코로나 위기의 초반이었던 지난 2월, 코로나19 집단감염으로 인해 경북 청도 대남병원에선 7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첫 사망자는 가족 없이 장기 치료를 받아온 무연고자였고, 두 번째 사망자 또한 장기 입원 환자였다. 그는 다른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곧 사망했다. 그것이 그의 입원 이후 15년만의 외출이라 알려졌다.
15년은 어느 정도의 시간인 걸까? 지금 내가 가늠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집에 머물라’는 사회적 거리 두기 2.5단계의 두 달이 90번 반복되는 시간이라는 거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공포스러운데, 현실은 그보다 더 가혹했을 것이다. 최대한 집에 머무르라는 권고를 따른 게 아니라, 시설이라는 공간에 그냥 갇혀있었으니까.
가장 모순적인 건, 코로나 사태 이전이었다면 그의 죽음이 알려지지도 않았을 거라는 점이다. 시설에 머무는 사람인 정신장애인, 노숙인, 장애인, 비혼모, 탈가정 청소년, 난민, HIV 감염인 등은 이미 ‘정상사회’에서 탈락한 사람들이기에 그들의 ‘부재’(不在)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어서 크게 신경 쓰지 않으니까.
그런 점에서 코로나 위기는 그 부재에 대해 의문을 던졌다고도 할 수 있다. 자가격리, 사회적 거리두기가 일상이 된 생활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 이전엔 상상할 수 없었던, 아니 상상할 필요도 없었던 ‘사회에서 격리된 삶’에 대해 상상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상상은 제대로 된 사회란 어떤 것인지에 대한 질문과도 연결될 수 밖에 없다.
‘탈시설’ 운동이 여성/소수자인 나와 만나는 지점
흔히 장애인의 탈시설 운동은 “시설 수용 중심의 장애인 정책에 반대하며, 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정책의 방향을 수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시설에 수용된 장애인들의 ‘독립’ 운동이라고만 인식하고, 나와 상관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대부분 비장애인)이 많다. 장애인 이슈라고 여기는 거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건, “삶에 대한 포기가 존재하고 생명에 대한 관리를 누군가에게 의탁해야 하는 사회”(시설사회)가 이미 내 삶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었다.
내가 여성으로서 마주하는 한국 사회의 현실, ‘낙태죄’를 존치시키고 여성의 재생산권을 좌지우지하려는 국가의 개입이 이미 시설 속 존재들에겐 ‘안전’과 ‘보호’라는 명목 아래 아무렇지 않게 행해져 왔다는 사실. 누군가에겐 아이를 낳아야만 한다고 하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절대 낳아서는 안 된다고 하며 재생산권을 통제한 것.
또한 내가 ‘정상가족’을 탈주한 존재로서 겪는 차별과 편견의 기반인 ‘정상가족 이데올로기’가 시설의 존재들에게도 작동되며 그들의 위치를 더 취약하게 만들었다는 것.
시설의 ‘보호’ 아래 들어가기 위해서 어떤 정체성을 강요 받고 ‘연기’해야 하는 상황은, 이 사회에 무리 없이 ‘편입’되기 위해서 어떤 정체성은 지우거나 숨겨야 했던 나의 상황을 떠올리게 했다.
내가 이 ‘시설사회’의 일원이라는 사실이 확연해지는 순간이었다.
배제와 분리의 장치 ‘시설’이 사라지는 사회
책 <시설사회>는 한발 더 나아가 독자들이 더 많은 질문과 마주하게 하고, 코로나19라는 글로벌 재앙을 맞이한 우리가 꿈꾸고 목표해야 할 사회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한다. 과감하고 급진적인 방식으로 말이다.
탈시설 운동을 하면서 “장애인시설 내 공간/시간의 배치, 관계의 방식 등 시설의 질서와 규범을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고 언급한 장애여성공감은 “프라이버시가 어떻게 침해되는지, 호칭을 통해서(시설 거주인이 시설 종사자를 ‘엄마, 아빠’라 부르는 것) 어떤 권력관계가 드러나거나 은폐되는지, 정상성과 이성애중심성, 능력주의가 어떻게 추구되면서 포기되는지 등”의 문제들을 파악했다.
시설 문제의 해결방안을 찾기 위해 장애여성공감은 ‘경계’를 넘어서는 방법을 택한다. 이주민/난민 보호소, 정신장애인 요양병원, 노숙인 쉼터, 탈가정청소년 보호소, 한부모가정 쉼터 등 다양한 시설의 이야기를 함께 다루기로 한 거다.
그러면서 시설에 수용된 사람들이 겪는 문제, 이들을 위한 “주거 정책이 없는” 상황에서 “가족을 구성할 권리를 부정”당하고 “수행하는 노동이 은폐”되며 “가치를 인정받지 못할뿐더러 보상받지도 못하는” 현실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런 시설화의 폭력을 멈추기 위해 ‘시설 폐쇄’를 목표로 하게 된다.
시설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시설을 폐쇄해야 한다는 주장은 다소 급진적이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시설은 단순히 물리적인 장소로서의 분리나 유예된 시간, 폐쇄된 삶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인간의 상이 무엇인지를 호명하는 메커니즘”이며 “시설화는 시설 내부에서 작동하는 규율 체계일 뿐만 아니라, 사회가 상상하는 이상적인 인간됨의 조건을 구성하는 과정”이라는 설명을 접하면, ‘시설’의 의미가 조금 더 명료해지면서 시설 폐쇄의 목표도 더 뚜렷해진다.
결국 시설이라는 공간은 ‘정상사회’, ‘정상가족’, ‘정상성’을 견고하게 유지하기 위해 역할하고 있으며, 배제와 분리의 논리에 명분을 주는 거대한 장치이므로 사라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이냐에 대한 질문
탈시설이나 시설 폐쇄를 주장하면 ‘그럼 시설에 있던 장애인이나 감염인 등은 어디로 가야 한다는 거냐?’ 등의 질문을 던지는 사람도 있을거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집이나 가족 품으로 돌아가는 것인가?
모두가 집이나 가족한테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은 둘째치고, 책에서도 지적하다시피 집이나 가족도 결코 안전한 공간은 아니다. 장애여성들이 집에서 노동력을 착취당하거나 학대 당하는 일은 드문 일이 아니고, 가정폭력도 일어난다. 그런 가정폭력을 피해 집을 탈출한 여성 혹은 청소년에겐 집보다 쉼터나 보호소가 더 안전한 공간일 수 있다.
하지만 탈가정 청소년 보호소, 한부모가정 보호소가 가진 한계는 명백하다. 당사자들은 ‘보호’라는 이름의 ‘관리’ 속에서 지속적으로 ‘보호받아야 할 존재’ 혹은 ‘가난한, 도움이 필요한 존재’임을 ‘증명’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때로는 억지로 그 과정에 자신을 끼워 맞추기 위해 무언갈 포기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제대로 된 자립을 준비할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하는 경우도 있다.
시설이라는 공간은 어떤 소수자를 ‘보호’하고 ‘지원’하려고만 할 뿐 제대로 된 권리인 자기결정권, 주거권, 가족구성권, 재생산권 등을 쥐어주지 않는다.
탈시설 논의는 이러한 개인의 권리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시설이 없으면 장애인, 노숙인, 감염인, 비혼모 등의 소수자가 어디에 있어야 하느냐’는 질문 대신 ‘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느냐, 우리는 어떤 사회에 살 것이냐’는 질문으로 바뀌어야 하는 거다.
“탈시설 운동의 의미는 시설화를 유지하는 지배권력이 무엇인지 분석하고 이에 대항하는 것”이라는 말의 의미를 찬찬히 들여다 보고 싶은 사람, 아니 코로나 이후 상호돌봄과 연대, 연결된 삶에 대해 고민이 생긴 모든 사람에게 책 <시설사회>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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