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육 서비스까지 파고든 ‘학벌주의’에 기댄 나의 노동

<일-돌봄-연대에 관한 청년여성들의 질문> 플랫폼 보육노동을 하며

수빈 | 기사입력 2020/11/01 [09:39]

보육 서비스까지 파고든 ‘학벌주의’에 기댄 나의 노동

<일-돌봄-연대에 관한 청년여성들의 질문> 플랫폼 보육노동을 하며

수빈 | 입력 : 2020/11/01 [09:39]

*기자단은 7월, 한국여성노동자회에서 진행하는 “페미니스트, 노동을 말하다” 기획을 통해 만났다. 각자의 위치와 상황 속에서 ‘일’하며 보고 들었던 경험을 토대로, 우리 사회에서 ‘노동’을 이야기할 때 배제되는 사람들이 누구이며 삭제되는 관점이 무엇인지 묻고 논의했다. 그리고 우리의 문제의식을 함께 풀어낼 수 있는 여성들을 만나, 그들의 삶을 듣고 기록했다. “일-돌봄-연대에 관한 청년여성들의 질문”은 그렇게 탄생한 여덟 편의 기사이다. [한국여성노동자회 “페미니스트, 노동을 말하다” 기자단]

 

일자리가 사라지는 시대에 만난 보육매칭 플랫폼

 

코로나 19가 대한민국을 뒤흔든 올해 초,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일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웠다. 구인공고가 365일 올라와 있던 빵집도 피시방도 공고문을 슬그머니 내렸다. 시간은 많고 돈은 없던 나는 아르바이트를 구하기 위해 전전했다.

 

그러던 중 친구 한 명이 자기가 하고 있는 시간제 보육노동 아르바이트를 추천해 주었다. 친구가 알려준 사이트 이름을 검색해 보니 “아이들과 두 시간 놀아주고 돈 벌기 좋은 아르바이트”, “비는 시간에 잠깐 일하고 알바비 벌자” 등의 홍보문구가 가득했다. 유동적으로 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주저 없이 회원가입을 하고 오리엔테이션을 신청했다.

 

그렇게 어설픈 보육노동자가 된 지도 벌써 반년이 지났다. 그동안 수많은 어린이를 만나고, 새로운 관계를 맺고, 조금 더 철이 들었다. 편의점과 빵집에 비해 높은 수입을 얻으며 경제적 여유도 생겼다. 하지만 좋은 기억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중개 플랫폼은 나를 ‘고학벌 여대생 선생님’의 이미지로 소개했고, 그 이미지를 극대화해 이윤을 창출했다. 중개 플랫폼을 통해 일을 하는 이른바 ‘특수고용노동자’로 살아가는 것도 이런저런 불편함이 있었다. 나는 나의 시간을 사는 보육자들에게는 고급 인력이었지만 동시에 불안정 노동의 줄타기를 하는 비정규직이었고 특수고용노동자였다.

 

내적 갈등으로 인해 괴롭기도 했다. 보육자는 나의 두 시간을 사기 위해 시간당 2~3만 원의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당연하게도, 내가 만나게 되는 보육자와 어린이는 중산층 이상이었다. 깨끗하고 친절한 가정, 흠잡을 데 없이 예의바른 어린이들을 만나는 것은 신선한 충격을 줬다. 나는 나쁜 사회구조의 부역자가 된 기분이었다. 어떤 곳에서는 학벌주의를 타파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던 내가 학벌주의를 이용하는 기업에 돈을 벌어주고 있었다. 

 

▲ 시간제 보육노동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며 어린이들을 만난 지 반년이 지난 지금, 나의 노동에 대해 돌아보기로 했다. (사진은 본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습니다.)  ©나랑


하지만 내가 처한 현실과 나의 감정은 너무나 복합적이어서, 단순히 이 일이 좋다, 싫다는 감정으로만 표현할 수가 없었다. 돈을 주지 않는다고 해도 계속해서 만나고 싶은 어린이를 알게 해주고 코로나 19로 인해 많은 사람이 위태위태한 상황에 나를 먹여 살려주는 플랫폼이 때로는 고마웠다. 하지만 나는 이 보육매칭 플랫폼이 나를 어떤 이미지로 홍보하는지, 그 홍보가 어떤 차별적 구조를 재생산하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한편으로 불안정 노동을 하면서 하루하루 내일의 수입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조금 힘들기도 했다. 나는 여러가지 감정의 교차점에서 내가 서 있는 구조의 매커니즘을 직시하고 문제점을 정리해보고 싶었다. ‘나쁜’ 구조를 벗어나겠다고 선언할 수는 없을지라도, 그 구조의 존재를 드러내고 싶었다. 짧게는 양심의 외침이었고 길게는 노동자로서의 투쟁이었다.

 

①어린이를 돌보는 데에는 학력만 있으면 된다?

 

내게는 열 살 차이 나는 동생이 있다. 부모가 맞벌이였기 때문에 동생의 어린 시절은 사실상 내가 전담했다. 동생의 기저귀를 갈아주고, 씻겨 주고, 분유를 먹이고, 이유식을 먹이고. 우여곡절의 시간을 보내며 어린이는 결코 혼자서 자랄 수 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아동기로 들어선 후에는 나의 주된 임무가 동생과 놀아 주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런 경험 때문에 어린이를 돌보는 데에는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다. 관련 지식도 전무하고 흔히 말하는 ‘아이들을 좋아하는’ 유형의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보육노동을 처음 가는 날 걱정보단 설렘이 앞선 데에는 그런 배경이 작용했을 것이다.

 

내가 처음으로 만난 어린이는 9세 남아였다. 하고 싶은 것을 이야기하고 자기 감정을 잘 드러내는 아이는 내게 자신감을 안겨주었다. ‘이거 별 거 아니네. 할 만한데?’란 생각을 하며 여러 공고에 지원했다.

 

고민이 생긴 것은 아마도 6세 어린이를 만난 직후였던 것 같다. 이론적 기반 없이 6세 어린이와 시간을 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심지어 보육자가 내게 어린이를 전적으로 맡긴 채로 외출을 해서, 내가 밥도 챙겨주고 용변 후처리도 해줘야 했다.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동생이라도 있었기에 망정이지, 경험도 지식도 없는 사람이면 도대체 어떻게 했을까?’

 

어린이와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아직 여물지 않은 어린이의 세상을 오롯이 받들어야 하는 일이다. 물론 어린이에게 친절한 것, 화를 제어할 수 있는 것, 재미있는 놀이를 많이 아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이런 특성을 가졌다고 해도 어린이에 대한 이해가 없는 상태라면 어린이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어린이는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공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 공이 위험한 곳으로 튀지 않게 하는 것이 보육자의 책임이다.

 

내가 일거리를 구하는 플랫폼에서는 보육노동자들을 간단한 절차로 뽑았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자면 거기에서 일을 구하기 위해서는 대학 학력만 있으면 되었다. 이들을 대상으로 아주 간단한 면접과 아주 간소한 교육을 하고 나면 그 사람은 ‘선생님’ 자격을 받았다. 그리고 아무 무기도 없이 전쟁터에 나가는 사람처럼, 어린이를 만나게 됐다.

 

그럼에도 보육자에게 그 ‘선생님’들은 마치 전문교사처럼 홍보되었다. 교육을 받을 때에는 어린이가 갑자기 바지에 설사를 할 수도 있다거나 어린이가 자기의 성기를 드러내는 경우가 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그런데 실전에서는 그런 일이 있었다. 어린이가 자라는 과정을 가장 옆에서 지켜본 나조차도 그런 상황에서 극도로 당황했는데, 어떠한 경험도 없이 대학교 학력만으로 이 일을 할 자격을 받은 사람들이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나는 그게 너무나 궁금했다.

 

▲ 보육 매칭 플랫폼 J의 구인 내용(왼쪽)과 아동 보호자에게 홍보되는 내용(오른쪽)

 

자격증을 따거나 단순히 지식을 습득한다고 어린이를 잘 돌볼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린이와 만나고, 시간을 보내고, 고민하고 경험하며 얻는 내공이 있다. 그리고 어린이라고 해서 모두가 똑같은 것은 아니다. 어린이마다 성향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다. 내공이 없이는 어린이와 시간을 보내기 어렵다. 이런 상황인 가운데 그런 내공이 부재한 사람들의 학력을 내세워 어린이를 잘 아는 사람인 것처럼 꾸미는 행위가 반드시 사고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고 생각한다. 대학 학력이 있다고 맛있는 음식을 만들 수는 없는 것처럼, 대학 학력이 있다고 버스를 운전할 수는 없는 것처럼, 대학 학력이 있다고 어린이를 돌볼 수는 없다. 학력을 전문성으로 탈바꿈하는 것은 학생의 표지일 뿐인 학벌에 능력과 신화를 부여하는 일이다.

 

②고임금 불안정 플랫폼노동자

 

시간 당 1만5천 원 정도의 수업료를 받으며 일을 했다. 일부의 경우를 제외하고 어린이와 시간을 보내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공부를 조금 봐주고, 색종이 접기를 함께 해주고, 어린이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금세 수업이 끝나 있었다. 편의점에서 노동을 했던 경험을 되살려 보았다. 술에 취해 난동을 벌이는 취객을 상대하거나 ‘진상’ 손님들과 말싸움을 했던 지난 날에 비하면 내가 하는 보육노동은 너무나 쉬운 노동이었다. 심지어 시급은 두 배 정도 되었으니 이토록 좋은 노동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어린이가 갑작스레 유치원에 등원하게 되거나 기존의 목표(예: 한글 떼기)를 달성하게 되면 나는 더이상 그 집에 갈 수 없었다. 내가 하는 노동은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실업급여도 해고수당도 없었다. 나는 쉽게 버려지는 노동자였다.

 

한국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는 저임금을 받고 정규직 노동자는 고임금을 받는 것이 일반적이다. 안정성과 임금 수준은 비례한다는 의미가. 하지만 어떤 노동에는 고임금과 불안정성이 병존한다. 내 노동이 그러했다. 아이를 유치원에 등원시키겠다는 부모에게 나는 어떠한 항변도 할 수 없었다. 공백이 생긴 수업시간을 메꾸기 위해 공고를 다시 들여다보아야 할 뿐이었다. 듣자하니 어떤 직장에서는 원하던 바를 이루면 성과급이 나온다고 했다. 그런데 몇 달을 노력한 결과로 아이가 한글을 읽고 쓰게 되었더니 내게는 성과급이 아니라 해고 통고가 나왔다.

 

플랫폼은 보육자와 선생님을 연결해주고 선생님을 대변해준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사용자인 보육자가 심경의 변화로 수업 예정일 하루 전에 수업을 취소해도 아무 페널티가 없다. 그러나 선생님이 불가피한 사정으로 수업 예정일 하루 전에 수업을 취소하면 플랫폼은 선생님에게 경고를 한다. 수업 전 취소가 반복되면 플랫폼을 이용할 수 없다는 경고다. 지원 후 취소가 불가능하므로 수업에 지원하면 해당 시간을 비워놓아야 하는 선생님의 위치와 수업 예정일 하루 전까지 선생님을 선택하지 않다가 돌연 수업을 취소해버리는 보육자의 위치는 너무도 다르다. 플랫폼은 선생님을 보호하고 존중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말에 불과할 뿐이다.

 

플랫폼 노동은 대개 그러하다. 지속되지 않는 노동, 수요가 없으면 탈락되는 노동. 물론 나의 보육노동은 거기에 ‘고학벌’이라는 프리미엄이 붙었다. 불안정성이라는 마이너스요소에도 불구하고 고학벌이라는 플러스 요소가 붙어 높은 임금을 받는다. 이런 점에서 나의 노동이 다른 플랫폼 노동과 모든 면에서 같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높은 임금을 받는다고 해도 불안정한 노동자로서의 지위에는 언제나 회의감이 든다. 노동자로서 인정받지 못한 결과 고용불안정을 해소하지 못한 플랫폼 노동자들 다수가 나와 비슷한 회의감 속에서 살아가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③‘학벌 프리미엄’이 붙은 보육 서비스?!

 

내가 사용하고 있는 플랫폼은 다른 보육노동 플랫폼에 비해 가격이 비싸다. ‘고학벌 대학생’들이 제공하는 보육노동이기 때문이다. 이 플랫폼은 선생님의 학벌과 나이를 내세워 보육노동의 가격을 높였고 이 돈을 지불할 수 있는 보육자들은 아이에게 더 좋은 것을 제공하고자 하는 심리로 이 플랫폼을 선택한다. 나는 이것이 보육노동에 ‘프리미엄’을 붙이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보육노동의 공급자에 일정한 조건을 달아 가격을 올렸기 때문이다. ‘프리미엄화’된 보육은 다른 플랫폼에 비해 높은 가격이 책정되어 있는 것만으로도 상대적으로 높은 품질을 보장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서울대학교에 재학 중인 지인은 나와 같은 플랫폼을 이용하면서 나보다 시급을 5천원 더 받고 있다. 선생님의 높은 학벌은 이 플랫폼에서 곧 능력이 된다. ‘더 비싼 선생님은 더 비싼 이유가 있다’는 기대감은 보육자로 하여금 학벌주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한다. 선생님의 학벌은 보육노동의 층위를 나누는 기준이 된다. 고학벌 선생님이 받는 높은 시급에 플랫폼의 수수료까지 더해지면 보육자들이 지불하는 수업료는 2시간 기준 최대 5만 원에 달한다. 비싼 가격은 이윤의 극대화를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보육노동의 ‘프리미엄화’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국가지원 아이돌보미나 타 플랫폼에 비해 훨씬 높이 책정된 가격은 보육자로 하여금 ‘우리 아이는 남들과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부유한 보육자는 아이에게 ‘비싼’ 보육을 제공함으로써 자신과 아이의 계급성을 확고하게 인지할 것이다.

 

▲ 미취학 어린이의 보육 서비스에도 학벌 프리미엄을 붙이는 사회다. (사진은 본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습니다.)   ©나랑

 

돈이 많은 집만 보육노동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내가 제공하는 보육노동은 돈이 많은 집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서비스다. 프리미엄 보육노동 서비스가 생기는 것은 가장 어린 나이의, 가장 친숙한 공간에서의 시간도 부모의 경제력에 따라 값어치가 달라진다는 함의를 지닌다. 계급 대물림의 시기가 점점 더 일러지고 있다. 사교육을 줄이고 학습의 격차를 줄여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이들이 있는 반면, 미취학 어린이의 보육노동에 프리미엄을 붙이는 이들이 함께 존재한다.

 

④모성 신화에 기댄 ‘여대생 선생님’ 이미지

 

나와 같은 플랫폼을 이용하는 남성 지인은 수업이 잘 매칭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초등학생 교육봉사를 정기적으로 다니고 있었으며 나보다 사회적 평가가 높은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학벌이 선택의 기준이라면, 그가 선택받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그 이유를 경험적으로 알아챌 수 있었다. 어린이를 만나러 간 곳에서 나는 종종 여성, 특히 어린 남동생을 둔 누나의 이미지 속에 갇히곤 했다. 간혹 여자 어린이들의 경우 성폭력에 관한 문제로 여자 선생님을 선택한다는 보육자들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보육자는 나를 ‘친절한-고학벌-여대생 선생님’ 고정관념에 투영하고 있었다. 아이와 격렬하게 공놀이를 하는 나의 모습을 의외인 듯 바라보거나 “어린 남동생이 있으면 아이들을 잘 돌보겠어요.”라고 말하는 보육자들도 있었다.

 

모든 어린이는 하나로 묶일 수 없다. 또한 어린이를 사랑한다는 말에는 대개 어린이에 대한 보호주의와 타자화가 깔려 있다. 그래서 나는 “모든 어린이를 사랑한다”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나는 그저 내가 만나는 한 명 한 명의 어린이들을 존중하고 그들과의 시간을 즐길 뿐이다. 그런데 사회는 내게 ‘어린이를 사랑할 것’을 강요하거나 강요하기 이전에 이미 사랑하고 있을 것이라고 단언하는 것 같다. 나는 경험에 기반한 최대한의 노력으로 어린이들을 대하고 있는 것인데, ‘여자라서’ 아이들과 잘 놀아준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여자라서 물류센터 아르바이트를 잘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었던 것과는 상반된다. 나는 어쩌면 여성에게 기대되는 순결하고 깨끗한 이미지를 이용해 일을 쉽게 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음에도 말이다.

 

처음 본 사이인 내게 자신의 6세 아이를 전적으로 맡기고 외출한 보육자도 나를 그런 이미지로 보고 있었을 것 같다. 아동보육 관련 학과에 재학 중이거나 관련 전문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게 아이의 시간을 온전히 맡길 수 있었던 것은 여성이, 특히 남동생을 둔 누나가 ‘엄마 같은 마음으로’, ‘엄마가 해주는 것들을’ 해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20대 남자였어도 아이를 온전히 맡길 수 있었을까? 물론 요즘의 20대 남성들이 아이를 맡기기에 불안한 상대인 것은 맞다. 하지만 처음 보는 내게 아이를 전적으로 맡길 수 있었던 것은 여성이기 때문에 안전할 것이라는 기대만이 작용한 결과는 아닐 것이다. 20대 여자 대학생에게 기대되는 어떠한 모성을 전제로 하는 선택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육 불평등을 생각하며

 

앞서 말한 것처럼, 나는 동생과 열 살 차이가 난다. 동생은 아직 초등학생인데, 플랫폼을 통해 동생과 비슷한 또래의 어린이를 만날 때면 동생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고는 한다. 코로나 19로 인해 초등학교가 수업 방식을 비대면으로 전환하면서 동생은 하루 24시간을 집 안에서 보내고 있다. 할 게 없으니 핸드폰을 가지고 놀다가, TV를 보다가, 그렇게 하루를 보낸다. 다른 어린이들의 숙제를 봐주고 공부를 도와주면서 동생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때로는 모순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보육노동은 어린이가 있는 모든 가정에 필요하다. 그러나 모든 가정이 보육노동을 제공받지는 못한다.

 

2020년. 내 동생에게는 빨리 끝났으면 하는 악몽 같은 시간이었지만, 어떤 어린이에게는 집에서도 다양한 활동을 하고 다양한 것들을 배울 수 있는 즐거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얼마 전 인천에 거주하는 초등학생 형제가 화재로 참변을 당했다는 뉴스를 봤다. 보호자가 부재한 상황이었다. 내가 플랫폼을 통해 만나는 어린이들과 이 초등학생 형제는 무엇이 다르기에 이리도 다른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 나는 오늘도 이런 모순을 안고 어린이들을 만난다.

 

*한국여성노동자회는 ‘페미니즘으로 노동을, 노동으로 페미니즘을’ 사유하며 성평등 노동의 가치를 확산시키는 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2018년부터 회원모임 <페미워커클럽>을 통해 여성노동자들과 함께 우리 삶에 박혀있는 성차별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성평등한 일터를 만들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후원회원 가입 및 소모임 참여는 kwwa@daum.net 메일로 문의해주세요.)

이 기사 좋아요
  • 도배방지 이미지

  • ㅇㅇ 2022/03/31 [15:44] 수정 | 삭제
  • 페미들은 왜 자꾸 잘 굴러가고 있는 세상에 이상한 의미부여를 하려 들까.. 진짜 보육서비스 이용하는 부모 입장에서 이런 인간들이 선생님으로 올까봐 소름돋네
  • 아마씨 2020/11/26 [15:04] 수정 | 삭제
  • 많이 공감하며 읽었어요. 다각적인 시선과 복합적인 갈등이 느껴졌어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 독자 2020/11/02 [11:02] 수정 | 삭제
  • 보육 보조에 해당하는 노동인 것 같군요. 학벌사회의 단면에 분노하더라도 자신에게 이득이 있을 때 학벌 프리미엄에 쉽게 길들여질만도 한데 양심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것이 인상적이어서 계속 읽게되었습니다. 보육자들도 생각을 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 ㅇㅇ 2020/11/01 [16:14] 수정 | 삭제
  • 아이들 돌보는 거 쉬운 일 아닌데... 대학생들 손을 빌리면서 플랫폼으로 돌아가는 구조가 참 여러 생각을 하게 되고 씁쓸하네요.
  • 디럭스 2020/11/01 [12:46] 수정 | 삭제
  • 아 정말 공감되는 글이네요
광고
노동 많이 본 기사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