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 책임 있는 노동자’가 표준인 사회를 만들자

코로나 시대 돌봄노동 가중된 여성들의 노동위기

박주연 | 기사입력 2020/11/05 [13:29]

‘돌봄 책임 있는 노동자’가 표준인 사회를 만들자

코로나 시대 돌봄노동 가중된 여성들의 노동위기

박주연 | 입력 : 2020/11/05 [13:29]

‘돌밥돌밥’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가사노동을 해 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밖에 없는, ‘돌아서면 밥하고 돌아서면 밥하고’라는 뜻이다. 이 돌밥돌밥은 가사노동을 하는 사람에겐 늘 큰 숙제 같은 일이지만 코로나 이후엔 그 비중이 더 늘어났다. 학교에 가지 않는 아이들, 외부 활동을 할 수 없는 노인들, 재택근무를 하게 된 직장인 등 모두가 집에 머물게 되었기 때문이다.

 

10월 28일 한국여성민우회가 주최한 토론회 <“돌봄 분담이요? 없어요, 그런 거”: 89명의 여성 인터뷰와 1,253건의 언론보도를 통해 본 코로나19와 돌봄위기>에서 류형림 한국여성민우회 성평등복지팀 활동가의 발표자료 중  ©한국여성민우회

 

“언제 끝날지 모르는 감염위기 속에서 가족 모두가 집에 있으니 ‘건강을 생각한 식단’을 짜고, 장을 보고, 밥을 하고, 치우고 돌아서면 다시 삼시세끼 밥을 차리는 일이 너무 고되다.”

 

한국여성민우회가 코로나19 확산으로 ‘육아’와 ‘일’을 병행하는데 어려움을 겪은 여성 89명을 인터뷰한 결과를 발표했다. 대다수가 늘어난 가사노동과 돌봄노동 부담을 호소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10월 28일에 열린 토론회 <“돌봄 분담이요? 없어요, 그런 거”>에서 공유된 여성들의 사례는 코로나 이후 ‘돌봄 중심 사회’로 가는 길의 초석을 다지는 자리였다.

 

어린이집, 학교…공공돌봄의 공백을 채운 건 여성 몫

 

“여성의 돌봄 부담률이 코로나 이전에 40%였다면 지금은 70%가 되었다. 이에 반해 남성의 돌봄 부담률은 평균 15%로 코로나 확산 전후 변화가 없어, 남성의 돌봄 참여는 위기 상황에도 크게 변화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류형림 한국여성민우회 활동가는 돌봄 노동이 여성에게 집중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전업주부와 유급노동을 하는 여성 양육자 모두 마찬가지였다.

 

‘전업주부’라고 하면 이미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을 전담하고 있어 큰 변화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이 여성들 또한 대학원에 다니거나 자원활동을 하는 등 사회활동을 하고 있고 비정기적 임금노동을 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코로나 이후엔 그런 모든 활동이 중단된 체 “아이돌봄을 우선”하게 되었다.

 

“소득활동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루 24시간 아이돌봄을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에도, 여성이 아이를 돌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주변의 시선 때문에 어린이집을 보낼 수 있어도 보내지 못하고, 주변에 힘듦을 토로하지도 못하는 상황”이거나 “어린이집에 보내면서 심한 죄책감에 시달리는 경우”도 있다. 또한 돌봄노동을 전담해야 하다 보니 “아파선 안 된다는 강박에 시달리기도” 했다.

 

맞벌이 부부의 경우에도, 학교와 어린이집 등 공공돌봄의 공백을 채우는 건 오롯이 여성의 몫이 되어버렸다. “둘 다 일하는 상황임에도 여성인 나만 전전긍긍”해야 했다. “아이를 위해 휴가를 내야 하면 90% 여성이 내야 하고, 재택근무 중에도 남편은 업무 공간과 시간을 지키지만 여성은 아이돌봄을 병행해야 해서 ‘일과 엄마 경계가 모호해지는’ 상황”에 놓였다.

 

▲ 10월 28일 한국여성민우회가 주최한 토론회 “돌봄 분담이요? 없어요, 그런 거”:> 현장  ©한국여성민우회

 

또한 여성들은 ‘보이지 않는 노동’에 대한 고충도 토로했다. “코로나19 확산 상황에 따라 시시각각 바뀌는 어린이집, 학교 스케줄에 따라서 늘어가는 ‘보이지 않는 노동’을 감당해야 하는 것도 여성의 몫”이었다. “남편은 셋팅된 상태에서 지령을 내려주길 바라는 상황, 스케줄을 관리해야 하는 것 자체가 부담”임에도 그 일을 분담하는 이는 없었다.

 

류형림 활동가는 여성들의 이런 상황이 코로나 이후에 ‘특별히’ 생긴 게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노동과 돌봄의 이중부담을 지고 있는 여성들은 아이를 돌봐줄 기관, 사람을 아등바등 찾아 일상을 유지해 왔다”며 “돌봄 공백은 코로나 이전에도 이미 존재했다”고 말했다.

 

돌봄노동 가중으로 여성의 노동위기 가속화

 

코로나로 인한 돌봄노동 가중은 곧 여성들의 노동위기로 이어졌다. 아이돌봄의 부담이 늘어난 상황 속에서 ‘일을 계속 할 수 있을지, 해도 되는지’에 대한 불안을 겪었다.

 

한편으로 “돌봄이나 방역 관련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여성들의 업무는 폭증”했다. 하지만 “사명감 때문에 일들 그만두지도 못하고” 집 안에서의 돌봄노동과 집 밖에서의 돌봄노동을 모두 전담하고 있는 현실이다.

 

비정규직이나 프리랜서로 임금노동을 하던 여성들의 일자리가 사라지거나 해고당하는 등 “여성들의 노동조건도 악화”되었다. 성차별적 사회구조로 인해 정규직이 아닌 불안정한 직장으로 내몰렸던 여성들이 코로나 위기 속에서 가장 먼저 위기를 맞이하고 있는 데다, 공공돌봄도 떠맡게 된 것이다.

 

“우울감, 압박감, 고립감, 불안감, 공허함 등의 정서적 어려움”도 많은 여성들이 토로했다. “전업주부였던 여성들은 사회적 교류 없이 집에서 아이들만 돌봐야하는 상황 때문에 극심한 우울감을, 프리랜서로 일하거나 학업을 하던 중에 돌봄으로 인해 중단해야 했던 여성들 또한 고립감을 느끼고 도태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고, 일과 아이 돌봄을 동시에 부담하고 있는 여성들도 중압감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코로나 상황이 지속되면서 이런 정신건강의 위험 신호를 돌봐 줄 겨를도 없이 반복되는 노동을 수행하고 있는 상황이다.

 

가족돌봄휴가, 긴급돌봄 제도는 얼마나 실효성 있었나?

 

류형림 활동가는 정부의 대응 정책이 과연 얼마나 실효성 있었는지에 대한 평가도 덧붙였다.

 

먼저 “정부가 코로나19로 인한 돌봄 공백 속에서 대안으로 제시한 정책이 가족돌봄 휴가를 지원하는 것이었지만, 가족돌봄 휴가를 불이익 없이 필요한 만큼 제대로 쓸 수 있었던 인터뷰 참여자는 거의 없었다”고 짚었다.

 

“돌봄위기에서 고군분투하는 여성들에게 가족돌봄 휴가는 당장에 도움이 될 수는 있겠지만, (여성노동자가 가족돌봄 휴가를 쓰는 건) 결국 돌봄에 대한 성별분업을 강화하고 돌봄 책임자로 낙인 찍히는 일이며, 그로인한 직장 내 배제와 불이익도 여성 몫으로 남겨지게 될 가능성이 크기 떄문”이다.

 

▲ 한국여성민우회 “코로나19이후의 세계 #독박가사/독박돌봄편” 카드뉴스 중   ©한국여성민우회

 

더불어 정부에서 운영한 ‘긴급돌봄제도’(어린이집과 유치원, 초등학교 휴업 기간 동안 아동을 맡아주는 제도) 또한 돌봄의 공백을 채우기 어려웠다고 진단했다. “언론에서 계속 (집단감염이나 급식 등의) 위험성을 강조하는 분위기였고 기관에서도 반기지 않는 상황”이었기에, “전업주부도 워킹맘도 긴급돌봄을 이용하는데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당사자들의 이런 목소리는, 정부의 정책이 조금 더 실질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선 장기적인 관점을 가지고 세심한 설계를 해야 한다는 주문이기도 하다.

 

장시간 노동은 안돼…돌봄 중심 사회로 전환해야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할까? 류형림 활동가는 여성들이 ‘장시간 노동’의 문제점을 지적했다고 전하며 “일상이 가능하고, 상호 돌보며, 삶의 회복이 가능한 표준노동시간의 재설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장시간 노동은 부모의 돌봄 책임과 권리를 방해하고, 퇴근 후 노동력 회복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채울 수 없게 한다. 여성들의 일과 돌봄 사이의 갈등을 외면한 결과가 ‘저출산’이기도 하다. 여성의 가사/돌봄노동을 기반으로 유지되고 있는 남성중심의 표준노동시간을 해체하여 누구나 노동과 돌봄을 병행할 수 있는 노동시간 단축 방향으로 개선되어야 한다.”

 

정형옥 경기도여성가족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또한 “오랫동안 ‘돌봄 책임이 없는 근로자’를 전제로 한 장시간 노동이 한국 사회에서 ‘규범적인 노동시간’으로 작동하면서 여성고용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왔다”고 지적했다.

 

정혁옥 선임연구위원은 “성별 분업에 근거해 ‘돌봄 책임이 있는 노동자’를 근로시간 단축이 필요한 예외적인 존재로 취급할 것이 아니라, 표준노동시간 자체를 ‘돌봄 책임이 있는 노동자’를 전제로 설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아동인권 측면에서 공적 돌봄 체계가 유지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주장도 나왔다. 류형림 활동가는 “어린이집 등 돌봄시설이 중단되면서, 가족 내에서 그 공백을 감당하지 못하면 아동의 안전과 인권이 ‘방치’되고 있는 상황”이라며 “돌봄 받을 권리와 돌봄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조건을 마련한 돌봄의 가치를 인정한 ‘돌봄 중심 사회’로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양난주 대구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도 “돌봄위기는 여성뿐만 아니라 아동 또한 위험에 빠뜨린다”고 말하며 “돌봄의 역할이 가족에게 돌아가면 안전할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 지적했다.

 

또 복지국가론으로 유명한 에스핑 앤더슨이 “현대복지국가들이 가정주부와 전업어머니를 활용하려 들면 들수록 복지국가들은 미시 수준(저출생, 낮은 가구 소득, 높은 빈곤 위험)과 거시 수준(인적자본의 낭비)에서 모두 복지를 후퇴시키는 결과를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한 말을 인용하면서, 양난주 교수는 “가족에 돌봄 책임을 전가할 것이 아니라, 선택이 아닌 필수적 제도로서 사회적 돌봄 서비스가 마련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돌봄은 ‘필수노동’,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은 돌봄이라는 ‘보이지 않는 가슴’에 기대고 있다고 주장했던 낸시 플브레의 책 <보이지 않는 가슴>(The invisible Heart)가 떠올랐다.”

 

정형옥 경기도여성가족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이렇게 말하며 “여전히 이 사회가 ‘돌봄위기’에 대해서는 ‘위기의식’을 크게 느끼고 있지 못한 것 같다”고 비판했다.

 

또한 코로나19라는 전염병으로 “돌봄은 위기의 시대에도 멈출 수 없는 ‘필수노동’임이 드러났는데도 왜 충분히 논의되지 않는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코로나 이후 취업자가 증가한 산업 중에서 여성이 다수인 일자리는 보건업 및 사회복지서비스업이다. 그 일자리가 주로 대면 일자리임에도 취업자가 증가하는 건, 코로나19 국면에서 ‘필수적인 노동’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일자리는 사실 언제나 필수적인 일자리였다. 하지만 그 가치는 왜 저평가되는 것인지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김수경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여성국장은 “코로나로 인해 전사회적 돌봄의 한계가 드러났지만, 이로 인해 교육과 돌봄, 학교와 지역공동체 내 돌봄의 공백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고 진단하며 “변화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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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ㅅㅂㅅㅂ 2020/11/27 [04:49] 수정 | 삭제
  • 비대면이 무엇보다 강조되는 시기에 ‘주변 또래 엄마’처럼 기존의 대면 관계가 현 시점에선 타개책이었다는 언급이 인상적이네요. 이 토론회에서 돌봄노동은 가사와 육아에 집중되어 있는데, 노인과 같은 대상 역시 비슷한 돌봄공백에 당면했는지 구체적인 사례도 유사한지 궁금하네요. 가족 내 장애가 있는 구성원이 있을 때의 어려움 등의 개별 사례는 기성언론에서 몇 차례 본 것 같은데, 노인의 경우만 유독 경로당 폐쇄처럼 제한적으로 다뤄져왔던 것 같아서요.
  • 독자 2020/11/06 [16:12] 수정 | 삭제
  • 돌봄은 필수노동이죠. 재평가가 시급합니다.
  • ㅇㅇ 2020/11/06 [13:58] 수정 | 삭제
  • 돌봄을 하는 사람을 기준으로 임금노동 시장을 개편하라는 요구가 정말 현실이 되어야 할 것 같아요. 그렇게 돤다면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질텐데...
  • ㅇㅅㅇ 2020/11/05 [18:38] 수정 | 삭제
  • “일상이 가능하고, 상호 돌보며, 삶의 회복이 가능한 표준노동시간의 재설계” 선뜻 당연해보이고 누구에게나 필요한 이 일이 왜이리 더딘지 모르겠네요. 돌봄의 수혜자들이 돌봄의 책임을 함께 질 수 있도록 편입되어야 할 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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