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든 백인 남성’이 장악한 음악계에 구색 맞추긴 싫다[페미니즘으로 다시 듣기] 피비 브리저스, 21세기 새로운 록스타지난 2월, 미국 버라이어티 쇼 프로그램 <세터데이 나잇 라이브>에서 음악가 피비 브리저스(Phoebe Bridgers)가 공연을 펼쳤다. 이 프로그램은 논란이 종종 있을 만큼 성역 없는 풍자로 유명하지만, 40년 넘게 이어오며 여전히 최고의 TV쇼 중 하나로 꼽히며 에미상 후보로 총 252번 올라 71번 수상했다고 한다. 이 프로에서는 뮤지컬 게스트라고 하여 매번 라이브 무대를 선보이는 음악가가 등장하는데, 피비 브리저스는 놀라운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모니터 스피커에 전기기타를 내려친 것이다. 물론 기타 제조사, TV 프로그램과 협의하여 가짜 스피커에 한 행동이지만, 이로 인해 미국 내에서는 작은 토론의 장이 만들어졌다.
가장 큰 쟁점은 기타 파괴가 지금까지 남성 음악가의 전유물이었다는 것이다. 1960년대 이후 무대에서 기타를 부순 로커(rocker)들이 꾸준히 존재했지만, TV를 통해 공개된 무대에서 기타를 부수는 여성 뮤지션을 보는 일은 매우 드물기에 많은 사람이 환호했다.
이 퍼포먼스가 아무 의미도 없이 뜬금 없이 펼쳐진 것도 아니었다. “I Know the End”라는 곡은 작년에 발매된 앨범 Punisher의 마지막에 수록된 곡인데, 피비 브리저스가 애플 뮤직에 남긴 코멘트에 따르면 ‘북부 캘리포니아 해안을 드라이브하는 것에 관한 자신의 구체적인 경험을 담아낸 곡’이다. “I Know the End”에는 캘리포니아에서 나고 자란 그가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것부터 ‘스페이스 엑스’(미국의 민간 우주 기업) 관련 광고를 본 경험까지가 담겨 있으며, 소리를 지르는 강렬한 엔딩이 이 곡은 물론 앨범에서 중요한 장치로 큰 여운을 준다.
피비 브리저스는 이렇게 메탈 느낌으로 노래를 하며 소리를 지르는 것이 자신의 위시 리스트(wish list)였다고 밝힌 바 있다. 미국 음악 매체 스테레오검(Stereogum)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거대한 아웃트로를 원했으며, “많은 사람들과 엉망진창 가사를 부르는 것은 굉장히 큰 승리의 기분을 느끼게 한다”고 말했다.
“어느 쪽이든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나는 새로운 곳을 찾을 것이다 울타리가 있는 유령의 집, 주위를 떠다니는 내 친구 유령들, 아니, 난 사라지는 게 두렵지 않아” -피비 브리저스, I Know the End 중에서
*Phoebe Bridgers - I Know the End https://youtube.com/watch?v=WJ9-xN6dCW4
두 번의 미투…“멀미가 나, 누가 창문 좀 내려줘”
피비 브리저스는 1994년생으로, 2017년에 첫 앨범을 발표하고 2020년에 두 번째 앨범을 발표했다. 최근 그래미 시상식에서 올해의 신인을 비롯해 네 개 부문에 후보로 이름을 올렸다. 아쉽게도 수상에는 실패했지만, 그가 미국 음악시장에서 입지전적인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첫 앨범 발매 당시에는 몇 매체만이 주목하고 인디음악 시장 내에서만 주목을 받았지만, 더 폭넓은 표현과 구체적이면서도 자전적인 가사로 두 번째 앨범 발표 이후 많은 호평을 얻고 있다.
첫 앨범에서 싱글로 발표했던 곡 “Motion Sickness”는 그가 잠깐 만났던 라이언 애덤스(Ryan Adams)에 관한 곡이다. 제목처럼 멀미가 나게 만든 당사자는 미국에서 미투(#MeToo) 운동이 일었을 때 성추행으로 고발을 당했던 인물이다. 라이언 애덤스의 전 부인이 성적 학대를 당했던 것을 세상에 알렸고, 이후 피비 브리저스를 비롯한 일곱 명의 싱어송라이터가 그를 고발했다. 유명 싱어송라이터인 그는 자신의 영향력과 인지도를 악용하여 후배 음악가의 작업을 도와주면서 성추행을 자행했다. 피비 브리저스와는 헤어진 이후 끊임없이 집착하며 괴롭혔다고 한다.
“멀미가 나, 누가 창문 좀 내려줘 뭐라고 표현해야 할 지도 모르겠어, 널 익사시키기 위해 비명을 지를 수도 있지” -피비 브리저스, Motion Sickness 중에서
*Phoebe Bridgers - Motion Sickness https://youtube.com/watch?v=9sfYpolGCu8
이러한 경험을 했기 때문인지, 그는 직접 레이블 ‘새디스트 팩토리 레코즈’(Saddest Factory Records)를 차렸다. 이 레이블에 다른 아티스트 클라우드(Claud)를 데리고 있기도 하다. 클라우드는 논바이너리로 스스로를 규정한 음악가다. 피비 브리저스는 <멘즈헬스>(Men’s Health)와의 인터뷰에서 백인 남성 중심의 음악시장을 비판하며 ‘다양성’은 중요한 핵심이라고 말한다. 겉핥기 식으로 소수자를 내세우는 토크니즘(tokenism. 소수자를 앞세워 구색을 맞추는 행위) 뒤에는 항상 나이든 백인 남성이 있다고 날카롭게 지적하기도 했다. 그는 사회적 영향 때문만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 더 나은 비즈니스 모델’이라고 말한다.
*Claud - Soft Spot https://youtube.com/watch?v=hjqTrZUL_2U
한편으로, 피비 브리저스는 다른 여성 음악가와 함께 ‘보이지니어스’(boygenius)라는 그룹을 결성해 인디음악 시장 내에서 슈퍼밴드라 불리며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The 1975’와 같이 대중적으로 인기가 있는 남성 밴드와도 협업을 했는데, 이에 관해 미국 음악매체 <포티파이브>(The Fourty-Five)와의 인터뷰에서 ‘1975를 싫어하는 것은 일종의 성차별’이라고 발언한 것이 눈에 띈다. 10대 여성들이 비틀즈를 만들었고, 10대 여성들이 세계적으로 뛰어난 밴드의 팬을 자처하며 음악을, 음악시장을 만들었는데 10대 소녀들이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The 1975’를 싫어하는 건 멍청한 소리라는 것이다.
피비 브리저스처럼 인디펜던트로, 그렇지만 적극적으로 자신의 음악을 만들고 또 알리고 활동하며 높은 완성도로 세간의 주목을 받는 인디 음악가는 흔치 않다. 인디 록, 포크 음악을 기반으로 하지만 그의 음악에는 메탈도 있고, 펑크도 있으며 자신이 어릴 때 영향을 받았던 것들을 적극적으로 가져온다. 여기에는 시대도, 영역도 구분이 없다. 특히 최근 발표한 앨범 Punisher는 더욱 그렇다.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트라우마부터 가족사까지 꺼내면서도 차분하게 감정선을 억누르며 자조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후반부에 감정을 강하게 표출한다.
그는 솔로로서 훌륭한 앨범을 발표하면서도, 앞서 소개한 ‘보이지니어스’ 외에 ‘베터 오블리비언 커뮤니티 센터’(Better Oblivion Community Center)라는 밴드 활동도 하고 있다. 피비 브리저스는 이제 시작이다. 아마 한참 뒤에는 이 음악가를 주제로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훨씬 더 많아질 것이다. 그 시간이 기대된다.
* NPR Music: Phoebe Bridgers Tiny Desk Concert https://youtube.com/watch?v=2bOigld3D1k
<관련 자료> -페미니스트 매거진 Femalista 2021년 2월 9일자 “Self-Proclaimed ‘Male Feminist’ Criticized Phoebe Bridgers For Smashing Her Guitar On SNL” -뉴욕타임즈 2020년 11월 25일자 “How Phoebe Bridgers Got Her Grammys Good News” -음악/팝 컬쳐 미디어 A.Side 2019년 4월 30일자 “Phoebe Bridgers models a version of healing that’s familiar, complex, and restorative”(by: Morgan Bimm)
[필자 소개: 블럭. 프리랜서 디렉터, 에디터, 칼럼니스트.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국내외 여러 음악에 관하여 국내외 매체에 쓴다. 저서로 『노래하는 페미니즘』(2019)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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