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도, 질병도 ‘극복’? 올림픽 보도의 한계

도쿄올림픽 보도에서 강조되는 것과 드러나지 않는 것 上

박주연 | 기사입력 2021/08/03 [15:44]

가난도, 질병도 ‘극복’? 올림픽 보도의 한계

도쿄올림픽 보도에서 강조되는 것과 드러나지 않는 것 上

박주연 | 입력 : 2021/08/03 [15:44]

7월 23일 개막한 2020 도쿄올림픽은 전세계에 큰 영향을 미친 코로나 팬데믹 상황 속에서 무리하게 열린 만큼 논란이 많은 올림픽이다. 자국민은 물론 해외에서도 개최 강행에 대한 우려와 반대의 목소리가 높았고, 선수촌 후쿠시마산 식사재 사용 논란을 비롯해 다양한 문제제기가 계속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문제는 도쿄올림픽 그 자체에만 있는 게 아니다. 올림픽을 어떻게 전달하고, 무엇을 조명할지 다뤄야 하는 국내언론의 부족함도 계속 지적되고 있기 때문이다.

 

개막식 중계 당시 공영방송 MBC에서 벌어진 참극(관련 기사: “고통스럽고 참담” 올림픽 중계 논란에 고개숙인 MBC사장, 미디어오늘, 2021년 7월 26일자)이나, 여전히 계속되는 경기 중계 보도에서의 성차별 발언(관련 기사: 낭자, 공주, 여전사… 올림픽 낡은 중계, 저는 불합격 드리겠습니다, 경향신문, 2021년 7월 29일자)은 한국언론이 가지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가 여전히 변화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이런 문제를 지적하고 변화를 촉구하는 목소리도 많아지고 있다. 이에 영향을 받고 경각심을 가지게 된 언론인이 ‘여궁사’라는 자막을 보고도 ‘궁사’라고 읽는 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도 의미 있는 변화다.(관련 기사: 이거 나만 불편해? "얼음공주""여우" 올림픽 중계에 뿔난 MZ, 중앙일보, 2021년 7월 29일자)

 

하지만 변화가 거기에서 그쳐선 안 된다. ‘올림픽 정신’으로 강조되었던 ‘OO 극복’의 반복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도 고민할 필요가 있다. 또한 좀처럼 드러나지 않고 보여지지 않는 순간들, 올림픽의 평화와 화합이라는 ‘대의’ 속에서 가려지거나 혹은 억압 당했던 목소리를 드러내어 증폭시키기 위한 방안도 생각해 봐야 한다.

 

▲ 선수들의 ‘OO 극복’ 서사가 도쿄올림픽 중계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이러한 보도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깊이 고민할 필요가 있다. (이미지 출처: pixabay)


가난과 빈민을 넘은 성공은 왜 ‘감동’인가?

 

“(이탈로 페레이라 선수는) 빈민가 출신에서 태어나서 아버지의 아이스박스 뚜껑으로 서핑을 배웠다. 예를 들면, 할렘가 출신으로 집도 없던 아이가 (최고라 불리는 미국 농구선수) 마이클 조던이 되는 감동 스토리를 써 가고 있다. 이제 정점을 찍어낸 것 같다. 개인적으로도 좀 뭉클하다.”

 

지난 7월 27일, 도쿄올림픽에서 처음으로 정식 종목이 된 서핑의 남자 결승전을 중계하던 KBS 해설위원이 금메달을 딴 브라질의 이탈로 페레이라 선수를 설명하며, 그가 ‘빈민가 출신’임에도 이런 ‘성공’을 이뤄낸 것이 얼마나 ‘감동적’인지 덧붙였다.

 

물론 그런 이야기를 듣고 힘을 낼 사람들이 있을 순 있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하는 지점은 이런 이야기가 반복됨으로써 가난과 빈민이 쉽게 대상화될 뿐만 아니라, 가난이라는 사회적 문제가 개인의 ‘능력’으로 충분히 ‘해결’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강조하는 게 된다는 부분이다.

 

현 자본주의 상황에서 “꿈을 실현하는 최선의 방법은, 현실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현 상황에 적응하는 것”이라고, 오스트리아의 사회학자 라우라 비스뵈크는 꼬집은 바 있다. 그는 책 <내 안의 차별주의자>(장혜경 옮김, 심플라이프)에서 지금 사회는 “이 현실을 만든 책임자나 이해 집단, 노동 조건, 정치나 제도를 바꿀 게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모두가 알다시피, 개인이 변화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엔 한계가 있다. 그렇기에 가난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의 문제다. 가난이 지속되는 것 혹은 가난에 ‘빠지게’ 되는 것은 오롯이 개인의 선택이나 한 사람의 문제가 될 수 없다. 사람의 삶은 살아가고 있는 사회 환경의 영향을 받으며 유기적인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을 삭제하는 효과를 불러오는 능력주의의 문제점이 지속적으로 도전 받고 있다는 점을, 미디어는 이제 더 세심히 고려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관련 기사: ‘능력주의’ 이름으로 강화되는 불평등을 고발하다, 일다, 2020년 12월 22일자)

 

또한 큰 성과를 이룬 선수에게 축하의 메시지를 건네며 그가 ‘빈민가 출신’이었다는 점을 언급하는 건 해당 선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감흥을 극대화하기 위한 건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하는 지점이다.

 

▲ 세계적 기량과 재능을 가진 선수들이 경쟁을 펼치는 올림픽에서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모습을 목격하는 건 황홀한 경험이다. 하지만 이 선수들조차 때때로 실수하고 실패하며, 포기하기도 한다는 사실도 받아들여질 필요가 있다. (이미지 출처: pixabay)


질병, 질환 그리고 장애는 ‘극복’해야 하는 것일까?

 

또 하나, 감동적 장면으로 자주 꼽히는 건 질병, 질환 혹은 장애를 ‘이겨낸’ 선수들의 이야기다. 이번 올림픽에서도 태권도 남자 80㎏ 초과급에서 동메달을 딴 인교돈 선수와 관련 보도엔 ‘암 극복’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했다. 인교돈 선수 외에도 어떤 질병이나 질환을 ‘극복’한 선수들의 이야기엔 ‘인간 승리’라거나 ‘이것이 올림픽 정신!’이라는 등의 말이 쉽게 따라붙는다.

 

그런데 이처럼 질병과 질환을 ‘극복’해야 하는 것으로 강조하는 건, 질병과 질환에 대한 낙인을 강화한다는 점에서 유의해야 한다.

 

책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조한진희 지음, 동녘)에선 암 판정을 받고 나서 너무 창피하고, 남 보기 부끄러워 죽고 싶었다고 말한 사람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만큼 우리사회의 질병에 대한 낙인이 강하기 때문이다. 아프다고 하면 몸 관리를 잘못한 탓, 잘못 살아온 탓, 예민한 탓, 무리하게 일을 많이 한 탓, 문란하게 지낸 탓 등 별의별 이유가 다 붙는다. 이렇다 보니 “아픈 몸들은 질병이 주는 생물학적 통증 때문이 아니라, 질병 이미지와 낙인 때문에 치료제도 없는 고통을 겪는다.”(책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중)

 

아픈 몸이 되는 건 개인의 통제 영역을 벗어나는 일이다. 아픔을 ‘극복’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열심히 질병 관리를 한다고 해도 그것을 ‘극복’하지 못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왜 ‘극복’해야 하는 것일까?

 

건강할 권리가 아니라 “잘 아플 권리, 질병권”을 주장하는 조한진희 작가는 노력해서 성공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아프면 안 된다고 하는 사회 속에서 아픔, 질병, 질환에 관한 논의가 더 잘 이뤄져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극복 서사가 반복, 강조되는 상황 속에선 “우리가 아플 만해서 아프다”는 것과 그렇기에 “우리에겐 아플 권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더 드러나기 어렵다. 질병을 ‘극복’해야만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한편, 장애를 ‘극복’했다는 말을 쓰는 건 정말 지양해야 한다. 유튜브 채널 <굴러라 구르님>을 운영하는 구르님은 영상 <[1분 구르님] 장애 극복은 무슨 말일까>에서 ‘장애 극복’의 문제와 모순을 짚는다. 일단 장애 극복이라는 말은 “장애를 어떤 역경이나 고난으로밖에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또한 “장애인이 장애를 ‘극복’한다는 건 비장애인이 된다는 말인지?”라는 의문처럼, 말이 안 되는 말이다. 이 말은 철저하게 비장애인 중심 사고에서만 가능하다.

 

▲ 유튜브 채널 <굴러라 구르님>을 운영하는 구르님은 영상 “[1분 구르님] 장애 극복은 무슨 말일까”에서 ‘장애 극복’이라는 말의 모순과 문제점을 짚는다. (출처: 굴러라 구르님 유뷰트 채널)


선수들의 포기에 대한 이야기도 필요하다

 

그야말로 세계적 기량과 재능을 가진 선수들이 경쟁을 펼치는 올림픽에서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모습을 목격하는 건 황홀한 경험이다. 하지만 이 선수들조차 때때로 실수하고 실패하며, 포기하기도 한다는 점은 많이 부각되지 않는다. 그것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하기 때문에 부각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실패나 포기도 괜찮다는 메시지 또한 필요하다는 얘기다.

 

그런 점에서 이번 올림픽 경기를 치르다 중도 기권한 미국의 체조 선수 시몬 바일스의 이야기는 의미있다. 체조 역사상 최고의 선수라는 찬사를 듣는 그가, 그 무엇보다도 자신의 신체적, 정신적 건강을 생각해 경기를 포기했다는 것이 시사하는 바는 여러 가지이기 때문이다. 이 일로 성적내기에만 급급해 선수들을 몰아붙이는 미국 체조계(를 비롯한 스포츠 전반)의 엘리트 교육과 훈련을 되돌아 봐야 한다는 목소리도 드러나고 있다.(관련 기사: ‘엘리트 교육’이란 이름으로 자행된 학대, 묵인된 성폭력, 일다, 2020년 12월 16일자) 또한 선수들의 정신건강 돌봄의 필요성도 제기되고 있다.

 

특히, 시몬 바일스의 포기가 무조건 해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 때론 쉼이 필요하고 그것이 포기의 형태여도 괜찮다는 메시지를 던졌다는 점은 중요하다.

 

이런 내용을 잘 전달한 보도도 있었지만, 일부 언론들은 시몬 바일스가 “압박감에 무너졌다, 중압감을 못 이겼다”고 표현하거나 “(시몬 바일스의 기권으로) 미국 체조가 노메달의 위기”라거나, 그가 “(단체전에 이어) 개인전도 포기할 것인지”에 주목하는데 급급한 모습을 보였다. 이야기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이런 분석보다, 사회에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 게 중요할지 고민하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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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ej 2021/08/09 [21:12] 수정 | 삭제
  • 불편했던 부분 짚은 기사라 반갑게 읽었다..
  • 독자 2021/08/06 [18:53] 수정 | 삭제
  • 극복 서사 참 진부하고 선수들에 대해 동정심 유발하는 거같아서 좀 그랬는데 동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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