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의 여성 아이돌 그룹 ‘제로캐럿’의 이야기와 이들의 팬인 ‘파인캐럿’이 쓴 팬픽이 교차하는 소설 <라스트 러브>, 여성 가수들의 노래를 테마로 한 앤솔로지(단편묶음집) <이 사랑은 처음이라서>와 <엄마에 대하여>, 일하는 여성들의 관계를 다룬 단편 모음 <팀플레이>, 다양한 여성들의 이야기가 담긴 <내 여자친구와 여자 친구들>, 죽음을 앞둔 중년의 레즈비언이 조카들에게 전하는 미션으로 가득한 <이어달리기>.
“‘여성’, ‘퀴어’, ‘노동’에 대해 관심을 갖고 쓴다”는 조우리 작가의 소개는 그의 소설을 설명하는데 매우 적확하다. 2011년부터 작품을 발표해 오고 있는 작가의 이야기가 한결같기 때문이다. 같은 이야기가 반복된다는 게 아니라,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명확하다는 의미로.
가장 최근에 발매된 연작소설 <이어달리기>를 단숨에 읽고 난 후, ‘이제 작가를 향한 사심을 드러낼 때가 되었다’고 느꼈다. <라스트 러브> 때부터 여돌여덕(여성아이돌을 좋아하는 여성팬)으로서 동지애를 품어왔고, 그의 소설 속 인물과 이야기에 공감하며 웃었던 적이 많았으니까. 소설가 조우리가 그리는 세계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는 마음을 품은 채, 그를 만났다.
-첫 책 <라스트 러브>는 팬픽이 등장하는 소설이에요. 학창 시절에 팬픽 좀 쓰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때의 팬픽과 소설가가 된 조우리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라스트 러브>의 탄생 비화도 궁금합니다.
“팬픽을 쓰게 된 건 PC통신을 접하면서부터예요. PC통신 게시판에 글을 쓰면서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는 글쓰기를 시작했는데, 당시 제가 좋아하는 글쓰기가 팬픽이었던 거죠. 그러니까 팬픽이 제 글쓰기의 시작인 것 같아요. 이후 예술고등학교에서 문학을 배웠고, 대학에서도 문예창작을 전공했는데, 그러면서 소위 ‘순문학’이라고 하는 글을 계속 쓰게 됐어요.
데뷔하고 나서(조우리 작가는 2011년에 단편 「개 다섯 마리의 밤」으로 제10회 대산대학문학상 소설부문을 수상했다) 5~6년 정도 글을 쓰는 동안 ‘내가 좋아하는 소설은 뭘까, 내가 쓸 수 있는 소설과 내가 써야 하는 소설은 뭘까’ 고민하게 되더라고요. 소설 쓰기 자체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고, 그러면서 소설 쓰기가 더 막막하게 느껴지기도 했어요. 그러다 찾은 결론이 ‘내가 좋아하는 걸 쓰자’였어요. 독자를 생각하며 글 쓰는 게 프로 작가라고 한다면, ‘가장 최초의 독자는 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가 재미있어야 다른 사람도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내가 처음 재미를 느끼면서 썼던 글이 팬픽이라는 걸 기억해낸 거죠.
2017년 <라스트 러브>를 기획할 때 그걸 떠올리게 됐고, 메타적인 팬픽 쓰기를 해 보자 싶었어요. 특히 <라스트 러브>는 창비의 문학플랫폼 『문학3』 웹사이트에 연재되는 소설이었기 때문에, 웹 게시판에 주간 연재를 한다는 점에서 팬픽이 더 생각날 수밖에 없었어요.”
-다시 팬픽 쓰는 건 어땠나요?
“재미있었죠. 연재 당시 소설을 게시판에 올릴 때 팬픽의 모티브가 된 노래의 유튜브 영상이나 뮤직 비디오 링크도 같이 올렸거든요. 또 웹 게시판이다 보니 독자들의 피드백도 바로 확인할 수 있으니까, 생생한 감상을 접한다는 점에서도 너무 재미있었어요. 보통 주간 연재면 되게 힘든데, 그 땐 힘들다는 생각도 없이 썼던 것 같아요. 원래 소설 쓸 때 되게 괴로워하는 편이거든요. <라스트 러브>를 쓰기 전까진 책상 앞에서 힘들어 하고 인상 쓰고 잠도 잘 못 자고 그랬는데 <라스트 러브>를 쓸 땐 정말 재미있었어요. 모니터에서 비친 제가 웃고 있는 모습이라는 게 저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였으니까요.”
-<라스트 러브>라는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접하고, 바로 사서 읽었던 기억이 나요. 여돌여덕으로서, 여돌팬픽과 관련된 것들을 한참 찾고 있던 때였거든요. 팬픽 문화 이야기가 나오면 남돌팬픽만 언급되고 분석되는 게 좀 서글프기도 하고, 왜 여돌팬픽은 비가시화 되는 걸까 생각했어요.
“팬픽 이야기를 할 때 주로 남돌팬픽이 언급되는 건 확실히 팬픽 수 자체의 차이 때문인 것 같아요. 팬덤이 더 크니까 팬픽도 훨씬 더 많은 거죠. 문화예술의 소비층 다수가 여성이고, 그 여성의 다수가 이성애자 여성이기 때문에 그들이 생산하는 팬픽의 대상이 남성일 경우가 많고요.
또 한편으로 여돌팬픽을 즐기는 여덕들에겐 ‘현타’가 오는 시점이 있는 것 같아요. 결국 이 팬픽 문화라는 것도 실존 인물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현실과 완전히 분리할 수 없는 지점이 있는데, 어느 순간 여돌을 환상의 허구 세계에 넣어둔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하게 되는 거죠. 현실의 많은 여성아이돌이 겪고 있는 문제와 고난들을 여성 팬들이 함께 목격하게 되면서, 더 이상 허구의 세계를 즐기지 못하게 되는 거에요. 현실이 멱살을 잡는 순간이 온다고 해야 할까요.(웃음) 그러면서 어떤 문화를 즐기는 향유층이 아니라 (현실에 저항하는) 투사로 만드는 때가 오는 거죠.
사실 <라스트 러브>도 그런 이야기에요. 어떤 문화를 사랑만으로 즐길 수 없는 한계점이 올 수 밖에 없다는 걸 담았으니까요.”
-<라스트 러브>뿐만 아니라 여러 작가들과 함께 출간한 앤솔로지인 <이 사랑은 처음이라서>와 <엄마에 대하여>에서도 작가의 여돌여덕 정체성이 묻어나는데요. 두 작품 모두 여성 가수들의 노래와 연결되는 테마 소설들의 모음이고, 직접 기획하기도 했고요. 작가의 이런 정체성이 드러나는 작품들이 전 재미있더라고요. 이 정체성이 작가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봐야겠죠?
“작품마다 다르긴 해요. 처음부터 그렇게 기획해서 쓰는 작품의 경우엔 마음껏 팬심을 드러낼 수 있으니까 아무래도 그 영향이 빛날 수밖에 없죠. 여돌여덕이라는 게 제가 가진 여러 정체성 중 하나인 건 분명해요. 그러니까 제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여성 아티스트들에게 영감 받는 부분도 당연히 있을테고, 그들에게 헌사하고 싶은 작품도 있고요.”
-올해 출간된 연작소설 <이어달리기> 주인공 이름이 성희(S.E.S. 멤버 바다의 본명)잖아요. 작가님이 S.E.S. 팬이라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인데(웃음) 책을 직접 전해본 적은 없나요?
“<이어달리기>의 성희는 S.E.S. 바다 님께 영감을 받은 부분이 분명 있죠. 제가 좋아하는 여성 어른의 모습을 가진 분이라 성희라는 캐릭터를 만들 때 참고했어요. 사실 최근 팬미팅 때 책을 전하긴 했어요.(웃음) 읽으셨는진 모르겠지만.”
-성덕(성공한 덕후)이시네요!(웃음) <이어달리기>의 경우. 큐큐퀴어단편선 <언니밖에 없네>에 실렸던 단편 「엘리제를 위하여」에서 시작된 이야기에요. 처음 단편을 읽었을 때, 여러 가지 추억이 떠올라 굉장히 재미있었거든요. 요즘은 좀 다르지만, 흔히 레즈비언 술집이라고 하는 공간들에서 느껴지는 약간의 촌스러움은 커뮤니티 내에서도 농담거리로 소비되었으니까요.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쓰게 된 계기가 있나요?
“큐큐출판사에서 퀴어를 주제로 단편을 써 달라는 제안을 받았을 때, 뭘 쓸 수 있을까 고민하다 ‘우리끼리 아는 이야기면서 남기고 싶기도 한 이야기에 대해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구리기도 했지만 우리들의 공간’이었던 곳의 이야기를요. 소설이라는 문학이 하는 일 중 하나가 한 시대 혹은 한 세대의 기억을 작품에 남겨서 다음 어딘가까지 이어지게 하는 거잖아요? 그런 점에서 우리의 공간과 우리들의 기억에 대해서도 좀 남기고 싶었어요. 큐큐퀴어단편선 같은 경우 퀴어 당사자들을 생각하는 책이기도 하니까, 퀴어들이 재미있어 할만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고요.”
-흥미롭게도 「엘리제를 위하여」가 단편일 땐 공간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이어달리기> 안에서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읽히더라고요. 성희와 조카’들’ 이야기가 되니까요.
“처음 「엘리제를 위하여」를 쓸 때 성희라는 인물을 사랑이 많은 캐릭터로 상정하긴 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엘리제를 위하여」에 나오는) 조카 혜주뿐만 아니라 더 많은 조카가 있었을 거라는 생각도 하고 있었죠. 그런데 <이어달리기>의 편집자한테 연락이 와서 다른 조카들 이야기를 써 볼 생각이 없냐고 하더라고요. 어떤 인물은 소설이 끝나도 한번 더 써보고 싶기도 하는데, 성희가 그런 인물이었어요.”
-퀴어로 나이 든다는 걸 상상하면, 외로움이나 고립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이어달리기>의 성희에게 많은 조카들이 있고 그들에게 사랑을 나눈다는 점이, 왠지 기분이 좋더라고요. 누군가는 이 이야기를 판타지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저한텐 굉장히 행복한 소설이었어요.
“<라스트 러브>를 쓴 이후로 전 스스로를 ‘내가 읽고 싶은 소설을 쓰는 작가’로 생각하고 있고, 그렇게 소개하고 있어요. 이제 소설을 쓸 때 가장 중요한 건 ‘내가 얼마나 재미있는가?’에요. 사실 <라스트 러브>를 쓰기 전에 좀 크게 아팠어요. 그 일을 계기로 내가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사는 동안 좀 재미있게 살아야겠다 싶더라고요. 소설에서도 판타지라고 할지언정 내가 바라는 모습을 더 쓰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내가 원하지 않는 세상의 어떤 모습을 그리는 것보다 내가 원하는 세상의 모습을 그리고 싶어진거죠.
퀴어의 나이듦도, 지금 한국 사회의 현실에선 ‘가족’을 형성할 수 없기 때문에 외로운 노후를 맞이할 수밖에 없다고 상상이 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이성애자들이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지내는 걸 보면, 어떤 점에선 자신들만의 울타리에 갇히거나 인간 관계가 좁아지기도 하는 것 같거든요. <이어달리기>의 성희는 혈연이 아닌 아이들을 조카라 부를 수 있었기 때문에 많은 조카들을 얻었던 거잖아요? 오히려 관계를 혈연으로만 좁히면 조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없었던 거고요. 전 가족이라는 법의 울타리 혹은 혈연의 울타리를 벗어나서 내가 선택한 사람과 가족이 될 수 있고, 삶의 동반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생각으로 <이어달리기>를 썼어요.”
-작가님 소설을 몇 편 읽고 난 후론 자연스럽게 작가님의 모든 소설 속 인물들을 퀴어로 상상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인물의 말이나 행동들을 더 살피게 되는 면도 있어요. ‘지금 이거, 이 사람이 퀴어라는 실마리인가? 이 두 사람 좀 의심스러운데?’ 이러면서요.(웃음)
“독자 분들께 말씀 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제 소설의 모든 주인공은 퀴어/레즈비언입니다.(웃음) 다만 소설 안에서 특별히 언급할 필요가 없을 때도 있기 때문에 언급하지 않는 것뿐이에요. 이성애자 남성 주인공이 항상 ‘나는 이성애자 남자야’라고 밝히지 않잖아요? 제 소설도 그렇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것에 대해서만큼은 약속할 수 있어요.(웃음)”
-요즘 문화예술 하는 분들 만나면 제가 꼭 하게 되는 질문이 있는데, ‘그래서 요즘 퀴어가 주류인가요?’에요.(웃음) 퀴어예술이 흥한다, 퀴어예술이 많아졌다는 말이 하도 많이 나오니까요. 근데, 물어보면 다들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얼마 전에 열린 서울국제도서전에서 <퀴어, 장애-‘불구’의 언어로 쓰는 ‘퀴어’한 세계>라는 행사에 연사로 참여했어요. 거기서도 ‘요즘 퀴어가 대세이고 유행이어서 다들 그냥 퀴어를 쓰는 것 같다’는 얘기가 나왔어요. 그 때도 제가 분명하게 말했어요. “아직 주류가 아니다”라고요. 긴 문학의 역사 속에서 지금 퀴어문학이라고 하는 게 차지하는 비중은 아직 0.1%도 안되거든요.
물론 요즘 퀴어 소재의 작품이 많이 나오는 것에 대해 어떤 피로감을 느끼는 독자도 있을 수도 있다고 봐요. 그렇지만 지금 어떤 작가들에겐 퀴어가 ‘유행’이라고 하는 지금이 아니면 내 작품을 내놓지 못할 것 같아서 엄청 열심히 써서 내는 것일 수도 있어요. 아니면 저처럼 데뷔 때부터 쭉 퀴어 이야기를 써 왔는데 요즘 눈에 띄게 된 경우도 있을 테고요.
한편으론 퀴어문학이 많아졌다는 말이 나오는 건, 독자들 또한 이제 그걸 알아볼 수 있게 되었고, 또 그걸 찾아볼 수 있게 된 건 아닌가 싶기도 해요. 하지만 분명한 건, 아직 주류라고 할 정도는 아니라는 거죠. 더 많이 나와야 한다고 봐요. 그래야 그 중에서 재미있는 것과 재미없는 것도 구별할 수 있을 거고요.
<퀴어, 장애-‘불구’의 언어로 쓰는 ‘퀴어’한 세계> 행사가 코엑스 책만남홀1에서 열렸는데, 정말 퀴어가 주류였음 (수용인원이 가장 큰) 책마당에서 열렸을 거에요. 그러니까 아직 아니다.(웃음)”
-아직 주류가 아니니까 작가님도 계속 더 많이 쓰셔야겠네요.(웃음) 그렇다면 작가 조우리에게 글을 계속 쓰게 하는 동력은 무엇일까요?
“쓰고 싶다는 마음인 것 같아요. 그 마음을 더 깊이 들여다 보면, ‘내 마음에 드는 건 나밖에 못 쓴다’이기도 하고, ‘이 세상에 분명 있어야 하는데 없는 이야기들이 있어서. 그 이야기가 없는 세상을 견딜 수 없어서’이기도 해요. 아마 많은 창작자들이 그런 마음이지 않을까요? 무엇을 창작해낸다는 건 결국 이 이야기가 세상에 필요하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고, 이 이야기가 없는 세상을 납득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글을 다 쓰고 마침표를 딱 찍는 순간, 다 썼다고 생각되는 그 순간을 대체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소설을 쓰는 것으로만 충족되는 어떤 굉장한 게 있고, 그걸 대체할 수 있는 게 없어요. 글이 잘 안 풀리고 마감은 다가오고 정말 ‘나무야 미안해’라는 심정이 될 때도 있지만.(웃음) 그래도 그걸 다 쓴 순간의 마음은 그걸로밖에 느낄 수 없더라고요. 대체불가인거죠.”
-독자들에게 어떤 작가로 기억되고 싶으세요?
“‘저 작가는 적어도 내가 기대했던 것을 실망시키지 않을 거야’라는 생각이 들었으면 좋겠어요. 그게 뻔하다는 말이 될 수도 있지만, 전 뻔한 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앞으로도 제 소설에선 퀴어가 주인공일거고 그들이 불행하지 않고 행복할 거에요. 독자들이 그걸 기대했을 때 그 믿음을 배신하고 싶지 않아요. 조우리를 떠올렸을 때, 믿음을 배신하지 않는 작가였음 좋겠네요.”
-장편을 쓰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그에 대한 이야기를 살짝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아마도 하반기에 연재가 시작될 것 같고, 책으로 나오는 건 내년 상반기 즈음이지 않을까 싶어요. 역시나 주인공은 레즈비언이고요. 지역에서 지방직 공무원으로 일하는 주인공이, 자신의 이상형 부치를 만나게 되면서 일어나는 우여곡절 이야기를 담게 될 것 같습니다. 이 외에 단편들도 계속 나올 예정이에요. 앞으로도 제가 읽기에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할 예정이니 많이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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