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든 고향, 스위트홈? ‘가부장적 장소’를 떠난 여성 청년들<책방에서 밑줄 긋기> 장민지 『여자들은 집을 찾기 위해 집을 떠난다』[연재 소개] 여성들의 말과 글이 세상에 더 많이 퍼지고 새겨져야 한다고 믿으며, 서점에서 퍼뜨리고 싶은 여자들의 책을 고른다. 책방 ‘살롱드마고’의 신간 책장에서, 마음에 새겨지는 책을 한 권씩 밑줄 그으며 꼭꼭 씹어 독자들과 맛있게 나누고자 한다.
자유와 생존 그리고 욕망의 다른 이름, 집
“집이 어떻게 경험되는가는 집이라는 공간과 그 내부에서의 사회관계를 결정할 수 있는 권력이 누구에게 있는가에 달려 있다.” -발렌타인 (책 44쪽)
이사를 하지 않은 지 5년이 지났다. 성인이 되자마자 부모님 집을 떠난 뒤 최장기록이다. ‘내 집’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세입자였을 때엔 1~2년 단위로 이사를 다니곤 했으니까. 현재 사는 집은 집값의 90% 이상 빚을 내 구입을 감행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까지 무리해서 집을 가질 필요가 있느냐고 했는데, 그들은 자기 소유의 집을 이미 가졌거나 집의 상태가 건강에 별 영향을 주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 나는 10년 넘게 남의 집을 떠도는 동안 몸과 마음에 ‘맺혀온 것’들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벽지에 곰팡이가 피지 않고 집주인이 아무 때나 들이닥치지 않는 나만의 공간이 생긴다면, 미래의 자유를 담보 잡히는 것은 눈 질끈 감고 참을 수 있었다. 아니 앞으로도 ‘내 집’이 없다면 내 삶에 온전한 자유를 보장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인생에 가장 큰 숙제로 느껴지는 ‘집’에 대해 아련한 향수를 품는 정서는 나에게 낯설면서 기만적으로 느껴진다. 한국 사회에서 집은 계급의 상징이면서 집단적 욕망의 방향을 보여주는 것이다. 뉴스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서울의 아파트 시세를 보도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사람들의 욕망과 사회문화적 권력이 집중된 곳의 부동산 동요는 마치 모두의 인생이 흔들리는 것 같은 착시와 불안을 퍼뜨린다.
“인터뷰에 참여한 여성청년들은 홀로 이주를 경험한다는 부담감과, 독립적인 삶에 적응하고 경제적으로 독립해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우울감을 느꼈다고 언급했다.” (182쪽)
아버지의 집 밖에서 자유로운 독립은 가능한가
이렇게 인생을 건 투기의 도구가 된 집이 우리에게 그리운 안온함을 재생할 수 있는 곳으로 기억되는 이유는, 우리가 자라는 동안 집의 그림자로 살았던 여자들의 보살핌과 희생 때문이다. 스무 살에 서울에서 아파트의 방 한 칸을 빌려 자취를 시작하고 가장 당황스러웠던 것은 집이, 아니 ‘내 방’이 더 이상 안전하지도, 안온하지도 않다는 사실이었다. 안전함은 아버지로부터, 안온함은 어머니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야 깨달았다.
“아버지의 집은 여성들에게 안전과 편안함을 제공하지만 동시에 자유와 해방감에 있어서는 관습화된 금기를 통해 제약을 가해왔다.” (123쪽)
“전통적으로 집의 가족 구성은 이성애적 부부와 혈연관계로 이루어졌다. 집의 장소감은 이러한 관계 내에서의 보이지 않는 희생자, 특히 ‘어머니’로부터 만들어진 것이었다. 여성들은 전형적인 집의 장소감―위안, 편안함, 친밀감 등―을 제공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207쪽)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해 ‘지방에서 올라온 여자애’는 대도시에서 가장 어리숙한 존재 같았다. 청소년기 내내 꿈꾼 ‘고향과 부모님으로부터 탈출’을 실현해 어렵게 획득한 자유의 틈새가 벌어질수록, 내가 감각하고 감당해야 하는 위험도 함께 비례하며 늘어났다. 그래서 서울에서 독립하는 동안 무엇이 ‘나를 위한’ 선택인지 늘 혼란스러웠다.
특히 내가 느끼는 공포가 빚어낸 상상 속 폭력의 장면들은 때로 나를 노이로제 상태로 몰아넣었다. 반지하 방과 다세대주택이 밀집한 동네에 몇 년간 살며 실제로 보고 들은 여성 대상 (성)범죄가 차고 넘쳐, 혼자만의 과대망상이라 할 수도 없었다. 24시간 부모를 비롯한 누구의 눈치나 허락 없이 살 수 있는 이 자유가 과연 위협을 무릅쓸 가치가 있는 것인지, 아니 늘 불안에 떠는 내가 지금 진짜 자유로운 게 맞긴 한지 끝없이 되물었다.
“특히 이러한 주거 공간의 보안 및 치안에서의 위험 가능성은 젠더적으로 여성 편향적이다. 여성청년 이주민들은 계속해서 자신을 피해자의 위치에 놓고 위험 의식을 제 몸에 각인시킨다. 그들은 이주를 통한 주거 공간이 제공하는 부정적 상상을 지속한다. 이러한 무의식적 상상의 발현은 젊은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가 일반화된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받을 수밖에 없는 수많은 시선 때문이다. 사회적 관습에 의해 응시(시선)의 주체보다는 대상으로 존재해왔던 여성, 특히 남성 중심적 욕망에 익숙해진 여성들에게 내재된 부정적 상상은 일상으로서 집의 의미를 변형시킨다.” (115~116쪽)
왜 여성청년 이주민인가
“여성청년 이주민들은 가부장적 질서의 감시를 탈주해 자신의 공간을 소유하거나 부여받은 존재들이다. 그들은 자율적으로 자신의 삶을 관리하고, 전통적으로 여성에게 부과되었던 가사노동에 대한 의무감을 점차 흐리며, 성적 주체성을 스스로 구성해나간다.” (101쪽)
“우리는 이들을 ‘남성 중심적 장소를 떠나는 여성 주체’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71쪽)
책 『여자들은 집을 찾기 위해 집을 떠난다』의 저자 장민지는 대학 입학과 함께 부산에서 서울로의 이주를 통해 처음 ‘(부모님의) 집’을 떠났고 이후에도 여러 번의 이주를 경험했다. 그는 이주를 반복하는 동안 ‘집’이 가지는 의미가 계속 변하거나 새로 만들어지는 것을 발견하며 자신처럼 성인이 됨과 동시에 지방을 떠나 수도권으로 이주한 열두 명의 여성청년들에게 “집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고 탐색한다.
저자는 ‘88만원 세대’나 ‘N포 세대’ 같은 청년에 대한 수사가 청년층의 빈곤과 계급 문제 외에 젠더적 측면을 포함하거나 설명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또한 “집의 감정적 토대는 가족 구성원으로부터 생산되”는데, “집이라는 공간은 정상가족 이데올로기가 내재되어 있”기에 “전형적인 여성성은 집에서부터 재생산”된다고 주장하며, 젠더를 둘러싼 논의를 중심으로 ‘여성청년과 집’의 관계를 해석하고자 했다.
인터뷰에 참여한 여성청년들은 “가부장제로부터의 탈출 욕구와 자아 발전에 대한 욕망을 함께 느끼면서 이주를 감행한다.” 그것은 “두 가지 스케일에서 일어나는데 자신이 살고 있던 지역을 벗어나 새로운 도시로 이주하는 것과, 가족과 함께 살아가던 공동체적 집에서 벗어나 개인적인 집으로 진입하게 되는 것이다.”
이주에 대한 이들의 욕구에 깔려 있는 바탕은 청년 시기의 내 마음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았다. 또한 책을 탐독하면서 그동안 살아온 집과 동네의 역사가 저절로 펼쳐지며 특히 고향의 문화와 정서가 나와 친구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더욱 크게 다가왔다.
누가 효녀인가―떠나도, 남아도 죄스러운 딸들
전라도 지역의 소도시에서 나고 자란 나는, 지방에서 계속 살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포기하는 마음가짐’이라 생각했다. 욕망을 스스로 알아채기도 전에 미리 접어버리는 것. 반짝반짝하고 멋져 보이는 모든 것들은 너무 멀리 있고 비싸고 위험하니까. 그것을 가지려면 부모/가족이 잘 살거나 본인의 능력이 수도권의 수준을 뛰어넘을 만큼 출중해야 하는데, 운 좋게 둘 중 하나에 해당하더라도 ‘밖으로 내돌리면 큰일 나는’ 딸들은 가부장제라는 더 높고 단단한 벽을 몸으로 깨야 한다.
지역에서 나름 경쟁력 있는 인문계 여고에 다녔음에도 친구들 중 졸업 후 서울로 ‘진출’한 이는 많지 않았다. 마침 IMF 금융위기와 맞물리며 어른들 대부분이 안정적인 직업이 최고라고, 아이들을 종용하고 회유했다. 영민하고 전도유망했던 많은 딸들이 부모의 감시와 통제를 받는 집 근처의 국립대나 교대 장학생이 되었다. 물론 그것이 본인의 ‘자발적’ 선택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서울대 갈 실력 아니면 (나갈) 꿈도 꾸지 마”라는 엄포에 맞서 모험을 떠날 자신이 없었다. 특히 뒤이어 대학에 가야 할 동생이 있거나 집에서 엄마가 고생하는 모습을 지켜본 딸들은 자신의 욕망을 주장하는 것 자체에 죄책감을 가졌다.
한편 또 다른 어른들은 그곳을 떠나지 못한 아이들을 인생의 실패자이자 부모의 희생을 무가치하게 만든 불효자로 바라보며 혀를 끌끌 차곤 했다. 20대 후반 무렵 서울살이를 정리하고 ‘백수’ 상태로 부모님 집에 잠시 내려가 있었을 때, 부모님은 동네 사람들의 시선을 걱정하며 전전긍긍하고, 언제 다시 떠날 건지 자꾸 묻곤 했다. 평생 자신이 살아온 곳을 혐오하는 정서 속에 자란 나 그리고 우리는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열패감과 포기라는 우리 안의 식민지성은 그 부모들, 어른들이 ‘지방러’들에게 물려준 뼈아픈 유산이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장소를 꿈꾸며
몇 년 전 근처 소도시의 고등학교에 다니는 여학생을 만난 적이 있는데, 이 책을 읽고 나서 그와의 대화가 새삼 떠올랐다.
-나: 졸업하고 계속 이 지역에서 살고 싶어요? -학생: 아뇨. 저랑 친구들 모두 ○○군 탈출이 목표예요. 이왕이면 유학이나 이민도 가고 싶어요. 그래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어요. -나: 왜 떠나고 싶어요? -학생: 여기서 뭘 해요? 부모님이랑 계속 같이 살아요? 여긴 일자리도 없어요. 할 건 결혼뿐인데, 대학도 안 나오고 직장도 없는 여자랑 누가 결혼할까요?(웃음)
미디어로 세상을 보고 교류하는 여성청년들은 일찍부터 더 넓은 세계를 꿈꾸고 그것을 욕망한다. 디지털을 따라 ‘메타적 세계관’이 일상에 들어와 있는 시대에 이주냐 정착이냐 중 하나로 삶의 답을 찾을 수는 없다. 서울이든 지방이든 가르지 않아도 되는 지역사회의 기본적 인프라, 청년이든 여성이든 사회 구성원 누구나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다양한 자원이 균등하게 갖춰져야 한다. 오직 개인의 ‘능력’이 공정을 저절로 실현한다는 허구적 선동은 이제 사회적 자립의 출발선에서 시작하는 청년 계층에 무거운 짐과 불안감만을 얹어줄 뿐이다.
마침 전국의 지자체에서는 청년 이주민 대상 지원제도나 일자리 정책들을 우후죽순처럼 내놓고 있다. 그들은 청년 당사자의 삶과 욕구 자체에 관심이 있기보다 인구감소로 인한 지방소멸 문제를 돌파하기 위한 방편으로 대응하기에, 궁극적으로 청년들의 결혼과 재생산을 목표로 삼는다. 그러나 1인가구 비율이 전체 가구의 삼분의 일 가까이 되는 현 상황에서(2020년 기준 31.7%, 통계청) 이성애 중심의 핵가족 형태는 의미를 잃은 지 오래다. 책에 등장한 인터뷰이들 역시 반려동물과의 관계나 유사가족 형태로 새롭게 구성된 커뮤니티에서의 유대감이 주는 심리적 안정감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주를 경험한 여성청년들은 이동과 정착의 순환이 지속되면서 기존의 사회적인 집의 의미를 점차 허물고, 그것의 장소성을 개인적인 경험의 것 즉 변형 가능한 것으로 변화시킨다. (중략) 훅스는 ‘집은 수많은 곳에 있다’고 말하면서 집이 다양한 시각을 가능하게 하고 이를 촉진시키는 장소이자 우리가 현실을 보는 새로운 방식, 즉 차이의 개척지를 발견하는 장소라고 주장했다.” (121~122쪽)
책을 덮으며 내가 집을 ‘내 집’이라고 느낄 때가 언제인가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발가벗고 돌아다녀도 될 때, 어지른 것을 나중에 치워도 될 때, 언제든 떠났다 다시 돌아와도 될 때, 누군가를 불러들여도 되고 혹은 들이지 않아도 될 때… 무엇이든 ‘된다’고 느낄 때였다. 여자들에게, 여성청년들에게 ‘되는 곳’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여자가 ‘되’지 않아도 된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나는 솔직히 자주 내가 가게 되는 곳. 그곳이 집인 것 같아. 자주 가게 되는 곳. 자주 가는 카페도 집 같아. 그런 생각 들 때도 있어.” (235쪽)
[필자 소개] 달리. 전북 남원에 있는 지역서점이자 페미니즘 문화공간 ‘살롱드마고’의 공동운영자이며 에세이 『몸이 말하고 나는 쓴다』(2021)의 작가이다. ‘고요한 해방, 나의 목소리를 찾는 글쓰기 여행’, ‘삶의 빈 칸을 채우는 글쓰기’ 등 여성들과의 글쓰기 활동을 기획,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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