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이미지에 갇히지 않는 여성들의 관계와 일

24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로그램 중 장편, 단편 추천작 5

블럭 | 기사입력 2022/08/23 [13:56]

‘피해자’ 이미지에 갇히지 않는 여성들의 관계와 일

24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로그램 중 장편, 단편 추천작 5

블럭 | 입력 : 2022/08/23 [13:56]

올해 24회를 맞는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8월 25일부터 9월 1일까지 8일간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과 문화비축기지에서 열린다. 여러 영화인들의 참여하는 가운데, 지역 여성 영화제들을 조명해보는 토크, 신체와 모성에 관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논의하는 자리 등 흥미로운 행사가 마련되어 있다.

 

상영작도 다양하다. 국내외 여성 감독의 장편영화들 중 경합을 거쳐 선정, 소개하는 ‘발견’ 프로그램 외에도, ‘페미니스트 콜렉티브’, ‘필름 X 젠더’, ‘퀴어 레인보우’ 프로그램 등 다른 곳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작품들이 다수 준비되어 있다. 영화제 프로그램 노트를 작성하면서 먼저 본 작품들 중에서 꼭 추천하고 싶은 영화 다섯 편을 소개한다.

 

▲ <경아의 딸> (김정은 감독, 한국, 2022, 119분)

 

<경아의 딸> (김정은 감독, 한국, 2022, 119분)

영화제 프로그램- 지금 여기 풍경: 수프에 바치는 오마주

상영 일정- 8월 28일 10:00, 8월 30일 19:30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김정은 감독의 장편 데뷔작인 <경아의 딸>은 디지털성범죄의 피해자가 된 경아의 딸, 그리고 경아의 삶에 놓인 사건과 이를 헤쳐가는 과정을 담아낸다. 자신의 삶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는 딸 연수와 자기 서사를 가진 엄마 경아, 현재의 환경을 이겨내기 위해 모녀는 고군분투한다. 특히 경아의 딸인 연수(하윤경 분)의 태도는 현실적이면서도 ‘피해자다움’에 관한 통념을 벗어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 영화를 감상하는 또 하나의 포인트는 바로 ‘노동’이다. 황미요조 프로그래머의 소개처럼, 디지털 시대 여성의 일과 관계에 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만든다. 극중 경아(김정영 분)의 일이 중단되었다가 다시 찾아 나가기 위해 발을 딛는 마지막 모습까지, 그 사이에 일어난 일과 관련된 여러 순간들을 짚어 보면 영화가 단순히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의 서사만 그리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또한 디지털 시대가 지닌 특성 때문에 관계에서도 감정노동을 해야 하는 처지에 있다는 점까지, 영화는 현실 곳곳을 입체적으로 비춘다.

 

프로그램 소개처럼 “남성성의 오래된 작동 방식은 디지털 기술이 개입되면서 더 파괴적인 파급력을 가지게 되었”다. 만연한 디지털 성범죄 속 가해자와 그 가족이 느끼는 압박감을 영화는 생생하게 전달한다. 그 가운데 여성의 노동이 어떻게 다뤄지고 있으며, 노동 안에서 여성은 어떻게 비춰지는지, 다른 가능성은 없는지 고민하면서 작품을 보면 또 다른 감상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 <미싱타는 여자들> (이학래, 김정영 감독, 한국, 2020, 109분)

 

<미싱타는 여자들> (이학래, 김정영 감독, 한국, 2020, 109분)

영화제 프로그램- 지금 여기 풍경: 수프에 바치는 오마주

상영 일정- 8월 27일 16:00, 8월 29일 13:00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일다에서 “평화시장엔 ‘시다 7번’이 아니라 투쟁하는 여성이 있었다”라는 제목의 기사(https://ildaro.com/9254)로 소개된 바 있는 다큐멘터리 영화 <미싱타는 여자들>도 이번 영화제를 통해 만날 수 있다. 청계피복노조 조합원들의 이야기를 통해 1970년대 여성들의 민주 노조 운동을 조명한 영화는 당시 공장의 노동 환경이 얼마나 열악하였고 성차별적이었는지, 그리고 공권력의 가부장성 또한 생생하게 드러낸다.

 

이른바 ‘99투쟁’(1977년 9월 9일, 노동교실 강제 폐쇄에 맞서 농성을 시작한 조합원들을 공권력이 탄압한 사건)으로 불리는 당시의 운동을 기록하는 이 다큐멘터리는 남성 중심의 운동 서사와는 다른 결이다.

 

당시 여성 노동자들의 위치를 지금의 노동 현실과 교차해서 생각해보면, 여전히 여성의 노동은 저평가되고 무시당하고 있다는 점을 떠올리게 된다. 올해 공개된 ‘교차로 프로젝트’(gyocharo.kr)의 내용과 비교해서 봐도 좋을 것 같다. 페미니스트 문화기획자그룹 BOSHU가 진행한 교차로 프로젝트는 여전히 노동 현장 안에서 소외된, 특히 서울과 수도권 외의 지역에서 여성의 저임금, 비계약 노동을 이야기한다. 대전에서 일하는 여섯 명의 중년 여성 노동자의 생애 경로에 관한 인터뷰를 읽을 수 있으며, 노동 시장의 현재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 <그렇고 그런 사이> (김인혜 감독, 한국, 2022, 30분)

 

<그렇고 그런 사이> (김인혜 감독, 한국, 2022, 30분)

영화제 프로그램 - 아시아 단편

상영 일정- 8월 27일 17:00, 8월 29일 19:30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결혼 전까지 쿨한 친구였는데 이제는 새언니가 되었다! 그리고 엄마와 묘하게 마찰을 일으키는가 하면, 갈등은 또 얼렁뚱땅 풀리고는 한다. 묘한 긴장 속에서 희극과 비극이 짧은 시간 안에서 교차하는 이 영화는 단편영화가 줄 수 있는 재미를 잘 살린 작품이다.

 

관계를 대하는 방식에 관해 다양한 제안을 하기도 하고, 현실적이면서도 유쾌하게 풀려 나가는 모습을 보며 관계의 본질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준다.

 

주인공 선지는 결혼 과정에서 갈등을 겪고, 엄마와도 마찰이 있으며, 새언니가 된 친구 진희는 물론 시어머니가 될 뻔한 사람까지… 관계는 답답하다가도 이내 풀린다. 속도가 있는 전개와 흥미로운 양상 속에 빠져들어 웃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나의 관계 속에서 가족과 어떤 방식으로 연대하고 있는지, 혹은 나는 어떤 관계를 상상하며 운명공동체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지 되짚어 보게 된다.

 

▲ <쓰는 일> (유재인 감독, 한국, 2021, 23분)

 

<쓰는 일> (유재인 감독, 한국, 2021, 23분)

영화제 프로그램- 아시아 단편

상영 일정: 8월 27일 17:00, 8월 29일 19:30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주인공 지영은 우체국에서 일하면서 시인을 지망하고 있다. 그래서 열심히 시를 써서 신춘문예에 응모한다. 그러던 중 이미 없어진 주소로 날아온, 예전 우편번호와 주소를 쓰는 노란색 편지 봉투를 받는다. 작품에서 ‘쓰는 일’은 시를 쓰고 편지를 쓰는 일도 해당되지만, 지영이 마음을 쓰는 일도 포함되어 있다.

 

영문 제목이 ‘Return to Sender’인 것은 어쩌면 반송되는 편지를 계속 보내는 이에 관한 힌트일 수도 있지만, 응답 받지 못할 수도 있는 신춘문예에 응모하는 주인공에 관한 힌트일 수도 있다.

 

작품은 굉장히 정적이고 조용하다. 극적인 사건 없이 잔잔하게 전개되는 작품에서 어색함을 느끼는 이도 있겠지만, 정적인 가운데 전달되는 에너지는 결코 작지 않다. 전달될 지 확실하지 않은 상황 속에서도, 어쩌면 그것을 알면서도 글을 써서 보내는 건 그만큼의 믿음과 힘이 있기 때문이다. ‘쓰는 일’은 쉽지 않지만, 많은 품이 드는 작업이지만 그만큼 큰 울림을 주는 일이기도 하다.

 

▲ <왼손> (나스린 모하마드푸르 감독, 이란, 2021, 15분)

 

<왼손> (나스린 모하마드푸르 감독, 이란, 2021, 15분)

영화제 프로그램- 아시아 단편

상영 일정: 8월 28일 13:30, 8월 30일 19:30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15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이 단편 영화는 이란에서 아이를 키우는 여성 노동자가 어떤 환경 속에서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를 빠르게 비춰낸다. 비록 영상은 짧지만, 주인공이 처해 있는 곳의 상황과 감정은 그만큼 임팩트 있게 전달된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며 도축장에서 일하는 주인공은 빚을 갚기 위해 한 쪽 손을 포기할 생각을 한다. 영화 첫 시작부터 그는 한쪽 손을 뒷짐진 채, 미리 예행연습을 한다. 빚에 시달리는 모습부터 혼자 밥을 먹는 모습까지, 어느 한 장면도 눈을 뗄 수 없다. 아니, 떼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면 주인공의 상황에 좀 더 근접하게 다가갈 수 있다.

 

마지막 1분, 긴장 속 갑자기 일어난 사건에 공포와 슬픔, 괴로움, 모든 것이 담겨 있다. 프로그램 노트에 “그 찰나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아니었을까”라고 썼는데, 그만큼 영화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눈을 떼지 않길 권한다.

 

나스린 모하마드푸르 감독은 이란의 여성과 사회에 관해 말해왔으며, 이란 내에서도 조금씩 주목을 받고 있다고 한다. 촬영 기간은 7일, 러닝타임은 15분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는 한 사회가 담겨 있다.

 

[필자 소개] 블럭: 프리랜서 디렉터, 에디터, 칼럼니스트.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국내외 여러 음악에 관하여 국내외 매체에 쓴다. 저서로 『노래하는 페미니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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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ㅈㅅㅇ 2022/08/25 [14:02] 수정 | 삭제
  • 여성영화제 시작이구나. 코로나 때문에 올해는 생각 못하고 있었는데.. 온라인으로 챙겨볼 수 있는 작품들 살펴보려고 해요. 미싱타는 여자들 볼 기회가 있을 때 봐야하는 영화.. 강추입니다!
  • 2022/08/23 [17:33] 수정 | 삭제
  • 단편영화들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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