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에 균열을 낸 여성영화인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주목할 영화 <할리우드의 아이다 루피노>

블럭 | 기사입력 2022/08/24 [12:04]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에 균열을 낸 여성영화인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주목할 영화 <할리우드의 아이다 루피노>

블럭 | 입력 : 2022/08/24 [12:04]

‘미국 스튜디오 시스템’. 1920년대 초에서 1960년대가 찾아오기 전까지 미국 LA 할리우드를 중심으로 구성된 영화 산업의 구조를 이야기한다. 제작과 배급, 상영까지 수직적 구조를 통해 통합되어 만들어진 이 산업 구조는 한동안 규모를 키우며 독과점화 되어가며 성장했다. 하나로 묶인 구조는 결국 소수의 회사가 영화 산업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는 결과를 만들었다.

 

누군가는 그 시기 영화를 ‘명화’라 부르며, 거대하고 안정적인 자본의 확보가 높은 완성도를 가져왔다고 평하지만, 알고 보면 하나가 실패하면 크게 실패하는 구조이기도 하다. 특히 구조가 수직적이기 때문에 권위적인 문화였으며, 소수 자본으로 다양한 영화들이 나오기 힘든 환경이었다. 그 속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절대다수가 남성이었다. 당시 영화 제작 환경에서 배우를 제외하면 여성은 거의 찾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심지어 여성이 원탑 주연인 영화도 없다.

 

▲ 다큐멘터리 영화 <할리우드의 아이다 루피노>(쥘리아 퀴페르베르그, 클라라 퀴페르베르그 감독, 프랑스, 2021년, 54분)

 

노스웨스턴대학교가 미국 영화연구소와 미국의 영화 정보 채널 IMDb의 아카이브를 분석한 내용을 보면 그 심각성을 여실히 알 수 있다. 1910년부터 1920년까지 여성 배우들은 약 40%의 출연진을 구성했다고 한다. 작가는 20% 정도, 제작 부서에서는 12%였고, 감독은 5%였다. 하지만 스튜디오 시스템이 도입된 이후 1930년까지, 여성의 연기 역할은 절반으로 줄었고, 제작과 연출 역할은 거의 0에 가까웠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은 1950년대까지 이어진다.

 

연구팀의 추가적인 데이터 분석에 따르면, 스튜디오 시스템은 소수의 남성 그룹에 의해 전체가 통제되는 것처럼 보였으며, 남성이 남성을 고용하는 양상을 보인다고 데이터 상의 연관성을 짚었다.

 

이러한 영화산업의 구조와 환경에 엄청난 균열을 일으킨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아이다 루피노(Ida Lupino)다. 아이다 루피노는 스튜디오 시스템 시대 속, 정확하게는 그 체제가 균열을 맞이하던 1940년대부터 1960년대 이전까지 할리우드의 유일한 여성 감독이었다.

 

올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페미니스트 콜렉티브’ 프로그램에 초대된 다큐멘터리 영화 <할리우드의 아이다 루피노>에 따르면 여성은 영화인들의 조합에 가입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고 한다. 영화의 영문 제목(Ida Lupino - Gentlemen & Miss Lupino)은 실제로 아이다 루피노가 1950년대에 미국 감독 조합에 가입이 되었을 때, 1,300여명의 남성과 단 한 명의 여성인 아이다 루피노를 칭할 때 저렇게 불렀다고 한다.

 

▲ 다큐멘터리 영화 <할리우드의 아이다 루피노>(쥘리아 퀴페르베르그, 클라라 퀴페르베르그 감독, 프랑스, 2021년, 54분)

 

아이다 루피노 이전, 도로시 아즈너(Dorothy Arzner)가 192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스튜디오 시스템이 견고할 때의 유일한 여성 감독이었고, 아이다 루피노는 기묘하게도 그 위치를 이어 받은 셈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도로시 아즈너의 영화가 자매애(시스터후드), 그리고 여성들이 실제 겪는 삶에 초점을 맞췄다면, 아이다 루피노는 그보다 훨씬 파격적인 소재 선택과 전개로 영화계에 화두를 던졌다는 것이다.

 

과거 아이다 루피노를 연구한 내용 중에는, 그가 자극적인 소재를 택했다는 이유로 저평가하던 시기가 있었다. 아이다 루피노의 영화가 실제로 B급 영화로 분류되었던 장르, 그러니까 복수극이나 느와르, 가족사로 인한 법정극과 같은 문법을 썼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감독으로서 그는 과거의 것을 답습한 적이 없었다.

 

배우로서의 커리어를 보면, 초기 작품에서는 전형적인 여배우의 모습을 보여준다. 대형 스튜디오 소속 배우로서 철저히 이용당했다. 남성 중심의 영화산업 구조 속에서 여성 캐릭터는 타자화되었고, 남성을 유혹하여 곤경에 빠트리는 역할 혹은 남성에게 순종적인 역할이라는 이분법 아래 있거나, 존재감이 없었다. 배우로서 아이다 루피노는 성적으로 대상화된 배역을 거절하거나, 캐릭터의 역할을 두고 싸우기도 했다. 그렇게 투쟁의 과정을 겪는 중에 그는 영화를 공부하기 시작했고, 독립영화사를 세운 뒤 작품을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그는 배우, 감독은 물론 각본, 제작까지 하는, 그야말로 전천후 영화인이 되었다.

 

직접 영화사를 세운 아이다 루피노는 그간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마음껏 꺼내놓는다. 최초의 강간복수극 <아웃레이지>에서는 검열 때문에 ‘강간’이라는 단어조차 사용할 수 없었고. 폭력적인 장면을 묘사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자극적인 장면 하나 없이 주인공인 피해자 여성이 겪는 트라우마를 다루었고, ‘피해자다움’이라는 통념에 관한 화두까지 던진다. 무려 1950년에 나온 작품에서 말이다.

 

▲ 다큐멘터리 영화 <할리우드의 아이다 루피노>(쥘리아 퀴페르베르그, 클라라 퀴페르베르그 감독, 프랑스, 2021년, 54분)

 

1951년에 나온 <거칠게, 빠르게, 아름답게>는 여성이 커리어와 결혼 사이에서 겪는 갈등을 직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주인공의 남자친구는 결혼하면 아내가 은퇴 후 전업주부가 되길 바라고, 주인공의 엄마는 딸이 세계적인 테니스 스타가 되었으면 한다. 그 사이에서 정작 주인공은 모호한 태도를 보이지만, 여성의 커리어와 대척되는 것이 가부장적 삶이라는 구도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시대를 감안하면 파격적인 것이었다.

 

이후 1953년에 만든 히트작 <히치하이커>에서는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지는 않지만, ‘남성성’에 관하여 비틀고 또 질문한다. 느와르 작품이지만 영웅 서사 하나 없는 이 작품은 견고할 것 같은 남성성이 무너지는 모습과 함께, 참전용사라는 인물을 통해 시대에 또 하나의 화두를 던진다. 아이다 루피노의 작품은 거듭 살펴볼수록 사회에 이야기를 던지는 방식이나 영화로서 가지는 흥미가 크다. 다큐멘터리를 보면, 이 시대 거장이라 불리는 마틴 스콜세지 감독도 아이다 루피노에게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할리우드의 아이다 루피노>는 그가 영화사에 남긴 족적과 성과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작품에 담긴 아이다 루피노 개인의 맥락을 함께 보여준다. 그가 감독으로 선보인 작품 중에는 자전적인 요소가 담겨 있는 대목도 있고, 감독과 배우라는 양 쪽의 포지션에서 그가 얼마나 고군분투했는지도 드러난다. 또한 그가 처했던 사회적 환경이 얼마나 남성 중심적이었는지 입체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더 주목하게 된다. 과거 작품들을 비록 일부이지만 자연스러운 화질 및 음성 복원으로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아이다 루피노의 이야기와 업적을 좀 더 생생하게 알고 싶다면, 할리우드 시대의 여성 감독의 발자취에 흥미가 느껴진다면, 직접 영화제에서 감상해보자.

 

-영화 정보: 쥘리아 퀴페르베르그, 클라라 퀴페르베르그 감독, 프랑스, 2021년, 54분

-상영 일정: 8월 26일 16:00, 8월 30일 13:00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필자 소개] 블럭: 프리랜서 디렉터, 에디터, 칼럼니스트.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국내외 여러 음악에 관하여 국내외 매체에 쓴다. 저서로 『노래하는 페미니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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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꽁치 2022/09/01 [14:50] 수정 | 삭제
  • 진짜 짱 멋지심
  • 허스토리 2022/08/25 [17:03] 수정 | 삭제
  • 좋은 정보네요. 나름 영화 공부했는데 왜 아이다 루피노라는 이름을 들러본 적이 없지. 싶어서 찾아봤는데 진짜 그 업적에 비해 정보가 별로 없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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