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탄생한 ‘그들만의 리그’와 95세 야구선수의 커밍아웃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 드라마 시리즈 <그들만의 리그>

박주연 | 기사입력 2022/08/28 [09:35]

재탄생한 ‘그들만의 리그’와 95세 야구선수의 커밍아웃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 드라마 시리즈 <그들만의 리그>

박주연 | 입력 : 2022/08/28 [09:35]

‘여성 영화’ 클래식 중 하나로 꼽히는 영화 <그들만의 리그>(A League of Their Own, 1992, 페니 마샬 감독)는 스포츠 영화로도 유명하다. 1943년부터 1954년까지 운영된 전미 여자 프로야구연맹(AAGPBL)에 소속된 여성 야구팀 중 하나였던 ‘록퍼드 피치스’의 이야기를 다룬 실화 바탕 영화이기도 하다. 지나 데이비스, 마돈나, 로지 오도넬, 톰 행크스 등의 배우들이 출연했고, 상업적으로도 성공한 건 물론 좋은 평가를 받았다. 명작 반열에 올라선 <그들만의 리그>는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영화다. (관련 기사: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야 https://ildaro.com/9137)

 

▲ 드라마 시리즈 <그들만의 리그> 포스터 ©Prime Video

 

그런 <그들만의 리그>가 다시 돌아왔다! 영화가 아니라 8부작 드라마 시리즈로. 실화 바탕의 여자 프로 야구팀 ‘록퍼드 피치스’의 이야기를 담았지만, 새로운 캐릭터들로.

 

두 명의 20대 여성 유대교인이 뉴욕에 살면서 겪는 이야기를 다룬 코미디 시트콤 <브로드 시티>(Broad City)의 제작자이자 주연 배우인 애비 제이콥슨(Abbi Jacobson)과,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이야기를 그린 코미디 드라마 <모차르트 인 더 정글>(Mozart in the Jungle) 제작자인 윌 그래햄(Will Graham)이 함께 제작한 새로운 <그들만의 리그>는 그야말로 새롭다. 동시에 원작이 그랬듯 ‘여성 스포츠’라는 드문 소재를 굉장히 매력적으로 그려냈다.

 

깊어진 유대, 아름다운 관계들

 

드라마 <그들만의 리그>는 카슨(애비 제이콥슨 역)이 기차를 타기 위해 달리는 장면부터 시작된다. 영화에선 도티와 키트 자매가 함께 뛰었지만 드라마에선 카슨 혼자 야구 선수 선발전에 참여하기 위해 집을 떠난다. 그렇게 낯선 도시에서 카슨은 그레타(다르시 카든 역)와 조(멜라니 필드 역)을 만나게 되고, 그들은 모두 ‘록퍼드 피치스’로 선발된다. 각기 다른 곳에서 온, 다른 사연을 가진 여성들이 합숙을 하며 야구를 향한 열정을 불태운다.

 

▲ 드라마 시리즈 <그들만의 리그> 중 맥스와 카슨의 모습 ©Prime Video

 

기본적인 이야기는 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드라마 시리즈 <그들만의 리그>는 길어진 시간만큼 캐릭터 간의 다양한 관계를 좀 더 내밀하게 조명한다.

 

오랜 기간 절친이며 함께 모험과 도전을 즐기는 그레타와 조, 가족 같은 관계로 서로의 든든한 지원자인 맥스와 클랜스, ‘형제애’(스포가 될 수 있기에 설명을 생략한다)을 쌓는 루페와 제스, 경쟁자 혹은 라이벌이면서도 동료가 되어주는 카슨과 맥스 그리고 카슨과 루페. 같은 ‘인종’이니 당연히 어울려야 한다는 예상을 벗어나 삐그덕거리는 루페와 에스티, 응원하지만 서로 다른 꿈을 꾸는 맥스와 그의 엄마 토니, 그리고 우정과 연애를 찐하게 오가는 카슨과 그레타. 이 외에도 시리즈 후반부에 조명되는 맥스와 ‘이모’ 버드의 관계나, 합숙소를 관리하는 보호자 베벌리와 선수들의 관계까지.

 

이들의 관계는 당연히 아름답기만 하지 않다. 때때로 서로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고, 상처도 받는다. 견고해 보이는 의리는 현실의 벽 앞에서 무너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의 관계 속엔 ‘동료’를 찾아가는 여정이 뜨겁게 담겨있다. 스포츠는 경쟁이고 목표는 승리라고 하지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그들만의 리그>는 ‘동료’를 향한 마음을 잃지 않는다. 이 메시지는 작품을 봐야 할 가치 그 자체라고 해도 무방하다.

 

흑인 여성과 퀴어 선수들 이야기가 주요 서사로!

 

영화에선 흑인 선수들이 등장하지 않았다. 실제로 전미 여자 프로야구연맹은 “모든 미국 여성들의 프로 리그”라는 말이 무색하게 인종차별적이었다. 대부분의 선수들이 백인 여성들이었고 라틴계 여성들 중에서도 ‘밝은 피부를 가진’ 이들만 선수로 채용되었다. 흑인 여성은 당연히 배제됐다. 이런 상황이었다 보니 영화에선 흑인 여성이 공을 던져 주는 장면 하나가 나올 뿐이었다. 이제 고인이 된 페니 마샬 감독은 당시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2022년에 나온 드라마는 다를 수밖에 없다. 드라마에선 록퍼드 피치스의 선수들 이야기만큼이나, 야구 선수를 꿈꾸지만 ‘배제된 흑인 여성’인 맥스(샨테 아담스 역)의 이야기를 주요 서사로 다룬다. 단지 맥스라는 흑인 여성 한 명을 추가한 것이 아니라, 맥스와 그의 절친 클랜스, 맥스의 가족과 일터까지 이야기에 포함시켜 1943년 당시 미국 흑인 커뮤니티의 상황도 함께 보여준다.

 

1943년은 ‘분리 정책 시대’(The Segregation Era, 1900-1939)가 끝난 후지만 시민권 운동 시대(Civil Rights Era, 1950–1963)이 일어나기 전으로, 세계 2차 대전으로 어수선하던 때였다. 여전히 흑인을 향한 차별과 배제, 분리가 공공연하게 남아 있던 시기였다.

 

▲ 드라마 시리즈 <그들만의 리그> 중 맥스가 야구 공을 잡고 있는 모습 ©Prime Video

 

맥스 또한 차별과 배제를 겪는다. 야구 선수 선발전에 참가도 못했지만, 야구 선수가 되겠다는 꿈을 저버리지 않은 맥스는 직장 야구팀이라도 들어가 보려고 한다. 하지만 야구팀이 있는 공장은 백인 여성과 흑인 남성까진 채용해도 흑인 여성은 채용하지 않는 곳이다. 야구팀 감독에게 한번만 기회를 달라고 해 보지만, 그는 ‘흑인 여자라서 안 된다’는 말 대신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안 된다며 거절한다. 이런 현실 속에서도 맥스는 <그들만의 리그> 속에서 꿈을 포기하지 않고 도전을 이어나간다.

 

영화에 드러나지 않았던 또 다른 이야기는 퀴어 서사다. 미국에선 ‘소프트볼(야구와 유사하지만, 야구보다 더 큰 공을 사용하며 투수가 공을 언더스로로 던진다) 레즈비언’이라는 말이 있다. 그 정도로 야구/소프트볼과 레즈비언 간의 상관 관계가 있다는 이야기다. 물론 어떤 것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사람의 성적 지향을 단정하는 건 지양해야 할 일이지만, 그동안 야구/소프트볼을 비롯해 많은 스포츠에서 여성 퀴어들의 존재와 역사를 지우거나 숨겨왔다는 사실은 분명히 짚고 가야 한다. 그건 1992년 개봉한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최근 몇 년간 여러 자료 조사와 증언들을 통해 상당수의 전미 여자 프로야구연맹 소속 선수들이 동성 연인과 관계를 맺거나 그들과 평생을 함께 해 왔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넷플릭스에서 제작, 공개된 다큐멘터리 <그들만의 사랑: 테리와 팻의 65년>(A secret love, 2020, 크리스 볼런 감독)의 주인공도 마찬가지다. 테리 도나휴는 1946년부터 페오리아 레드윙스 소속의 포수였던 인기 선수였다. 하지만 이들의 관계는 가족들에게조차 ‘룸메이트’로 인지될 정도로 숨겨져 있었다. 이들은 미국에서 동성 결혼이 법제화 된 후인 2015년 결혼했고, 커밍아웃했다. 이런 경우는 테리 뿐만이 아니었다.

 

▲ 드라마 시리즈 <그들만의 리그> 중 그레타와 카슨의 모습 ©Prime Video

 

새롭게 만들어진 <그들만의 리그>에선 이렇게 숨겨졌던 여성 퀴어 선수들의 이야기를 듬뿍 담아낸다. 이에 대해 일부 영화 팬들이 ‘우리 선수들을 레즈비언으로 만들었다’며 분노하기도 했지만, 이런 반응에 대해 애비 제이콥슨은 크게 개의치 않는다고 답한 바 있다. “그 분노 혹은 두려움은 흑인 캐릭터와 퀴어 캐릭터들을 더한 것에 대해 더 확신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이런 반응이) 바로 왜 소수자 재현이 필요한 지 그 이유죠.”

 

95세 전직 야구 선수의 커밍아웃

 

<그들만의 리그> 배우들은 현실감 있는 연기를 위해 ‘내가 배우인지 야구 선수인지 헷갈릴 정도로’ 야구 연습을 한 걸로 알려졌다. 제작진들 또한 현실에서 있었던 일들을 잘 반영하기 위해 전미 여자 프로야구연맹 소속 선수로 활동했던 선수들의 자문을 받았다. 그 중 한 명이 1948년 페오리아 레드윙스 소속이었던 메이벨 블레어(Maybelle Blair)다. 1927년생으로 현재 만 95세인 메이벨은 <그들만의 리그>가 공개된 올해, 대중적으로 커밍아웃을 하며 또 하나의 장면을 만들어 냈다. 메이벨은 <그들만의 리그> 홍보 행사에도 야구 방망이 모양이 지팡이를 짚고 참여하기도 하며 역사의 산증인으로서의 몫을 톡톡히 해냈다.

 

메이벨의 커밍아웃이 가능했던 건,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당시 드러낼 수 없었던 이야기를 찾고자 한 제작자가 있었기 때문이고, 그들이 모두 퀴어 당사자이기 때문이었다. 애비 제이콥슨은 2018년 메이벨과 처음 만났을 때 “어떻게 이야기를 꺼낼지 망설이다 일단 우리 다 퀴어라고 커밍아웃부터 했다. 그랬더니 메이벨이 한참 있다 ‘사실 나도…’라고 얘길 했다”고 회상했다.

 

그렇게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은 메이벨이 “내 인생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라 표현한 게이 술집에서의 파티 등의 이야기를 <그들만의 리그>를 통해 간접 체험할 수 있다.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차별과 배제의 시간, 그렇지만 기쁨도 존재했던 날들

 

여성, 특히 흑인 여성과 퀴어들에게 1943년은 결코 살기 쉬운 시간이 아니었다. 차별과 배제가 공공연했고 폭력에 노출되기 쉬웠으며 오히려 범죄자로 몰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순간이 불행했던 건 아니다.

 

▲ 드라마 시리즈 <그들만의 리그> 중 록퍼드 피치스 선수들 모습 ©Prime Video

 

누가 뭐래도 꿈을 포기하지 않았고, 도전과 모험을 멈추지 않았고, 답답한 규칙을 부수기도 했고, 경계를 무너뜨리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함께 웃고 사랑하며 그 시간을 즐겼다. 그들은 놀 줄 아는,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들만의 리그>는 그렇게 빛나는 사람들과 순간들을 놓치지 않고 담아낸다. 이 반짝거림을 목격할 수 있다는 게 너무 행복하게 느껴질 정도로.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에 자세히 말할 수 없지만, 영화 <그들만의 리그>의 배우 중 한 명이 드라마에도 등장해 멋진 모습을 뽐낸다. 영화를 좋아했던 팬이라면 그 또한 큰 즐거움일 테다.

 

<그들만의 리그>를 보고 나니, 한국 스포츠에서도 여전히 감춰져 있는 퀴어 선수들의 역사나 존재가 언젠가 드러날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갖게 됐다. 벽장 속 선수들에게 응원을 보내며 그들이 95세가 되기 전에! 커밍아웃을 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다짐도 해본다. 코로나19 여파로 잠시 쉬었던 여성/성소수자 생활체육대회 ‘퀴어여성게임즈’(qwgames2022.org)도 10월에 돌아온다고 한다. 슬슬 운동장을 향한 예열을 시작해야겠다.

 

※ 참고자료

-EW, Abbi Jacobson responds to angry reactions to A League of Their Own: 'Representation matters so much' (Devan Coggan, 2022. 8. 15)

-유튜브 "A League of Their Own" #outfest Q&A with #RosieODonnell #MaybelleBlair & #creators and cast (2022. 7. 19)

-유튜브 'A League of Their Own' Cast On Their Refreshing Reboot | Around the Table | Entertainment Weekly

이 기사 좋아요
  • 도배방지 이미지

  • 밀리 2022/08/30 [21:36] 수정 | 삭제
  • This Used to Be My Playground~ 아직도 ost 여운이 남는 영화인데 재탄생했다니 반갑네요
  • IZ 2022/08/29 [14:54] 수정 | 삭제
  • 그들만의 리그 운좋게 본 적이 있는데, 마지막에 할머니가 된 전직 선수들이 느린 속도로 야구를 하는 모습이 그 어떤 픽션보다 더 강한 울림을 주었어요. 메이벨 블레어 선수와 제작팀이 조우한 이야기는 한층 더 감동적이네요.. 차별도 배제도 겪었지만 기쁨도 있었다.. 엄마의 청춘 시절도 생각 나고.. 영화도 드라마도 다시 보고 싶습니다.
관련기사목록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