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의 코르셋을 벗어난 ‘이상한 여성들’

[극장 앞에서 만나] 영화 <더 브론즈>

신승은 | 기사입력 2022/09/03 [10:33]

윤리의 코르셋을 벗어난 ‘이상한 여성들’

[극장 앞에서 만나] 영화 <더 브론즈>

신승은 | 입력 : 2022/09/03 [10:33]

의사, 경찰, 형사 등 많은 영화 속 역할들이 남성 배우에게 더 많이 주어진다. 비단 긍정적이고 옳은 일을 하는 캐릭터만 그런 것은 아니다. 알콜 중독자, 마약 중독자, 조직폭력배, 살인마 등도 그러하다. 여성은 ‘여성’ 그 자체로 미디어에 등장하기 일쑤며 간혹가다 위의 역할들을 맡더라도 유일한 여성 의사이거나 유일한 여자 살인마이거나 아무튼 여자, 여성이라는 꼬리표가 늘 붙는다. 디폴트가 남성이기 때문이다.

 

‘실패한 재야의 고수’ 캐릭터는 사랑받는다

 

남성들이 전유하는 캐릭터는 이뿐만이 아니다. 오늘 주목할 캐릭터는 바로 ‘실패한 재야의 고수’다. 우리나라에서 백윤식 배우가 많이 하는 역할이다. <싸움의 기술>에서 은둔하고 있는 싸움의 고수로 등장했고, <천하장사 마돈나>에서 의욕 없는 씨름부 코치 역할로 등장했다.

 

이 캐릭터들의 공통점이 있다. 첫째, 한때 잘 나갔다는 것이고, 둘째, 지금은 의욕이 없다는 것이다. 이 캐릭터들의 클리셰는 종종 형사물에도 적용된다. <추격자>의 김윤석 배우가 맡은 역할, <지구를 지켜라>에서 이재용 배우가 맡은 역할이 그러했다. 한때는 믿음직한 형사였지만 불미스러운 일로 좌천된 경우다. 하지만 이들은 어설픈, 그러나 열정적인 초짜 주인공, 혹은 사건을 만나게 되고 다시 열정을 불태우게 된다. 그리고 예전의 카리스마를 보여준다.

 

매력적인 캐릭터이다. 관객은 인물이 다시 예전의 경험과 재능을 되살려 사건을 해결해 나가기를 간곡히 바라게 된다. 뻔한 캐릭터라고 할만큼 영화 속에 많이 등장했지만 그만큼 오래 사랑받은 데에는 이유가 있다. 우리는 인생에서 누구나 실패를 겪지만 그걸 다시 예전처럼 잘 해결해 나가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 캐릭터들은 그 마음을 건드리고 불씨를 지핀다. 캐릭터가 끝내 예전의 그 카리스마를 되찾을 때 관객은 비로소 이들을 더 사랑하게 된다.

 

▲ 영화 <더 브론즈>(The Bronze, 브라이언 버클리 감독, 미국, 2015) 중에서

 

동메달 출신 호프 앤 그레고리

 

이러한 캐릭터 중에 여성은 없을까? 바로 <더 브론즈>(The Bronze, 브라이언 버클리 감독, 미국, 2015) 속 호프 앤 그레고리가 그러하다. 호프는 제목에서 알 수 있다시피 체조 동메달 선수다. 아니 동메달 선수 ‘출신’이다. 당시의 부상으로 인해 지금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백수다. 돈은 어떻게 벌어 충당하는가. 아버지의 돈을 훔쳐서 살아가고 있다. 호프는 태어난 지 5개월 반 만에 엄마를 잃었고 다정한 아버지와 함께 평생을 살아왔다. 하지만 부상 이후 항상 화가 나 있는 호프는 아버지에게도 화를 내고 욕을 일삼는다.

 

영화는 어린 시절 호프의 홈비디오로 시작한다. 영상 속 등장인물은 호프와 아버지다. 아버지는 어린 시절부터 호프의 재능을 알아보고 체조를 시켰고 호프는 곧잘 따라 했다. 이 홈비디오에는 의문점이 있다. 도대체 누가 아버지와 호프를 촬영한 것일까. 영화 내내 아버지의 친구 한 명 등장하지 않는데 과연 누가 촬영을 해준 것일까. 이 의문의 홈비디오는 ‘홈비디오’로서의 역할보다는 관객이 어린 시절 호프를 직접 바라보게 한다. 이 장면을 찍을 수 있고,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버지도, 호프도 아닌 관객뿐이다. 이 비호감의 캐릭터를 관객이 처음부터 친밀하게 느낄 수 있는 출발점을 연출은 만들고 시작한다.

 

영상 속 호프가 점점 자라고 화면은 텔레비전 화면으로 바뀐다. 올림픽 체조 부문 중계 장면이다. 호프는 한 종목을 치르다 부상을 입지만 끝까지 마지막 종목을 강행한다. 그래서 다시는 체조를 못하게 되었지만 호프는 미국의 영웅이 되었다. 다음 컷은 이 텔레비전 영상을 보고 있는 현재의 호프다. 호프는 그 영상을 보며 당시 땄던 동메달을 목을 걸고 자위를 하고 있다. 자신의 한창때의 모습을 보며 자위하는 여성 캐릭터로 시작하는 영화라니, 시작부터 그간 영화에서 본 적 없는 여성 캐릭터의 면모를 보여준다. 자위를 마친 호프는 트로피로 마약으로 추정되는 알약을 빻는다. 그리고 코로 흡입하고, 아침 메뉴를 묻는 아버지에게 험상궂게 소리를 지른다.

 

▲ 영화 <더 브론즈>(The Bronze, 브라이언 버클리 감독, 미국, 2015) 포스터

 

호프는 자라온 동네에서 살고 있다. ‘동메달 출신 호프 앤 그레고리’의 고향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는 곳, 그런 호프에게 공짜로 피자를 내어주는 곳, 심지어 공짜로 마약을 주기까지 하는 이 동네에서 호프는 항상 유니폼을 입고 당시의 앞머리를 고수하며 살고 있다. 한마디로 과거에 머물러 있는 셈이다.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채 과거의 영광에 박혀있다.

 

그런 호프의 전 코치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호프에게 유서를 남긴다. 자신이 코칭 중인 제자를 맡아 코치를 할 경우 50만 달러를 물려주겠다는 파격 제안이다. 아버지가 용돈도 주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더 이상 돈도 훔치지 못하게 자물쇠로 차를 묶어두었다. 호프는 별 수없이 제안을 받아들인다.

 

이상한 여자 캐릭터가 필요해–박화영, 양미숙, 호프

 

호프에게 동메달만큼이나 빼놓을 수 없는 특징이 있다. 바로 음담패설과 욕이다. 호프는 욕과 음란한 단어들을 입에 달고 산다. <박화영>(이환 감독, 2018) 속 ‘박화영’처럼 입이 걸걸하다. 박화영은 불량 청소년으로, 집을 나와 자신만의 공간에서 술, 담배, 욕과 함께 살아간다. 그렇게 살아가게 된 사정이라는 것은 영화 속에서 딱히 설명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박화영은 청소년임에도 연민의 대상보다는 위험한 대상으로 인지된다. 후반부에 갈수록 박화영의 외로움이 드러나면서 관객은 이입을 하게 되지만, 영화 초반 박화영은 비호감 그 자체다.

 

호프 또한 그러하다. 호프는 자살한 코치의 제안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역시나 불성실하게 이행한다. 제자에게 식단과는 상관없는 고칼로리 패스트푸드들을 먹이고 남자친구와 성행위를 하라며 부추기고 몰래 마약까지 먹인다. 정말 이상하고 호감이 가기 어려운 캐릭터다.

 

비호감 여성 캐릭터로 출발하는 명작 <미쓰 홍당무>(이경미 감독, 2008)에서는 양미숙이 등장한다. 양미숙은 유부남 동료 교사의 스토커다. 자격지심과 망상에 시달리고 있다. 툭하면 홍당무처럼 빨개지는 얼굴은 그의 트레이드마크다. 그는 스토커 짓을 이어가기 위해 유부남 교사의 딸까지 끌어들이는 행동을 한다.

 

▲ 영화 <미쓰 홍당무>(이경미 감독, 2008) 중에서

 

하지만 영화 끝에서 우리는 이 세 주인공을 모두 이해하게 된다. 이 세 주인공이 윤리적으로 옳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윤리의 코르셋을 벗어난 이상한 여자 캐릭터가 더 많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세상엔 착한 여자, 예쁜 여자, 똑똑한 여자, 성공한 여자도 많지만 욕하고 자위하고 자격지심 있는 여자도 충분히 많다. 여자를 납작하게 그리지 않는 방법 중 하나를 감독들은 택했다. 비호감 주인공으로 서사를 끌고 나가기는 쉽지 않지만 세상에는 호감 가는, 친절한 여자만 있나? 박화영, 양미숙 그리고 호프 같은 여자도 존재한다.

 

호프가 기존 여성 캐릭터와 또 다른 점은 바로 잠자리 경험이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에 대해 쉽게 말하며 쉽게 잔다. 여성의 성관계를 불가침의 영역처럼 그리던 영화들과는 정확히 반대다. 이 영화에서는 오히려 호프의 상대 남성 캐릭터인 벤이 순결의 상징으로 그려진다. 벤은 혼전순결주의자이고 호프와 키스를 할 때도 자꾸만 아래로 내려가는 호프의 손을 저지한다. 미디어에서 보통 남자는 조르고 여자는 거절하는 방식으로 남녀의 성관계를 그리지만 <더 브론즈>의 세계에서는 뒤집힌다. 호프는 조르고 벤은 막는다. 그리고 호프는 술김에 다른 남자와 성관계를 하기까지 한다. 이런 막무가내 호프는 영화 속에서 성장을 한다. 벤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하고 진정한 코치로 거듭난다.

 

또 다른 코르셋과 호프의 성장

 

여자 체조 선수에게는 또 다른 코르셋이 작용한다. 마른 몸은 물론이며 가슴이 나와서는 안 된다. 가슴에는 붕대를 감아야 한다. 호프는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고서도 계속 가슴에 붕대를 감고 다닌다. 하지만 호프는 선수가 아닌 코치가 되어가며 붕대를 벗는다. 그리고 포커스를 받지 않는 자리에 있는 법을 깨우친다. 하지만 영화는 그런 호프에게 포커스를 맞춘다. 제자인 매기가 올림픽에서 경기를 하는 씬이 있다. 카메라는 고속으로 아주 느리게 호프를 찍는다. 처음에는 아주 멀리서 찍어 호프가 아주 작게 보인다. 경기장은 크게 보이고 매기의 움직임이 카메라 앞을 왔다 갔다 한다. 하지만 포커스는 꿋꿋이 작은 호프에게 맞춰져 있다. 그리고 카메라는 다가간다. 매기가 아닌 호프에게 말이다.

 

카메라가 뒤로 물러난 사람들을 잡는 건 이 순간만이 아니다. 매기의 경쟁자가 매기의 활약으로 낮은 순위를 받게 되고 매기의 인터뷰 영상이 나온다. 매기의 경쟁자는 뒤편에 서서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다. 카메라는 그런 어색한 웃음을 놓치지 않는다. 텔레비전 화면을 찍은 쇼트여서 화질이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과감히 들어가 찍는다. 물러난 사람들의 아름다움을, 동메달의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는다.

 

▲ 영화 <더 브론즈>(The Bronze, 브라이언 버클리 감독, 미국, 2015) 중에서

 

영화는 물러날 줄 아는 자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듯하지만 그 표면 아래에는 괴상한 호프가 존재한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호프의 캐릭터는 역설적이게도 어디에는 꼭 있을 것만 같다. 욕 잘하고, 성욕 많고, 잠자리 많이 하고, 실패한 여자는 왜 있으면 안 되는가? 납작한 여성 캐릭터를 반복해온 영화들의 잔잔한 호수에 돌 하나를 던지는 영화다.

 

현실의 여성이 착함과 조신함, 친절함을 강요받는 것처럼 영화 속 주인공 캐릭터들도 어쩌면 그래 왔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런 캐릭터들은 단숨에 비호감으로 점철된다. 하지만 호프를 보라. 이경미 감독의 영화들 속 여성들을 보라. 여성은 다양하고 여성 캐릭터 또한 그러할 수 있다. 더 많은 이상한 여성 캐릭터를 원한다. 어딘가 미쳐있고 나쁘지만 끝내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아니 때로는 이해조차 할 수 없는 다양한 캐릭터들이 나오길 바란다. 수많은 이상한 남성들이 스크린을 장악해오고 그것이 연기력의 절정인 양 평가받았던 것처럼 말이다. 괴상한 여자들이 괴상한 세상을 구할지도 모른다.

 

[필자 소개] 신승은: 싱어송라이터이자 영화감독. 1집 앨범 [넌 별로 날 안 좋아해](2016), 2집 앨범 [사랑의 경로](2019)를 발매했으며 단편영화 <마더 인 로>(Mother-in-law, 2019), <프론트맨>(Frontman, 2020) 등을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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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둘리 2022/11/22 [23:29] 수정 | 삭제
  • <더 브론즈> 포스터가 너무 마음에 든다. 저 얼굴이야 말로 띠꺼운 표정의 본보기! ㅋㅋ 여성 캐릭터가 아직도 전형적인 테두리에 갇혀있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공감이 많이 가는 글이었습니다.
  • 초록 2022/09/09 [10:16] 수정 | 삭제
  • 요즘 여성들만 나오는 예능들이 유행을 하면서, 최근엔 중년 여자배우들이 나오는 여행 예능을 우연히 보게 되었어요. 제 마음속에서조차 낯선 기분이 들더군요… 남자배우의 ‘나이듦’은 많이 노출되고 익숙하지만, 여성은 나이듦과 함께 스크린에서도 보여지지 않게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느 순간은 그런 장면들을 보아도 낯선 기분이 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 NY 2022/09/04 [12:35] 수정 | 삭제
  • 비호감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삼아서 작품을 끌고 가기는 쉽지 않은 일인 것 같아요. 게다가 이쁘거나 잘생기지도 않다면.. 코미디를 제외하곤 어렵겠죠. 하지만 그래서 더 명작이라며, 잘생기지도 않고 젊지도 않고 성격도 안좋은 남자 캐릭터들이 주인공인 작품이 얼마나 많았던가... 여자 원탑 주인공인 영화 자체가 귀할 정도인데, 진짜 갈 길 멀었고. 판이 바뀌었음 좋겠네요.
  • 메로나 2022/09/03 [14:49] 수정 | 삭제
  • 맞아맞아 재야의고수 완전 남자캐릭터 차지임... 여성캐릭터가 훨씬 더 다양해져야 함을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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