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대 시절 모국을 떠나, 한국에 와서 겪은 일

[이주 배경 청년의 목소리] ‘중도입국자’로서의 삶

Tae | 기사입력 2022/09/04 [20:26]

십대 시절 모국을 떠나, 한국에 와서 겪은 일

[이주 배경 청년의 목소리] ‘중도입국자’로서의 삶

Tae | 입력 : 2022/09/04 [20:26]

※국제결혼 가정이나 이주민 가정에서 태어나 성장한 청(소)년들, 아동 청소년 시기에 중도 입국한 청년 등 다양한 이주 배경을 가진 청년들이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 사회에서 좀처럼 가시화되지 않고 있습니다. 청년 담론 안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이주 배경 청년 당사자들의 시선과 목소리를 직접 들어봅니다. [편집자 주]

 

나는 열일곱 살에 한국으로 와서 귀화를 한 청년이다. 나의 부모는 한국인이 아니었고, 나는 태어나 학창 시절을 보내는 동안 내가 한국에 와서 살게 될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 최근에 동생이랑 중랑천을 따라 산책을 하고 찍은 사진이다.   ©Tae

 

열입곱, 예기치 않은 한국으로의 이주

 

내가 열세 살 무렵, 어머니는 아버지와 이혼을 하고 한국인 남성과 재혼을 하셨다. 어머니는 한국으로 가서 가정을 꾸렸고, 나는 당시 외할머니의 돌봄을 받으며 어머니와는 4, 5년가량 떨어져 지내게 되었다. 어머니와는 가끔 채팅어플로 영상통화를 하고, 일 년에 한 번씩 돌아오실 때 잠깐잠깐 만났다.

 

방학이 되면 내가 한국으로 가서 잠시 생활하다가 모국으로 돌아오곤 했다. 사실 두 나라를 왔다 갔다 하면서 나는 좀처럼 마음을 잡기가 힘들었다. 그렇지만 새아버지에게 ‘아빠’라는 호칭으로 부르면서, 어머니의 제 2의 선택이 부디 행복하기를 기원했다.

 

잠깐 생활을 하면서 본 새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잘 대해주는 것처럼 보였다. 새벽에 어머니가 김밥과 간식을 준비해주시고, 새아버지가 운전을 하여 가족들이 같이 바다를 보러 간 것이 생각난다, 어머니가 다문화가정의 한국생활 문화체험 프로그램을 신청해서, 동생들과 같이 구경한 것도 기억이 난다.

 

나는 모국에서 직업학교에 다녔고, 요리를 배웠다. 솔직히 한국에 방학 때 잠깐 놀러오는 것은 좋았다. 내가 사는 곳보다 도로가 깔끔하고 인터넷이 빠르다는, 단지 그 이유로 말이다. 하지만 한국에는 친구도 없고, 어디를 가더라고 낯설고, 내가 왜 여기에 와 있는지 이유도 잘 몰랐다.

 

그러다가 열일곱 살 방학 때 한국에 왔을 때, 이제 방학도 끝나갈 때가 되어서 내가 모국으로 언제 돌아가는지 일정을 묻자, 어머니는 그곳엔 나를 봐줄 사람이 없다면서 다시 보내주지 않으셨다. 예기치 않게 낯선 한국 땅에 머물게 된 나는 매일 인터넷으로 친구들과 만나 게임을 하고 채팅을 하며 허송세월했다.

 

당시는 하루라도 빨리 돈을 모아서 모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사회 경험이 없고 십대인 나는 그저 게임폐인급으로 하루 14시간 게임만 하면서 살았다. 반항도 많이 했다. 어머니도 그런 나 때문에 많이 힘들어 하셨다. 한 번은 새아버지가 ‘매일 게임만 하면 어떻게 하니? 무엇이든 해야 할 것 아니냐’ 등의 말을 했는데, 틀린 얘기가 아니란 걸 알았지만 나의 정체성, 한국에서의 생활, 모든 것이 헷갈렸던 나는 방향을 잡지 못한 채 계속 스스로를 원망하고 어머니를 원망했다.

 

하루는 어머니의 잔소리를 듣다가 너무 답답하여 ‘어머니의 사랑 때문에 왜 내가 희생해야 하는지…?’ 등의 상처를 주는 말을 하고 말았다. 그 말을 듣고 어머니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어머니를 원망한다는 말을 내뱉고 난 이후, 집에서 나를 터치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나의 말이 어머니의 마음에 얼마나 큰 상처가 됐을까 후회가 밀려온다.

 

하고 싶은 일도, 할 수 있는 일도 없는

 

어린 시절 나는 활발하고 유쾌한 아이였다. 그런 성격이 이곳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을 닫게 되고 점점 힘들어졌다. 밥도 제때 안 챙겨 먹고, 외출도 거의 하지 않았다. 어머니와 새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동생의 어린이집 등하원을 시키는 게 외출의 전부였다. 폐인처럼 생활을 하다 보니, 마른 비만에 긴 머리카락에 잘 씻지도 않아서 거울 앞에 서면 거지가 따로 없었다.

 

사실 나는 모국에 있을 때 한국어를 조금 배워서 어느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막상 실전에서 소통을 하려니 외래어가 반인 한국어로 대화를 하는 데에 지장이 많았다. 한국어를 배우는 일이 시급했기 때문에, 어머니는 본인이 다니는 한국어 교실에 나를 데리고 가셨다. 그러나 청소년들이 공부하는 곳은 아니었다. 선생님께서 단어를 던져주면서 문장을 지으라고 하면 항상 나오는 말이 ‘시어머님’, ‘남편’, ‘자녀’와 같은 단어였다. 나에겐 너무 낯선 것이었고, 마치 내가 아주머니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동년배가 한 명도 없는 그곳에서 나는 수업 시간 내내 컴퓨터 게임만 열심히 했고, 결국 한국어 교실을 그만두게 되었다.

 

한국에 와서 1년의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나는 여전히 모국의 친구들과 인터넷으로 만나 게임을 하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한 지인이 일하는 곳으로 일자리를 소개해주시겠다며, ‘가서 면접을 보면 좋겠다’고 하셨다. 거절하기 어려워서 면접을 보겠다 했지만, 첫 면접 자리가 막막하기만 했다. 나는 한국의 문화도 모르고, 면접 준비에 대해서는 더더욱 몰랐다. 내 옆에는 어머니와 새아버지뿐인데, 그 분들에게 묻기도 싫었다.

 

당시 나의 마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혼란했다. 면접을 어떻게 봐야 하고, 만약 합격하면 또 어떻게 직장생활을 해야 하지? 앞으로 한국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지? 나의 정체성도 혼란하고, 내 마음을 이해해주는 사람은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런 목표도 없이 돈을 버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하는 생각도 했다. 어머니의 잔소리에 마지못해 면접을 수락하였지만, 면접 결과 불합격했고 속으로 은근히 기뻤다.

 

내가 한국 생활에 전혀 적응을 못하고 너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어머니가 잠깐 모국에 보내주셨다. 고향에 가니, 친구들은 오히려 잘 사는 한국으로 간 나를 부러워했다.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며칠의 만남이지만, 내가 본 친구들의 모습은 학교를 졸업한 이후 모두 많이 성장해 있었다. 나만 정체되어있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살던 곳에서는 대학에 가지 않아도 요리학교를 나오면 요리사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졸업장만 가지고 한국에서는 취직을 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사실 나는 한국에서 하고 싶은 일도 없고, 할 수 있는 일도 없다는 느낌이었다. 모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어머니의 이혼…우리는 살아남아야 했다

 

그러나 내가 다시 한국으로 와서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가정에 큰 변화가 생겼고, 나의 삶도 큰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어머니가 새아버지의 알코올중독과 가정폭력을 견디다 못해 이혼을 한 것이다.

 

잠시 한국에 왔다 갔다 했던 어린 시절에는 잘 몰랐지만, 내 눈에 비친 어머니의 결혼 생활은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한국에 와서 같은 집에 살다 보니, 정말 보기 싫은 장면들을 보게 되었다. 아버지라는 사람은 매일 어머니가 차려준 밥상을 받으며 소주를 마셨고, 텔레비전을 보다가 자빠져 자곤 했다. 그런 사람을 ‘아빠’라고 부르는 것에 나는 큰 부담감을 느꼈다. 게다가 술을 마시면 끝도 없이 이야기를 늘어놓았고, 어머니는 그 얘길 밤새 들어주어야 했다. 지친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도 당시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어느 날 밤, 새아버지라는 인간은 어머니와 나를 보고 ‘짐 싸서 집에서 꺼지라’며 쫓아냈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머니는 맞벌이를 하면서도 남편의 밥상을 차려주고 나와 동생까지 보살펴주시는데, 그놈은 뭐가 잘났다고 큰소리를 지르며 야밤에 아내를 쫓아내는지! 아마 무능한 나 때문에 ‘괜히 입 벌리는 식구 하나’ 생긴 게 못마땅했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아무리 내가 밉더라도, 아내가 가족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면 집에서 쫓아내는 행동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주여성이 혼자서 아이 둘을 키우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안다면, 오죽했으면 어머니가 이혼을 했을지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어머니의 이혼 과정에 대해 상세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동생의 양육권을 두고 엄청나게 싸웠던 것은 알고 있다. 최근까지도 그 남자가 우리 집으로 찾아와서 동생을 내놓으라며 문을 부수려고 해서, 경찰에 신고를 한 적도 있다.

 

어머니는 아는 지인의 집에서 머무르다가, 어렵사리 살 곳을 구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어머니를 도와야 한다는 생각에, 식당 아르바이트부터 경제활동을 시작했다.

 

▲ 아동기나 청소년기에 자신이 태어나 자란 곳을 떠나 한국으로 이주한 ‘중도입국자’의 삶은 정체성 혼란과 소통의 어려움, 문화적 이질감, 교육제도의 차이 등 삶의 전망을 그리기 어려워 개인이 넘어야 할 벽이 너무 높고, 많다. (일러스트 제작: 두두사띠)

 

상사의 ‘갑질’과 가혹행위를 겪으며

 

한국에 와서 매일 집에서 게임만 하다가, 밖으로 나와서 모르는 사람들이랑 일주일 내내 지내는 게 쉽지가 않았다. 게다가 나는 재료 이름부터 조리과정까지 하나도 아는 게 없었다. 아르바이트하면서 코피도 여러 번 흘렸고, 상사의 갈굼으로 몇 번이나 울었는지 셀 수도 없다.

 

내가 일하던 식당에 부점장으로 있던 사람은 파인애플이라는 한국식 영어 발음을 내가 못 알아들었다는 이유로, 반팔을 입은 상태에 항시 3도 이하로 내려가 있는 워크인냉장고에 들어가서 모든 재료 이름을 외울 때까지 나오지 말라고 시켰다. 나중에 배달 일을 하는 큰형들이 그 사실을 알고 나를 냉장고에서 꺼내주었고 부점장에게 화를 냈는데, 지금 생각하면 진짜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그 부점장은 다른 사람들과는 친하게 지냈는데, 유독 나에게만큼은 엄격하게 대하고 심하게 괴롭혔다. 그러면서 항상 ‘우리 언제 일적인 얘기 안 하고 친하게 지낼 수 있겠냐’는 식의 말을 하곤 했는데, 일종의 가스라이팅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너랑 친하게 지내고 싶은데, 네가 일을 하도 못 해서 갈구는 거다’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물론 세상에는 악인만 있지는 않다. 한국 생활이 서툰 나를 걱정해서 도움을 준 분들도 많았다. 그러나 그곳을 그만두고 다른 곳에 이직을 하고, 또 몇 곳을 다녀보면서 내린 결론은, 어디를 가도 상사의 갑질을 피할 수 없고 직원들과의 관계도 힘들다는 것이었다.

 

어쩌다가 뒤늦게, 근무를 하면서 대학을 다닐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걸 알게 되어서, 모국에서 받은 졸업장 등 서류 공증과 인증을 받아와서 산업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일상을 보냈다. 하지만 그 와중에 불경기를 이유로 회사가 인력을 감원하는 바람에, 사장이 자신의 지인들만 남겨놓고 나머지를 해고를 해버렸다. 나도 그 중 하나였다.

 

그래도 이왕 시작한 김에 대학 과정을 끝내야겠다는 생각에, 각종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산업대학교를 무사히 졸업하였다. 가족들 모두 응원해주었고, 특히 어머니가 무척이나 기뻐하셨다.

 

지금 나는 직장에 다니고 있고, 투잡으로 배달 일도 하면서 어머니와 같이 우리 가정을 꾸려나가고 있다. 사회생활에서 받는 스트레스는 웨이트 운동을 하면서 해소한다. 이제 나는 한국에서 어떻게 하면 나의 자리를 잡을 수 있을지 고민하며 노력해가고 있다.

 

‘중도입국자’에게 먹이를 던져달라는 게 아니다

 

자신이 태어나 자란 곳을 떠나서, 아동기나 청소년기에 다른 국가로 이주해서 살아가는 나와 같은 사람을 ‘중도입국자’라고 부른다. 내 주변이나, 가끔 언론을 통해서 중도입국한 청소년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올라서 무척이나 공감이 간다. 사실 한국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례들이 대부분인데, 남들은 철이 덜 들었다는 시선으로 쉽게 보겠지만 나는 그 힘듦을 겪어보았기에 남의 일 같지 않고 너무나 안타까울 뿐이다.

 

중도입국 청소년을 지원하는 복지시설이나 한국문화체험 프로그램, 심리상담 등이 있다고는 하지만 스스로 알아보고 찾아보지 않는 이상 접근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나는 그러한 방식의 지원이 진짜 얼마나 도움이 되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적절한 표현인지 모르겠으나, 때로는 중도입국자와 같은 이주 배경 청소년들에 대한 정책이 마치 먹이를 던져주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것은 스스로 먹이를 찾아 먹을 수 있는, 즉 성장을 할 수 있는 정책이다.

 

무엇보다 한국 사회가 돈을 쓰는 문제가 아니라, 사람을 들여다보고 우리의 삶과 이야기에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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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좀 뜬금없지만 2022/09/07 [15:25] 수정 | 삭제
  • 이분 모국에서의 전공을 살려서 현지 음식을 만드는 요리사로, 한국에서 식당 개업까지 하게 되시면 좋겠다.
  • 사하라 2022/09/06 [18:53] 수정 | 삭제
  • 이주민을 돕던 일을 하던 사람으로서 글을 보며 가슴은 아픈데 마땅한 방법이 없는 것 같아서 가슴이 먹먹하네요. 지금 한국 사회의 구조라면, 신청주의를 바꿀 수도 없고, 사람을 들여다보기에는 봐야할 서류와 대응해야할 지도점검도 많고.. 그래도 2013년보다, 2020년보다 조금씩 관심을 갖는다는 말이 위로가 될지 모르겠어요.
  • comme 2022/09/06 [11:50] 수정 | 삭제
  • 마지막 문장을 읽으니 큰 여운이 남네요. 돈 쓰는 문제가 아니라 사람을 들여다보라는 얘기.. 사실 지금 소외되어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해당하는 얘기가 아닐까 싶어요.
  • 독자 2022/09/05 [19:56] 수정 | 삭제
  • 저도 중도입국자에 대해 잘 몰라서 찾아봤더니, 중도입국 청소년들에 대한 통계도 없는 현실이라고 하네요. 3만 명은 넘을 거라는 뉴스도 봤습니다. 3만이 적은 수도 아닌데 너무 비가시화되었던 것 같아요. 청년이 되어서 직접 자신이 성장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분이 있다는 거 자체가 고마운 일이란 생각도 들고요.. 기사를 주위에 많이 퍼 나르겠습니다.
  • 지후 2022/09/05 [15:38] 수정 | 삭제
  • "아내가 가족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면 집에서 쫓아내는 행동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공감합니다. 국경을 건너 맞이한 아내를 어떻게 대우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네요. 이혼 과정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안 봐도 상상이 가네요. 싱글맘으로 한국에서 살아가기가 쉽지 않으시겠지만, 어머니가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고 이 사회의 일원으로 행복하고 당당한 삶을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 2022/09/05 [12:34] 수정 | 삭제
  • 상사의 갑질은 형사고발 감이네요. 왜 약자를 더 괴롭히는지.. 그런 폭력성은 각개전투로 고발하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는지, 한두명의 얘기가 아닐 것 같아서 더 무겁네요. 안타까운 마음으로 읽었어요. 중도입국자라는 말도 처음 알게된 것이 민망하네요. 더 관심을 가질게요. 정말 험하고 막막한 시간 거쳐온 것이 대단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글쓴 분의 앞으로의 인생 길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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