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어공주가 나와 같아!” 나와 같은 누군가

[이주 배경 청년의 목소리] 한국에 온 이주민, 난민들과 만나며(上)

강슬기 | 기사입력 2022/10/12 [10:45]

“인어공주가 나와 같아!” 나와 같은 누군가

[이주 배경 청년의 목소리] 한국에 온 이주민, 난민들과 만나며(上)

강슬기 | 입력 : 2022/10/12 [10:45]

※국제결혼 가정이나 이주민 가정에서 태어나 성장한 청(소)년들, 아동 청소년 시기에 중도 입국한 청년 등 다양한 이주 배경을 가진 청년들이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 사회에서 좀처럼 가시화되지 않고 있습니다. 청년 담론 안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이주 배경 청년 당사자들의 시선과 목소리를 직접 들어봅니다.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편집자 주]

 

디즈니 실사 애니메이션 ‘인어공주’ 캐스팅 논란

 

지난 9월 9일 디즈니 실사 애니메이션 ‘인어공주’의 트레일러 영상이 공개되었다. 애니메이션 ‘인어공주’는 캐스팅 단계부터 뜨거운 화제였다. 덴마크 원작 동화의 주인공을 흑인 배우로 캐스팅했다는 디즈니의 결정에 ‘사상 최초의 아프리카계 인어공주’라며 정치적 올바름이 화두가 되었고, ‘백인 인어공주의 원작을 훼손’했다는 주장과 함께 흑인 인어공주에 반발하며 보이콧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3년 전에 이미 인어공주 캐스팅에 대한 논란이 일었을 때, 영화 제작사인 디즈니 측은 이렇게 일침을 놓았다. “덴마크 ‘사람’이 흑인일 수 있으니까 덴마크 ‘인어’도 흑인일 수 있다.” 또한 원작 애니메이션의 ‘흰 피부에 빨간 머리’ 인어공주 아리엘의 이미지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을 반박하여, “흑인인 덴마크 사람과 인어가 ‘유전적으로’ 빨간 머리를 갖는 것도 가능하다.”라고 밝혔다.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인어공주는 백인의 자리도, 흑인의 자리도 누구에게만 허락되는 자리가 아니라, 누구나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아쉬움은 남는다. 왜 인어공주 이야기는 언제나 덴마크 안데르센의 인어공주만 기억되는 것일까? 세계 곳곳에 인어 전설이 있다. 한국에도 ‘동백섬 인어 설화’, ‘장봉도 인어 설화’, ‘비구니 낭간 설화’ 등이 전해지고 있다. 아프리카 신화에도 1000년 전 서아프리카에서 바다의 여신으로 불리며 인어로 알려진 ‘예마야’가 있다. 애초에 단 하나, 덴마크의 인어공주 이야기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인어공주 이야기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 인어공주도, 인어의 서사도 다양하다.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일러스트 제작: 두두사띠

 

이미 처음부터 백인의 캐릭터로 자리 잡은 역할에 흑인 배우로 대체함으로써, 인어공주 이야기를 재창조했고 인종과 편견을 넘어섰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백인의 자리를 흑인‘도’ 채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진정으로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일까?

 

영화는 2023년 5월에 개봉될 예정이라고 하는데, 이번에 공개된 영상으로 인해 3년 전에 일어난 캐스팅 논란이 재점화되었다. 애니메이션과 관련한 기사들과 댓글들이 터져 나오고, 심지어 한 트위터리언은 영상 속 배우의 모습을 인공지능(AI) 기술을 통해 백인의 외모로 바꿨다가 인종차별적인 영상이라며 논란을 빚었다.

 

이러한 소식들 속에서 우연히 29초짜리 인어공주와 관련한 틱톡 영상을 접하게 되었다. 1분도 안 되는 짧은 영상이었지만 매우 강하게, 그리고 눈물 나게 뇌리에 박혔다. 영상은 인어공주 트레일러를 본 흑인 아동, 청소년들의 반응을 모아 편집한 내용이었다. 아이들은 제각각 이렇게 외쳤다.

 

“I think she is brown.”(그녀의 피부가 갈색인 것 같아요)

“That is Ariel.”(저 사람이 아리엘이에요)

“She’s a black girl!”(그녀는 흑인 소녀에요!)

“I’m crying.”(눈물이 나요)

“She’s black!”(아리엘이 흑인이에요!)

 

트레일러 속 인어공주 역을 맡은 배우를 보고 아이들은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아이들의 외침 속에서 가장 기억 남는 말이 영상 마지막에 나오는 소녀의 외침이었다.

 

“She’s like me!”(그녀는 나와 같아!)

 

▲ 디즈니 실사 애니메이션 ‘인어공주’ 트레일러 영상을 본 흑인 아동, 청소년들의 반응을 모은 틱톡 영상에서 캡쳐. 출처: https://tiktok.com/@armlina/video/7142550172550073606

 

스물아홉의 슬기가 만난 여덟 살 친구 설이

 

그 외침을 듣자마자, 내가 지금 활동하고 있는 이주민센터 의정부EXODUS에서 2015년에 만난 8살 설이(가명)가 떠올랐다. 설이의 이야기를 하기 전에 내 이야기를 먼저 하자면, 나는 1986년 한국에서 이주노동자의 딸로 태어났다. 2005년에 대학교 진학을 위해 필리핀에 유학생으로 이주했고, 2010년에는 지역개발사업을 위해 남아공에 이주노동자로 파견되었다. 그리고 2014년부터 현재까지 한국에서 이주민과 난민을 직접 지원하는 일을 하고 있다.

 

나는 아버지가 필리핀 출신이고, 어머니가 한국 출신이다. 아버지는 내가 중학생 때 귀화를 해서 이제는 한국 국적을 갖고 있다. 나와 반대로 설이는 어머니가 필리핀 출신이고 아버지가 한국 출신이다. 설이의 어머니가 상담이 필요해 내가 일하는 이주민센터를 방문했고, 어머니를 따라온 설이를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센터 근처로 이사를 오게 된 설이는 학교 수업이 끝나면 꼭 센터에 들려서 놀다가 집에 갔다. 그렇게 설이와 자주 만나게 되었고, 설이는 나를 좋아해주고 매우 잘 따랐다.

 

어느 날 설이는 나에게 ‘학교 친구들 중에서 자신이 비행기를 가장 많이 타본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다른 사람이 들으면 한 초등학생의 자랑거리 또는 특별하지 않은 이야기로 들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설이의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고, 너무나도 신이 났다.

 

내가 딱 그랬기 때문이다. 내가 초등학생 때 설이처럼 우리 반에서 비행기를 가장 많이 타본 사람이었다. 29살의 나는 그 순간 8살의 슬기로 돌아가, 설이와 이야기를 하며 즐거움을 만끽했다. 비행기를 자주 탔다는 것이 즐거움을 만끽할 정도로 재미난 주제는 아니다. 이 주제는 설이와 나에게 단순히 가족의 일상적인 이야기 중 하나를 나눈 것이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나에게는 이런 일상의 이야기를 그동안 나눌 사람이 없었다. 그런 내가 29살이 되어서 8살 친구에게 ‘공감’이라는 감정을 느끼며 신이 나서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물론 최초로 내뱉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내 단짝 친구들, 동생들, 엄마아빠 분명 누군가에게는 이야기했을 것이다. 그런데 설이에게 이야기했을 때는 뭔가 차원이 다른 감정과 가슴 벅참을 느꼈다. 내가 한국에서 살면서 처음으로 ‘소속감’이라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나는 오랜 시간 내가 ‘특별’하다고 느껴서 위축되어 지내왔다. 하지만 설이를 만나고 나는 ‘특별’하면서도 ‘평범한’ 사람 중 하나임을 깨달았다. 나는 고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늘 벗어나고 싶었다. 한국이라는 테두리 안에 들어오면 보이지 않는 쇠사슬이 내 발목을 잡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나와 같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쇠사슬을 풀어낼 수 있었다. 나와 같은 누군가가 있다는 것, 큰 위로와 힘이 되었다.

 

▲ 2019년에 이주 배경으로 살면서 겪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나누는 당사자 모임을 진행했을 때 만든 웹자보 중 일부. ‘어느 나라에서 오셨어요?’ ‘한국말 잘 하시네요?’ 이런 말들에 답변하다 지친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고 싶었다. kendi7@gmail.com

 

내가 설이를 만나 서로 공감하고 소속감을 느꼈듯이, 인어공주 트레일러 영상을 본 흑인 아동 청소년들의 반응은 인어공주가 흑인이라서가 아니라, 인어공주가 ‘나’와 같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설이를 통해 위로와 힘을 얻었듯이, 영상에서 본 아이들의 외침은 아리엘을 통해 얻은 위로와 힘이었다고 생각한다.

 

다양성을 존중하고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사회가 변화해야 한다고 이제는 진부할 정도로 많이들 이야기한다. 하지만, 누구든 소수자성을 가진 당사자들은 서로의 ‘다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바라는 목소리와 함께, 나와 ‘같은’ 사람들이 주변에 존재하며 같이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또한 기억했으면 좋겠다.

 

이주 배경을 가진, 나와 같은 당신을 만나고 싶다

 

사실 나는 3년 전, 다양한 이주 배경으로 살면서 겪게 되는 정체성과 소속감에 대한 고민을 나누는 당사자 모임을 만들어 진행한 적이 있었다. ‘어느 나라에서 오셨어요?’ ‘한국말 잘 하시네요?’ 이런 질문이 지겹고 답변하다 지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을 모으지 못했고 모임도 지속적으로 가져가지 못했다. 사람들을 초대했지만, 아직 자신을 드러내기 어렵다는 답변도 받았다. 이 기록을 계기로, 다시 모임을 시작하고자 한다.

 

“나와 같은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당신이 있는 그 자리에서 한 발짝 앞으로 나와, 

저와 함께 공감하고 연대의 길을 걸어가자고 말이에요.”

 

[필자 소개] 강슬기. 한국에서 필리핀 이주노동자의 딸로 태어났다. 어릴 적에는 한국인인지 필리핀인인지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 어느 날 문득 한낱 지구인 중 하나임을 깨달았다. 이제, 우주인으로 넓혀야 하는지 고민 중이다. kendi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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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ㅅㅇㄹ 2022/10/17 [16:19] 수정 | 삭제
  • 영상 링크 따라가 보구 나도 환호성을 질렀다. 혼자 볼 땐 그냥 그런가보다 했는데 생각보다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큰 것 같네요.. 인종 차별이 얼마나 심한지 역으로 생각해보게 되구요.
  • 독자 2022/10/17 [10:33] 수정 | 삭제
  • 넘 좋은 글이네요.. 그냥 공감이 가요
  • 리을 2022/10/12 [20:14] 수정 | 삭제
  • 인도 사람과 결혼해서 아이를 둘 낳아 키우고 있는 분을 만난 적이 있는데, 한국에 와서 적응하기가 어렵다고 하셨던 기억이 나네요. 아이들은 피부색이나 이목구비가 또렷한 얼굴이라는 것 외에는 한국말을 잘해서 그런지 여느 다른 아이들과 다를 바 없어보였는데요. 그 아이들이 지금쯤 성인이 될 무렵일 것 같은데 큰 혼란이나 차별을 겪지 않고 잘 자랐을지 궁금합니다. 아직도 인종차별 의식을 가지고, 출신지나 피부색을 보고 선입견 갖는 사람들 보면 이렇게 묻고 싶어요. '똑같은 인종에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만 있는 것보다 다양한 사람들이 있어서 더 좋은 사회 아닌가요.'
  • pjwwj 2022/10/12 [12:49] 수정 | 삭제
  • 누구나 따로똑같은 사람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가 되길 바라며 글 잘 읽었습니다
  • 동그라미박 2022/10/12 [12:45] 수정 | 삭제
  • 이 기사가 왜 일케 내 맘을 울리는지 모르겠다 ㅠㅠ 그냥 너무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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