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장의 편향된 젠더 레이어 분석

[백래시 시대, 페미니즘 다시 쓰기] 외인구단 리부팅: 여자야구

턱괴는여자들 | 기사입력 2022/10/20 [09:21]

야구장의 편향된 젠더 레이어 분석

[백래시 시대, 페미니즘 다시 쓰기] 외인구단 리부팅: 여자야구

턱괴는여자들 | 입력 : 2022/10/20 [09:21]

※ 페미니즘에 대한 왜곡과 공격이 심각한 백래시 시대, 다양한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로 다시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백래시 시대, 페미니즘 다시 쓰기” 스무 편이 연재됩니다. 이 기획은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지원을 받아 진행됩니다. [편집자 주]

 

(인트로)

 

“한국 프로야구 출범 당시 ‘의학적으로 남성이 아닌 자’는 부적격 선수로 분류됐다. 1996년, 규약에서 이 문구가 사라진 뒤 여자도 프로야구 선수로 뛸 수 있게 되었다.”

 

▲ 영화 〈야구소녀〉(최윤태 감독, 2019) 스틸 컷. 주인공 주수인(이주영 분) 캐릭터는 한국 고교야구에 최초로 등장한 여자 야구선수이자, 2004년 여자야구팀을 창단한 안향미 선수를 모티브로 삼았다.

 

영상을 멈추고 검은 화면 중앙에 놓인 하얀 글씨들을 한참 보았다. 영화 〈야구소녀〉(2019)의 첫 장면이었다. 내 주변에서 야구 얘기를 하는 친구들도, 나를 야구장에 처음 데려간 친구들도 다 여자였고, 아이들을 야구장에 데려오는 야구팬도 대부분 엄마들이던데, 생각해 보니 여자 야구선수는 본 적이 없었다.

 

문화예술 콘텐츠가 그 어느 매체보다 효과적으로 무의식을 뒤흔들 때가 있다. 마침 매주 예술과 대중문화 콘텐츠를 소개하고 의견을 공유하는 스터디를 진행하던 우리는, 그렇게 한 달이 넘게 〈야구소녀〉로부터 파생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결론이 있을 줄 알았던 이야기는, 파고들수록 끝도 없이 많은 레이어(layer, 층)를 발견하게 되면서 마침내 하나의 프로젝트로 자리 잡았다. 치어리더는 왜 노출 있는 의상을 입은 여성이어야 하는지, 그 와중에 왜 응원단장만은 남자여야 하는지. 4대 구기종목 중 심지어 축구까지 여성 리그가 있는데, ‘국민’ 스포츠라는 야구만 유독 ‘국민 절반(여성)’에게 필드 입장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함께 턱을 괴었다. 질문을 정리했고, 답을 내어줄 사람들을 찾아냈다.

 

궁금증에 대한 답을 찾아서 무작정 문을 두드리고, 또 운 좋게 인터뷰를 하나 둘 따내며 발견한 사실이 있다. 야구는 종주국 미국에서 유래하여 국내에 도입되는 과정에서부터 단순한 스포츠 종목이라기보다 유난히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도구로서 맥을 이어왔다는 점이다. 여자 야구가 품고 있는 그 비밀스러움과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들이 비단 우리뿐만은 아닌 듯했다. 어느새 인터뷰이는 약 스무 명이 되었고, 야구와 여성의 상관관계를 끝까지 파고 들어가 보자고 한 ‘턱괴는여자들’의 연구는 18개월간 이어졌다.

 

▲ 야구와 여성의 상관관계를 연구한 결과물과 인터뷰는 496 페이지의 연구집 『외인구단 리부팅: 야구장 속 여성의 자리는 어디인가』로 정리되었다. 인쇄 감리 날의 모습 ©턱괴는여자들

 

여성 야구팬, 산업을 지탱하는 지갑이지만 아는 척은 안돼

 

2022년, 프로야구는 여성 관중 없이는 ‘국민’ 스포츠의 위상을 유지하기 힘든 상황이다. 처음으로 시즌 관중 800만을 넘어섰던 2016년, 이미 그 흥행의 주역은 새로운 직관 문화를 만들고 있는 여성이라는 분석이 있었다. 이에 맞춰 잠실 야구장은 2011년에 남자 화장실을 줄이는 동시에 여자 화장실을 50% 늘렸고, 파우더룸 등 여성을 위한 공간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여성 팬을 겨냥한 각 구단의 MD 상품들도 쏟아졌다. 2015년에 제작된 KBO 공식 텀블러의 경우, 구매자의 78.8%가 여성인 것으로 집계되기도 했다.

 

2020년에는 야구의 여성 팬 의존도가 높아지고 있다는 내용을 담은 리서치 결과가 발표되었다. 여성의 홈경기 관람 횟수가 더 높고, 최근 5년간 증가한 새내기 팬 중 여성의 비중이 더 높다는 것이다.(2020년 기준, 홈경기 관람 경험 여성 73.5%, 남성 68.4%, 최근 5년간 프로야구 새내기 팬 여성 55%, 남성 34.9%. 출처: 중앙선데이) 사실, 여성이 프로야구의 흥행 혹은 존립에 있어 중요한 입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업계 내에서도 공공연하다. #프로야구 #여성 키워드로 학술 자료를 검색하면 ‘마케팅 전략’ 관련 연구 결과가 약 99%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여성 팬은 정당한 대우를 받고 있을까?

 

“여성분들은 일단 배트에 맞으면 안타인 줄 알고 환호하는데, 파울이었습니다.”

 

5월 14일, NC 다이노스와 SSG 랜더스와의 경기에서 논란이 된 김수환 캐스터의 발언이다. 선수 출신 박재홍 해설위원 역시 맞장구를 치며 비슷한 대화를 이어가, SNS 상에서 ‘여성 혐오’ 논란이 일었다. 일반적으로 야구와 여성이 어떤 관계로 엮이게 되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이 아닐까 싶다. 여성은 야구에 돈을 얼마나 쓰든 ‘비전문가’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하다못해 ‘지갑’으로서도 제대로 존중 받지 못한다는 현타가 여성 팬들의 심기를 건드렸다.

 

누군가는 평가하는 입장에, 누군가는 증명해야 하는 입장에 놓이게 되는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 이러한 태도는 야구를 직접 하는 여성들을 향해서도 예외 없이 적용된다. “150을 던지면 알아서 모셔간다”라는 논리로 110, 120을 던지는 여자야구 국가대표 선수에게 이것저것 가르치는 댓글이 쌓여가는 광경은 인터넷 여기저기서 심심치 않게 목격되곤 한다.

 

왜 여자아이들은 ‘플레이어’를 꿈꾸지 않을까?

 

120을 던지는 여성 선수? 한국에 여자 야구 선수가 있던가? 놀랍게도 2021년 기준 한국에는 49개의 여자 야구팀과 1,020여 명의 여자 야구 선수가 등록되어 있다. 연간 개최되는 경기는 약 400게임에 이르며, 이를 모두 관리하는 ‘한국여자야구연맹’이라는 기관도 존재한다. 물론 야구로 생계를 이어갈 수는 없는 사회인 야구라는 점에서 엘리트 스포츠인 남자 야구와는 명확한 차이점이 있지만, 여자 야구 이미지가 워낙 부재해서인지 취미 야구의 존재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 여자들의 온몸을 던지는 피칭, 경쾌한 타격 음, 여성의 목소리로 여기저기서 들리는 작전 지시 샤우팅과 흙먼지가 이는 슬라이딩을 상상해 본 적 있는가?

 

영화 〈야구소녀〉의 첫 장면이 그토록 충격적이었던 이유는 여자 야구 선수를 ‘본 적이 없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했다는 점 때문이었다. 야구가 독재 정권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국민 스포츠가 된 시점을 지나, 2021 도쿄올림픽이 출전 선수 성비에 있어서 ‘성평등 올림픽’이라는 타이틀을 얻은 현시점까지도, 여성은 야구에 있어서만큼은 그저 관객과 치어리더라는 주어진 역할에 충실했던 것이다. ‘왜 마운드에 선 여자 야구선수는 대중이 보기 힘든지’, ‘왜 올림픽에는 여자 야구 대신 소프트볼이 있는지’, 질문도 의심도 던지지 않은 채로.

 

“볼 수 없으면 될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메이저리그 최초 여성 단장(마이애미 말린스), 킴 응, 2020

 

야구하는 여성의 이미지를 볼 수 없다는 것의 가장 큰 폐해는 야구를 ‘하고 싶은’ 여성이 생겨나기 힘들다는 점이다. 여자 사회인 야구팀의 선수들 대부분은 성인이 되고 나서 야구를 시작한 경우다. 학교 체육 시스템 안에서는 여자아이들이 ‘내가 야구를 좋아하는지’, ‘야구를 잘 하고 싶은지’ 파악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으니 어찌 보면 당연하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요점을 짚어볼 수 있다. 1)여학생과 야구의 접점이 거의 전무한 교육과정과 사회 환경 안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른이 된 후에 자신의 흥미를 탐구하고 기꺼이 야구에 도전한 이들의 열정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개인적으로, 야구팬들이 프로야구 선수들에게 기대하는 정신과 태도가 여자 선수들에게 있다고 본다) 2)선수급 역량을 목표로 기초를 다지는 과정은 학생 때 시작되어야 하므로, 여자아이들이 야구에 대한 흥미와 적성을 발견하기 힘든 현재의 구조 안에서는 여성 ‘선수’가 등장하기 힘들다. 거꾸로 생각하면, 그만큼 선수 육성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여자 야구의 한계를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잠시 벅차고 멋진 이야기를 귀띔하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야구를 하는 여학생들이 크게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2022년 여자 야구 국가대표 최종 엔트리 22명 중 2000년대 생이 약 14명에 이르렀다. 2000년생 김라경 선수의 등장으로 인해 수정된 ‘리틀 야구단 나이 규정' 덕이 큰 것으로 보인다. 학교 야구부 없이 알아서 야구를 해온 여학생들이 마침내 또래의 동료를 만날 수 있을 정도로 늘어난 것이다.

 

※김라경 특별법: 리틀 야구 졸업 이후 중학교 야구부에 입단할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해, 여학생에 한해 리틀 야구단 소속 기간을 중학교 3학년까지 연장할 수 있다. (남학생의 경우 초등학교 졸업과 함께 리틀 야구 역시 졸업하게 된다.

 

▲ 2022년 김라경 선수를 주축으로 유소녀 선수들로만 구성된 JDB 팀이 창단되었다. 남자 사회인 야구팀과의 경기에서 승리한 후 포즈를 취하는 JDB선수들. 유튜브 채널 ‘프로동네야구 PDB’를 통해 해당 경기 영상을 볼 수 있다. ©프로동네야구 PDB

 

야구뿐만 아니라, 현재 학교 체육 교과는 대체로 여학생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크게 요구하지 않는다. 청소년기의 경험이 인식의 틀과 인생의 가능성을 결정짓는데 중요하다는 점에서, 여자 야구로 인해 발견된 학교 체육 현장의 맹점은 사실상 여성 스포츠 전체의 문제로 확대해 볼 수 있다. 여성 스포츠에서 유독 환경의 열악함을 극복한 특출난 개인이 ‘특별한’ 존재로서 종목 전체를 견인하는 서사가 반복되는 이유다. ‘선구자’의 덕을 본 경우는 있어도, ‘제도’의 덕을 본 경우는 거의 없다.

 

역사, 예술, 교육, 미디어…“몰랐어 원인이 이리 다채로운지”

 

“여성의 모든 교육은 남성과 관련이 있어야 한다. 남성을 기쁘게 하는 것, 그들에게 유용한 것, 그들에게 사랑 받고 그들을 존경하는 것, […] 그들의 삶을 즐겁고 달콤하게 만드는 것은 모든 여성의 의무이자 어린 시절부터 가르쳐야 할 것들이다.”

-장-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에밀(L’Émile)』, 1762, livre V

 

왜 야구하는 여자가 많지 않냐는 질문에 답을 내리기 위해서는, 야구 산업과 교육에서의 문제뿐만 아니라 ‘여성의 몸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과 ‘여성 몸의 주체성’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아주 오랫동안 여성의 몸은 여성이 것이 아니었다. 여성에게는 내 몸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문화와 풍습과 제도와 교육이 있었으니까. 가슴과 엉덩이, 골반은 풍만하고 허리는 잘록해야 여성의 본분인 ‘출산’에 유리하다는 관념이 여성의 몸을 옥죄었다. 허리를 꽉 조이는 코르셋, 치마를 볼록하게 만들기 위한 용도인 파딩가일(farthingale) 등 출산에 최적화된 여성이 되기 위해 많은 발명품들이 개발됐다. 여성에게는 꽃꽂이, 바느질 등 아내로서 가정을 지키고 남편을 기쁘게 해줄 교육만 허락되었다. 여기에 더해 예술가들 역시 역사 곳곳에서 여성을 ‘뮤즈’로 치환하며 동시대 남성들이 원하는 ‘전형적인 몸’을 그리며 찬양하고, 인간 여성 모델의 몸에 신화 속 여신을 덧입히곤 했다.

 

여성은 성장하며 보고 듣는 모든 곳에서 철저히 몸의 사용권을 차단당했다. 자신의 몸을 ‘주체적으로’ 돌보고 움직이고 관찰할 권리가 없었다. 남성이 마련해 놓은 시각과 기준에 맞춰 몸을 만들 노력만이 허락되었다. 이러한 역사적·사회적·문화적 배경은 ‘스포츠’에도 놀라울 만큼 고스란히 적용된다.

 

지금의 우리에겐 낯설지만 1880년대 미국의 여성들은 적극적으로 야구를 향유했다. 여자 야구팀이 남자 야구팀을 상대로 승리를 견인할 만큼(1885년 필라델피아 여자야구클럽 대 남자 야구팀 니나즈의 경기는 8:7로 필라델피아 여자야구클럽의 승). 그러나, 같은 기간 미국 사회는 건강하게 야구하는 여성들에게 ‘섹슈얼 필터’를 씌웠다.

 

여성의 다리 라인을 드러내는 것이 법적으로 금지되었던 당시 미국에서 여자 야구 선수에게 야구 유니폼을 입혀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현재에도 무척 익숙한 ‘여성x몸x마케팅=바이럴’ 공식을 도입한 회사는 미국의 Allen&Ginter 담배회사였다. 1886년 출시된 새로운 담배 라인의 디자인에는 야구하는 여자의 몸이 사용되었다. 야구 유니폼을 입고 다리를 벌리는 자세(유격수)와 그라운드에 누워 슬라이딩을 하는 자세를 취한 여자 선수들이 담뱃갑에 실려 전국에 유통됐다.

 

▲ 버지니아 브라이트 시가렛사의 담배 홍보 이미지, Allen & Ginter, From the Girl Baseball Players series, ©MET, The Jefferson R. Rurdick Collection

 

그러나 담뱃갑 속 유니폼을 입은 여성들은 실제 선수가 아니었다. 당대 언론이 ‘포르노'라고 언급할 만큼 논란을 일으켰던, 야구하는 체하는 여성의 몸 이미지는 마운드 위 진짜 여자 야구 선수들을 심리적·물리적으로 야구장 밖으로 내몰았다. 대상화된 이미지를 통해 실제 여자 야구 선수들의 몸에는 낯선 이의 시선이 꽂혔다. 자연스레 가족과 지인들은 마운드에 서는 것을 만류했다. 유튜브, SNS도 없던 시절, 대량 인쇄는 무서운 도구였으므로 1890년대를 기점으로 야구는 오롯한 남성의 스포츠가 되었다. 남성화된 야구를 그대로 수입한 한국에서는 여자 야구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은 장르였다.

 

약 150년 전, 미국 담배 회사의 마케팅 공식은 현대에도 잘 통한다. 미디어가 원하는 여성의 몸은 정해져 있고, 대중은 송출되는 이미지에 맞춰 살아간다. ‘미스코리아' 대회를 보고 자란 세대나 ‘아이돌'을 보고 자란 세대의 청소년들은 TV에서 제안하는 몸을 꿈꾸며 운동장을 멀리한다. 삶의 테두리를 형성할 수 있는 청소년기에 몸 써봄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성인이 되어도 운동과 멀다.

 

“야구하는 여자가 없잖아”, “야구는 남자 신체에 적합한 운동”, “150만 던져봐”라는 말을 하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1)루소의 치우친 교육관 이래로 현재까지 여성에게 자신의 몸을 직접 정의하고 움직일 ‘동등한 기회’가 주어진 적이 있는지. 2)없던 길을 만들어 활동하던 과거의 여자 야구선수를 언론과 미디어가 적합한 방법으로 조명했는지. 동시에 현재의 언론과 미디어가 여성을 기술하는 방법이 적합한지도 물어야 한다. 3)1885년 남자 야구팀을 상대로 8:7의 승리를 견인한 필라델피아 여자야구클럽과, 2021년 11월 20일 남자 사회인 야구팀을 8:7로 꺾은 여자야구팀 JDB를 알고 있는지도.

 

언니들을 찾아 헤매본 사람이라면 주목, ‘여자 야구’

 

이제 “여자가 야구하면 어떤 점이 좋아?”라는 질문이 이어질 수도 있겠다. 여자 야구는 프로팀이 없고, 배드민턴, 풋살, 수영 등 타 스포츠와 비교했을 때 아마추어 선수 풀도 현저하게 적다. 타 여성 스포츠가 나름 선수 풀이 두터워 아마추어 리그가 연령별로 운영되는 것에 비해, 여자 야구는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들이 한 팀을 이룬다는 특이점이 있다.

 

야구를 하기 위해서는 9명이 모여야 한다. 선수를 구하기 쉽지 않기 때문에 성별이 여성이고 야구만 좋아한다면 나이도, 직업도, 사는 곳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멀리 살지언정 주말에 모여 한 팀으로 땀 흘려 훈련하고 시합하고 헤어지면 그만이다. 선수 한 명 한 명이 소중한 여자야구에는 그만큼 ‘다양한 여성 서사’와 ‘연대’가 있다.

 

황정희 한국여자야구연맹 회장이 13년간 야구를 하며 발견한 것이 바로 이 연대의식이다. 그는 새로운 팀원이 들어오면 “결혼식이든 장례식이든 네 인생의 희로애락에 언제나 함께 할 든든한 언니들이 있다”라고 말한다. 결혼과 출산, 육아 등의 단계마다 툭툭 끊기는 여성들의 네트워킹은 불은 면발 같다고 여겼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와 닿았다. 나는 여초 집단이었던 대학을 졸업하고 동종업계로 왔는데, 왜 큰 그림을 그리는 자리엔 언니들이 없을까 생각했던 적도 많았다. 가족 돌봄의 무게와 유리천장의 장벽에 지쳐 떠난 언니들에게 커리어 관련 상담이나 경조사 소식을 전하기는 어렵지 않나. 그래서 여성의 네트워킹은 점처럼 흩어지기 쉽다.

 

“한 12년 정도 야구를 했는데 제가 야구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연대입니다. 제 나이가 마흔일곱이거든요. 그런데 팀에서 가장 어린 친구가 스무 살이에요. 가장 연장자는 52세이고요. 약 30여 년의 갭이 있는 사람들이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주말에 야구 하나로 모이는 거예요.”

-황정희 한국여자야구연맹 회장, 『외인구단 리부팅: 야구장 속 여성의 자리는 어디인가』, 2022, p.345

 

여자 야구 리서치를 하며 여자야구팀에 직조된 끈끈하고 건전한 시스터후드를 찾을 수 있었다. 어쩌면 이 부분이 우리 연구의 가장 큰 수확일지도 모른다. 회사의 40-50대 언니들은 내 자리에서 멀리 떨어져 앉는 존재들이지만, 여자야구팀에서 만나는 언니들은 진로 고민이나 취업상담 혹은 법적 자문까지 척척 해결해 주는 동료이자 친구의 관계였다. 반대로 언니들은 팀을 통해 회사의 어린 팀원이나 자녀의 문화를 경험하고 파악할 수 있다. 본업과 야구를 병행하는 여자 야구의 현실에서 고민 해결사 역할까지 수행하는 것이 바쁘거나 귀찮지 않냐 물었더니, 대다수는 “동료의 고민이 빨리 해결되어야 주말에 야구하러 올 테니까요(웃음)”라고 답했다. 이 관계성을 관찰하며 우리는 남성들의 ‘사우나 문화’가 여성에게는 ‘마운드 문화’로 치환된다는 가설을 세우기도 했다.

 

프로팀이 없는 환경에서 오로지 야구를 위해 모인 다양한 연령의 여자 선수들은 알고리즘만으로 형성된 세상에 균열을 낸다. 흩어진 다른 점이 모여 공동의 목표를 가진 원 팀이 된다. 바로 이 ‘여성 연대’가 기울어진 마운드 위에서 고군분투하는 여자 야구가 만들어낸 값진 결실이다.

 

▲ KBS 〈제3지대 월드시리즈를 가다〉 다큐멘터리 상영 후 이어진 GV 현장. 2004년 국제 대회에 참여한 강효람 선수, 20여 년간 야구 선수로 활동한 나두리 한국여자야구연맹 이사 그리고 2004년생 여자야구 국가대표 박주아 선수(차례로 오른쪽에서부터 세 번째, 두 번째, 첫 번째)가 참여했다. 2022년 3월 26일 이수 아트나인에서 턱괴는여자들 진행(왼쪽)

 

(아웃트로)

 

두 명의 리서처로 구성된 턱괴는여자들은 인문학의 연구 방법론을 차용해 거대 산업이자 문화인 마운드를 살펴봤다. 그리고 야구장 사이에 끼여있거나, 자리를 못 찾거나, 돈과 시간과 애정을 써도 야구의 ‘주체’가 되지 못하는 여성들의 사례와 그 원인을 들춰냈다. 보통 사랑하는 대상을 직접 할 때 덕업 일치를 이루며 큰 행복감을 느끼는데, 야구를 좋아하는 여성들에게는 ‘할 수 있는 길'이 없다. 물론 누군가가 “그럼 그냥 해! JUST DO IT!”, “하지 말라고 아무도 안 했습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좋아하는 일을 치열하게 하면 되는 상황과, 차별을 견디고 없는 제도를 만들면서 해야 하는 상황의 기준이 단순히 ‘성별’이라면 이것은 “그냥 해"라고 말할 수 없는 문제다.

 

우리는 “시선은 가장 미시적인 형태의 권력”이라는 말을 믿기 때문에, 연구와 출판에 이어 우리의 문제의식을 확장할 ‘여자야구 시각화 프로젝트 vol.1’을 기획했다. 바로 여자야구 다큐멘터리 상영회 「마운드 파헤치기+GV」였다. 2004년 대한민국 최초의 여자야구 국제 대회를 기록한 다큐멘터리 〈제3지대 월드시리즈를 가다〉를 본 약 60여 명의 관객들은 함께 울고 웃었다. 그 이후, 오랫동안 하고 싶은 야구를 시작했다는 몇몇 독자들의 후기도 듣게 되었다.

 

두 눈으로 보아야 꿈꿀 수 있다. 본다는 것은, 앞서 간 언니가 걸어간 곳까지 가보리란 용기를 직간접적으로 얻는 순간이다. 직접 몸을 이끌고 땀을 흘리는 여성들의 모습이 더 많이 시각화되길 바란다. 그래서 더 많은 이들이 좋아하는 것을 즐길 수 있도록 턱괴는여자들의 시각화 프로젝트는 다음 단계를 기획하고 있다.

 

[턱괴는여자들] 파리와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두 명의 인문학 연구자로 구성된 리서치 듀오 송근영과 정수경. 문화예술을 이용해 우리 주변의 밝은 사각지대를 탐구하며, 그 결과물을 출판과 전시, 영상 등 2차 콘텐츠로 재생산한다. ig / twitter: @tuck_on_h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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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롬 2022/11/06 [11:08] 수정 | 삭제
  • 턱괴는여자들... 모든 일은 턱괴는 것에서 출발하던가. 기억할게여~~~
  • thth 2022/10/31 [18:50] 수정 | 삭제
  • “시선은 가장 미시적인 형태의 권력” 양질의 인사이트 감사드립니다 또 이렇게 뵈었으면 정말 좋겠네요... 글 너무 좋아요
  • 원선 2022/10/21 [18:30] 수정 | 삭제
  • 이런 글을 볼 수있다니 감개무량하네요. 올해 본 글중에 최고의 글입니다. 멋진 글을 써주진 두분께 큰박수를 보내드리고 더 많이 알리고 공유했으면 좋겠습니다.
  • 이삼이 2022/10/21 [14:22] 수정 | 삭제
  • 기사 너무 좋네요. 야구 좋아하고 여자야구팀이 없음을 아쉬워하면서도 여기에 대해 깊이 파고들어볼 생각을 못했네요. 유소년부를 일단 양성하면 분위기는 달라질텐데.. 여자야구 보고싶어요.
  • 메이플시럽 2022/10/20 [20:45] 수정 | 삭제
  • 외인구단 리부팅이라니, 너무 멋지다!! 학교마다 여자야구부가 있으면 얼마나 좋아요. 소녀들에게는 팀스포츠가 필요합니다!
  • ㅇㅇ 2022/10/20 [16:27] 수정 | 삭제
  • 너무 공감합니다. 축구보다 더 장벽이 높은 야구... 경기장에서 아직도 맨스플레인 오지게 겪는데. 촌철살인 분석이 빛나는 사이다 기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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