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사랑, 어디 나와요?

페미니스트 국어 선생들이 말하는 ‘요즘 학교 어떤가요’⑤

두리번 | 기사입력 2022/11/21 [07:53]

어머니의 사랑, 어디 나와요?

페미니스트 국어 선생들이 말하는 ‘요즘 학교 어떤가요’⑤

두리번 | 입력 : 2022/11/21 [07:53]

[기획의 말] 페미니스트로 살고자 하는 국어 교사들이 모여 교실과 학교에서 성평등한 국어 교육을 펼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성평등 국어교사 모임’을 만들어 고민을 나누고 대안을 만들어 온 국어 교사들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고등학교 1학년생과 함께 읽는 소설, 『눈길』

 

신규 교사이던 시절 이야기다.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가 국정 교과서로 모두 통일되어 있던 때, 전국의 고등학생들은 이청준의 소설 『눈길』을 배웠다. 망해 버린 집안에서 일찍 홀로서기를 배워, 부모에게 받은 것이 없으니 갚을 빚도 없다고 생각하는 주인공의 이야기.

 

경제적 지원을 제대로 못 해 준 부모에게는 부모 자격도 없다고 생각해서인지, 주인공은 어머니를 ‘노인’이라 일컫는다. 이제 다 자라 자신의 가정을 꾸리고 일에 찌든 일상을 보내는 그는 혹시라도 노모에게 목돈이 들어갈까 노심초사하며, ‘나는 받은 것이 없다’, ‘저 노인도 양심이 있다면 나에게 뭘 바라지 않을 것이다’라고 끊임없이 확인한다. 하지만 결말 부분에서 그는 결국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고, 남몰래 눈물을 흘리게 된다.

 

▲ 7차 교육과정 국어 교과서 표지와 거기에 실린 이청준의 소설 『눈길』 본문. 전국 고등학교 1학년 학생들이 공통으로 학습한 국정 교과서였다.

 

소설의 전문 자체가 꽤 긴 데다가, 중년 남성인 주인공의 마음을 따라가는 일에 학생들이 어려움을 겪곤 했다. 이 소설을 다룰 때면 학생들은 항상 물었다. “이 아저씨 왜 이렇게 못 됐어요?”, “뭐 이런 나쁜 아저씨가 다 있어요?”

 

그리고 두 번째로 하는 질문은 다음과 같았다. “자습서에 소설의 주제는 ‘어머니의 사랑’이라고 나오는데, 어머니의 사랑 어디 나와요?”

 

소설 속 어머니가 어머니로서 하는 역할이 드라마틱하지는 않다. 어머니는 형편이 어려워 집을 팔아버린 후에도 주인공을 위해 옛날 그 방에서 좀 무리해서 밥을 차려주었고, 지금은 그 날의 한 끼를 기억하게 만드는 옷궤를 보관하며 그냥 늙어 있다.

 

대중가요 속 어머니처럼 짜장면이 싫다며 끝내 안 먹는다거나, 누아르 영화 속 어머니처럼 위기에 놓인 주인공을 위해 대신 나쁜 짓을 하거나, 자식에게 누가 될까 봐 먼 곳에서 혼자만의 죽음을 택하거나 하는 일이 벌어졌다면 학생들이 ‘어머니의 사랑’을 찾기 어렵지 않았을 텐데, 그런 일은 이 소설에서 벌어지지 않는다. 

 

모성을 평가하는 학생들

 

독자로서의 나는 이 소설을 아주 좋아한다. 중년의 어른이 자기연민에서 빠져나오는 순간을 보여주는 결말이 좋다. 한 청년이 자신을 괴롭히던 세상과 약하기만 한 부모를 향해 주먹을 휘두르려고 단단히 말아쥐고 있다가, 결국 그 힘이 스르르 풀려 눈물을 흘리는 부분은 다시 읽어도 감동적이다. 그 장면은 부모와의 화해일 뿐 아니라, 고달팠던 자신의 젊은 시절과의 화해이기도 하다.

 

그리고 교사로서의 나는 학생들이 주인공에게 거부 반응을 보이는 이유를 알고 있다. 자식이 부모에게 보여야 할 마땅한 태도는 ‘효’라는, 교과서적 정답만이 그간 교실에서 허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과서 속 주인공이 어머니에게 야박하게 대하는 모습을 보며, 그의 상처를 이해하기보다는 불편하게만 여기는 것이다. 또 개개인에 따라, 아직은 세상이 그런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경험치가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학생들의 두 번째 반응-소설에서 어머니의 사랑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의 이유 역시 마찬가지다. ‘모성’에 대한 우리 사회의 과장된 통념과 잣대들이 학생들에게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선입견과 왜곡된 기대를 심어놓았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사랑은 절대적 가치로 칭송받아왔다. 물론 실제로도 소중한 가치이지만, 엄마다운 역할에 대한 사회의 기준과 압박은 혹독하고도 모질다.

 

우리 사회는 엄마들에게 늘 호통치는 사회다. 식당에 데리고 온 아이가 울어서 시끄럽게 하면 ‘맘충’이 되고, 자신이 밥을 먹느라 아이에게 유튜브를 보여주면 흉을 잡힌다. 밥을 해먹이면서는 갖가지 영양 기준을 맞추어야 하고, 환경을 훼손하지 않도록 일회용품도 덜 배출해야 한다. 벌이도 좀 해가면서 집안일을 해야지, 남편의 벌이에만 의존하면 무능하고 의존적인 엄마가 된다. 도시락을 싸야 하는 상황에서 손수 준비하지 못해 도시락을 사서 보낸 엄마들은 스스로 ‘사서 보냈다’며 자조하는 농담을 주고받는다. 나쁜 엄마가 되기는 너무 쉬운데, 좋은 엄마가 되기란 참 어렵다. (이런 어려운 엄마-되기를 아빠가 하면? 그는 모든 일에서 면죄부를 받을 수 있다. 남자니까, 어딘지 부족해도 좋은 아빠가 된다.)

 

소설 『눈길』 속 어머니, 그녀는 자식에게 적은 재산이라도 남기고 어서 세상을 등지기라도 했어야 하는 걸까. 서술자인 주인공도, 그리고 독자인 학생들도 이걸로는 좋은 엄마인지 의심스럽다며 어머니의 마음을 의심하고 있었다. 주인공의 어머니가 무엇을 희생했는지 눈에 확 뜨이지 않았던 것이다. 어머니는 며느리의 질문에 머뭇거리며 짤막짤막하게 대답하고 있을 뿐, 어머니를 이해하는 것은 주인공의 몫이자 독자의 몫이기도 하다. 아들을 돌보는 일 말고도 그녀에게는 당시 처했던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텐데, 그 와중에도 밥 한 끼의 중요함을 생각해 밥을 차려 내 왔던 그 마음이란 무엇인지, 이해가 필요하다.

 

▲ 7차 교육과정 고등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에 실린 이청준의 소설 『눈길』 중에서. 어머니는 아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눈이 몰아치던 날 산길을 비틀거리며 함께 걸어 아들을 배웅한다.

 

결국 나는 학생들에게 ‘효’, ‘모성’ 등의 가치를 언급하는 것보다는 인간 저마다의 다면적인 모습에 다가가도록 유도하며 이 소설을 감상하도록 도울 수 있었다. 인간은 누군가의 효성스런 자녀로서만 사는 게 아니라 생활인으로서의 고뇌도, 젊은 시절의 상처도 안고 살아가기에 자기연민에 빠져 어리석은 모습도 보인다는 것. 그리고 엄마로서 살아가는 어떤 인간이든, 매순간 엄마로서의 의무와 자신의 욕망이 머릿속에서 경합을 벌인다는 것 등을 교실에서 나누었다.

 

결국에는 학생들은 이 소설 속에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타인을 이해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엄마다움이란 무엇인가, 엄마가 주인공에게 준 것은 무엇인가 등의 복잡한 생각거리들을 안게 되고, 처음 던진 질문보다는 성장한 모습으로 수업을 마무리하곤 했다.

 

천대하면서 신성시하는 돌봄이라는 노동

 

『눈길』의 주인공 말고도 엄마의 사랑을 의심하는 사람들은 많다. 물론, 돌봄을 받는 처지에 있는 청소년들로부터 자신의 보호자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오는 것은 자연스럽고, 건강한 일이기도 하다. 아동과 청소년들은 보호자가 자신을 더 잘 돌봐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요즘 ‘어머니의 사랑’을 예찬하는 시를 읽을 때면 ‘부모가 나를 낳았으니 돌보는 게 당연’하다는 태도를 학생들의 감상문에서 흔히 읽을 수 있다. 감사하는 마음보다는, 저질렀으니 책임지라는 말투가 내겐 낯설기도 하지만. 틀린 말은 또 아니라서 뭐라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중년에 이른 『눈길』의 주인공이 자신은 부모로부터 받은 게 없으니 부모를 외면하겠다고 뻗대는 태도라면 그건 좀 달리 생각해볼 문제다. 그는 왜 자신의 엄마를 그날까지도 용서하지 못한 채로 살아왔던 걸까. 그리고, 가난했던 경제 환경의 책임마저도 왜 모조리 엄마에게 떠넘기고 있는 걸까.

 

사회에서 돌봄의 ‘현장’을 문제 삼는 목소리들이 유독 여성으로 성별화된 돌봄 주체(엄마, 어린이집 교사, 간호사, 요양보호사, 간병사, 가사 도우미)들에게 희생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은 생각해 볼 만하다. 그들이 맡은 돌봄의 공간은 주로 부엌(밥 짓기)과 변기(대소변 도와주기), 욕조(씻기기)로 대표된다. 이 공간에서의 일은 경험과 노하우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이면 자동적으로 할 수 있도록 타고나는 일인 것처럼 치부된다. 그리고 이 공간들에서의 일은 꽤 많은 물리력과 수고가 들어가고, 또 그 전문성과 중요성을 무시할 수 없음에도, ‘쉬엄 쉬엄 할 수 있는 일’이라 불리며 박봉에 시달린다. 업무에 정성을 다하지 않거나 더 많은 보수를 요구하면 희생 정신이 부족하다며 비난을 받기도 한다.

 

한편으로, 또 하나의 특징은 그들의 희생을 신성시한다는 점이다. 아무도 쉽게 할 수 없고, 하고 싶지도 않은 역할을 여성에게 떠넘기기 위해 생겨난 것이 모성 신화가 아닐까. ‘위대한 모성’, ‘엄마 같은 선생님’, ‘천사 같은 간호사’… 돌봄 주체들의 노동이 그 자체로 가치 있게 여겨지기보다는, 천사로 부르고(천사가 되길 요구하고) 박수 쳐 주는 것으로 끝나는 사회. 이런 사회에서 자라나고 돌봄 노동을 해 보지 않은 중년의 아저씨 주인공이기에, 엄마가 자신을 돌본 것을 알면서도 엄마다운 희생을 하지 않은 것처럼 여겨졌던 것은 아닐까.

 

▲ 7차 교육과정 고등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에 실린 이청준의 소설 『눈길』 중에서. 아들은 어머니를 ‘노인’이라 일컬으며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고, 며느리가 그녀에게 묻는 질문들로 그녀의 속마음이 조금씩 드러난다. 실제로 가족 안에서의 소통, 화해라는 영역에서 여자들은 중요한 역할들을 담당하고 있다.

 

자습서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달리, 내가 보기에 소설 『눈길』의 주제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니다. 굳이 한 줄로 요약해야 한다면 “중년에 이르고서야 엄마에 대한 화를 풀고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다.”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주인공이 깨닫게 된, 없는 줄 알았지만 분명 있었던, 엄마로부터 받은 것은 ‘돌봄’이 아니었을지.

 

그녀가 충분히(?) 희생했든 아니든 간에, 주인공의 어머니는 제집에서 먹는 따뜻한 밥 한 끼가 사람에게 주는 심리적 위안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고, 그것을 주기 위해 애썼다. 눈길을 더 편하게 걸으려면 아들 혼자 걷는 게 나았을 텐데도 굳이 함께 길을 나섰다. 그녀가 준 것을 아버지나 다른 가족이 주었던들, 또 아니면 이웃의 따뜻한 누군가가 해주었던들, 그가 얻었던 그 심리적 온기가 달라질까.

 

문학 시간에 학생들이 시와 소설 속의 어머니를 만날 때 ‘모성은 여성의 숭고한 가치’, ‘위대하고 희생적인 모성’이라는 신화를 배우게 되어, 손쉽게 누군가에게 희생을 강요하거나 의심의 잣대를 들이대지 않기를 바란다. 엄마든 아니든, 매일 끼니를 준비하고 타인의 대소변 뒤치닥거리를 하고 청소를 하고 쓰레기를 치우는 손길이 있다면, 그 자체로 소중하다. 그 소중한 역할이 한 사람이 아닌 모두의 책임이 되어야 한다. 문학을 통해서 세상을 돌아가게 만드는 그 손길들의 가치를 이해하는 시간들이 주어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문학을 통해 학생들이 그 책임을 자처할 수 있기를 바란다.

 

*위 글은 성평등 국어교사모임에서 함께 이야기 나누고 작성한 내용입니다. 이메일 주소 femi_literacy_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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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6 2022/11/22 [14:26] 수정 | 삭제
  • 이청준의 소설 <눈길>이 이런 작품이었구나, 다시 기억을 되짚어보게 되네요. 문득 저자 분의 시각으로 이 소설을 읽어도 내신이나 수능에 문제는 없을까... 하는 자습서 같은 생각이 떠오르는 건 서글픈 일이네요.
  • marmot 2022/11/22 [12:08] 수정 | 삭제
  • 글이 너무 좋네요. 눈길도 다시 읽어보고 싶고... 돌봄에 대한 페미니즘의 시각이 이렇게 다르다는 걸 너무 잘 풀어내주고 있는 글이라.. 자습서를 대체했으면 좋겠네요. ㅎㅎ
  • 삼각 2022/11/21 [20:26] 수정 | 삭제
  • 이 글만 읽어도 울 엄마, 엄마의 엄마 생각이 나서 눈물이 나네요. 사람으로서, 나와 같은 여자로서의 엄마(들)...
  • 후라이 2022/11/21 [13:38] 수정 | 삭제
  • 국어선생님이시라 그런지 깊이 있는 인사이트에 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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