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자주 몸무게를 잰다

[섭식장애와 여성의 몸] 균형 잡기

백은선 | 기사입력 2023/01/16 [19:33]

아직도 자주 몸무게를 잰다

[섭식장애와 여성의 몸] 균형 잡기

백은선 | 입력 : 2023/01/16 [19:33]

※ 섭식장애를 개인적인 문제가 아닌 사회적인 문제로 바라보고, 젠더 관점을 담아 다각도로 접근하는 기획 ‘섭식장애와 여성의 몸’ 기사를 연재합니다.

 

▲ 시인이자 작가 백은선. 거식증에 관한 산문집 『나는 내가 싫고 좋고 이상하고』(2021, 문학동네)를 썼다. (필자 제공)

 

‘이상’적인 몸 이미지가 ‘이상’하다

 

스무 살 때부터 스물여섯 살까지 거식증을 앓았다. 혼자 살게 되면서부터 우울증이 깊어진 게 이유였던 것 같다. 누군가 챙겨주지도 않았고 먹고 싶은 것도 없었다. 무언가를 먹을 가치가 없는 인간이라는 생각과 무기력이 나를 수렁으로 밀어 넣었다. 글을 읽고 쓰는 것에 몰두하는 시간들도 먹는 일과 멀어지게 만들었던 것 같다. 독서와 식사는 얼마나 안 어울리는 조합인가? 책을 읽고 있으면 먹고 싶다는 욕구가 사라졌다.

 

그 시기에 어마어마하게 가파른 속도로 살이 빠졌고 그게 싫지 않았다. 사람들은 속이 얼마나 썩어가는지도 모르면서 나를 볼 때마다 예쁘다고 했다. ‘은선아 너 예뻐졌다’, ‘어떻게 살뺐어?’ 그런 말을 많이 들었다. 그 말들이 좋았다. 의도적으로 다이어트를 한 것은 아니었는데, 지속적인 칭찬을 받다보니 어느 순간에는 ‘만약에 내가 다시 살이 찌면 사람들이 나를 싫어할 텐데 어떻게 하지?’ 겁이 났다.

 

그때는 돈이 없었다. 한 달 월세를 내고 공과금을 내고 나면 남는 돈은 삼만 원 남짓이었다. 팔백 원하던 소면 한 묶음을 사와, 아주 배고플 때만 조금씩 삶아서 간장에 비벼 먹었다. 그게 주식이었다. 먹는 것에 들이는 돈과 시간을 무가치한 것이라고 여겼다. ‘나는 먹을 자격이 없어.’ 당시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이다. 나의 가치는 얼마나 좋은 글을 썼는지를 기준으로 매겨졌던 것 같다. 만족스러운 것을 쓰지 못했으니 난 쓰레기야. 스스로를 아끼지 않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인생에서 가장 밝게 빛나고 아름다웠던 시절임에 틀림이 없는데, 그걸 몰랐다.

 

마르면 마를수록 사람들이 내게 주는 관심과 사랑이 커지는 게 이상하고 웃기면서도 기뻤다. 처음에는 우울과 경제적 이유로 시작한 절식이 점점 다른 방향을 향하게 되었다. 비어 있는 나의 가치를 안에서부터 채우는 것이 아니라 바깥의 인정에서 구하려고 했었나 보다.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타인에게 사랑받고 싶어하는 불균형이 나의 섭식장애를 더 가속화시켰다.

 

그때쯤 전남편을 만났는데, 그는 백팔십이 넘는 키에 오십오 킬로그램 남짓되는 왜소한 사람이었다.(그는 체질이 마른 사람이었다.) 나는 그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고 사랑받고 싶었는데 방법을 몰랐다. 그래서 닮고 싶었다. 점점 더 굶게 되고 마른 몸에 집착하게 되었다. 하루 칠백 칼로리를 계산해서 먹고 식단 일기를 썼다. 음식을 보기만 해도 저절로 칼로리가 계산됐다. 거식증이 점점 심해져 사람들이 음식을 먹는 것을 보는 게 불쾌하고 힘들어졌다.

 

사실 그는 내 마름의 정도에 관심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집착은 점점 커졌다. 이런 노력을 몰라준다는(그는 그냥 내가 어떤 몸이든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이었는데) 것과, 아무리 많이 먹어도 마른 그에게 알 수 없는 화가 났다. 그런데도 내 감정이 옳지 않은 것임을 알기에 표현하지 못하고 억눌렀다. 나의 영혼은 조금씩 비틀리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어쩌면 나는 내게 벌을 주는 것을 즐겼던 것 같다. 평온하고 무탈한 날들을 잘 견디지 못했다. 극단적으로 갈등을 회피하면서도, 질책받는 것을 누구보다 무서워하면서도, 그렇지 않으면 뭔가 잘못된 것 같다는 불안. 아무도 나를 혼내지 않을 때는 자해를 하거나 스스로를 벌했다. 그래야만 안심이 되었다. 그래야 마땅하니까. 존재 자체가 잘못되었으니까. 그때는 그랬다. 불행에 중독되어서 조금이라도 기쁨이 찾아오면 그 행복 때문에 더 큰 불안에 짓눌렸다.

 

자가진단을 해본다면 그건 아마 지속적으로 폭력에 노출되어 있었던 유년 시절 때문이 아닐까. 누군가 ‘넌 잘못됐어’라고 말하지 않는 것은 내게 이상한 일이었다. 불안이 극에 달하면 떠오르던 감정. 누군가 나를 때려줬으면 좋겠다. 죽을 때까지 두들겨 맞다가 울면서 잠들고 싶다. 그게 내게 어울린다고. 그러면 마음이 놓일 것 같다는 기이한 환상에 시달렸다.

 

지금까지 열거한 내 거식증의 이유만 해도 서너 가지쯤은 되는 것 같다. 그 이유들이 모두 정합적으로 맞물려 거식으로 도출되지 않는 듯 여겨지더라도, 원래 정신 안에서 일어나는 일의 원인은 단일하지 않으며 논리적이고 인과적이지 않다는 것을 이해해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이제는 거의 타인이나 다름없는 십오 년 전 나의 상태에 대해 반추해보려고 애쓰는 것뿐이고, 그것은 사후적이라 이런 저런 틀을 대어보며 최대한 맞아떨어지는 각을 찾는 과정에 불과하기에.

 

▲ 백은선 작가의 산문집 『나는 내가 싫고 좋고 이상하고』(2021) 카드뉴스 중에서. (출처-문학동네)

 

거식과 폭식은 한 장의 카드의 양면이나 다름없다. 한 가지 질환만을 앓을 수는 없다는 얘기다. 어느 한쪽이 우세할 수는 있어도 한 가지 병만 가질 수는 없다.

 

한 모델의 이야기를 SNS에서 본 일이 있다. 어떻게 다이어트를 하냐는 한 네티즌의 질문에 그는 ‘패션쇼 시즌 전부터 물을 포함하여 한 달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고 답하며, 자신의 방법은 건강하지 않으니 따라 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그것이 옳지 않은 것임을 알면서도 그녀는 자신의 몸을 혹사시키고 있음을 시인하지 않는가?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에 다수가 환호하지 않는가? 그 글은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끼쳤으리라 본다.

 

그러나 내가 더 크게 충격을 받았던 것은 시즌이 전부 끝난 그가 거의 울면서 연어초밥을 먹던 영상이었다. 그건 음식을 맛있게 먹는 사람의 행동이 아니었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폭식의 양상이었다. 나 같은 경우는 술을 마시는 것으로 증상이 옮겨갔다. 술을 마시면 배고픔도 느껴지지 않았고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게 만취하면 라면을 잔뜩 끓여 먹곤 했다. 그리고 술에서 깨면 사나흘 간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가 다시 술에 손을 대고 이것저것 먹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술을 마시는 양은 점점 늘어났고 기억을 잃어버리기 일쑤였다. 나는 점점 말라서 삼십 킬로그램 후반이 되었지만 예쁘지도 행복하지도 않았다. 나는 늘 죽음을 생각했고 사람들을 만나기도 어려워졌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바디 프로필’을 촬영하기 위해 과도하게 굶고 운동을 한다. 그런데 소위 바프를 찍고 그 몸을 꾸준히 유지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대부분 요요를 겪거나 바프 이전보다 더 많이 체중이 증가하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 몸, 런웨이에 서는 ‘이상적인 몸’의 기준에 이상(異常)이 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트위터에서도 ‘개말라’ 혹은 ‘프로아나’(Pro-ana 찬성을 뜻하는 Pro-와 거식증 Anorexia에서 Ana를 합성한 용어)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자주 접할 수 있는데, 나는 그들의 이야기가 남 일 같지 않다. 요즘은 ‘소식좌’(남들보다 적게 먹는 사람을 칭함)라는 것이 인기다. 그들이 먹는 양은 인체가 필요로 하는 에너지로 환산해보았을 때 턱없이 부족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스타일로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같다.

 

나는 그런 흐름을 지켜보며 불편함을 느낀다. 완벽한 몸을 만들려는 사람들의 인식을 하찮은 욕망으로 치부하거나 비웃고 바꾸려 하기 이전에, 그러한 ‘이상적 몸-이미지’가 어디서부터 시작되고 생산되고 있는지를 찾아 개선하려는 노력이 선행하고 더 여러 형태의 몸이 미디어를 통해 제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물론 이미 그런 흐름이 시작되고 있음을 알지만 나는 그것이 둑을 무너뜨리는 거대한 물살이 되기를 바란다.)

 

나는 지금 육십 킬로그램이다.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자주 몸무게를 잰다. 그것이 바람직하지 않은 행위임을 알면서도 정확한 몸무게를 알지 못하면 불안한 것은 아직도 고치지 못한 버릇 중 하나다. 티브이나 유튜브를 켜면 먹방을 하는 사람, 식단 조절을 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모두가 ‘먹는 행위’를 기형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째서일까. 인류의 식이생활이 균형점을 잃은 것처럼 느껴진다고 하면 너무나 큰 과장일까?

 

친구에게 ‘나는 왜 바디 포지티브(Body Positive, 몸을 긍정하기)가 안 될까?’ 하고 물으니 친구가 그렇게 말했다. 애초에 바디 포지티브라는 말 자체가 이상하고 싫다고. 그렇다. 모두가 몸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면 바디 포지티브라는 말은 세상에 불필요하다.

 

몸이 없으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 먹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잘 먹고 잘 존재할 수 있을까? 그 ‘균형’을 의식하지 않고도 균형 잡힌 삶을 살고 싶다. 이 평균대 위에서 내려와 평지를 걷고 싶다.

 

[필자 소개] 백은선. 2012년 『문학과 사회』 신인상 수상 작가. 시집 『가능세계』(2016),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장면들로 만들어진 필름』(2019), 『도움받는 기분』(2021)을 냈고, 거식증에 관한 산문집 『나는 내가 싫고 좋고 이상하고』(2021)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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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자 2023/01/18 [07:48] 수정 | 삭제
  • 언젠가 자유롭게 평지를 걷게 되시길 바랍니다. 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 ㅇㅇ 2023/01/17 [15:12] 수정 | 삭제
  • 이미 기형적인 사회가 된지는 오래인 것 같습니다. 여성의 몸은 전쟁터라는 얘기가 지금은 또 다른 의미에서도 더 가속화되는 것 같고. 남자들도 자유롭지 않게 된 것 같기도 합니다. 백은선 작가님의 글을 읽다가, 내 상상의 나래 속의 내 모습이 백인영화배우에 가까운 모습이라는 걸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식이장애 같은 문제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먹는 것에 대한 부담이나 죄책감 같은 것이 없다고는 말 못하겠네요. 애초에 불가능한 어떤 이미지에 미달하는 내 몸, 어떻게 포지티브할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 아몬드 2023/01/16 [22:46] 수정 | 삭제
  • 나도 대학 다닐 때 주위에서 몇 키로냐고 물어보고, 말라서 좋겠다고 부러워하고, 먹을 때마다 칼로리 계산하는 친구들 보면서 왤케 피곤하게 사나 싶으면서도 나도 모르게 마른 몸이 예쁜 거라는 생각을 체화하게 된 것 같다. 내가 남한테 잘보일 필요는 없지 하면서 유혹에서 빠져나오려고 나중에 노력해야했어요. 외모품평은 진짜 안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 같아요. 근데 너무 일상적인 대화 속에 있음. 칭찬의 의미라면 몸무게 물어보는 게 실례인줄도 모르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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