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 LGBT가?” 이후, 우린 더 나아갈 수 있다!2023년 방송·미디어, 그리고 사회가 변화해야 하는 것들지난 20일 공개된 OTT 플랫폼 웨이브의 오리지널 콘텐츠 〈좋아하면 울리는 짝!짝!짝!〉(좋알람) 11화에서 “니, LGBT가?”라는 말이 등장했다. 연애 예능 프로그램인 좋알람의 여성 출연자 중 자스민이 남성 출연자인 타잔에게 또 다른 여성 출연자 백장미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자, 타잔이 자스민에게 “니, LGBT(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의 줄임말로 성소수자를 의미함)가?”라고 한 것이다.
좋알람은 시작부터 타 연애 예능 프로그램과 다른 점이 있었다. “좋아하는 마음만 있으면 직업, 나이 그리고 성별과 상관없이” 좋아하는 대상에게 알람을 울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성애중심주의를 탈피하는 설정과 함께 실제로 이성, 동성 여부와 관계없이 호감 가는 상대에게 다가가려고 하는 출연자들이 등장함으로써, 좋알람은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예상치 못한 전개와 사랑의 방향,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려고 하는 출연진의 등장에 시청자들 또한 호응 중이다. 대중미디어를 통해 자연스럽게 자신의 이야기를 드러내는 퀴어들의 모습이 시대의 변화를 보여준다.
지난 몇 년간 방송, 영화 등 미디어에서 소수자 재현이 변화하고 있다는 걸 감지할 수 있는 장면이 꽤 있었다. 변화하고 다양해지는 여성 캐릭터를 접하기도 했고(관련 기사: 〈마인〉〈골때녀〉에서 <구경이〉<스우파〉까지 여성서사 약진 https://ildaro.com/9249) 성소수자를 다루는 방식도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관련 기사: ‘마인’…한국 드라마에서 성소수자 재현 어디까지 왔나 https://ildaro.com/9080)
지난 해 가장 인기 있었던 드라마 시리즈가 자폐장애를 가진 여성이 주인공인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였다는 것도 잊을 수 없다. 또 다른 드라마 시리즈 〈우리들의 블루스〉에선 발달장애인 캐리커쳐 작가 정은혜 씨가 장애인 캐릭터를 연기했다. 비장애배우가 아닌 장애배우가 그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은 분명 시사하는 바가 있었다.
하지만 이런 변화에 만족할 수 있냐고 질문한다면? 그 대답은 여전히 ‘아니오’다. 이러한 변화는 방송·미디어에 다양성과 포용을 담아내는 시작이어야 한다.
미디어의 소수자 재현, 현실의 다양성 반영 안돼
작년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2021년 등록장애인 비율을 살펴보면, 전체 인구대비 5.1%, 그 중 지체장애가 가장 높은 비율(45.1%)이다. 초고령화 사회를 목전에 둔 한국 사회에서 주목해야 하는 부분도 있다. 2011년엔 38%였지만 2021년 51.3%로 증가한 65세 이상 비율이다. 이주민 등 체류외국인 인구 비율 또한 코로나 팬데믹으로 2021년엔 줄었지만, 매년 꾸준히 증가 추세였다. 2019년엔 4.87%였고, 앞으론 더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이다.
성소수자 인구 집계는 아직도 공식적으로 이뤄지지 않는 현실에 놓여있다. 성소수자가 정부 정책 대상으로 포함될 수 있도록 실태 조사가 필요하다는 국가인권위원회 권고를 수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라 국내 현황을 파악할 순 없지만, 다른 나라들의 통계를 참고해 봤을 때 대략 5% 내외 수준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이 추이도 증가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2022년 갤럽에서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자신을 LGBT로 정체화하는 인구는 7.1%로, 2012년의 3.5%에서 계속 증가 추세다. 특히 1981년생부터 1996년생까지의 ‘밀레니얼 세대’의 경우 10.5%, 1997년생부터 2003생까지의 ‘Z세대’의 20.8%가 LGBT라고 답했다.
이런 현실은 미디어에 얼마나 반영되고 있을까? 매년 쏟아지는 수많은 콘텐츠 중 소수자를 다룬 콘텐츠는 여전히 손에 꼽을 정도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에선 소수자들의 이야기가 ‘화제성’ 이상이 되기 어렵다.
그렇다면 세계 각국에서 미디어의 사회적 소수자 재현에 관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을까. 김선아 단국대학교 교수의 「영화산업 다양성 정책 현황 및 발전 방향에 관한 연구」(2022)에 따르면, “최근 세계 영화 산업은 활발해진 여성서사와 여성 핵심창작인력에 대한 성인지 관점의 연구와 정책을 기반으로, 포용성 영화정책을 수용하며 발전해 가는 중”이다.
영국의 경우, 영화정책기구인 “영국영화협회(BFI)에 ‘다양성 표준’이 존재”한다. 이는 “BFI 영화기금을 지원받는 모든 산업에서 다양성을 강화할 수 있도록 하는 가이드라인 역할”을 하고 있다. 2016년엔 ‘다양성 및 포용 전략’을 새롭게 세웠다. 이를 통해 “BFI가 도달하고자 하는 최소한의 다양성 목표는 영국의 노동 인구 비율에 기반을 두어 네 가지로 구성”된다. “①50:50 성별 균형 ②소수 인종 그룹에 속하는 이들을 20%까지 ③장애인을 12%까지 ④LGBTQ+를 10%까지 고용한다.”
미국에서도 아카데미영화제가 아카데미 작풍상에서의 다양성 기준을 발표했고, OTT 플랫폼인 넷플릭스는 ‘다양성과 포용 보고서’를 발표해 오고 있다.
호주의 연방 정부기관으로 영상 산업을 지원하는 스크린 오스트레일리아(Screen Australia)에서 2016년 발표한 ‘우리 자신 보기’(Seeing ourselves)에서도 실제 인종, 장애인, 성소수자 비율과 TV 드라마에서 반영되는 캐릭터의 인종, 장애인, 성소수자 비율을 비교하며 미디어가 현실을 얼마나 반영하는지를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그러나 국내에선 변화를 위한 지원이 더디기만 하다. 김선아 교수는 「영화산업 다양성 정책 현황 및 발전 방향에 관한 연구」에서 이를 지적하며, “영화진흥위원회의 심사기준인 ‘독창성과 참신성’, ‘완성도’, ‘영화화 가능성’ 등의 평가항목 재검토와 더불어 가산점 형태로 부여된 5점의 ‘여성 가산점’은 한국 사회의 젠더, 인종, 장애, 지역을 포함하는 다양성 지표로 확대 적용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가시화는 중요하다
최근, 태국 드라마지만 태국을 넘어 전세계 곳곳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드라마 시리즈가 있다. 〈갭 더 시리즈〉(Gap the series)(원작 동일명 웹소설)라는 ‘GL드라마’(Girl’s Love의 줄임말로, 여성 간의 로맨스를 다룬 콘텐츠)다. 태국 내 방송으로도 방영되고 있지만 유튜브 채널에도 모든 에피소드가 업로드 중이며, 현재 5화의 파트3는 천만뷰 달성을 앞두고 있다. 이렇게 큰 인기를 얻고 있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내 이야기가 미디어에서 보여진다, 내 이야기가 세상에 반영된다’는 발견과 기쁨은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까지 콘텐츠를 향유하게 만든다.
이야기뿐만 아니라 존재 자체를 가시화하는 것도 중요하다. 〈좋아하면 울리는 짝!짝!짝!〉 최신 에피소드인 12화에서 여성 출연자인 자스민과 백장미의 데이트 장면, 자스민이 백장미에게 고백하는 장면이 방송된 후 좋알람을 향한 호응은 다시 한번 뜨거워졌다. 트위터에선 ‘스민장미’가 화제의 단어로 급부상했다.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내고, 또 그것을 받아들인 두 사람에게 공감한 사람들의 감상과 후기가 쏟아졌다. 동성을 좋아한 경험, 현실의 벽 앞에서 차마 고백하지 못했던 경험들을 떠올리며 자스민의 용기를 보고 용기를 얻었다는 이야기, 이래서 미디어에서의 가시화가 중요하다는 이야기 등.
자폐를 가진 청소년의 성장 이야기를 담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시리즈 〈별나도 괜찮아〉(Atypical)의 주인공 샘은 비장애배우가 연기했지만, 그의 친구, 대학에 가서 만나게 되는 동아리 친구들은 자폐장애 당사자인 배우들이 맡았다. 비장애배우가 장애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에 대한 비판을 피해갈 수 없었지만, 적어도 당사자들이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
뇌성마비를 가진 게이 남성의 이야기를 담은 코미디 시리즈 〈스페셜〉(Special)의 주인공인 라이언은 뇌성마비 장애 당사자인 라이언 오코넬이 연기했다. 여자 대학생 4명의 섹슈얼리티와 성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코미디 시리즈 〈섹스 라이브즈 오브 칼리지 걸스〉(The sex lives of college girls)에선 휠체어를 탄 캐릭터가 조연으로 등장한다. 이 캐릭터는 휠체어 사용자이자 ALS(루게릭병)를 가진 로렌 스펜서가 연기한다. 섹스-포지티브 활동가이기도 한 로렌 스펜서처럼 성생활에 당당한 장애여성 캐릭터다.
당사자들의 등장은 또 다른 효과를 가져온다. 소수자를 향한 편견, 오해, 낙인을 무너뜨릴 수 있고, 당사자에게 직접 마이크가 주어지기 때문에 보다 생생하고 진솔한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 또한 이들을 보는 당사자 시청자/관객에게 다양한 영감을 줄 수 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니까 우리에겐 여전히, 더 많은 소수자 이야기가 필요하다.
“이야기인 채로, 끝낼 수 없다”
소수자를 등장시키고, 이들에게 적절한 서사를 부여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조금 더 나아갈 수도 있다.
지난 해 11월 일본 공영방송 NHK “밤 드라마”(よるドラ)로 제작, 방영된 〈만들고 싶은 여자와 먹고 싶은 여자〉는 동일명의 만화 시리즈가 원작이다. 유자키 사카오미가 개인 SNS계정에 올렸다가 큰 호응을 얻어 카도카와 출판사를 통해 연재, 출판된 작품으로, 2022년 5월 기준 2권 만으로 20만부 넘게 판매됐다. 요리하는 걸 좋아하는 카스가와 먹는 걸 좋아하는 노모토가 우연히 만나 관계를 맺으면서 자신의 성정체성 또한 깨닫게 되는 과정을 그린 만화는 인기를 얻으며, 드라마로도 제작됐다.
드라마 시리즈가 방영되고 만화 3권이 발간된 11월, 〈만들고 싶은 여자와 먹고 싶은 여자〉는 후원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일본의 동성혼 법제화를 위해 활동 중인 ‘공익사단법인 Marriage For All Japan -결혼의 자유를 모두에게’를 후원하기 위한 굿즈를 판매하고 그 수익을 단체에 기부하는 프로젝트다.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며 작가는 이런 말을 남겼다.
"정말 많은 GL·BL 콘텐츠, 동성 연애물이 존재하는 나라에서 동성혼이 법제화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늘 이상했습니다. 픽션에선 자유를 그리고 있지만 현실에서의 성소수자들의 권리는 제한되고 있습니다. 픽션을 즐기는 사람들도 이런 상황을 알아줬으면 좋겠습니다. 동성애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고 사람으로서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생각하던 중에 기획한 것이 이번 후원 프로젝트입니다. 좋아하는 사람과 있어도 좋고, 혼자 있어도 좋은, 누구나 희망하는 미래를 선택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 현실로 가는 한 발을, 함께 내딛지 않겠습니까?"
작가는 소수자의 이야기가 담긴 콘텐츠가 등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나아가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소수자 이야기가 단지 이야기(픽션)으로 끝나선 안 된다고, 현실과 연결되어야 한다고. 유자키 사카오미 작가가 창작자로서 던진 이 말은, 창작자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단면적으로 보여 준다. 콘텐츠를 제작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런 영향력에 대해서도 함께 생각한다면, 현실에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
관련 제도와 정책이 보완되고, 창작자들 또한 적극적으로 소수자 이야기를 가시화하는 일에 관심을 가진다면, 분명 많은 것이 바뀔 수 있다. 그리고 시청자들, 우리 사회의 역할도 중요하다.
소수자의 이야기가 담긴 콘텐츠를 신기해 하고, 귀여워하고, 재미있어 하고, 즐기는 것도 좋지만 2023년 한국 사회가 차별금지법조차 없는 곳이라는 것, 생활동반자법도 제정되지 않았다는 것, 장애인이 이동하고 교육 받고 일하러 가기 위한 투쟁을 힘겹게 이어나가고 있다는 것, 이주민·난민을 향한 혐오를 표출해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 곳이라는 걸 상기해야 한다. 그게 정말 변화의 시작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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