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내 여성혐오와 히잡 시위
이란의 여성혐오는 악명이 자자하다. 작년 9월, 20대 여성 한 명이 히잡을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된 후 의문사했다. 곳곳에서 반정부 시위가 터졌다. 이란 정부는 무력으로 진압을 했다. 지난 카타르 월드컵에서는 여성들에게 연대하는 이란 남성 축구 국가대표 선수들이 이란 국가를 제창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란 정부는 반정부 시위를 지지한 이란의 여성 배우를 선동 혐의로 체포하는 등 계속해서 탄압을 이어갔다.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3개의 얼굴들〉(2018)은 이런 이란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모큐멘터리(mockumentary: mock + documentary, 허구의 이야기지만 다큐멘터리처럼 구성하는 방식) 형식의 이 영화는 휴대폰 화면비의 영상으로 시작한다. 영상에는 이란 시골 마을에 살고 있는 한 소녀, 마르지예가 등장한다. 마르지예는 예술학교에 합격해 입학하려고 했으나 보수적인 가족들의 반대에 맞닥뜨렸다. 마르지예는 죽는 것밖에 답이 없다며 자살을 암시하는 내용을 찍는다. 그리고 이 영상은 이란의 유명 여성 배우 자파리에게 전달된다. 영상 속에서 마르지예는 자파리가 자신을 구해주길 바랐으나 실패했다고 말한다.
자파리는 촬영장을 벗어나 파나히 감독과 함께 마르지예가 살고 있는 마을을 찾아 떠난다. 자파리는 이 영상이 장난이길 간절히 바란다. 자파리가 촬영장을 이탈하는 바람에 현장은 난리가 났다. 분노한 스태프가 파나히 감독에게 전화를 해보지만, 파나히 감독은 자파리와 함께 떠난다.
-여기서부터 영화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유의하세요.-
좁은 길을 담는 롱테이크
그들은 길을 물어 마을에 간다. 마을로 가는 길은 좁고 험난하다. 가파른 벼랑에 도로가 있고 차 한 대밖에 다닐 수 없는 길이다. 길 초입에서 경적을 울려 반대 방향으로 오는 차가 있는지 확인해야만 안전하게 지나갈 수 있다. 좁디좁은 길은 마르지예를 비롯한 예술을 꿈꾸는 이란 내 여성들의 미래와 닮아있다. 쉽게 마을을 벗어날 수 없음을 직접적으로 비유한다.
마르지예는 길을 개척하려 했었다. 좁은 길이 답답해 삽을 들고 도로를 넓히려 했었으나 남자들이 와서 삽을 빼앗아 갔다. 삽은 남자들, 농부들의 것이라는 이유였다. 좁은 길에 체념하지 않고 맞서려 했던 마르지예의 도전을 남성들이 짓밟은 셈이다.
경적 소리를 내 겨우 통과한 좁은 길 끝에서 자파리와 파나히는 마르지예의 집에 도착한다. 마르지예의 엄마는 마르지예가 행방불명된 지 3일째라고 했다. 마르지예의 남동생은 대뜸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며 욕을 해댄다. 마르지예가 사라진 것 자체를 집안의 불명예로 생각하고 잔뜩 분노해있었다. 마르지예가 돌아오면 폭력을 행사할 것이라는 암시를 준다. 자파리는 정말 마르지예가 죽은 것일까 봐 걱정한다.
영화는 계속해서 롱테이크로 진행된다. 차에서 자파리와 파나히가 대화할 때를 제하고는 컷을 거의 나누지 않는다. 카메라는 최소한의 개입을 선택한다. 이는 컷을 자유자재로 나눌 수 있는 극영화와 대비되는 다큐멘터리적 효과를 최대한 주기 위함으로 보인다. 카메라가 그냥 그곳에 우연히 있었을 뿐 연출하지 않은 상황에 가까움을 고의로 드러낸다. 이로 인해 영화의 리얼리티는 의심의 영역에서 벗어나게 된다.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 안에서 이 현실이 프레임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실제 일임을 알리는 데에는 성공적이지만, 한편으로는 현실에 어떠한 개입도 할 수 없는 무력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감독이 모큐멘터리 형식을 선택한 데에는 성차별 현실을 그대로 담아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이 영화가 온전한 극영화였다면 사람들은 마르지예의 생사 여부에 이입을 해 길에서 일어나는 대화들에 관심을 두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 속에 이란의 현실이 그대로 묻어나오기에, 모큐멘터리 형식은 이 이야기를 전하기에 가장 적합한 형식이었을 것이다.
마르지예는 살아있었다. 예술을 하고 싶어서, 영화가 하고 싶어서, 연기가 하고 싶어서 그저 벗어나기 위해 이러한 방법을 택한 것이다. 이 사실을 안 자파리는 분노한다. 자신을 속이고 생명으로 장난을 쳤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르지예는 제발 자신의 처지를 알아달라고 울부짖는다. 자파리는 차갑게 돌아선다.
자파리와 파나히는 마을을 떠나려 한다. 역시 좁은 길을 통과해야만 한다. 헌데 문제가 생겼다. 다친 소가 누워 길을 막고 있는 것이다. 소의 주인으로 보이는 남성이 파나히에게 다가와 말을 한다. 파나히는 소를 치우는 방법을 말하지만 남성은 강력히 반대한다. 소의 생명 때문이 아니다. 저 소는 정력이 대단해 하룻밤에도 10명의 암소를 임신시키며, 저 소의 고기를 먹으면 80세 노인도 장사가 된다는 이야기를 한다. 내일 암소의 무리가 올 것이며 교배를 위해 수의사가 올 때까지 소를 살려야 한다고 말한다.
헛된 남성성을 상징하는 단어 중 하나가 정력이다. 누워서 길을 막고 있는 소는 현재 이란의 남성 권력을 은유한다. 마르지예가 넓히지 못하게 남성들이 막았던 도로가 이번엔 자파리의 길을 막는다. 마을은 고여 있는 우물 같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다. 결국 파나히는 차를 돌릴 수밖에 없다.
과거, 현재, 미래의 여성 예술가들
마르지예가 3일 동안 머물렀던 곳은 이란혁명(1979년) 이전 유명세를 날렸던 셰자드라는 여성 배우의 집이었다. 자파리는 다시 그 집을 찾아간다. 마침내 한 집에 과거를 대표하는 셰자드, 현재를 상징하는 자파리, 미래를 꿈꾸는 마르지예 ‘3개의 얼굴들’이 모였다. 하지만 카메라는 밖에서 묵묵히 지켜본다. 실루엣만 보일 뿐이다. 남성인 파나히 감독은 다가갈 수 없다. 자파리와 파나히가 같이 묵는다고 했을 때에 반응이 뻔하기 때문이다. 카메라도 파나히 감독과 함께 집 밖에 머무른다.
다음 날이 되고 자파리와 파나히는 마르지예를 집에 데려다준다. 자파리는 마르지예의 부모를 설득하러 따라 들어간다. 파나히 감독은 앞에서 차를 대고 기다리고 있다. 그 때 마르지예의 남동생이 결국 파나히 감독의 차창에 벽돌을 던진다. 마지막 컷, 자파리와 파나히가 마을을 떠난다. 카메라는 차 안에서 떠나는 길 방향을 찍는다. 차 앞 유리의 깨진 부분이 앵글 우측 부분에 그대로 담긴다.
좁은 길에서 또 문제가 발생한다. 어제 만났던 남자가 말한 암소들의 무리가 오는 것이다. 파나히는 어쩔 수 없이 차를 대고 기다린다. 자파리는 나가서 걷겠다고 말한다. 자파리가 좁은 길을 홀로 걸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또다시 집에서 뛰쳐나온 마르지예가 그 뒤를 따라간다. 둘이 함께 걷는다. 차로 갈 수 없다면 걸어서 가면 된다. 더 오래 걸릴지라도, 다리가 아플지라도 이들은 반드시 앞으로 걸어 나갈 것이다. 카메라는 깨진 차창이 아닌 그들의 모습에 포커스를 맞춘다. 깨진 유리를 뒤로 한 채 그들의 모습이 점점 작아진다.
음악하는 여자는 징그러?
검정치마 2집(2011년 발매)에 실린 ⌜음악하는 여자」에는 이런 가사가 나온다. “음악하는 여자는 징그러, 시집이나 읽으며 뒹굴어 아가씨.” 쏜애플의 보컬 윤성현이 한 여성 싱어송라이터의 음악을 두고 “자궁냄새”가 난다고 말한 것을 지인이 올려 화제가 된 적도 있다. 독립음악 씬 내에서 여성은 ‘마녀’ 아니면 ‘여신’으로 분류된 적도 있다. 예술가 여성에 대한 탄압과 혐오는 역사가 깊으며 지금까지도 그 역사에서 벗어나지 못한 혐오자들이 존재한다. 검정치마는 음악을 하는 남자는 괜찮은 걸까?
음악을 하는 사람들 중 진짜 징그러운 사람들은 따로 있다. 성범죄자 남성의 음악이 울려 퍼지는 거리를 걸을 때면 나는 ‘징그럽다’는 감정을 받는다. 예술과 그것을 창작한 개인은 분리되어야 하는 것마냥 외치는 옹호자들은 왜 여성 창작자와 예술은 분리를 못해 안달일까. 여성들이 음악을, 창작을 하는 것이 성범죄를 저지르는 것보다 징그러운 일인지 묻고 싶다. 아니면 사회적 약자만 골라서 징그러워하는 습성이 따로 있는 것일까.
노래 가사와 개인의 발언뿐만 아니라 예술계 내에는 ‘구조적 차별’이 분명 존재한다. 여성 배우와 남성 배우의 임금 격차는 할리우드부터 유명하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에 출연한 최우식 배우는 경력이 훨씬 많은 조여정 배우보다 높은 출연료를 받아 화제가 되었다. 성별 권력 앞에서는 경력도 실력도 무의미해진다.
힙합 경연 프로그램 ‘쇼 미 더 머니11’에서 여성 래퍼인 이영지가 우승을 했다. 정당한 우승임에도 불구, 많은 사람들이 단순 인기투표의 결과라며 그의 실력이 우승자 수준이 아님을 논했다. 여자는 경연에서 우승을 해도 더 증명을 해야만 한다. 여성 예술가의 삶에는 증명이라는 시험이 끝없이 존재한다.
영화를 하고, 음악을 하는 한 명의 비남성 창작자로서 마르지예의 이야기는 그저 먼 나라의 일로만 느껴지지 않았다. 국가별 여성 혐오와 차별의 강도를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여성에게는 국경이 없다는 말이 실감 난다. 단편영화제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수많은 여성 감독들이 장편 데뷔를 쉽게 하지 못하는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영화의 장비들이 비장애인 성인 남성 기준으로 만들어진 것 또한 우연이 아니다.
성차별이 사라진다면 이러한 문제들 또한 빛바랜 구시대의 유물로 남겨질 것이다. 계속되는 탄압 속에서도 계속해서 과거, 현재, 미래를 연결해나가는 3개의 얼굴들을 보며 더 많은 비남성 예술가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에게 무한한 응원과 연대의 박수를 보낸다. ‘여성영화’라는, 지금은 필요한 이름이 불필요해질 날을 상상해 본다.
[필자 소개] 신승은: 싱어송라이터이자 영화감독. 1집 앨범 [넌 별로 날 안 좋아해](2016), 2집 앨범 [사랑의 경로](2019)를 발매했으며 단편영화 〈마더 인 로〉(Mother-in-law, 2019), 〈프론트맨〉(Frontman, 2020) 등을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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