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소개] 여성들의 말과 글이 세상에 더 많이 퍼지고 새겨져야 한다고 믿으며, 서점에서 퍼뜨리고 싶은 여자들의 책을 고른다. ‘살롱드마고’의 신간 책장에서 마음에 새겨지는 책을 한 권씩 밑줄 그으며 꼭꼭 씹어 독자들과 맛있게 나누고자 한다.
페미니즘 블랙 코미디: 사라진 여자
“중요한 것은 내가 내 삶을 얼마나 믿을 수 있느냐다. 내 삶을 믿기 위해서는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홍현진 『나를 키운 여자들』 52쪽)
얼마 전 관공서에 업무를 처리하러 갔다. 담당자가 자리에 없어 가져간 서류를 뒤적이며 기다리고 있는데, 한 남성이 들어와 내가 기다리던 창구 앞에 앉았다. 그때 담당자가 돌아오더니 바로 그를 친절히 응대해 주었다. 뒤에서 기다리던 내가 조심스럽게 “저 아까 왔는데 서류 제출해도 될까요?” 묻자 담당자는 눈을 들어 나를 힐긋 한 번 보더니 자신이 보던 서류로 고개를 내렸다.
분명 나와 눈이 마주쳤고 내 말도 들렸을 텐데 투명인간 취급하는 태도가 황당했다. 그때 다른 남성 둘이 또 내 자리 앞에 끼어들더니 담당자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담당자는 친절하게 인사하며 그들의 문의를 듣고 답해주었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큰 목소리로 “제가 먼저 왔는데 얼마나 더 기다려야 돼요?”라 물었다. 사무실의 모든 근무자와 방문객들 눈이 순식간에 내 쪽으로 쏠리더니 1초간 정적이 흐른 채 ‘일시정지’ 모드가 됐다. 나는 마치 진공 상태의 연극 무대 한가운데 선 기분이었다.
담당자는 내게 끝까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보다 못한 옆자리 여직원이 약간 허둥지둥하며 대신 응대해 주어 겨우 일 처리를 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이런 대접은 이곳이, 저 사람이 처음이 아니다. 나이가 더 어리거나 여성이라는 이유로 끊임없이 뒤로 밀리거나 먼저 양보하라는 암묵적인 요구를 받는 상황은 평생에 걸쳐 겪어왔다. (성)차별은 가장 사소해 보이는 일상 속에서 ‘별것 아닌 일’처럼 벌어진다. 거기에 제동을 걸어야 ‘별일’이 되고, ‘별 사람’이 되는 건 덤으로 따라온다.
최근에 본 드라마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OTT 플랫폼 중 하나인 애플TV+의 〈로어Roar: 여성들의 뜨거운 외침〉은 ‘페미니즘 블랙 코미디’를 표방한 각각의 에피소드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1편 ‘사라진 여자’는 인종차별 사회에서 흑인 여성이 어떻게 타자화되는가를 소름 돋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백인들은 흑인 여성 주인공이 하는 말을 전혀 듣지 못하고, 심지어 카메라조차 그녀를 촬영하지 못한다. 주인공은 오로지 피해자 정체성으로만 세상의 주목을 받을 수 있는데, 그조차도 백인들의 ‘선의’나 ‘윤리의식’을 증명하는 데 이용된다.
관공서에서 조용히 나를 무시한 담당자와 계속 내 앞을 새치기한 남성들은 어쩌면 드라마 〈로어〉 속 백인들처럼 내가 잘 보이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목소리를 내 항의 표시를 했을 때 마치 작은 돌을 던져 얼음을 깬 느낌이었다. 정당한 요구임에도 모두의 시선과 함께 불편해하는 기색이 훅 다가왔는데, 나는 그것이 창피하거나 민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흐름에 균열을 낼 힘이 나에게 있다는 사실이 반갑고 다행스러웠다. 나에게 힘이 없다고 느껴지면 부당한 대우를 당했을 때 그것에 순응하려 애쓰거나 불평에 그치고 만다. 보이지 않는 존재들, 세상이 들어주지 않는 목소리를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해 우리에게는 자신에 대한 믿음과 더 과감한 행동이 필요하다.
길들여지지 않는 여자들
“피가 철철 날 것을 알면서도 부딪치고 흔들리며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따르는 여자들의 서사를 만나면서 나는 해방감을 느꼈다. 세상에 길들여지기를 거부한 여자들, 눈을 똑바로 뜨고 싸우는 여자들, 마음껏 욕망하는 여자들, 경계를 넘어 끝까지 가보는 여자들, 이전과는 다른 내가 된 여자들의 서사를 통과하며 내 안에 차곡차곡 쌓여 있던 견고한 벽이 조금씩 무너졌다.” (11쪽)
책 『나를 키운 여자들』에는 저자 홍현진 씨가 본 영화 27편과 드라마 5편의 ‘결점 있는’ 여성 캐릭터들이 소개된다. “모범생처럼 착실히 살아왔다” 자평하는 저자는 오랜 직장생활을 그만둔 후 자기만의 길을 걷기 시작하며 일과 육아를 병행하던 중, 번아웃을 겪고 자체적인 안식년을 가졌다. 삶이 흔들린 시기, 여성으로서 주어진 여러 정체성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하다 만난 영상작품 속 ‘미친 여자들’에 대해 글을 쓰며, 저자는 해방감을 느끼고 ‘진짜 나’를 인정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나 자신에게, 그녀들에게 좀 더 친절해지고 싶어졌다. 벽이 무너진 자리에는 용기와 사랑이 자랐다.” (12쪽)
책을 읽으며 세어보니 소개된 작품 중 절반 정도는 나도 본 것이다. 이미 본 작품에 관한 글에서 공감되는 부분을 발견할 때, 영화를 보고 나서 친구와 재미있게 수다 떠는 기분이 들었다. 아직 보지 못한 작품에 관한 글을 통해서는 ‘추천작 체크리스트’를 만들 수 있었다. 『나를 키운 여자들』은 단순히 작품 비평이나 캐릭터 분석을 넘어, 여성으로서 자신의 삶과 연결해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저자는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사라 코랑겔로, 2018)에서 천재 시인인 다섯 살짜리 제자를 질투하면서도 동경하는 리사(매기 질렌할 분)를 통해 “글쓰기는 필연적으로 질투심과 열패감을 동반한다”는 것과, 그럼에도 글쓰기를 사랑하는 마음을 함께 고백한다. “글쓰기는 예정된 실패를 알면서도 자꾸만 기대하게 되는 이상한 일이다.”
또 영화 〈아워 바디〉(한가람, 2018)에서 달리기를 시작하며 삶에 대한 태도가 변화하게 되는 자영(최희서 분)을 보면서,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제 손으로 파괴하는” 주인공처럼 저자도 “지금까지 살아온 관성과는 다르게 살아보고 싶다”고 고백한다. 처음 영화를 보았을 땐 ‘도대체 왜 저래’라 생각한 여성 캐릭터들의 이해할 수 없는 모습과 선택들 속에서 저자는 삶을 되돌아보고 자신의 욕망을 발견하게 된다.
낯설고 특이한 엄마(들)
책의 3부는 ‘엄마라는 이름의 여자’로, 특히 모성의 다양한 측면에 주목한다. 저자가 엄마이자 딸로서 살아가며 필연적으로 모순적일 수밖에 없는 내밀한 감정과 관계에서의 갈등을 올올이 풀어내는 부분이 인상적이다. 책에서 언급한 영화 〈로마〉(알폰소 쿠아론, 2018)의 클레오(얄리차 아파리시오 분)가 죽은 아이를 분만한 후 울면서 “저는 그 애를 원치 않았어요.” 말하는 장면은 읽기만 해도 가슴이 저릿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엄마-되기’에 대해 여성들이 갖는 복잡다단한 감정과, 그 아래 숨죽은 욕망에 대해서도 떠올리게 한다.
저자는 다른 영화를 소개하는 글에서, 어렸을 때 “엄마에게도 자기 인생이 있다고 말하는 엄마를 꽤 오래 비정상적이라 생각했다. 엄마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았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자신이 엄마가 되고 나서 “모성은 아이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때로는 아이를 사랑하고 때로는 아이를 미워하는 양가적인 감정”임을 깨달았다고 담담히 이야기하며, 엄마를 바라보는 시선과 그 안에 물든 감정이 달라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나 역시 엄마가 자신과 나 사이에 선을 그으려 할 때, 엄마가 가족이나 자식보다 자신의 욕구를 우선할 때, 그런 엄마의 모습이 낯설고 특이하다 여기곤 했다.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고 공부를 하면서도 모성에 희생을 기대하는 마음은 한참 동안 쉽게 눌러지지 않았다. 이렇게 뿌리 깊은 모성신화를 탈피하기 위해, 책에 나온 영화 〈로스트 도터〉(매기 질렌할, 2021) 속 레다(올리비아 콜맨 분, 제시 버클리-젊은 레다 역)처럼, “타오르는 욕구를 가진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낯설고 특이한 엄마 캐릭터가 세상에 더 많이 필요하다. 딸(자식)과 엄마가, 엄마가 자기 자신과 화해할 수 있도록.
“언젠가부터 엄마에 대한 애증이 서서히 희미해졌다. 엄마도 엄마의 ‘한계 안에서 나를 사랑했을 것이라고, 그리고 그것은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백수린 『친애하고 친애하는』)이라는 걸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241쪽)
욕망하는 여자들의 목소리
최근 SBS 뉴스는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을 받은 배우 양자경(Michelle Yeoh Choo-Kheng, 미셸 여)의 수상소감(“누구도 여러분에게 당신의 전성기는 지났다고 말하지 못하게 하세요. 결코 포기하지 마세요.”)을 보도하며, 이 발언 바로 앞에 말한 “여성 여러분(And ladies)”의 음성과 자막을 모두 지워 큰 비판을 받았다. 전세계에 실시간 방송된 말을 공신력 있는 언론사에서 지워버리는 비현실적인 장면을 마주하며, “현실은 언제나 영화보다 더하다”는 말을 곱씹게 된다.
양자경은 또한 이렇게 말했다. “오늘 밤 이 방송을 보고 있을 저와 비슷한 모습을 가진 소년 소녀들에게 이 상은 희망과 가능성의 등대입니다.”
오늘 밤 우리가 보는 영화와 드라마에 나온 여성 캐릭터들은 우리에게 어떤 희망과 가능성을 보여줄까. “우리에게는 참고할 만한 미친 여자가 더 많이 필요하다.”(『나를 키운 여자들』 추천사에서, 정문정 작가) 욕망하는 여자들의 목소리는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필자 소개] 달리. 전북 남원에 있는 지역서점이자 페미니즘 문화공간 ‘살롱드마고’의 공동운영자이며 에세이 『몸이 말하고 나는 쓴다』(2021)의 작가이다. ‘고요한 해방, 나의 목소리를 찾는 글쓰기 여행’, ‘삶의 빈 칸을 채우는 글쓰기’ 등 여성들과의 글쓰기 활동을 기획,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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