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덕질을 응원합니다

페미니스트 국어 선생들이 말하는 ‘요즘 학교 어떤가요’⑭

산양 | 기사입력 2023/05/23 [12:31]

당신의 덕질을 응원합니다

페미니스트 국어 선생들이 말하는 ‘요즘 학교 어떤가요’⑭

산양 | 입력 : 2023/05/23 [12:31]

[기획의 말] 페미니스트로 살고자 하는 국어 교사들이 모여 교실과 학교에서 성평등한 국어 교육을 펼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성평등 국어교사 모임’을 만들어 고민을 나누고 대안을 만들어 온 국어 교사들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그래서... 스밍은 어떻게 돌린다고?”

 

코로나19로 외출이 자유롭지 않은 상황에서, 지루함을 견디려고 유튜브 바다를 떠다니다가 한 아이돌의 무대를 보고 빠져들었다. 태어나 처음 제대로 ‘덕질’을 하자니 눈치로만 깨우치기에는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그런 나를 구한 건, 인생의 대부분을 덕질을 하며 보낸 캐럿 K다(‘캐럿’은 그룹 ‘세븐틴’의 팬덤 이름이다). 학교에서는 제자지만 그는 케이팝 선배님이다. 포카 직거래는 어떻게 하는지, 스밍은 어떻게 돌리는지, 티켓팅은 어떻게 하는지, 어디에 가야 케이팝 용품들을 구할 수 있는지를 인내심과 친절함을 발휘해 가르쳐 주었다.

 

누군가의 팬이 되는 건 여러모로 좋지만, 중등 교사로서 장점이 있다. 아이돌 문화에 가장 관심이 지대한 청소년들과의 대화에 괴리감 없이 스며들 수 있다는 점과, 그들의 심리를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계산 없는 열정을 수업에서 다룰 수 있다는 점에서 특히 이롭다.

 

아이돌 팬 세계의 단어와 문화에 눈 뜨고서야 학생들의 대화가 제대로 들렸다. “오늘은 지민 오빠 생일이에요!”라고 외치는 학생의 눈에 담긴 떨림이 보이고, 좋아하는 아이돌의 컴백 당일 옹기종기 모여 눈을 반짝이며 감상을 공유하는 그들의 설렘이 느껴진다. 어떤 것을 좋아할 줄 아는 사람만이 뿜어내는 생기다.

 

하지만, 흔히 덕질이나 팬덤 문화는 청소년 시기의 일시적인 현상이거나, 혹은 현실에 집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는 헛소비로 여겨진다. 아이돌을 좋아하는 여성은 여전히 ‘빠순이’라고 불리며, 좋아하던 연예인이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는 행동을 하면 팬들이 욕을 먹고 해명할 것을 요구받기도 한다. 학생들과 아이돌 덕질 이야기를 할 때 학생들이 유독 눈빛을 빛내는 것은, 그들이 공적인 공간인 학교에서 교사와 이런 이야기를 해선 안 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 팬이 되는 건 여러모로 좋다. 뮤지션이든, 스포츠선수든, 혹은 마블 시리즈든 간에. 그러나 아이돌 그룹을 좋아하는 여성은 여전히 ‘빠순이’라고 불리며, 이들의 ‘덕질’은 헛소비로 여겨진다. 사진은 영국의 팝스타 두아 리파 콘서트 장면. (출처: pixabay)


작년에 한 반은 유독 무언가에 몰입한 학생들이 많았다. 아이돌, 공포 게임, 여자 배구, 아인슈타인 등 장르도 다양했다. 글을 쓰건, 사랑에 대한 문학 작품을 읽건 감정을 이입하는 대상이 각기 달랐으나, 모두가 무언가를 좋아하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도 그 마음을 쉬이 비난하지 않았다.

 

학기 중에 나는 농담처럼 “언젠가 각자가 좋아하는 분야 영업하기 수업 할 거야~!”라고 말했는데, 큰 호응을 얻어 학기 말에 진짜로 서로가 좋아하는 분야 영업하기 수업을 진행했다. 규칙은 간단하다. 좋아하는 특정 분야를 다른 친구들에게 소개하되, 각자의 이해도가 다르니 최대한 간단하게 풀어 설명할 것. 발표 자료는 자유롭게 준비하되 영상은 2분 내외로 사용할 것.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은 마음은 알지만) 발표 시간은 5분을 초과하지 않을 것.

 

수업 과제물 중 처음으로 “제한 시간보다 적으면 감점인가요?”가 아니라 “시간을 초과하면 어떡해요?”라는 질문을 먼저 받았다. 안된다며 으름장을 놓았지만, 모두가 시간을 초과하였고, 그 사실에 누구도 불만이 없었다.

 

우주의 아름다움과 한 세터 선수의 뛰어남과 아이돌 멤버의 작곡 실력과 공포 게임의 공략법이 어우러지는 장르 복합적인 수업이었다. 학생들은 상기된 얼굴로 자신이 아는 정수를 뽑아내고도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지 못했다.

 

수업을 진행하며 특히 기뻤던 것은 청중의 태도다. 일반적인 발표 수업에서 학생은 채점 기준에 맞춰 개개인의 말하기 능력이나 자료 편집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같은 학급 학생이 잘하는 것은 기쁘지만, 내 능력과 비교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학생들은 청중이면서 동시에 평가자다. 하지만, 이 수업에서 학생들은 서로의 열렬한 청중이었다. 모두의 주제가 달랐으므로 직접적인 경쟁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그 장르에서만 통용되는 낯선 어휘를 더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발표자와, 감탄을 연발하며 영업 당할 준비가 된 청중만 있었다. 발표자도 청중도 끝나는 종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아쉬워했다.

 

학생들이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정체성은 그들의 문화에서 온다. 학생들은 유튜브와 SNS, TV 프로그램에서 동질성을 느끼는 문화를 수용한다. 번역하기 어려운 언어, 상황적 맥락과 개그 코드를 습득하며 그들은 정체성을 선택하고 만들어간다. 덕질도 마찬가지다. 실시간으로 접속하며 정보를 공유하고, ‘총공’에 참여해 응원하는 마음을 보태며 유대감을 느낀다. 같은 것을 좋아하는 것은 나이와 거리를 가볍게 뛰어넘어 우정을 쌓는 충분한 조건이 된다.

 

가치관이 요동치는 청소년 시기, 많은 학생들이 언제 변할지 모르는 우정이나 이해받지 못하는 자신의 마음을 팬덤 공동체 안에서 마음껏 털어놓는다. 왜 좋은지나 싫은지를 설명하지 않아도 서로를 이해하며, 아티스트의 성장과 고난기를 함께 겪고 극복하며 자란다. 그것은 개인이 몰입하여 성장하는 과정이자 하나의 문화다. 세상을 향해 도전하라는 메시지와 동시에 현실적인 진로를 설정하라고 종용하는 묵직한 사회의 목소리 안에서 스스로 행복을 찾고 창조하는 꿈틀거림이다.

 

생각해보면 교과서는 덕후들이 만든 것이다. 이 작가의 작품은 정말 의미 있어, 이 발음은 이렇게 해야지! 더 말을 잘하고 잘 듣기 위해서는 이걸 알아야 해, 라는 것을 누군가에게 끈질기게 설득할 수 있는 사람들의 창작물이다. 신학기에 교과서를 받으면 소설 작품은 모조리 읽던 한 학생이 자라서 국어 교사가 되었듯, 더 많은 학생들의 좋아하는 마음을 수업에 끌어오고 싶다. 자신의 세상을 설명할 수 있는 기술을 알려주고 그 세계에 함께 빠지고 싶다. 그렇게 우리의 교실을 넓히고 싶다. [연재 끝]

 

*위 글은 성평등 국어교사모임에서 함께 이야기 나누고 작성한 내용입니다. 이메일 주소 femi_literacy_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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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이팅 2023/06/03 [19:43] 수정 | 삭제
  • 연재 정말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들의 존재가 앞으로도 저에겐 힘이 될 것 같아요. 감사드려요!!
  • 개구리소녀 2023/05/29 [00:36] 수정 | 삭제
  • 선생님의 덕질도 응원합니다 ㅎㅎ
  • 감자 2023/05/25 [22:25] 수정 | 삭제
  • 맞아요. 덕질은 자유인데 여성이라는 이유로 은근이 비하되는 게 아직도 있는 거 같아요. 선생님 글 보면서 더 깊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 열차 2023/05/23 [22:45] 수정 | 삭제
  • 덕질하는 여자들이 세상을 끌어가는 것 같아요! 덕질로 세대통합 ㅎㅎ
  • ㅅㅎㅁ 2023/05/23 [14:32] 수정 | 삭제
  • 페미니스트 선생님들을 응원합니다. 이번 연휴에 연재된 글들 다시 정주행하면 제대로 충전이 될 것 같아요. ㅎㅎ
  • ㅇㅇ 2023/05/23 [14:15] 수정 | 삭제
  • 멋진 선생님! 마지막 문단 읽으면서 눈물이 핑 도네요~
  • 감동 2023/05/23 [13:07] 수정 | 삭제
  • 기사 너무 감동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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