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계 미투 운동, 새로운 생태계를 꿈꾸는 무용인들

[미투 이후의 시간은 이전과 다르다] 춤추는 페미니스트로 살아남기

이민진 | 기사입력 2023/06/29 [18:40]

무용계 미투 운동, 새로운 생태계를 꿈꾸는 무용인들

[미투 이후의 시간은 이전과 다르다] 춤추는 페미니스트로 살아남기

이민진 | 입력 : 2023/06/29 [18:40]

-2018년 초, 서지현 검사의 성폭력 고발 이후 미투 운동(#Metoo)이 사회 각계에서 불붙듯 확산되었다. 한국 사회를 뒤흔든 미투 운동, 5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어떤 변화를 만들어냈을까? 각 분야에서 미투 운동을 해온 이들이 ‘변화의 순간’에 초점 맞추어 그 성과를 공유하고, 남겨진 과제를 짚으며, 앞으로 나아갈 길을 모색해본다. [편집자 주]

 

조용하던 무용계에서 ‘미투’가 시작됐다

 

미투 운동으로 한참 영화계, 연극계, 미술계가 뒤흔들리고 있을 당시, 옆 동네에 있던 무용계는 비교적 고요한 편이었다. 하지만 이 고요함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2019년 5월, 서울 소재 모 직업학교에 재직 중인 현대무용가 류ㅇㅇ씨가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추행’ 혐의로 검찰에 기소되었다. 피해자는 가해자가 지도하는 학생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 사건 이후 무용계 종사자들이 연대의 목적으로 다시 한번 모이게 되었다.

 

나는 페미니즘 독서모임을 같이 하고 있던 동료를 통해 이 사건을 알게 되었다. 나 역시 학교를 막 졸업한 상태였기 때문에 피해자가 겪은 일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에게 힘이 되어주기 위해 ‘방청 연대’에도 몇 차례 참석했다. 가해자 측 증인이었던 피해자의 학교 선배는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먼저 가해자에게 관심을 보이는 행동을 했다고 증언했다. 가해자는 피해자와 연애의 감정으로 ‘교제’했던 것은 사실이나, 어떤 강요도 폭력도 없었다고 주장했다. 사건에 대한 진상을 알게 될수록 너무 화가 났다.

 

이번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친목과 공부의 목적으로 시작했던 페미니즘 독서모임은 ‘페미플로어’라는 단체로 발전했다. 페미니즘의 ‘페미’, 댄스 플로어(Dance floor)의 ‘플로어’를 합친 이름이다. 페미니즘이 깃든 댄스 플로어에서 안전하고 즐겁게 춤을 추고 싶은 염원이 담겼다. 안무가, 무용수, 예술교육자 등으로 무용계 내에서 다방면으로 활동하고 있는 4명의 여성 무용인(유지영, 윤상은, 이민진, 주혜영)이 함께한다. 나의 소중한 동료들이다.

 

▲ ‘문화예술계 성희롱 성폭력 예방 행동강령 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페미플로어의 #무용계_내_행동강령_쓰기 3차 서울 워크숍 현장 모습, 장소는 어반무브먼트살롱 댄서스라운지. 무용계 안팎으로 많은 참여자들이 함께 자리해주었다. ⓒ김효진


독서모임이 페미니즘 단체로 진화하는 과정에는 ‘문화예술계 성희롱 성폭력 예방 행동강령 개발 사업’을 진행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미술 장르의 여성예술인연대(AWA), 인디음악 장르의 부산문화예술계 반성폭력연대, 그리고 무용 장르의 페미플로어 이렇게 3개 단체가 함께했다. 페미플로어는 총 3번의 #무용계_내_행동강령_쓰기 워크숍을 서울과 부산에서 진행하며, 참여자들과 성평등한 무용계를 위한 행동강령을 만들었다.

 

무용계 성희롱 성폭력 예방 행동강령 만들기 사업이 마무리될 때 즈음, 류ㅇㅇ 사건의 재판도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 사건이 알려졌을 때보다는 대중의 관심도가 많이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방청연대에 오는 사람의 수도 줄어들었다. 2020년 초, 나는 마지막 재판의 방청연대를 갔다. 가해자는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응? 고작 2년?’이라고 생각하다가도 ‘요즘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면 징역 선고를 받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되나’라고 체념하는 마음도 들었다. (가해자는 항소했지만, 2심 재판부는 기각했다.)

 

페미니스트 무용수가 바라본 무용계

 

사실 공론화가 되지 않았을 뿐, 이 사건 이외에도 무용계에서는 많은 성희롱 성폭력 사건이 있었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특히 발레와 한국무용처럼 그 춤이 발생했을 당시의 고전과 전통이 아직까지도 절대적 진리처럼 자리잡고 있는 단체나 공연 현장에서는 그 안에서 발생하는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나기 더욱 어렵다. 발레는 왕자, 공주, 요정이 등장하는 레퍼토리 공연 수요가 주이다. 전통한국무용은 무형문화재 보유자가 이수자에게 춤을 전수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어 권력형 성폭력이 발생하거나 그것이 묵인되기 정말 쉬운 생태계이다.

 

이런 구조가 무용의 도제식 교육 체계의 근간이 된다. 개인 레슨으로 한번 인연을 맺은 선생님을 따라서 그 선생님이 추천하는, 때로는 강요하는 학교를 지원한다. 그 학교는 대부분 레슨 선생님의 선생님인 교수님이 계신 곳이다. 대학 진학 후에 교수님이 초빙한 선생님의 수업을 듣고, 또 그 선생님의 공연에 무용수로 참여한다. 학교 공연 이외의 외부 활동을 하면 미운털이 제대로 박힌다. 무용을 늦게 시작한 편인 나는 무용계 내의 사제간 권력 구조가 다소 충격이었다. 학생들에게 학교에 대한, 선생님에 대한 일종의 ‘충성심’을 강요하는 것이 참 별로였다. 군대도 아니고.

 

제일 참을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여자 무용수와 남자 무용수 사이의 차별 대우다. 무용계는 다른 예술 장르에 비해 성비 차이가 크다. 여성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다. 남자 무용수는 희소성 있는, 귀한 존재가 되었다. 몸, 실력, 행동, 태도에 대한 기준도 남자 무용수에게 더 관대하게 적용되었다.

 

여성 무용수들에게 요구되는 ‘자기 관리’의 기준 역시 나는 동의할 수 없었다. 신체적, 심리적 안위는 모두 무시한 채, 오로지 남자 무용수가 쉽게 들 수 있는 가벼운 몸, 딱 달라붙거나 몸이 많이 드러나는 의상을 망설임 없이 입을 수 있는 몸을 늘 요구한다. 학교에서나, 무용단에서나 나는 내 몸을 있는 그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여자 치고’ 어깨가 유독 넓은 탓에 사람들이 나에게 중성적, 남성적인 이미지를 덧입혀 바라보는 일도 많았다. ‘어우, 어깨를 보니 너는 운동해도 되겠어.’

 

▲ 2020 서울국제공연예술제 SPAF, 프랑스 안무가 제롬 벨 〈갈라〉 공연의 한 장면. 나는 노랑색 머리띠를 하고 있다. 모든 몸을 위한 갈라. 소중한 인연들을 많이 만났다. ⓒJérôme Bel facebook

 

불편한 것들이 계속 눈에 보이기 시작하면서 나는 더 안전한, 더 즐거운, 더 좋은 작업 환경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권위적인 남성(혹은 여성)이 없고, 나에게 마른 몸을 요구하지 않는 작업 환경. 나는 당시 활동하던 무용단을 나오기로 결정하였고, 스스로 아웃사이더가 되었다. 그래야만 이 구조에서 조금이라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무용수로서의 일이 점점 줄어들고 있지만, 이것이 내가 살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는 것을 안다.

 

없는 무용’: 무엇이 없으면 괜찮아질까?

 

코로나19 팬데믹도 터지고, 페미플로어는 타의 반 자의 반으로 잠시 휴식기를 가지던 와중에 작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청년예술가 네트워크 활성화 지원사업에 선정이 되어 ‘없는 무용’ 프로젝트를 기획하게 되었다. 성희롱 성폭력 예방 행동강령 만들기를 통해 무용 교육 환경과, 창작 환경에서 안전하기 위해서 지켜야 하는 약속들을 제안했다면, 이번에는 무용수의 삶과 일상에 대입할 수 있는 페미니즘 실천을 고민해보기로 했다.

 

‘없는 무용’은 당연하다고 여기는 ‘어떤 것’이 사라진 상태를 상상하며 기획한 프로젝트이다. 페미플로어 멤버들은 평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주제들을 엮어서 워크숍, 강의, 인터뷰, 공연 등을 진행했다. ‘착취 없는 밥 먹기’, ‘유감 없는 살’, ‘폭력 없는 오르가즘’, ‘안무가 없는 춤’ 총 4개의 프로그램을 진행하였고, 마지막에는 없는 무용 페스티벌을 개최하여 이 주제에 관심을 가진 무용인들이 한데 모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

 

내가 진행을 맡은 프로그램은 ‘폭력 없는 오르가즘’이다. 늘 몸이 관객에게 보여져야 하는 직업인 무용수가 무대에서 어떻게 섹슈얼리티가 삭제되고, 또 타의로 드러나게 되는지를 고찰해보는 자리였다.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SHARE)’에서 제작한 ⌜에브리바디 플레져북」을 워크북으로 활용하였는데, 워크북 활동 중 하나인 ‘플레져미터’에서 성적 경험에 작업 경험을 대입시켜 작업 환경 만족도를 확인해보았다. 그리고 더 즐겁게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 필요하고 변화해야 하는지 참여자들과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무용이랑 섹슈얼리티가 무슨 상관이 있어?’라는 질문이 무색하게, 섹슈얼리티는 거의 모든 것과 관련이 있었다.

 

▲ 없는 무용 페스티벌. 2022년 12월 29일. 장소는 윈드밀. 프로젝트에 대한 발표를 하고 있는데 너무 떨려서 속사포 랩을 해버렸다. ⓒfiveohfive


‘불편한 상황이 돼도 괜찮아, 더 나아가기 위한 거야’

 

공동체, ‘팀’이 중요시되는 공연예술계 내 작업환경에서는 나의 안전, 나의 즐거움을 위해서 어떤 변화를 요구하거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출연 계약서도 공연 직전 혹은 공연 도중에 작성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무대에 올라가는 순간까지 나는 언제나 ‘대체 가능한 존재’라는 것에 대한 불안함도 있다.

 

또 어떤 문제점을 제기했을 때 다음 작업 기회에 내가 제외될 것이라는 불안감도 함께 존재한다. 안무가도 자기 말을 잘 듣는 무용수와 함께 일하기를 원하지, 분위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과 일하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듯 무용수의 경력과 생계와 직결되어 있는 문제다 보니, 공연이 제작되는 과정에서 어떤 제동을 거는 ‘불편한 사람’이 되기에는 사실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다행히 가끔 ‘불편한 사람’의 역할을 관객이 해주기도 한다. 2021년 국립발레단에서 공연 예정이었던 〈말괄량이 길들이기〉 작품 속에 장애인을 희화화하고 비하하는 장면이 있다고, 한 발레 팬이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넣었다. 이 관객은 발달장애가 있는 아이의 엄마이다. 결국 국립발레단은 작품의 저작권을 가지고 있는 존 크랭코 재단의 허락을 받아 문제의 장면을 안무를 수정하여 무대에 올렸다. 소비자였기 때문에 가능한 변화였을까? 그 춤을 직접 춰야 하는 우리는 왜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까?

 

밖에서 보기에 남다른 투쟁 정신과 해방 의지를 가진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충격적이게도(?) 나는 평화주의자 기질이 있다. 생각이 아무리 꼬여 있어도 행동으로 옮기는 데에는 신중한 과정이 필요한 편이다. 내 속에서 늘 여러 개의 자아가 싸운다. 지금 어떤 것이 불편하고, 어떤 점은 양보할 수 있고, 어떤 점은 양보할 수 없고… 속에서 무수히 많은 기준과 조건을 생각하면서 결정 내리기를 연습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 눈치를 정말 많이 본다.

 

솔직히 지칠 때도 있다. 그리고 이렇게 많이 고민한다고 해서 나에게 올 폭력과 상처를 온전히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친구의 이빨 사이에 시금치가 낀 걸 발견하면 빼기 전까지 계속 신경 쓰이듯이, 한번 불편한 것이 눈에 보이면 그걸 무시할 수가 없다. 페미니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작업을 하다 보면, 작업 안에서 꼭 누군가는 이빨 사이에 시금치가 껴있다. 그러면 또 어떤 불안감이나 혹은 분노에 차오르게 되고, 작업에 집중할 수가 없게 된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내 안의 분노와 괴로움을 다스리며 불편한 것을 솔직하게 말하기 위해서, 소통하기 위해서 연습 중이다. 작업 안에서의 논쟁, 대립, 분란의 상황이 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내려놓는 훈련과 함께. ‘모든 것이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 불편한 상황도 괜찮아. 더 나아가기 위한 것이야.’라고 대뇌이며. 그래야만 더 좋은 동료, 더 좋은 작업을 만나고 계속해서 춤을 출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 소개] 이민진. 무용계 내 페미니즘 단체 ‘페미플로어’의 멤버로 활동하고 있다. 그 이외의 시간에는 여러 작업을 떠돌며 작업에서의 나와 일상에서의 나 사이의 간극을 줄이기 위해 노력 중이다. 구조냥이 미미, 키키, 아보, 카도와 동거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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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독 2023/07/02 [23:45] 수정 | 삭제
  • 알고 보면 군대보다 더하죠ㅠ
  • S.E 2023/07/01 [11:07] 수정 | 삭제
  • 말괄량이 길들이기 안무 수정한 것 가지고도 말이 많았죠..... 불편한 상황도 괜찮아. 더 나아가기 위한 것이야. 라는 말이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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