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 운동이 가져온 것 ‘작은 승리를 기억하라’[미투 이후의 시간은 이전과 다르다] 부산문화예술계 반성폭력연대-한국 사회를 뒤흔든 미투 운동은 어떤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을까? 각 분야에서 미투 운동을 해온 이들이 ‘변화의 순간’에 초점 맞추어 그 성과를 공유하고, 남겨진 과제를 짚으며, 앞으로 나아갈 길을 모색해본다. [편집자 주]
그건 예술이 아니라 성폭력입니다
2016년 10월은 내 생애 가장 강렬한 경험으로 기억 저장고에 새겨진 날이자, 트위터를 중심으로 한 문화예술계 성폭력 고발 운동이 시작된 해이다. 미투 이후를 이야기할 때면 어느새 2016년 10월로 돌아가게 된다. 오랜 시간 예술계 내에서 폭력이라 부르지 못했던 경험을 폭력이라고 고발했던 그 순간을 대면한 목격자로서 지금, 어떤 언어로 그 시간을 재해석해야 할지 매번 쉽지 않다.
미투는 갑작스럽게 일어나지 않았다. 노동 시장에서 여성들이 겪는 임금과 기회의 불평등, 일상화된 성희롱과 여성비하 현상들은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었고, 2015년 어느 팝 칼럼니스트의 페미니스트 비하 발언이 문제가 되면서 페미니즘 운동의 불씨가 재점화된다. 트위터를 중심으로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릴레이가 이어졌고, 그 다음 해인 2016년은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이 여성들의 생존과 인권에 대한 인식으로 확대되면서 마침내, 말하기의 연대가 시작되었다.
문화예술계 성폭력 고발운동에 함께 목소리를 내었던 예술가들은 이런 남성중심적 말들을 넘어서기 위해 ‘선언’과도 같은 말과 문장을 남겼다. 영화계 성폭력 고발에 연대한 남순아 감독은 “단 한 명의 동료도 잃을 수 없다”고 말했고, 이성미 시인은 “이제부터 우리의 서사를 우리가 직접 쓸 것입니다”라는 문장을 남겼다. 부산문화예술계 반성폭력연대는 “그건 예술이 아니라 성폭력입니다”라는 슬로건을 통해 이제는 다른 예술과 예술 현장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력하고 단호하게 드러냈다.
부산문화예술계 성희롱‧성폭력 예방센터가 운영되기까지
선언이 된 말하기의 파도는 곳곳에서 일어났다. 부산의 예술가들은 ‘지방에는 미투 없어’라는 또 다른 벽에 맞서 지금-여기, 지역의 문제로 전환하기 위해 노력했다. 예술 활동을 하면서 겪었던 성차별 경험을 sns에 공개적으로 말하며 공론의 장을 만들었다. 이 활동이 현재 부산문화예술계 반성폭력연대 활동의 시초라 할 수 있다.
2016년 00계_내_해시태그를 계기로 문화예술 현장의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 내고자 예술인들은 그룹이나 단체를 만들어서, 각 성폭력 사건 대응을 위한 연대와 문화예술계 성평등정책 추진에 힘을 실으며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행동에 나섰다. 예술인 각자의 생계와 예술 활동을 이어가면서 반성폭력 활동까지 의지를 가지고 해 나가는 동안 쉽게 변하지 않는 현실 속에서 소진을 경험할 때쯤, 2018년 전 세계적인 미투 운동이 일어났다. 그에 따라 다시 한번 운동이 가속화된다.
특히 부산, 경남 지역에서 일어난 미투가 언론 보도를 통해서 알려지면서, 지방에서도 더 이상 미투가 없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2016년 부산문화예술계 반성폭력연대과 부산 지역 여성단체를 중심으로, 부산시와 예술 공공기관에 부산 지역의 문화예술계 성평등 정책을 요구했다. 기나긴 논의 테이블 끝에 예술인들의 성폭력피해 지원을 전담하는 부산문화예술계 성희롱‧성폭력 대응 센터가 임시운영을 하게 되었다.
센터에서는 성폭력 상담 및 피해지원 외에도, 문화예술계 성평등 정책의 필요성과 제도 개선을 위한 간담회 등을 추진했다. 그러나 임시운영 기간이 끝나자 부산시가 후속 운영에 대해 대책을 세우지 않고 시의회에서 예산을 삭감하는 등, 센터는 유지되지 못할 위기에 놓였다. 3년의 시간 동안 부산시와 예술공공기관에 항의하고 설득하고 논의하는 등 다양한 소통을 거듭한 결과, 현재는 ‘부산문화예술계 성희롱‧성폭력 예방센터’라는 이름으로 부산문화재단 부산예술인복지지원센터에서 위탁 운영되고 있다.
서울을 비롯한 타 지역에서 활동하는 다양한 예술인들과의 연대와 네트워크, 부산 지역에서 오랜 시간 활동했던 여성운동 단체들의 연대 기반 또한 변화를 만들어낸 중요한 요인이다.
시간이 지난 후에야 이런 변화를 만들어낸 동력이 ‘작지만 강한 연대’임을 깨닫게 되었다. 당시에는 미투를 통해 드러난 심각성에 비해 빠른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페미니즘 운동의 크기가 너무 작다고만 느껴졌고, 불안하고 답답한 날들이 더 많았다. 이후에 그 시간들을 다시 복기하는 과정에서, 변화를 만들어내기 위해 내딛는 ‘한 걸음’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한 걸음을 만들어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인내, 연대가 필요한지 알게 되니 겸허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야 ‘작은 승리’를 기억해야 한다는 페미니스트들의 말을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작은 승리를 기억하고 기록할 것, 다음에 올 사람을 위해
페미니즘 운동에서 내가 배운 것은 ‘작은 승리를 기억할 것’이다. 쉽게 변하지 않은 현실 속에서 소진되고 지치더라도 페미니스트들의 활동과 운동, 연대가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감각을 체감하려면 당장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함에 답답해하고 좌절할 것이 아니라, 작은 변화에 초점을 두고 그 순간을 승리의 경험으로 기억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페미니즘을, 페미니스트인 나와 동료들을, 그리고 내가 숨 쉬며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를 탓하며 소진되기 쉽다.
이 배움이 이후에 부산문화예술계 반성폭력 운동을 ‘기록’하는 활동으로 이어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2021년 당시 나와 동료들은 정신적으로 체력적으로 소진이 온 상태였다. 활동가들의 헌신이 운동을 지속하는데 많은 비중을 차지했는데, 누군가 아프거나 더 이상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그 동안의 노력과 변화의 성과들은 이후에 어떻게 나눌 수 있는 걸까? 우리가 기록하지 않으면 사라질 수 있는 이야기들을 공공의 영역에 기록하고, 누구라도 함께 기억하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공간을 만들 필요가 있다. 이러한 취지로 부산문화예술계 미투 운동을 기록한 온라인 전시와 출판물을 기획, 제작하게 되었다.
전시와 함께 출간된 책 『그건 예술이 아니라 성폭력입니다』는 온라인 전시에서 담지 못한 예술인들의 반성폭력 투쟁의 과정을 세세하게 기록하였다. 창작을 해오던 평범한 여성 예술인들이 거리에서 마이크를 잡고, 선언문을 쓰고, 기자회견을 열고, 정책을 제안하며 문화예술 현장을 바꾸는 주체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담았다. 이 기록 작업을 시작할 때는 문화예술계 반성폭력 현장을 기록한다는 의미가 컸지만, 준비하는 과정에서 미래의 누군가 외롭게 싸우지 않도록 우리의 활동이 힘이 되어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커졌다.
“누군가 침묵의 벽 앞에서 홀로 남겨지지 않도록, 이 책이 다음 사람의 곁에 있길 바라며 우리의 경험을 써내려간다.” -『그건 예술이 아니라 성폭력입니다』 서문 중
싸우는 여자들을 위한 안전망이 필요해
치열했던 미투, 그 과정은 누군가의 삶에 큰 변화의 만들기도 했고, 누군가는 심리적인 어려움을 겪거나 건강이 악화되기도 했으며, 자신이 일하던 업계를 떠나야만 했던 이들도 있다. 미투 이후를 이야기할 때 나는 세상을 바꾸겠다고 뛰어든 여자들이 보다 안전하게 싸울 수 있는 안전망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법과 제도적 안전망은 지속적으로 더 싸워나가야 할 영역이라면, 일상 가까이에 다양한 안전망들이 편의점처럼 흔하고 많아졌으면 좋겠다. 다양한 주제로 페미니스트들 모일 수 있는 공간, 내가 페미니스트라고 말해도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는 공동체가 있다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안전망이다. 이런 모임과 활동들이 지속될 수 있도록 지원 제도나 자원이 확대될 필요가 있다.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시(사회의 진보적 흐름에 대한 반동)가 심화되는 사회에서, 페미니스트 시민으로서 말하고 행동해도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는 안전망이 시급하다.
20대 여성 참가자들은 자신보다 다양한 경험을 한 여성들을 만나는 것에 대한 호기심과 일에 대한 열정들이 가득하지만, 여성과 사회적 소수자들이 겪는 차별과 불평등을 실제 대면해서 이야기 나눌 때면 긴 한숨과 웃음기 없는 무기력한 표정을 자주 지었다. 나 또한 그 무기력의 곡선에 빠져 보았기에 희망과 무기력 사이를 오가는 그 표정들이 유독 마음에 남았다. 더불어 문화예술계 반성폭력 운동을 치열하게 통과하면서 만들어진 성장과 성과들을 20대 여성들과 어떻게 나누어야 할지 늘 고민이 되었고, 내 능력 밖의 일이구나 한탄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반성폭력 운동을 계기로 내가 받았던 상담과 치유 분야를 좀 더 전문적으로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가와 명상 수련과 함께 관련 공부를 시작하게 되면서, 나를 돌보는 에너지 속에 담긴 전환의 힘을 알게 되었다. 여성과 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불평등에 대한 충격을 내가 온전히 흡수하지 않고 분리할 수 있는 힘, 그 힘을 축적해서 차별에 대응하는 ‘전환’의 기술을 안내하고 기획하는 일들을 조금씩 시도해보고 있다.
미투는 여전히 진행 중이며, 싸우는 여자들은 어디에든 있다. 이제는 싸우는 여자들이 모든 걸 내걸지 않아도 되는 싸움을 희망한다. 그 희망의 한 걸음을 만드는데 각자의 자리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이 결코 작지 않다고 말하고 싶다. 페미니즘이 뜨겁게 타오르는 시기를 지나 백래시를 거처 약간의 소강상태로 접어들 때, 고립과 단절을 감당해야 하는 것은 결코 개인의 몫이 아니다. 그 시기를 보내고 있을 나에게 먼저 따뜻한 안부를 묻고, 내 옆의 페미니스트 동료들에게 따뜻한 연대의 마음을 나눌 수 있길 바란다. 싸우는 여자들이 안전하기를, 건강하기를, 평화롭기를!!
[필자 소개] 송진희. 시각예술작가, 문화기획자, 반성폭력 활동가로 일하고 있다. 반성폭력 활동 이후 심리치유 기반의 요가와 명상에 관심을 가지고 수련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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