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널 걸’ 공포, 여성, 클리셰의 기묘한 삼각관계

[극장 앞에서 만나] 영화 〈더 파이널 걸스〉

신승은 | 기사입력 2023/08/05 [10:31]

‘파이널 걸’ 공포, 여성, 클리셰의 기묘한 삼각관계

[극장 앞에서 만나] 영화 〈더 파이널 걸스〉

신승은 | 입력 : 2023/08/05 [10:31]

-본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줄거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파이널 걸’(Final girl)의 조건

 

‘여름’하면 많은 관객들이 공포영화를 떠올릴 것이다. 그 중에서 특히 슬래셔(slasher) 장르는 다양한 클리셰를 유지 및 변주하며 인기를 끌었다. 슬래셔 장르의 클리셰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우선 주로 가면을 쓴 잔혹한 살인마가 등장하고, 그에게 희생당하는 10대, 20대 초반의 학생 무리가 등장한다. 이 무리의 멤버들이 하나하나 살인마에 의해 살해를 당하게 되면서 영화는 진행된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남는 주인공은 여성으로, ‘파이널 걸’이라고 불린다.

 

‘파이널 걸(Final girl)’ 캐릭터들도 몇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 중 하나는 바로 성경험이 없다는 점이다. 무리에서 성경험이 있는 여자는 중간에 죽게 되지만, 반면 성경험이 없는 ‘파이널 걸’은 끝까지 살아남는 최후의 1인이 되어 살인마를 물리친다.

 

섹스를 하지 않은, 사회에서 갖다 붙인 기준으로 보았을 때 문란하지 않은, 소위 말해 ‘정숙한’ 여자만이 살아남는 이 오묘한 클리셰는 역으로 다른 여성 캐릭터가 살아남지 못한 원인을 섹스로 돌리는 듯하다. ‘순결’, ‘처녀성’ 따위를 지키지 못한 여성은 결국 죽게 된다고 엄포를 놓는 것 같다. 이는 여성의 성생활이 부도덕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고리타분한 관념을 그대로 반영한다. 여성 캐릭터는 살아남기 위해선 섹스를 하면 안 된다.

 

▲ 영화 〈더 파이널 걸스〉(The Final Girls, 토드 스트라우스-슐슨 감독, 2015) 트레일러 이미지


이 슬래셔 장르의 클리셰를 그대로 반복하면서 노골적으로 드러내 풍자를 하는 영화가 있다. 제목부터 〈더 파이널 걸스〉(토드 스트라우스-슐슨 감독, 2015)다. 복수형 ‘-s’가 붙은 이유는 영화가 진행될수록 밝혀진다.

 

클리셰 따르기, 드러내기, 저항하기

 

〈더 파이널 걸스〉는 1980년대에 유행했던 〈캠프 블러드 배스〉(Camp Bloodbath, 한국어로 ‘피바다 캠프’라고 번역됨)라는 영화 속 영화의 배우였던 ‘아만다’와 딸인 ‘맥스’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아만다는 지금도 프로필을 돌리고 있지만 호러영화 배우 이미지만 기억하는 제작자들 때문에 역할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 맥스는 그런 엄마를 응원한다. 둘은 차를 타고 가다가 사고를 당하고, 그 사고로 인해 아만다는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3년 뒤, 〈캠프 블러드 배스〉의 광팬인 던컨이 맥스의 과제를 대신해주는 조건으로 기념 상영회에 맥스를 억지로 오게 한다. 영화가 시작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극장에서 불이 난다. 던컨과, 맥스를 좋아하는 크리스, 크리스의 전 애인이자 맥스의 전 절친 비키, 현 절친 거티는 찢어진 스크린 사이로 불을 피한다.

 

눈을 떠보니, 그들이 와있는 곳은 영화 〈캠프 블러드 배스〉 속이다. 맥스는 자신의 엄마를 만나지만, 영화 속에서 그는 맥스의 엄마인 아만다가 아니라, 극 중 역할인 ‘낸시’일 뿐, 맥스를 알아보지 못한다. 원래 〈캠프 블러드 배스〉에서 ‘파이널 걸’은 다른 여자 캐릭터다. 또 원래 영화에서 낸시는 캠프에서 남자와 잠자리를 하고 일찍 죽게 된다. 하지만 ‘성관계를 하면 죽는다’라는 공포영화의 클리셰를 아는 맥스는 낸시를 살리기 위해, 낸시가 성관계를 하지 못하게 막는다.

 

영화는 이를 기점으로 클리셰를 대놓고 언급한다. 여자가 옷을 벗으면 살인마가 등장하기 때문에 노출광인 캐릭터를 꽁꽁 싸매놓기도 하고, 크리스의 전 애인 비키는 자신이 흔히 등장하는 나쁜 여자 캐릭터이기 때문에 금방 죽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비키는 자신의 말대로 영화 속에서 살인마에게 죽임을 당한다. 영화는 적극적으로 그 클리셰에 맞서지 않는다. 클리셰를 드러내고 꼬집는 대사는 있지만 연출이 개입해 그 틀을 부수는 단계에 가지는 않는다. 클리셰에 대한 애증의 마음은 끝내 클리셰를 따르면서 끝이 난다.

 

▲ 영화 〈로즈와 마틴의 유령퇴치 주식회사〉(Extra Ordinary, 마이크 아헌, 엔다 러프먼 감독, 2019) 마틴과 로즈


클리셰를 드러내면서 더 적극적인 저항을 하는 영화들도 있다. 〈로즈와 마틴의 유령퇴치 주식회사〉(Extra Ordinary, 마이크 아헌, 엔다 러프먼 감독, 2019)는 영혼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을 가진 주인공 로즈가 악마를 소환해 왕년의 전성기를 되찾으려는 뮤지션 크리스찬을 저지하면서 벌어지는 소동을 다룬다. 이 영화에서는 앞서 말한 슬래셔 무비 장르와는 다른 클리셰가 등장한다.

 

여기서 등장하는 악마는 성경험이 없는 ‘처녀(virgin)’만 제물로 받는다. 미디어에 등장하는 악마들은 이렇게 종종 성경험이 없는 여성만 찾으면서, 마치 그 여성이 깨끗하고 부정을 타지 않는 인간이어서 잡아먹는 것처럼 설명된다. 도대체 악마는 어떻게 그걸 구별하는 것일까. 의문투성이인 클리셰가 반복된 원인은 유독 여성에게 지나친 순결을 강요하는 사회에 있다. 악마의 눈에는 동정남, 숫총각은 그다지 순결하지 않은가 보다.

 

영화의 절정에서 악마는 결국 소환되고 로즈를 빨아들이려 한다. 로즈가 점점 악마의 구렁텅이로 빨려 들어가고 있을 때, 인물들이 아이디어를 낸다. 지금 성관계를 하면 처녀가 아니게 되니까 제물로 먹히지 않을 거라는 기가 막힌 아이디어다. 촌각을 다투는 그 때, 로즈와 함께 유령퇴치 일을 하게 되며 감정을 쌓아온 마틴과 로즈가 성관계를 한다. 그리고 로즈는 더 이상 빨려 들어가지 않는다. 여성이 섹스를 해 버리자 악마가 그만 입을 꾹 닫아버렸다.

 

여성의 섹스와 공포를 연결 짓는 미디어

 

어떤 공포영화에서 여성은 섹스를 하면 죽고, 다른 공포영화에서 여성은 섹스를 하면 살아남는다. 이 두 계열은 완전 반대되는 주장을 하는 것 같지만 사실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여성과 섹스, 특히 첫 성관계는 목숨과 결부될 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여성에게는 ‘순결’이 목숨만큼 중요하고, 섹스를 한 여자는 부정하다는 한결같은 이야기를 다른 방식으로 여성 캐릭터를 죽이면서 설파해왔다. 공포와 첫 성관계를 연결지어 여성의 성생활을 억압하고 비난하며 음지화했다.

 

▲ 영화 〈더 파이널 걸스〉의 크리스, 맥스, 비키


토크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마녀사냥〉은 소위 ‘섹드립’으로 알려진 신동엽을 필두로 해, 방송에서 금기시되었던 성에 대해 연예인들이 이야기하는 프로그램이다. 근래에는 러블리즈의 이미주가 등장해 성관계 시 여성이 흥분했을 때 나타나는 몸의 변화를 이야기했다. 제작진은 이미주의 발언을 ‘삐’소리로 대체했고 입 모양도 알아볼 수 없게 ‘CENSORED’(검열)라고 적힌 이미지를 붙여 입을 가렸다. 이야기를 들은 남성 패널들의 당황한 반응샷이 이어져 나왔다. 제작진이 솔직하게 다루고 싶었던 성은 남성의 섹스만이라는 사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장면이었다.

 

최근 비뇨기과 의사 ‘꽈추형’이 유튜브와 공중파를 넘나들며 의학 지식과 성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예전에는 노골적이라고 꺼려했을 닉네임이지만 이제는 대부분 그를 편하게 부른다. 하지만 이 역시 시스젠더 남성에게 한정된 이야기다. 여성의 성은 아직도 연구가 턱없이 부족하고 알려지지 않았다. 여성에게는 공포영화에서 계속 말해온 성경험의 무게보다도 여성의 성을 쉬쉬하는 사회의 억압 자체가 진정한 공포 아닐까.

 

익숙함과 새로움

 

〈더 파이널 걸스〉에서 인물들은 클리셰를 이용해 문제를 해결해 나가기도 한다. 맥스가 ‘파이널 걸’이 되길 바라는 낸시는, 여자가 옷을 벗으면 살인마가 나타난다는 클리셰를 이용해 자신을 희생하며 살인마를 부른다. 클리셰에 갇히는 인물이 아니라 적극 활용하는 주체적 인물로서의 ‘파이널 걸’이 된 셈이다. 살인마와의 마지막 대치를 앞둔 맥스는 이렇게 말한다. “넌 잘못된 처녀를 골랐어.” 섹스를 한 여자와, 하지 않은 여자라는 단순한 이분법으로 여성을 구분 짓는 장르에게 한 방을 먹이는 대사다.

 

영화는 클리셰 뿐만 아니라 영화의 다양한 기법 또한 자유자재로 활용한다. 플래시백 장면에서는 흑백의 점액들이 인물들의 주변으로 쏟아지면서 가두어 이들을 그 시간대로 이동시키고, 자막이 들어가는 장면에서는 실제로 자막이 놓여있어 그걸 지나가는 인물은 자막을 뛰어넘어 가기도 한다. 익숙한 기법들을 새롭게 보여주는 씬이다.

 

뿐만 아니라 〈더 파이널 걸스〉는 영화 속 캐릭터를, 그 역을 맡은 배우가 연기하는 어떤 ‘순간’이 아니라 그 세계에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보여줌으로써 영화 속의 세계가 실재한다고 말한다. 감독은 슬래셔 장르에 대한 애정만이 아니라 영화 자체에 대한 진심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 로맨틱 코미디 장르의 클리셰를 드러내는 영화 〈어쩌다 로맨스〉(토드 스트라우스-슐슨 감독, 2019) 포스터와 공포영화의 촬영과 사운드 기법을 그대로 따르면서, 진정한 공포는 가부장제라고 새로운 주제를 말하는 단편영화 〈유산〉(남순아 감독, 2021) 포스터


〈더 파이널 걸스〉가 슬래셔 무비의 클리셰를 그대로 보여주며 꼬집듯이, 로맨틱 코미디 장르의 클리셰를 드러내는 영화 〈어쩌다 로맨스〉(토드 스트라우스-슐슨 감독, 2019)가 있다. 또 공포영화의 촬영과 사운드 기법을 그대로 따르면서, 진정한 공포는 가부장제라고 새로운 주제를 말하는 단편영화 〈유산〉(남순아 감독, 2021)도 있다. 오래된 장르적 클리셰가 새로운 시대의 흐름과 만나 뒤틀리는 순간은 익숙함과 새로움이라는 모순된 감정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쾌감을 준다.

 

사회의 클리셰

 

클리셰는 영화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에도 존재한다. 여자는 이래야 해, 남자는 이래야 해, 하는 성별이분법적인 고정관념이 그러하고, 성차별적인 문화가 그러하다. 미디어는 그것을 무분별하게 재생산하기도 하고, 때로는 비판하며 부딪히기도 한다. 예술은 사회의 고정관념을 강화하기에 아주 좋은 수단이기도 하고 반대로 그걸 부수기에도 강한 힘을 갖고 있다. 〈더 파이널 걸스〉, 〈어쩌다 로맨스〉, 〈유산〉은 장르적 클리셰를 이용해 사회의 클리셰를 다룸으로써, 영화에 대한 애정으로 고정관념을 타파하는 아름다운 실천을 보여준다.

 

맥스는 끝내 살인마의 목을 벤다. 맥스와 크리스는 그들 앞으로 올라가는 크레딧을 본다. 드디어 영화 속 영화가 끝난 셈이다. 크레딧이 끝나고 무언가에 빨려 들어가듯 짧고 강렬한 혼돈이 맥스와 크리스를 감싼다. 그리고 눈을 뜨니 맥스는 병원에 누워있다. 다행히 친구들도 다 살아있다. 그런데 병원 복도에서 다시 살인마가 등장한다. 속편이 예고된 것이다. 맥스는 새롭게 맞설 준비를 한다. 그렇다. 멈추기엔, 아직 부숴야 할 클리셰가 너무 많다.

 

[필자 소개] 신승은. 싱어송라이터이자 영화감독. 1집 앨범 [넌 별로 날 안 좋아해](2016), 2집 앨범 [사랑의 경로](2019)를 발매했으며 단편영화 〈마더 인 로〉(Mother-in-law, 2019), 〈프론트맨〉(Frontman, 2020) 등을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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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즐독 2023/08/08 [12:10] 수정 | 삭제
  • 유산 보고 싶은데 어디서 볼수 있나요
  • 이파리 2023/08/06 [14:02] 수정 | 삭제
  • 클리셰에 대한 감독의 '애증' 이야기가 멋지네요.
  • ㅇㅇ 2023/08/05 [17:42] 수정 | 삭제
  • 너무 재밌게 읽었어요. 이 영화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또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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