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가 읽는 책을 보면 언니의 생활이 보인다”

〈책방에서 밑줄 긋기〉 류승희 만화 『자매의 책장』

달리 | 기사입력 2023/08/14 [18:31]

“언니가 읽는 책을 보면 언니의 생활이 보인다”

〈책방에서 밑줄 긋기〉 류승희 만화 『자매의 책장』

달리 | 입력 : 2023/08/14 [18:31]

[연재 소개] 여성들의 말과 글이 세상에 더 많이 퍼지고 새겨져야 한다고 믿으며, 서점에서 퍼뜨리고 싶은 여자들의 책을 고른다. ‘살롱드마고’의 신간 책장에서 마음에 새겨지는 책을 한 권씩 밑줄 그으며 꼭꼭 씹어 독자들과 맛있게 나누고자 한다.

 

▲ 류승희 만화 『자매의 책장』(도서출판 보리) 표지 (촬영: 달리)

 

오랜 룸메이트였던 자매

 

“오늘처럼 힘든 날은 서점에 간다. 내가 읽지 않은 수많은 책들. 책을 읽는 사람들. 하루 종일 끓어올랐던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는다.” (『자매의 책장』 23쪽)

 

두 살 터울의 여동생과 나는 서로의 인생에 가장 오랜 룸메이트였다. 우리는 성인이 되어 각자의 가족을 꾸리며 떨어지기 전까지 20년 넘게 한 방을 썼다. 어릴 때엔 엄마가 자매끼리 우애가 좋아야 한다며 일부러 각방을 못 쓰게 했고- 엄마의 바람과 달리 한 방에서 무지 싸웠지만- 대학 졸업 후 둘 다 서울생활을 하면서 우린 다시 한 집, 아니 한 방에 살게 되었다.

 

IMF 금융위기 이후 부모님의 경제 상황은 급속도로 나빠졌다. 우리 자매의 대학 등록금도 마련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부모님에게 의존할 수는 없었다. 지방 소도시에서 나고 자라며 10대 내내 꿈꾼 서울생활의 환상은 우리 형편에 맞는 월세집을 찾아다니며 시작도 전에 산산이 깨졌다.

 

동생과 내가 서울에서 처음 같이 살았던 집은 마치 등산 코스 같은 가파른 경사의 언덕 끝에 있었다. 집은 산꼭대기에 있는데 창밖으로는 골목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발이 보일 만큼 우리가 땅 속에 있다는 게 아이러니했다. 다음에 이사한 집은 다행히 땅 위에 있었지만, 여성 대상 범죄가 자주 일어나는 동네의 다세대주택이라 항상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일상 속에 살아야 했다.

 

우리는 일을 구하지 못할 때도 가난했고, 일을 하면서도 가난에 허덕였다. 일에 쫓기고, 삶에 치이고, 돈에 목이 졸리는 젊은 자매. 그 좁고 변변치 않은 월세방들에서는 엄마가 강조한 우애 대신 각자의 불안과 혼돈 그리고 외로움이 쌓여갔다. 어릴 땐 고향에서 탈출하고 싶었고, 자라고 나선 가족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었던 나는 서울생활의 가난과 우울 속에서 내 삶에 더 이상 탈출구가 없음을 깨달았다.

 

그 무렵 부모님이 갑자기 헤어지면서 우리 가족은 순식간에 해체되었다. 삼십 년 가까운 시간을 함께 보낸 관계의 지붕이 그렇게 힘없이 무너진 건 우리의 사랑이 부족해서였을까, 돈이 부족해서였을까, 아니면 우리는 원래 모래성 같은 사이였던 걸까. 스스로 탈출할 여지 없이 증발되어버린 가족의 그림자는 나에게 여전히 말줄임표이자 물음표로 남았다. 그래도 나보다 살가운 동생은 내게 아직 가족이 ‘있다’는 사실을 희미하게나마 상기시켜주곤 한다. ‘언니, 요즘 비가 많이 오는데 괜찮아?’

 

▲ 류승희 만화 『자매의 책장』(도서출판 보리) 중에서 (촬영: 달리)

 

책장을 공유하며 관계를 쌓아온 자매의 이야기

 

“우리는 서로에 대해 끝끝내 알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기대어 살아가겠지. 가족이니까.” (203쪽)

 

어려서부터 책장을 공유하며 관계를 쌓아온 자매의 이야기를 그린 만화 『자매의 책장』(류승희 만화, 도서출판 보리)은 제목만 듣고도 마음이 동한 책이었다. 나는 책과 뗄 수 없는 관계로 살아가고, 동생은 내게 요즘 재미있는 책이 뭐냐고 가끔 물어오곤 하니까. 류승희 작가의 후속작이라는 점도 작품에 막연한 믿음과 기대를 주었다. 그의 전작인 만화 단편집 『그녀들의 방』은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삶을 지극히 현실적으로 그리고 세밀하게 보여주어 깊은 인상을 남겼기 때문이다.

 

『자매의 책장』은 갑작스러운 사고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자매의 모습으로 시작해 3년의 시간이 흐른 뒤, 그들의 삶을 계절의 흐름에 따라 담담히 그려낸다. 아버지가 떠나고 언니인 우주는 직장에 다니면서 아픈 어머니를 모시고 살며, 동생 미주는 육아를 위해 작가 일을 그만둔 상태다. 결혼을 하든 하지 않든, 자매 모두 가족을 돌보는 역할에 매이게 된 것이다.

 

우주와 미주가 엄마를 보살피고 딸을 키우며 고민하고 힘들어하는 모습은 그 또래 여성이 처한 현실의 풍경을 그대로 그려놓은 듯하다. 산재를 입은 어머니의 병원 검진을 위해 반차를 내면서 직장 상사의 눈치를 보고, 남편이 퇴근할 때마다 멋대로 벗어놓은 슬리퍼를 정리하며 한숨을 쉬는 자매의 일상은 겪어보지 않은 이들에게는 왜, 무엇이 힘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와 판박이 같은 상황에서 가족 돌봄을 수행하는 여성은 너무 흔해 특별하게 여겨지지 않는데, 이 작품은 이러한 이야기를 주요 내러티브로 다루며 젠더와 돌봄 문제를 의미화한다.

 

“지우고 또 지우고, 자기를 지우는 방법밖에 몰라 평생을 쪼그라든 엄마. 그런 엄마를 닮아가는 나.” (141쪽)

 

가족관계가 중심이며 가족 구성원, 특히 부모에게 느끼는 감정이 각 주요 인물이 가진 딜레마임에도 불구하고, 작품 속에서 가족 간 갈등은 전면에 드러나지 않는다. 세 모녀는 자주 만나고 서로를 살뜰히 챙기면서도 자신의 속마음은 꺼내놓지 않는다. 이들의 일상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범하게 흘러가는 듯 보이지만,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과 어린 시절 상처가 된 기억은 자매의 현재 삶에 끊임없이 플래시백 된다.

 

자신의 슬픔과 고통을 말없이 홀로 삼키며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이 쓸쓸하게 느껴졌는데, 한편으로는 우리 가족이 그대로 겹쳐지기도 했다. 어떤 ‘사건’이 있어도 다음날이면 아무렇지 않은 척했던 것, ‘진심’을 내놓기 시작하면 날 선 대화만 반복됐던 것, 그래서 결국엔 서로에게 좁힐 수 없는 거리와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날들.

 

우리는 가족이 세상 누구보다 가깝고 끈끈할 거라 믿지만, 현실에서 그들은 나의 취약한 모습을 보여주기에 가장 두려운 대상이기도 하다. 특히 나는 부모님에게 어엿한 모습만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이 무의식에 늘 자리했던 것 같다. 우리는 가족이나 부모에게 얼마나 솔직할 수, 아니 정직할 수 있을까? 그래도 우리의 관계는 괜찮을까? “가족을 가족으로 만드는 건 무엇인가.”(출판사 책 소개에서)

 

“아버지가 기른 것 중에 못 자란 건 나뿐이야.” (114쪽)

 

“작은 집에서 오래 같이 있다 보면 서로의 기척만으로 숨이 막힌다. 그런 날은 날카로운 말이 튀어나오기 전에 집을 나선다.” (208쪽)

 

▲ 류승희 만화 『자매의 책장』 중에서 (촬영: 달리)

 

책갈피에 담은 마음

 

함께 사는 동안 한 책장에 책을 모아온 우주와 미주 자매는 고단한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면 버릇처럼 책을 찾는다. 적어도 책에 빠져드는 동안에는 괴로운 현실을 잊을 수 있고, 책장을 채워갈수록 자신의 영역이 더 넓어진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나도 어릴 때 꽤 ‘책벌레’였는데, 책 읽기를 즐기기도 했지만 혼자 책을 읽는 시간만큼은 왠지 ‘안전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책을 읽을 땐 방해받지 않고 오롯이 나만의 세상에 머무를 수 있었다. 그래서 우주가 마음이 어지러울 때마다 도서관이나 서점에 발걸음하는 것이 충분히 이해되었다.

 

한편 육아에 분주한 미주는 책을 읽다 멈춰야 할 때, 아이가 낙서한 종이나 물건을 산 영수증처럼 주변에서 바로 손에 잡히는 것을 책갈피로 쓴다. 어느 날 미주가 펼친 책에 예쁜 책갈피와 메모가 꽂혀 있었다. 언니 우주가 선물한 것이었다. 자매는 직접적인 말 대신 책을 통해 상대의 마음을 짐작하고 소통하며 작은 위로를 건넨다. 말하지 않아도 알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마음은 말로 다 할 수 없기에. 이 글을 쓰며 생각했다. 동생과 나도, 세상의 많은 자매들이 아마, 서로에 대한 마음을 말로 다 할 수 없을 거라고.

 

“언니가 읽는 책을 보면 언니의 생활이 보인다. 책 제목에서, 밑줄 친 문장에서, 책에 꽂아 둔 갖가지 책갈피에서.” (143쪽)

 

[필자 소개] 달리. 에세이 『몸이 말하고 나는 쓴다』(2021)의 작가이며 전북 남원에 있는 지역서점이자 페미니즘 문화공간 ‘살롱드마고’에서 프로그램과 모임을 기획한다. 지역에서 여성들과 글을 읽고 쓰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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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매들의방 2023/08/16 [14:01] 수정 | 삭제
  • 전작 그녀들의 방을 소장하고 있는데 반가운 신간 소식이네요. 사 봐야 겠어요!
  • 독자 2023/08/15 [15:35] 수정 | 삭제
  • 책 읽고 싶다
  • 타임라인 2023/08/14 [19:18] 수정 | 삭제
  • 언니랑 같이 산 시간들을 생각해보면 지금 이렇게 떨어져서 지내는 것도, 서로 삶을 많이 공유하지 못하는 것도 이상하게 느껴질 때가 있는데.. 이 글 읽고 눈물이 날 뻔했어요. 한 방 쓰고 책장 공유하고 한때는 침대도 같이 쓴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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