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은 거기 있어, 여자들은 갈 거야

[미투 이후의 시간은 이전과 다르다] 미투의 성공 혹은 실패?

원정 | 기사입력 2023/08/20 [11:31]

대학은 거기 있어, 여자들은 갈 거야

[미투 이후의 시간은 이전과 다르다] 미투의 성공 혹은 실패?

원정 | 입력 : 2023/08/20 [11:31]

-한국 사회를 뒤흔든 미투 운동은 어떤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을까? 각 분야에서 미투 운동을 해온 이들이 ‘변화의 순간’에 초점 맞추어 그 성과를 공유하고, 남겨진 과제를 짚으며, 앞으로 나아갈 길을 모색해본다. [편집자 주]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불어온 대학가 ‘미투’의 바람

 

나는 이사회가 총장 선출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분분한 대학에 다녔다. ‘탈정치’ 같은 말이 곳곳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시기였지만, 우리 학교 총학생회는 계속해서 정치적 목소리를 낼 명분이 있었고 나설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학교는 끝없이 학생들의 자치를 방해했고, 오랜 투쟁에 지친 학생들은 내부적인 갈등이 생기면 잘 해결하지 못했다. ‘정치하는 학생회’는 안팎으로 고충을 겪다가 더 이상 학생들에게 호응받지 못하고, 이른바 정권교체를 당했다.

 

공교롭게도 그 무렵은 페미니즘 리부트의 시작이었다. 우리 학교 총여학생회는 3년 동안 궐위(어떤 지위나 자리가 공석이 되는 것) 상태였는데, 페미니즘 리부트를 맞아 총여학생회 출마를 오랫동안 고민하던 선배들이 용기를 냈다. 학생회 보궐선거가 끝나던 2017년 봄, 우리 학교는 ‘정치하는 학생회’와 작별하는 동시에 학내에서 ‘젠더정치’를 도모하려는 가장 정치적인 목적의 학생회(총여)와 다시 만났다.

 

나는 선배들의 뒤를 이어 2018년 총여학생회장이 됐다. 임기 동안 내가 정확히 어떤 일을 했는지 이제 속속들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학기를 시작하기도 전부터 대학가 미투의 바람을 온몸으로 맞았던 것만은 기억한다. 리부트로부터 2년도 채 되지 않아 미투 운동이 활발히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당시 몰아친 물결이 얼마나 거셌는지를 증명했다. SNS를 통해 이 분야 저 분야에서 터져 나왔던 성폭력 피해 경험과 가해자의 이니셜, 그리고 익숙하기도 하고 낯설기도 한 대학의 이름들.

 

▲ 학내 여성주의 단체가 진행한 기자회견 퍼포먼스 사진. 총여학생회를 비롯한 학생회 단위들이 함께했고, 고발된 성폭력 가해 교수의 연구실 문 앞에 포스트잇을 붙였다. ©동대신문


대학은 미투에 응답하지 못했다

 

당시 우리 학교의 이름도 SNS에 거론되었지만, 고발된 교수가 징계 절차를 밟거나 악명 높은 ‘알파벳 교수’가 되지는 못했다. 고발의 내용은 충분히 구체적이었고 추가 증언 또한 확보할 수 있었지만, 당시 학내 인권센터의 규정상 피해자 본인이 아니면 신고할 수 없었다. 오로지 피해자만이 자기 모든 것을 걸고 책임져야 하는 조건 위에서, 피해자는 수면위로 등장할 수 없었고 끝내 조용한 소문만이 남았다.

 

총여학생회와 학내 여성주의 단체, 그리고 교지 편집위원회는 각각 최선을 다해 피해자와 미투 운동에 연대하려고 했다. 총여학생회가 대리인으로 나설 수 있음을 밝히면서 익명 채팅방을 운영하기도 하고, 교지에서 취재도 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만난 것은, 어느 과에 오래도록 구전되고 있다는 ‘피해야 하는 교수’의 존재, 외국인 유학생만을 노려 성매수를 시도한다는 어느 단과대 교수, 그리고 졸업하고 나서까지 사건 공론화를 망설이는 학생들이었다.

 

우리 학교는 끝내 동덕여대나 서울대의 경우처럼 악명 높은 ‘알파벳 교수’가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것이 결코 ‘그런 교수가 없어서 다행’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대신 우리 학교에는 정체는 불분명하지만 분명히 어딘가에 숨어 있는 망령 같은 가해 교수들이 있었다. 여느 대학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성폭력을 고발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들려면?

 

우리 학교의 과제는 먼저, ‘말할 수 있는 공간’이 되는 것이었다. 피해자(혹은 ‘학생’이나 ‘여성’)의 편이 아닌 공동체의 분위기가 가해자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고 피해자를 입막음하고 있다면, 그 구조를 바꿔 ‘미투’가 가능하게끔 만드는 단계였다.

 

총여학생회와 학내 여성주의 단체들은 학생들에게 인지도가 낮았다. 우리는 인력과 예산이 불충분한 인권센터를 정상화할 것, 익명 제보나 제삼자의 고발이 가능하고 제보자 또는 피해자를 온전히 보호할 수 있도록 인권센터 규정을 개정할 것, 성폭력 사건 해결 과정에 학생 참여를 보장할 것을 요구했다.

 

그것은 제도를 바꾸는 일이었다. 과거 호주제 폐지나 성폭력 특별법 제정처럼, 파도가 지나가도 무너지지 않는 결과를 만들고 싶었다. 그런 성과를 만들어내는 게 우리 세대에 맡겨진 숙명이리라 느꼈다. 제도를 보완한다는 것은 절대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변화, 이전과는 전혀 다른 공간을 조성하는 일이라 믿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렇지만은 않았다. 시간이 조금 걸리긴 했어도 우리 학교의 인권센터는 규정 개정을 거치며 이론적으로는 미투에 대응할 수 있는 센터가 됐다. 그러나 그것이 학생사회의 변화로 이어지거나, 언제든 성폭력을 고발할 수 있는 토양이 되어주진 않았다. 피해자는 여전히 잃을 것이 너무 많고, 사건 해결은 요원했다. 그 센터와 제도는 규정이 아무리 바뀌어도 여전히 학생의 것, 여성의 것, 소수자의 것, 피해자의 것이 아니었다.

 

미투 이후, 페미니즘을 쫓아낸 대학

 

그 해 대학가는 연초에 미투 운동을, 연말에 총여학생회 폐지를 겪었다. 어느 페미니스트들은 ‘알파벳 교수’들과 싸우며 다쳤고, 어느 페미니스트들은 백래시로 인해 자치를 실현할 권리를 박탈당하고 공간을 빼앗겼다. 대학가 미투는 가해 교수 중징계와 같은 명징한 성과가 있었지만, 너무나 많은 사람이 오랫동안 고통받아야 했다. 제도 개선이 이루어진 부분도 있지만, 성폭력을 가능케한 대학 문화를 격변시키지는 못했다. 대학의 페미니스트들은, 그리고 나는 내가 바꿔낸 게 무엇인지 잘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페미니스트들은 제도권 바깥에서도 대학의 구조를 바꾸려고 노력했다. 나는 범대학 페미니스트 공동체를 표방했던 시민단체 ‘유니브페미’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2019년부터, 해산을 결의한 2023년까지 집행위원과 운영위원으로 함께했다. 그곳에는 저마다 학내에서 미처 끝내지 못한 짐을 안고 있는 사람이 많았다. 미투 운동도 우리 어깨 위의 짐 중 하나였다. 

 

▲ 2019년 10월 27일, 서울시여성가족재단과 유니브페미가 함께 “미투 이후, 변하지 않는 대학에서 살아남기” 워크숍을 열었다.


2019년 가을, 유니브페미는 활동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시여성가족재단과 “미투 이후, 변하지 않는 대학에서 살아남기”라는 워크숍을 열었다. 대학 페미니스트들이 모여, 미투 운동을 지나고 나서도 변한 게 없는 것 같은 대학에서 앞으로 어떤 의제를 어떻게 이끌어가면 좋을지 대화하는 자리였다. 나는 당시 대학가 미투가 혁명이 되진 못했다는 것을, 사무치지만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 같다.

 

앞날이 밝은 건 아니었다. 대학 페미니즘이 점점 사그라들었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이거나, 페미니즘을 알거나, 소극적이게는 ‘성평등을 지지한다’는 대학 신입생들은 전보다 많아졌지만, 그들을 ‘사냥’하려는 이들의 목소리 또한 전보다 커졌다. 학내 페미니스트 모임에 참여할 수 없는 분위기가 만들어졌고, 페미니즘 모임들은 거센 활동을 전개할 수 없었다. 명실상부 위기가 찾아왔다.

 

유니브페미는 대안이 되기 위해, 또 유니브페미의 지속 가능성을 위해 ‘대학생 페미니스트들의 욕구는 무엇일까’를 두고 아주 오랫동안 토론했다. 대학 민주주의의 위기, 대학 페미니즘의 위기는 곧 유니브페미의 위기로 돌아왔다. 어려움 속에서 최선을 다했지만, 명확한 답은 도출하지 못한 채 시간이 흘렀다. 유니브페미는 4~5년의 활동 끝에 ‘과연 지금 대학 페미니즘은 우리를 필요로 하는가’라는 질문을 마주하며, 언젠가 시대가 또다시 우리를 부를 때 기꺼이 모이자는 말을 남기며 해산했다.

 

이 일련의 과정들은 대학 페미니즘 운동 혹은 대학가 미투 운동의 실패, 몰락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반대로, 대학가 미투 운동의 ‘성공’이라는 것은 뭘까?

 

대학은 안 변했어도 사람들은 이미 ‘미투 그다음’

 

대학생 때 나는, 가해자 안희정이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총여학생회실 바깥은 나에게 허락되지 않은 세상 같다는 공포를 느꼈다. 학내 인권센터와 대학 성폭력 사건 처리 규정이 나의 것이 아니라고 느꼈던 그 느낌 그대로.

 

하지만 아무리 대학가 미투가 ‘성공’한 게 아니라고 해도, 나는 그때의 공포를 딛고 계속해서 정치해왔다. 정치하는 학생회를 지지하던 학생에서 가장 정치적인 학생회의 회장으로 성장하고, 대학 안팎에서 목소리를 내다가 나를 대변하는 정당을 만나 지금은 국회 안팎에서 일로써 정치하고 있다. 계속 말하고 정치하는 것만이 그 규정을, 그 문화를, 그 장소를 모두의 것으로 돌려놓는 방법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 제8대 전국지방동시선거에 출마했을 때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 6주기를 맞아 진행한 “강남역 세대로 성평등 정치교체!” 기자회견. 나는 인천시의회의원 비례대표 후보로 출마했다. ©기본소득당


대학은 정말 변한 게 없어 보인다. 변하는 게 귀찮은 대학 본부는 은밀히, 때로는 노골적으로 학생 자치를 방해하고, 온갖 핑계를 대며 낡은 규칙을 유지하고, 학내 성폭력을 사적인 문제로 만들기 위해 애를 쓴다.

 

하지만 미투는 분명히 사람들을 바꿔놓았다. 여성들은 곧바로 성폭력을 신고하거나 고발할 수는 없을지라도 이제 무엇이 성폭력인지 더 잘 알게 됐다. 성폭력 사건을 접했을 때 그것이 피해자의 탓이 아니라는 사실을 더 많이 알게 됐다. 제도가 너무나 낙후되었다는 것을, 우리 사회의 문화와 관계 맺는 법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더 크게 느끼게 됐다. 그리고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여성은 전보다 분명히 많아졌고, 힘이 세다.

 

학교, 대학, 노동 현장에서 모든 세대의 여성이 미투를 겪었다.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고 말하는 대통령이 당선되는 뼈저린 백래시에 부딪친 상황이지만, 우리는 이곳에서 저곳으로 자리를 옮기고, 힘들 땐 잠시 쉬어가기도 하면서 변화의 필요성을 말할 것이다. 다음 총선, 다음 지선, 다음 대선에서도, 미투가 남기고 간 새로운 상식을 실현할 때까지.

 

그리고 ‘미투 그다음’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 발맞춰, 언젠가 대학도 뱉어냈던 미투의 다음 단계로 따라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필자 소개] 원정.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페미니스트. 모두가 자기 몫을 받고, 누구나 자기답게 살 수 있는 곳을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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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ㅇㅇ 2023/08/21 [15:55] 수정 | 삭제
  • 정말 차열하게 싸운 당신들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요. 그만큼 더 강하고 단단해지고 현명해진 페미니스트들이 함께 숨쉬고 살아가고 있음을 생각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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