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밍아웃, 그 희망

한국 성소수자들에게 듣는다

박김수진 | 기사입력 2003/12/01 [01:52]

커밍아웃, 그 희망

한국 성소수자들에게 듣는다

박김수진 | 입력 : 2003/12/01 [01:52]
“행복 뒤에는 상대적 불행이 닥칠 것이다. 지금의 내가 그렇다. 그렇다면 불행 뒤에는 상대적 행복이 찾아오지 않을까. 이것이 내가 믿고 있는 미래에 대한 희망의 이론이다.” (천리안 ‘퀴어넷’ VELIVOLO@chollian.net)

벽장 속에서 나오다

연예인 홍석천씨의 커밍아웃 이후 최근 수많은 기사와 문헌에는 ‘커밍아웃’이라는 낱말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을 축하하는 어느 식자의 글의 제목이 커밍아웃이고, 정치성향 커밍아웃, 맞고 사는 여자의 커밍아웃, 누드모델의 커밍아웃 등 이 낱말이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런 현상을 두고 한 레즈비언 인권활동가는 불편한 심경을 토로하기도 한다. “동성애자들에게 있어 평생의 한이자 동시에 과제인 커밍아웃에는 그 누구도 관심 갖지 않는 현실인데, 동성애자들 스스로 이름 붙인 그 낱말마저 ‘이성애자들의 언어’가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라고 말이다.

동성애자에게 있어 커밍아웃이란 어떤 의미일까. 레즈비언 친목모임 활동을 하는 한 레즈비언은 “커밍아웃은 나의 성정체성이 당신들(이성애자들)과 다르다는 것을 떳떳하게 알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같은 모임에서 활동하는 또 다른 레즈비언의 얘기를 들어보자. “내 자신을 더 이상 속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기 위한 자유의지가 바로 커밍아웃이다.”

커밍아웃은 '벽장 속에서 나오다(Come out of closet)'라는 구절에서 유래한 낱말이다. 커밍아웃은 성소수자로 정체화한 사람들이 자신의 성정체성을 자신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드러내는 과정과 행위를 의미하는 용어다. 한국여성 성적소수자 인권운동모임 ‘끼리끼리’의 간사 아자씨는 “동성애자로 살아가는 것이 힘들지만 자신을 포함해 친구 혹은 가족에게 성정체성을 밝힌다는 것은 자신을 지지해 줄 수 있는 지지자를 만들기 위한 적극적인 행동이다”라고 말했다.

자신의 성정체성을 ‘찾기’까지

커밍아웃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즉, 커밍아웃은 성소수자 스스로 자신의 성정체성을 긍정하고 스스로에게 이름 붙이는 그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대부분 동성애자들이 그렇듯 30대 중반인 레즈비언 김모씨는 최초의 커밍아웃을 기억하고 있다. “중고등학교 재학 시절 내내 같은 여성을 좋아하는 나를 발견하면서부터 도대체 나는 뭔가 하는 생각으로 잠 못 이룬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어요. 대학에 들어와서 ‘레즈비언’이라는 낱말을 처음 들었는데 그 순간에 ‘아, 나는 레즈비언이구나’하는 생각을 처음 했죠. 그게 나의 첫 커밍아웃입니다.”

한국에서 30대 중반이상 성소수자들은 성장 과정에서 성정체성과 관련한 어떠한 정보도 얻을 수 없었던 시기를 살아 온 세대다. 그런 세대에게 있어 스스로에 대한 커밍아웃은 원천적으로 ‘무지’라는 장벽에 둘러싸여 있었기에 더욱 힘들었다 할 수 있다.

인권교육, 성교육 등 교육계에서 새롭게 시도되는 프로그램 속에서조차 성정체성과 관련한 정보를 접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지역 여성운동을 하고 있는 김모씨는 “우리 단체에서는 중고등학교로 성교육을 나가고 있지만 커리큘럼 안에 동성애 부분을 추가하는 데까지 발전하지 못했다”며, “교육을 하는 인력이나, 교육을 신청하는 학교 측 모두에게 동성애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한국의 성소수자들이 성정체성 관련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기는 하다. 1990년대 중반부터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한 인터넷 활용의 결과 현대를 살아가는 성소수자들은 사이버 세상에서 관련 정보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익명성이 일부 보장되는 사이버 공간 속에서 성소수자들은 스스로의 존재에 붙일 수 있는 이름을 발견하고, 작고 큰 모임을 통해 자신의 성정체성을 긍정할 수 있는 계기들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사이버 상의 정보 접근 역시 용이하지 않다. 그나마 성소수자들에게 있어 유일한 정보 제공의 역할을 하는 인터넷은 PC방에서 차단 소프트웨어로 인해 접근을 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됐다. 또한 성소수자 관련 사이트에 접속한다는 사실 자체가 드러날까 두려워하는 성소수자들의 ‘공포’는 충분히 이유가 있는 것이다. 20대 후반 레즈비언 백모씨는 “성정체성으로 혼란스러워 하던 시기에 회사생활을 했는데, 성소수자 관련 사이트가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도 동료들 눈치가 보여 마음 편히 열어본 적이 없다”며, “집에서는 더욱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커밍아웃하지 못하는 까닭

한국 사회에서 성소수자들은 사이버 상의 관련 사이트들과 일부 지역에 집중해 있는 성소수자 업소 등을 통해 다른 성소수자를 만나게 된다. 20대 후반 레즈비언 이모씨는 “스스로에게 가까스로 커밍아웃을 했던 나는 1996년 어느 날 레즈비언이 등장하는 프로그램을 통해서 처음으로 나 외에도 레즈비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말한다. “그 프로그램에서 소개되었던 레스보스라는 레즈비언 카페를 찾게 된 후에 같은 고민을 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커밍아웃할 수 있었다”는 것.

이와 같이 성정체성을 긍정하게 된 성소수자들이 두 번째로 시도하는 것은 다른 성소수자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것이다. 레즈비언 친목모임을 운영하고 있는 전모씨는 1990년대 중반 레즈비언 업소에 출입을 하면서 커밍아웃을 하게 됐을 때를 회상하며,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다. 나에 대한 이야기를 다른 누군가에게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건 축복 그 자체였다”고 말한다.

다른 성소수자들에게 커밍아웃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것은 친구와 가족 등 지인에게 커밍아웃하는 일이다. 대부분 성소수자들은 이 문제에 직면해 많은 고민을 하게 된다. 소위 말하는 적령기에 접어 든 성소수자들의 경우는 더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말해 커밍아웃을 선택하는 경우는 극소수다. 이유는, 커밍아웃할 수 없는 현실 때문이다.

성소수자들이 손꼽는 ‘커밍아웃 못하는 이유’는 ‘버림받고 싶지 않아서’, ‘유,무언의 피해가 두려워서’, ‘가족들이 받을 충격에 대한 공포’, ‘해고될까봐’ 등이다. 대학에서 성소수자 인권운동을 하고 있는 정모씨는 “부모님은 최후의 보루”라고 말한다. 실제로 끼리끼리 상담실에는 자신의 성정체성이 가족에게 알려져서 정신병원 감금 위기에 처한 사람, 수개월을 방안에 갇혀 지내 온 사람 등의 사례들이 접수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현실에서 성소수자들이 가족에게 커밍아웃을 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어려운 일이다.

“나 레즈비언이야” 이후

“정신이 똑바로 안 박혀서 그래”
“더러워”
“그게 뭐야?”
“함께 기도하자. 예수님이 치료해 주실 거야”

주위 사람의 커밍아웃을 접한 사람들의 반응은 각양각색이다. “기도를 해서 반드시 치료를 받자”는 사람에서부터 벌떡 일어나 문을 박차고 나가는 사람, 가엾어하며 눈물을 뚝뚝 떨구는 사람, “그런 소리를 왜 내게 하느냐?”며 윽박을 지르는 사람 등.

성소수자들은 자신들이 가진 하나의 ‘차이’일 뿐인 성정체성을 지인들에게 알리고 자신의 차이를 긍정받기를 원하는 욕구를 가지기 마련이다. 성소수자들에게 있어서 자신의 성정체성,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 드러내기는 평생의 과제다. 그러나 커밍아웃 이후 관계 단절이라는 쓴 맛을 보아 온 성소수자들이 매우 많다. 레즈비언 친목모임 활동을 하고 있는 한 레즈비언은 말한다. “세상 모두에게 외친다고 하더라도 어머니는 끝까지 모르셨으면 해요. 나로 인해 타인의 질타를 받게 하고 싶지 않거든요.”

운동의 차원에서 감행하는 커밍아웃도 있다. 이름하여 ‘대사회적 커밍아웃’. 성소수자 인권운동 진영에서는 대사회적인 커밍아웃을 한 활동가들이 소수 존재한다. 그녀/그들은 각기 개인적인 사정을 충분히 고려하여 오랜 시간 커밍아웃을 준비하는 단계를 거쳐왔다. 대사회적인 커밍아웃을 통해 한국 사회에 동성애자가 존재함을 알리고, 동성애자 역시 평범한 시민에 지나지 않음을 역설해왔다. 홍석천씨의 커밍아웃이 우리 사회에 미친 파장을 보았을 때, 이런 결단과 용기가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커밍아웃’은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타인에 의해 성정체성이 까발려지는 ‘아웃팅’과는 다르다. 대사회적 커밍아웃을 한 게이 활동가 모씨는 “성소수자 인권 향상을 위해 의도적인 아웃팅도 불사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사회적으로 인지도 있는 레즈비언/게이 아웃팅 시키기’ 프로젝트와 같은 것을 시도해보자는 것. 이런 주장은 매우 위험하다. 어느 누구도 성소수자에게 커밍아웃을 강요할 수는 없다. 언론을 통해 커밍아웃한 동성애자들의 대부분이 회사에서 해고되는 등의 생존권과 직결된 고통을 받고 있는 우리 현실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아웃팅’은 명백한 인권침해이며 범죄행위다.

커밍아웃할 수 있는 사회로

한국의 성소수자들은 커밍아웃을 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로 ‘커밍아웃을 하고자 하는 확고한 의지’, ‘커밍아웃을 할 상대자에 대한 선별 능력’, ‘커밍아웃 이후 벌어질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대응방안 마련’ 등을 꼽는다. 무엇보다 이러한 선택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성소수자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차이를 인정하는 문화가 조성돼야 한다.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이 견고한 사회에서, 성소수자들은 이제 겨우 인터넷을 통해 성정체성에 대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게 됐다. 인간의 기본권 중 하나인 ‘존중 받을 권리’를 인정 받는다는 것이 성소수자들에겐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지. 성소수자들은 성정체성을 이유로 자신을 부정하고, 혐오하고, 학대하는 경험을 하며 살아왔다. 그것은 사회가 성소수자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이다.

여전히 벽장 속에 숨어 있는 성소수자들이 자신에게, 가족에게, 친구에게, 타인에게 ‘커밍아웃’할 수 있는 계기와 사회적 여건을 만들어나가는 것은 성소수자들의 과제일 뿐 아니라, 다양성과 공존을 희망하는 사회구성원 모두의 과제라 할 수 있다. 그 해결방안은 성정체성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배우는’ 것이고, 기존에 습득된 편견을 깨려 노력하는 것이며,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에 대항하는 보다 적극적인 실천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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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004/05/04 [21:03] 수정 | 삭제
  • 내가 이말을 들은지가 몇개월 정도 되는데,
    당시에는 "못된놈아." 이러고 말았는데, 이기사 읽고보니 범죄수준의 악행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 놈이 하는 말인즉슨,

    자기는 아는 사람 중 동성애자가 있다면 , 그리고 자기가 스스로 밝히지 않는다면
    자기가 그것을 주위사람들에게 알려줘야 한다면서.

    왜 그래야하냐고 물었더니

    주위사람들의 '알권리'와 그사람들이 피해(뭔피해?)를 받을 수도 있기때문이라 합니다.
    옆에 있는 몇몇 인간들도 동조하는 기색을 보이더군요.

    이인간들공개수배에 올렸어야 했는데...
  • 탱태앵~ 2004/02/07 [12:39] 수정 | 삭제
  • 아주 친한 친구중에 "나는 이성애자인지 동성애자인지 모르겠다. 남자랑 사귀는 것이 불편해서 아직까지 한번도 안사귀어봤는데, 그래서 그런지 아니면 동성애자라그런지 지금까지는 여자가 더 좋다" 라고 말하는 애가 있는데요..
    저는 그 때 그애에게 "동성애자건 이성애자건간에 중요한 것은, 니가 너의 성정체감을 찾는 것이다. 나중에 스스로 레즈비언이라고 깨닫게 되더라도 절대로 그것때문에 상처를 받거나 '난 이상해'라고 생각하지 말기를 바란다." 라고 해줬거든요..
    그런데 그 친구가 실제로 커밍아웃을 해 오면 무슨말을 해 줘야 할까요?

    여러가지 생각해 봤는데.. 다들 조금씩 핀트가 안맞아서..
    말 한마디에 상처를 줄 수도 있는거니깐요.
    "괜찮아"-> 뭐가 괜찮다는건지...
    "이해할 수 있어"-> 감히 이런말은 못해요..
    이런 말들은 하지 말아야 겠죠..?

    "결단 내리느라 고생했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말해줘."
    라는 정도가 괜찮을까요..?
    이 친구는 그쪽에는 거의 무지한 친구라서 얼마전까지는 자기도 당연히 남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해 온 친구예요...

    의견을 좀 말해주세요..
  • 저도 2003/12/04 [02:06] 수정 | 삭제
  • 요즘 유행하는 드라마를 보면서 내가 시한부인생이라면 커밍아웃을 하고 할 수있는 일들을 하고 죽어야지 하는 생각을 한답니다.
  • 은빛연어 2003/12/03 [19:10] 수정 | 삭제
  • 이성적으로는 그들에게 편견과 멸시를 버려야 된다고 생각하지만... 감정적으로 아직도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니....
    내 안의 편견을 빨리 버려야 하는데......
  • Moal 2003/12/01 [21:48] 수정 | 삭제
  • 남의 얘기가 아니에요. 저는 커밍아웃이 어려운 건줄도 모르고 내 친구라면 내가 동성애자든 아니든 인정해줄 줄 알았어요. 철이 없었던 거죠. 친구가 처음엔 안 믿더니 나중엔 울더라구요. 제가 더 많이 울었죠. 아.. 여러분. 커밍아웃한 친구앞에서 울지 맙시다! 정말 외로워져요. 그러면..
  • 바다낚시 2003/12/01 [16:27] 수정 | 삭제
  • 동감입니다.
    커밍아웃이란 말이 아무데나 쓰이는 거 저도 문제라고 느꼈거든요.
    특히 부정적인 곳에 쓰이는 건 오용아닌가요?
    커밍아웃은 고해성사가 아니라 긍정적인 의미인데 말예요.
    자신있게 커밍아웃할 수 있는 사회가 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 토토 2003/12/01 [13:43] 수정 | 삭제
  • 커밍아웃의 희망과 좌절에 대해 너무 잘 써주셨네요.
    지금의 불행 다음에 상대적인 행복이 온다고 믿고 싶어요.
    아주 인상적인 얘기네요.
    저의상황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이 느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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