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어송라이터인 이내가 최근 가지게 된 꿈은 “마을과 사람들을 연결하는 것”이다. 이 꿈을 꾸게 만든 씨앗 같은, 짧지만 강렬한 여행이 있었다. 코로나 팬데믹 후, 일본 여행이 재개된다는 소식과 함께 떠난 그녀의 우연한 여행은 거기서 그치질 않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이내의 여행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한번도 가보지 않았지만 이미 연결되어 있었던 우리의 이웃 마을들,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과거의 시간과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함께 느끼게 된다. 인연의 꼬리를 물고 계속되는 이내의 로컬 여행기, 종착지가 정해지지 않은 마을 이야기들을 연재한다. -편집자 주-
부산 산복도로에서 출발, 첫 걸음을 돌아보며
글을 쓰러 집 근처 카페에 왔다. 파란색 정사각형 테이블, 약간 푹신한 갈색 인조가죽 의자가 내 자리다. 눈앞에는 벽 하나를 가득 채우는 커다란 유리창이 있다. 그 너머로 보이는 장면이 바다면 참 좋겠지만, 몇 년 전 지어진 못생긴 아파트가 눈에 들어와 아쉽다.
카페 앞에 놓인 길은 산 한복판에 생긴 도로라서 ‘산복도로’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차가 많이 다니지 않는 2차선 도로의 가로수는 대부분 벚나무다. 언제부터인가 봄의 벚꽃보다 가을의 벚나무 낙엽이 눈에 들어왔다. 낙엽을 대표하는 빨강, 노랑, 갈색의 빛깔을 모두 가지고 있어 가을을 더욱 가을로 만들어 준다. 무심코 바라본 커다란 창 밖으로 벚나무 낙엽이 하나, 둘, 그리고 셋,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아래로 떨어졌다. 너무나도 가벼운 움직임이다. 화려한 연분홍 꽃과 무성했던 잎의 푸르른 기억에 아무 미련도 없다는 듯이. 짧은 일본 여행에서 돌아와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가만히 돌아보는 그때는, 가을에 떠올리는 봄꽃처럼 아득하다.
벼꽃같이 짧았던 여행을 기록하기로 한 내 모험의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영영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여행자를 환대해 주고, 만나서 이야기를 들려주고 들어주고, 떠나는 뒷모습에 손을 흔들어 준 사람들이 모두 활짝 핀 꽃들 같았다. 그 순간만으로도 충분했지만, 조그만 볍씨를 만들고 싶어졌다. 지지와 비밀과 우정이 가득 담긴 이야기가 계속해서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우선 글이라는 통로를 선택해 보았다. 그리고 또 다음 꽃이 피어나는 순간을 빌어 볼 거다.
여기에 빌어, 빌어, 빌어 어둠 속에서 부른 그 이름을 가슴에 꼭 껴안고 빌어 이야기는 계속되고 이런 나에게 여기 봐 지금 피는, 꽃!
-오리사카 유타, ‘나팔꽃’ 중
부산에서 너무도 가까운 후쿠오카 (하늘에서 20분) 서울보다 더 짧게 느껴지는 거리감
새로운 곳에 가는 걸 좋아하면서도 스스로는 여행 계획을 잘 세우지 않는 편이다. 제법 여행을 많이 다녔는데 대부분 친구의 계획을 따르거나, 친구가 있는 곳에 찾아가는 식이었다. 일본 여행이 가능해질 거라는 소식이 들리자마자 비행기 티켓을 검색해 보았고, 가격이 급속도로 상승할 기미가 보이길래 앞뒤 생각하지 않고 떨리는 손으로 후쿠오카행 항공권 결제를 진행했다. 지금 돌아보면 그 순간의 무모했던 내가 너무나 대견하다.
가장 싫은 건 숙소 예약이다. 예약 문화가 별로 없던 20여 년 전부터 즉흥적으로 숙소를 정하던 버릇이 아직도 남아있는 모양이다. 내 쪽에서 하는 선택보다 세상이 나에게 주는 선택지가 언제나 더 근사했다. 앱 하나로 척척 잘도 예약하는 사람들이 늘 신기했는데 이번 여행에서 처음으로 실감했다. 세상은 정말로 편리해져 있었다! 여정의 모든 숙소를 에어비앤비 앱으로 예약하고 결제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여전히 촉을 활용해 우연히 발견하는 것들을 더욱 사랑하지만, 스마트폰 화면 속에서도 어느 정도의 느낌은 감지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후쿠오카(福岡), 오노미치(尾道), 쿠라시키(倉敷)에 예약해 둔 모든 숙소가 완벽했으니까.
후쿠오카-오노미치-쿠라시키 모두 커버하는 외국인 대상 레일패스
일주일에 한 번 회화 수업을 받고 있는 일본어 선생님 마모루 씨에게 영화에서 본 동네가 어디쯤인지 물어보았다. 외국인을 대상으로 일본에서 여행 가이드를 하는 마모루 선생님은 “이내 씨는 부산에 사니까 후쿠오카에서 신칸센을 타고 가면 되겠네요”라고 루트를 알려 주었다. 그의 조언을 따라 열차를 알아보다 보니, 후쿠오카에서 오노미치 마을을 지나 쿠라시키까지 모든 여정을 커버하는 외국인 대상의 레일패스가 있었다.
5일 동안 신칸센을 포함한 그 지역 모든 열차를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다니! 온 세상이 나의 이번 여행을 계획해 주고 있다고 느낄 정도로 모든 게 일사천리였다. 그 정도로 코로나 기간 동안 배운 일본어를 써보려고 일본에 가고 싶은 내 바람이 깊고 강했던 것이었을지도. 저렴한 왕복 항공권, 7일의 숙소, 레일패스까지 완벽한 준비를 한 게 여행을 떠나기 한 달 전이었다. 그 모든 여행 준비를 혼자서 한 건 생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조금은 성장한 것 같아 뿌듯한 마음까지 들었다.
최고로 행복한 일주일의 여행이었지만, 여행을 기다리던 한 달간 그때의 감정도 소중하다. 바쁘고 피곤한 일정 중에도 여행을 생각하면 저절로 얼굴이 환해졌다. 어딜 가나 일본 여행 간다고, 묻지도 않은 사람들에게 떠벌리고 다녔다. 틈만 나면 다이어리를 펴고 이번 여행에서 하고 싶은 것들을 끄적였다. 어딜 가고 싶다거나, 무얼 보거나 먹고 싶다는 내용은 거의 없었다(생맥주나 하이볼을 마셔 보겠다는 건 있었지만). 마음의 소리를 따라 적어 내려가다 보면 다양한 골목을 걷고 많은 우연을 만나고 싶다는 내용에 닿았다. 물론 가장 이루고 싶은 건 최대한 일본어를 많이 써 보는 것이었고. 여행에서 돌아와 적어 둔 것들을 다시 찾아보니 바라던 그 이상으로 다 이루어졌다. 마음의 지도를 분명하게 그려 두면 그 길로 자연스럽게 들어서게 된다는 믿음이 조금 더 단단해졌다.
나는 일부러 보려고 하지 않으면 시각 정보가 저절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어릴 때부터 쭉 그랬다. 그런 둔감한 눈을 조금 더 활성화하는 데에 가장 도움이 되는 건 단연코 여행이다. 무딘 눈에 관심을 장착하고 두리번거리기 시작한 건 공항에 갔을 때부터였다. 떠나고 돌아오는 사람들이 가득한 곳에는 햇살이 가득했다. 주위를 가리는 높은 건물이 없어서 빛이 더 곧고 당당하게 뻗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시각은 빛에서 비롯되는 감각이다. 두려움이나 걱정이 마음에 담을 쌓지 않도록 살피면서 작은 빛이라도 놓치지 않아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바다를 건너는 비행기에 올랐다.
홀로 낯선 곳을 다니지만 외롭지 않을 것 같은 예감
부산에서 후쿠오카까지의 비행시간이 너무 짧아서 (하늘에서 20분) 깜짝 놀랐다. 제주나 서울 갈 때보다 더 짧게 느껴졌다. 후쿠오카 공항 정보가 하나도 없었는데 탑승 직전에 우연히 보게 된 유튜브 클립에서 국제선에서 국내선까지 무료 셔틀버스가 있다는 걸 발견하고 그대로 따라 움직였다. 후쿠오카를 주로 다루는 유튜버가 공항을 소개하며 질문을 하나 던졌다.
“후쿠오카의 가장 좋은 점은? 정답은 라면도 포장마차도 아니고… 공항에서 시내가 가깝다는 점!”
구글 지도로 검색해 보니 공항에서 숙소까지 걸어도 55분이었다. 몇 년 전 사 둔 오사카 지역 교통카드 ‘이코카’를 챙겨 갔는데, 그 사이에 전국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네트워크가 생겨 있다. 공항에서 현금을 조금 충전해서 하타카와 텐진 중간쯤 있는 게스트하우스로 가는 공항선 지하철을 탔다. 퇴근 시간의 지하철에서 일본 직장인들을 구경하고 온갖 광고판 속 글자를 더듬더듬 읽어 보느라 눈이 바빴다.
숙소와 가장 가까운 역인 기온(祇園)에서 내려 10분쯤 걷는데 커다란 절과 주택가를 지나야 했다. 조도가 높지 않은 점이 마음에 들었다. 후쿠오카는 부산이랑 느낌이 비슷한 것 같다. 대도시면서도 인구는 많지 않고 관광지의 편리함도 갖추고 있다. 가장 큰 차이는 거리와 집들이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다는 점. 며칠 걷다 보니 다양한 스타일의 크고 작은 절과 신사가 많아서 ‘여기가 일본이구나!’ 싶은 분위기가 이국적인 매력을 뽐낸다.
이틀을 묵기로 한 게스트하우스 HIVE는 오래된 2층 목조 건물을 젊은 감각으로 꾸며둔 곳이었다. 평일인데도 거의 만실일 정도로 다양한 사람들이 북적였다. 이곳에서 몇 개월씩 머물면서 일하고 있다는 스텝의 수가 많은 게 조금 신기했다. 체크인은 본격적으로 일본어를 써 보는 첫 번째 관문이었다. 입을 떼는 순간에는 언제나 조금씩 버벅거리게 되었지만, 소통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배가 고파서 근처 식당을 추천해달라고 물었더니 어떤 걸 좋아하냐고 해서 ‘밥!’이라고 대답했다. 가 본 적은 없지만 문 앞에 ‘쌀이 맛있는 집’이라고 써 붙여진 식당이 있다고, 에어드롭으로 주소를 보내준다. 주소를 에어드롭으로 보낼 수 있는지는 이번에 처음 알았는데, 굉장히 유용하게 사용했다. 일본 한자는 읽는 방법이 워낙 다양해서 영어나 구글 번역만으로는 찾을 수 없는 장소들이 있기 때문이다. 추천 받은 아카리(旬菜旬味 燈明)라는 이자카야도 한자 이름만 등록된 모양인지 검색에 잡히지 않았다. 도미토리에 짐을 풀고 곧바로 저녁을 먹으러 나왔다.
배를 든든히 채우면서 가게에 틀어 둔 방송을 힐끔거리다가 점원에게 말을 걸었다. 코로나 전에는 부산에 미용 여행을 자주 갔었다며 사진을 보여주는데 감천문화마을, 해운대 용궁사, 광안대교, 자갈치 시장, 그리고 신창토스트가 보인다. 너무나도 익숙한 장소들이다. 친구들이 부산에 놀러 오면 국제시장 골목에 있는 신창토스트에 데려가곤 한다. 하얀 요리사복에 주방장 모자를 빳빳하게 세워 쓴 할아버지가 정성껏 토스트를 구워주는 작은 가게다. 이후로도 후쿠오카에서 부산에 와 본 적 있는 일본인들의 사진첩에는 반드시 신창토스트가 있는 게 신기하고 반가웠다.
점원과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가게의 주인이자 주방장도 수줍게 끼어들었다. 부산에 친한 가족이 있어서 자주 갔었는데 지난 3년은 코로나 때문에, 지금은 경기침체로 갈 수 없다며 아쉬워했다. 가게 이름이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았더니 4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가 지어준 이름이라고 한다. ‘등명’이라는 한자는 ‘아카리’라고 읽고 ‘신에게 올리는 등불’이라는 의미다. 가게를 시작하고 어머니를 갑자기 여의고 곧이어 코로나가 시작되었던 지난 몇 년이 꽤 고생스러웠던 모양이다. 수줍은 목소리에 쓸쓸함이 조금 묻어 나왔다.
가게에서 대화를 나눈 모두가 문밖까지 배웅해 주며 나의 남은 여정을 응원해 주었다. 일본 사람들이 인사를 소중하게 여기는 문화를 가지고 있는 게 참 좋다. 처음 만난 사이, 잠깐 만난 사이라도 만나고 헤어질 때 반드시 정성껏 인사를 전해준다. 홀로 낯선 곳을 다니는 여행자에게 보내준 정성 어린 인사들 덕분에 조금도 외롭지 않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외로울 때 들으라고 친구가 카톡으로 음악을 보내 주었는데, 가져간 이어폰은 여행 내내 트렁크 가장 구석진 자리에서 나올 기회를 찾지 못했다.
[필자 소개] 이내. 동네 가수. 어디서나 막 도착한 사람의 얼굴로 두리번거리며 걷는다. 걸으며 발견한 것들을 일기나 편지에 담아 노래를 짓고 부른다. 발매한 앨범으로 『지금, 여기의 바람』(2014), 『두근두근 길 위의 노래』(2015), 『되고 싶은 노래』(2017), 디지털 싱글 「감나무의 노래」(2020), 「걷는 섬」(2022) 등이 있고, 산문집 『모든 시도는 따뜻할 수밖에』(2018), 『우리는 밤마다 이야기가 되겠지』(2021, 공저) 등을 썼다. 가수나 작가보다는 생활가나 애호가를 꿈꾼다. 인스타 @inesbri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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