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를 뒤흔든 미투 운동은 어떤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을까? 각 분야에서 미투 운동을 해온 이들이 ‘변화의 순간’에 초점 맞추어 그 성과를 공유하고, 남겨진 과제를 짚으며, 앞으로 나아갈 길을 모색해본다. [편집자 주]
‘#영화계_내_성폭력’부터 #ME_TOO까지
‘미투 운동’ 이후의 한국 영화계를 논하는 데 있어 서울여성독립영화제와 ‘찍는페미’를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미투 운동이 전 세계를 휩쓴 2019년, 서울여성독립영화제는 그 첫 번째 막을 올렸다.
돌이켜 보면 한국 사회에는 미투 운동 이전에 ‘#OO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이 존재했다. 소셜 미디어의 적극적인 활용이 미투 운동 확산의 기폭제였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온라인을 기반으로 이루어진 ‘#OO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과 미투 운동이 충분한 연속성을 가진다는 사실을 유추해 볼 수 있다.
2015년 이후 메르스 갤러리 사태(이를 계기로 메갈리아 사이트가 탄생했다)와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등을 거쳐 온 많은 여성들은 그간 불합리하다고 여겨왔지만 명징하게 발화할 수 없었던 경험들이 ‘성폭력’이라는 단어로 정의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러한 피해 사실을 소리 내어 말하기 시작한 순간, ‘#OO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이 시작되었다.
‘영화계 내의 모든 차별과 폭력에 저항하고자 한다’는 기치를 내세우고 출범한 찍는페미는 ‘#영화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이 시작된 다음 날 조직되었다. 찍는페미 구성원들은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서 출발해, 여성 중심의 영상 콘텐츠 제작 및 상영, 영화계 내 반성폭력 운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을 펼쳐 나가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의 서울여성독립영화제를 만든 동료들은 모두 찍는페미에서 만난 인연들이다.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이야기
서울여성독립영화제는 원래 찍는페미의 주력 사업 가운데 하나였던 ‘여성영화 상영회’에서 파생된 기획이었다. 우리는 여성이 주도하는 영화 현장을 만들고 현장에서 폭력을 예방하는 활동만큼이나 ‘여성이 만든, 여성의 이야기가 담긴, 여성이 향유할 수 있는 콘텐츠’가 활발히 유통되는 일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찍는페미는 설립 이래로 ‘페미니즘 시각으로 보는 다큐멘터리 상영회’, ‘개개인의 여성을 위한 상영회’, ‘메릴 스트립 상영회’, ‘두잉X찍는페미 월간 페미니즘 무비 나잇’ 등 수많은 여성영화 상영회를 진행하였다. 서울여성독립영화제 역시 기획 초반 단계에서는 새로운 여성영화 상영회 정도로 여겨졌다. 하지만 논의를 거듭할수록, 독립영화를 제작하는 여성 영화인들에게 실질적인 힘을 실어줄 수 있는, 그러니까 상영회 이상의 행사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당시 서울여성독립영화제를 기획했던 동료들은 문학계, 영상·영화계, 사진계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중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예술계의 남성중심적, 여성 배제적인 관행이 여성 예술인에게 어떠한 악영향을 미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가 한국 영화계 내에서 여성 영화인이 한 편의 영화를 완성하는 일, 그 작품을 통해 관객들과 만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절감하고 있었다. 그때 우리는 여성 영화인들의 미래에 도움이 될 포트폴리오 속 ‘한 줄’이 되어주고 싶었던 것 같다.
미투 이후, 여성독립영화의 괄목할만한 성장
2019년 첫 개최 이후 5년 동안 서울여성독립영화제는 많은 변화를 마주했다. 찍는페미 내부에서 개최되었던 초반과 달리 독자적인 조직을 꾸리게 되었고, 규모 역시 성장했다. 그 과정에서 ‘#영화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과 미투 운동을 거친 한국 여성독립영화가 변화해 나가는 과정 또한 몸소 체감할 수 있었다.
2019년부터 현재까지, 한국의 여성독립영화는 양적, 질적으로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어 냈고, 그 주제와 소재 역시 다양화되었다. 특히 비교적 짧은 제작 기간이 소요되는 단편 영화의 경우, 당대의 여성들이 주목했던 사회적 이슈를 빠르게 반영하는 경향이 있어 더욱 다양한 주제와 소재를 취한다. 이는 한국 독립영화계에 종사하는 여성들이 이전보다 더 나은 환경에서, 자신이 원하는 이야기를 펼쳐낼 수 있게 되었다는 반증이다.
무엇보다도 두 번째, 세 번째 영화로 다시금 서울여성독립영화제를 찾는 여성독립영화인들을 마주할 때 서울여성독립영화제의 존재 이유를 실감한다. 영화제를 통해 얻은 상영 기회와 이곳에서 만난 관객들로부터 힘을 얻어 다음 작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고 말하는 여성영화인, 서울여성독립영화제 출품을 목표로 새로운 작품을 연출하게 되었다는 여성영화인이 있다. 이들의 이야기를 접할 때면 한국 여성독립영화의 명맥을 이어가기 위한 5년간의 노력이 헛되지만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여성영화만을 위한 4일이 소중한 이유
그렇지만 긍정적인 변화만이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영화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과 미투 운동 이후 영화계 내의 성차별적인 구조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관련한 활동과 연구, 정책 제안 등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미투 운동으로 고발되었던 남성 영화인들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복귀하고 있었다. 현장의 성차별적 관행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고, 남성 영화인으로 가득한 엔딩 크레딧도 여전했다. 그 속에서 우리는 때때로 무력감을 느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코로나19라는 전 세계적 위기가 도래했다. 독립영화계를 중심으로 부흥하던 여성영화는 한국 영화계 전체에 닥친 위기 앞에서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팬데믹 이전 조금씩 개선되던 성인지적 지표는 팬데믹을 거치며 다시금 퇴행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2022년 실질 개봉작과 순제작비 30억 이상 상업 영화에서 모두 여성 인력이 전반적으로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영화진흥위원회 연구본부 영화정책연구팀, 『2022년 한국 영화산업 성인지 결산』 참조)
-연출자가 여성일 것(공동 연출인 경우, 절반 이상이 여성일 것) -스태프의 절반 이상이 여성일 것 -여성과 관련된 주제/소재를 취하고 있을 것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즉 서울여성독립영화제의 출품 조건에 부합하는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고군분투 중인 여성 영화인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들과 관객 사이를 잇는 징검다리로서, 이 자리를 지키겠다는 마음을 다잡는다.
누군가는 ‘남성영화’를 배제하는 서울여성독립영화제의 조건이 되려 차별적이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 역시 ‘남성영화’를 위한 시공간이 언제,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여성영화만을 위한 독립영화전용관에서의 4일은 여전히 부족하다. 앞으로도 우리는 부러 여성들의 이야기에만 주목할 것이다.
[필자 소개] 안정윤. 서울여성독립영화제 집행위원. 계간 영화 잡지 『프리즘오브』 편집장. 페미니즘과 영화, 영화제 등에 관심을 갖고 그에 관한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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