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돌아가지 않겠다’ 독일 정부와 맞선 한인 간호사들‘이민자 국가’ 독일 사회의 경험② 자신의 권리를 찾은 여성 ‘손님노동자’ (上)2019년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던 내 파트너는 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독일의 수도 베를린으로 떠났다. 기차로 6시간이 넘게 걸리는 길이었다. 4월 27일, 100여 명이 참석한 시위는 독일의 한 대형 공구 정원용품 유통업체를 규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인종차별과 여성혐오에 반대하는 한국계 여성들과 함께
문제는 이 업체의 광고였다. 나이 든 백인 남자가 땀을 흘리며 정원 일을 하고 있다. 땀에 젖은 남성의 옷은 진공 포장되어 일본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보내진다. 아시아인으로 보이는 한 젊은 여성이 자판기에서 이 옷을 구매해 황홀한 표정으로 냄새를 맡는다. 광고는 이것을 봄의 냄새로 표현했다.
사정상 나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시위에 참석한 사람들의 분노를 상상할 수 있었고 그들의 당당함 또한 그려볼 수 있었다. 이미 독일의 아시아계 여성들은 광고심의 담당기관에 신고를 했고 업체 매장 앞에서 릴레이 1인 시위도 벌였다. 그들은 이미 성과를 거뒀다. 독일 광고심의위원회는 해당 광고에 대해 부적합 결정을 내렸고, 업체는 독일 내 모든 매체에서 광고를 삭제했다. 하지만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 해당 광고는 계속됐고, 업체는 이 문제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다.
독일에서 뜻하지 않게 나는 한국과 관련된 여러 시위와 정치 행사에 참여했다. 대부분의 경우 그 중심에는 여성들이 있었다. 2019년 베를린 시위에는 그사이 나와 파트너가 알게 된 한국 여성들 중 상당수가 참여했다. 먼 지역에서 아이를 데리고 찾아온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여성혐오와 인종차별을 섞어 놓은 그런 광고를 용인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독일에선 알게 된 한국계 여성 중에는 1960-1970년대에 독일에 온 사람도 있었다. 이들을 통해 나는 독일 사회 속의 한국계 이민자에 대해 여러 가지를 알게 되었다. 과거 서독에는 한국의 학생운동이나 민주화 운동과의 연관 속에서 정치에 관심을 두고 활동하는 한국인도 있었지만, 한편으로 이주민이라는 삶의 조건 속에서 독일 사회와 싸우면서 정치화된 사람도 있었다.
특히 이주 간호사들이 그랬다. 그리고 그들의 경험은 이주민도 이 땅에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독일의 대표적 진보 언론 타쯔(taz)의 2006년 6월 13일자 지면에는 "한국식 정치화"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재독 한인 여성모임과 그 모임에서 발간한 책을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재독 한인 여성모임은 이주간호사의 ‘고향 송환’에 반대하는 서명운동에서 시작했으며, 모임에서 발간한 책은 이주 한인 간호사 20명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책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던 간호사 중 한 명은 처음으로 서명운동을 시작할 때의 떨림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그는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태어나 남자들이 정치에 관해 이야기할 때면 주방에서 일을 해야 했던 한 여성이 처음으로 정치적인 행동을 하면서 느꼈던 자기 극복의 감정을 기술하고 있다.
1977년 서독 정부는 의료 시스템 개혁과 함께, 유럽연합의 전신인 유럽공동체(EC) 외부 국가 출신의 이주 간호사들이 더 이상 노동 계약을 연장할 수 없게 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이미 독일 사회에서 자리 잡고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고려는 없었으며, 오직 의료 비용 절감만이 근거가 되었다. 당시 서독에는 한국뿐 아니라 인도, 필리핀, 인도네시아 출신의 이주 간호사가 있었다. 서독은 급여 수준이 낮고 노동 강도는 높은 간호사 인력을 이들 나라로부터 공급받았다. 이들의 상당수는 모국에서 간호사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이주 간호사들은 최초 3년 계약으로 독일에 왔지만, 이들은 전문적인 노동 인력으로 인정받고 있었기 때문에 별문제 없이 계속해서 계약 연장을 할 수 있었다.
한인 간호사들은 독일 정부의 결정에 항의하기 위해 서명운동에 들어갔다. 한인 이주 간호사의 이야기가 주요 배경인 백수린의 소설 『눈부신 안부』에는 이 서명운동 이야기가 등장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이주 간호사 선자는 일기장에 독일어로 "Wie langen noch sollen Menschen wie Waren hin- und hergeschoben wreden(얼마 동안이나 사람들이 물건처럼 이리저리 보내져야 하는가?)"라는 문장을 적어 두었다. 애초에 정치와는 거리를 두고 살았던 선자가 서명운동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던 마음을 표현한 내용이다.
선자의 문장은 실제 성명서의 내용과 연결되어 있다. 11,019개의 서명이 들어간 성명서에는 독일어로 "우리는 독일 병원이 필요로 했기 때문에 이곳에 왔다. 하지만 우리는 상품처럼 이리저리 보내지기를 원하지 않는다."라고 적혀 있었다. 한국 간호사들은 병원과 거리에서 사람들에게 성명을 모았다. 아시아 사람을 쉽게 볼 수 없던 1970년대 독일의 거리에서 서명운동을 하는 그들의 모습을 상상하면, 슬픔과 경탄의 감정이 함께 찾아온다.
독립적인 삶을 꾸리며 해방감을 느꼈던 여성 노동자들
성명서는 서독 정부에 전해졌고, 이주 한인 간호사들은 1978년 3월 뮌스터시에서 연방 내무부와 노동부의 대표, 그리고 뮌스터시가 위치한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내무부 대표가 참여하는 공청회를 조직했다. 공청회에서 한국인 이주 간호사들은 이곳에 계속해서 머무를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했다. 결국 같은 해 6월, 서독 상원은 간호사들이 계속해서 계약을 연장하고 독일에 머물 수 있도록 법을 수정했다.
한인 이주 간호사들은 독일에서 돈을 벌고, 자전거를 배우고, 운전 면허를 따고, 결혼을 하고, 애를 낳고, 이혼을 하기도 하고, 교육을 통해 새로운 직장을 얻기도 하면서 자신의 삶을 스스로 꾸려갔다. 이들은 많은 경우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했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는 삶을 스스로 쟁취했다. 소설 『눈부신 안부』 속의 선자의 경우, 광부였던 남편은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어했지만 본인은 독일에 남기를 원했다. 그는 이혼하고 독일에서 홀로 자식을 키웠다.
독일의 손님노동자 집단 중 한인 간호사의 사례는 특수한 경우에 속한다. 남성 한인 이주노동자보다 이들의 숫자가 많았다는 것뿐만 아니라, 육체적 노동 강도는 높지만 비교적 전문성을 가진 노동 집단이었다는 것도 그렇다. 하지만 다른 국가에서 온 여성 손님노동자들의 사정은 조금 달랐다. (下편에서 이어집니다)
[필자소개] 김인건. 대학 졸업 후 잠시 철학 교사 생활을 하다 독일로 떠났다. 프랑크푸르트 괴테 대학에서 한나 아렌트의 ‘정치적 평등’ 개념을 주제로 석사를 마쳤다. 지금은 ‘움벨트’라는 연구 모임에서 독일의 환경, 정치, 사회, 문화 등에 대한 프로젝트 글쓰기와 번역 작업을 하고 있다. 그 외에도 언론사 해외통신원, 여행 가이드 일을 하며, 독일의 역사적 발달과 그에 따른 사회 모습의 변화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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