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임금과 차별대우에 ‘파업’으로 맞선 이주여성노동자들‘이민자 국가’ 독일 사회의 경험③ 자신의 권리를 찾은 여성 ‘손님노동자’(下)서독과 처음으로 ‘손님노동자’ 모집 협정을 맺은 지중해 국가들은 자국의 여성들을 독일로 보내기 꺼렸다. 이들 사회는 여성이 다른 사회에 가면 도덕적으로 타락한다는 생각했다. 그렇지만 젊은 여성들이 독일에 가서 번 돈이 고향 가족의 생활에 큰 보탬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점점 많은 여성 이주노동자가 독일을 찾았다. 경제적 동기는 당대의 의식적 제약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물론 개인적 모험심 때문에 독일 행을 결정한 여성도 있었다.
협정에 따른 채용 과정을 통해 독일로 온 여성 이주노동자는 남성과 마찬가지로 일할 수 있는 능력을 증명해야 했다. 그들은 젊고 건강해야 했다. 선발을 담당하는 현지 위원회는 발끝에서 치아까지 그들의 건강 상태를 꼼꼼하게 검사했다. 이들이 일했던 분야는 주로 섬유, 전자, 식품 산업 등이었다. 섬유 전자 산업에 투입될 인력의 경우, 손가락 운동 능력과 시력 검사도 통과해야 했다.
1960년에서 1973년까지 이주여성 노동자의 숫자는 43,000명에서 706,000명으로 16배 증가했다. 같은 기간 전체 이주노동자 중 여성의 비중은 15%에서 30%로 두 배가 되었다.
가장 낮은 임금 지급하며, 노동력은 유연하게 사용하기 원해
독일 사회는 오랫동안 남성 이주노동자의 서사를 중심으로 손님노동자에 대해 이야기했다. 여성 이주노동자는 남성 노동자의 가족으로 온 경우가 대부분이며, 독립적으로 손님노동자로 온 경우는 별로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독일 경제는 가장 임금이 낮은 분야에서 이주여성 노동자를 필요로 했다. 이주노동자 모집을 주관하는 부서는 적극적으로 여성 노동자를 모집했다. 서비스 분야의 경우, 단체 모집이 아닌 개인이 노동 비자를 통해 독일에 오는 경우도 있었다.
섬유 및 의류, 전자, 식품 산업에 투입된 여성 이주노동자는 독일의 단체 임금협약에 의해 정해진 낮은 급여를 받았다. 당시 여성이 일하던 저임금 분야의 급여는 일반 남성 산업 노동자보다 30-40% 낮았다.
서비스 분야에서도 여성 이주노동자를 필요로 했다. 호텔 및 숙박업소, 식당, 일반 가정 등에서 청소나 주방 일을 하는 노동력의 경우에는 체계화된 노동 계약이나 급여 시스템이 없었기 때문에 근무 조건은 더 열악했다. 이들의 급여는 이주 노동자 모집이 이루어졌던 지중해 국가 대도시의 급여보다 낮은 경우도 있었다.
여성 이주노동자의 저임금은 서독 사회의 구조적 불평등과 연결되어 있었다. 당시 서독에서는 여성을 가정주부로 여기거나, 여성의 임금 노동을 가정의 추가 수입으로 보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서독의 기본법이 정한 여성과 남성의 평등 원칙은 성별에 따른 임금 차별을 금지했다. 하지만 차별은 노동에 등급을 나누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노동 강도와 필요한 숙련도에 따라 임금을 구분했고, 여성이 주로 근무하는 노동 분야를 저강도 비숙련 노동으로 분류해 낮은 임금을 줄 수 있도록 허용했다.
독일 여성 노동자의 경우, 가정의 살림도 책임져야 했기 때문에 시간제 노동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독일 기업은 남성 손님노동자와 마찬가지로 여성 이주노동자 또한 가족과 상관없이 시간을 회사를 위해 유연하게 사용하기를 원했다. 기업들은 저임금을 주면서 자신들의 사업장만을 위해 삶을 살 수 있는 노동력을 원했다. 업체는 젊고, 아이가 없는 여성 노동자를 원했다. 하지만 이는 현실과 맞지 않았다. 손님노동자 모집이 이루어졌던 나라의 여성들은 대부분은 일찍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다.
‘유급 출산휴가’ 등 법적 권리 몰랐던 이주 여성노동자들
여성 이주노동자는 아이를 고향에 두고 오는 경우도 많았다. 그 결과, 어떤 이는 아이를 고용주 몰래 기숙사에 데리고 오기도 했고, 어떤 이는 아이가 병에 걸리자 독일에 머물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최초 여성 노동자를 모집할 때는 아이가 여럿인 여성은 모집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여성 이주노동자에 대한 산업계의 요구가 커지자, 부부를 대상으로 인력을 모집하는 경우도 생겼다.
임신한 여성이 임신 사실을 숨기고 취직하는 경우도 있었다. 기업은 이주노동자의 임신 사실이 드러났을 때, 모집을 담당하는 관청에 책임을 전가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모집 담당 관청은 성공적인 모집 달성을 위해 임신 여부를 검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기업체들이 이미 저렴한 노동력으로 이익을 얻고 있기 때문에 이런 위험부담은 감수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서독과 다른 국가 사이의 협정 내용에는 이주노동자도 독일 노동자와 같은 사회 노동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규정이 있었다. 따라서 임신한 이주노동자도 독일 여성노동자와 마찬가지로 급여가 보장된 출산 휴가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기업은 이런 비용을 부담하고 싶어 하지 않았고, 독일어를 모르는 이주노동자는 자신에게 그런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기업은 임신한 여성에게 고향에 돌아갈 수 있는 비용을 지불하고 떠나게 했다.
결국 1960년대 말 간편한 임신 테스트기가 시장에 나왔고, 손님노동자 모집을 담당하는 해당 관청은 임신 테스트를 이주노동자의 건강검사의 일부로 도입했다.
독일 언론에서 소개되는 여성 손님노동자의 이야기 중에는 고향에 아이를 두고 왔다가 훗날 아이를 독일로 데리고 온 사연이 종종 등장한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아이를 고향의 부모나 친척에게 맡기고 독일에 와서 노동을 했던 어머니의 이야기다. 이들은 독일에서 잠시 돈을 벌고 고향에 돌아갈 것이라 생각했을 뿐 아니라, 고용 조건과 생활 환경 때문에 아이를 데려올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독일에서의 체류가 길어지면서, 이들은 점차 고향에서 아이를 데리고 오기 시작했다. 이런 사연은 당시 여성 이주노동자의 모집이 해당 여성의 현실에 대한 고려 없이 진행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독일 남성 숙련공들이 시위에 연대, 사측은 그제야 협상 나서
독일에서의 생활이 장기화되자, 이주노동자들은 자신들이 받는 대우가 부당하다는 것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1973년 자동차 부품업체 피어부르크에서 일하던 여성 이주노동자들은 기업이 언제 까지나 이주노동자를 착취할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줬다. 그들은 여성 이주노동자 또한 자신의 삶을 위해 능동적으로 정치적 행동을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줬다.
당시 서독은 석유 파동에 따른 물가상승과 경기침체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독일에서 생활하는 이주노동자의 생활비는 증가했지만, 기업은 이주노동자에게 저임금을 주면서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
피어부르크의 자동차 기화기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 이주노동자의 현실 또한 어두웠다. 이곳에 일하던 3,000명의 직원 중 1,700명이 여성 이주노동자였다. 이들은 유고슬라비아, 터키, 스페인, 그리스 등에서 왔으며 대부분은 가장 임금이 낮은 ‘저강도 비숙련 노동 그룹’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거기다 이들은 도급계약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그마저도 다 받을 수 없었다. 피어부르크사는 1970년에서 1973년까지 시간당 할당량을 62.5%나 증가시켰다.
1973년 8월 13일, 이들은 컨베이어벨트 옆에 서서 노동하는 대신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한 파업을 선택했다. 노조 및 직장평의회와 합의된 파업이 아니었기 때문에 보호를 받을 수 없는 파업이었다. 여성들은 시급 1마르크 인상과 저강도 노동 그룹 분류의 폐지를 요구했다. 사측은 곧바로 경찰을 끌어들였다. 3명이 체포되었으며, 경찰은 이들에게 폭력적으로 대응했다. 하지만 파업은 중단되지 않았다. 참가자는 더 늘어났다.
사측은 가을에 300명의 새로운 여성 이주노동자를 투입해, 장기간 근무하던 여성 노동자를 대체할 계획을 하고 있었다. 사측은 이들의 요구를 무시했고, 시간이 지나면 정치적 조직력을 갖고 있지 않은 여성 이주노동자들이 포기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회사의 예상과 다르게, 여성 이주노동자들은 시위의 동력을 잃지 않았다. 점차 독일인 남성 숙련공들도 시위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독일 남성 숙련공들은 과거 경험을 통해, 공장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여성의 지지가 없다면 자신들 또한 파업에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장차 여성 이주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지원군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성 이주노동자들이 장미꽃과 연대를 호소하는 문구가 적힌 카드를 나눠주며 지지를 호소하기도 했다. 이전까지는 다른 위치에 있던 두 집단은 함께 춤을 추고 구호를 외치며 파업을 밀고 나갔다,
사업장 내 서로 다른 두 집단이 화합의 태도를 보이자, 사측은 협상에 나섰다. 여성 이주노동자들은 1마르크는 아니지만 53페니히(100페니히=1마르크)의 시급 인상과 저강도 노동 분류 체계의 중단을 약속 받았다.
1973년 여성 이주노동자들의 파업 이후, 독일의 많은 기업에서 이주노동자들의 파업이 벌어졌다.
[필자소개] 김인건. 대학 졸업 후 잠시 철학 교사 생활을 하다 독일로 떠났다. 프랑크푸르트 괴테 대학에서 한나 아렌트의 ‘정치적 평등’ 개념을 주제로 석사를 마쳤다. 지금은 ‘움벨트’라는 연구 모임에서 독일의 환경, 정치, 사회, 문화 등에 대한 프로젝트 글쓰기와 번역 작업을 하고 있다. 그 외에도 언론사 해외통신원, 여행 가이드 일을 하며, 독일의 역사적 발달과 그에 따른 사회 모습의 변화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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