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홈리스 여성이 남긴 기록, ‘쓸모 없어 빛나는’ 세계

『고야마씨 노트』로부터① 고야마씨 노트 워크샵 멤버들의 8년

신지영 | 기사입력 2023/11/16 [11:20]

어느 홈리스 여성이 남긴 기록, ‘쓸모 없어 빛나는’ 세계

『고야마씨 노트』로부터① 고야마씨 노트 워크샵 멤버들의 8년

신지영 | 입력 : 2023/11/16 [11:20]

작년 12월 〈여성 홈리스 증언대회〉가 열려 홈리스 여성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드문 시도가 시작됐다.(관련 기사: 여성 홈리스, 우리가 여기 있다! https://ildaro.com/9517) 올해 9월에는 『그여자가방에들어가신다』(홈리스행동생애사기록팀 기획, 후마니타스)가 출판되었다.(관련 기사: 여성 홈리스는 왜 안 보일까요? https://ildaro.com/9719) 이 새로운 흐름을 관통하는 핵심질문은 ‘홈리스 여성은 왜 보이지 않는가?’이다. ‘남성’ 중심의 노숙인 지원제도로부터 소외된 채, 집에서도 밖에서도 안전한 삶의 자리를 확보할 수 없는 홈리스 여성들이 처한 상황을 알리고 변화시키려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이때, 이 질문의 의도는 ‘보여준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어떻게 홈리스 여성이 안전하게 살아갈 장소를 확보할 수 있는가에 있다.

 

이 질문은 홈리스 여성이 처한 문제를 가시화하는 것이나 생존을 확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더 멀리 나아간다. 홈리스 여성의 경험은, ‘홈리스’ ‘여성’이란 전형화된 틀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관계와 내밀한 고통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며, 동시에 그 수많은 고통을 개인적인 것으로 가두지 않는 새로운 관계나 활동과 만나는 순간들도 품고 있기 때문이다.

 

▲ 일본 도쿄의 한 공원 깊숙이 있는 텐트 마을에, 비닐로 겹겹이 싸여 있던 고야마씨 노트 ©고야마씨노트워크샵


홈리스 여성에 대한 전형화된 인식은 결국 혐오와 폭력, 위계화된 동정으로 귀결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고통을 단지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한 여성이 생산성-정상-인간 중심주의적인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겪는 이 복잡한 고통에 귀를 기울이고 그/녀/들과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는 것이 아닐까? 고통과 등을 맞댄 채로도 고통을 넘어설 수 있는 세계가 그/녀/들의 표현으로부터 창출될 수 있지 않을까?

 

홈리스 여성이 놓여 있는 구조에 대한 비판뿐 아니라, 그 자본주의와 가부장제 시스템 ‘밖’에 있기 때문에 생겨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세계 감각을 여러 존재의 공생을 위한 기반으로 삼고 싶다.

 

도쿄의 한 공원 속 텐트마을에 살았던 고야마씨

 

일본의 어느 공원에서 생산성-정상-인간 중심주의적인 세상과 불화하며 자신의 경험을 자신의 존재를 지키듯이 계속해서 써 왔던 여성이 있다. 고야마씨의 노트는 풍부하고 날카로운 물음을 던지며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것은 ‘쓸모 없어 쓸모 있게 되어야 한다는 세계’가 아니라, 오히려 ‘쓸모 없어 그 자체로 빛나는 세계’이다. 이는 내 유학생활 속 비밀 같은 시간과 연결되어 있다. 그 시간을 채워준 그/녀/들을 통해 나는 한번도 만나본 적 없는 고야마씨와 만났다.

 

고야마씨는 도쿄의 한 공원 깊숙이, 비밀처럼 펼쳐진 텐트 마을에 살았다. 고야마씨의 마지막 시간을 돌봤던 사람들은 고야마씨가 세상은 떠난 뒤 방대한 분량의 노트를 불태우지 않기로 한다. 노트에는 끼니가 걱정되고 추위나 더위로 힘들고 폭력에 시달리지만, 몸과 마음이 아프고 불안하고 흔들리면서도 자신을 지키듯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던 고야마씨의 세계가 풍부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 ‘쓸모 없어 빛나는 세계’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모여, 그야말로 개성 넘치는 필치로 쓰여진 방대한 양의 노트를 컴퓨터로 문자화하는 ‘고야마씨 노트 워크샵’ 활동을 시작해 8년이 흘렀다. 그리고 올해 10월 30일, 워크샵 멤버들이 문자화된 노트를 편집하여 『고야마씨 노트(小山さんノート)』(etc. books)가 출판되었다. 고야마씨가 죽으면서 남긴 노트와, 약한 존재들에 대한 폭력이 심화된 현재를 살아가는 멤버들의 고민이 만나, 그 누구의 것도 아니고 따라서 모두의 것이 될 수 있는 유례없는 형식의 책이 되었다.

 

▲ 지난 10월 30일에 발간된 『고야마씨 노트(小山さんノート)』 고야마씨노트워크샵(小山さんノートワークショップ) 편, 엣세트라 북스(etc. books) ©고야마씨노트워크샵 https://etcbookshop.stores.jp/items/652f815ce70d9700363ddcfb


이 책에 실린 고야마씨의 글과 ‘고야마씨 노트 워크샵’ 멤버들의 에세이는 홈리스 여성에 대한 문제의식이 확대되고 있는 현재 한국사회에서, 어떤 존재를 전형화하거나 이상화하지 않으면서 경험을 듣고 기록하는 또 하나의 방법을 상상하게 한다.

 

세상 사람들은 고야마씨를 ‘홈리스 여성’이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멤버들은 고야마씨라고 불렀다. ‘홈리스 여성’이란 말은 고야마씨를 설명해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고야마씨는 주변의 폭력이나 조롱, 가난한 삶으로 불안해진 마음을 달래기 위해, 약간의 돈과 시간이 생기면 단골 찻집으로 가서 값싼 커피를 시켜놓고 몇 시간이고 글을 쓰고 예전에 쓴 글을 읽으면서, 세상의 시선에 의해 난도질 된 스스로를 되찾아 오곤 했다.

 

빈 병이나 캔 줍기, 도시락 받기, 대신 줄서기, 생계를 위해 동거하는 남성의 빨래 등으로 삶은 바쁘고 고됐지만, 고야마씨는 글을 쓰는 그 시간을 “프랑스에 간다”고 표현하고, 태풍으로 텐트가 무섭게 흔들리면 ‘비행기를 탔다’고 상상하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도움을 주는 사람에게는 손으로 만든 “키라키라(번쩍 번쩍)”라고 불리는 부적을 선물로 주었다. 이는 동정을 거부하고 평등한 관계를 만들어내려는 노력이기도 했다.

 

가난과 폭력과 실패 속에서도 길들여지지 않는

 

밖으로부터 강요된 역할이나 시선에 맞추는 것이 고통스러울 때, 아무리 노력해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을 때, 폭력과 폭언에 계속 노출될 때, 온갖 차별과 배제로 스스로가 쓸모 없다는 생각이 파고들 때, 좀 다르겠지 생각한 공동체에서도 다시금 차별과 배제에 마주하게 될 때, 그 모든 고통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지키고자 하는 자기 자신의 세계가 어둠 속에서 웅크리고 있을 때, 『고야마씨 노트』는 조용히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길을 찾아줄 것이다.

 

이러한 기대를 품고, 출판사 엣세트라북스(ect.books)의 편집장 마츠오 아키코(松尾亜紀子)씨의 배려로 『고야마씨 노트』 중 고야마씨 노트 일부와 멤버의 에세이를 번역하여 6회에 걸쳐 연재한다.(일다에 실린 마츠오 아키코씨 인터뷰: “아직 전해지지 않은 여성의 목소리는 무한대다” https://ildaro.com/8631) ‘고야마씨 노트 워크샵’ 멤버들은 대부분 고야마씨를 만난 적이 없지만, 멤버들의 에세이에는 워크샵을 통해 함께 만나갔던 고야마씨가 멤버 각자의 고민과 만나 변신한 모습들이 담겨 있다.

 

▲ 텐트 마을 속 고야마씨 텐트가 있던 곳 앞에서 애도를 표하는 ‘고야마씨 노트 워크샵’ 멤버들  ©고야마씨노트워크샵


이치무라씨는 복지나 의료가 이른바 ‘정상가족’의 틀 바깥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에게 얼마나 폭력적인지를, 고야마씨의 마지막 순간을 통해 보여준다. 요시다씨는 홈리스 활동 안에서도 생기는 ‘여성’에 대한 위계와 차별 속에서, 고야마씨의 노트가 힘을 주었던 순간들에 대해 쓴다. 사코씨는 고야마씨가 동거 남성으로부터 온갖 폭력과 폭언에 시달리면서도 정신적 독립을 잃지 않았던 모습을 통해 자신도 겁먹지 않고 살아갈 힘을 얻었다고 토로한다. 후지모토씨는 슬플 때 고통스러울 때 불안할 때 등에 따라 달라지는 고야마씨의 필치에 주목하면서, 쓰는 것과 사는 것이 어떻게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는가를 보여준다. 셋츠씨는 실천적 연극활동의 경험을 바탕으로 가난 속에서도 자신의 삶과 무대를 환상 속에서 만들었던 고야마씨의 노력을 연극 표현을 통한 치유행위로 읽는다.

 

고야마씨의 죽음과 함께 시작된 ‘고야마씨 노트 워크샵’은, 고야마씨 노트를 멤버들의 다채로운 활동과 그 속의 고민과 연결시켜 변신시켜 왔다. 한국에 번역 연재되는 고야마씨의 노트와 멤버들의 에세이가, 한국사회의 홈리스 여성 활동뿐 아니라, 생산성-정상-인간 중심주의적 세계를 거부하면서, 쓸모 없어 비로소 빛나는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는 여러 활동들과 만나 또다시 변신하며 퍼져나가길 바라는 마음이다.

 

“전진하라, 일하라, 돈 벌어라”라는 올림픽 같은 구호 때문에, 고야마씨는 흔들리고 약해지고 몸과 마음이 병들고, 폭력과 폭언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은 몇 번이고 실패했다. 그렇지만 고야마씨는 “이제 나는 현실의 인간관계나 사람들 곁에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이 땅은 하늘에도 통하는 길이 있다.”라고 말한다.

 

고야마씨는 어떻게 이 지속적인 가난과 폭력과 실패 속에서도, 길들여지지 않고 그 상황을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을 갖고 글을 계속 쓸 수 있었을까? 어떤 존재의 좌절을, 또 다른 세계를 향한 끊임없는 물음으로 만들어 가는 일을 함께 할 친구들을 찾아, 연재를 시작한다.

 

노보리씨는 이번 첫 연재에 고야마씨 노트 워크샵이 시작된 경위를 밝혀 주었다. 노보리씨의 에세이를 통해 준비운동을 마친 후, 고야마씨 노트의 생생한 글 속으로 들어가 보자.

 

[필자] 신지영. 연세대학교 교수. 1945년 전후 동아시아 코뮌의 형성과 기록/문학을, 현재의 마이너리티 및 비/인간 존재들의 공통성과 기록/문학과의 접점 속에서 연구하고 있다.

 

-노트 속에서 발견한 장소: 노보리 구키코(登 久希子) 에세이

 

우리들이 고야마씨라고 부르는 여성은, 2013년 연말까지 도시에 있는 공원의 ‘텐트 마을’에서 살면서 방대한 분량의 글을 쓰고 있었다. 고야마씨가 죽은 뒤 남긴 노트를 앞에 두고, 같은 텐트 마을의 주민이었던 이치무라 미사코씨가 노트를 디지털 문자화하자고 이야기하여 ‘고야마씨 노트 워크샵’이 시작되었다.

 

▲ 고야마씨 노트, 고야마씨의 개성적인 필치가 느껴진다. ©고야마씨노트워크샵

 

공원에서 살고 있던 고야마씨가 자신의 곁에 두고 소중하게 지켜온 수십 권의 작은 노트는 비나 공원 습기에 손상되지 않도록 비닐로 겹겹이 싸여 있어서, 마치 누군가에게 언젠가 읽히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했다. 페이지를 넘겨 보면, 읽히길 기다리고 있었다고 느낀 것이 반드시 착각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일기라고 부르는 것이 좋을지, 사소설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을지는 모르겠지만, 작은 노트는 다양한 배경을 갖고 각기 다른 삶을 사는 우리들을 사로잡아 버렸다.

 

우리들은 주로 매달 주말 오후에 모여서 노트를 문자화했다. 노트 내용은 너무 충격적이거나 너무 슬프거나 너무 고통스럽거나 혹은 너무 재미있었다. 따라서 [고야마씨의 노트를] 디지털 텍스트로 문자화하는 것은 기계적으로 척척 진행되지 않았다. 제각각 고야마씨의 기분을 따라가며 공감하거나, 수수께끼 같은 음차 글자나 너무 달필인 부분은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거나, 노트북 앞에서 뭉친 몸을 풀거나 했다. 마지막에는 각자 가져온 음식을 둘러싸고 저녁식사를 하면서 수다를 떨거나 하면서, 워크샵은 천천히 진행되었다.

 

[필자] 노보리 구키코(登久希子) 일본학술진흥재단 특별연구원(RPD). 박사(인간과학). 사회적 아트 실천. ‘아트’와 돌봄과 연구의 관계성에 대해서 인류학적인 시점에서 연구하고 있다.

 

#고야마씨 노트로부터 

 

1991년 11월 7일

일하러 가고 싶지 않아. 일과는 맞지 않아. 이제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어. 나는 나대로 힘껏 살았어.

과거 12년간 떨어져 있던 도시 속에서 본래의 은혜와 두절된 현재, 하늘에 빌어도 이 현실은, 스스로 일해 현금을 벌어 지불하지 않으면, 쉬는 날도 방에서 한 시간조차도 한숨도 잘 수가 없다. 밖에 나가도 편안한 곳이 없을 때, 내 좌절을 구원해줄 것들은 모두, 돈과 시간이 드는 곳들 뿐이다.

나에게 소중한 것들은 모두, 무가치하게 되어 떠내려가 버린다.

 

▲ 고야마씨의 글은, 손바닥보다 약간 큰, 작은 사이즈의 노트에 빼곡하게 쓰여졌다. ©고야마씨노트워크샵

 

2001년 2월 22일

스스로의 힘이 있는 한, 제우스, 제우스, 제우스와 예술, 문학, 음악의 신을 우러러보며, 불타오르는 시간 속에서 예술에 대한 정열을 지속하고 있지만, 허락된 시간뿐이다. 호사 취미(道楽)라는 이야기를 듣고, ‘누구 덕에 밥을 먹느냐, 게으름뱅이, 돈을 벌어와’라는 호통만 듣고 있자니, 영혼이 상처받고, 심한 충격을 받는다. 두세 가지 일을 좀처럼 하지 못한다.

 

2001년 2월 26일

사람의 자유, 본래 있어야 할 영혼을, 누긋누긋해질 수 있도록, 해방시켜 주면 좋겠다. 시간이 허락하는 한 나는 나 자신이고 싶다.

걸을 힘을 잃었다. 이 마음의 응어리를 풀려고 한다. 침묵의 2월이 끝나려 하고 있다.

 

2001년 3월 18일

노랑색 우산 하나, 공원의 쓰레기 수거장에 놓여 있었다. 젖지 않을 수 있게 됐다. 고마워, 마치 오늘의 빛 같다.

 

2001년 3월 26일

3월 26일, 어젯밤부터 내린 비로 대지가 젖어, 어린 풀의 초록색이 한층 깊어 졌다.

오늘이야말로, 느긋하게 하루 누워 있으려고 생각했는데, 정오가 지나 희미하게 눈을 뜨자 갑자기 ‘배가 아파’라고 소리를 내 버린다. ‘시끄러워. 꾀병이지. 니 말은 믿을 수 없어’라는 차가운 말…….

이런 사람 옆에 쓰러져 있을 성싶으냐고, 억지로 벌떡 일어나, 공원 광장을 둘러본다. 봄바람이 강해 분수가 눈물처럼 마구 흩날리고 있다. 인적이 드문 오후 햇살에 몸을 드러내고, 냉혹한 관계에서 빨리 벗어날 수 있도록, 기백과 고고한 정신을 불러 일으킨다. 작은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신다. 닷새 동안 먹으려고 했던 15년산인 이 술은, 350엔, 싸서 흥미롭다. 버스럭 버스럭하고 몸 속 긴장이 풀린다. 올해는 벚꽃이 빨리 질 것 같다. 나뭇잎이 새로 여물 때가지 잠시 동안 웅성거릴 것이다.

 

3시가 지나, [그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잠자코 밖으로 나온다. 슈트케이스의 무게가 2배로 느껴진다. 주말이 지나면 거리는 조용하다. 언제나 앉는 자리에서 마음을 느긋하게 한다. 완전히 외부 세계에서 벗어나 짧은 시간, 프랑스에 간 셈치고 나 자신의 세계로 들어갈 때, [그것들을] 웃어 넘길 수 있는 의식이 되살아날 때가 있다. 질척질척한 감정은 싫다. 하물며 싸움은 제일 싫다. ‘마치 삶아도 구워도 죽일 수 없는 곤약처럼 바보 같다’는 말을 몇 번이고 들으면서 지내온 날들이 너무 길어 지긋지긋하다.

 

이번에는 너무 많이 썼다. 습관을 지속하는 것도 중단될 것이다. 다시 새로운 즐거움을 찾자. 5월 어린잎과 함께 무엇인가 새로운 이미지가 피어날 수 있도록, 미묘한 4월을 그럭저럭 지내자.

25살 때부터 읽고 쓰는 일에 뜻을 두고, 현재 이런 환경 속에서 약 2개월에 6권의 노트를 쓸 수 있었으니 충분하다. 분명 격려하고 협력해 준 사람들도, 세상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수입이 없어도 기뻐해 주겠지. 나도 기쁘다. 오늘도 쓸 수 있었다, 읽을 수 있었다, 걸을 수 있었다 라고……. 예쁜 풍경을 보고, 아름다운 음악도 들을 수 있었다.

 

▲ 텐트 마을 속 고야마씨 텐트가 있던 곳 앞에 바쳐진 책 『고야마씨 노트』 ©고야마씨노트워크샵

 

2001년 4월 4일

1997년 5월 3일부터, 공원 밖의 사생활에 인연이 닿아 지내 보았지만, 추운 겨울에 더구나 텐트 생활은 생각지도 못했다. 40년 가까이 풀숲에조차 앉지 못했던 내가, 자연과 함께 비 오는 날, 폭풍우 치는 날, 눈 오는 날, 더구나 두려운 사람과 함께 사는 것의 괴로움이, 얼마나 내 내면을 복잡하게 만들었는지. 자유가 있고 자유가 없다.

제각각 심하게 내몰린 한 존재와 생명은, 사회를 떠났다. 고독을 고립으로 몰아넣고 몸부림치며 외쳤던 텐트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빛에 휩싸여, 하루의 잠을, 존재를, 시간의 한계를 지켜 주었다.

 

외출, 길어야 네 다섯 시간, 스무 시간 이상이나 이 비참한 비닐 한 장에 싸여 지내온 것일까 생각하면, 내 몸과 마음을 움직일 수 있고, 먹을 수 있고, 마시고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내 목숨이란 것, 그 존재를 음미하게 한다.

한번 나갔다가 다시 돌아온, 서문 가까이의 매점 건물에서 지낸 1997년, 1998년, 밤이 되면 열명 정도 모여 기둥 8개가 [받치고 있는] 두꺼운 지붕 아래 공간 의자에 누워 있었다. 비, 폭풍 때에는 비닐을 뒤집어 쓰고 공포로 소리지르며 지냈던 땅도, 모두 없어지고, 현재, 식당 매점이 됐다.

그래도 이제 나는 현실의 인간관계나 사람들 곁에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이 땅은 하늘에도 통하는 길이 있다.

 

2003년 2월 9일

느긋하게 산책을 가려고 약간의 음식과 음료를 긴마(金真)의 텐트로 옮기고, 물을 길러 가는 도중, 까마귀 한 마리, 나무 위 하늘을 보고 있다. 동그란 간장 전병 하나가 떨어졌다. 확 입에 물고는 기쁜 듯이 날아 갔다. 위를 보아도 사람이 아무도 없고, 새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신기한 장면을 처음 봤다.

 

5시쯤 부터 거리를 향한다. 봉투 하나가 필요했다. 길 모퉁이 쓰레기통에 ‘파리’라고 쓰여진 새 봉투가 하나 있었다. 집어 들자 아래에 새 부츠 한 켤레가 있다. 갈색, 굽이 높은 오리지널 제품 같다. 이 만남이 기쁘다. 마침 이탈리아 부츠 한 켤레가 있었지만, 젖어 곰팡이가 슬어, 한 켤레도 없었다. 사이즈 L. 발이 커서 딱 맞는 구두를 찾는 게 어려웠다. 구두에는 꿈이 있다. 이걸 신고 춤추고, 여유롭게 산보하면 즐겁겠지. 서양 인형 컬(역주: 1950-60년대 유행한 어린 여자아이를 모델로 한 파란 눈의 인형. 앞머리 컬 모양 때문에 컬 인형이라고 불림)이 신을 것 같은 부츠, 드레스에도 어울릴 것 같다.

 

※긴마(金真): 일하는 곳에서 만나 함께 살게 된 남성으로, ‘함께 있는 사람(共の人, 共にいる人)’이라고 불림. 그는 2002년 10월 7일에 세상을 떠나는데, 죽은 뒤에는 그를 ‘긴마’라고 부르기 시작함.

 

2003년 10월 10일

다시 환상의 방에서 의식은 마음을 향한다. 스쳐 지나가는 환상의 모습이 웃는 얼굴로 서 있다. 와인 색 블라우스, 세로 줄무늬의 사이드 벤트의 산뜻한 정장. 바쁘게 일주하고 돌아온 ‘룰라’ (고야마씨의 상상 속에 등장하는 인물로, 댄디한 복장을 한 프랑스인의 모습을 하고 있음)의 멋진 모습을 눈 앞에 볼 때, 갑자기 밝은 빛에 휩싸인 듯이 다른 사람이 된 나. 기쁨과 행복이 온 몸을 감싸는 밤의 한때. 심야, 빗소리를 들으면 편안하게 잠든다.

 

2003년 12월 29일

기운도 나지 않는 쓸쓸함의 정오, 2001년 가을의 노트 3권을 읽고, 2년 이상이나 되는 빈곤생활, 현재 점점 더 심해지고 있는 상황을 견디기 어렵다. 언제까지 이렇게 힘들어야 할까. 나는 ‘싫어’라고 중얼거리면서 꿈도 희망도 퇴색하고 옹졸해진 의식에 매몰되어 버렸다. 시간은 시시각각 흘러 간다. 외출할 몸가짐을 할 기운도 나지 않는다. 미지근한 커피와 비스킷을 먹고, 노트를 다 읽으니 3시가 되었다. 남쪽 하늘이, 오늘도 희미한 보라색으로 물들어 있다. 지긋이 감정이 가라앉기를 기다려, 인간 각자에게 너무도 가혹한 혹독함을 주는 불평등을 원망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 한층 더 침묵은 깊어지고, 내 내면의 근원으로 침몰한다.

 

2004년 9월 6일

9월 6일, 불안정하게 잠에서 깬다. 쓸쓸한 테이블. 또 다시 부족한 물건을 보급하려 거리로 향한다. 어제의 휴양은 움직임을 둔하게 한다. 2시간 남짓 반복해서 같은 곳을 걷고, 안 되겠다고 포기하자 마자, 돌아온 약간의 음식, 음료. 얼마 안 되지만 없는 것 보다는 나아 마음이 편안해진다. 빨리 돌아와, 빨래, 물 깃기.

밤에 접어들어, 결국 정신적인 꽉 막힘에, 일본에 있는 것의 한계를 느낀다. 조금 이르지만, 환상으로 만든 프랑스 방에 일주일 정도 가기로 결심하고, 꽉 막힌 일본의 현재 상황의 압박과 가난에서 벗어난다.

새벽까지 깊이 고민하고 생각하고, 답답하다.

 

2004년 10월 11일

밤이 되자,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식욕도 없다. 소소한 요리에 약간의 맥주로 건배. 슬로우 재즈 곡으로 지르박 춤을 추고, 마음의 활기를 불러 일으킨다. 샤워로 몸을 씻고, 10월의 장마철 같은 날씨, 이틀만 있으면 55년의 인생도 끝. 새로운 여행이 시작된다. [번역: 신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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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rill 2023/11/19 [19:32] 수정 | 삭제
  • 진정한 자신으로 살아가려고 했던, 한 사람의 진솔한 언어가 마음을 울리네요. 읽으면서 펑펑 울고 위로 받았습니다.
  • silverback 2023/11/18 [11:21] 수정 | 삭제
  • 이름 모를 누군가를 위해 바치는 헌사에는 우리 모두가 인간이라는 동질감이 숨어있으며, 그러한 동질감을 이루는 요소는 공감과 연민일 것입니다. 이 글을 읽는 저 또한 기자님으로부터 연결된 고야마씨의 삶과 죽음이 가까스로 이어져 전해져오는 것을 느낍니다. 글이란 인간만이 가진 특권이며, 일기란 그 특권의 유일한 미학인듯합니다. 수백수천년에 쓰인 고문서를 해독하는 장인들의 집중을 떠오르게 하는 기자님과 번역자들의 노고는 이 기사를 읽는 이의 마음을 차츰 먹먹하게 합니다. 저는 문득 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던, 지구 상 어느 한 사람을 궁금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은 언어의 힘이고 생각의 씨앗입니다. 씨앗은 발아하였고, 마침내 지상을 누비고 성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길 위를 걷는 사람은 새싹을 목격하였고, 사람들은 이제 그 존재를 인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세상은 그 틀에 맞지 않는 존재들을 지독하게 밟아 없애려 하고, 그 존재를 지우고 싶어하지만, 빛은 밟는다고 흐려지지 않고, 가린다고 사라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모든 희로애락의 무질서가 가라앉은 새벽, 침묵을 동반한 빛은 조용하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하였습니다.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나와 동일한 종류의 생명체가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사투의 경계선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해야햐는 의무와 차분히 앉아서 자신의 생각을 글로 정리하는 권리 사이에는 수 많은 이야기가 숨어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이야기를 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들의 인생이기 때문이지요. 오늘 저는 인터넷을 떠돌다가 아직 살아있는 '사람' 한 명을 발견합니다. 그 이야기는 살아서 차분하게 목소리를 들려좁니다. 아직 죽지 않은 것입니다. 어서 그 책을 읽어보고 싶습니다.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궁금해졌습니다. 성실하고 사려깊은 기사 감사합니다.
  • 독자 2023/11/17 [13:01] 수정 | 삭제
  • 한국에서도 고야마씨 노트를 단행본으로 읽을 수 있는 날이 오겠지요? 일기도, 기사도 반짝반짝 하네요.
  • 연이 2023/11/16 [14:52] 수정 | 삭제
  • 비닐에 꽁꽁 싸여있어 누군가에게 언젠가 읽혀지길 바란 것 깉다는 얘기가 마음을 쿵 하고 건드립니다. 제가 이렇게 읽을 수 있어서 기쁘네요.
  • 감사 2023/11/16 [12:56] 수정 | 삭제
  • 전문 번역출간되면 좋겠습니다. 좋은 기사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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