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하지 않는 것이 자매애인가

페미니즘 수난시대

문이정민 | 기사입력 2003/05/01 [01:15]

비판하지 않는 것이 자매애인가

페미니즘 수난시대

문이정민 | 입력 : 2003/05/01 [01:15]
나는 작년 한해 “당신은 페미니스트입니까?”라는 간단한 신변확인(?) 이후 곧바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아야 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박근혜를 지지합니까?”

작년 대선을 앞두고 이계경 전 여성신문사 사장이 한나라당 입당을 했다. 당시 나는 여성신문사 기자였다. 그리하여 이런 질문도 받아야 했다.

“사장님이 한나라당 입당했는데 당신도 지지합니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박근혜를 결코 지지하지 않으며 이계경 전 여성신문사 사장의 판단을 수긍할 수 없다. 재고할 일말의 가치도 없이 ‘아니다’라고 생각한다.

구구절절 그 이유를 설명할 것도 없다. 한명의 여성이라도 정치판에 들어가는 것보다 아버지에게 충실하게 배운 박근혜의 독재 정치가 실제 여성들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먼저 생각하는 것이 여성주의니까. 언론사 사장이 정치활동을 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상식에 어긋나는 짓이니까. 혹자는 그것이 ‘급진’이라고 했지만 전투적인 것과 막 나가는 것은 다르다. 설득할 수 없는 급진은 전투적일 수 없다.

그런데 내가 왜 그런 질문을 감당해야 했을까. 왜 사람들은 페미니스트라면 으레 박근혜를 지지하고 여성언론 사장의 한나라당 입당을 어떤 의미에서건 환영한다고 믿었던 걸까.

페미니스트는 ‘여성의 정치세력화’를 위해서는 절차와 과정, 그리고 상식 없이 “여성도 더러워져야 한다”는 한목소리를 내리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모든 페미니스트들이 단일한 목소리를 내리라 생각하는 그들의 무지함일 뿐이라고 치부하고 넘어갈 수만은 없었다.

왜냐하면 아무도 “아니다”라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도 “틀렸다”라고 지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페미니즘 수난 시대였다. ‘누구를 위하는 것’인지 모를 여성 정치세력화 논의는 마초들의 공격 대상이 됐고 분위기에 힘입어(?) 여성들은 그저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말자고 다독였다. 무엇이 옳은 건지에 대한 냉철한 논의는 뒷전으로 가버렸다.

박근혜를 지지한다는 발언이 김규항과 같은 마초들에게 얼마나 좋은 먹이를 던져준 꼴이 되었는지에 대해 말하는 것이 고달프게 살아 온 여성을 벼랑으로 내모는 것인가. 경솔한 정치적 선택과 그 선택이 가져온 파장을 비판하는 것이 14년간 여성언론을 이끌어온 노고를 무시하는 것인가. 둘은 아무 상관관계가 없다. 비판의 지점은 명확했다.

그러나 분위기는 이랬다. 우리끼리 얼굴에 먹칠하지 말자는 것이었고 서로에게 상처주지 말자는 것이었다. 서로를 감싸 안아라, 비판하지 말아라. 그것이 ‘자매애’였다.

그녀들 간의 더러운 연대에 ‘나’는 없었으되 비판하면 안되었다. 비판하는 것은 ‘자매애’가 부족한 경솔한 행동이므로, 선배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므로, 페미니즘의 분열을 보여주는 것이므로. 불행히 나는 어렸고 아무도 말 걸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다.

얼마 전 이계경 여성신문사 전 사장의 퇴임식이 있었다. 알만한 여성계 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여 격려의 제스처를 취했다. 그간 힘들었다는 심경 고백 후 이계경 전 여성신문사 사장은 눈물을 비췄지만 “떳떳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난 떳떳하지 못했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다’로 정리되는 안일한 ‘자매애’가 난 떳떳하지 못하다.

원칙 없는 온정주의가 어느새 ‘자매애’로 둔갑해 페미니즘을 얼마나 웃긴 것으로 만들어 버렸는지 여전히 강하게 머리를 잡아 끌기 때문이다. 도대체 누가 책임질 것인가. 상처주지 않고 감싸 안느라 성찰 없는 궤변이 페미니즘이 되어버린 것을.

‘웃긴’ 페미니즘이,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페미니즘이, 누구를 설득하고 또 누구를 위협할 수 있겠는가.

이제는 페미니즘 진영 내부의 성찰과 비판적인 토론문화가 절실히 요구된다. 그 비판은 생산적인 담론의 시작이 되어야 한다. 누구도 비판없는 담론을 원하지 않으며 성찰하지 않는 페미니즘을 원하지 않는다. 더 이상은.

  • 도배방지 이미지

  • 레드버진 2005/07/22 [15:16] 수정 | 삭제
  • 박근혜지지설이 나왔을 당시, 혼자 많은 싸움과 논쟁을 치뤄냈습니다.
    나 스스로도 감당하지 못할 만큼의 혼란이 있었지만 나도 어느순간 자.매.애라는 함정에 빠져들더군요. 그러다가 그런 나를 스스로 경계하면서 그럼 난 페미니스트가 아닌가? 당시엔 좀 힘들고 난망했던 기억이...

    이 글을 읽으니 속이 다 후련합니다.^^ 보다 당당하고 솔직한 페미니스트로 서로 거듭나길!
  • 잉걸 2003/05/27 [07:51] 수정 | 삭제
  • 접합니다.
    이런 생각 보다 많은 사람이 말할 수 있으면 합니다.
    다음엔, 다음 선거엔 박근혜를 다시는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여성주의를 기다립니다.
  • 우인 2003/05/09 [12:22] 수정 | 삭제
  • 박근혜에 대한 논의,
    이계경 씨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지 않았잖아요.
    여성정치세력화에 대한 논의도 마찬가지고요.

    현실과 이상의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각자 다른 입장들에 대한 정당한 논의가 선행되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인 드는군요.
  • 수수꽃다리 2003/05/07 [19:24] 수정 | 삭제
  • 언론사 사장이 정치인으로 변신한 것 때문이 아닌, 그가 투신한 곳이 한나라당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그 외 기사 내용 모두 동의합니다.

    이제 막 회원 가입했구요.
    조금 지켜보다 '일다 친구'로 등록할게요.

    진정한 여성주의는 소수자와 약자를 사유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여성의 자매는 생물학적 여성이 아닌 사회적 약자로서의 여성입니다.
    이것이 '일다'의 생각 맞지요?

    '일다'의 발전을 기원하며...
  • 개암나무 2003/05/07 [02:25] 수정 | 삭제
  • 평소 내 맘 속에 담고 있던 말을 꼭꼭 집어 해 주신것 같습니다.


    박근혜 논쟁이 나올때 기절하는 줄 알았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이 그에 동조했기 때문이었죠.

    만일 박근혜가 남성이었다면 어떠했을까요...

    모르긴 몰라도 아마 타도의 대상이 되었을 겁니다.


    김규항이 싸잡아 욕할때, 그런식으로 욕먹는 것이 억울하기도 했지만, 한 켠으론 욕 먹을만 했단 생각도 들었었습니다.

    여성도 더러워져야 한다고 쓴 글을 읽어보며 고개를 내 저엊는데 이프 잡지가 동조 하고 나서더군요.

    대선때 이회창에게 줄 서는 의원들을 손가락질 했는데 소위 언론사의 사장이라는 이계경씨도 그 줄에 끼는것을 보고 경악했습니다.


    남성이면 비난 받을 일도 여성이라면 자매애란 이름으로 여성주의자들 사이에선 무조건 면죄부를 받을 수 있는가?


    나도 그에 관해서는 동의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일다의 탄생을 축하하며 다양한 의견을 나타내 주는 여성주의 매체로 성장하길 기대합니다.
  • 둥글둥글 2003/05/06 [13:48] 수정 | 삭제
  • 정말로 보고싶었다. 이런 글이...

    눈물이 난다.
  • 희영 2003/05/02 [15:54] 수정 | 삭제
  • 용기가 없어서겠죠.
    찔리는 게 많아서거나.
    그걸 자매애라고 말한다면 뻔뻔한 거죠.
  • ttetis 2003/05/02 [13:37] 수정 | 삭제
  • 이글에서 자기자신에 관한 성찰 얘기가 왜 나오는지 잘 모르겠네요.
    여성신문사의 상황에 관한 의견개진이 기자의 성찰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자신을 성찰하라는 말은 흡사 넌 잘못한거 없냐..라는 식으로 들릴수도 있구요.
    성찰이란 말과 비판의식은 떨어진게 아닐텐데요.
    비판은 나자신의 성찰에서 나오는거 아닌가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면 말이죠
  • 제안 2003/05/02 [11:18] 수정 | 삭제
  • 페미니즘 내의 비판과 성찰이 필요하다는 말은
    원론적으로 맞지요...
    그런데 또 하나 필요한 게 나에 대한 성찰입니다.
    페미니스트, 페미니즘을 말하고 있는 나, 페미니스트, 그리고 내 페미니즘에 대한 것이지요. 기존의 페미니스트, 페미니즘에 대해 비판하고 성찰하는 것 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내가 말하는 페미니스트, 페미니즘은 무엇이고, 그건 또 다른 여성들과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 그게 함께 따라와야 설득력이 있지요.

    무엇보다 여성신문 이.취임식 그 현장에 있었나요?
    혹여 현장에 오지 않은 상태에서 기사만을 보고(인터넷에 올려진 것)
    말하는 거라면... 음! 그러지 마시길...

    더 많은 얘기들은 조금씩 아껴가며 하지요.

    일다의 창간을 축하합니다.
  • 안네 2003/05/01 [21:28] 수정 | 삭제
  • 일다는 다를 거라 생각했습니다.

    더 이상은 더 이상은 더 이상은

    박근혜 얼씨구 하는 소리 안 나왔음 좋겠다.
  • 나두 2003/05/01 [17:27] 수정 | 삭제
  • 여성운동계에 몸담아 왔다. 여자이면서 공직자가 됐다.
    이런 분들 존경했었죠.
    근데 어느샌가 그들을 보면서 정이 떨어지더라는 것입니다.
    물론 존경할 만한 부분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반성이 필요할 때 반성하지 않는 게 문제라고생각해요.
  • 공감 2003/05/01 [13:04] 수정 | 삭제
  • 안일한 감싸주기가
    페미니즘 수난시대를 만들었다고
    저도 생각합니다.


    글 읽으면서 짜릿함을 느꼈습니다.
    100번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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