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은 디자인된 것이다

[청년 페미니스트, 내 머리맡의 책] 차별 없는 디자인하기

한승아 | 기사입력 2024/02/26 [11:14]

차별은 디자인된 것이다

[청년 페미니스트, 내 머리맡의 책] 차별 없는 디자인하기

한승아 | 입력 : 2024/02/26 [11:14]

[필자 소개] 한승아. 미술사를 공부하고 미술관 코트체크부터 책방 및 카페 알바, 시민문화회관 수건 접기, 방과후 미술 프로그램 지도, 그리고 건축사무소와 도시디자인 스튜디오 마케팅 일을 거쳐 작년 여름부터 공공장소에 프로그램을 만드는 ‘스트릿 랩’(Street Lab)이라는 비영리 단체에서 일한다. 공공장소에 대한 호기심과 애착으로 common inquiry라는 아트 콜렉티브의 일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 스트릿 랩(Street Lab)의 ‘움직이는 도서관’ 중 하나.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스트릿 랩은 공공장소에 다양한 팝업 문화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집단이다. (사진 출처: 스트릿 랩) https://www.streetlab.org


‘우리 동네에 안전한 공공장소가 필요해’

 

내가 풀타임으로 일하는 ‘스트릿 랩’(Street Lab)이라는 단체는 공공장소에 다양한 팝업 문화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집단이다.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스트릿 랩은 2006년, 창립자들이 살던 동네에 쓰레기더미가 쌓인 작은 부지를 야외 영화관으로 바꾼 프로젝트가 출발점이 되었다. 그 이후 빈 점포를 도서관으로 탈바꿈한 프로젝트가 ‘움직이는 도서관’으로 변형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며 확장되고 있다.

 

마음을 풍요롭게 해주는 미술관이나 도서관 같은 장소를 즐기려면 일단 티켓을 살 형편이 되거나, 그런 공간들이 문을 여는 시간에 일을 쉴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그 장소까지 가는데 걸리는 시간과 교통비까지 생각하면, 도시의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많은 사람들은 거기 가는 것 자체가 피로하다.

 

이런 현실에 답답함을 느끼고, 문화 공간이 사람들이 이미 걸어 다니고 지나고 있는 거리여야 한다라는 생각이 스트릿 랩의 모든 기획 속에 깔려있다.

 

모든 스트릿 랩 활동의 중심에는 동네 차원에서 움직이는 작은 단체들과의 협력이 있다. 이 중에는 도시의 공공기관과 연결되어 있는 사업개선지구(Business Improvement Districts)와 같이 체계를 이루고 있는 팀도 있고, 자신의 동네를 안전하게 만들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혼자 활동하는 여성도 있다.

 

우리가 생각했을 때 저 동네가 기획이 필요하겠다 싶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동네에는 안전하고 사람들이 모일만한 공공장소가 없어. 우리 동네에 와줬으면 좋겠어’ 하고 먼저 연락을 주는 개인 혹은 단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관계를 형성하며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 스트릿 랩의 움직이는 도서관. ‘문화 공간이 사람들이 이미 걸어 다니고 지나고 있는 거리여야 한다’는 생각이 스트릿 랩의 모든 기획 속에 깔려있다. (사진 출처: 스트릿 랩


팝업이라는 모델을 사용하는 이유는, 영구적 변화가 오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과 행정 절차가 필요한 뉴욕에서 빠르고 민첩하게 지금 이 자리에 무엇이 부재중인지 보여주며 공공장소에 대한 상상력을 실험해 보기 위함이다. 팝업이라는 방법을 사용하지만 결국엔 영구적인 변화를 주도하는 많은 사람들과 협업하며 영구적 변화를 목적으로 둔다. 그 변화가 새로운 공원이나 광장이란 물질적인 변화가 될 수도 있고, 계속해서 같은 도로로 유지되지만 일정한 날에 ‘차 없는 도로’가 되어 그 자리에서 다양한 문화 행사를 하며 그 거리의 문화가 바뀌는 인식의 변화가 될 수도 있다.

 

실제로 스트릿 랩이 주기적인 프로그램을 계획하며 함께 했던 거리가 영구적인 ‘오픈 스트릿'(정해진 시간에 차 없는 거리로 다양한 문화행사가 진행되는 거리)이 되기도 했고, 광장이 되기도 했다.

 

왜 디자인인가?

 

나는 미술사를 공부했지만 주변에 다양한 디자인 분야에 속한 친구들이 있었고, 건축과 도시계획 쪽에서 일을 하며 자연스레 더욱더 디자인에 대해 궁금해하고 고민하게 되었다. 그러다 작년부터 스트릿 랩에서 일을 하며 이제는 디자인에 관한 대화에서 보조만 하는 역할이 아닌, 적극적으로 함께 공부하고 의견을 모으는 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렇게 관련 서적과 자료를 꾸준히 찾아보고 있었고, 2023년 겨울에 한국에 다녀오게 되었을 때 눈 여겨 보던 신간 『차별 없는 디자인하기』를 구매해 올 수 있었다. 책은 퀴어와 이인(異人), 인간과 비인간, 연대와 평등, 도시와 재난, 장애와 차별이라는 다섯 가지의 주제에 대해 다섯 팀(길벗체, 핫핑크돌핀스, 스투키 스튜디오, 리슨투더시티, 다이애나랩)과 다이애나랩의 유선, 출판사 6699press의 재영이 각기 대화를 나눈 인터뷰집이다.

 

▲ 『차별 없는 디자인하기』(길벗체, 핫핑크돌핀스, 스투키 스튜디오, 리슨투더시티, 다이애나랩, 유선, 이재영 지음. 6699press, 2023) 커버디자인. (사진: 6699press)


책 속엔 디자인이 세상을 바꿀 것이라는 거창한 믿음이 아닌, 나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꾸준한 호기심으로 그들과 대화하며 내가 가진 권력과 내가 느끼지 못한 불편함에 대해 의식하기, 그리고 그것을 바꾸기 위한 노력이 담겨있다. 차별 없는 디자인을 한다는 것은 정답이 없고 계속해서 보완하고 배워야 하는 과정이다. 책의 형식이 그런 대화를 엿들을 수 있는 인터뷰집이라는 것도 반가웠다.

 

왜 여러 투쟁에 관해 이야기할 때 디자인을 논할까. 그건 부조리한 시스템이 권력을 가지고 있는 주류 집단의 지독하고 면밀한 디자인 속에서 탄생한 것이라는 걸 기억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이상한 사회의 모든 시스템 속에 스며들어 있는 차별은 디자인된 것이다. 그냥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니다.

 

처음에 이야기한 좋은 미술관이나 도서관, 혹은 아름다운 공원은 저소득 가구들이 살고 있는 동네에서는 대부분 멀리 떨어져 있다. 뉴욕 밖의 사람들이 뉴욕을 떠올릴 때 생각하는 이미지는 맨해튼일 확률이 높다. 그런데 인구의 50% 이상이 백인이자 중위 가구 소득이 9만 5천달러인 맨해튼이 아닌 다른 자치구 (뉴욕시는 맨해튼, 브롱스, 퀸즈, 브루클린, 스태튼 아일랜드 이렇게 다섯 개의 자치구로 이뤄져 있다), 특히 저소득 흑인 인구와 다양한 이민 인구가 사는 동네일수록 쾌적하고 아름다운 공공시설이나 공공장소를 찾아보기 어렵다.(뉴욕시 전체 인구 중 백인은 37.5%이고 중위 소득이 약 7만6천 달러다. 2022년 기준, U.S. Census Bureau 참고)

 

이 모든 것이 레드라이닝(redlining)의 역사다. 레드라이닝은 도시설계를 할 때 의도적으로 특정 집단 (뉴욕의 경우 흑인과 이민자들)을 소외시키며 디자인 한 것이다.(뉴욕시에서 2021년 발행한 레드라이닝의 역사에 대한 포스트 참고) 레드라이닝의 결과는 백 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사람들의 주거환경, 건강, 교육, 경제활동 등 모든 방면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 뉴욕 지하철 안에 설치되어 있는 벤치. 사이사이 대가 설치되어 있어서 눕지 못하게 되어 있다. (촬영: 한승아)


또 다른 예로는 벤치가 있다. 다른 도시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지만, 뉴욕에서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벤치는 앉을 수 있는 공간 사이사이에 대가 설치되어 나눠져 있고, 심지어는 엉덩이를 기댈 수만 있는 엉덩이 거치대로 변형된 것도 있다. 길에서 자고 먹고 쉬어야 하는 홈리스들이 눕지 못하도록, 오래 머물지 못하도록, 불편하도록 디자인된 것이다. 조지아공과대학 공공정책학과 교수 로버트 로젠버거(Robert Rosenberger)는 이와 같은 요소들을 “냉담한 물건”(callous object)이라고 부른다.

  

▲ 뉴욕에서 새로 설치되기 시작한 리닝 바(LeaningBar). 엉덩이만 기댈 수 있게, 일부러 불편하게 디자인했다. (사진 출처: NYC DOT)


냉담한 도시를 바꾸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이렇게 냉담한 물건, 냉담한 공간, 그리고 냉담한 시선투성이인 도시를 바꾸기 위한 정책의 변화는 정치적 직접 행동, 많은 이해 당사자들과의 협력, 그리고 궁극적으로 정부의 힘이 요구된다. 하지만 시민 한 명 한 명이 익숙하기만 했던 일상의 디자인을 통해 어떤 소수자가 어떻게 배제되어 왔는지 인식하고 힘을 모으기 시작할 때, 변화의 문으로 향하는 시작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스투키 스튜디오’의 정유미 디자이너는 차별 없는 디자인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라는 질문에, “내가 어느 위치에 있는가 계속 생각해 보는 것. 세계 속의, 한국 속의 나도 그렇고. 내가 가진 권력이 뭘까, 계속 생각하고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고 답한다. (219쪽)

 

잠을 잘 수 있는 집이 있는 사람은 벤치에 대가 있건 말건 상관이 없고, 푸른 나무가 가득한 공원과 활발한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는 공간들과 가까운 동네에 사는 사람은 집을 나서기 전 두려운 마음을 가다듬거나 긴 시간을 도로나 지하에서 허비하지 않아도 된다. 이것들은 공공장소를 둘러싼 몇 가지 예에 불과하지만, 소수자의 관점을 빌려 주위를 둘러볼 때 비로소 당연하게만 느껴지던 풍경들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게 된다.

 

▲ 광장이 되기 전 주정차와 사고로 골치를 앓던 퀸즈의 한 도로(위)가 스트릿 랩을 포함한 수많은 단체, 기관, 사람들의 협력으로 2018년 광장으로(아래) 다시 태어났다.  (사진 출처-스트릿 랩)


불공평한 도시 디자인으로 인해 건강하고 활성화된 공공장소가 형성되어 있지 않은 곳을 중점으로 활동하는 스트릿 랩이지만, 또 그래서 더더욱 우리의 작업이 닿지 않는 소수자는 누구일까 고민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우리의 움직이는 도서관에는 누가 쓴 어떤 책들이 들어있는지, 우리 벤치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 홈리스 참여자가 환대를 받고 있는지, 장애가 있는 참여자가 불편함 없이 접근할 수 있었고 또 참여하고 있는지… 질문의 리스트에는 끝이 없다.

 

나의 위치를 인식하며 이인(異人)에 대한 호기심을 갖고 질문을 던지도록 격려해준『차별 없는 디자인하기』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찾아보는 참고서 중 하나가 될 것 같다. 하지만 결국 차별 없는 디자인을 위해 깊게 성찰하며 디자인을 바꾸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디자인을 애초에 만들어낸 원인까지 쫓아가는 우리가 되길 기원해 본다. 디자인은 차별의 ‘도구’일 뿐이니 그 디자인을 바꾼다고 ‘원인’까지 없어지진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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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h 2024/03/08 [13:25] 수정 | 삭제
  • 글 잘 읽었습니다. 저는 지방 소도시에서 살고 있는대요, 서울광장이나 광주 518 민주광장처럼 작은 도시들도 광장이 생겼으면 참 좋겠습니다.
  • 공감 2024/03/07 [20:05] 수정 | 삭제
  • 한국도 인색한 공공디자인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ㅠㅠ
  • ㅇㅇㅇㅇㅇ 2024/03/02 [22:02] 수정 | 삭제
  • 재밌게 읽었어요. 도시공학 쪽에서 필독했으면 좋겠네요.
  • 공감 2024/02/28 [15:20] 수정 | 삭제
  • 동네에서 으슥한 곳이 있으면 무서운데, 작은 카페나 마을도서관 같은 게 생기면 안전하고 생기가 있는 동네가 되는 매직을 기억합니다.
  • 머찐 2024/02/26 [18:10] 수정 | 삭제
  • 차별 없는 디자인이라는 개념이 참 좋네요. 어떤 장면들이 떠올랐어요. 돈 없는 사람들 추방하는 도시 말고 따뜻한 도시를 꿈꿀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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