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3월 8일 세계여성의날에는 한국에서 ‘여성파업’이 예고되었다. 30여개 여성/노동/사회단체들이 2024년 ‘3.8 여성파업 조직위원회’를 결성해 유급/무급 여성노동 실태와 ‘구조적 성차별’을 알리며 여성파업을 준비 중이다. 여성파업을 반기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듣는다. -편집자 주
“우리 사업장에선 오히려 여성들이 더 세요.”
얼마 전, 톨게이트 요금수납원들을 만나러 갔을 때 한 남성 노동자가 말했다. 톨게이트 요금수납원들은 아니, 이제는 한국도로공사 ‘현장지원직’으로 일하는 노동자들은 80% 이상이 여성이다. 이 남성 노동자의 말은 여성이 수적으로도 많고, 여성 노동자들이 투쟁으로 일터와 삶을 다시 일궈 왔기에 그 목소리와 권리를 지키려는 힘이 더 세다는 의미였다.
톨게이트 요금수납원들은 2019년 6월부터 2020년 1월 말까지 7개월 동안 한국도로공사의 불법 파견에 맞서 본사 앞에서, 거리에서, 캐노피에서 투쟁했다. 그리고 2020년 5월, 직접고용을 하겠다는 한국도로공사의 안을 받아들여 무기계약 현장지원직으로 일하게 되었다.
톨게이트 요금수납원들이 처음부터 비정규직이었던 것은 아니다. 원래는 정규직으로 일했다. 그러다 IMF 구제금융 사태가 벌어졌고, 한국도로공사는 위기를 핑계로 2008년부터 전면 외주화를 단행했다. 이후 요금수납원들은 고용불안에 시달리며 일했다. 불안정한 고용상태를 붙잡으려 하다 보니 부당한 처우도 감내해야 했다.
한 평도 안 되는 부스 안에서 팔을 비틀고 앉아, 화장실도 마음대로 사용하지 못하며 일했다. 그런 와중에 고객의 욕과 성희롱이 쏟아져도 방어할 수 없었다. 항의했지만, 사장이나 관리자들은 모른 척했다. 부스 밖 업무도 많았다. 각종 서류 정리, 미납 고객 전화, 화장실 청소, 숙소 청소, 차로 풀 뽑기, 눈 치우기…….
그래도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했기에 요금수납원들은 묵묵히 열심히 일했다. 그러다 한국도로공사로부터 ‘자회사로 가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말이 자회사지 사실상 또 다른 큰 용역업체와 다르지 않았다. 법원도 도로공사가 요금수납원들을 직접고용해야 한다고 판결했음에도, 한국도로공사는 대법원 판결이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회사 전환을 밀어붙였다. 자회사로 전환하지 않는 요금수납원들 앞에는 ‘해고’가 기다리고 있었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힘을 모아 일어서기로 했다. 일자리를, 나를 지키며 이제는 나로 살아 봐야겠다고 결의를 다졌다.
7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 요금수납원들은 치열하게 싸웠다. 그리고 요금수납원이 아닌 ‘현장지원직’으로 다시 일을 하게 되었다. 현장지원직은 한국도로공사 내에 있는 지사 관할 쉼터나 도로정비 등 환경정비를 담당하며, 대부분 청소 일을 한다.
현장지원직으로 일하게 된 ‘톨게이트 노동자’들의 근무 환경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한국도로공사의 여러 지사들로 나뉘어 일하게 된 노동자들은 각각 형성된 조에 소속되어 각자 맡은 구역에 가서 일한다. 월요일은 오전 8시 40분에 출근해 오후 6시에 퇴근하고, 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는 8시 20분에 출근해 6시에 퇴근한다. 금요일에는 8시 20분에 출근해 3시에 퇴근한다. 근무 시간만 놓고 보자면 요즘 많은 사람들이 원한다는 ‘워라벨’을 달성한 듯하다.
하지만 날마다 지사에서 차량으로 현장에 이동해 밖에서 일해야 하다 보니 생리현상을 해결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다른 톨게이트 노동자들과 함께 투쟁을 통해 한국도로공사에 입사한 이진희 씨는 이렇게 토로했다.
“일하러 나가면 인근의 화장실을 이용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일하기 전후로 복지센터나 관공서 같은 곳을 찾아 들러야 해서 애로사항이 많아요.”
또 노동시간을 놓고 보면 ‘워라벨’(Work and Life Balance, 일과 삶의 균형)이 맞지만, 낮은 임금 수준이 워라벨을 누릴 수 없게 한다고 했다.
톨게이트 노동자들은 현장지원직이 되면서 호봉제로 임금을 받는다. 그런데 해당 호봉 자체에 책정된 임금 수준이 같은 연차의 다른 직군 호봉과 비교하면 턱없이 적다. 더구나 톨게이트 노동자들은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에서 승소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따른 임금 차액은 지급 받지 못하고 있다. 이에 톨게이트 노동자들은 현재 임금 소송을 진행 중이다.
또 각각 지사로 발령이 나서 일하다 보니, 전과 달리 집에서 근무지가 한참 멀어진 점도 어려움 중 하나이다. 이진희 씨는 집이 경기도 안성에 있는데, 충북 충주에 있는 엄정지사에서 일한다. 그래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회사 숙소에서 지내고, 금요일 퇴근 후 집으로 가서 주말을 보낸다.
“주말에 집에 가면 밀린 집안일 하느라 정신이 없어요. 다행히 딸 둘이 있는데 성인이 되었고, 아들은 군대에 가 있어서 모두 알아서 잘 지내는 편이지만, 몰아서 집안일을 해야 하니 정신이 없죠. 어떤 때는 집에 가면 남의 집에 있는 것 같기도 해요.”
노동권 투쟁을 통해 당당하게 한국도로공사에 입사했지만, 톨게이트 노동자들은 여전히 병가나 산재 신청을 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이진희 씨와 함께 엄정지사에서 일하는 한 조합원은 휴식 시간에 다쳤는데, 눈치가 보여서 개인적으로 병원에서 치료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건강보험관리공단으로부터 건강보험료를 환납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공단은 그 조합원이 당연히 산재신청을 했으리라 판단하고 사용한 건강보험료를 환납하라는 것이었다. 결국 해당 조합원은 다시 병원을 쫓아다니며 영수증을 모아야 했다.
이진희 씨는 질병 때문에 병가를 쓰려고 했던 적이 2번 있는데, 모두 쉽지 않았다.
“병원에서 진단을 받았는데도 병가를 쓰기가 어려웠어요. 진단 받은 대로 병가 내서 휴식을 취하기까지 차장이나 팀장 등 관리자들과 여러 번 길게 이야기를 나눠야 했어요.”
톨게이트 노동자들은 한국도로공사로 입사하면서 톨게이트 근무 당시의 연수에 맞는 호봉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연차는 인정받지 못했다. 그래서 1년에 사용할 수 있는 연차가 적은 편이다.
“우리 연령대가 대부분 40~50대인 터라 챙겨야 하는 대소사가 많은 편인데 휴가를 쓸 수 없어 난감할 때가 많아요. 부모님이 갑자기 편찮으시기도 하고, 집안에 큰일이 생기기도 하는데요. 휴가가 적다 보니 헌혈을 하는 경우도 많아요.”
헌혈을 하면 유급 휴가를 쓸 수 있다고 했다.
“저는 가장이에요. 아이 키울 수 있는 ‘임금’을 줘야죠”
이진희 씨는 자녀들이 모두 성인이 되어 돌봄에 대한 부담이 전보다 많이 줄어든 상황이다. 하지만 같은 여성인 딸들을 보고 있노라면 돌봄 노동에 대한 생각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같이 일하는 동료들 중에서도 돌봄 서비스를 이용하는 동료가 있어요. 그런데 가뜩이나 월급이 적은데 돌봄 서비스를 이용하고 나면 진짜 돈이 확 깎여요. 그래서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면 돌봄 서비스를 이용하기 어려워해요. 저 같아도 정말 피치 못할 상황이 아니면 사용하고 싶지 않을 것 같아요. 공공성을 강화해서 무료로 서비스를 사용할 수 있다면 또 모를까요.”
결혼 기피와 저출생 문제에 대해서도 의견을 보탰다.
“딸들이 결혼해서 아이 낳아서 키우기가 쉽지 않겠다고 이야기해요. 들어 보면 참 공감이 많이 가요. 본인들이 버는 월급 수준이 한정되어 있고 그것을 갖고 생활해야 하는데 부부가 같이 벌어 수입을 합해도 아이를 낳고 키울 수 있는 수준이 안 되는 거죠. 그런 상황에서 돌봄 서비스까지 이용한다는 것은 더 먼 이야기고요. 저희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임금 수준에 많은 변화가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이진희 씨는 돌봄의 짐은 어느 정도 내려놓았지만, 홀로 자녀 셋을 두고 있는 가장인 터라 늘 어깨가 무겁디 무겁다. 그래서 누구보다 임금 수준 개선에 대한 고민이 많다. 하지만 당장 자신이 딱히 할 수 있는 것이 잘 떠오르지 않아 답답하다.
여성노동자들은 왜 애써서 매번 들고 일어나야 할까요
이진희 씨는 이번 3‧8 여성파업 소식을 들으며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고 했다. 2024년 3‧8여성파업조직위원회의 5대 요구안 중에서는 ‘임신중지에 건강보험 적용, 유산유도제 도입’이 가장 와 닿는다고 했다.
“여성이 임신을 하고 혼자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여성이 임신을 유지할지 말지를 결정하고 선택할 수 없게 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생각해요.”
5대 요구안은 ▶성별 임금 격차 해소 ▶돌봄 공공성 강화 ▶일하는 모두의 노동권 보장 ▶임신중지에 건강보험 적용, 유산유도제 도입 ▶최저임금 인상이다.
“3‧8여성파업을 조직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대단하다 느꼈어요. 그런데 사실 한편으로는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걸까란 생각도 들었어요. 여성도 남성과 똑같은 사람인데 왜 여성은 차별받고 불이익을 당하고 부당함을 마주해야 하나 싶기도 했고요. 여성은 애써 나서고 들고 일어나야 하는 현실이 씁쓸하기도 해요. 누군가가 어떤 권리를 누린다면, 같은 사람인 우리도 당연히 누려야 하는 거잖아요.”
이진희 씨는 지금의 여성이 겪는 현실이 답답하지만 또 힘을 내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여성이 겪는 불이익이나 부당함을 없애고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가 그 불이익이나 부당함에 대해 잘 알아야 할 것 같아요. 사회적으로 여성차별이 만연해 있고, 그러다 보니 여성차별을 당연한 것으로 교육되기도 하고요. 잘 모르면 자신이 부당한 일을 당하는지조차 미처 모르고, 내가 안 해도 되는 일을 하고 있는지도 인지하지 못할 수 있잖아요. 그래서 여성 스스로 좀 더 열린 귀를 갖고, 많이 알고, 깨어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진희 씨는 동료 톨게이트 노동자들과 딸들을 포함해 더 많은 여성들이 지금보다 나은 삶을 누릴 수 있도록, 고단하지만 또 힘을 모으는 중이다.
[필자 소개] 김경미. 변혁적여성운동네트워크 빵과장미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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