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어송라이터인 이내가 최근 가지게 된 꿈은 “마을과 사람들을 연결하는 것”이다. 이 꿈을 꾸게 만든 씨앗 같은, 짧지만 강렬한 여행이 있었다. 코로나 팬데믹 후, 일본 여행이 재개된다는 소식과 함께 떠난 그녀의 우연한 여행은 거기서 그치질 않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이내의 여행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한번도 가보지 않았지만 이미 연결되어 있었던 우리의 이웃 마을들,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과거의 시간과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함께 느끼게 된다. 인연의 꼬리를 물고 계속되는 이내의 로컬 여행기, 종착지가 정해지지 않은 마을 이야기들을 연재한다. –편집자주
“아무것도 없을 거야.” 소라의 말처럼, 아리타는 조용하고 수수한 마을이었다. 아무것도 없다는 게 가장 좋았다. 눈을 잡아 끄는 자의식 강한 인공물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시끄러운 간판도, 직선으로 그어진 자동차만을 위한 길도 보이지 않는다.
대중교통도 없으니 소라의 어머니가 자동차로 마중을 나왔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친구 엄마와 수다 떨기를 즐겨 온 실력으로, 나는 소라 어머니 미와코 씨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걸어보았다. 낯을 좀 가리는 듯 미와코 씨는 말수가 적었다.
소라의 어머니, 미와코 씨와 보낸 3일
집은 주인을 닮는다. 50년 넘게 도자기에 그림 그리는 일을 해 온 미와코 씨의 공간은 온통 그림으로 가득 차 있다. 아리타는 90% 주민이 도자기 관련 일을 하는 마을이다. 도자기를 빚는 사람, 굽는 사람, 그림 그리는 사람, 파는 사람 등 분업이 철저한 게 특징이라, 예술가보다는 직업인에 가깝다고 했다. 미와코 씨에게 그림은 일이기도 하고 취미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그림은 일상이고 인생이었다. 천천히 조금씩 자신을 보여줄수록 나는 미와코 씨에게 스며들고 말았다. 또 사랑에 빠진 것이다.
우걱우걱 맛있게 먹어 치우며 채소 중에서 가지와 오이를 가장 좋아한다고 말했더니, 미와코 씨가 조용히 답했다. “여름 채소를 좋아하는구나.” 그리고 집에 머무는 3일 동안 식탁 위에 다양한 방식의 가지와 오이 요리가 빠짐없이 올라왔다. 미슐랭 별을 받은 일본식 소바 요릿집에도 데려가 주시고, ‘온천 두부’라는 신기한 지역 특산 요리도 만들어 주셨다.
소라가 한 달 전부터 내게 못 먹는 음식이 없는지,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인지 계속 질문을 해서 솔직히 조금 귀찮았는데, 알고 보니 미와코 씨의 질문이었나 보다. 테이블 옆에 붙여 둔 포스트잇에 ‘이내 오는 날, 공연하는 날, 떠나는 날’이 쓰여 있는 걸 보고 가슴이 찡해져서 사진을 찍어두었다.
정신 없이 지나간 아리타에서의 3일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미와코 씨와의 대화다. 거실의 원탁 테이블에서 우리는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음악을 듣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밤이 되면 원탁 테이블을 치우고 요를 깔아, 나와 소라가 나란히 잠들었던 자리다.
첫날은 내가 선물로 들고 간 3집 앨범을 곧바로 틀어 잠들기 직전까지 무한 반복했다. 둘째 날 밤에는 친구를 만나러 간 소라 없이 미와코 씨와 긴긴 대화를 나누며 스킵 제임스의 블루스 앨범을 무한 반복으로 들었다.
미와코 씨가 아직 40대였던 시절, 이혼 직후 삶의 팍팍함을 달래 준 게 델타 블루스였다고 한다.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한 책에서 미시시피 지역의 어쿠스틱 블루스 음악을 알게 되었고, 이후 중고 레코드 가게에서 일하던 큰아들을 통해 앨범을 하나씩 사 모으기 시작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여기저기 장식된 흑인 음악가들의 초상화가 눈길을 끌었는데, 미와코 씨가 직접 그린 그림들이다.
블루스 음악을 좋아하지만 연주할 수는 없어서 아쉽다고 했더니, 미와코 씨는 언젠가 꼭 블루스 노래를 만들어 보면 좋겠다고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했다. 새로운 꿈이 하나 늘었다.
선물하는 기쁨을 알게 해준 장인의 가위
며칠 후, 오노미치에서 소라와 시간을 때우러 나간 산책 길에 우연히 작은 갤러리에 들어가게 되었다. 4대째 가위를 만드는 장인 가족의 전시를 보다가 우리는 늘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미와코 씨에게 꼭 어울리는 가위를 발견했다.
소라와 나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름다운 가위 하나를 같이 사서 곧바로 우체국으로 달려가 아리타로 소포를 보냈다. 봉투에는 짧은 메시지를 적었다. 같이 다니는 내내 일본어 선생님이 되어 준 소라의 첨삭을 받아서.
아리타에는 몇 백 년째 이어져 온 도자기가 있고, 소라의 어린 시절이 있고, 나의 첫 정식 일본 공연의 기억이 있고, 어느 밤 스킵 제임스를 함께 들었던 미와코 씨가 있다.
[필자 소개] 이내. 동네 가수. 어디서나 막 도착한 사람의 얼굴로 두리번거리며 걷는다. 걸으며 발견한 것들을 일기나 편지에 담아 노래를 짓고 부른다. 발매한 앨범으로 『지금, 여기의 바람』(2014), 『두근두근 길 위의 노래』(2015), 『되고 싶은 노래』(2017), 디지털 싱글 「감나무의 노래」(2020), 「걷는 섬」(2022) 등이 있고, 산문집 『모든 시도는 따뜻할 수밖에』(2018), 『우리는 밤마다 이야기가 되겠지』(2021, 공저) 등을 썼다. 가수나 작가보다는 생활가나 애호가를 꿈꾼다. 인스타 @inesbri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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