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 소개] 박서진.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이며 페미니스트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선의 조각이 있고, 충분한 조건 속에서 발현될 수 있다고 믿으며, 믿고 싶어한다. 학내 교지 동아리에서 데이트 성폭력 경험과 논바이너리로서의 경험 등에 대한 글을 쓴 바 있다. 반사이버성폭력 단체에서 활동한 후 현재는 반전평화운동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다. 모두가 벼랑으로 내몰리지 않는 세상을 꿈꾼다.
20살 페미니즘을 알고 페미니스트로서 나 자신을 정체화 하고 글을 쓰고 말을 하고 온갖 실천을 하던 나는, 어느 날 무너졌다. 대학교 학과에서 아무리 여성주의를 기조로 삼고 성평등 강의를 무조건적으로 수강하게 하더라도, 그것이 모두에게 개인적인 경험과 사고로 이어지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과 선배의 성추행이 있었고, 데이트했던 남성으로부터 데이트 성폭력을 겪었다. 믿었고, 믿었기에 사랑했다. 그가 페미니즘에 대해 공부했다며 워마드 사이트를 들어가봤다고 거들먹거릴 때도, 나는 여성단체 민우회 사이트를 보여주며 하나하나 설명해줄 정도로 그를 사랑했다. 그래서 내가 겪은 것이 성폭력이라는 것을 정말로 인정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 몸과 내 정신이 분리되던 감각이 기억난다. 고통밖에 느끼지 못하고 있는 몸에서 어떻게든 벗어나 그 안에서 사랑의 흔적을 찾으려 하던 내가 기억난다. 관계가 끝났을 때 내게 남은 것은 죄책감과 분노, 절망뿐이었다. 딱히 내 잘못이 없다는 것을 페미니스트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20년이 넘게 살아온 나라는 사람은 나에게서 잘못을 찾는 데 너무 익숙했다. 제대로 거절하지 못한 것, 관계를 적극적으로 끊으려 하지 않고 도망으로 마무리지은 것. 내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에 더 비참했다.
2021년 겨울, 나는 실명을 걸고 나의 데이트 성폭력 피해 경험을 고발하는 대자보를 붙였다. “성폭력을 당했으면 경찰에 신고를 하세요.”라던 답글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폭력과 범죄는 등치 관계가 아니다. 젠더 권력이 존재하고 남성의 성적 행동이 ‘장려’되는 사회에서 성폭력 상황이 발생했음을 인지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더욱이 성범죄를 ‘여성이 적극적으로 거절 의사를 밝혔는지 여부’로 파악하는 한국에서 성폭력 피해를 신고하고 이것이 성범죄로 판단되어 법적 절차를 밟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성폭력 가해자, 피해자가 16년 후 다시 만나 함께하는 일주일
나는 성폭력 피해자를 지원하는 단체에서 활동하면서 고통스러워하는 성폭력 피해자들을 많이 만났다. 법적으로, 사적으로 ‘복수’를 원하는 피해자들은 많이 만났지만, ‘용서’를 말하는 피해자는 만나지 못했다.
나는 용서라는 것을 한 번 해보고 싶어 『용서의 나라』라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두 명의 저자(토르디스 엘바, 톰 스트레인저)가 작성한 책으로 한 명은 성폭력 피해자, 다른 한 명은 다름 아닌 그 성폭력 사건의 가해자이다. 1996년에 있었던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가 9년 후 가해자에게 편지를 보내고, 7년 5개월 간 300통의 이메일을 주고 받던 두 사람은 2013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재회해 일주일의 시간을 보낸다. 이 책은 그 일주일의 대화와 두 사람의 일기를 담고 있다.
흔히 ‘용서’라는 단어는 한없이 성스럽고 평온한 느낌을 주지만, 그들의 여정은 결코 평화롭지 않다. 서로를 상처주기도 하고, 이 여행을 시작한 것을 한없이 후회하는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강간위기센터에서 저자 중 한 명은 토할 것 같은 감각을 느끼며 괴로움을 호소하는 모습을 보인다.
거듭 말하지만, 이 책에서 용서는 결코 평온하지 않다.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베푸는 일방적이고 호혜적인 선물도 결코 아니다. 열흘 간의 여정을 마치고 각자의 삶으로 돌아간 두 사람은 평온을 얻지만, 그것은 과거를 잊어서 얻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치열하게 과거를 돌아보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한국 사회는 약자에게 한없이 ‘착할 것’을 요구한다. ‘착한’ 장애인, ‘선량한’ 피해자 등등. 그래야만 우리는 자신의 피해를 인정받을 수 있다. 동시에 가해자를 악인으로 만듦으로써, 권력을 가진 이들의 집단과 힘은 유지된다. ‘우리는 그렇게 나쁜 놈이 아니야’, ‘저 놈이 나쁜 거야’ 라는 논리 속에서 구조는 바뀌지 않고 영원히 피해와 가해가 반복된다.
폭력을 만들어내는 ‘구조와 권력’을 바라보는 일
이 책은 성폭력에 대한 책이지만, 내게는 폭력의 전반과 그에 대한 성찰을 담은 책으로 다가왔다. ‘용서’란 무엇일까. 내가 지금 활동하고 있는 단체는 베트남전에서 있었던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의 진상 규명을 목표로 하는 단체이다. 베트남 전쟁에서 더 나아가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공습 등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전쟁과 반인륜적 행태에 반대하며 평화를 위해 활동하고 있다.
베트남 전쟁 당시 ‘국익’이라는 것을 위해 수많은 장병들을 파병한 군부 독재 정권과, 그것에 대한 책임을 지금까지 회피하고 있는 한국 정부를 보자. 누군가는 베트남 정부 측에서 더 이상 사과를 바라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 말을 반박하기에 앞서 그가 생각하는 사과가 무엇인지 묻고 싶다. 사과는 단순히 ‘미안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진심으로 ‘미안하다’를 전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처절한 반성이 필요하다. 수십 번, 수백 번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고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는지,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뼈를 깎는 성찰 속에서 비로소 ‘미안해’는 가능할 수 있다. 과정 없는 미안해는 그저 빈 껍데기일 뿐이다.
용서의 나라라는 제목과 어쩌면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책에는 ‘미안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하지 않는다. 미안해 라는 말은 그 모든 것을 담기에 너무 작다.
책을 읽은 목적이 무색하게도, 나는 아직도 가해자들을 용서하지 못했다. 그러나 용서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기에, 나는 더이상 용서하지 못한 나를 싫어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 글을 읽는 당신도 괜찮다. 마음껏 미워하고 원망하자. 미워하는 당신의 마음이 폐허가 되지 않도록, 당신의 곁에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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