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 소개] 김민지. ‘노동‧정치‧사람’과 ‘청소년 트랜스젠더 인권모임 튤립연대’가 주관하고 다양한 구성원이 모여 만들어진 〈무지개교실〉의 ‘탱이’이다. (무지개교실에서는 흔히 “선생”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탱이”라고 한다. “담탱이”에서 따온 말이다.) 매일 반성할 수 있는 용기를 소망하며 더 많이 말하고자 한다.
더이상 페미니스트 그만 하고 싶어, 그치만 나는 여전히 페미니스트야. 진짜 내 마음은 뭘까?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온종일을 방 안에 옹송그리고 있던 시절에 『아무튼, 메모』(정혜윤 지음, 위고)라는 책을 읽었다. 가벼운 에세이라 바닥난 집중력으로도 읽을 수 있었다.
당시 나는 오래 이어진 우울로 무기력과 회피가 일상이었고, 매일 접하는 부당한 사건 뉴스에도 방에 가만히 앉아 답답해 할 수밖에 없었다. 여성 청년과 성소수자가 팬데믹으로 인해 특히 우울해한다는 기사를 읽어도 위안이 되기는커녕 남의 일로 느껴졌다. 방 밖의 세상과 나를 연결 짓는다는 감각을 잃어가던 때였다.
전염병의 기세가 차츰 수그러들고, 학내에서 마음 맞는 친구들과 이런저런 활동을 시작했다. 우울의 버릇을 하나씩 천천히 걷어내가며 갈급을 해소하듯이 목소리를 냈다.
그러는 와중에도 마음 한 켠에는 답답함이 있었다. 수도권 4년제 여대에 다니면서 목소리를 내려다 보면 너무 많은 이야기들이 도중에 걸려 넘어지거나, 시작부터 공허하게 느껴졌다.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동질 집단의 신화에 강하게 휩싸인 공동체 안에서는 페미니즘도, 장애인권도, 능력주의에 관한 담론도, 비거니즘도, 노동자-학생 연대도 전부 한 번씩은 헛바퀴를 돌았다. 주위에 페미니스트의 이름을 달고 혐오 발언을 하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페미니즘이라는 게 뭘까?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세상에 대해 알아갈수록 나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칭하기가 어려워졌다. 그 이름의 폭이 너무 넓은 것 같기도, 너무 좁은 것 같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다 〈무지개교실〉의 일원이 되었다. 여자만이 피해자이며 약자라는 말을 들으면 코웃음을 칠 사람들 사이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스트인 사람들 사이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다. 여자 얘기를 매일같이 악써서 하거나 듣지 않아도 되어서 좋았다. 온통 ‘이반’(일반, 즉 이성애자가 아닌 사람)뿐이어서 ‘일반적인’ 여자는 한 명도 없는 곳에 있으니 해방감이 느껴졌다.
나는 어딘가에서 ‘여자가 차별 받았다’는 말을 들으면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투쟁을 외칠 것이면서도, 외치는 도중에 ‘근데 여자가 뭐지?’ 라는 의문을 품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현재로서는 나에게 페미니즘이란 ‘여자’의 경계, ‘나’의 경계를 확장하는 실험이다.
‘나’를 확장하기
『아무튼, 메모』의 저자는 열띠게 외부의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라디오 PD라는 그의 직업 특성상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나’는 유한하고 보잘것없는 ‘나’일 뿐이기 때문에 더 나아져야 하는데, 나아지기 위해서는 유일한 진실인 타인의 말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메모를 한다. 세계를 확장시킴으로써 미래를 믿기 위해서. 나의 밖에 존재하는 더 나은 무언가를 만나러 가기 위해서.
저자는 자신이 왜 메모를 하는지에 대해, 즉 메모가 왜 세상을 긍정하고자 하는 행위이며 자신이 왜 세상을 긍정하고자 하는지에 대해 길게 설명하고, 실제 자신이 적어둔 메모들을 몇 소개한다. 그것들은 주로 꿈과 몸에 대한 것들이다. 그 수렴이 명쾌하다. ‘세상은 몸이 꿈을 향해 나아가는 공간’이라는 깔끔한 정리처럼 느껴진다.
“꿈은 ‘아니면 말고’의 세계가 아니다. 꼭 해야 할 일의 세계다. 꿈은 수많은 이유가 모여 그 일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그런 일, 포기하면 내가 아닌 것 같은 그런 일이다. 진짜 꿈이 있는 사람들은 꿈 때문에 많은 것을 참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용감하게 선택하고 대가를 치른다.” (『아무튼, 메모』 109쪽)
“즐기는 몸, 일하는 몸, 휴식하는 몸, 소비하는 몸, 욕망의 대상이 되고 싶은 몸. 수동적인 몸, 주체적인 몸. 사랑하는 몸, 사랑받는 몸, 훼손된 몸. (…) 어쨌든 몸의 관점에서 보면 삶이란 최종적으로는 패배할 것을 알면서도 계속하는 전투 같았어요.” (『아무튼, 메모』 118쪽)
내가 나이기만 하다는 사실을 견딜 수가 없을 때마다 이 책을 꺼내어 읽는다. 보양식처럼 일 년에 한 번도 읽고 두 번도 읽는다. 읽으며 세계에 대한 희망을 수혈하는 것이다. 몇 번이고 위의 대목들을 곱씹을 때마다 떠오르는 얼굴들이 달라진다. 요즘 나의 일상은 온통 무지개교실이기 때문에, 가장 최근에 읽었을 때에는 무지개교실의 친구들이 떠올랐다.
‘아니면 말고’가 아니라 꼭 해야 하는 동성애, 트랜지션, 커밍아웃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우리가 모두 아무것도 아니란 말에는 고개를 끄덕일 것이지만, 진짜 그렇다기에는 너무 많이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들. 그래서 농담이 온통 자조뿐인 사람들. 생각하고 있노라면 ‘나’의 경계는 부풀고 부풀어 이들이 전부 내가 된다.
우리의 꿈과 몸
여느 날과 같이 수업을 하고, 상담을 하고, 회의를 하고 나와 출출하다며 근처 칼국수집에서 칼국수를 한 대접씩 시켜 앉았다. 다들 피곤해서 나사 빠진 농담을 늘어놓다가 대화가 조금 진지하게 흘러, 마음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이는 구성원에 대해 얘기를 하게 되었다. 그러다 한 팀원이 친구들이 자꾸 죽어서 무지개교실을 만들었다는 얘기를 꺼내놓았다. 소수자는 마치 그것만이 자신의 일인 양 절망을 거듭하다가 쉼 없이 죽는다.
“나도 이제는 안다. 사는 게 아무것도 아니라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란 것, 생명이 아무것도 아니라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란 것, 미래가 아무것도 아니라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란 것. 사는 것도 미래도 그냥 그런 것. 태어났으니 그냥 사는 것.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 또한 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슬퍼했던가? 누군가의 삶이 사라졌다는 것에 대해서.” (『아무튼, 메모』 83쪽)
우리의 꿈과 몸은 저물고, 우리의 꿈과 몸은 지연된다. 제도와 사회가 우리의 꿈과 몸이 우리의 것이길 지연시키는 사이 우리는 저물어간다. 무지개교실의 구성원은 서른 명 남짓이지만 각자의 삶이 바쁘고 존재가 무거워 한 번 모이면 열 명도 채 모이지 않을 때가 많다. 그래도 모이는 것이다. 무기력해 일어나기가 힘들다고 하면 몇 번이고 모닝콜을 하고, 무심결에 혐오가 섞인 농담을 주고받아 불쾌했다면 바로 말해 사과의 말을 나누고, 화장실의 남자/여자 표시 위에 퀴어 스티커를 붙이고, 공부가 다 무슨 대수냐고 하며 갑자기 책을 접어버리고 근처 공원으로 소풍을 간다.
꿈과 몸은 끝끝내 부정되지 않는다. 우리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계속 우리가 되기 위해 무지개교실을 일군다. 하루 하루의 일상에서 증명처럼 서로를 볼 수 있도록 자꾸 손을 내밀어 만난다. 내가 도무지 누구에게도 인정되는 것 같지가 않을 때 곱씹는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슬퍼했던가? 누군가의 삶이 사라졌다는 것에 대해서.” 그러고는 다시 자리를 지키기 위해 애쓰는 것이다. 세상에는 슬픔이 너무 많아서 이제는 좀 무지개가 뜰 차례이기 때문이다. 무지개에 비친 서로의 얼굴을 보며 우리는 스스로의 소중함도 다시 명심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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