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2일,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이른 아침부터 동네 친구의 차를 얻어 타고 파주로 향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텃밭이었다. 일등으로 도착한 우릴 시작으로 하나둘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금세 삼십 여명이 모였다. 밭 입구에 커다란 원을 그리며 서서, 옆에 선 낯선 존재들의 손을 잡았다. 언뜻 보면 살짝 이상한 풍경처럼 보일지 모르는 장면이 펼쳐진 곳은 ‘퀴어텃밭’ 현장이다.
올해 초 열린 2024 체제전환운동포럼에서 “자본에 포획된 농업으로부터 정의로운 전환” 세션을 듣고 현재 농업 상황에 충격 받은 이후, 나에게 ‘도시농부가 되는 일’은 어떤 숙제 같은 일이 됐다. 그러니 3월,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SNS에서 ‘퀴어텃밭’을 함께 할 사람들을 모집한다는 홍보를 보고 관심 가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파주? 좀 먼데…’ 하고 주저하는 동안 어느새 마감. 다행히 친구의 도움으로 뒤늦게 두 번째 모임부터 참석할 수 있게 됐다.
이날에야 ‘퍼머컬처’(Permaculture) 방식으로 텃밭농사를 한다는 걸 알았다. ‘대체 퍼머컬처는 뭐지?’ 궁금했는데, 다행히 퀴어텃밭을 이끌어 주는 선생님이 있었다. 소란이라는 분이었다. 선생님은 수십 가지 채소, 허브, 꽃을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무엇과 무엇을 함께 심으면 상생 효과가 있는지 줄줄 꿰고 있었다. “이 식물은 불면증 있으신 분들이 먹으면 좋고. 이건 바로 뜯어서 드셔도 되고…” 엄청난 정보를 공유하는 선생님을 바라보며 ‘텃밭의 대가인 것 같은데, 뭐 하는 분일까?’ 궁금했다. 모종 심기 날이 끝난 후, 텃밭 하는 동료들로부터 “우리 선생님, 장난 아닌 분”이라는 정보를 입수해 바로 검색해 봤다. 유튜브에 퍼머컬처라고 치니 연관 검색어로 소란이 뜨는 게 아닌가! 선생님은 엄청 유명한 퍼머컬처 디자이너였던 것이다.
선생님을 붙잡고 묻고 싶었다. 왜 퍼머컬처여야 하는지, 퀴어텃밭을 퍼머컬처로 만든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도시퀴어농부의 꿈이 이뤄질 수 있을지.
-퍼머컬처는 대체 무엇인가요?
퍼머컬처는 68세대(1968년 기존의 질서와 체제에 반대하며 프랑스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대학생들과 이에 동조해 시위와 청년문화를 이끈 당시 유럽과 미국 등의 젊은 세대를 말함)가 ‘앞으로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하던 때 만들어졌어요. 퍼머넌트(permanent, 영구적인) 애그리컬처(agriculture, 농업)이니까 ‘지속가능한 농업’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퍼머컬처는 ‘지속가능한 문화’를 설계하는 거예요.
애그리컬처는 인간이 최초로 가졌던 문명에 대한 이름이기도 하죠. 68세대들은 ‘이렇게 자본주의적이고 폭력적이며 다양성이 없는 사회에서 어떤 문명을 상상할 수 있을까? 어떤 문명을 우리가 만들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그리고 베트남전 같은 전쟁 그리고 2차 오일쇼크를 보내면서 ‘석유문명은 끝났다, 자본주의가 끊임없이 자연을 파괴한다’는 걸 깨닫고, ‘우리가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야겠다.’며 퍼머컬처라고 하는 생태적인 툴(tool)을 만든 거에요. 퍼머컬처는 68세대가 자신들이 생각하는 유토피아를 구현하는 수단으로 쓴 거라고 보시면 돼요.
근데 툴이라기보다 하나의 공동체를 디자인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어요. 실제로 68세대들은 새로운 독립 공동체를 많이 만들었어요. 퀴어 공동체도 있었고요. 당시 그들이 만든 공동체가 천 여개가 넘는다고 해요. 지금도 다양한 소수자들이 모여 살고 있어요. 농사가 중요해 진 건, 특별한 이유는 아니고 먹는 것이 삶의 근간이기 때문이에요.
-공동체를 디자인하는 방식이라고 설명하셨는데요. 퍼머컬처를 검색하니 ‘디자인’이라는 말이 많이 나오더라고요.
디자인은 설계라는 뜻이기도 한데, 퍼머컬처에선 이런 말이 있어요. “퍼머컬처는 농사를 가장한 혁명이다.” 그러니까 ‘세상이 우리가 설계하는 대로 된다!’고 생각하는 거죠. 디자인이라는 건, 우리가 상상하는 걸 구현할 수 있는 틀을 마련하는 거에요. 그걸 다양한 공동체를 통해서 하자는 거고요.
-어떻게 퍼머컬처를 알게 되셨나요? 어떤 인연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가부장제 때문이죠.(웃음) 학생 때 여성운동을 했고 단체도 운영했어요. ‘영페미니스트’(1990년대 중반부터 대학가를 중심으로 새로운 담론을 만들고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을 펼친 페미니스트들) 그룹 중 하나였죠. 그 때 우리가 했던 게 운동사회 내 가해자 성폭력 상담이었어요. ‘가해자들을 좀 똑바로 만들어 보자’는 생각이 있었던 거죠. 피해자가 원하는 만큼의 변화를 이끌어 보려고 노력했는데, 그게 단기적인 게 아니라 오래 걸리는 일이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스트레스가 점점 많아져서 어느 날 ‘다 하기 싫다. 도망가야겠다’ 싶더라고요.
집을 빼서 영국으로 갔어요. ‘살기 좋은 마을’을 검색해서 갔는데, 그곳이 토트네스 마을이었어요. 영국 최초의 전환마을운동을 하는 곳이었죠. 분위기가 정말 다르더라고요. 동네 사람들이 농사도 좀 다른 방식으로 짓는 걸 보고, 궁금해서 같이 하게 됐죠.
사실 공동체에 좀 질려있던 상태(웃음)에서 영국을 간 건데, 그 공동체는 약간 느슨한 느낌으로 프로젝트도 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의식주를 해결하는 방안을 고민하더라고요. 그게 마음에 들어서 따라다녔는데, 그게 바로 퍼머컬처라는 걸 알게 된 거죠. 근데 퍼머컬처의 시작이 아시아에서 시작된 농법과 공동체 생활 방식을 모방한 거라, 한국 정서가 꽤 있거든요. 제가 시골 출신인데, 거기서 내 능력의 출중함을 알게 되기도 했어요.(웃음) 생각보다 내가 많은 걸 알고 있더라고요? 공동체 하기 싫어서 도망갔는데 그렇게 또 다시 공동체를 하게 됐죠.(웃음)
-한국 돌아온 후엔 어떻게 활동하셨나요? 한국 퍼머컬처에선 유명 인사시더라고요.(웃음)
저 이전에도 연구자나 남성 활동가들이 퍼머컬처를 했던 것 같은데, 자리를 잡지 못했던 것 같아요. 사실 퍼머컬처는 마을 공동체나 새로운 공동체를 꾸리고 어떤 문화를 만들어야 하는 거라, (농사만이 아니라) 활동의 영역에 가까운 부분들이 있는데 그게 잘 안 됐던 것 같더라고요. 한국에 돌아왔을 때 집이 없어서 은평에 있는 친구들과 함께 지냈는데, 그러면서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도 같이 하게 됐죠. 전환마을을 만들고 싶다, 퍼머컬처 방식으로 만들면 좋겠다는 고민을 했어요. 그래서 퍼머컬처 학교를 열었고, 거기서 만난 사람들과 로컬푸드 채식식당 ‘밥풀꽃’도 만들고, 여러 활동을 하게 됐어요.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활동도 하다 보니, 이게 우리 동네만 필요한 게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이 동네 저 동네 가다 보니 전국을 다니는 것 같아요.
-한국에서도 퍼머컬처에 대한 관심이 높은 편인가요?
물질문명이 피크에 달하고 있잖아요. 기후위기도 같이 도래하고요. 그래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다며, 그 방식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퍼머컬처에 다가오는 것 같아요. 그리고 확실히 돌봄에 감각이 있는 분들이 퍼머컬처에 관심을 갖는 것 같아요. 전 돌봄도 사랑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내 주변 사람 혹은 나 자신이 기후재난을 겪으면 어떻게 할까 상상하고, 그걸 상상해야 대비할 수 있으니까요. 근데 돈 있는 사람들은 그런 ‘문제’들을 돈으로 해결하려고 하잖아요. 아니면 가족 중심으로, 내 바운더리 안에서만 고민하는데, 퍼머컬처에 관심 보이는 분들은 상호 관계나 공동체, 주변의 소수자나 약자에 대해 관심 있는 분들이 많아요.
-지금 ‘퀴어텃밭’ 선생님도 맡고 계시잖아요. 어떻게 합류하게 되었나요?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캔디 할동가와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에서 같이 활동했던 인연이 있어요. 이번에 퀴어텃밭을 한다고 하더라고요. 단지 텃밭뿐만 아니라 ‘퀴어를 위한 생태공동체’도 꿈꾸고 있다고요. 그런 건 경험해 보는 게 좋다고 생각하거든요. 사람을 모으는 경험도 하고, 정말 할만 한지 한번 해 보는 거죠. 같이 모여서 상추라도 뜯어먹으면 서로를 더 잘 알 수 있잖아요?
해외 다닐 때 퀴어 생태마을들을 많이 봤어요. 그게 뭐 이성애자, 비퀴어 마을과 퀴어마을 이렇게 분리가 되는 건 아니에요. 사실 생태의 기본은 다양성이거든요. 그래서 모든 공동체가 기본적으로 그런 감수성을 갖고 있어요. 우리는 퀴어마을이라고 부각하지 않아도, 그게 그냥 기본인 거에요. 다양성이 모이면 굉장히 감각적이잖아요? 다양한 색깔들이 모여 알록달록해지죠. 생태 공간에 퀴어성이 더해지면 시골에 있는 논밭이 아니라 아름다운 공간이 되더라고요. 거기에 매력을 느꼈어요. 퀴어텃밭의 다양함과 아름다움이 늘 눈에 띄었어요. 심지어 퀴어들은 자기들이 기른 야채 등을 판매하거나 요리를 해서 판매할 때도 되게 능력을 발휘하더라고요.(웃음)
코로나 팬데믹 시기엔 제가 속해있는 텃밭에서 ‘밭두렁퀴어컬처축제’를 했어요. 보통 논일 밭일 하면 옷이 볼품 없고 그런데, 그 날은 화려하게 무지개 아이템을 장착하고 모여서 춤추고 노래하며 놀았어요. 사실 농사 공동체, 특히 지방으로 갈수록 보수적인 분위기가 있긴 하죠. 하지만 이런 걸 익숙하게 받아들이게 하는 문화를 만들고 싶었어요. “자연은 다양해. 다양성이 기본이야. 자연이 그렇다는데 어떻게 할거야?” 이러면서 다가가는 거죠.
그렇겠죠. 또 비슷한 사람들과 삶을 영위하고 싶어하는 게 사람의 욕망 아닐까 싶어요. 그런 걸 가장 평화롭게 담을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이 생태 공간이 아닐까요? 사실 자본주의에서의 삶은 굉장히 딱딱하고 고정적이잖아요. 성공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등. 그냥 자연스러운 공간에 들어가서 풀 뜯어먹으면서 소소하게 살아도 되는데 말이에요. 오히려 이런 게 인간의 근본적 욕구가 아닐까 싶어요.
퍼머컬처의 기본 베이스가 돌봄이거든요. 자신을 돌보고, 지구에 있는 모든 생명과 타인을 돌보는 걸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해요. 또 말했다시피 생태의 기반은 다양성이죠. 그리고 문화는 교집합이 늘 생기잖아요. 새로운 관계를 맺으면서 새로운 걸 만들어 낼 수 있죠. 그게 원래 자연의 순리이기도 하고, 사실 자연 안에선 그런 게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거든요. 퍼머컬처도 그 연장선이에요. 퍼머컬처 하다 보면 사람들이 밭일하다 요가하는 것도 보고, 논일하다 춤추는 것도 보고. 다양한 사람이 모이기도 하지만 한 사람도 여러 일을 하죠. 지금 자본주의에선 하나의 일에 매달려 지쳐 죽을 때까지 하잖아요. 그건 인간의 본성을 모르는 거라고 봐요. 인간은 사실 다양한 걸 할 수 있죠. 그걸 드러낼 수 있도록 하는 게 맞다고 봐요.
-제가 퀴어텃밭에 참여하게 된 건, 아무래도 기후위기의 영향이 큰데요.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기후위기의 핵심도 다양성이라고 생각해요. 다양성을 잃지 않는 사회가 되면 기후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도 여러 가지 만들어낼 수 있는데, 지금은 돈 잘 벌어서 이성애 결혼하고 ‘정상가족’을 꾸리는 식의 정해진 틀로 자꾸 들어가라고 하죠. 그 틀을 넘어야 자연 파괴를 막을 수 있다고 봐요. 새로운 삶의 방식, 다양한 삶을 방식을 계속 보여줘야 해요. 그걸 설계하는 게 퍼머컬처라고 생각하고요.
-도시에서, 정말 집 가까이에서도 퍼머컬처로 텃밭을 해보고 싶은데,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저도 여러 밭을 만들었는데 매번 쫓겨났어요. 지금 사회에서 도시농업을 한다는 건 공유지 싸움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도 멈추지 않고 도전하는 건, 여튼 우리가 어떤 공간을 생태적인 공간으로 바꾼다는 거에요. 그게 다시 다른 공간으로 바뀔 수도 있지만, 유지될 수도 있잖아요? 그럼 지구에게 좋은 일이고요.
한국은 2040년 정도되면 농부가 거의 없을 거에요. 이미 한국 농부들 평균 연령이 68세, 50% 이상이 70세가 넘었어요. 10년 후엔 ‘일반적인’ 밥상에 오르는 채소들을 생산할 사람이 거의 없다는 거에요. 거기다 기후위기를 겪으면서 농사를 할 사람도 많지 않을테고요. 먹거리 문제가 정말 심각해질 거에요. 그리고 지금 굉장히 불경기인데, 불경기 이후의 문제가 ‘다양성이 소실된다’는 거거든요. 그로 인한 먹거리 문제도 있을 거고요.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은 공유지를 만들고 농사를 하는 방법, 채소를 기르는 방법 등을 익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죠.
-이 인터뷰로 퍼머컬처에 관심 가질 분들이 더 늘어날 것 같은데요.(웃음) 어떤 것부터 하면 좋을까요?
퍼머컬처 할 땐 일단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부터 심으라고 해요. 내가 맛있게 즐길 수 있는 걸 심고 기르는 경험은 그냥 슈퍼에서 사는 거랑 완전히 다르거든요. 맛도 엄청 달라요. 다년생을 한번 심으면 평생 그 자리에 있거든요. 내가 지구에 없을 때도 나를 대신해 살아갈 생명들을 지구에 남긴다는 행위 자체가 너무 좋지 않나요? 다년생들은 또 풍요로워서 하나를 심고 나면 주변에 나눌 수 있어요. 그렇게 조금씩 자본주의에서 독립해 보는 거죠.
-앞으로 또 어떤 일들을 펼칠 계획인가요?
퍼머컬처네트워크라는 걸 만들었어요. 화학비료를 쓰거나 땅을 갈아엎지 않고 탄소를 땅에 저장하는 유기순환 농사를 짓는 파머컬처리스트들이 생태거점 회원 등록을 하면, 생태 거점에 어느 정도의 탄소가 저장되는지 파악하고, 그걸로 탄소기본소득 운동을 해 보려고요. 또 퍼머컬처 농산물의 공동 상표를 만들어 보려고 하고요. 해외에선 이미 탄소기본소득도 진행되고, ‘우리가 탄소를 이만큼 저장했어. 그에 대한 대가를 줘’라고 하면 크레딧을 주거든요. 기업들도 탄소세를 내야 하니까, 그런 운동에 함께 하고 있고요. 한국 기업들도 해외에선 참여하고 있어요.
이 네트워크를 통해 퍼머컬처 텃밭들을 모으려고 해요. 데이터를 갖고 있으면 아무래도 정부 지자체나 기업들과 협상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한국에서도 사례를 만들어 보려고요. 탄소를 줄여서 활용하는 사례, 탄소기본소득 사례… 앞으로 잘해 봐야죠.
퀴어텃밭도 열심히 해서 내년엔 퀴어문화축제에서 대파도 팔고, 고구마도 팔고. 그러면 재미있지 않을까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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