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민 구제’가 사회를 구제하는 일이 될 겁니다‘아루페 고가네이 난민센터’ 마츠우라 유카코 센터장과 만나다2020년 봄, 가나가와현 가마쿠라시(鎌倉市)에 일본 최대 규모의 난민 쉼터가 탄생했다. 쉼터를 운영하는 ‘아루페 난민센터’(アルペ難民せんたー)는 센터 이사 겸 사무국장인 아리카와 켄지(有川憲治) 씨가 설립한 비영리법인으로, 예수회 수도원 부지와 건물을 쓴다. 신부들이 나이가 많이 들어 수도원이 폐쇄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협의하여 무상으로 빌려 쓰게 되었다.
여자수도회 제안으로 설립된 고가네이 난민 쉼터 ‘난민을 지원하는 일은 병든 일본 사회를 구제하는 일’
고가네이 난민센터도 높은 나무들로 둘러싸인 수도원 안에 있다.
“여기는 가마쿠라와는 달리 여자수도회인데, 마찬가지로 수녀님들이 고령이 되면서 활동을 축소하게 되었다며 제안을 받았어요. 가마쿠라 난민센터의 활동을 알고, 같은 활동을 여기에서도 할 수 없냐며.”
이렇게 말하는 이는 센터장 마츠우라 유카코(松浦由佳子) 씨. 이로써 수녀들이 사는 수도원 일각에 난민 여성과 어린이를 위한 쉼터가 만들어졌다. 마츠우라 유카코 씨도 원내의 소박한 방에서 입소자와 함께 살고 있다.
처음 1년은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고 말하지만, 작년 말, 난민 지원의 의미를 다시 한번 인식시켜주는 기쁜 사건이 있었다.
“미얀마 출신의 한 가족에 초등학생인 K군이 있었는데, K군과 같은 반 친구의 어머니에게서 편지가 왔어요. ‘학교에 가기 싫어하는 아들이 K군과 함께라면 등교할 수 있다고 하네요. 아침에 그쪽으로 찾아뵙고 두 아이가 같이 학교에 가게 해주실 수 없을까요?’라고. K군은 일본의 동화주의(同化主義, 소수민족이나 이민자들이 주류의 문화와 질서에 동화되도록 하는 사회구조) 등에 신경 쓰지 않는 자유롭고 명랑한 아이에요. K군과 함께라면, 그 친구도 있는 그대로의 자기로 지낼 수 있다고 느꼈겠죠. ‘다양성’이 사회에 가져오는 가능성을 실감한 경험이었습니다.”
난민을 구제함으로써 실은 이 사회에 사는 우리가 구제된다.
“일본 사회는 병들어 있어요. 길에 쓰러진 사람이 있어도 묵묵히 옆을 지나가는 나라. 다른 나라라면 모두들 달려왔겠죠. 살기 힘든 사람이 계속 늘어나는 이 사회가 어딘가 이상하다고 생각할 때가 자주 있습니다.”
난민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비로소 알게 됐다
마츠우라 유카코 씨는 중학생 시절부터 난민 문제와 세계의 빈곤에 관심이 있었다.
“아프리카의 기아에 충격을 받으면서도, 그 영상을 보는 나는 쾌적한 집에서 따뜻한 밥을 먹고 있다는 모순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어요. 뭐든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죠.”
당시 집어삼키듯 읽은 책이 이누가이 미치코(犬養道子)의 『인간의 대지』였다. 마음만으로는 난민을 지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언어와 전문지식을 배우기 위해 대학에 입학했다. 일본국제협력기구(JICA)에 들어가 해외에서 지원 활동을 하고 싶다는 꿈도 이뤘다. 하지만 2003년에 부임한 아프가니스탄에서 전기를 맞았다.
출국 전, 아프가니스탄 출신의 청년 알리 씨로부터 “내 어머니를 찾아서 내가 무사하다고 전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알리 씨 가족은 소수민족인 하자라인인데, 아버지는 탈레반의 손에 죽었고, 형은 행방불명. 미성년자였던 알리만 일본으로 도망 와서 살아남았지만, 난민 인정을 받지 못한 채 외국인보호소에서 부당한 구금을 당해 오랫동안 국가와 법정 다툼을 하고 있었다. 참고로 일본의 난민 인정률은 OECD 가입국 최하위권인 한국(1~2%)보다도 더 낮은 약 0.4%에 불과, 극단적 배타성을 드러낸다.
마츠우라 씨는 카불에 도착해 해외지원 일을 하는 한편, 백방으로 알리의 어머니를 수소문했다. 치안이 좋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어찌어찌 알리의 모친으로 짐작되는 여성을 만나게 되었고, 알리가 포함된 단체 사진을 내밀었다. 사진 속 한 사람을 가리키는 그녀의 손이 떨렸다.
“그 순간, 알리의 어머니가 확실하다는 것을 알았죠. 막내만은 살아남았으면 해서 브로커에게 부탁해 일단 아프간에서 탈출시켰지만, 안부를 모르는 채 있었던 거예요. 아이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엄마의 모습을 보고, 그제야 마음으로 알게 된 것 같아요. 난민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그런 환경에서 도망친 청년이 난민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을요. 일본인으로서, 제가 일본에서 해야 하는 난민 지원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분쟁이 끊이지 않는 세계에서 이웃 아시아 사람들의 고통을 알리고, 손을 내밀어야
또 하나의 전기는 신앙과의 만남이었다. 30억 엔이나 되는 규모의 예산으로 해외개발사업을 시작한 후에는 밤늦게까지 일을 해도 끝이 나질 않았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한계에 도달해 있는 자신의 모습이 있었다.
“동료의 실수도 너그럽게 용서하지 못하고, 이렇게 해야 한다는 독선으로 저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까지 속박하고 있었던 거죠.”
미션계 중학교를 나왔지만, 그때 성경을 펼치자 예전에는 울림이 없던 말들이 스르륵 가슴에 와닿았다.
“무거운 선택에 내몰리는 나날들. 세상이 원하는 성과가 아니라,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에게 정말로 좋은 선택이었는지, 항상 고민입니다. 이것저것 머릿속 수다가 끊이지 않을 때는 정원을 걸으며 마음을 가라앉혀요.”
바로 얼마 전, 난민을 지원하는 활동가가 모이는 대회가 대만에서 열렸는데, 미얀마 활동가들의 호소에 눈물을 흘렸다. 징병제가 시작되고, 소수민족과 민주파를 탄압하는 국군에 가담해야만 하는 젊은이들. 그들의 고통에 해줄 수 있는 말도 없다며 지원자는 한탄했다. 분쟁이 끊이지 않는 세계에서 이웃 아시아 사람들의 고통을 더 많이 알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츠우라 씨는 난민센터 활동을 통해 제도의 벽도 부수고 싶다. 고가네이시에서는 다행히 시의회 여성의원들이 의욕적이다.
“보호일시 해제자(외국인보호소에 구금되었다가 가석방된 사람들)의 취업을 허용하고, 건강보험 가입을 인정하고, 사회의 일원으로서 함께 살 수 있도록 지자체 단위가 검토할 수 있게 계속 추동할 생각입니다.” [번역: 고주영]
-〈일다〉와 제휴 관계인 일본의 페미니즘 언론 〈페민〉(women's democratic journal) 제공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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