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1월, 피해자의 신고 이후 세상에 알려졌으며 지금까지 ‘밀양 성폭력 사건’이라 불리는 이 사건이 최근 ‘재조명’되고 있다. 이는 지난 6월 1일 한 유튜버가 올린 가해자 신상 공개 영상 때문이었다. 하루 이틀 사이 영상 시청 수는 200만 뷰가 넘어섰고, SNS를 통해 일파만파 확산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처벌도 거의 받지 않고 평온한 삶을 보내는 가해자들의 현재에 분노하며, 지금이라도 이들이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이런 분노와 추궁이 이뤄지는 동안 피해자는 다시 원치 않은 노출과 주목을 받게 됐다.
영상을 공개한 유튜버의 말과 달리, 영상 공개가 피해자와 그 가족이 동의한 내용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났지만, 이 사건을 자극적으로 소비하게 만드는 유튜버들의 행태가 계속 진행중이다. 이에 6월 5일 한국성폭력상담소는 피해자, 피해자 가족과 상의 끝에 보도자료를 발표했다. (참고: ‘유튜브 〈나락보관소〉 공지 “밀양 성폭력 피해자들과 긴밀한 이야기 후 영상 내렸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https://sisters.or.kr/activity/react/7198) 그러나 이후에도 피해자의 목소리, 성폭력상담소의 역할을 둘러싼 ’논쟁‘이 일고 있다.
경악할만큼 우리 사회의 문제를 많이 드러낸 사건이었지만 변화를 이끌었고, 함께 하는 힘을 보여준 사건이기도 하다는 것
2004년 12월 피해자와 보호자를 만난 최초 상담자인 김옥수 전 울산생명의전화 가정·성폭력상담소장은 밀양 성폭력 사건이 사건 자체뿐 아니라 이후에 여러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고 이야기했다.
“당시 피해자와 보호자는 성폭력 피해보다 언론보도에 의한 피해를 더 크게 호소”할 정도로 이 사건이 다뤄지는 방식엔 문제가 많았다. 또한 “상담을 통해 알게 된 경찰 수사 과정 중 발생한 2차 피해 정도는 경악을 금치 못할 만큼 심각했다”는 것. 당시 경찰은 피해자에게 비난성 질문을 던지며 모욕했으며, “너희 때문에 밀양 물 다 흐렸다” 등의 막말을 했다.
피해자와 가해자를 분리하여 신문하는 원칙도 이뤄지지 않았다. 김옥수 전 소장은 “경찰은 피해자와 44명의 가해자를 한 공간에서 대질신문함으로써 피해자에게 위협적인 분위기를 조성했다”고 했다. 심지어 조사실 밖에는 당시 청소년이었던 가해자들의 보호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피해자와 가족들이 지나갈 때 노골적으로 비난하여 피해자를 위축시키는” 행위도 일삼았다.
“경찰은 수사 내용, 피해자 이름과 나이, 거주지까지 적힌 보도자료를 배포”하기도 했고, “전국 언론사들은 서로 경쟁하듯 과장되고 왜곡된 보도를 이어가며 피해자의 인권을 침해”했다. “검찰은 가해자가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44명 중 10명만 기소, 20명은 소년부로 송치”했고, “나머지 13명은 피해자 의사와 무관하게, 친권자인 피해자의 아버지와 합의했다는 이유로 ‘공소권 없음’으로 기각”했다. 또 “재판부는 선도차원의 솜방망이 처분을, 소년부로 보내진 이들도 모두 전과가 남지 않는 소년보호처분을 내렸다. 결국 44명 중 형사처벌을 받은 가해자는 단 한 명도 없는 결말”이었다.
이 모든 과정과 결말은 공분을 살 만하지만, 동시에 피해자와 보호자, 조력자와 연대인들이 결코 가만히 있지 않았다는 사실도 잊어선 안 된다는 것을 기자회견 참여자들은 강조했다.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은 “피해자 측이 국가 상대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하고, 최초로 인정 판례를 끌어냈다.”(참고: 법률신문 2008년 6월 19일자 류인하 기자, “대법원, 경찰관이 성폭행 피해자 모욕… 국가배상 확정” https://lawtimes.co.kr/news/40608)는 사실을 밝혔다.
피해자 지원단체의 노력도 있었다. “피해자의 동의 없이 피해자에 대한 정보를 일방적으로 확보, 확산하고, 피해자가 동의할 수 없는 내용과 방식으로 재현하는 문제는 2004년 방송사와 경찰의 문제에서 2024년 유튜버의 문제로 바뀌며 반복되고 있다”고 지적한 김혜정 소장은 “2004년 당시 피해자 지원단체인 가정·성폭력상담소에서 항의하며 일일이 수정요청을 했고, 2024년 현재도 피해자 지원기관인 성폭력상담소가 항의하고 수정, 삭제 요청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시민들의 연대도 존재했다. “2004년 故 최진실 님의 기부로, 초기 활동 자금을 마련하여 형사사법 절차에서 발생하는 2차 피해를 근절하고 피해생존자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성폭력 수사 재판 시민감시단’이 2004년 10월 발족”했다. 시민감시단의 첫 번째 활동은 “‘밀양 성폭력 사건’ 현장 조사 및 모니터링, 제도 개선 제안 보고”였다. 김혜정 소장은 “그 이후 2005년부터 현재까지 매년 2월 성폭력 수사·재판과정 디딤돌·걸림돌을 선정하고 발표하고 있다”며, “앞으로도 많은 시민들이 수사·재판과정 감시, 모니터링, 의견 개진에 함께 해줬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여전히 더 많은 지지대가 필요하다
2004년부터 현재까지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들과 소통하며 지원하는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이사는 얼마 전 피해자와의 만남에서 “피해자로부터 ‘저 많이 단단해졌어요! 너무 걱정 마세요.’라는 말을 듣고 가슴이 먹먹해졌다”고 했다.
이미경 이사는 “피해자가 지금 ‘단단’하다고 보지 않는다.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해지고 싶은 마음일 것. 그러면 충분히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다만 이것은 혼자만의 힘으로 가능하지 않다. 이미경 이사는 “그를 피해자로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시민으로, 자기 삶을 존중받으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사회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UN의 2030 지속가능개발 목표에는 ‘누구도 뒤에 두지 않는다’(Leave no one behind)를 중요한 원칙으로 채택하고 있다.”고 설명한 이미경 이사는 “사실 국가가 나서서 범죄피해자의 일상 회복을 지원했어야 했지만, 제대로 시도조차 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피해자들을 위한 지원 제도는 여전히 미흡하다. 김혜정 소장은 “피해자 의료비나 심리 상담 비용 지원이 있긴 하지만, 기간도 비용도 한정적. 법률 지원도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주거 지원의 경우 “LH에서 성폭력 피해자나 가정폭력 피해자가 지원할 수 있는 부분이 있지만,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어 이 또한 쉽지 않은 부분”이고, 생계비 지원은 “기금을 신청할 때 피해자의 개인정보, 재산 정보와 가족들의 재산 정보까지 상세하게 입력해야 하는 부분이 문제”라고 덧붙였다.
이 사건의 피해자 또한 현재 “주거환경, 사회적 네트워크, 심리적·육체적 건강도 불안정한 상황”으로 “정식취업이 어려워 아르바이트 및 기초생활수급비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이미경 이사는 “(피해자가) 준엄한 삶의 현장에서 때로는 넘어질 수도 있겠지만, 그때마다 툴툴 일어날 수 있는 정신적인 힘과 물리적인 기반을 만들어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밝혔다.
무엇보다 피해자의 말에 귀기울이는 사회가 돼야
기자간담회에서 대독된 피해자의 말엔 응원해 주는 사람들에 대한 감사, 잘못된 정보로 인해 또 다른 피해가 생기는 것에 대한 우려가 담겨 있었다. 또한 이 사건이 다시 자극적으로 소비되기만 하고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읽을 수 있었다.
또한 “피해자가 일상을 회복할 수 있는 사회 여건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 고민하고, 그에 대한 토대를 마련하는 것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김혜정 소장은 “지금의 사태, 유튜버들이 가해자를 응징하겠다고 하는 방식이 어떤 도전 프로젝트처럼 콘텐츠화되는 측면을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특히 이것이 피해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매우 문제적”이라 짚었다. 또한 “피해자들이 사건 당시엔 중학생이어서 언론이나 사회에서 어떤 말들을 하는지, 그게 무슨 의미인지 잘 몰랐지만, 지금은 다 알고 있다고 했다. ‘우리의 마음이 무시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전했다.
더불어 김혜정 소장은 “사회적으로, 입법적으로, 제도적으로 가해자에 대한 응징이나 처벌도 중요하겠으나, 피해자에 대한 단단한 지지와 지원이 더 연구되고 논의되길 바란다. 여성폭력 피해자 지원 예산이 증액되고 피해자의 일상 회복이 단단해지길 바란다”는 점을 거듭 요청했다.
피해자는 20년 전부터 이미 충분히 많은 것들을 해냈다. 가해자들을 법의 심판대에 세우고자 했고, 지역을 옮기고 학교를 옮겨가면서도 자신의 일상을 이어 나가고자 했다. 가해자들이 처벌 없이 지금 평온한 삶을 보내고 있다면 그건 피해자 탓이 아니라, 당시 사건을 수사한 경찰과 검찰, 가해자 모두에게 선처를 고한 재판부 탓이다. 사건을 자극적으로 이용하고 멋대로 재단한 이들 탓이기도 하며, 이 사회에 여전한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통념과 편견 탓이기도 하다. 앞으로 ‘밀양 성폭력 사건’을 둘러싼 논의는 바로 그 부분을 짚어야 한다.
피해자에겐 필요한 건 일상의 회복이라고 밝히며, 한국성폭력상담소는 피해자의 생계비를 지원하는 특별 모금을 시작했다.(https://box.donus.org/box/ksvrc/donate-milyang) 피해자와 연대하는 마음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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