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주껏 형편껏 색깔대로 짓는 밭농사, 책농사를 권함[기후위기 체감하는 여성 농부들의 메시지] 당신의 재주가 지구를 구할지도한파가 몰아치기 전 이상하리만치 푹했던 지난 초겨울, 오일장엔 냉이가 지천이었다. 이 겨울에 웬 냉이람? 장에 나온 엄니들은 “참, 요상한 시상(세상)”이라 하시던데, 정말 계절을 가늠할 수가 없다.
기후위기 현상이 또렷하게 나타나는 현장 가장 가까이에서 농부들이 지구를 걱정하는 모든 이들에게 띄우는 편지
생경한 모습은 감밭에서도 펼쳐졌다. 지지난 겨울, 한 해가 다 새 가는데도 감을 하나도 따지 않은 밭이 심심치 않게 보였다. “올해는 감금(감 값)이 똥이여.” 감밭 어르신이 한숨과 함께 내뱉은 말이었다.
서울과 수도권에는 엄청난 폭우가 덮쳤던 초여름, 이 남쪽 땅엔 비 한 방울 오지 않던 날들이 이어졌다. 장마와 태풍으로 자연이 거두는 대로 떨어지고 솎아졌어야 할 감꽃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살아남았다. ‘가물수록 잘 자라서 감’이라고 부른다더니 살아남은 감꽃들은 그대로 열매가 되었다. 그렇게 이례적인 풍년을 맞은 감은 그야말로 값이 똥이 된 것이었다. 감을 팔아 버는 돈보다 감을 따느라 쓰는 인건비가 더 드니, 감을 따지 않고 그대로 둔 감밭이 한둘이 아니었다. 눈을 맞으며 나뭇가지에 달린 채로 곶감이 되어 가는 붉은 감들이 농부 속도 모르게 여기저기서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고 있었다. 이상한 사계절, 아니, 봄과 가을이 사라지는 이 계절을 맞닥뜨리고 있었다.
나는 우리가 느낀 그 ‘이상함, 무서움’을 모두가 알아차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똑바로 마주하기엔 거북한 사실들이 ‘이례적’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분명하게 일어나고 있다. 잠자리가 앉았다 간 흔적처럼 아무렇지 않은, 그런 작은 일이 아니라, 기후위기 또는 기후재앙, 기후가열로 불리는 현상이 또렷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전국 각지 소농, 페미니스트 농부들의 목소리를 모아
봄에 만나야 할 시절 인연들을 겨울에 만났을 때 어색하고 미안한 마음, 이례적인 이상기온 소식을 듣고 누군가의 밥벌이와 목숨이 위험해졌다고 알아차리는 마음, 가뭄에도 물이 철철 나오고 한파에도 방이 절절 끓는 공간을 편히 바라보지 못하는 마음, 이런 거북한 마음들이 숨지 말고 떡하니 드러나면 좋겠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이상한 변화를 모르는 척하지 말자고 꼬장꼬장 말하면 좋겠다.
그런 바람으로 책을 만들어 오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자연농사를 짓는 작은 농부 아홉 명의 편지를 엮어 만든 『살자편지』다. 처음 이 책을 기획하고는 전국 각지 소농들에게 연락했다. 기후위기 앞에 우리가 정말로 되찾아야 하는 일상은 인간이 풍요롭게 누려 온 일상이 아닌 지구와 공존하는 일상이어야 하기에, 그런 이야기를 해 줄 수 있는 작은 농부들에게 요청했다. 편지를 달라고.
무너진 다양성, 지나친 소비주의, 파편화된 개인, 잃어버린 야생성, 땅과 멀어진 삶을 돌아보고 반성하고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도록 기후세대를 위한 다른 길을 보여 달라고 요청했다. 다행히도 아홉 농부로부터 따뜻한 답장들을 받은 덕에 긴 시간 편집을 거쳐 책이 나왔다.
모든 이들이 자신에게 귀한 밥을 대접할 수 있는 하루하루를 산다면, 이렇게 넘쳐나는 쓰레기 속에서 기후위기를 맞이할 까닭도, 사회가 가둔 틀에 갇혀 미워하고 따돌릴 까닭도, 날마다 곁사람들과 자기를 비교하며 살 까닭도 없을 것이기에, 이 책을 통해 여성 소농 여덟 명의 ‘다른 길’을 보여 주고 싶었다.
내용뿐 아니라 책의 꼴도 기후위기에 맞게 고민했다. 될 수 있으면 누구에게든 덜 해가 되는 방식으로 책을 만들고 싶었다. 작은 출판사여서 한계가 많지만, 책을 만드는 작업자에게도 읽는 이에게도 또 환경에도 덜 해가 되는 ‘콩기름 잉크 인쇄’를 고집했다. 대부분 책을 만드는 데 쓰이는 석유 기반 잉크는 탄소와 오염 물질을 많이 배출한다고 한다. 휘발성 유기화합물을 포함한 화학물질들로 인쇄 노동자의 건강에도 좋지 않다. 그에 비해 콩기름 잉크 인쇄는 쉽게 자연에서 분해되고 만들 때도 탄소를 덜 배출하며 인체에 덜 해롭고, 콩기름 잉크로 펴낸 인쇄물은 재생하기에도 쉽다. 이런 까닭으로 콩기름 잉크로 책을 내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콩기름 잉크 인쇄가 가능한 인쇄소가 많지 않았다. 게다가 비용도 더 들었다. 500부 이하 소량 인쇄는 콩기름 잉크를 선택할 수도 없었다. 여기저기 연락을 돌리고 알아낸 끝에 시작할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종이를 선택할 때도 나무를 덜 벨 수 있도록 재생지를 선택하고, 화학약품을 덜 쓰도록 책 표지를 코팅하지 않았다. 책 표지를 코팅하지 않으면 나중에 책을 재활용할 때도 좋다. 글꼴이나 사진 밝기, 여백, 책 판형 같은 디자인 요소들 하나까지 될 수 있으면 낭비가 없도록 고민하여 선택했다. 그러다 보니 여백도 넓고 여분 종이나 다양한 색을 다채롭게 사용한 책들과 비교하면 우리 책은 꼴이 좀 없어 보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굳이 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다가도 단 한 권이라도 들살이와 물살이에게 덜 해가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다시 마음을 먹어야 했다.
기후위기를 삶 속에서 가장 뚜렷하게 느끼는 이들은 아마도 농부들일 것이다. 잘 자라던 과일이 더는 기후에 맞지 않아 수확량이 줄어드는 걸 느낄 때, 해마다 이르게 파종하고 있음을 알아차릴 때, 너무 비가 많이 오거나 너무 비가 오지 않는 날이 길어지면서 ‘하늘 보고 하는 농사’를 더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 생전 없던 벌레가 창궐할 때, 철 맞지 않은 꽃이 피었다가 서릿발에 다 죽어 버렸을 때… 농부들은 정말로 기후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있다. 나야 겨우 조그만 텃밭이나 가꾸고 있는데도 긴 장마에 토마토가 다 죽고 긴 가뭄에 손톱만 한 감자를 건진 몇 해를 보내면서 기후위기를 체감했는데, 정말 농사에만 전념하시는 농부님들은 얼마나 속이 쓰리겠는가.
그런데 나를 더욱 슬프게 하는 건, 기후위기의 증거들을 몸소 느껴 마음 아픈 이들이 뒤에서 묵묵히 견디는 동안, 역으로 기후위기 결과를 악화시키는 사건들에 큰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득세할 때이다. 내가 사는 지리산 자락에는 몇 해 전 ‘지리산 골프장’을 짓겠다는 움직임으로 예정지 산의 아름드리 수천 그루가 잘려 나간 일이 있었다. 어느 숲이 골프장 예정지가 되면 환경영향평가에 앞서 미리 합법적으로 나무를 다 베어 내는 일이 전국에서 관행처럼 벌어지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중에 환경영향평가 때 유리하게 하려는 꼼수라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뿐인가. 설악산 케이블카 조건부 동의 결정이 난 뒤로 여기저기 지자체가 자기들도 케이블카를 놓겠다며 열을 올렸다. 우리 동네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옆 동네에서는 산악열차를 놓겠다고도 했다. 내가 종이 한 장도 허투루 쓰고 싶지 않아 친환경 인쇄에 골몰한다고 해도 우리 마을의 숲이 발가벗겨지는 일에 무감해서는 나무 한 그루도 제대로 지킬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니 좋은 책을 만드는 일을 넘어서 마을 숲과 들과 강을 지키려는 사람들과 연대하는 일도 필요했다. 그렇게 마음 맞는 사람들과 지리산 골프장, 케이블카, 산악열차 같은 막개발 행정을 막는 일에 조금씩 손을 보태게 됐다. 한 사람 한 사람 저마다 자기 동네 나무와 새와 둘레 생명을 지키는 일에 함께한다면 아마도 온 지구를 지키는 효과를 낼 수 있지 않을까. 모두가 제 동네의 파수꾼이 된다면!
당신 각자의 재주가 모여 어쩌면 지구를 구할 수도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마무리할 땐 꼭 이 한마디를 남겼다. “강요하지 말자.” 나는 고기 안 먹는데, 너는 왜 먹니, 지구를 생각해서 나는 오늘 쓰레기를 안 만들었는데, 너는 왜 휴지를 쓰니, 너 왜 낮에 전깃불을 켜니, 너 왜 계속 에어컨을 트니 등등… 나는 이랬는데 너는 왜 안 하느냐고 타박하거나 강요하면 환경운동은 재미가 없어진다. 무엇보다 남이 처한 상황도 모르고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하면 누군가를 영영 환경운동에서 멀어지게 할 수 있다. 각자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 재주껏 형편대로 색깔대로 하면 된다. 그러니 아이들에게도 꼭 강요하거나 손가락질하기보다는, 서로 함께하자고 말하고 손을 내밀자고 말하며 수업을 마치곤 했다.
강요하지 말자는 소리는 나 스스로에게도 통한다. 나를 너무 몰아붙인 탓에 고장 난 손목을 생각해서라도,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하자고 마음먹었다. 어쩔 수 없이 한쪽에서 지구에 해가 되는 일을 했다면 다른 한쪽에서 지구에 이로운 일을 더 하면 된다고, 그렇게 다독였다. 그건 나 역시 누군가의 강요에 휘둘리고 싶지 않아서, 또 행동하지 않는 사람들을 미워하고 싶지 않아서 하는 주문이기도 했다. 기후위기는 분명히 벌어지고 있고 이미 우리 옆에 와 있지만, 이해와 사랑 그리고 상상을 놓지 않은 채 명랑하게 이 시대를 살아가고 싶다. 내겐 없는 멋진 재주를 가진 지구인들이 저마다 자기 재주껏 지구를 사랑하는 데 함께할 수 있기를.
[필자] 문홍현경. 독립출판 니은기역을 이끌어 기후정의에 가까운 이야기를 책으로 펴내고 있어요. 산, 들, 강 그리고 거기에 깃든 모두가 평화롭길 바라며 몸 쓰고 삽니다.
-‘기후위기 체감하는 여성 농부들의 메시지’ 기록은 아름다운재단(beautifulfund.org) 지원으로 제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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