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으로 인한 임신, ‘DNA 검사’해야 임신중단 지원?

‘낙태죄’ 헌법불합치 5년, 안전한 임신중지를 가로막고 있는 장벽들

박주연 | 기사입력 2024/06/21 [21:35]

성폭력으로 인한 임신, ‘DNA 검사’해야 임신중단 지원?

‘낙태죄’ 헌법불합치 5년, 안전한 임신중지를 가로막고 있는 장벽들

박주연 | 입력 : 2024/06/21 [21:35]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가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이후 5년이 지났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낙태죄’가 비범죄화된 걸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심지어 의료인들조차 인식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그 이유는 정부가 아직까지도 임신중단권과 성과 재생산 건강권에 대한 후속 정책 및 제도를 마련하지 못한 탓이 크다. 입법 공백 상황에서 임신중단권은 과연 어떻게 다뤄지고 있을까?

 

▲ 6월 14일 저녁 강북노동자복지관 대강당에서 ‘낙태죄’ 헌법불합치 5년, 양질의 임신중지 지원체계 모색을 위한 토론회- “여전히 안전한 임신중지를 가로막고 있는 장벽들, 현장에서 말한다”가 열렸다. 김정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이 ‘낙태죄’ 비범죄화 이후 상황을 말하고 있다. ©일다


지난 6월 14일, ‘낙태죄’ 헌법불합치 5년을 맞아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보장 네트워크’에서 “여전히 안전한 임신중지를 가로막고 있는 장벽들, 현장에서 말한다”라는 제목으로 〈양질의 임신중지 지원체계 모색을 위한 토론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김정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낙태죄 비범죄화 이후, 임신중단권 보장은 어디까지 왔는가?”에 관하여 ‘성폭력 피해자 임신중단 지원을 중심으로’ 기조 발제를 했다.

 

임신중단을 필요로 하는 성폭력 피해자가 지원받으려면

‘강간, 준강간에 의한 임신’을 입증해야?

 

김정혜 “임신중단을 필요로 하는 성폭력 피해자”를 지원하는 현장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보고하며, ‘낙태죄’ 비범죄화에 따른 의료 현장과 사회적 변화의 움직임, 그리고 임신중단권 보장을 위한 법과 정책이 마련되지 않음으로 생기는 문제들을 짚었다.

 

’강간 또는 준강간에 의하여 임신된 경우’의 임신중단은 1973년 모자보건법이 제정되면서부터 합법적이었고, 성폭력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과 시행령은 ‘성폭력으로 임신한 태아의 낙태’를 피해자에 대한 ‘신체적 정신적 치료’에 포함하여 의료비를 지원하고, 성폭력 전담의료기관에서 의료 지원을 하도록 하였다.(제27조) 그러나 “임신중단이 원칙적으로 범죄 행위로 규정된 상황”에선 한계가 있었다. 그렇다면 ‘낙태죄’가 비범죄화된 지금은 달라졌을까?

 

2021년 성폭력 피해자 지원기관의 임신중단 지원 실태를 파악한 설문조사 결과와 더불어, 2023년 하반기에 성폭력으로 인한 임신 피해자 지원 경험이 있는 기관 19곳(성폭력피해상담소, 해바라기센터, 성매매피해상담소)과 의료인 4명을 면접 조사한 김정혜 부연구위원은 “낙태죄 비범죄화 이후 나아진 부분도 분명 있지만, 다수의 면접참여자들은 비범죄화를 전후하여 별다른 변화를 느끼지 못 했다”고 보고했다.

 

특히 “여성가족부의 지원 지침에서는 의료 지원 근거법인 성폭력방지법이 아닌, 모자보건법을 따라 강간, 준강간에 의한 임신인 경우에만 의료비를 지원할 수 있다”고 쓰고 있는데, “(피해자) 지원 기관 중에서는 성폭력으로 인한 임신 또는 강간, 준강간에 의한 임신을 ‘증명해야 한다’는 부담을 느끼는 사례”들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 〈‘낙태죄’ 헌법불합치 5년, 양질의 임신중지 지원체계 모색을 위한 토론회 – “여전히 안전한 임신중지를 가로막고 있는 장벽들, 현장에서 말한다”〉에서 기조발제를 하는 김정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 ©일다


#성폭력을 경찰에 신고한 경우에만?

 

“적어도 피해자가 말하는 피해일이 임신 주수와 일치해야 한다거나, 강간죄의 구성 요건인 ‘폭행, 협박’의 범위를 넓게 해석하여 포섭할 수 있는 정도는 되어야 지원”한다는 조건이 붙거나 혹은 “상담 내용을 통한 판단 외에도 경찰 신고나 외부 전문가가 참석한 사례회의에서의 의결 등의 절차를 필수로 하거나, DNA 등 다른 증거를 필요로 하는 사례”도 있었다.

 

김정혜 부연구위원은 “성폭력 피해자가 임신중단 의료 지원을 받기 위해 경찰에 신고를 해야 한다는 명시적인 규정이나 지침은 없지만, 심층면접 결과 ‘해바라기센터의 지원을 받으려면 신고해야 한다’는 답변이 많았다”고 밝혔다.

 

이런 문턱들이 있다 보니 피해자들 중에는 중도 포기하는 경우도 생긴다. “결과적으로는 신고가 어려운 피해자를 지원한다 하더라도, 지원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에서 (경찰) 신고 권유가 지속되면, 신고할 수 없는 피해자는 지원을 포기하고 성폭력 피해자 지원체계에서 누락”된다는 것.

 

#DNA 검사를 해야 한다?

 

DNA 검사라는 과정도 큰 걸림돌이다. “최소한 임신 8~10주 이상은 되어야 의미가 있다”고 하는 DNA 검사를 기준으로 한다는 건, 임신 초기의 안전한 임신중단을 놓치는 꼴이다.

 

더불어 김정혜 부연구위원은 “DNA 일치라는 지원 조건은 성폭력 피해자 의료 지원에 있어 피해자가 경험한 ‘성폭력 피해’보다 ‘누구의 정자에 의한 임신인가’가 핵심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고 꼬집었다. 또한 “지목된 가해자에 의한 피해 시점을 전후하여 다른 성폭력이나 합의에 의한 성관계가 있었을 경우, 피해자를 비롯한 누구도 임신의 원인을 알 수 없음”에도, 그런 부분은 간과되는 것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김정혜 부연구위원은 이런 DNA 확인은 “여성가족부의 「해바라기센터 사업 안내」는 임신중단 지원 진행시 ‘허위 고소로 드러나면 무고죄 피소 등 법적 책임을 질 수 있고, 의료비를 환수할 수 있음을 사전에 고지’하는, 의료비 환수 지침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이처럼 의료비 지원 과정에서 피해자에게 무고죄 피소 가능성이나 허위 신고 같은 안내를 하는 것은, “수사 과정이나 일상에서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의심을 경험하는 피해자에게는 상당히 위협적으로 들릴 수 있고, 지원 요청을 위축하게 한다”고 비판했다.

 

또한 김 부연구위원은 “성폭력 고소는 성폭력에 대한 것이고, 임신 여부는 성폭력 범죄의 성립에 영향을 주지 않으므로, 임신이 성폭력 피의자에 의한 것인지 여부는 성폭력 무고의 문제와는 관련이 없고, DNA 검사를 하는 경우 피의자에 의한 임신이 아님이 확인되면 ‘성폭력 범죄의 결과로서의 임신’이 발생하지 않았음을 재판에서 참고하면 그만”이라고 설명했다.

 

#외부 자문위원 참여한 사례회의를 거쳐야?

 

임신중단 지원이 필요한 성폭력 피해자가 넘어야 하는 허들은 그뿐이 아니다. 외부 자문위원을 참여시킨 사례회의를 통해 임신중단 지원을 결정하기도 한다.

 

“외부 위원이 논의에 참여하도록 하는 때에는 회의 준비와 소집을 위하여 시일이 소요”된다는 점도 문제일 뿐더러, “회의 참여자의 성폭력 피해에 대한 이해도, 임신중단에 대한 인식이나 태도 등에 따라 지원이 불가능해지기도” 한다. 이런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피해자의 임신 기간이 증가”하고, 심지어 “지원 불가로 결정되면 그때부터 피해자는 다시 임신중단이 가능한 병원이나 지원기관을 찾아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토론회에서는 한편, 청소년 피해자의 경우 ‘부모의 동의’가 조건이 되어 오히려 안전한 임신중단에서 멀어지기도 하고, 성매매 피해자의 경우 “현재의 지침에 임신중단이 명시되어 있지 않아 의료비 지원에 어려움”이 있는 상황도 문제로 제기되었다.

 

▲ 2022년 8월 17일, 서울 보신각 앞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 보장 네트워크’ 출범식 기자회견. 참여자들이 “임신중지 권리보장 교육 실행, 임신중지 건강보험 전면적용” 등 요구를 적은 피켓을 들었다. ©모두의안전한임신중지를위한권리보장네트워크


임신중단 의료 제공하는 ‘의료인 찾기가 가장 어려웠다’

 

의료진들, 의사들의 인식 개선이 더디다는 점도 안전한 임신중단을 어렵게 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김정혜 부연구위원은 면접참여자들의 공통적인 대답이 “임신중단 지원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임신중단 의료를 제공하는 의료인을 찾기까지의 과정이었다고 말한 점”을 언급했다.

 

“병원마다 임신중단 의료 제공 여부 및 방법, 조건, 비용 등이 서로 달라서, 해바라기센터 수탁 병원과 성폭력 전담의료기관 중에서도 임신중단 의료를 제공하지 않는 곳이 있었고, 정부는 임신중단 의료비 지원 제도를 시행하고 있지만 임신중단이 가능한 병원 정보를 공유하지는 않는다.” 때문에 “지원기관들은 지원 요청 사례가 생기면 인근 병원에 일일이 전화를 하고 거부당하는 경험을 해야 했으며, 개인적 인맥까지 동원하여 닿은 의사를 겨우 설득하여 의료 기록을 남기지 않고 수술을 하기도” 했다는 것.

 

‘낙태죄’ 비범죄화 이후에도 여전히 “‘임신중단이 불법이기 때문에 해줄 수 없다’고 말하며 거부하는 의료인”도 있고, “‘불법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합법이라고 할 수도 없는’ 상태로 인지하는 의료인”도 있었다. 김정혜 부연구위원은 “‘낙태죄’ 비범죄화 이전과 동일한 의료 관행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짚었다.

 

건강보험 문제도 제기됐다. “비범죄화 이전에도 성폭력으로 인한 임신중단은 건강보험 적용이 가능”했지만, 이번 조사 결과 “성폭력 피해로 인한 임신중단 의료 지원에서도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사례가 더 많았”다는 것이다. “건강보험 적용이 되지 않은 경우, 의료비 편차가 매우 크며, 고액의 비용을 지불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임신중단 의료가 수술만이 아님에도, 수술적 방법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는 점도 드러났다. 김정혜 부연구위원은 “미소프로스톨과 복합으로 유산유도약으로 널리 사용되는 미페프리스톤이 아직 정식으로 수입되지 않는” 국내 의료 현장에서는 “임신중단 의료 임상 경험 부족과 의료 관행, 유산유도약 미허가, 수술 중심으로 만들어진 법률 등의 한계로 인하여 수술적 방법을 고수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정부는 성폭력으로 인한 피해로부터 조속한 회복 지원해야

‘임신중단 의료의 정상화’가 선결 과제

 

김정혜 부연구위원은 “‘낙태죄’ 비범죄화는 임신중단에 대한 낙인을 감소시키고, 성폭력 피해자 임신중단 지원 가능성을 향상시켰지만, 임신중단 의료 정상화를 위한 정부 대책이 부재할 뿐 아니라 성폭력 피해자의 임신중단 지원 기준조차 개선되지 않는 현실은 이미 존재하는 지원조차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어 “임신의 유지 또는 중단의 결정에 필요한 정보를 충분히 제공 받을 수 있고, 임신중단을 결정한 피해자가 비용 마련의 문제로 임신중단 시점이 지연되지 않고 빠른 시일 내에 낙인 없이 안전하게 임신중단 의료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함으로써, 성폭력으로 인한 피해로부터의 조속한 회복을 지원하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라며 변화를 촉구했다.

 

이와 관련해 김정혜 부연구위원은 다음의 여섯 가지 과제를 제시했다.

 

①임신중단 의료의 정상화가 선행되어야 할 것

②여성가족부의 지원 지침에서 성폭력 피해자 임신중단 의료 지원의 법적 근거를 수정하고, 성폭력 피해자 임신중단 지원을 지연시키거나 불가능하게 하는 지침 및 관행상의 요건과 절차들을 폐지하도록 명확한 원칙과 절차 지침을 제공할 것

③임신중단을 비롯한 성폭력 피해자 의료 지원에서 아동·청소년 및 장애인 피해자의 자기결정권이 보장되는 방안을 마련할 것

④성폭력 피해자 임신중단 지원 확대를 위하여 의료인 및 피해자 지원자의 역량을 강화할 것

⑤성폭력 피해자의 성·재생산 건강권 보장 강화 방안으로서 의료비 외 제반 비용 지원, 성폭력 전담의료기관 관리 강화, 피임 시술 의료비 지원을 확대할 것

⑥임신중단 의료를 제공하는 의료기관과 제공되는 의료의 범위를 파악하고 검색 시스템을 구축하는 등 의료기관 접근성을 향상하는 등 임신중단 의료 접근성을 강화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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