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쟁 속 세계…‘여성국제전범법정’의 경험 재조명되길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공동대표 인다이 사호르

시미즈 사츠키 | 기사입력 2024/07/28 [10:35]

분쟁 속 세계…‘여성국제전범법정’의 경험 재조명되길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공동대표 인다이 사호르

시미즈 사츠키 | 입력 : 2024/07/28 [10:35]

2000년 12월에 도쿄에서 개최된 ‘여성국제전범법정’은 아시아 여성들과 각국의 인권단체가 2차 세계대전 중에 일본군이 저지른 성노예제에 의한 인권침해 실태를 규명하고 가해자들에게 형사책임을 추궁하기 위한 목적으로, 당시의 국제법을 근거로 판결한 획기적인 법정이었다.

 

역사적인 그 법정의 공동대표 중 한 명, 필리핀 출신의 인다이 사호르(Indai Sajor) 씨가 14년 만에 일본을 찾았다.

 

“현재 여성국제전범법정 기록의 출판과 웹사이트 오픈을 준비 중입니다. 이번에는 일본군 ‘위안부’ 여성의 정의를 요구하는 운동을 함께 했던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자, 일본에 왔습니다. 법정으로부터 23년. 국경을 넘는 페미니스트 운동이었던 법정의 의의를 짚고, 그것을 아시아 여성들이 이끌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조명하고 싶습니다.”

 

▲ 2000년 도쿄에서 열린 ‘여성국제전범법정’의 공동대표 인다이 사호르(Indai Sajor) 씨. 필리핀 네그로스섬 출신으로 대학 시절 마르코스 독재정권 저항운동에 가담. 페미니스트로서 활동하며 ’아시아여성인권센터‘ 등 여성단체를 설립. 필리핀 여성정당 ‘가브리엘라’ 창설에 관여. 현재는 뉴욕 거주. (사진-오치아이 유리코)


인다이 사호르 씨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여하게 된 것은, 1992년에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 인신매매에 관한 회의에서였다.

 

“그 전 해에 김학순 씨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였다는 증언을 하셨습니다. 필리핀도 일본군의 침공을 당했었기 때문에 같은 피해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여성 활동가들로부터 조언을 구해, 귀국 후에 라디오에서 ‘전쟁 중에 일본군에게 성폭력을 당한 사람은 우리에게 전화해달라’고 요청을 했어요. 그것이 필리핀에서 ‘위안부’ 피해자를 찾는 활동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 로사 헨슨(Maria Rosa Henson, 필리핀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처음 증언한 여성) 씨가 나타났다.

 

그 후, 아시아 각지에서 성노예제 피해를 입은 여성들의 증언이 이어졌다. 피해여성들은 지원자들과 함께, 일본에서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국가무답책(國家無答責) 원칙(국가의 권력 행사에 의해 개인이 손해를 입어도, 국가는 손해배상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메이지 헌법 하의 원칙)과, 제척기간(어떠한 권리에 관하여 법률이 예정하는 존속기간. 그 기간 안에 행사하지 않으면 해당 권리가 소멸된다) 경과 등을 이유로 ‘패소’가 이어졌다.

 

어떻게 하면 그 이후의 ‘위안부’ 운동을 계속 펼칠 수 있을까.

 

“당시, 저는 국제형사재판소(ICJ) 설립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제형사재판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국제법 분야에서 권위 있는 전문가를 모아 국제법정을 열기로 하고, 준비를 시작했다. 성노예제 가해국 대표로서 일본의 故 마츠이 야요리 씨(VAWW-NET Japan), 피해국 대표로서 한국의 윤정옥 씨(당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국제사회 대표로서 인다이 사호르 씨(아시아여성인권센터)가 공동대표를 맡았다.

 

“실제로 유엔이 설치하는 전범법정의 형식에 따라 조직화하고, 전후 연합군에 의한 극동국제군사재판(2차 세계대전 관련된 동아시아의 전쟁범죄자를 1946년 5월 3일부터 1948년 11월 12일까지 약 2년 반에 걸쳐 심판한 재판)의 연장으로 위치를 잡고, 당시 극동재판에서 판결되지 않았던 ‘여성에 대한 폭력’에 대해 책임을 물었습니다. 참가한 사람들의 소속 국가마다 각각의 법체계와 법률 구성이 있어서, 그것을 서로 조정하기 위해 전문가들이 논의를 거듭하여 일왕과 일본 국가, 양측에 ‘유죄’ 판결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 2000년 12월 12일 도쿄에서 열린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에서 재판장 가브리엘 맥도널드(전 유고전범법정 소장)가 일왕에게 유죄를 선고하자, 울며 환호하는 각국의 ‘위안부’ 피해자들. *출처: 여성국제법정 20주년을 기념하면서 일본군‘위안부’연구회가 제작한 영상 “1. [정의를 찾는 여정: 다시 보는 2000년 여성국제법정]”


그렇게 열린 여성국제전범법정에서 나흘에 걸쳐 9개국 60명 이상의 여성이 일본군에 의한 가혹한 폭력의 실태를 증언했다.

 

“법정을 완성시킨 것은 국가와 지역을 넘어 연결된 페미니스트들이었습니다. 고생도 많았고 몇 번이나 울었지만, 반드시 끝까지 해내야 한다는 결의로 해냈던, 가슴 벅찬 운동이었습니다.”

 

증언을 한 여성들도 판결을 기뻐했으며, 그 중 필리핀 피해자인 토마사 살리노그(Tomasa Salinog) 씨는 “이것으로 나의 영혼을 되찾았다.”고 이야기했다.

 

검사와 판사 등 전문가들의 이름이 주목받았지만,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법정에서 의전과 통번역팀 등 백스테이지를 맡았던 여성들의 존재다.

 

“많은 일본인 여성들이 다양한 헌신과 희생을 치르며 일했습니다. 겨울이 없는 필리핀에서 온 여성이 입국할 때 공항에 나와서 코트를 들고 맞이하는 등. 그러한 모습을 보며, 일본에 대한 인상이 바뀌어 갔습니다. 통역자들은 문화의 벽을 뛰어넘는 일을 해주었습니다.”

 

인다이 사호르 씨는 여성국제전범법정 이후 2001년에 뉴욕에서 유엔과 관련 있는 비정부기구인 ‘젠더 정의를 위한 여성 코커스’(The Women`s Caucus for Gender Justice, 국제형사재판소에서 성평등과 성적 폭력 문제에 대한 정의를 촉진하기 위해 설립된 국제네트워크)의 디렉터에 취임했다.

 

국제형사재판소 설립을 위해, 재판소에 젠더 관점이 반영되도록 제언하는 활동을 한 이후에는 유엔에 파견되어 아프가니스탄과 이란, 시리아, 수단·다르푸르, 미얀마 등에 살면서 여성인권 옹호 활동을 계속해왔다. “아프가니스탄은 그 후 탈리반 정권으로 바뀌어, 당시 관여했던 여성들은 또다시 곤경에 처해 있습니다.”

 

현재는 유엔의 평화·인도 분야의 ‘젠더 어드바이저’(gender advisor)를 하며,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를 입은 세계 각지에서 여성과 어린이 돌봄을 위한 조언을 한다.

 

“긴급 시에는 헬리콥터에 뛰어올라 공습 현장에 가기도 합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나라에 다녔습니다. 유엔 인도적 지원의 정의를 ‘우선 여성과 어린이의 수요에 대해 제공해야 하는 것’으로 바꿔왔습니다.”

 

한편, 인다이 씨는 “이 나라 저 나라를 다니며 여성 예술가가 만드는 로컬한 소품과 그림 등을 사는 것이 취미”였다며, 귀여운 피어싱과 펜던트도 그중 하나라고 말했다. 사진 촬영을 요청하자 “갖고 왔죠.” 하면서 여성국제전범법정 기념 티셔츠로 갈아입고 다시 등장했다.

 

“여성국제전범법정의 막을 내린 채로 둘 것이 아니라, 전 세계가 무력분쟁에 직면한 지금, 법정의 경험이 세계에 공헌할 수 있지 않을까요?” [통역: 츠지이 미호] [한국어 번역: 고주영]

 

-〈일다〉와 제휴 관계인 일본의 페미니즘 언론 〈페민〉(women's democratic journal) 기사를 번역, 편집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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