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가 자라는 밭 사이에 관리기로 줄을 만들었다. 참외 모종과 수박 모종과 호박 모종을 심을 자리만 가늘게 경운을 했다. 작두콩을 심은 밭은 예초기로 낮게 예초만 했다. 작두콩 모종 심을 자리만 호미로 구멍을 내고 작두콩 모종을 심었다. 노지에서 맞춤하게 자란 모종을 보리가 자라는 사이에 적당한 간격으로 정식했다.
올해 밤 기온이 낮아 정식한 모종이 잘 자라지 않았는데, 아직 자라고 있는 보리가 찬바람을 막아주고 미기후를 만들어 주어 밤이 포근했나보다. 참외 모종이 튼실하게 잘 자라고 있다. 모종이 자리를 잡고 줄기를 사방으로 뻗어나갈 즈음이면, 남겨두었던 보리를 베어 눕혀 멀칭 재료로 사용한다. 그러면 참외나 수박은 풀덮개가 덮인 밭을 기어 자란다. 농사 시작부터 하고 싶었던 방식인데 이제야 시도해 본다. 나름 잘 그려진 그림 한 점 완성.
껍질째 먹는 맛난 토종 먹골참외, 왜 사라져갈까
보리 사이에 정식된 모종은 토종 먹골참외, 토종 작두콩, 토종 호박 등이다. 씨앗을 사서 심는 작물도 있으나 씨앗값이 비싸서 가급적 사서 심지 않으려 한다.
토종 먹골참외는 8년째 씨앗을 채종하여 심고 있다. 토종이 왜 사라져 가는지 알게 된다. 토종 먹골참외는 껍질이 얇고 부드러워 껍질째 먹을 수 있는 참외다. 단맛도 좋아 요즘의 참외 맛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하지만 쉽게 무르고 상해서 유통에는 어려움이 많겠다. 단단하고 유통 중에도 상하지 않는 참외가 시장성이 좋은 참외일거란 짐작을 얼추 해 본다. 단맛이 최고로 들었을 때 수확을 하면 맛있는 참외를 먹을 순 있겠지만 시장에 내다 팔기는 어려울 것이고, 시장에 팔려고 조금 일찍 수확하면 세상 맛없는 참외를 수확하는 경험을 할 것이다.
토종이라서 더 잘 적응하거나 더 맛있지는 않지만, 다양한 작물을 심는다면 잘 적응하는 것과 그렇지 못한 작물이 있고, 결국 살아남는 작물이 있을 것이다.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말은 투자에서만 적용되지 않는다.
지구를 살리는 탄소저장농법 지원하지 않는 국가
몇 해 전 〈대지에 입맞춤을〉(Kiss the Ground, 조슈아 티켈, 리베카 해럴 티켈 감독, 넷플릭스, 2020)이란 다큐멘터리를 언니들과 함께 보았다. 토양의 탄소저장 능력에 주목하여 기후온난화 문제를 해결할 대안으로 재생농업을 말하는 다큐다. 영화를 보고서 한 농민이 말했다. 정부나 지자체가 무경운(no-tillage, 땅을 갈지 않는 농법) 트랙터를 만들어 지원사업으로 보조해 주면, 콩농사와 보리농사는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우리에겐 무경운 트랙터라는 말조차 생소하다. 아직은 밭을 갈고 비료를 뿌리고 씨를 뿌리는 순서가 농사의 기본 매뉴얼이다. 생각해보니 무경운 트랙터를 만들어 내지 않을 것 같다. 무 경운 트랙터를 잘 만들어 많이 팔린다한들, 무경운 농법이라서 제한되는 여러 자재들이 안 팔릴 테니 자본가의 계산상으로는 결국 이익이 나지 않는 산업인 것이다.
모든 정부의 정책이 관행농업을 지향하는 방식이다. 비료를 많이 쓰면, 농약을 많이 쓰면, 비닐을 많이 사용하면, 지원금이 늘어나는 방식이다. 비료를 사용하지 않으면, 농약을 사용하지 않으면, 비닐을 사용하지 않으면, 그 어떤 정책자금도 지원되지 않는다. 돈이 되지 않으니 개발도, 연구도, 상품으로 출시도 되지 않는다. 친환경적이고 지속가능한 농사를 위한 자재나 농기구 개발은 하지 않는다.
무경운이 탄소를 저장하는 지속가능한 농법이라는데 동의하는 이가 늘어나고 있지만, 무경운 농법을 자신의 농법으로 받아들여 실천하는 데는 여러 가지 한계가 있다. 땅을 살리고 환경을 생각하는 생태농업을 지향하다가는 땅은 살아나고 건강한 먹거리 생산될지 모르나 농민의 몸은 망가지고 생계는 어려워져 지속가능성을 담보할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이럴 때일수록 정책적으로 무경운 농법이라던가 탄소저장농법에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하는데 말이다.
가을 즈음, 점검차 방문한 도청 공무원이 ‘밭도 갈지 않고, 농사하는 밭이 맞느냐’ 질문했다고 한다. 아직 무경운 농법은 있을 수 없는 농법이었다. 그들 눈엔 그저 휴경지였다.
무경운 농지에 대해서는 공익직불금이 지급되지 않는 사례도 들었다. 현장 공무원들이 판단하기에 경운하지 않고 비닐이 씌워지지 않고, 농작물잔사나 풀들이 덮여 있으면 휴경이라고 판단한다. 읍 면사무소에는 경운하지 않는 농지에 대해서는 공익직불금 신청을 하지 말라는 안내문이 붙어있었다고 한다.
우리 여성농민들은 기후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지속가능한 농법이 연구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확실한 이 방법에 모두들 눈을 감는다. 무경운 농법이 어떻게 생산량을 높일 수 있는지, 고령화되는 농촌 현실을 반영하여 노동력 절감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 영농자재비 구입 비용을 낮춰 농가 소득에 실질적인 영향을 어떻게 줄 것인지 등. 다각적인 연구와 검토를 한다면 불가능한 일이 분명코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언제까지 눈감고 귀 닫고 기후재난 시대를 살 수 있을지 의문이다.
에어컨 24시간 풀 가동. 최근 이야기다. 한 달 동안 밤잠을 설치며 에어컨을 끄고 자기도 해 보았지만,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어 아예 켜놓고 선풍기를 돌리고 겨우 잠을 청한다. 30도를 넘는 폭염과 25도 이하로 떨어지지 않는 열대야가 한 달은 계속되는 듯하다. 아침 일찍 조금 그리고 오후 늦게 조금씩 밭일을 하고 있다. 그마저도 요 며칠은 힘에 부쳐 아침이나 저녁에 한 번만 밭으로 간다.
하우스에선 한 시간 정도만 일하면 땀이 비 오듯 흐르고 현기증이 나기도 해서, 이러다 죽는 건 아닌가 싶다. 분명 살자고 하는 일인데 곧 죽을 지경이다. 노지 밭이라고 상황이 나은 건 아니다. 그늘도 없고 바람이 불지 않는 날이면 숨이 턱턱 막힌다. 분명 작년까지는 이 정도는 아니었다. 처서가 지나고 8월 15일이 지나 20일 즈음이 되면 뜨거웠던 햇빛도 조금 누그러지면서 ‘역시 절기는 속일 수 없다’는 말을 하곤 했는데, 지금은 다르다. 6월 중순 이후 시작된 장마는 한 달 이상 비를 내리게 하더니, 장맛비가 그치고는 한 달 동안 폭염과 열대야다.
극단을 달리는 기후는 우리를 그리고 전 세계를 이 자본주의 시스템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듯하다. 폭염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더위만 문제인 듯 보인다. 하지만 날씨는 비가 내릴 때는 폭우를 들이붓고 추울 때는 극한의 추위를 보여준다.
작년부터 모종이 이상하다고 느꼈다. 노지에서 잘 자라주던 모종이 좀처럼 자라지 않았다. 그나마 싹을 틔우고 자라는 것도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밭으로 나가기에는 너무 부실해서 부랴부랴 하우스에 모종을 냈다. 늦게나마 조금 모종을 내고 겨우 조금씩 수박농사와 참외농사를 이어갈 수 있었다.
올해는 정도가 더 심하였다. 비닐하우스가 있었으므로 느긋하게 모종을 냈다. 하우스가 있으니 좀 더 일찍 모종을 내어도 되지만, 어차피 밭에 나가면 지온이 오르지 않는 한 자라기는 어려우므로 충분히 지온이 오르는 시기를 잘 맞춰 정식하기로 했다. 그런데 웬걸, 보통은 마당에서도 잘 자라던 모종이 올해는 하우스에서도 잘 자라지 못했다. 한 달이 채 걸리지 않고 밭에 정식할 수 있으리라는 예상을 깨고, 한 달 보름이 지나도록 모종은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수박 모종을 정식하면서 토종수박 교실을 진행해 보려던 계획은 자꾸만 뒤로 밀렸다. 결국 모종을 한 달 보름 이상 키워 밭에 정식하였다.
끝이 아니었다. 정식을 하고 한 달. 몸살을 이겨내고 완벽 적응하여 폭풍 성장할 준비를 마치는 시기이다. 어미 순을 잘라내고 아들 순 두 개를 잘 펴준다. 풀을 뽑아주고 수박이나 참외가 잎을 크게 키워 광합성을 충분히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러고 나면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린다. 작렬하는 태양에너지를 온몸으로 받아 익어간다. 달달한 향기를 풍기면 주변의 벌레나 짐승들을 유혹하기도 한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도록 모종 상태 그대로였다. 그 사이 풀은 무성하게 잘도 자랐건만 내 수박은 아직 제자리 걸음이다. 오히려 줄어든 것 같기도 했다.
지속가능한 삶, 나 혼자 힘으로는 안 된다
길지 않은 내 농민 경력에, 해를 거듭할수록 ‘어떻게 살 것인가?’를 더 빈번히 더 심도깊게 고민하게 된다. 농민이라서 문제일까? 농사를 짓지 않고 살면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조금 더 환경적인 농사법을 고민해봐야 하는 것일까? 이보다 더 잘 할 수 있을까?
작년에 비닐하우스를 시작하면서 적지 않은 죄책감에 시달린 게 사실이다. 그 동안 자연재배 농민이라고 자부하면서 무투입 농사를 짓겠노라고 선언하고 실천해왔는데, 이런 저런 구실을 만들어 하우스농사를 시작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나 혼자 힘으로는 어렵다 느낀다. 산업 체계가 바뀌지 않고서는, 체제 전환을 하지 않고서는 우리의 삶이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절감한다. 화석연료에 기반한 산업 말고, 재생 가능한 에너지를 사용하는 지속가능한 산업을 함께 고민해야 할 때이다.
[필자 소개] 김연주. 농사짓는 부모님을 보고 자라면서 절대 갖지 않아야 하는 직업군 중 1위였던 농민이 이제 나의 직업이 되었다. 자연농과 쿠바식 틀밭, GMO 문제 등을 만나면서 내 입에 넣을 것만이라도 내 손으로 생산해야겠다는 큰 야망을 가지고 농민이 되었고, 기왕지사 농민이 될 바에야 여성농민 운동도 함께 해보자고 맘먹고 열심히 살고 있다. 해를 거듭할수록 농민으로 산다는 게 무엇인지 더 어렵고 힘들지만, 밭에 있으면 스스로 힐링이 됨을 느끼며 오늘 하루도 견뎌 살아내고 있다.
-‘기후위기 체감하는 여성 농부들의 메시지’ 기록은 아름다운재단(beautifulfund.org) 지원으로 제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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