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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lt;페미니스트 저널 일다&gt;</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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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낯선 사람 조심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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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낯선 사람 조심해.”</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어린 시절부터 수도 없이 들었던 말이다.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공익광고에서도 어린이와 여성에게 반복적으로 전달되는 안전 교육은 늘 비슷했다. 낯선 사람을 따라가지 말 것, 친절을 쉽게 믿지 말 것, 위험해 보이면 피할 것. 위험은 바깥에 있고, 안전은 스스로를 잘 방어하는 데 있다는 메시지였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하지만 나는 점점 궁금해졌다. 정말 그렇게 경계하는 것이 성폭력의 피해를 막는 데 도움이 되는가. 그리고 우리를 안전하지 않게 만드는 요인이 무엇이길래, 왜 안전을 개인의 경계 능력에 맡기게 되었는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한국 사회의 성폭력 통계를 보면, 많은 경우 가해자는 ‘낯선 사람’이 아니라 ‘아는 사람’이다. 친구, 선배, 연인, 가족, 직장 동료처럼 이미 관계 안에 있는 사람들이다. 오히려 가까운 관계 안에서 발생한 성범죄에서 피해자는 더 오래 침묵하고, 더 많이 스스로를 의심하며, 신고를 망설인다. 그럼에도 사회는 여전히 어린이와 여성에게 “조심했어야지”라는 메시지를 반복한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0928142330.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최근 일본 여행 중에 성희롱, 성추행을 겪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지금도 그 충격의 여파가 남아 있다. 이 사진은 비 오는 날 먹구름 끼어 어두운 하늘에 무지개가 뜨는 걸 보고 찍은 장면이다. [사진-이은선 제공]</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최근 일본 여행 중 성희롱과 성추행을 겪었다. 언어교환과 문화교류를 목적으로 하는 플랫폼을 통해 사람을 만났고, 나는 그것이 비교적 안전한 방식이라고 믿고 있었다. 실제로 주변 친구들 중에는 그런 플랫폼을 통해 오래 이어지는 우정을 만든 경우도 있었다. 나 역시 SNS를 통해 관심사를 나누며 관계를 이어온 사람들이 많은데, 여행을 좋아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 이야기하는 일을 좋아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처음 몇 시간 동안 우리는 서로의 관심사와 한일의 문화에 대해 평범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상대는 나에게 성적인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우리가 만난 통로가 언어교환 플랫폼이었기 때문에 나는 더 당황했다. 이후에는 상대가 그런 상황에서 불편해하고 당황하는 내 반응 자체를 즐기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 더욱 모욕감과 분노를 느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하지만, 성폭력을 겪고서 가장 먼저 든 감정은 공포와 모욕감만이 아니었다. “내가 낯선 사람을 믿어서 이런 일이 생긴 건가?”라는 자책이었다. 왜 그런 자리에 나갔는지, 왜 친절을 경계하지 못했는지, 왜 조금 더 의심하지 않았는지 스스로를 계속 검열하게 되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돌이켜보면 나는 연인이나 친구와 함께 여행하며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을 때는 비슷한 경험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혼자 여행하는 여성이었을 때 처음 그런 일을 겪었다. 그래서 더 쉽게 ‘내가 더 조심했어야 했나’라는 생각 속으로 빠져들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성폭력 피해를 경험한 사람들은 종종 가해자보다 먼저 자기 자신을 심문하게 된다. “왜 만났어?”, “왜 그때 바로 도망가지 못했어?” 사회는 가해자의 행동보다 피해자의 선택을 더 세세하게 들여다본다. 그렇게 안전은 어느새 개인의 책임이 된다. 피해를 막지 못한 사람은 충분히 조심하지 못한 사람처럼 여겨진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러나 1366(여성긴급전화) 상담을 받으며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문제는 내가 타인을 믿은 것이 아니었다. 문제는 상대의 가해 행위였다. 누군가를 신뢰하고 대화를 나누고 문화를 교류하고 새로운 관계를 기대하는 일은 잘못이 아니다. 그런데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면, 사람들은 쉽게 피해자의 선택과 판단을 검열한다. 결국 피해자는 자기 자신을 의심하며 살아가게 된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0928451616.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늘 타인을 의심하고 경계하고 위험을 예측하며 살아남고자 하면, 개인은 점점 더 고립된다. 사진은 이번 일본 여행 중에 한 비건 식당에서 만난 독일인 여행자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서로 다이어리를 교환해서 적은 내용이다. (사진-이은선 제공)</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물론, 위험은 언제나 존재한다. 경계가 필요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지금의 ‘안전’ 담론이 지나치게 개인의 방어 능력에 의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회는 약자에게 스스로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타인을 경계하고, 위험을 예측하며 살아남으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그렇게만 살아가는 삶은 사람을 고립시킨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나는 살아오며 낯선 사람에게 도움을 받은 경험도 많이 있다. 이번 여행도 마찬가지였다. 길을 잃었을 때 친절하게 안내해준 사람, 비건 식당에서 만난 옆자리 여행자와 각자의 이야기를 나눈 경험, 우울에 대한 글쓰기를 함께하며 서로의 마음을 들어주던 사람들, 처음 만난 어린이와 함께 스티커를 붙이며 웃었던 순간들. 우리는 낯선 존재들의 친절과 환대 속에서 살아간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만약 “낯선 사람은 위험하다”는 말만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인다면 결국 환대도, 기회도, 모험도 없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누구도 쉽게 믿지 못하고, 새로운 관계를 시도하지 못하고, 도움을 요청하지도 못하는 사회. 그것이 안전한 사회일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장애인 이동권 운동에서 종종 말하듯, 이동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장애인 개인의 몸/장애가 아니라 비장애인 중심의 사회 설계다. 안전 역시 마찬가지다. 안전은 개인이 얼마나 완벽하게 경계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성폭력을 가능하게 만드는 문화와 구조, 피해자에게 책임을 돌리는 분위기, 신고 이후에도 안전하지 않은 사회가 함께 바뀌어야 한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092916569.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일본 여행 중에 찍은 사진. “연결이 있는 사회로”라고 적혀 있다. [사진-이은선 제공]</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나는 아직도 이번 여행의 기억 때문에 몸이 갑자기 얼어붙는 순간이 있다. 사람을 만나는 일이 이전처럼 편하지 않다. 그러나 나는 누군가를 신뢰하고 싶어 하는 마음까지 잃고 싶지는 않다. 서로에게 안전한 존재가 되고 싶다는 마음, 낯선 사람의 친절을 두려움으로만 기억하고 싶지 않은 마음 역시 여전히 남아 있다. 우리는 타인에게서 상처를 입기도 하지만, 동시에 누군가의 환대와 다정함 속에서 살아갈 힘을 얻기도 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 글은 “낯선 사람도 안전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왜 우리는 성폭력 피해 경험 이후 자기 자신을 먼저 의심하게 되는지, 왜 안전의 책임이 개인에게 돌아가는지, 그리고 타인과 연결되려는 마음마저 죄책감이 되어버리는지, 안전한 사회란 어떤 사회인지 생각해보길 바라는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c935ba;">[필자 소개] 이은선</span>. 고등학생 시기 학칙 개정과 학생인권조례 제정 활동을 하며 청소년 인권 운동을 만났다. 청소년이 학교와 사회에서 그저 버티는 존재가 아니라, 부당한 순간에 목소리를 내고 변화를 만들어가는 시민이 될 수 있기를 고민하며 활동해 왔다. 현재 대학원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폭력에 반대하며 비건을 실천하고 있다. 『우리는 청소년-시민입니다』, 『노키즈존 한국 사회』 등을 공저했고 청소년의 경험과 권리, 젠더화된 규범에 대해 글을 써왔다. 주변 존재들에 물들고, 물들이는 것을 좋아한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6-09 10:26:00</pubDate>
	   <section>sc1</section>
	   <section_k><![CDATA[사회]]></section_k>
	   <section2><![CDATA[성폭력]]></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이은선)]]></author>
	   <category><![CDATA[성폭력]]></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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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Missing Some Things in the Place that I Left]]></title>
       <link>http://www.ildaro.com/10473</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color: #3366ff; font-family: georgia, palatino;">Editor’s note: Vacation, business travel, migrant labor, language study, study abroad, international marriage, immigration—many of us have such experiences of crossing national borders, and there are many immigrants living in our country. Ilda examines the emigrant sensibility we will need in order to live equally and peacefully in the age of globalization. This series is supported by the Korea Press Foundation’s Press Promotion Fund.</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Remembering the Country of Forever Spring</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 one year trip around the world. That was my plan when I left South Korea in the spring of 2008. However, when I actually returned in 2014, in those six years I had visited less than six countrie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efore leaving South Korea, I used to work as an editor at a publishing company, and now that I have returned, I also work as an editor. In this past entire year in South Korea, I have not only been struggling to catch up on everything that has changed in the last six years when I was not here, but I’m also struggling to accept everything that is still the same, even though six years have passed.</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60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0805084494.jpg" alt="" width="60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On the way back home from the Café La Luna when I was living in Xela, Guatemala. ©Luna</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r />As I look back, when I was outside of this country, I realize that I very badly missed some things in South Korea. But now I do miss some things from the place that I left. Recently, someone told m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 worst thing is to miss somewhere else while living her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is person, now in her late forties, was born in South Korea, spent her teens and twenties in Argentina, and came back to South Korea in her thirties. She said that it took her five years to re-adapt herself to South Korea. At the early stages of when she had returned to South Korea, she wanted to go back to Argentina. She tried to find a way to do so but unfortunately it was not possible, so she eventually decided to settle down in South Korea. This was five years after from when she had come back.</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nyway, South Korea was a good place to live,” she finally stated.</span></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 wondered when I would be able to say those words.</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Xela Greeted Me with a Story Prepared Especially for My Futur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One year after I left, I stayed at a village bordering a huge lake, in Atitlan, Guatemala. One fellow traveler, from Belgium, looked like a typical hippie who seemed to simply be on a short excursion with just a light backpack. Nevertheless, when opened, his backpack exploded like magic with a number of items like portable pots, a burner, a bag of flour, a rolled mat, etc. Every day, he ate Indian Chapati bread that he made by himself, and each time he made the bread he joyously shouted “Chapati! Chapati!” I was surprised to find out that he had been traveling for eight years and I asked him how could that be possibl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t’s easy to travel for eight years. It’s simpl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fter some time passed, I ended up fully understanding that statement, which I had not understood at that moment. A few weeks after my stay at Atitlan, I arrived in Xela, the city that was waiting for me with a story prepared especially for my future. Later, that place became a space that I called home for more than four year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My trip, which started from San Francisco, USA—and felt like a split second—took over one year until I was about to leave North America. It took such a long time not only because of the huge size of the U.S. and Canadian territory but also because of an important factor which I had not counted on when scheduling: the people whom I would meet on the road.</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60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0805335980.jpg" alt="" width="60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My Neighbors,” foreign friends I met in Xela. ©Luna</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r />Xela is the second largest city in Guatemala, Central America, but for South Koreans it looks like a very small city. Even though the city’s official name is Quetzaltenango, almost everyone call it Xela, which is the Mayan name of the city before Spanish colonization. As the city is located 2,330 meters above the sea level, its weather is cool, however, one should not expect a Himalayan landscape. The city has a McDonald’s and a Wal-Mart; people in this city enjoy TV dramas just like the people in Mexico or other Spanish language countries; and the majority of the younger generation listens to Techno and hip-hop music via smart phone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On the other side, Guatemala continues its traditional culture which can be seen in two distinctive parts: Mayan culture before and after the Spanish colonization and catholic culture became implanted through the Spanish colonizers. Like other Central and South American countries, Guatemala was a Spanish colony for three hundred years until 1821, so the colonial culture which came across the ocean, implanted itself, and wiped out the Mayan culture which had strongly influenced not only the indigenous people’s collective unconsciousness but also their affective roots for a long tim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Many visitors are fascinated by the layouts of the streets in this city where the colonial style of the division of the city copied the configurations of old cities in Europe. So was I. There are dark, winding, and narrow paths like a maze; lights from small shops located at the corners; and a stoned ground not made for cars or humans but for horses passing by.</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 main reason why I ended up staying in Xela for over one month was to take a Spanish language class. That was not only because most of the countries I travelled to were Spanish language countries in Central and South America, but also because I needed to learn Spanish to travel better. As Xela is a place where people use an appropriate speaking pace and have clear pronunciation, there are many foreigners who stay there in order to take Spanish language course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re are many cases in which travelers stayed there for at least two or three weeks, some staying for one more months because they are fascinated by the upbeat atmosphere, and then others even ending up staying for over one year. A number of communities, created by foreigners who left their homes and temporarily stayed there, unofficially and publicly became part of the culture in Xela.</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t the Community House where Foreigners Live Together</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China! Chinita!”</span></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People in Xela called all Asians Chino or China which means Chinese. Even though I lived there for over four years, this name calling in streets still made me uncomfortable. However, it could considered as acceptable since, in South Korea, people used to shout “American!” unconditionally whenever they saw foreigners who did not look Asian, even nowadays there are still a number of times when people look furtively and point a finger at foreigners.</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60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0806104160.jpg" alt="" width="60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One windy morning at the window of where “I used to live” ©Luna</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r />The atmosphere of the place where I lived in Xela was different from the one outside in the street. It was a sort of humble and rural community house where foreigners lived together, that had eight individual rooms, a spacious front yard, bathroom, etc, that people shared.</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re are various reasons for young people in their twenties or thirties, mostly from North America and Europe, to come to Xela: people come in order to have a long vacation, learn Spanish, or do volunteering work for different kinds of associations; some people come to work or settle down after wandering to many places; others become fascinated by Xela and feel that they can live longer there; and others, still, come to Xela because they could not find jobs in their own countries and settle here because of the low-cost of living.</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 spent enough time in Xela and Guatemala that I can generalize what I experienced there. However, the time that I spent there is the reason why I feel it difficult to generalize my experiences. That is why I do not want to compare a genuine story that one has to another genuine story such as that of Richard’s, an American in his sixties, who stayed in the house with me for a fairly long time, who had needed to leave his own country, and what he really wanted to attain from Guatemala, because I was deeply part of other people’s stories too.</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So, after coming back from there with a certain outlook and a number of incomparable stories, I still sometimes feel so touched and moved to tears that I cannot answer the questions whenever I am asked about stories from Guatemala.</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Cooking Became a Way of Expressing Myself</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t is a common expression to call the weather in Guatemala a forever spring. Although the daytime sunshine is strong enough to dry laundry hung out in early morning then folded right after lunch, one does not sweat, unless one runs. Even though at dawn or at night the weather is chilly enough that one should wear a layer of sweaters, there is also no desperate need for heating appliances and no snow. The annual temperature range has no severe gaps and the climate has only two separate seasons in one year: six months of rainy season and six months of dry season. The all-year round cool weather was the other reason that made me stay in Xela longer.</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60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0806458514.jpg" alt="" width="60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The Xela skateboard park with a graffiti of Quetzal, a Mayan bird. ©Luna</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r />The Native people in Xela were pretty kind to me as a single Asian woman. Because foreigners from English speaking countries or Europe had an easier time communicating with each other, this made me feel comparatively much closer to the Native peopl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Due to the fact that it was rare to see Asian people, especially Korean people, whenever I joined a group of foreigners they were unconditionally delighted stating that “our atmosphere is really international!” Interestingly, when I cooked to eat in the communal kitchen, all of my neighbors wanted to taste the food—even if just a fried vegetable—and were eager to find out what kind of healthy food diet an Asian person followed.</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Whether [their expectation] made me feel uncomfortable in the kitchen or not, I didn’t show it because cooking gave me such energy. By handling various types of vegetables bought from the market, I felt like the energy of these items transmitted to my entire body via my hands. In the course of washing, cutting, frying, and mixing them, I was able to not only disperse unnecessary thoughts and meditate silently, but also to gain newly found courage and even come up with new ideas or solutions to problem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Whenever I cooked something copiously seasoned without measure—gauging only with my senses—then it turned out to be delicious, and I was extremely proud of myself as if I had succeeded a laboratory experiment. Cooking was kind of a way of expressing myself as if I could communicate fully under the condition of language. I told the people in my house that if I mentioned to my family and friends in South Korea that I had cooked here, they wouldn’t believe me. The people laughed at me and said they did not believe what I just told them. <span style="color: #932ed0;">[Translated by Jieun Lee]</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Original Article: <a href="http://ildaro.com/7265" target="_blank">http://ildaro.com/7265</a> Published: October 20, 2015</span></p>]]></description>
       <pubDate>2026-06-08 16:03:00</pubDate>
	   <section>sc100</section>
	   <section_k><![CDATA[English Article]]></section_k>
	   <section2><![CDATA[]]></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Luna)]]></author>
	   <category><![CDATA[English Article]]></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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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여성의 섹슈얼리티 착취한 국가폭력의 장소에 가다]]></title>
       <link>http://www.ildaro.com/10472</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경기도 동두천 소요산 초입에는 낡은 2층짜리 건물이 울타리에 둘러싸인 채 방치되어 있다. 지금은 폐허가 된 이 건물은, 1973년부터 1996년까지 기지촌의 성병관리소로 사용된 장소다. 미군을 상대하는 기지촌 여성들에게 성병 검진 의무를 부과하고, 검진증이 없거나 성병 검사에서 양성 판정을 받은 이들을 강제로 수용해 치료 명목으로 감금했던 국가폭력의 현장.</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0718252341.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동두천 소요산 초입에 위치한 옛 성병관리소(몽키하우스)의 현재 모습. 2026년 5월 23일 두레방, 역사문제연구소, 반성매매인권행동 이룸이 공동 주최한 〈동두천 성병관리소×기지촌 빼뻘 답사〉 중에서. ⓒ일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동두천시는 이 건물을 철거하고 일대를 관광지로 개발하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여성단체와 학계, 그리고 국제사회는 여성에 대한 심각한 인권침해가 발생한 역사적 장소를 철거해선 안 된다며 반대한다. 비극적인 기억이 망각되지 않도록 하고, 역사를 왜곡하거나 과거의 사실을 부인하려는 시도를 막기 위해서도 현장을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2024년 8월 12일에 발족한 ‘동두천 옛 성병관리소 철거 저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는 과거 미군 기지촌 성매매 여성들의 인권유린 현장인 ‘낙검자 수용소’(성병관리소) 건물을 없애버리지 말고 ‘국제인권평화기념관’ 등으로 활용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옛 성병관리소의 흔적을 보존하는 것은 현재의 우리 사회에 어떤 가치가 있는 일일까? 그 의미를 시민들과 함께 찾아가는 뜻 깊은 답사 프로그램이 지난 5월 23일에 개최됐다. 두레방, 역사문제연구소, 반성매매인권행동 이룸이 공동 주최한 〈동두천 성병관리소×기지촌 빼뻘 답사〉 현장을 따라가보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번 기지촌 답사는 “한국사회의 성매매 산업 해체를 지향함”과 동시에 “군사정책, 관광정책, 도시재개발에 의해 성매매 집결지가 없어져 버리는, 너무나 익숙하고 당연한 성매매 집결지 ‘소거’ 문법에 페미니즘 언어로 문제의식을 던져보고자” 한다고 기획 의도를 밝히고 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여성의 몸’을 외화 획득 수단으로 삼은 ‘국가폭력’의 장소</span></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철거하면 안 될 근대 유산…평화와 인권의 기억공간으로 거듭나야</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소요산 자락의 옛 성병관리소부터 보산동 일대, 상패동 공동묘지, 턱거리 마을, 빼뻘 마을을 방문했고, 이후 의정부역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간담회를 가졌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1973년부터 1996년까지 운영된 성병관리소는 기지촌 여성들에게 성병 의무검진, 강제수용, 치료 명목의 감금 등 인권침해가 자행된 공간으로 이른바 ‘낙검자 수용소’ 또는 ‘몽키하우스’로 불렸다. (관련 기사: “국가가 미군 상대 성매매 조장했다” <a href="https://ildaro.com/7136" target="_blank">https://ildaro.com/7136</a>)</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지완 역사문제연구소 활동가는 “이곳은 여성의 몸을 외화 획득의 수단으로 삼았던 국가폭력의 적나라한 증거”라며, 그 배경을 설명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1969년 닉슨 독트린으로 주한미군 감축이 추진되자, 위기를 느낀 박정희 정권은 미군 주둔을 유지하기 위해 ‘기지촌 정화 운동’을 대대적으로 실시”하며 “‘미군 위안시설’로 지정된 곳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성병을 관리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기지촌 여성들은 주 2회 정기적인 검진을 강요”당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여성들은 가슴에 명찰이나 보건증을 달고 다녀야 했고, 강제 수용된 여성들은 과다한 페니실린 투여로 인한 약물 쇼크로 사망하기도 했다. 당시 미군이 어디서 성병에 걸렸는지 지목만 하면, 여성들은 경찰의 토벌을 통해 정당한 검사 절차 없이 이곳으로 끌려와야 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지완 활동가는 “성병관리소 건물은 한국 정부가 단순히 ‘성매매를 묵인해왔다’는 차원을 넘어,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적극적으로 수단으로서 동원, 관리하고 착취해왔다는 걸 보여주는 건물”이라는 점도 짚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0718518084.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동두천 옛 성병관리소 철거 저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의 천막 농성이 634일째 진행되고 있었다. ⓒ일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이 건물 뒤편엔 ‘동두천 옛 성병관리소 철거 저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가 천막농성을 벌이고 있다. 탐방 날은 농성 634일째였다. 답사단은 최희신 공대위 집행위원장의 설명을 들으며 건물을 둘러보았다. 최 위원장에 따르면, 성병관리소의 부지는 약 2,300평으로 건물 자체의 바닥 평수는 약 100평인 2층 건물이다. 내부는 현재 들어갈 수 없지만, 1층에 진료실과 식당, 2층에는 창문에 도주를 막기 위한 쇠창살이 설치된 7개 수용 입원실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한 방엔 20명씩, 총 140명 수용 가능한 시설이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동두천시는 소요산 관광지 확대 개발을 이유로 부지를 매입하고 철거를 추진 중이다. 최희신 공대위 집행위원장은 “이 건물을 단순히 헐어버릴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평화/여성 인권 박물관으로 리모델링하여 아픈 역사를 증언하는 공간으로 남겨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윤금이 피살 사건: ‘민족주의’ 그늘에 가려진 여성 인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답사단은 동두천시 최대 규모의 미군 기지였던 캠프 케이시 정문 앞, 보산동 일대로 향했다. 기지촌 전성기였던 1960~1980년대, 동두천시 세수의 80%가 보산동 기지촌에서 나왔다고 할만큼 달러와 군사권력이 교차하는 지대였다. 미군을 대상으로 기지촌 경제가 성장하면서 여성들은 생계를 위해 이곳으로 흘러들어왔다. 국가는 이들을 (달러를 벌어들이는) ‘애국자’라 부르기도 했지만, 동시에 ‘기지촌 여자’로 낙인찍어 통제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또한 이곳 보산동은 1992년 10월 28일 세상을 경악케 한 ‘주한미군 케네스 마클 성폭력 살인 사건’(윤금이 사건)이 발생한 곳이다. 시신이 처참하게 훼손된 채 발견된 이 사건은 미군 범죄에 대한 대중의 분노를 촉발시켰고, 주한미군 범죄를 처리하는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의 개정을 요구하는 주권회복 운동으로 이어졌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0719141812.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보산동 일대에서 최우영 역사문제연구소 활동가가 ‘케네스 이병의 윤금이 씨 살해 사건’ (1992)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일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최우영 역사문제연구소 활동가는 “시민사회에서 ‘주한미군의 윤금이 씨 살해사건 공동대책위원회’가 조직되었고, 공대위는 재판 때마다 거의 수백에서 천명 가까이 되는 방청객을 조직했고, 매주 수요일 서울역에서 집회를 열었다”고 설명했다. 18개월 동안 투쟁이 계속되었고, 덕분에 케네스 마클은 구속기소돼 유죄 판결을 받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러나 페미니즘적 시각으로 보았을 때, 이 사건의 공론화 과정은 큰 한계를 지적 받는다. 최 활동가는 “사건이 ‘한국인에 대한 미국의 범죄’나 ‘민족적 자존심’의 문제로만 환원되면서, 정작 기지촌 안에서 일상적으로 자행되던 여성 인권 유린과 성폭력의 현실은 제대로 포착되지 못했다”는 점을 짚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기지촌 여성들은 미국인 뿐만 아니라 클럽 주인이라던가 지역 남성으로부터 일상적으로 착취와 폭력을 겪어왔는데, 그런 점에 대해서는 사실 논의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살아서는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여성이, 참혹한 죽음을 맞이한 뒤에야 비로소 ‘민족 주권’의 상징으로 소비되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최우영 활동가는 ‘윤금이 사건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의 문제는 ‘미군 주둔 아래 형성된 기지촌의 구조와 그 속에서 오랫동안 주변부로 밀려나 있었던 여성들의 존재를 어떤 시선으로 복원할 것인가’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고 강조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0719363152.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상패동 공동묘지 장소는 현재 무덤들을 모두 파묘하여 다른 지역으로 옮기고, 공원으로 조성 중이다. ⓒ일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파묘되고 지워진 죽음: 상패동 무연고 묘지와 광암동 턱거리마을</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동두천 상패동에 위치했던 공동묘지에는 1960~1970년대에 이곳으로 유입되어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죽어간 기지촌 여성들의 무덤이 가득했다고 한다. 이름 대신 숫자가 적힌 나무토막만이 꽂혀 있던 무덤들은 2020년대 들어 공원 조성사업이 추진되면서 모두 파묘되어 300km나 떨어진 경주의 추모공원으로 옮겨졌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유골들은 10년간 보존된 후 완전히 소멸될 예정인데, 지자체에는 무연고 기지촌 여성 묘지에 대한 자료조차 남아있지 않다. 자본과 개발 논리에 의해 이들의 존재 자체가 완벽히 ‘소거’되고 있는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어 방문한 광암동 턱거리마을(캠프 호비 앞)에서는 아직 남아있는 묘비가 하나 있었다. 1971년에 사망한 ‘순자 레이놀즈(Soon Ja Reynolds)’의 묘다. 묘비엔 “순자 레이놀즈. 내 사랑 평화롭게 쉬기를. 당신을 영원히 생각하고 있기에 우리의 마음은 하나로 합쳐져 있다오”라고 쓰여 있었다 한다. 탐방단은 미군 부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배기에 자리한 ‘박순자의 묘’ 옆에 꽃을 헌화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0720091231.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턱거리마을에 위치한 ‘박순자의 묘’는 미군 부대를 바라보고 있다. ⓒ일다</p></td></tr></tbody></table><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br />의정부 빼뻘마을과 ‘언니들’의 쉼터 두레방</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답사의 마지막 현장은 의정부 고산동의 ‘빼뻘마을’이었다. 캠프 스탠리 주변에 형성된 이곳은 배나무가 많아 ‘빼뻘’이기도 했지만, 기지촌 여성들 사이에서는 “한 번 발을 들이면 빼도 박도 못한다”는 자조 섞인 이름으로 불렸다. (참고 기사: ‘기지촌엔 도깨비가 산다’ 어떤 죽음들의 이야기 <a href="https://ildaro.com/9277" target="_blank">https://ildaro.com/9277</a>)</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과거 외부와 단절되다시피 했던 이 마을의 여성들을 위해 1986년 문혜림이 설립한 공동체가 바로 ‘두레방’(My Sister's Place)이다. 2022년 세상을 떠나 지금은 고인이 된 문혜림 활동가는 헤리엇 페이 핀치벡이라는 본명을 가진 미국인으로, ‘나라도 기지촌 여성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겠다’는 생각으로 기지촌 여성들이 쉴 수 있는 피난처, 두레방을 만들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번 빼뻘마을 답사는 전 두레방 공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과거 성병 검진이 이루어지던 보건소 건물을 임대해 평화와 치유의 공간으로 탈바꿈시켜 사용했었다. 이 건물은 전국에 유일하게 원형이 보존된 기지촌 성병 보건소다. 하지만 최근 의정부시는 ‘새뜰마을사업’이라는 도시재생 명목 하에 두레방 측에 퇴거를 통보했고, 두레방은 공간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0720297011.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기지촌 여성들을 위한 공동체 ‘두레방’이 상담소 및 쉼터 공간으로 사용했던, 의정부의 옛 기지촌 성병 보건소 건물은 ‘노후건축물의 안전성 검토를 위한 정밀안전진단 진행 중’이라는 현수막이 걸린 채 방치되어 있다. ⓒ일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정강실 두레방 활동가는 기지촌 여성들과 함께 해 온 활동경험을 공유했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두레방은 1980년대 당시 유기농 당근과 우리밀로 빵을 만들어 판매하는 자활 사업을 운영했고, 방치된 혼혈아동들을 위한 놀이방과 공부방을 열어 아이들을 돌보았다. 또한 약물 중독과 폭력에 시달리다 하루 한 끼조차 챙겨 먹지 못하는 여성들을 위해 매일 안부를 묻고 공동 식사를 제공했다. 식사를 통해 매일 안부를 챙기는 방식이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렇게 기지촌 여성과 연대자들의 역사적 장소 또한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다. ‘두레방 언니들’은 “이 공간이 후대가 알아야 하는 역사이자 다시 반복되지 않아야 하는 역사”라며 공간의 보존을 원하고 있다고, 두레방 활동가들은 전한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역사와 증거와 책임이 사라지는 ‘소거’에 맞선 기억운동</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답사를 마친 후 진행된 간담회에서는 이룸, 두레방, 역사문제연구소 활동가들과 참가자들이 모여 지워지는 역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개입할 것인지 논의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기용 반성매매인권행동 이룸 활동가는 청량리와 이태원 등 도시 중심부의 성매매 집결지에서 벌어지는 재개발과 ‘소거’의 과정을 공유했다. 거대한 자본과 재개발 앞에서 팻말 하나 남기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밀려나야 했던 무력감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특히 이태원의 경우, 과거 미군과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던 기지촌의 역사에서 현재는 트랜스젠더와 소규모 업소 여성들만이 남아있는 상태로, 재개발로 인해 이들마저 계속해서 쫓겨나고 있는 현실이라고 밝혔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활동가들은 또한 “공간을 여성주의적으로 기억한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를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구조를 드러내고 소거에 저항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0720483234.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빼뻘 마을 곳곳은 이미 거의 폐허 상태였다. ⓒ일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김은진 두레방 원장은 “기지촌 성매매가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 이주 여성들을 통해 똑같이 반복되고 있는 착취의 구조”임을 강조했다. 또한, 2022년 대법원이 기지촌 성매매가 국가 폭력임을 인정하는 역사적인 판결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피해자를 위한 제대로 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 제정은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한편, 답사단 참여자 한 명은 철거 위기에 놓인 공간들을 보며 “혈연적 유족이 없는 이 여성들을 위해 시민들과 활동가들이 그들의 유족이 되어 기억운동을 계승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김은진 원장은 “오늘날 우리는 성매매 산업의 해체를 이야기한다. 이는 분명 중요한 과제이며, 많은 여성주의 운동이 오랫동안 싸워온 영역이다. 그러나 이때 우리가 함께 고민해야 할 것은, 해체의 방식과 그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기억”이라고 말하며, 다음과 같은 과제를 남겼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현재 한국 사회에서 성매매 집결지와 기지촌은 종종 재개발을 통해 사라진다. 이 과정은 환경개선, 도시발전, 안전한 사회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그리고 그 공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이 과정에서 지워지는 것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다. 그곳에서 살아온 여성들의 역사, 국가와 사회가 가한 폭력, 그리고 우리가 져야 할 책임이 함께 사라진다. 깨끗하게 정비된 도시 속에서, 우리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아가게 된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6-07 16:15:00</pubDate>
	   <section>sc1</section>
	   <section_k><![CDATA[사회]]></section_k>
	   <section2><![CDATA[평화]]></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박주연)]]></author>
	   <category><![CDATA[평화]]></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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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행복해지기 위해 한국을 떠난 성소수자들]]></title>
       <link>http://www.ildaro.com/10471</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2013년 캐나다에서 결혼하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우리는 그냥 부부로 살고 싶었다. 우리가 원한 건 그것뿐이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그게 너무 어려웠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0519071363.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미국 캘리포니아주 웨스트 할리우드 프라이드 기간, 퍼레이드에 참여해 거리를 걷고 있는 아콘네 부부. [사진 제공-크리스]</p></td></tr></tbody></table><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우리는 그냥 부부로 살고 싶었을 뿐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막연하게 캐나다 이민을 생각했다. 결혼식을 올린 곳이기도 했고, 우리를 부부로 인정해준 나라이기도 했다. 토론토에는 외가 친척들도 많이 있다. 그들에게 우리의 결혼 사실은 숨겼지만, 아는 사람이 있으면 낯선 땅이 덜 무서울 것 같았다. 커밍아웃이 두려워 이민 대행사도 쓰지 않고 둘이 직접 이민 신청 서류를 준비했다. 하지만 그해 캐나다 온타리오 주정부는 이민 선발 정원(cap)이 이미 찼다며 서류를 검토도 하지 않은 채 돌려보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사실 미국 이민은 한동안 생각도 못 했었다. 동성혼이 연방 차원에서 전국적으로 합법화된 게 2015년이었고, 이민 심사가 더 까다롭기로 유명한 나라니까. 그런데 미국 고용주 없이도, 한국에 살면서 부부가 함께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는 제도—NIW(National Interest Waiver, 국가이익 면제)—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미국 이민 전문 대행사를 찾아 수속을 밟았다. 처음에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해외에서 혼인했지만 한국에서는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상태’라고만 말을 돌렸다. 그러다 막판에야 캐나다에서 결혼한 동성 부부라며 혼인증명서를 제출했다. 대행사 측 반응은 나의 예상과 달랐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증빙 서류를 받아줬다. 그 담담함이 오히려 낯설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0516013604.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성소수자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건넸던 교황 프란치스코를 추모하며 조기를 게양한 웨스트 할리우드. [사진 제공-크리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2018년 여름, 주한 미국대사관 영사 인터뷰 날. 깐깐하기로 소문난 한국계 미국인 영사가 우리를 호출했다. 유리판 너머로 학력, 경력, 추천서를 하나씩 확인하던 영사가 서류 사이에서 혼인증명서를 발견했다. 동성 부부라는 것을 알아챈 것 같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리고 물었다. “Do you have children?”(아이가 있나요?)</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나는 답했다. “No, not yet, but I hope so.”(아직은 없어요. 바라건대 언젠가는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우리를 부부로 봤기에 나온 질문이었다. 아이 교육을 위해 아내와 아이만 미국에 보내고 자신은 기러기로 남으려는 남편들은 심사에서 보류되기도 한다. 우리는 동성 부부였지만, 함께 이민하는 가족이었다. 30분 넘게 경직돼 있던 몸이 조금 풀렸다. 마지막에 영사가 무언가를 말했는데 긴장한 탓에 제대로 듣지 못했다. “Congratulations!”(축하합니다!)라고 했을 때야 믿어졌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한국 국적의 여성 부부로서 동시에 발급받은 미국 영주권. 그제야 실감이 났다. 우리의 관계가 제도 안에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을. 미국 정부는 캐나다 혼인증명서를 근거로 우리를 부부로 인정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그렇지 않았고, 결혼한 지 13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하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우리는 부부입니다’라는 말이 가벼워지는 곳</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한국에서 미국 영주권을 받은 후, 우리 부부는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천천히 뿌리내릴 곳을 찾았다. 미국 학교나 회사에 소속되는 조건 없이 영주권을 받았기에, 우리 스스로 정착할 동네를 고를 수 있었다. 그 자유는 우리가 어떤 환경에서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선택권이었다. 그래서 내가 유학했던 실리콘밸리 근처 샌프란시스코와 산호세 사이에서 한 달 살아 보고, 성소수자 친화적인 도시로 손꼽히는 샌디에고도 둘러본 끝에 결국 로스앤젤레스(LA) 카운티에 속하는 웨스트 할리우드에 정착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0516251182.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화사한 꽃들 너머로 무지개 플래그가 채색된 웨스트 할리우드 슈퍼마켓의 일상 풍경. [사진 제공-크리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미국에서 우리는 처음부터 부부로 시작했다. 도착하자마자 공동명의 은행 계좌를 열었다. 집도, 자동차도 함께 소유했다. 매년 부부 합산으로 세금 보고를 하고, 세금 공제도 부부로 받는다. 한국에서 사람들은 우리 관계를 모녀로 보기도 한다. 굳이 설명하지 않으면 그냥 그렇게 넘어간다. 미국에 살면서 “우리는 부부입니다”라는 한마디 말이 이렇게 가벼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우리가 거주지로 선택한 건물에는 입주민 절반 이상이 성소수자다. 아래층과 위층, 옆집에도 퀴어들이 살고 있다. 그곳에서 우리는 그저 반갑고 편한 이웃이다. 나는 영어도 잘 못하는 한국인이지만, 입주민 투표로 입주자대표회의 이사에 당선됐다. 이사 5명 중 4명이 여성 퀴어이고, 나머지 한 명은 발코니에 프라이드 깃발을 단 앨라이(지지자)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웨스트 할리우드는 굳이 6월(Pride Month)이 아니어도, 성소수자의 존재가 일상 속에 스며 있는 동네다. 무지개색 횡단보도와 상점 창가의 작은 표식들이 서로의 삶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신호처럼 보인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리고 해마다 초여름이 되면 웨스트 할리우드 전체가 하나의 축제장으로 변한다. 멀리 이동할 필요도 없다. 집 앞 길목에서 퍼레이드가 시작된다.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은 채 나는 Ari의 손을 잡고 그저 걷는다.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는 Lady Gaga의 〈Born This Way〉(“나는 잘 나가고 있어. 원래 이렇게 태어났으니까”라는 가사가 담긴 이 곡은 퀴어 공동체의 자긍심을 상징하는 노래가 되었다)가 우리 가슴을 벅차게 만든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0516443037.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웨스트 할리우드 도서관의 LGBTQ+ 섹션. 성소수자 관련 도서와 DVD가 공공의 공간에 빼곡히 진열되어 있다. [사진 제공-크리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행복해지기 위해 다른 나라로 이주해 사는 성소수자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한국에서는 퀴어문화축제 날이면 동성애 혐오 세력이 주변을 둘러싸고 맞불 집회를 열곤 한다. 그들은 자신들을 ‘사회를 지키는 거룩한 방파제’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방파제가 없어도, 웨스트 할리우드의 일상은 아무 문제 없이 흘러간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직장은 LA 북쪽의 미디어 도시, 버뱅크(Burbank)에 있었다. 수많은 할리우드 영화가 만들어지는 그곳에서, Ari와 나는 한국어 음성과 관련된 인공지능(AI) 프로젝트를 함께했다. 한국을 떠나 미국에서 살면서도, 우리의 작업은 한국어로 이루어졌다. 그것은 일상의 언어라기보다, 기계가 학습해야 할 언어에 가까웠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다행히 우리의 일상은 미국에서 이어졌다. 동료 중에도 퀴어가 여럿 있었다. 터키나 이란처럼 동성애를 금기시하는 나라를 떠나 미국에 정착해 결혼했다는 게이 커플도 있었다. 행복해지기 위해 다른 나라로 이주해 사는 성소수자들이 우리 주변에 있었다. 우리 역시 정체성을 숨기지 않고 부부로서 살아가기 위해 모국을 떠나온 사람들 중 하나였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0517042960.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퀴어 프라이드 기간을 맞아 성소수자 관련 어린이 동화책들이 진열된 버뱅크(LA 북쪽의 미디어 도시)의 한 서점 풍경. [사진 제공-크리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우리 부부는 웨스트 할리우드의 성소수자 친화적인 성당에 다니지만, 설날에 LA 코리아타운에 있는 한인 성당에 간 적이 있다. 떡국을 준다는 얘기에 혹해서. 우리 부부가 성당 옆 회합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낯익은 작은 한국이 눈앞에 펼쳐졌다. 재외동포 사회는 생각보다 폐쇄적이었다. 보수적인 종교관을 가진 부모 아래서 자란 성소수자 아이들이 한국만큼이나 힘든 가정생활을 하기도 한다. 한국 천주교회가 말하는 완고한 성가정—남자와 여자, 그리고 자녀로 이루어진 ‘정상가족’—의 언어는 미국 한인 성당에서도 그대로였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미국에서 만난 가톨릭 여성 퀴어 모임 ‘알파오메가’ 회원은 LA 남쪽 토런스(Torrance) 지역 한인 성당 청년 모임에서 캘리포니아주의 성소수자 차별 금지 정책을 비난하는 분위기에 실망했다고 했다. 재외동포 사회에서 성소수자를 지지하는 목소리는 쉬이 들리지 않는다. 한국의 보수 우익 청년들 못지않게, 미국 한인 청년들 중에도 성소수자에게 적대적인 이들이 있다. 그 분위기 속에서 고통받는 퀴어 청소년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 많은 한인 가톨릭 인구 중에 우리를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줄 사제와 수도자, 그리고 신자가 얼마나 있을까. 솔직히 기대하지 않는 쪽이 더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데도 한국은 쉽게 멀어지지 않았다. 나이 들어 가시는 부모도, 수십 년이 쌓인 관계들도 거기 있으니까.</span></p>]]></description>
       <pubDate>2026-06-05 19:13:00</pubDate>
	   <section>sc5</section>
	   <section_k><![CDATA[소수자 시선]]></section_k>
	   <section2><![CDATA[퀴어]]></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크리스)]]></author>
	   <category><![CDATA[퀴어]]></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6/2026060518086297.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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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탄핵 광장 이후 변화를 이어가려는 사람들에게]]></title>
       <link>http://www.ildaro.com/10470</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color: #3a5bc5; font-family: 바탕;">[연구 소개] 박지하의 논문 「<a href="https://skhu.dcollection.net/srch/srchDetail/200000964706" target="_blank"><span style="color: #3a5bc5;">윤석열 퇴진 광장 참여자 경험 연구-‘취약한’ 정체성들을 드러낸 발언자를 중심으로</span></a>」는 광장의 경험이 다양한 존재들의 정치적 주체화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퀴어-페미니즘적 관점에서 살펴본 연구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먼저, 탄핵 광장에서 자신의 ‘취약한’ 정체성을 가시화하는 발언자들을 주의 깊게 볼 수 있었던 건, 연구자 자신이 광장에서 긴 시간 적극적으로 참여했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저는 집회에서 사회자로, 자원봉사자로 때로는 그냥 참여자로 함께했습니다. 단상에 올라가 사람들 앞에서 발언하는 사람들을 연구했지만, 제가 단상에 올라가 발언을 한 적은 없어요. 그래서 더 발언자들의 용기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 같습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0455463549.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남태령 집회에서 사회 보는 박지하 씨의 모습. 탄핵 광장 경험을 토대로 박지하 씨는 논문 「<a href="https://skhu.dcollection.net/srch/srchDetail/200000964706" target="_blank">윤석열 퇴진 광장 참여자 경험 연구-‘취약한’ 정체성들을 드러낸 발언자를 중심으로</a>」를 썼다. [사진 제공-박지하]</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2024년 12월 6일, 국회 앞에서 열린 집회에서 가장 먼저 자신이 성소수자임을 밝히면서 발언한 분이 계셨는데요. 그때 제가 사전마당을 진행하고 있었고, 무대 옆에 있었거든요. 누군가가 여러 사람 앞에서 커밍아웃을 하는 순간을 내가 이렇게 보는구나, 저 사람은 어떻게 이 자리에서 저런 얘기를 할 수 있었을까 놀라웠죠.</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날 이후, 발언자분들이 주어진 짧은 시간에 굉장히 정돈된 말씀들을 구구절절 하시는 것을 보면서, ‘이 이야기는 발언자들이 가슴 속에 아주 오랫동안 품고 살아왔던 이야기였구나. 언제든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만 있다면, 그런 공간만 있다면 터져 나올 이야기였구나.’하는 생각을 했어요. 오랜 시간 고르고 다듬은 말 같았고요. 이 이야기들을 광장 안팎의 더 많은 사람들이 듣고 기억하기 위해서 뭐가 필요할까 고민 했던 게 이 논문의 시작이었습니다.”</span></p><p> </p><p><span style="color: #3a5bc5; 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두 번의 탄핵 광장, 무엇이 달랐나</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10년도 안 되어 대통령 둘이 탄핵되는 흥미로운 나라에 살고 있는데요. 과거 박근혜 퇴진 집회(2016~2017)를 윤석열 탄핵 광장과 비교했을 때, 촛불의 단일함 대신 이번엔 응원봉의 알록달록 다양한 색의 차이가 두드러지게 보이기도 하고, 이전보다 무지개 깃발이 많이 눈에 띄었던 것 같아요. 실제로 박근혜 퇴진 집회에서 여성혐오, 장애비하 발언이 반복되었고요. 두 집회 모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경험으로 비추어봤을 때 차이와 변화를 어떻게 느끼셨나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번 논문 인터뷰를 하면서 지난 박근혜 퇴진 집회 때 성소수자 당사자로서 무대에 올라 발언을 한 사람이 단 두 명이었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또 박근혜 퇴진 집회를 주관했던 단체가 투쟁 과정을 기록한 벽돌 두께의 백서 책에 ‘페미존’(Femi Zone, 여성·성소수자·장애인 등 소수자들이 혐오와 성추행 등으로부터 안전하게 발언하고 연대할 수 있도록 집회 참여자들이 만든 공간)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는 것도 처음 알았어요. 그래서 ‘누구를 중심으로 무엇에 집중하느냐’에 따라서 때로는 지워지고 무시되었던 목소리들을 명확히 남기고 싶었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민주주의가 이야기하는 평등한 사회는 정말로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를 광장이라는 시공간에 각인시키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 그래서 자신의 ‘취약한’ 정체성을 드러내는 발언이 계속 이어졌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평등 수칙’(평등한 집회를 위한 규칙)은 박근혜 퇴진 촛불 때도 있었어요. 하지만, 말씀하신 것처럼 여성혐오와 장애비하 발언을 막지 못했죠. 그런데 평등 수칙이 윤석열 탄핵 광장에서는 기능할 수 있었던 건, 어느 한 사람의 노력이 아니라 정말 우연과 필연이 얽히고 그야말로 우주의 기운이 모여서 가능했다는 생각이 문득 들더라고요. 단순히 집회를 주관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해야 된다는 의지만으로는 어려웠을 것 같아요. 문제되는 발언이 있다고 해서, 사회자가 마이크를 뺏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죠. 그 자리를 구성한 사람들이 ‘그래 저 말은 옳지 않아’라고 생각하고 그런 발언에 호응하지 않고, 문제의식을 가지고 주변과 온오프라인 상에서 적극적으로 토론하는 것까지 나아가야 가능한 일이라는 걸 이번 광장에서 느꼈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아마 지난 박근혜 퇴진 집회에서의 경험 덕분이겠죠. 우리가 현직 대통령을 끌어내리는 큰 변화를 만들었지만, 대통령 한 사람 바꾸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느꼈기 때문이죠. 그래서 ‘무엇이 새로워져야 정말로 일상의 민주주의가 가능할 것이냐’를 붙잡고 고민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또 이번 집회의 특징으로 2030 여성들이 주축이 되었다고 많이들 이야기하고 저도 매우 공감하는데요. 동시에 과거 중년남성 중심의 문화라고 여겨지는 운동권에 대한 거부― 이를테면 “깃발 내려라”, “조끼 벗어라” 이런 식으로 ‘이 자리에는 다른 정치적인 구호는 함께할 수 없다’는 식의 배제의 분위기와는 달랐다고 생각합니다. 비상계엄이라는 엄중한 시국에서 구분과 배제보다는 힘을 더 크게 모으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 남태령의 밤을 상징하는 문구인 ‘그렇구나. 알아두겠다’(당시 한 농민이 ‘우리 딸들 수고했다’ 응원하자, 한 퀴어 시민이 자신은 ‘딸이 아니다’라며 논바이너리 정체성을 설명했고, 이에 농민이 “그렇구나, 알아두겠다”라고 경청의 태도를 보인 것이 온라인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로 이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0449295944.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윤석열 퇴진 대구집회가 열린 동성로에서, 연구참여자 분이 찍어준 사진. 그이는 지역 언론 뉴스민에 〈결혼일기〉를 연재 중이다. [사진 제공-박지하]</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span><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인터뷰를 하기 위해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신 걸로 아는데,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나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제가 성격이 엄청 급한데, 사실 약속이 다 잡히고 내려간 게 아니었어요. 무작정 출발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부산 집회에서 ‘노래방 도우미’로 자신을 밝히고 무대에 섰던 분이 계신데요. 이 분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생각하고, 엑스(X)에서 이 분의 입장을 리트윗하신 분께 SNS로 DM을 보내면서 그냥 부산으로 출발했어요. 감사하게도 기다리다 보니 연락이 닿았고 당일 저녁에 바로 약속이 잡혔죠. 얼굴도 이름도 모르지만 온라인 공간에서 연결시켜주신 분께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을 이 인터뷰를 통해 드리고 싶네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또, 지역 집회에서 발언을 해주신 분들을 만나면서 느낀 건데, 일종의 애향심이라고 해야 할까요? 집회가 이루어지는 대구 동성로 일대를 쭉 같이 걸으며 투어를 시켜주신 분도 계시고, 전라도까지 왔으니 무얼 먹어야 한다며 제 식사를 같이 고민해주신 분도 계셨어요. 지역의 발언자들을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내가 이 지역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여기서 어떻게 잘 살아갈 것인지’ 고민하는 분들을 만난 것이 좋았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취약성’이라는 것을 보통은 감추거나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잖아요. 그런데, 광장 참여자들의 발언을 통해 공적 공간에 출현해 자신의 취약성을 나타내는 것이 곧 그들의 취약성을 만드는 구조에 저항하는 일임을 보여주는 논문이었는데요. 논문을 쓰면서 본인도 자신의 어떠한 ‘취약성’을 떠올리거나 그들을 통해 용기를 얻은 부분이 있나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문제의 원인을 약자들의 탓으로 돌리는 세상에서, 저항하는 사람들이 과도한 요구를 받는다고 생각해요. 이를테면 법이 약자를 보호하지 못하는데도 ‘법대로 해’부터 ‘불편을 만들지 마라’, ‘방해하지 마라’ 또 ‘세련되게 해라’, ‘친절하게 해라. 그래야 들어줄 수 있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그렇게 해서 바뀔 일이었으면 이미 세상이 바뀌었겠죠.</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저는 이번 광장에서 마치 가슴 속 삼천원(‘누구나 가슴속에 상처 하나쯤은 품고 살잖아요’라는 드라마 대사에서 파생된 인터넷 밈. 인생의 씁쓸한 상처 대신, 겨울철 길거리에서 간식을 사 먹을 수 있는 현금 3천원의 소소한 위로를 표현한 말)처럼 항상 자신을 설명하기 위한 말들을 만들고, 부정당한 자신이 여기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 이야기를 품고 살아온 사람들을 만나면서 느낀 것이 있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내가 가진 어떤 정체성에 대해서, 그리고 내가 살려고 또 세상을 바꾸려고 뭔가를 주장하는 일들에 대해서 남들이 모욕한다고 해도, 그것이 민망하고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라 그럼에도 당당해지는 것 역시 투쟁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또 그래야 지치지 않고 나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color: #3a5bc5; font-family: 바탕;">들어줄 사람이 있을 때 이야기는 시작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환대는 발언자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몫을 우리의 몫으로 전환한다’는 문장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들어줄 사람이 있어야 이야기는 시작될 수 있다’는 문장도요. 광장에서 참여자들의 상호작용도 있었지만, 발언자들의 발언 내용을 잘 이해하고 공감하며 사람들을 응집시키는 사회자와의 상호작용도 중요했을 것 같아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페미니즘 덕분에 가능했다? 하하. 비상계엄이라는 것이 사회의 위기이기도 하지만, 그 시기가 저 개인에게도 굉장히 위기였거든요. 사회에 대한 회의감도 컸고, 그러다 보니 먹고 사는 어려움이 더 크게 느껴졌고, 동시에 활동가로서는 잘 살고 있는 건가 하는 고민이 있었는데요. 그때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여성학 대학원에 진학한 상태였어요. 페미니즘을 공부하지 못했더라면, 그래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거나 나의 어떤 취약함 같은 것들을 다르게 해석하는 힘을 배우지 못했더라면, 그 시간을 잘 못 넘어섰을 것 같아요. 눈앞에 일어나는 현상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될지 몰라 혼란스러웠을 것 같고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페미니즘을 배우고 익히며, 상황마다 배제되는 사람들이 누군지 살피는 감각도 조금이나마 키울 수 있었고, 무엇보다 ‘나의 어려움이 제일 큰 어려움이다’라고 착각하지 않을 수 있었어요. 사사로운 일에 상처받기보다 큰 시선으로 볼 수 있는 데에도 도움이 많이 됐고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탄핵 광장에서 사회를 본 덕분에 발언자들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던 것도 영광이고, 광장 참여자들의 얼굴을 생생하게 앞에서 볼 수 있었던 것도 너무 좋은 기억이고요. 광장에서 시간을 보내며 회의감도 걷어낼 수 있었습니다. 변화가 딱 하나의 방법으로 온다고 주장할 수는 없고, ‘내가 맞네, 니가 틀리네’ 싸우는 것보다는 이 바위를 깨기 위해 뭐라도 하는 사람들끼리 때로는 비판도 물론 필요하겠지만 서로 많이 격려해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도 배웠습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0450036390.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윤석열 파면 선고가 된 날, 기쁜 마음으로 행진하는 모습. [사진 제공-박지하]</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span><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소수자, 약자들은 그들을 보이지 않도록 억압하는 사회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 자체가 운동이잖아요. 그들이 어렵게 자신을 드러내면 곧바로 ‘눈에 띄지 말라’는 얘기를 듣곤 하죠. 논문에서 플래그라든지 뱃지, 굿즈 같은 것들로 정체성을 드러내는 표식이 저항의 증거으로 타인과 연결되게 한다고 했는데, 혹시 평소에 착용하거나 달고 다니는 게 있나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저는 세월호 추모 리본과 이태원 참사 추모 리본을 받으면 바로 가방에 달고, 굿즈나 스티커 같은 거를 받으면 그냥 바로 붙여버리거든요. 근데 어느새 다 떨어져 있어요. 그래서 밖에 나올 때 트랜스 플래그를 비롯해 그날의 착장을 세심하게 준비하고 나온다는 연구 참여자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리고 제가 할 수 있는 것을 고민했는데요. 저의 실명을 드러내며 이렇게 인터뷰를 하며 여기저기 흔적을 남기며 사는 것도 일종의 실천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포털에서 〈일다〉 인터뷰 기사에도 악플이 상당하더라고요. 그럼에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당당한 거. 그게 나를 후퇴하지 않게 만드는 것 같아요. 모두가 그렇게 살라는 얘긴 전혀 아니지만, 저한테는 그게 저를 끌고 가는 수행이라는 생각을 하게되었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윤석열 탄핵 집회에서 윤석열을 끌어내리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탄핵 다음을 상상해야 하는 것이 중요한 부분이기도 했는데요. 광장에서 취약한 존재들이 서로의 ‘정치적 자원’이 되어 주고 탄핵 다음을 상상할 수 있는 에너지가 모이기도 했죠. 논문에 나오는 것처럼 일종의 ‘헤테로토피아적’ 시공간이었던 광장이 늘 열리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서로가 계속 연결될 수 있을까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래서 저는 지역이 진짜 중요하구나, 내가 손 내밀고 닿을 수 있는 거리에서, 내가 서 있는 곳에서 뭔가를 하는 게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먼저 결심한 사람들이 계속해서 연결될 수 있는 시도가 필요하겠다 생각했고요. 좀 느리거나 부족한 사람들을 비난하지 않는 것, 그리고 계속해서 성찰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일인 것 같아요. 이미 있는 사회운동 조직들이 위축되지 않도록 하는 것도 중요할 것 같고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광장이 끝나고 정권 교체가 되고 나서 정치 효능감을 느낀다는 사람들도 있는 반면, 광장이 막 떠들썩하게 있었던 거에 비해서 세상은 여전히 조용하네 라고 느끼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거든요. 그 중간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하고 중간에서 그들을 연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건 어쩌면 구질구질하게 보일 수도 있는데, 그런 일들을 포기하지 않고 해야겠죠.”</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0450378393.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누가 집회 무대에서 노래방처럼 노래를 하냐며 지인이 온라인 중계를 보다가 캡쳐해서 보내준 사진. (사진 제공-박지하)</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span><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인터뷰를 마무리해야 할 시간인데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저는 이전 비화 님 인터뷰(관련 기사: 부족해도 실천해보는 거야, “나쁜 비건 페미니스트” <a href="https://ildaro.com/10436" target="_blank">https://ildaro.com/10436</a>)에서 들은 ‘완벽한 무언가가 되기 위해서 아무 시도도 안 하는 것보다 시도를 하는 게 좋다’라는 이야기가 지금의 광장 이후에도 이 변화를 이어가려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메시지라고 봤거든요. 우리가 완벽하지 않아도 그것을 향해서 나아가는 게 운동 아닌가 생각합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또 연구참여자 분께서 광장에서의 발언, 내가 한 ‘말’을 통해 더 이상 그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얘기를 해주시기도 했어요. 나의 이야기를 밖으로 꺼낸다는 것은 내가 이제 돌아갈 수 없는,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는 것이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 넘은 것이고요. 그 선은 사람마다 다르게 쳐 있겠죠. 어떤 사람들은 대단히 높은 선을 넘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각자의 앞에서는 다 엄청 큰 선이잖아요. 그 선을 넘는 사람들을 많이 응원해 줬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하다 보면 먼저 간 사람의 뒤를 따르는 사람도 생길 거고, 난 여기서 해야겠다 라는 사람도 생길 수 있다는 걸 인터뷰하면서 느꼈고 굉장히 용기가 됐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c234cb;">[필자 소개] 비화</span>는 ‘비건 화이팅’을 줄여서 만든 별칭. 페미니스트이고 비건 실천을 하고 있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6-04 10:45:00</pubDate>
	   <section>sc1</section>
	   <section_k><![CDATA[사회]]></section_k>
	   <section2><![CDATA[]]></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비화)]]></author>
	   <category><![CDATA[사회]]></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6/2026060454378067.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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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지방선거가 성차별과 ‘남성정치’를 강화할 때]]></title>
       <link>http://www.ildaro.com/10469</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지하철역에서 색색깔 옷을 입고 피켓 든 사람들이 외치기 바쁘다. 지방선거다. 정책을 알리기보다 “O번, OOO입니다” 멘트가 반복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정치하려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니, 놀랍다. </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번 지방선거에 선거구는 2,335개라 한다. 뽑는 사람 정수는 시·도지사 16명, 구·시·군의 장 227명, 시·도의회의원 804명, 광역의원 비례대표 129명, 구·시·군의회의원 2,650명, 기초의원 비례대표 385명이다. 교육감 16명까지 하면 당선되는 이만 전국에 4,227명이고 국회의원 재·보궐선거는 14명을 뽑는다. 후보자가 총 7,723명이다. 많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골목길에서, 공보물에서 포스터를 골똘히 본다. 이들은 어떤 철학, 자원, 욕망을 안고 ‘주민의 대표자’라는 길에 나서고 있을까?</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선거가 성차별을 재생산할 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한국여성단체연합은 5월 18일, 정당공천에서의 성별 불균형 문제를 짚었다. 중앙선관위 후보자 등록자 7,723명 중 여성은 34% 가량이었다. 교호순번제(성별 교대 배치)를 거친 비례대표 후보에서 여성 숫자를 제외하면 처참한 수준에 이른다. 광역의원 지역구 23.7%, 기초의원 지역구 26.3%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 광역단체장 후보 중에서는 9.3%, 기초단체장 후보 중에서는 7.2%만 여성이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 광역단체장 후보 중 여성은 단 한 명씩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정치의 남초화, 광역정치의 초남초화, 피라미드 성별 구조는 지방자치의 풀뿌리성을 무색하게 한다. 시민의 ‘공복’이 되겠다고 뛰어다니는 전국 수천 명의 사람들, 그들의 움직임을 조직하는 지방자치라는 공공성의 영역이 큰 규모로 성차별적으로 재생산되고 있는 셈이다. 성별 분석은 후보자 성별 퍼센트, 사람의 숫자만 의미하지 않는다. 정치가, 지방자치가 뚜렷하게 남성중심적임을 알 수 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0224203346.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26년 2월 13일, 더불어민주당 중앙당사 앞.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박정현 부여군수 출판기념회 참석을 규탄하는 긴급 집회가 불꽃페미액션 주관으로 열렸다. (사진-한국성폭력상담소 제공)</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이번 선거에서 ‘최대격전지’라 불리며 언론의 관심이 집중된 것은 국회의원 재·보궐선거다.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여성의전화 등 55개 여성시민사회단체는 5월 18일, 평택을 국회의원 재선거에 출마한 더불어민주당 김용남 후보의 변호사 시절 30여건 성폭력 가해자 변호 이력 가운데 ‘내용상 문제’를 규탄하며 성명을 발표한 바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20세 전후 남성 6명이 공모하여 중학교 2학년 여학생을 만취시키고 차례로 성폭력을 저지른 집단 성폭력”, “훈육하는 차원에서 피고인의 성기에 접촉하라고 피해자에게 한 적이 있으나 고의는 없었다고 주장한 친족 성폭력”, “가출 청소년에게 숙식을 제공하여 성매매를 하도록 성매수남을 모집해 알선하고 수입원으로 삼은 자에 대해서 ‘업으로’ 행한 것은 아니라며 변론한 사건” 모두 경기남부에 소재한 지방법원에서 다툰 사건이거나 그에 대한 항소심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2012년 정치를 시작하던 때 법무법인도 문을 열었고, 2024년까지 새누리당, 국민의힘, 개혁신당을 오가며 같은 기간 지역 성폭력, 성매수 사건에 대한 가해자 변론을 ‘심각하게 문제적인 내용’으로 계속했던 사람이 더불어민주당 ‘전략공천’ 주인공이라니. 경기 남부 지역의 10년간 성폭력 피해자, 피해자를 지지하는 시민, 조력자는 완전히 배제하고 있는 ‘남성 정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한편, 평택을 조국혁신당 조국 후보는 성폭력 피해자를 온라인상에서 조리돌림했던 가해 남성 시인을 편들었던 이력이 있다. 그에 대해 지난 4월 17일 피해자가 사망한 후, 고인에게 사과와 조의를 표하라는 요구가 무수히 많았는데도 어떤 존중 어린 입장표명도 없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조국혁신당은 조국이 당선되면 조국혁신당 소속 국회의원 12명이 평택을 지역 읍·면·동 민생 현안을 나눠 담당하겠다는 초유의 약속을 제시했다. 당대표라는 위계로 지역을 특권화하면서 동시에 대상화하고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지방에서 시작하는 선거와 민주주의에서 성차별이 되려 재생산되지 않으려면, 어떤 기준과 제도, 권력 구조의 전환이 필요할까.</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0224487657.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26년 4월 14일, 서울시청 앞에서 55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2026 지방선거 서울시민행동’이 기자회견을 통해 출범을 알리고, 서울시정 전환을 위한 8개 분야 공약을 제안하였다. (사진 출처-정보공개센터)</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인권’이라는 민생을 ‘선거’가 가로막을 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지하철역에 늘어선 지방선거 운동원들을 보면서 드는 두 번째 생각은 이번 지방선거가 무척 분절적이라는 느낌이다. 나는 우리 지역 의제를 주로 모니터링하고 다루는 활동가는 아니고, 주말에 협동조합 활동에 참여하는 평범한 주민이다. 그래도 세월호 집회가 우리 지역 작은 번화가에서 열리고, 탄핵 집회에 지역주민 깃발을 들고 온 사람들이 있고, 터널을 뚫자는 공약에 갑론을박 반대 토론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지방선거는 어떤 가교가 되고 있나?</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윤석열 탄핵, 사회 대개혁을 위한 겨울 광장 이후 치러진 대통령 선거는 민주주의의 승리, 시민의 승리로 나라 안팎에서 상찬됐다. 그 후 정치는 클로즈업되는 대통령의 입과 말로 정리되고 있는 것일까. 대통령은 온라인 생중계 회의에서 공무원의 무능을 호쾌하게 잡도리하고, 시장에 나와서 털털하게 호떡을 먹고, 오래 살던 집을 팔아 집값을 낮추고 주식시장을 견인하고, 팔레스타인 연대 활동가를 탄압한 이스라엘을 규탄하며 사자후를 날린다. 정치적, 사회적 변화를 원하는 사회운동가들은 지금 대통령의 동선을 찾아가 만나고, 대통령을 언급하며 SNS에서 코멘트와 DM를 보내고 있다. 민주주의 효능감이 어느새 스펙터클 대통령 쇼츠가 되어버린 것 같을 때, 이번 지방선거에서 어떤 정책이 의미있게 평가되고 논의되는지 더욱 더 보이지 않는 듯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대통령과 정부, 중앙의회, 지방정부와 지방의회는 연결되어 있는 민주주의 체계일 것이다. 그런데 선거는 중앙 정부, 입법부, 지방정부, 지방의회를 연결 짓고 흐르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반대의 장벽으로 기능하고 있다. 지체되어 있는 여성폭력 제도개선, 입법 변화를 위해 정부를 찾아가면 “입법부가 움직여야 한다”고 말하고, 국회를 찾아가면 “선거가 끝나야 한다”고 나중에로 지연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힘을 모으고 확인하는 선거는 항상 말하는 ‘사회적 합의’의 장일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사회적 합의는 시도된 적 없이, 선거는 의제와 이슈를 숨기고 배제하는 구조로 뒤바뀌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0225267750.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24년 12월 6일, ‘12·3 비상계엄’ 사태를 일으킨 대통령의 퇴진을 촉구하는 ‘여성계 시국선언’ 자리에서. “페미니스트가 요구한다. 윤석열 퇴진하라.” 피켓은 ‘민주주의 구하는 페미-퀴어-네트워크’에서 디자인한 것이다. (촬영-이충열)</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내란척결 세력이 바로 저이고, 우리 당입니다!”라고 반복하는 유세차 연설을 본다. 내력세력 척결은 선거운동 조끼에도 써 있다. 그러나 파란당 남성 후보가 중년 여성 선거운동원들에게 줄 잘 맞추고 피켓 똑바로 들라고 훈계하고 있는 반면, 빨간당 청년 남성 후보가 혼자서 허리 굽혀 성실히 명함을 나눠줄 때, 내란만이 문제인가 싶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래서, 내란청산을 외쳤던 광장의 요구는 사회 대개혁을 함께 외쳤다. 차별금지법과 성평등이 필요하다고 수백 명이 발언하였다. 성소수자와 비정규직 노동자와 농민으로서 깃발을 휘날렸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랬던 광장으로부터 대선을 지나 이번 지방선거까지, 성평등과 차별금지법이 어디에서 입막음되었는지 기막힐 노릇이다. 6월 3일 18시가 되면 개표방송이 시작된다. 전국 곳곳이 무슨 색이 되는지, 몇 퍼센트인지 숫자와 점유가 밤새 스펙터클을 구성할 것이다. 그러나 ‘선거가 끝나고’, ‘선거가 끝나면’ 사회 대개혁이 2,335개 지역 주민들의 힘과 뜻 모아 시작되는 것일까. 광장 시민들은 여전히 기대하고, 기다리고 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남태령의 시민들은 지금</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얼마 전 개봉한 다큐멘터리 〈남태령〉(김현지 연출)을 보았다. 추운 겨울에 시시각각으로 얼굴이 불긋불긋하다 못해 파래진 2024년 12월 21일 밤과 22일 새벽의 사람들, 이들을 생중계로 보면서 피자와 핫팩을 배달시키는 전국의 사람들, 해외의 시민들이 생생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022551809.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MBC경남 김현지 PD가 감독한 다큐멘터리 영화 〈남태령〉(The Longest Night: Namtaeryeong 2026) 중에서</p></td></tr></tbody></table><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남태령에서는 “O번, OOO입니다”로 끝나는 게 아니라 “저는 OOO인데”로 시작해서, “그래서 OOO를 생각하지 못했다가 OOO를 오늘 배웁니다”로 향해가는 발언만이 가득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자기가 누구니 나를 선택하라는 2026년 지방선거 사이에서 나는 누구였지만, 타인과 만나 새로운 인식을 열게 되었다는 ‘경청’과 ‘연대’와 ‘배움’의 남태령이 소환된다. 남태령의 시민들은 혐오 발언을 공약으로 서슴지 않은 무려 서울시 교육감 후보 현수막에 일일이 무지개빛 연대의 현수막을 달고야 만 사람들일 것이다. 넘쳐나는 후보들 사이에서 쉽게 찾을 수 없는 성평등 공약을 정리해서 알리고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남태령의 시민들을 생각한다. 그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선거가 끝나면, 선거가 끝나고, 아니 선거와 상관없이 해야 할 일을 계속 해나가고 있지 않을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9434ca;">[필자 소개] 김혜정</span>. 2004년부터 반성폭력 운동판에서 사람을 배우고 세상을 바라보았다. 성폭력을 알게 된 사람들이 사려깊고 해방된 세상을 만든다고 믿는다. 현재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이고, 상근활동가이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6-02 11:21:00</pubDate>
	   <section>sc1</section>
	   <section_k><![CDATA[사회]]></section_k>
	   <section2><![CDATA[성폭력]]></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김혜정)]]></author>
	   <category><![CDATA[성폭력]]></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6/2026060226506306.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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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From Observer to Neighbor]]></title>
       <link>http://www.ildaro.com/10468</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Editor’s note: Vacation, business travel, migrant labor, language study, study abroad, international marriage, immigration—many of us have such experiences of crossing national borders, and there are many immigrants living in our country. Ilda examines the emigrant sensibility we will need in order to live equally and peacefully in the age of globalization. This series is supported by the Korea Press Foundation’s Press Promotion Fund.</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Half of the year in Laos, half of the year in South Korea</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Let me think about it—it started in 2007, so now it has been nine years. First, I spent two years volunteering in Laos with the Korea International Cooperation Agency (KOICA). From that time until this year, when I am the director of the Energy and Climate Policy Institute’s Laos Renewable Energy Support Center, I’ve been spending half of the year in Laos.</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60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0103143401.jpg" alt="" width="60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The author (the woman on the left) in the middle of a renewable energy education project in Laos’ Sainyabuli Province in 2014 ©Lee Yeong-ran</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r />“Oh, my! You are peeling that mak muang (mango) with the knife facing you!”</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t was 2007, about 2 months after I had been sent to a middle school in the town of Sainyabuli, Laos, as a volunteer worker. That is what the ajhan (Laotian for “professor”; can also be used to address a teacher), who were by then often coming to my house to hang out, make Laotian food, and drink together, exclaimed with surprise and amusement when they first saw me peel a mango.</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 was very surprised too—or rather, I was very surprised, full stop. It wasn’t just because, as the ajhan said, Koreans peel fruit with the knife facing towards their body while Laotians do it with the knife facing away.</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Differences between South Korea and Lao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Sainyabuli, an average Laotian provincial city, was an area little visited by international aid organizations, let alone tourists. In its residents’ eyes, the Korean aid workers who came there to live for two-year periods were terribly interesting and amusing guests. Our appearance—despite also being Asian—and every other aspect of us, from speech to the number of spoons in our house, became a topic of conversatio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So the ajhan that we were close to, especially those who visited our houses and got a peek at our private lives, talked about us to the other ajhan, students, and neighborhood residents—more often than we talked about ourselves. That made us the target of even more attention. The main topic addressed by these popular, storytelling ajhan were the differences between Korea and Laos, and between Korean people and Laotian people.</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60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0103359838.jpg" alt="" width="60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Elephants are nearly the only tourist attraction of the Sainyabuli area. This is an elephant’s evening bath, at the Elephant Conservation Center in 2011. ©Lee Yeong-ran</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r />That unlike Laos, which according to various researchers has between 60 and 100 different ethnic groups despite a total population of less than 7 million people, Korea is a single-race [dan-il min-jok] nation (please don’t misunderstand: I’m not using this term in its ethnocentric meaning to emphasize racial purity, but as the best translation of the term Laotians use) despite a population of over 70 million people. That in contrast to Laos, where people of various ethnicities live as neighbors with little problem despite their different languages and religions, Korea is split into two countries, and even had a war, despite being composed of a single ethnicity that speaks a single languag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at, in 2007, the starting salary for a South Korean civil servant was 30 times higher than that of a Laotian civil servant. That a kilogram of beef in Laos cost 30,000-40,000 kip (3,000-4,000 won [about 3-4 USD], at the exchange rate of that time) while 100 grams of beef in South Korea cost over 10,000 won. That the tuition fees of any of South Korea’s numerous universities were approximately 100 times higher than that of Laos’s only university.</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at while working hours in Laos are from 8 a.m. to 4 p.m. and include a two-hour lunch, working hours in South Korea are from 9 a.m. to 6 p.m. and allow only one hour for lunch, and also most Korean employees work past 6 p.m.</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at Korean women marry in their mid-20s at the earliest and are often still unmarried in their mid-30s, while Laotian women marry sometime between their mid-teens and mid-20s. That unlike Laotians, who nearly all build and live in a house on their own property (rural people even have fields and paddies, farms and streams, and use rivers and mountains freely as common-pool resources), Koreans don’t (can’t) build their own houses and have to buy or rent them instead.</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While talking about these kinds of things with Laotian people, it was common for me to wonder if South Korea was really an advanced, “well-to-do” country, and the provincial Laotians were really people of a “poor” country who needed my help.</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Differences between Korean and Laotian peopl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ut our conversations didn’t start out on such a big-picture level. Having learned and taught others to associate Gga-ol-li (Korea) with North Korea, until the arrival of the South Korean foreign volunteer corps, these teachers in a socialist country were simply curious about how and why North and South Korea were differen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While looking at the nice things we had brought with us from Korea, they asked us how much each cost, and what our monthly salaries were that we could afford such nice things. Except me, all of the volunteers were unmarried, and so as similarly-single men and women, they were curious about our ages. And they were very interested in how Koreans “form a family” (how Laotians describe marriage) and live their lives.</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0104019893.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Left] Our school’s vice principal and her mother. Older ajhan are especially inspiring, sympathetic, and helpful. [Right] Ketlakhone, the ajhan who, as an English lecturer, taught Laotian language and culture to Korean volunteer workers ©Lee Yeong-ran</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r />I have sometimes used these conversations to explain why Laos must not follow the development path that today’s advanced countries—and especially Korea—have, show that our attitude as aid providers from an advanced country is not one of superiority, and demonstrate the ideal of international cooperation that we must show as equal partners in development aid. (I still do.)</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However, repeating these clichéd comparisons did become tiring. That’s when I started to look at Laotian people’s lives not from the aid worker perspective that I had been taught but as if I were an anthropologis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 observed the Buddhist priests asking for alms every day at dawn, the landlord’s second son reciting Buddhist scriptures every night before bed, how without exception every calendar in Laos included not just the lunar calendar but also Buddhist calendar, and that the Buddhist temple is still a major space for big community events and even has some of the functions of the modern school. I learned how Buddhism plays a central role in Laotian life, at least for its majority ethnicity.</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 learned from experience that because of the semitropical climate, evening and early morning are the best times for activity and one must rest in the shade during midday. The climate is also why, as I learned, “Have you washed?” was a greeting similar to our asking “Have you eaten?”, and saying, “Let’s sleep together” around lunchtime was the same as “Let’s rest together.”</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n most regions, there is no need to worry about cold weather, and there is no fear of starving to death because wild produce is plentiful 12 months out of the year. In addition, relationships between people and their relatives and neighbors are so close that the amount of care, emotion stability, and material support and aid they share with each other makes them similar to a big immediate family in our terms. This culture is contagious and spreads to observers; I think that this feeling Laotian people give is the biggest reason why people who have visited Laos once always come back.</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60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0104255231.jpg" alt="" width="60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A student and teacher of electrical engineering at a vocational/technical school, Ministry of Education employees, and the author (right) look at a broken solar panel installed by the Sainyabuli Province Bureau of Energy and Mining, and consider what to do about it. ©Lee Yeong-ran</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 font-weight: bold;"><br />Volunteer worker, observer, immigrant wom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t the same time, as people accustomed to competing to survive, this Laotian culture functions to make the people seem lazy and dependent, and thus incompetent, to us. Also, though it’s nothing like the level of ethnic or religious strife that is a frequent topic for international news, I noticed subtly-expressed discrimination between the ajhan based on ethnicity, hometown, and rac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Like this, I had grown past being a Korean volunteer worker to become someone trying to observe them in a more delicate but still neutral way. But because of the way I held a knife while peeling, I became just an “immigrant wom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t the time, in an effort to defend this Korean habit as a representative of my people, I asked if it wasn’t better to hold it that way so that if something went wrong, it would be me who got hurt and no one else. The ajhan pointed out that there would be no problem if I just faced it away from everyone, laughing at my poor logic and completely dismissing i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 laughed along like I was ashamed of my poor logic. But actually, I was agitated by the many thoughts flashing through my head. And I was laughing in order to keep from frowning</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 number of female marriage immigrants to Korea started increasing sharply in the early 2000s. Their way of holding a knife has been widely discussed as a seed of conflict, one of the reasons the women face discrimination from their husbands’ families and wider Korean society. </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Far from sympathizing with them, I had barely even understood the countless articles, petitions, and academic papers about immigrant women’s plight—but now I felt it in my bones. Fear of a hidden sense of superiority, about which I had deceived even myself, ran down my spine. So this is who I am!</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fter that, the volunteer worker who stood back a bit and smilingly pretended to accept everything made few appearances. Though I was a mere “immigrant woman” in the eyes of the Laotians that I had come to help, I started asking questions when something didn’t make sense, and resisted and even fought back when I thought something was wrong.</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nd what I’ve worked hardest on is to learn from people in Laos and be like them, as a person who lives here. There has been more touching moments than fights in this process, so I’m happy. This process is still ongoing. <span style="color: #ce30c2;">[Translated by Marilyn Hook]</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Original article: <a href="http://ildaro.com/7299" target="_blank">http://ildaro.com/7299</a> Published: November 28, 2015</span></p>]]></description>
       <pubDate>2026-06-01 12:01:00</pubDate>
	   <section>sc100</section>
	   <section_k><![CDATA[English Article]]></section_k>
	   <section2><![CDATA[]]></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Lee Yeong-ran)]]></author>
	   <category><![CDATA[English Article]]></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571'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6/2026060106518094.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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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75번의 거부도 소용없다? ‘최협의설’에 갇힌 성적 자기결정권]]></title>
       <link>http://www.ildaro.com/10467</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약 1시간 동안 75차례 넘게 성적 행위를 거부하는 피해자의 음성이 녹음 파일에 고스란히 담겼다. 가해자가 거부 의사를 무시하고 계속 성행위를 시도하자, 피해자는 가해자의 머리채를 잡으며 저항했다. 그러나 1심과 2심 법원은 가해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피해자가 거부 의사를 밝힌 것은 사실이지만, 가해자의 폭행·협박이 피해자의 항거를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에 이르지 않았다고 본 것이다. 이른바 ‘최협의설’에 근거한 판결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2심 무죄 판결 이후 피해자는 검사에게 대법원 상고를 요청했지만, 검찰이 상고를 포기하며 무죄가 그대로 확정되었다. 우리 형사소송법상 범죄 피해자에게 독립된 상소권이 없기 때문에, 피해자는 결국 헌법재판소에 ‘재판소원’을 청구했다. 법원의 판결이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을 침해했기에 헌재의 판단을 구하는 절차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시민사회는 이번 재판소원이 단순한 판결 뒤집기를 넘어, 대한민국 사법체계가 성폭력을 바라보는 근본적인 잣대를 바꾸라는 시대적 요청이라고 강조하고 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3107304525.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26년 5월 13일, 서울 광화문 변호사회관에서 열린 〈동의없는 성폭력 재판소원 쟁점 토론회〉 현장. 최란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이 사회를 맡고, 이도경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와 안지희 법무법인 유한 변호사가 발제를, 장임다혜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정인경 이화여자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김홍미리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 한선희 천주교성폭력상담소 소장이 토론자로 나섰다. ⓒ일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지난 5월 13일, 광화문 변호사회관에서 〈동의없는 성폭력 재판소원 쟁점 토론회〉가 열렸다. 동의없는 성폭력 재판소원 공동대책위원회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여성인권위원회, 장애여성공감 성폭력상담소, 탁틴내일, 천주교성폭력상담소,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의전화가 공동 주최한 자리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객관적 증거에도 유사강간죄 ‘무죄’…위헌적 판결 헌재가 바로잡아야</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도경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는 재판소원의 발단이 된 형사사건의 무죄 판결의 문제점을 설명했다. 피해자는 술에 취한 상태에서 가해자로부터 기습적인 유사 강간 피해를 입었고, 처음 성적 접촉을 시도한 순간부터 가해자와의 대화를 녹음했다. 녹취록엔 약 1시간에 걸쳐 75회 이상 가해자에게 성적 행위를 거부하는 의사 표시가 담겨있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또한 이도경 변호사는 “가해자가 ‘(유사강간 전에) 합의된 성관계를 했다’고 주장한 것과 정면으로 모순되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감정 결과(정액 반응 음성)”가 있다고 밝혔다. “(피해자가) 두 사람 간의 공통 지인에게 전화를 해 위험한 상황임을 알린 통화 내역도 있었다”고 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럼에도 1심과 2심 법원은 피해자가 명시적으로 거부 의사를 표한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가해자에게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강간죄의 폭행·협박 요건을 피해자의 항거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로 좁게 해석하는 ‘최협의설’이 주된 근거였다. 이 변호사는 “(법원이) 피해자가 (사건) 이전에 거부하지 않은 스킨십이 있었으며, 가해자가 피해자의 거부 의사를 오인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강간 통념’을 판결의 근거로 사용했다”고 비판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도경 변호사는 “법원이 시대착오적인 최협의설을 자의적으로 적용하고, 피해자의 거부 의사가 담긴 명백한 증거를 배척함으로써 피해자를 보호해야 할 국가의 의무를 저버렸다”고 지적했다. 이는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 평등권, 인격권,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 등 헌법상 보장된 기본권을 명백히 침해한 것”이므로, 위헌적 재판을 헌재가 바로잡아야 한다는 주장이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가해자의 ‘오인’은 믿고, 피해자의 ‘거부’는 의심한 재판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무죄 판결문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로 지적된 것은, 객관적인 증거를 무시한 채 가해자의 주장에 과도한 신뢰를 부여한 재판부의 편향적 태도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가해자는 사건 당일, 유사강간 전에 이미 성관계를 가졌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 주장은 국과수 감정 결과(정액 반응 음성)와, 범행 전 피해자가 지인에게 위험을 알린 통화 내용, 더불어 가해자 자신이 한 말의 녹음 음성(‘나 네 것에 들어간 적도 없어’)과 정면으로 어긋난다. 그럼에도 법원은 “피고인은 이미 피해자와 성관계를 하였다”고 사실로 인정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또한 법원은 피해자가 반복적으로 거부 의사를 밝혔음에도 가해자가 성행위를 멈추지 않은 것에 대해, “이전에 (피해자가) 자의로 키스를 하였으므로, 피고인이 피해자의 내심을 오인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김홍미리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이번 재판은 전형적인 “현대적 강간 통념”이 작동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고전적인 강간 통념”이 노골적이고 직접적으로 피해자를 비난하거나 성폭력을 정당화했다면(‘여성이 짧은 치마를 입어서 성폭력 대상이 된다’), “현대적 강간 통념”은 보다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 예를 들면 ‘그 상황에서는 남성이 오해할 수 있다’거나 ‘여성이 분명하게 신호를 주지 않았다’는 식이라고 설명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러한 강간 통념으로 인해 피해자의 말과 경험이 무시되는 “증언 부정의”(testimonial injustice)에 대해 김홍 부연구위원은 강력하게 비판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재판부는 피해자가 반복적으로 거부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반복된 거부 의사를 묵살하는 가해자에 대해 피해자가 느꼈을 분노와 당혹감, 자신의 몸이 침탈당하는 상황의 치 떨리는 모욕감과 치욕스러움에는 단 한 걸음도 다가서지 않는다. 그것을 알려고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내가 아닌 타인의 의지로 몸에서 인격이 분리되어 파열되는 고통의 순간을 상상하지 못한다. 반면에, 왜 피해자의 반복된 거부가 피고인에게 전달되지 않았을 수 있는지는 어렵지 않게 이해하고, 수월하게 설명하며, 간단하게 판시한다. 피고인의 오인은 합리적인 것으로 판단되었고, 피해자의 고통과 파열 은 법적 판단의 언어로 번역조차 되지 못한 채 지워지고 말았다. 이것은 과연 정의롭다 할 수 있는가.”</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3108066841.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26년 4월 23일, 헌법재판소 앞에서 피해자가 수십 번 거부했는데도 ‘폭행·협박 최협의설’을 이유로 무죄 판단된 ‘동의없는 성폭력’ 판결에 대한 재판소원 진행을 알리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동의없는 성폭력 재판소원 공동대책위원회</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시대착오적 ‘최협의설’, 국제사회는 이미 폐기 중</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강간죄와 유사강간죄를 판단할 때, 상대방의 저항을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협박이 있었는가를 기준으로 삼는 ‘최협의설’이 폐기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이어졌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장임다혜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에 따르면, 이 법리는 “1953년 형법 제정 당시 강간죄의 보호법익을 여성의 ‘정조권’으로 보았던 시대의 산물”이다. “정조를 보호하기 위해 피해자가 사력을 다해 저항했는지를 심판대에 올리는 과거의 기준”이라는 것이다. 1995년 형법 개정을 통해 강간죄의 보호법익이 ‘성적 자기결정권’으로 변경되었음에도, 여전히 법원이 과거의 낡은 잣대로 피해자의 저항 수준을 평가하며 기본권을 침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장임다혜 선임연구위원은 “지난 2023년 전원합의체 판결(2018도13877)을 통해, 정조권이 아닌 성적 자기결정권으로 형법 제32장의 보호법익이 변경된 점에 비추어 ‘강제추행죄’의 경우 최협의설이 폐기된 바 있다”고 설명했다. 상대방의 신체에 불법한 유형력을 행사하거나 해악을 고지하는 것만으로도 강제추행죄를 적용하기에 충분하다고 보아, ‘항거 곤란’을 요구하던 기존 판례를 바꾼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 전원합의체 판결 이후, 여러 하급심 법원에서는 강간죄와 유사강간죄에 대해서도 최협의설을 폐기한 법리를 적용하여 유죄 판결을 내리고 있다. 이처럼 다른 법원들은 피해자의 ‘거부 의사’에 반하는 유형력 행사를 범죄로 인정하고 있는데, 유독 이 사건 재판부가 과거의 최협의설을 고집하여 무죄를 선고한 것에 대해, 이도경 변호사는 “명백한 ‘평등권 침해’”라고 지적했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 </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국제적 흐름 역시 ‘동의’ 여부를 강간죄/유사강간죄 판단의 핵심 기준으로 삼고 있다. 안지희 법무법인 유한 변호사는 해외 사례를 소개했다. 독일은 2011년 이스탄불 협약에 따라 ‘다른 사람의 분명한 의지에 반하여’ 이루어진 성적 침해를 처벌하도록 강간죄 규정을 개정했고, 최협의설의 원조격이라 할 수 있는 일본조차 2023년 동의하지 않는 의사를 표명하기 곤란한 상태까지 포함하는 ‘부(不)동의 성교죄’로 법을 개정했다.(관련 기사: 한국보다 앞서 강간죄 개정한 일본…‘비동의 성교죄’ 들여다보기 <a href="https://ildaro.com/9727" target="_blank">https://ildaro.com/9727</a>)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 또한 한국 정부에 폭행·협박 요건을 ‘동의 여부’로 개정할 것을 지속적으로 권고하고 있다고, 안지희 변호사는 강조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성적 자기결정권 보호하라…재판소원이 중대한 분기점 될 것</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75번의 거부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면, 지인이나 연인 등 친밀한 관계 내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성폭력 사건 피해자들은 법의 사각지대에 방치될 수밖에 없다. 한선희 천주교성폭력상담소 소장은 “사법부가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줄 때 피해자는 극심한 자기 검열과 고립을 겪게 되며, 이는 성적 자기결정권 감수성을 퇴보시키는 위험한 사회적 신호가 된다”고 경고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피해자가 제기한 재판소원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이 건을 본안 심사로 회부할지 각하할지 결정하는 사전심사 중이다. 사전심사는 헌법소원 청구일로부터 30일 이내에 이뤄지기 때문에 5월 18일까지 결정이 났어야 하지만, 헌재가 보정명령을 내렸고 사전심사가 30일 더 연장되었다. 공대위는 우리 사회를 ‘강간문화’가 아닌 ‘평등문화’로 이끄는 길에 시민들의 많은 참여가 필요하다며, <a href="https://forms.gle/aF9FoaAZX9XpSYrdA" target="_blank">재판소원 본안 회부를 촉구하는 2차 서명운동</a>을 진행 중이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5-31 17:05:00</pubDate>
	   <section>sc1</section>
	   <section_k><![CDATA[사회]]></section_k>
	   <section2><![CDATA[성폭력]]></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박주연)]]></author>
	   <category><![CDATA[성폭력]]></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5/202605310956933.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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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혼자 살고 혼자 죽기 — 고독사와 수치심]]></title>
       <link>http://www.ildaro.com/10466</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20년 넘게 혼자 살아왔다. 나름 경력자다. 이 경력은 날마다 갱신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혼자 산다는 게 곧바로 혼자 죽는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혼자 죽을 수도 있음을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건 혼자 살기의 각주 같은 거다. 때론 각주가 본문보다 더 예리한 질문이나 성찰을 품기도 한다. 죽음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도착할 사건으로서 삶의 배치 속에 들어온다. ‘아프면 어떻게 할 것인가, 누구에게 연락할 것인가, 어디까지 도움을 요청할 것인가. 어떤 방식으로 마지막 순간을 맞이할 것인가.’ 혼자 산다는 건 이런 질문을 미리 오늘의 삶 안에 들여놓는 생활의 기술 혹은 역량에 가깝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3025443848.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혼자 산다는 건 관계가 없는 삶이 아니라, 고독을 기초 값으로 두고 삶을 조직하는 일이다. 죽음에 관한 질문을 미리 오늘의 삶 안에 들여놓는 생활의 기술 혹은 역량에 가깝다. Image by Sabine van Erp from Pixabay</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왜 혼자 죽는 게 ‘실패한 삶’의 표지가 되나</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1인 가구의 삶을 살피는 책 『필연적 혼자의 시대』을 읽으며 오래 곱씹은 장도 죽음을 다루는 마지막 장이었다. 개인화된 사회의 위험을 가장 최전선에서 맞닥뜨리는 게 1인 가구라면, 이 위험은 죽음의 과정에서 가장 극적으로 드러날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저자가 만난 사람들은 죽음 자체에 대해서는 덤덤한 태도를 보였다. 죽음은 보편적인 자연의 일이니까, 때가 되면 죽는 거니까. 오히려 관심은 임종 전의 돌봄이 필요한 시기로 쏠린다. ‘안 아프고 깔끔하게 죽고 싶다’고 말한다. 이건 설령 아프더라도, 어떻게 해서든, ‘깔끔하게’ 죽을 거라고 결의를 다지는 노년들의 말과 일치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차이는 ‘죽음 이후’에 대한 생각에서 나타난다. 늦게 발견된 죽음, 냄새, 남겨진 물건, 그리고 수치심. 고독사 이야기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추한 모습으로 보이기보다는 편안하게 죽은 모습 있잖아요. 그런 모습이 조금 덜 부끄러울 것 같아요. 헤벌레 입을 벌리고 옷도 덜 걸치고 실오라기 하나 없이 죽은 모습을 남에게 보였다. 만약 이러면 너무 수치스러울 것 같아요.” —고정민(정신건강 사회복지사, 30세)</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저는 죽은 후가 너무 무서워요. 그런 얘기 듣잖아요. 시체가 한 달 이상 썩어서 하도 냄새가 나서 들어가 보니까 어떻더라, 이런 거.“ —신지영(기간제 교사, 42세)</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필연적 혼자의 시대』, 김수영, ebook, 85쪽)</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돌봄의 배웅 없이 고립된 채 고통받으며 죽어가는 ‘과정’이 문제가 아니라, 고독사에 대한 ‘수치심’이 1인 가구 죽음 생각의 핵심이라니. 늦게 발견된 시신의 ‘부패한’ 모습이 그동안 살아온 삶에 켜켜로 쌓인 이야기와 의미 또한 ‘부패시킬’ 거라는 공포, 결국 빨리 잊히는 게 가장 축복일 만큼 추하고 비참한 삶으로 추락할 거라는 두려움이 압도적이라니.</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죽은 자의 집 청소』 같은 문화 미디어가 고독사에 관해 퍼뜨린 부정적인 이미지의 위력을 새삼 확인한다. 이 책에서 우리는 뒤늦게나마 고독한 죽음을 마무리하는 손길을 엿볼 수도 있고, 어떤 죽음도 비참에서 멈출 수는 없다는 전언을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위의 인용문들이 보여주듯, 유포된 고독사의 ‘장면’은 사회적 각성이나 실존적 고민으로 전환되지 않은 채, 희화화된 상태로 사람들의 머릿속을 떠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그게 뭐가 문제란 말인가” — 고독사에 대한 사회적 해석</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1인 가구는 결혼 출산 양육이라는 생애 단계를 살아내느라 죽음을 생각할 겨를이 없는 다인 가구보다 훨씬 일찍부터 자기 죽음을 생각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 죽음에 대한 사유가 과연 얼마나 덜 표피적인, 덜 상투적인, 덜 자본주의적인 생각일 수 있을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고독사는 혼자 맞이한 죽음, 늦게 발견될 수도 있는 죽음이다. 여기에 인간의 죽음 중 가장 처참한 죽음이라는 사회적 해석이 들러붙는 건, 혼자 살며 혼자 죽는 이들에 대한 모독이다. 드러나지 않은 협박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게 뭐가 문제란 말인가. 사람도, 사물도, 나라도, 도시도 태어나서 피고 지고 썩는다.”(『느리게 마이너노트로』, 우에노 지즈코, 64쪽) 페미니스트 선배 독거노인 우에노 지즈코 선생의 이 말을 해독제로 인용하고 싶다. 고독사 이전에 고립된 삶이 있다. 고독사에 비참함이 있다면, 그건 삶을 고립에서 보호하지 못한 사회와 국가가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왜 혼자 죽는 게 실패한 삶의 표지가 되는 걸까.</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필립 아리에스는 『죽음 앞의 인간』에서 죽음을 대하는 인간/사회의 감각이 역사 속에서 변화해 왔다고 말한다. 오랫동안 죽음은 자연 속 야생의 폭력이었고, 공동체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길들이기 위한 의례를 발전시켰다. 이후 인간이 자신을 공동체의 일원으로서뿐 아니라 특별한 자아로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죽음은 ‘사건’이 되기 시작한다. 고유한 존재인 ‘나’의 죽음이나, 내게 특별한 타자인 ‘너’의 상실은 하나의 사건으로서 의미를 부여받는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러나 근대에 이르러 죽음은 수치스럽고 불편한 것이 되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데로 추방된다. 아리에스가 ‘역전된 죽음’이라고 부른 죽음의 추락이 최종적으로 도달한 곳이 병원이다. 최근에 한국 사회에서도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조력 존엄사나 (특히 가정) 호스피스에 관한 관심, 더 일반적으로는 ‘집에서, 살던 곳에서 죽고 싶다’라는 소망이 커지는 건, 역전된 죽음을 다시 역전시키려는 움직임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죽음 자체가 아니라, 죽음이 노출되는 방식이 수치(羞恥)의 대상이 된 상태. 오늘날 1인 가구가 고독사에서 느끼는 수치심과 두려움은 이러한 역사 위에 놓여 있다. 고독사는 혼자 죽었다는 사실보다, 그 죽음이 제대로 관리‧통제되지 못했다는 인상을 남긴다는 점에서 더 큰 불안을 낳는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다시 한번 질문하자. 왜 혼자 죽은, 그리고 늦게 발견된 죽음이 그/녀의 삶의 총체적 실패가 되어야 하는가. 예를 들어 영화 〈럭키 아파트〉(강유가람 감독, 2024)는 고독사한 노년 여성의 생애 전체를, 아름답고 따스했던 두 여성 간의 사랑을 중심으로 새롭게 엮는다. 그의 죽음은 아래층까지 뚫고 내려온 어떤 냄새에 의해 발견되지만, 그의 삶은 그 불편한 장면으로 축소되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는 그 고독사를 낳은 건 고립된 삶이었고, 그 고립된 삶에 대한 책임은 동성 간 친밀성을 인정하지 않은 사회와 국가에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수치심은 죽은 사람의 것이 아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혼자 산다는 건 관계가 없는 삶이 아니라, 고독을 기초 값으로 두고 삶을 조직하는 일이다. 혼자 먹고 자고 아프고 사람을 만나고 일하는 동안 꾸준히 생활의 기술을 익힌다. 실패하고 다시 배우고 새롭게 조정한다. 고독하지 않으려 할 때, 외로움의 통증이 커진다. 필요한 건 고독의 회피가 아니라, 고독하게 일상을 지키는 기술의 연마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 </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푸코는 이를 ‘자기의 배려’(epimeleia heautou)라고 불렀다. 이것은 무엇보다 자기와 관계 맺는 법을 익히는 것, 그렇게 삶을 하나의 형식으로 빚어내는 기술이다. 자기 자신에 잘 머물며, 자기 자신과 친구가 되고, 자기 자신에게서 즐거움을 발견하고 존중하기. 그에 따르면 ‘너 자신을 알라’는 명제는 원래 ‘너 자신을 돌보라’는 요청을 구현하기 위한 것이었다.(미셸 푸코, 『주체의 해석학』)</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러나 자기 배려의 기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누구나 혼자인 시대의 죽음’이 곧 ‘혼자 죽는 죽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죽음은 언제나 타자를 호출한다. 홀로의 죽음에는, 호출되었으나 응답하지 않는 타자의 부재가 있다. 죽음 이전의 돌봄, 죽음 이후의 마무리, 애도와 행정, 이 모든 과정을 동행하는 공공의 손길이 필요하다. 『필연적 혼자의 시대』도 강조하듯이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공공복지의 책임이 무덤 앞에서 멈춰 서면 안 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럼에도 고독사가 발생한다면? 그때 남겨지는 수치심은 누구의 것인가. 무엇인가. 고독사를 ‘대면한’ 사람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건 단지 냄새와 부패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 장면 안에서 자신의 취약성을 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조르조 아감벤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생존을 분투하는 존재(조에, zoe)인 동시에,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언어 주체(비오스, bios)다. 인간의 삶은 둘 중 어느 하나로 환원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둘 모두의 경계에 있다. 사람의 인정 고픔이나 의미 마름은 배고픔이나 목마름을 궁극적으로 이기지 못하며, 탁월한 견해나 치열한 정의감은 먹고 싸고 냄새 피우는 몸의 순환과 분리될 수 없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고독사의 장면이 우리를 흔드는 것은 단지 ‘조에’(생물학적 몸)가 드러났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비오스’(사회적 주체)라고 믿어온 삶이 사실은 ‘조에’ 위에, 아니 그 안에 구축되어 있다는 사실이 폭로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수치심은 죽은 사람의 것이 아니다. 그 수치심은 취약성을 개인의 실패로 돌려온 사회의 것이고, 그 장면 앞에서 자신의 취약성을 직면하게 된 우리 모두의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고독사의 장면이 지니는 이 노출과 폭로의 이중 구조를 제대로 이해할 때, 우리는 홀로 죽는 죽음에 윤리적으로 다가갈 수 있고, 사회문화적으로 예를 갖출 수 있다. 우리는 목숨 걸고 둘째 오빠의 시신에 모래 한 줌이라도 덮어주려 한 안티고네의 후손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제 우리가 응답해야 할 질문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것이리라. 더 이상 ‘그냥 자연의 일’일 수 없게 된 인간의 죽음을 어떻게 자연-문화라는 보다 포괄적인 생태에 귀속시킬 수 있는가. 혼자 죽더라도 그것이 피상적인 수치가 되지 않는 사회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892bd3;">[필자 소개] 김영옥</span>. 페미니스트 여성으로 늙어가고 있다. 교차성의 관점에서 노년기 말년성에 대해 질문하고 감각하고 쓰고 지우고 또 다시 쓰고 있다. ‘죽음은 무엇인가’가 아니라, ‘죽음에 대한 사유는 무엇을 하는가’에 관심이 있다. 이번 연재에서 죽음에 대한 사유는 명사적 죽음의 보편성과 동사적 죽음 경험의 특이성을 교차적으로 탐색하면서, 삶의 여러 국면을 고유한 문장으로 새롭게 낯설게 만나게 하리라 기대한다. 『늙어감을 사랑하게 된 사람들』, 『흰머리 휘날리며, 예순 이후 페미니즘』 단독 저서와 『돌봄의 얼굴』, 『돌봄의 상상력』, 『돌봄과 인권』,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 등 다수의 공저가 있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5-30 11:23:00</pubDate>
	   <section>sc1</section>
	   <section_k><![CDATA[사회]]></section_k>
	   <section2><![CDATA[]]></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김영옥)]]></author>
	   <category><![CDATA[사회]]></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5/2026053030326255.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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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사람들]]></title>
       <link>http://www.ildaro.com/10465</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주변에 추천하려다가도 금세 머뭇거리게 되는 작품들이 있다. 미국 애니메이션 드라마 〈보잭 홀스맨〉(BoJack Horseman)은 내 최애 드라마 중 하나지만, 누군가에게 적극적으로 추천하기엔 조금 주저되는 작품이다. 보고 난 후에는 분명 드라마 속 우울이 전염되는 후유증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 우울은 인간의 유한한 삶, 행복의 가치, 고독, 무의미에 대해 고민하는 실존적 불안에서 기인한다. 작품의 표면적인 블랙코미디 아래에는 삶의 진실을 마주하는 데서 생기는 깊은 우울이 흐르고 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2946394936.jpe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미국 애니메이션 드라마 〈보잭 홀스맨〉(BoJack Horseman) (출처: 넷플릭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깊은 우울 속에서 발견한 것</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특히 주인공 보잭의 경우 처음에는 도무지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인물이기 때문에 짜증을 참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보잭은 자신이 힘들다는 이유로 타인에게 상처를 주며, 일을 미루고, 남 탓을 하는, 책임감이 없는 인물이다. 그건 현실이 무의미하다는 진실을 회피하기 위한 그만의 방식이다. 보잭은 시즌이 거듭할수록 현실도피가 녹록지 않다는 걸 깨달아가고, 점차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문제를 마주하기 시작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반면 보잭의 친구이자 작가인 다이앤 응우옌은 보잭과는 달리 현실을 냉철하게 관찰하고 주변 인물들에게 도덕적 나침반이 되어주는 좋은 사람이다. 하지만 종종 자신만의 도덕적 잣대로 타인을 평가하며, 자신의 기대에 못 미치는 자신에게 환멸을 느끼는 인물이기도 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여기 나오는 인물들은 나와 다르지만, 또 아주 다르지도 않다. 모든 일을 미루고 싶고 모든 것에 화내고 싶지만, 가까스로 일상을 유지하다가 연말이 되면 이때다 싶어 모든 걸 놓아버리고 방에 칩거하곤 하는 나는, 보잭과 그의 주변 인물들을 볼 때마다 ‘계속 그렇게 마음대로 살아달라’고 응원하고 싶은 마음과 ‘제발 정신 좀 차리고 책임감 좀 가지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을 모두 끌어안을 수밖에 없다. 이 드라마 속에는 분명 나의 아주 깊은 욕망이 감춰져 있는 게 분명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에피소드마다 어떤 문제가 있는 상황을 보여주는데, 결말에서 해결되긴커녕 더 심각해진 채 끝나기를 반복한다는 점이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이다. 그러나 〈보잭 홀스맨〉은 타인의 불행을 통해 상대적으로 괜찮은 나의 삶을 재확인하는 그런 종류의 드라마가 아니다. 시트콤의 문법처럼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이후에 모든 게 연기였던 것처럼 말끔하게 지워지는 가벼운 드라마도 아니다. 인물들은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문제 속에 갇혀있고, 스스로를 힘들게 하며 주변에 피해를 끼치는 일들을 반복하지만, 반복되는 상황 속에서도 어떤 것은 조금 달라져 있다. 이 미묘한 변화, 즉 제자리걸음 같아 보지만 아주 조금씩은 달라져 있는 세계의 진실을 알아차리는 재미가 여기 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수인 보잭 홀스맨과 인간 다이앤 응우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보잭 홀스맨〉을 볼 준비가 되었다면, 먼저 이 드라마의 세계관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반은 인간, 반은 동물의 모습으로 의인화된 수인(獸人)과 인간이 공존하는 세계관이다. 수인에는 각 동물의 특성이 반영되어 있어 개의 얼굴을 한 영화배우 미스터 피넛버터는 산만하고 해맑고 초인종 소리에 흥분하며, 고양이의 얼굴을 한 매니저 캐롤린은 예민하고 그루밍을 자주 하며 테이블에는 쥐 인형이 달려있다. 수인과 인간은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함께 자식을 낳기도 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인간의 세계와 동물의 세계가 혼합되어 있어서 종종 당황스러운 설정을 마주하는데, 이를테면 인간이 동물을 먹는 문화는 그대로라는 점이다. 레스토랑의 한 테이블에서는 인간 커플이 돼지머리를 먹고, 그 광경을 지켜보는 다른 테이블의 돼지 인간이 슬픈 표정으로 샐러드를 먹는 풍경이 공존한다. 드라마는 동물을 먹는 인간을 바라보는 혐오스러운 시선에 더 지배적인 감정을 투여하는 식으로 곳곳에 윤리적, 정치적 입장을 드러내고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주인공 보잭은 말과 인간의 모습을 함께 지닌 수인이다. 그는 인간 아이 3명을 입양해서 키우는 1990년대 인기 시트콤 〈말 장난〉(horsin Around)의 주연이었으나, 20년 후인 현재는 한물간 배우가 되어 있다. 그는 자신의 시트콤이 녹화된 비디오를 무한 돌려보며 영광스러운 1990년대를 그리워하는 할리우드의 중년 배우다. 보잭은 부모의 무관심으로 인한 정서적 학대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현실도피를 위해 술과 약물, 섹스 중독으로 허우적대는 철없는 어른이기도 하다. 그는 갱생의 여지가 안 보이는 문제적 인물로 표현되는데 그가 뭔가를 해결하려는 과정은 깊이 생각한 결과가 아니기에 줄곧 더 엉망이 된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2947316381.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애니메이션 드라마 〈보잭 홀스맨〉(BoJack Horseman) 중에서 서로의 상처를 공유하는 보잭과 응우옌의 뒷모습 (출처: 넷플릭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시즌1에서는 자서전을 쓰기로 해놓고 과거를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아 현실도피(술을 끝도 없이 마시거나 편집자의 전화를 받지 않는)하다가 우연히 파티에서 처음 만난 다이앤 응우옌에게 대필 작가를 제안하는 장면이 나온다. 응우옌은 금세 보잭이 회피하는 현실을 직시하게끔 조력하고 때로는 그의 거짓말을 간파하며 서로의 고민과 상처를 공유하는 사이가 된다. 이 드라마에서 보잭과 특별한 정서적 유대감을 나눌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후 응우옌이 써서 출간한 보잭의 자서전은 그가 회피하고자 했던 자신의 삶을 진실되게 보여주며 세간의 주목을 받고, 책을 통해 보잭은 처음으로 자신의 삶을 마주하게 된다. 그렇게 응우옌은 이 드라마 속에서 누군가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계기로, 자신의 글을 다른 이의 이름으로 발표한 유령 작가로, 파티 주최자 피넛버터의 애인으로, ‘응우옌’보다는 발음하기 쉬운 ‘다이앤’으로 불리며 존재한다. 하지만 응우옌에게도 당연히 자신만의 이야기가 있다. 시즌 5의 2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보잭이 아닌 응우옌의 시선만으로 채워져 있기에 특별하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진정한 ‘나’를 찾을 수 있을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응우옌은 누구인가? 그녀는 보스턴에서 태어난 베트남 이민자 2세로 설정되어 있다. 영어 실력은 유창하지만 베트남의 언어나 문화적 유산은 전혀 접한 게 없다. 그녀의 아버지는 대학에서 베트남 사학과 종신교수이지만, 딸이 자신은 왜 다른 아이들과 다르냐고 물어볼 때면 쓸데없는 소리 집어치우라고 대답하곤 한다. 심지어 베트남에 대한 지식이라도 알려달라고 하면, 집에서 쉬는 날엔 일 얘기하지 말라고 소리 지르는 그런 사람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녀는 똑똑하며 매사에 침착하고 감정보다는 이성이 먼저 작동하는 현실적인 인물이다. 성차별, 인종차별 등에 예민하고 사회비판적인 목소리를 잘 내며 글 솜씨가 있기에 작가로서의 욕망도 지니고 있다. 한편, 누군가에게 의지하길 원하고 그런 안정감을 욕망하기도 한다. 매사에 똑 부러진 모습이다가도 한번 무너지면 술과 약물에 빠져 누구보다(심지어 보잭보다도 더) 폐인처럼 지내기도 한다. 그래서 그녀가 자신의 바닥을 드러내고 슬픔을 ‘표현’할 때면 나는 정말 그녀의 뼛속 깊은 슬픔이 느껴진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 에피소드는 응우옌이 자신과는 너무 다른 피넛버터와의 결혼생활을 끝내고 합의 이혼을 결심한 뒤, 베트남으로 여행을 떠나는 내용이다. 응우옌은 자신이 ‘베트남에 가야 하는 이유 10가지’를 다음과 같이 나열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1. 자신의 뿌리를 재발견하기 위해 </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2. 여기선 여행자가 될 수 있기 때문 </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3. 이제 싱글이니까 원하는 걸 다 할 수 있어서 </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4.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어서 </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5. 천연 서식지(집)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6. 일을 휴가처럼 즐길 수 있기 때문 </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7. 심리 상담사가 가라고 했으니까 </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8. 새로운 나를 발견할 수 있어서 </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9. 일상에서 벗어나는 건 즐거운 일이니까 </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10. 집으로 돌아오려면 떠나야 하니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열 가지 이유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제로 그녀의 상상적 고향이자 여행지인 베트남에서의 현실은 기대와는 달랐다. 그녀의 눈앞에 펼쳐진 베트남의 거리풍경은 간판에도 응우옌, 쇼핑백에도 응우옌이라고 적혀있다. 미국에서는 모두가 그녀의 이름을 발음하기 어려워해서 대부분 ‘다이앤’이라고 불렀지만, 베트남에서는 ‘응우옌’이 너무나 흔한 이름이다. 그녀는 자신과 비슷한 얼굴의 사람들 속에 섞여 있으니 마음이 편하다고 하지만, 길에서 베트남 여성과 부딪혔을 때 언어가 전혀 통하지 않아 난처한 상황에 처하기도 한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2949043280.jpe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베트남 전통 의상이 마치 무대의상 같다고 생각하는 응우옌. 애니메이션 드라마 〈보잭 홀스맨〉(BoJack Horseman) 중에서 (출처: 넷플릭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호텔 로비에서는 미국에서 온 영화 촬영팀의 현장을 목격하는데, 그들이 찍고 있는 건 공교롭게도 ‘최근에 이혼한 여자가 자신을 찾아 베트남에 온 얘기’이다. 응우옌의 여정은 어딘가 익숙한 클리셰의 결말을 불안하게 암시하고 있다. 베트남 사람과는 말이 통하지 않고, 베트남 전통 의상을 입은 채 거울을 봐도 어색하기만 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하지만, 베트남에서 만난 외국인들의 눈에 그녀는 완전한 베트남 사람으로 비친다. 길에서 미국인 관광객 가족이 그녀에게 손짓발짓을 써가며 아주 느린 영어로 ‘당신 영어 할 줄 아냐’고 묻는다. 응우옌이 나도 미국인이라고 유창한 영어로 대답하자 놀란 것도 잠시, 다시 아주 느린 영어로 ‘나는 미국, 너는 베트남’ 이렇게 말한다. 또박또박 느릿느릿 영어로 말하는 태도는 베트남 얼굴을 한 여성이 결코 영어를 잘할 리 없다는 편견을 드러낸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마찬가지로 호텔의 바에서 만난 미국 촬영팀의 한 남성(그는 미국을 상징하는 독수리 모습의 수인이다)이 응우옌에게 손짓발짓을 써가며 맥주 주문하는 걸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응우옌은 아무 말 없이 그새 익힌 베트남어로 맥주를 대신 주문해 준다. 그리고 자신이 영어를 쓸 줄 아는 미국인이라는 걸 굳이 말하지 않는다. 영어로 말해도 소용없으니 베트남 사람으로 패싱을 하는 것이다. 그러자 남성은 ‘나 좋은 미국 남자’라고 말하며 데이트를 제안한다. 응우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웃으며 받아준다. 응우옌은 이 남성이 원하는 여성이 된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곧 응우옌은 자신이 영어를 잘한다는 걸 남성에게 들키게 되고, 그녀가 연기했다는 걸 알게 되자 남성은 치졸하게 분노한다. 이처럼 베트남에서 응우옌은 뿌리를 찾는 편안함도 느낄 수 없었고, 집을 떠나 완전한 자유로움을 느끼는 여행자도 될 수 없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개의 날들이 끝났다’…집으로 돌아오기 위한 여정</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 그럴듯한 자아 찾기, 고향 찾기의 여정은 실은 이혼으로 인한 공허함을 마주보기 힘들었던 응우옌의 도피 여행이기도 했다. 주변 인물들 사이에서는 도덕적 나침반의 역할을 하곤 했지만 막상 이혼하니 나침반도 지도도 없이 표류하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응우옌은 떠나기 전보다 더 깊은 외로움을 느끼지만, 드디어 자신의 고통을 마주해야만 한다는 당연한 사실 앞에 설 수 있게 된다. 이건 자주적인 여자의 멋진 자아 찾기, 뿌리 찾기, 정체성 찾기의 여정이 아니다. 뿌리는 고향에 간다고 저절로 발견되는 것도 아니며, 떠난 연인의 빈자리는 누구에게나 공허함을 남긴다. 응우옌은 평범한 여자의 클리셰를 마주한다. 피넛버터가 새 애인과 키스하는 장면을 목격한 뒤 마스카라가 눈물에 번질 정도로 서럽게 울며 집으로 돌아왔던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응우옌은 이제 솔직해진다. 베트남에 간 건 자신의 뿌리를 재발견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저 집으로 돌아오려면 일단 떠나야 하기 때문이었다. 떠나기 전과 떠난 이후의 응우옌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글을 잘 쓰는 좋은 사람이고, 누군가에게 의존하고 싶어 하면서도 독립적이길 바라는 모순적인 사람이다. 있는 그대로의 ‘나’는 생각보다 멋지지 않고 초라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깨닫는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또 부정하며 그녀는 조금 더 자신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살아갈 것이다. 유령 작가로 사는 자신의 삶을 정말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 자신을 무시하는 가족들을 계속 사랑할 수 있는지, 감정을 계속 억누르면서 살 수 있는지 그녀는 조금씩 자신에게 질문하기 시작할 것이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24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2950188270.jpg" alt="" width="724"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보잭 홀스맨〉(BoJack Horseman)에서 내가 좋아하는 응우옌의 얼굴. 행복을 찾는데 무관심해 보이는 응우옌의 행복을 진심으로 응원했다. (출처: 넷플릭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시즌 5의 2화 제목은 “그와 함께한 날들”이라고 번역되었지만, 영어 제목은 “The Dog Days Are Over”이다. 직역하면 ‘개의 날들이 끝났다’라는 의미로, 응우옌이 피넛버터와의 결혼생활을 끝내고 이혼한 극 중 서사를 반영한다. 하지만 ‘The Dog Days’는 너무 더운 날, 혹은 정체기를 의미하는 표현이기에 ‘이제 힘든 시기는 끝났다’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응우옌이 자신에게 존재하는 우울을 조금씩 응시하기 시작했으니 이제 다른 날들이 시작될 거라는 걸 암시하는 에피소드인 것이다. 타인의 우울과 고독, 고통이 반드시 의미 있는 기록이자 책, 혹은 예술이 되길 바라는 대필 작가 응우옌의 열망은 자신의 고통 또한 꼭 가치 있고 특별해야만 한다는 강박을 점차 내려놓고 시즌6에서는 가벼운 하이틴 추리 소설을 출간하며 자신과 화해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 에피소드에서 끝날 때 나오는 엔딩곡은 이 드라마의 테마곡 〈Back in the 90’s〉를 밴드 ‘Thao &amp; The Get Down Stay Down’의 리더 타오 응우옌(Thao Nguyen)이 변주해서 부른 것이다. 〈보잭 홀스맨〉은 오프닝에서 흘러나오는 테마곡 〈Back in the 90’s〉가 여러 버전으로 변주되어 엔딩에서 등장하곤 하기 때문에 엔딩 타이틀도 꼭 끝까지 봐야 한다. 덕분에 나는 Thao &amp; The Get Down Stay Down의 노래를 좋아하게 되었고 그녀의 음악들을 다 찾아 들어봤다. 그러다가 2020년에 발매된 앨범의 타이틀곡 &lt;Temple&gt;이 응우옌의 어머니에 대한 노래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span></p><p><br style="font-family: 바탕;" /><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 노래는 타오 응우옌의 어머니가 베트남 전쟁을 겪고 미국으로 이주한 이야기를 반영하고 있다. 가사에는 “나는 이제 나를 드러내고, 집으로 돌아간다(I’m coming out, I’m coming home)”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는 자신의 어머니가 전쟁의 생존자로서 살아남았음을 축하하며, 동시에 응우옌 자신이 퀴어 정체성을 드러내며 안식처를 찾았음을 중의적으로 드러낸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2951043669.jpe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밴드 ‘Thao &amp; The Get Down Stay Down’의 노래 〈Temple〉 (Official Music Video) <a href="https://www.youtube.com/watch?v=bRzQ6QY8d4U" target="_blank">https://www.youtube.com/watch?v=bRzQ6QY8d4U</a> (출처: 유튜브)</p></td></tr></tbody></table><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뮤직비디오에서 눈여겨볼 지점은 등장인물들이 손짓으로 아름답게 표현하는 가사의 내용이다. 이건 타인에게 자신의 언어를 전달하기 위해 자기중심적으로 표현했던 관광객의 손짓과는 완전히 다르다. 손가락을 꽃송이처럼 모으고, 공중에서 무언가를 움켜쥐고, 소중하게 숨기고, 비밀스럽게 어딘가에 다시 넣는 손짓이 보인다. 타오 응우옌은 베트남의 민속 무용에서 영감을 받아서 이 동작을 연출했다. 이는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삶을 가두었던 어머니의 기억을 형상화하며, 동시에 퀴어 문화에서 자신을 당당하게 드러내는 보깅(voguing: 흑인·라틴계 퀴어 공동체의 볼룸 문화에서 발전한 춤 양식) 동작을 형상화하여 타오 응우옌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는 모든 이들의 여정을 응원하는 이 아름다운 장면을 꼭 보길 바란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ab36c8;">[필자 소개] 전솔비</span>. 시각문화 연구자. 독립기획자. 정체성과 수행성의 문제를 연구하며 전시와 책을 만들어왔다. 동시대 현장에서 생산되는 이미지의 정치성과 예술적 실천을 탐구하며 예술가, 연구자, 활동가 동료들과 여러 협업을 이어가고 있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5-29 09:44:00</pubDate>
	   <section>sc7</section>
	   <section_k><![CDATA[문화]]></section_k>
	   <section2><![CDATA[만화/애니]]></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전솔비)]]></author>
	   <category><![CDATA[만화/애니]]></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5/2026052955358356.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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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아동들은 불법체류하지 않는다. 그냥 살아갈 뿐이다]]></title>
       <link>http://www.ildaro.com/10464</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얼마 전 SNS에서 짧은 TV 토론 프로그램 영상을 봤다. 주제는 ‘불법체류자 자녀에 대한 교육지원을 제한해야 하는가?’였다. 영상 속의 두 토론자는 자극적이고 빠른 속도로 자신의 주장을 주고받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교육지원을 제한해야 한다는 측의 패널은 “불법체류자 자녀에게 교육지원을 하는 것이 우리 사회에 ‘불법체류를 해도 된다’는 공공의 메시지로 읽힐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 한국은 OECD 국가들 중에서도 이주민이 가장 빠르게 늘어나고 있음을 지적하며, 미국이나 유럽의 경우, 이주민들을 포용하는 정책을 통해 이주민이 늘어나 사회적 혼란이 발생한다는 이야기도 하였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짧은 영상 속의 그 말들은 꽤 그럴듯하게 들렸다. 불법에는 책임이 따라야 한다는 말, 정부가 불법체류자에게 혜택을 주면 안 된다는 말, 선진국의 실패를 반복하면 안 된다는 말. SNS에서는 그런 말들이 특히 더 “현실적인 이야기”처럼 소비되고 있었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 </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런데, 영상을 다 보고 나서도 계속 마음에 남는 게 있었다. 그 토론에는 정작 당사자인 아동은 없었다. 미등록 체류 아동에게는 생존과 정체성과 관련된 삶의 절박한 문제가, 누군가에게는 그저 논리 게임으로 취급되는 상황이 씁쓸하게 느껴졌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불법체류자 자녀’라는 말</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불법체류자 자녀”라는 단어는 이상하다. 그 말은 아동을 아동의 존재가 아닌 부모의 체류자격으로 설명하고 정의 내린다. 그 단어에는 아동의 이름도, 나이도, 학교도, 친구도 사라지고 부모가 출입국관리법을 위반한 사실만 강조되고 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2715113340.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24년, 이주민센터 친구에서는 ‘미등록 이주 아동 구제 대책’을 통한 체류자격 신청을 위해 당사자 아동과 동행하였다. 해당 아동은 미등록 외국인이었지만, 한국에서 태어나 10년 이상을 한국에서 성장한 아동이었다. [사진 제공-이주민센터 친구]</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주변의 사람들은 〈이주민센터 친구〉에서 일하는 나에게 ‘그래도 사람들이 아동에 관해서는 연민을 느끼고, 인도적인 처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라고 물어본다. 그러나 생각보다 놀랍게도 그 앞에 ‘불법체류’라는 단어가 붙는 순간 많은 사람들의 생각은 반대로 뒤집힌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안타깝지만, 한국 사회에 있으면 안 되는 존재’, ‘한국 국적의 아동과 동일하게 취급될 수 없는 존재’, ‘기본적 생존권이 보장되지 않아도 어쩔 수 없는 존재’로 둔갑하게 된다. 그리고 아동이 왜 여기 오게 되었는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무엇을 선택할 수 있었는지 등의 이야기는 사라지고, 그냥 ‘불법 상태의 사람’처럼 취급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하지만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다. 아동은 자신의 미등록 체류 상태에 대해 어떠한 책임도 없다. 아동은 그저 이 사회에 그냥 살게 된 존재들일 뿐이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아동에게 이곳은 삶의 자리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아동들은 자기 체류자격을 선택하지 않았다. 어느 나라에서 태어날지, 어느 나라에서 살지, 부모의 체류자격이 언제 만료될지, 가족이 어떤 사정을 겪게 될지 아동이 스스로 결정한 것은 전혀 없다. 그런데도 아동은 어느 순간 자기 삶 전체를 “불법”이라는 말로 설명 받게 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가만히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다. 아동은 학교에 가고 친구를 사귀고 급식을 먹는다. 친구들과 한국어로 웃고 싸우고 화해한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국가와 사회가 아동에게 너는 원래 여기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물론 조금씩 나아지는 부분도 있다. 미등록 체류 상태라고 해서 초·중등학교에 다닐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학교 현장에서는 미등록 이주아동의 경우에도 전·입학을 받아주거나, 미등록 이주아동에 관한 학적 관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매뉴얼이 배포되기도 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하지만, 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것과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또한, 아직도 미등록 체류 아동은 학교 다닐 수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거나, 노골적으로 배제하는 학교들이 여전히 존재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아동들은 불안과 위험 속에서 산다. 부모가 단속될까 봐 걱정하고, 병원비 때문에 아픈 걸 참기도 하고, 어떤 서류를 냈다가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닐지 겁낸다. 어디까지 말해도 되는지 몰라서 학교에서도 조심한다. 친구들에게 자기 상황을 숨기는 아이들도 많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생활의 측면을 넘어 실제 행정·법적 영역에서도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외국인등록번호가 없거나 유효하지 않아서 사회 복지서비스, 의료서비스, 각종 보험서비스를 이용하지 못하거나, 대학교 진학 시에도 문제가 발생한다. 범죄나 법률적인 문제에 부딪혔을 때도 선뜻 경찰서, 노동청, 법원의 도움을 받기 힘들다. 왜냐하면 ‘불법체류’ 아동에게 그런 곳들은 오히려 피해야 하는 기관이기 때문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특히 한국의 현재 미등록 이주아동 체류 대책은 ‘한시적’이고 제한적이다. 일정 요건을 충족해야 하고, 부모의 체류 문제나 벌금 문제도 얽혀 있다. 아동의 권리를 말하지만, 실제 절차에서는 아동이 해결할 수 없는 어른들의 사정이 계속 따라붙는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2712091712.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25년, ‘미등록 이주아동 체류권 보장’을 촉구하며 이주아동 당사자, 시민사회단체가 함께 진행한 기자회견. [사진 제공-이주배경 아동·청소년 기본권 향상을 위한 네트워크]</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과 교육은 ‘혜택’이 아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미등록 이주 아동에 대한 논의에서는 항상 다음과 같은 주장이 따라온다. 불법체류를 한 부모에게 국가가 혜택을 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동의 교육은 부모에게 주는 보상이 아니다. 아동이 학교에 다니거나 최소한 인간다운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국가가 부모의 체류 위반을 눈감아주는 행위가 아니다. 그냥 아동이 아동답게 살 수 있도록 하는 최소한의 조건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부모에게 책임을 묻는 문제와, 아동을 학교 밖으로 밀어내는 문제는 같은 것이 아님에도, 우리 사회는 이 두 가지를 항상 섞어서 이야기한다. </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특히 온라인 공간에서는 더 그렇다. “세금”, “역차별”, “국가 부담”, “사회 혼란” 같은 말들이 아동의 본질적인 삶보다 먼저 나온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물론 사회적 논의는 필요하다. 이주 정책에 대한 입장이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최소한 아동의 문제를 이야기할 때는, 아동을 하나의 정책 변수처럼만 다루지는 말아야 한다. 아동은 국가의 인구정책이나 출입국정책을 계산하면서 태어난 존재들이 아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아동들은 그냥 살아가고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현장에서 만나는 아동들은 거창한 걸 요구하지 않는다. 학교를 계속 다니고 싶다고 말한다. 친구들과 헤어지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아플 때 병원에 가고 싶고, 졸업하면 뭔가 준비해 보고 싶다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자꾸 이 아동들을 예외적인 존재처럼 취급한다. 임시대책의 대상, 한시적 구제의 대상, 특별 허가의 대상으로 부른다. 하지만 아동의 삶은 임시적인 것도 아니고, 예외적인 것도 아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아동은 오늘도 학교에 가고, 친구를 만나고, 시간을 보내며 자란다. 행정은 몇 년 단위로 대책을 연장할 수 있지만, 아동은 그 사이에도 계속 성장한다. 열 살의 불안은 열다섯 살의 침묵이 되고, 스무 살의 막막함으로 이어진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주배경 아동ㆍ청소년 기본권 향상을 위한 네트워크’는 2025년 국내 체류 미등록 이주아동의 권리 보장과 구제 대책의 상설화를 요구하며 “Let Us Dream” 캠페인(<a href="https://letusdream.campaignus.me" target="_blank">letusdream.campaignus.me</a>)을 시작했다. 여기 참여한 한 청년은 체류자격을 얻고 나서야 “처음으로 미래를 생각할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이전까지는 내일 학교에 갈 수 있을지, 한국에 계속 머물 수 있을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아이들에게 체류자격은 단순한 행정상의 지위가 아니다. 비로소 자기 삶의 미래를 상상할 수 있게 되는 최소한의 조건에 가깝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세상의 모든 아동에게는 그런 자리가 필요하다. 자기 존재를 의심받지 않는 사회. 내일도 학교에 갈 수 있다고 당연하게 생각할 수 있는 사회. 아동은 불법체류하지 않는다. 아동은 그냥 살아간다. 다만 어른들이 만든 제도가 어떤 아동들의 삶을 “불법”이라는 말 아래 밀어넣고 있을 뿐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973ec1;">[필자 소개] 이제호</span>. ‘이주민센터 친구’에서 상근변호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아동·청소년 인권, 교육기본권, 이주인권 분야에 관심이 있습니다. 최근에는 이주배경아동의 기본권 보장에 대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5-27 10:04:00</pubDate>
	   <section>sc4</section>
	   <section_k><![CDATA[국경너머]]></section_k>
	   <section2><![CDATA[이주]]></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이제호)]]></author>
	   <category><![CDATA[이주]]></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5/2026052714066851.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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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스쿠버 다이빙도 하는데 왜 비행기에서는 혼자 못 내려오는가”]]></title>
       <link>http://www.ildaro.com/10463</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지난 5월 15일자 〈비마이너〉에 보도된, “티웨이항공, 6개월도 안 돼 또다시 장애인 차별” 기사는 Moon의 이야기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스쿠버 다이빙을 하기 위해 제주에 도착한 우리는 비행기에서 계단을 통해 내려와야 했다. Moon의 배우자는 밑에서 Moon을 받치고, 나는 옆에서 Moon의 바지 뒤춤을 잡고 내려왔다. 열몇 개의 계단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자칫 잘못하면 셋이 함께 굴러떨어질 상황이었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건 이 기사에 달린 댓글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스쿠버 다이빙도 하시는데 비행기에서는 혼자 못 내려오시나.”</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탄성이 나왔다. 역설적으로 핵심을 드러내는 질문이다. 정말이지, Moon은 스쿠버 다이빙도 하는데, 왜 비행기에서는 혼자 내려오지 못할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우리는 일반적으로 가능과 불가능을 가르는 것은 능력, 기능, 체력, 장애 유무… 등이라고 여긴다. 그렇다면 능력도, 체력도, 뇌병변으로 몸의 기능도 제한적인 Moon이 어떻게 스쿠버 다이빙을 하고 있는 것일까? 숙련된 기술을 요하는 스쿠버 다이빙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어떻게 비행기 계단을 내려오지는 못하는 것일까?</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253254172.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항공사 측이 리프트를 제공하지 않아 Moon이 계단으로 내려오고 있다. Moon이 제어가 가능한 왼손으로 난간을 잡기 위해 뒤로 돌아있고, Moon의 배우자와 활동지원사인 호미가 부축하고 있다. (사진: 방준식 감독 제공)</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몸에 맞는 장비들을 구하고, 맞추고, 바꾸고, 닦고, 말리고…</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제주 섶섬에서 다이빙을 마치고 씻고 나왔을 때였다. 장애인 스쿠버 다이빙을 6년째 하고 있는 감태 활동가(제주해녀문화연구원 원장, 참고 기사 <a href="https://ildaro.com/10381" target="_blank">https://ildaro.com/10381</a>)가 잠수복과 장비들을 닦고, 말리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감태 씨는 지난 2월부터 서울과 용인 잠수풀 연습 때마다 이 장비들을 가지고 올라왔는데, 매번 이런 뒷설거지를 홀로 해왔을 거라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돕겠다 나서니 호흡기 같은 장비는 건조하게 유지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에 본인이 한다고 그만두란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뒷일이 이렇게 많을 거라 생각 못했어요. 용인까지 오시고, 강습해주시는 것만 해도 큰일이었을 텐데….”</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감태 씨가 크게 웃었다. </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예요. 사람에 맞는 장비 궁리하는 거에 비하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제주에서 강습을 위해 용인으로 올라오는 감태 씨는 매번 아주 커다란 가방을 가지고 왔다. 다른 사람 장비는 잠수풀장에서 대여했지만, Moon의 몸에 맞는 장비는 대여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호흡기의 마우스 피스가 Moon의 입에 맞지 않아 아동용으로 바꿔 끼웠다. 호흡기가 벗겨질 때 찾아 다시 끼우기가 힘드니, 호흡기에 고무줄을 매어 목에 걸었다. Moon의 다리가 물 속에서 벌어지는 것도 문제였다. 감태 씨는 두 다리를 잇는 벨트도 찾아 왔다. 그리고 다리가 아래로 내려가도록 벨트에 맬 천 웨이트(무게추)도 구해왔다. 보통 웨이트는 납이라 Moon의 발목 부상이 우려되기 때문이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렇게 구해온 장비들도 바뀌기 일쑤였다. 호흡기 호스는 보통 오른쪽에 달려 있는데, Moon은 왼손만 쓸 수 있으니 왼쪽에 호스가 달린 것으로 바꿔 왔다. 하지만, Moon이 여전히 불편해하자, 좌우 양쪽에 호스가 달려 있는 호흡기를 가져왔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가장 어려웠던 문제는 체온 조절이었다. Moon은 체온 조절이 힘들다. 온도가 떨어지면 호흡이 힘들어진다. 호흡은 스쿠버 다이빙의 생명. 일반적으로 입는 3mm 잠수복으로는 체온 유지가 어려웠다. 그래서 감태 씨는 5mm 잠수복을 가지고 다녔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번 5월 제주 바다 다이빙을 앞두었을 때였다. 미리 답사를 다녀온 감태 씨가 긴급 상황을 알려왔다. 바다 온도가 17도. 5mm 잠수복으로도 해결이 힘든 상황이었다. 감태 씨는 수중 발열조끼를 준비하고, 잠수복 제조업을 하는 지인이 7mm 잠수복을 기부하기로 했다. 덕분에 공항 앞 공터에서 잠수복을 맞추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물론 7mm 잠수복은 엄청난 고가이다. 민간단체인 제주해녀문화연구원에 이런 큰돈이 있을 리 없다. 이런 기부를 감태 씨는 ‘일종의 품앗이’라고 말한다. 이 잠수복은 Moon이 입고 제주해녀문화연구원에 기증된다. 덕분에 누구라도 몸에 맞는 사람은 입을 수 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2533186537.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Moon이 손으로 이퀄라이징(압력 평형 맞추기)을 하며 입수하고 있다. 물속에서 빠질 때를 대비해 줄로 묶은 호흡기, Moon의 입에 맞는 마우스피스, 다리 벌어지는 것을 방지하는 벨트, 무게를 잡아주는 천 웨이트, BCD(부력조절장치) 양방향 호스, 7mm 두께의 잠수복 등은 Moon의 몸에 맞춰 바꾸고, 맞춰온 것들이다. 사진에 나오지 않지만 Moon 바로 앞에서 함께 다이빙하고 있는 감태 씨까지. 이들 덕분에 Moon의 다이빙은 가능해졌다. (사진–호미 제공)</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승객에게 맞는 장비 구하는 대신, 양해를 구하는 이유</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감태 씨는 끝없이 궁리하며 Moon의 몸에 장비들을 맞추어 갔다. 반면, 티웨이항공은 감태 씨와 전혀 다른 경로를 걷는다. 티웨이항공은 Moon에게 반복해서 ‘양해’를 구했다. 더할 수 없이 친절한 목소리로 직원은 Moon에게 걸을 수 있는지 물었다. (걸을 수 있다면 왜 휠체어를 타겠는가?) 걸을 수 없다고 대답하자, 그의 말이 걸작이었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 편이 탑승교가 배치되지 않는 편이라서요. 양해를 구합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양해 요청은 겉으로는 동의를 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비행기를 소유하고, 비행기 운항 일정과 리프트 설치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자원을 가진 항공사가 탑승이 절실한 개인에게 거듭 구하는 ‘양해’는 거절 가능성이 없는 허위 선택지다. 우리는 이를 ‘차별’ 혹은 ‘갑질’이라고 부른다. 항공사는 ‘양해’를 해주는 장애인의 ‘선의’를 이용해 차별을 지속하기를 선택하고, 비용을 절감하고, 수익을 유지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예약한 장애인이 있어도 탑승교를 설치하지 않고 ‘양해’를 구하는 것이 매뉴얼이 되고 규정이 된다. 매뉴얼이 되고 규정이 되면, 그 자리에 어떤 직원이 와도 반복된다. 6개월 후에도 똑같은 문제를 일으키고, 공식적인 사과를 하고도 다시 같은 잘못을 한 이유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뿐 아니다. 먼저 계단을 내려온 비장애인 승객들은 공항버스에 타서 Moon과 우리가 벌벌 떨며 내려오는 것을 모두 지켜보았다. 그들에게 제대로 걷지 못하는 몸만 보였고, 탑승교가 설치되지 않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불가능’이라는 허구는 이렇게 수행된다. 계단을 내려온 후 2주 째, Moon의 발목 통증이 여전히 심하다. 평소 하던 동작이 안돼서 아찔한 순간이 자꾸 발생한다. 이 ‘허구’ 수행의 비용은 온전히 장애 몸이 치른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양해를 거부하자, 놀랍게도 리프트가 나왔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다이빙을 끝내고 돌아가는 비행기 타기 두 시간 전, 항공사에서 전화를 걸어왔다. 다시 걸을 수 있는지를 묻고, 못 걷는다고 하자, 이번에는 4시간 후 비행기편을 이용하면 안 되는지 ‘양해’를 구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제주 가는 비행기에서 다이빙 일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계단으로 내려왔던 Moon은 이번에는 양해하지 않기로 선택했다. 리프트가 마련될 때까지 버틸 작정이었다. 그러자, 시간에 맞춰 리프트가 나왔다. 우리는 리프트를 타고 순조롭게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이제 Moon의 비행기 탑승은 ‘가능한 일’이 되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불가능과 가능을 가르는 것이 능력, 기능, 체력, 장애 유무가 아니라, 시스템과 환경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이것이 올해 4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장애인권리보장법의 핵심이다. 40년 전에 제정된 심신장애자복지법이 장애를 “개인의 손상”으로 본 데 반해, 장애인권리보장법은 장애를 “사회의 문화적·물리적·제도적 장벽 등 환경적 요인과 개인적 요인의 상호작용으로 일상생활 및 사회참여 제약이 발생하는 상태”로 명시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2534007870.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Moon(가운데)이 35m 아래로 다이빙해 자세를 잡았다. 35m는 아파트 12층 높이 아래다. Moon의 가슴에 “장애인도 시민으로 이동하는 민주주의” 몸자보가 보인다. 사진 왼쪽이 감태 씨, 오른쪽이 Moon을 이어 강습을 받기 시작한 이규식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대표의 활동지원사이다. 이규식 대표는 스쿠버 다이빙을 하기 위해 백방으로 방법을 찾았지만 못 찾고, 활동지원사가 다이빙 자격증을 따도록 하였다. 그러다 Moon을 통해 감태 씨를 소개받고, 직접 강습을 받기 시작했다. (사진 제공-호미)</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며칠 전 잠수풀에서 Moon은 35m까지 내려갔다. 물론 감태 씨와 함께. 다음 날 제주로 돌아간 감태 씨가 텔방에 올린 글.</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스스로 이퀄라이징 하고, 마스크 조절하고, 두 다리도 자연스럽게 뻗어지고 있어요. 물에 많이 적응한 거죠. 다이빙의 궁극적 목적은 물속에서 안전하게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건데, Moon님은 스스로 할 수 있는 선까지 상당히 도달했어요.”</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덧붙임: 댓글 쓰신 분께</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좋은 질문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비행기 탑승구에서 지면까지 2.7m. 비행기에서 아무 장비 없이 혼자 힘으로 내려올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고도로 훈련받은 소방관이나 암벽 등반 선수도 장비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탑승교, 계단, 리프트가 있는 것입니다. Moon은 이 중 탑승교와 리프트로, 그리고 비장애인은 계단의 도움으로 내려오는 겁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c53ab4;">[필자 소개] 호미</span>. 장애활동지원사이며 동화 집필 노동자. 전국귀농운동본부 ‘귀농통문’ 편집위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장애활동서비스 이용인’ Moon을 돌보고 Moon으로부터 돌봄을 받으며 하루하루 연명합니다. 일하고 사랑하며, 투쟁하고 놀며 새로운 몸으로 되어갑니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5-25 10:29:00</pubDate>
	   <section>sc5</section>
	   <section_k><![CDATA[소수자 시선]]></section_k>
	   <section2><![CDATA[장애]]></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호미)]]></author>
	   <category><![CDATA[장애]]></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5/2026052537273900.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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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What I Discovered While Making a ‘Sexuality Map’]]></title>
       <link>http://www.ildaro.com/10462</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Editor’s note: The “Let’s Talk about Sexuality” series explores the diverse values and experiences that women in their twenties have with regards to sex, bodies, and relationships. Through it, Ilda hopes to create a new, feminist sexual discourse. The series is funded by the Korea Foundation for Women’s Gender Equal Social Development Project.</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Girls’ secret masturbation and guil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Men’s sexual desire is everywhere in society. Adolescent boys’ masturbating and watching porn is treated as completely natural. In fact, boys who don’t do those things are picked on. That’s the degree to which male sexual desire is seen as not just natural but something that must be expressed.</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t’s easy to find information on male masturbation methods, and the information is imparted kindly. Advice like ‘use gel so that you don’t take off any skin’, ‘make sure to wash your hands afterward’, and ‘don’t grip your penis too hard or you may not be able to feel much when you have penetrative sex later’ is even shows concern for the recipient’s future pleasur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n contrast, female sexual desire can’t exist. It’s not that it doesn’t exist, it’s that it can’t. Society won’t allow it to. Is there a place for adolescent girls to learn ways to masturbate? Not only are they not given that kind of information, but it’s common for girls to begin masturbating without even knowing what masturbating is. And they feel guilty without knowing why.</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Male sexual desire is permitted to exist anywhere, but women’s nowhere. Women even fake orgasms when having sex with men in order to fulfill that male desir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Of course, some women do let it be known that they have sexual desires. But those who freely talk about sex and their sexual tastes and preferences in front of men are then treated by those men as “bodies I can have sex with”. The women are called “easy”, “cheap”, and “slutty” and have to endure come-ons from men who want to have sex with them. If they reject those advances, they are resented and, in the worst cases, subjected to violenc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Why won’t you sleep with me?’ seems to have become a widespread attitude among Korean men toward women.  If a rumor spreads that a woman has slept with one man, it’s like she becomes the public property of all men. Women who express their sexual desire and live sexually liberated lives face this risk. </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What do I really wan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ve been very interested in sexual matters since I was young, and I still am today. I first remember masturbating when I was four years old. If I put my blanket between my legs and put pressure on it, I felt good. I didn’t understand what was happening or why I felt good, but I knew that I didn’t want anybody to see me doing tha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fter I realized that this was masturbation, I often felt a crushing sense of guilt about my dirty, impure thoughts. Even after I found feminism and learned that female desire is natural, this guilt didn’t go away. This deep-seated feeling could only be defeated by gathering with other women and talking about i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n March, I was part of the planning committee for Fireworks Femi-Action’s latest feminists’ sex ed event. The theme was “Sex That’s For Me”, and I was in charge of an activity called “Making my Sexuality Map”. It was a chance for participants to get to know their sexuality and sexual tastes and think about their right to sexual self-determinatio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Women don’t have many chances in their everyday lives to think or talk about their own sexuality, and the social environment doesn’t condone it. So during the program, we talked to each other about our sexual tastes and spoke freely about what kind of mood, acts, and so on turned us o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Personally, I hoped that by thinking about their fundamental desires, participants would even be able to think about their sexual orientation and whether it wasn’t aromantic or asexual. This was because while trying out the program myself, I had become certain that I was aromantic.</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60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2456019107.jpg" alt="" width="60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My Sexuality Map. This map includes Castle, Forest, Harbor, Inland, Boat, Sea, and Another’s island. ©Fireworks Femi-Action</p></td></tr></tbody></table><p><span style="color: #2269dd; font-family: georgia, palatino;"><br />[(Name)’s Sexuality Map</span></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Castle: I really like that, come in (a space for writing down the acts that you like the most)</span></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Forest: I want to do that secretly </span></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 Harbor: Shall I try that?</span></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nland: I like that</span></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oat: Not yet, but maybe later</span></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Sea: I probably won’t ever do that</span></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nother’s island: Meh, I’d rather eat cake (asexuals’ territory, a space for writing down things that aren't for m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 explained the activity to the sex ed participants, and they wrote their desires and dislikes down on post-its. These could be sexual or romantic. Then I collected all of the post-its and read them out loud.  The participants listened to each desire, thought about what it meant to them, and wrote it in the appropriate space in their map.</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Desires have to first be brought forward in order for us to know whether we really hold them or not. I wrote the common TV drama situation of ‘wrap a scarf around my partner and give them a peck’ in the harbor box, but ‘visit a rooftop bar to listen to music and hold hands’ went into the sea box.</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Really, on my map, a lot of things that weren’t pretty directly connected to sex went into the sea box. But some things that the media tells us are romantic went into the harbor or forest boxes. However, I realized that this was because I was confusing society’s ideas of desires for my own. When I think hard about it, I realize that since I was little I’ve never imagined or dreamed about romantic situations. But I’ve longed for them. I was brainwashed into believing that women naturally long for love and romance, just like I used to think that actions like men trapping women against a wall, forcibly kissing them, etc. were romantic.</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Our sexual fantasies are all differen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y leading this program, I not only learned about the true nature of my own sexual desires, I also learned that other women have sexual desires and that these are every bit as explicit as men’s. Each post-it described one desire and participants were asked to make three post-its, but some of them made 10 or more. It was even more amazing to find, when I read the post-its, that every desire was different. This was true even if they seemed similar on the surface. For example, ‘holding hands’ showed up several times, but each time it was in a different situation – while lying naked in bed, to draw on each other’s palms as a joke, while watching a movie, and so o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n particular, “Meow”, a post-it I made, was wildly popular. In my imagination, it was something to say while engaging in “cat-play” (acting like a cat during sex), but I was surprised and pleased to find that others had other interpretations and imagined uses of it, such as as a prelude to sex or as a way to act cute. The wide variety of other sexual fantasies mentioned included having sex in an outdoor place like a swimming pool, mutual masturbation facing one’s partner in a brightly-lit place, and sex in a cramped car.</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ll that time, I had thought that my thoughts were dirty, but as I listened to the other women, I realized that those thoughts were completely natural. When, as a little girl, I had masturbated while thinking about animated characters kissing each other, I hadn’t been strange, perverted, or impure for a girl. This was natural behavior for a human born with sexual desires. When I learned that the desires I had thought to be excessive weren’t and, what’s more, that everyone was harboring all these different sexual desires, my guilt disappeared.</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fter filling out my map, I learned a new fact about my sexual tastes. I hadn’t thought that I was an S&amp;Mer (someone who enjoys sadomasochism), but it turned out that I tend towards sadism. I like catheters and anal plugs, and dream of various types of S&amp;M play. I like imagining my partner saying, “I’ve been bad,” and, “Forgive me,” with their eyes full of tears. (Though, of course, this kind of play can only be engaged in with consent.) I had to fully express my fantasies before I could really come to know myself.</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60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2456589635.jpg" alt="" width="60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From Fireworks Femi-Action’s “Feminist Sex Ed” program in March. ©Ilda (Park Ju-yeon)</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 font-weight: bold;"><br />A society filled with men’s rape fantasie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s a 21-year-old, I’m a legal adult who can have sex freely if she wants. These days, most youth start watching porn as adolescents. But both porn and mutually consensual sex are still not very friendly to women. Porn is heterocentric and clearly aimed towards men. A majority of its scenes feature violence against women, and I feel sick when I watch i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 first porno that I watched featured the rape of a woman. I felt uncomfortable for a few days after seeing it. Instead of turning me on, it had made me worry that I would be raped. I wondered how I should deal with being raped if it happened, and even – though this is the extreme choice – if I should kill myself.</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 video was one that my older brother had downloaded and hadn’t gotten around to deleting. It made me queasy to think of him using something like that to masturbate. After that, as I saw more of that type of media, I got used to the idea that some people used it to turn themselves on. But getting used to the idea didn’t mean that I liked i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 still struggle to find videos to masturbate to that are racy, don’t make me feel scared, have a story that I can understand, and feature handsome actors. I look here and there for porn made from women’s point of view, not this crap drenched in men’s fantasie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 world around me only talks about sex that is for men and led by men. In that world, there’s no opportunity for me to consider whether I’d like S&amp;M and no place for women to discuss our sexual fantasies. In a situation where it’s difficult to even find content that stimulates my sexual imagination, it’s not surprising that I didn’t discover my real sexual tastes until I was 21 years old. Maybe it’s lucky I discovered them at all.</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re are still few places where women can safely reveal the existence of their sexual desire. In fact, I think you could say there are none. We can’t even reveal it to our partners, out of fear that we’ll look “too experienced”, seem easy, or that our partner will go around telling other people about it after we break up.</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n contrast, male sexual desire is projected even into objects – like women’s stockings, girls’ school uniforms, socks, etc. And that desire transfers over onto the people wearing them. When I was a high school student, an adult man asked me to sell him my used stockings for 50,000 won [45 USD]. In this way, women’s very existence is sexually objectified by men. Meanwhile, women’s sexual desire is always being obstructed and poses a threat to its owner if it erupts.</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Crying out my sexual desire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Really, it’s not just women’s sexual desires but any type of female desire that society does not tolerate. Working women who desire promotions are criticized as overbearing, and women who desire material possessions are called snobs. Society is scared of the idea of women having desires, because its continued existence relies on their oppression. The desires to enter the workforce, to be free of having to care for children, or to at least choose a better husband (a desire that used to be necessary for survival) are treated as personal, narrow-minded, and unacceptabl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 In the stories I’ve heard since I was young, men risking their lives and fighting to get a pretty bride have been depicted as brave, but women fighting for a good husband have been treated as greedy and awful. In fairy tales like “Kongjwi and Patjwi” and Cinderella, it is the “pure” woman with no desires who gets a good husband. In past society, wives were seen as men’s accessories, while husbands were needed for women’s survival. This situation meant that of course women had to choose the best possible men for their husbands. But men couldn’t accept the thought of needing to be chosen and so kept the power of choice all for themselve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Society is still scared of female desire and doesn’t want to listen to women’s voices. Men enjoy women talking about their sexual desires as long as they keep within the limits set by men. Think about it – whose sexual desires are reflected in the pop idols dancing suggestively on TV while wearing school uniforms, in the child models wearing adult-style makeup, or in the very existence of tight-fitting school uniform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So it was even more meaningful that women gathered to talk about their sexual desires and fantasies and make sexuality maps. By candidly revealing their desires and talking about how others’ desires sound and what they mean to them, the women were able to rethink their sexuality. They realized what they liked and what made them uncomfortabl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f women want to, they can have this kind of talk anytime and anywhere, and until the day that doing so becomes normal and not fodder for men to consume, I’m going to keeping crying out my desires to the world. <span style="color: #2269dd;">[Translated by Marilyn Hook]</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Original article:</span> <a href="http://ildaro.com/8214" target="_blank">http://ildaro.com/8214</a> Published May 29, 2017</p>]]></description>
       <pubDate>2026-05-24 13:49:00</pubDate>
	   <section>sc100</section>
	   <section_k><![CDATA[English Article]]></section_k>
	   <section2><![CDATA[]]></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Gift)]]></author>
	   <category><![CDATA[English Article]]></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601'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5/2026052401409246.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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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여성들의 커먼즈 생태계, 초록상상의 ‘메티스’ 연대기]]></title>
       <link>http://www.ildaro.com/10461</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color: #266ad8; font-family: 바탕;">[연구소개] 이지아는 석사학위논문으로 「<a href="https://skhu.dcollection.net/srch/srchDetail/200000964977" target="_blank"><span style="color: #266ad8;">지역여성들의 실천적 지식으로 만드는 커먼즈 생태계 – 중랑구 초록상상의 활동 사례 연구</span></a>」를 썼다. 동북여성환경연대 초록상상의 18년 활동사를 정리한 작업으로, 지역여성운동의 의미를 재조명하며 사적 영역에 머물던 여성들의 일상 경험과 실천이 어떻게 공적 실천으로 확장되며 ‘호혜적 돌봄 커먼즈 생태계’를 구축해 왔는지 분석하였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2304539309.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서울 중랑구에 위치한 ‘초록상상’에서 만난 이지아 연구자. 석사 논문으로 「지역여성들의 실천적 지식으로 만드는 커먼즈 생태계 – 중랑구 초록상상의 활동 사례 연구」를 썼다. (조영주 촬영)</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span><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초록상상은 서울 중랑구 지역의 유일한 여성환경단체로 소개되고 있는데요. 어떤 곳인지 소개해주세요. 이지아 씨(활동명: 다달)는 초록상상을 어떻게 만나게 되었나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초록상상은 2007년 설립되었고, 중랑구 지역 여성들이 함께 건강하고 생태적이며 성평등한 마을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풀뿌리단체입니다. 도서관에 갔다가 초록상상의 ‘생태 안내자 양성과정’ 홍보 포스터를 보고 초록상상을 처음 접하게 되었어요. 생태 안내자라는 말이 낯설기도 했지만 신선했어요. 우리 지역을 생태라는 관점으로 다시 볼 수 있는 기회인데, 이런 시선의 강좌가 있다는 게 신기했고, 강좌에 누가 올까 궁금했어요. 여성만 모집한 것도 아니었는데, 참여자 모두 여성이었어요. 여성들이 공동체를 위해 뭔가 해보겠다고 자신의 시간과 재능을 발휘하는 장이 열린 것 같았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내가 사는 공간 혹은 내가 항상 오고 갔던 공간을 새롭게 둘러보고, 거기에 있는 생태계 구성원들을 돌아볼 수 있었어요. 봉화산과 각 아파트 화단에 있는 나무들도 생태계의 한 부분이죠. 텃밭의 작물도 단순히 우리가 먹을 식재료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흙부터 시작해서 흙을 뒤집을 때 나오는 곤충들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농사를 도와주는 생태계의 중요한 부분이라는 점을 인식할 수 있었어요. 텃밭에서 밥상까지, 먹거리가 어디서 어떻게 어떤 노동을 거쳐서 오는지 연결되는 감각, 생태적 감각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현재는 초록상상에서 어떤 일을 하고 계신가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2007년 초록상상 창립 직후부터 생태팀, 성평등팀, 돌봄팀의 활동가로 참여하였고, 2021년까지 팀장과 사무국 활동가, 사무국장을 맡아 단체의 핵심 의제와 사업을 직접 기획·수행하였습니다. 현재는 ‘창립 20주년 단체사 기록 TF팀’의 일원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초록상상의 활동 사례 연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나 문제의식은 무엇이었나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초록상상의 활동은 2007년부터 지속되고 있지만, 단체의 역사는 체계적으로 기록되지 못했습니다. 1~4명의 비상근 사무국 인력과 240여 명의 회원 회비로 운영하다 보니 현실적 제약이 있었어요. 초록상상에서 활동하는 동안에는 너무 진심이고 최선을 다해서, 이 활동의 중심에 우리가 있다는 걸 의심해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나면 활동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활동의 내용, 그 의미와 가치가 없어졌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어디에 남아있는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단체로서도 그렇고. 새로운 활동이 이어지다 보니 지난 활동에 대한 기록을 자꾸 미루게 되더라고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초록상상의 활동은 지역을 변화시켜 왔고 그 중심에 여성들이 있었는데, 이러한 역사를 어떤 언어로 기록하여 전할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내년 2027년이 초록상상 활동 20주년이기 때문에 더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 기록해 두지 않으면 시간이 더 지난 뒤에는 기록이 남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문제의식과 절박함으로 연구를 시작했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기록의 정치’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의가 있을 것 같은데요. 이 부분에 대해서도 연구자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싶습니다</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여성단체의 자기 역사 기록의 의미를 분석한 임경진(2018)에 의하면, 이러한 기록은 남성 중심적·가부장적 역사에서 소외된 여성의 경험과 주체성을 복원하는 페미니즘적 실천이자 ‘기록의 정치’라고 말해요. 대학원에서 여성학을 공부할 기회를 얻고 ‘기록의 정치’를 배우며, 초록상상의 역사를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지역운동의 기록 방식을 살펴보면, 사업보고서나 성과공유회 등이 있는데요. 보통 수치로 평가를 하는데, 수치로 드러나지 않는 여성들의 활동과 경험도 있잖아요. 또, 누구를 중심으로 기록하는지도 중요해요. 처음에는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분이 이후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그 분야의 전문성을 가진 주체가 되기도 하죠. 이렇게 지역을 변화시켜 온 주체들을 호명하는 작업이 ‘기록의 정치’라고 생각합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행정의 기준이 아니라, 우리의 의도와 자원을 ‘있는 그대로’ 기록해 보는 게 필요하죠. 지역 활동의 기록은 너무 열악한 편이라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을 때가 많기 때문에, ‘기록의 정치’는 지역에 훨씬 더 많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지역 민주주의 운동 측면에서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지난 18년간 초록상상이 해 온 활동 중에서 몇 가지만 소개를 부탁합니다.</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18년간 진짜 많은 활동이 있었더라고요. 하나하나 의미가 커서 핵심적인 것을 고르는 건 너무나 어려운 일이에요. 제가 기억하고 기록한 것 중심으로 몇 가지만 이야기해볼게요.</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2305334079.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07년 봉화산에서 ‘초록지구탐험대’ 프로그램에 참여한 어린이들이 참나무잎 퍼즐 맞추기를 하는 모습. (이지아 제공)</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생태 안내자 양성과정을 통해 모인 지역 여성들은 생태팀을 만들고 생태 공부를 계속하며 봉화산과 아파트, 학교 등에서 생태프로그램을 진행했습니다. 특히 어린이 생태놀이 프로그램인 ‘초록지구탐험대’는 2006년부터 2018년까지 매년 주말 프로그램과 여름캠프로 운영되었어요. 생태팀이 답사와 학습을 통해 기획하고 운영한 이 프로그램은 도시 어린이들이 동네 숲을 중심으로 사계절의 자연 변화를 관찰하고 경험할 수 있도록 구성했죠.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 자연을 만나고 놀며, 지역의 다양한 생명체들에 대한 감수성과 생태계에 대한 감각을 되살리는 시간이었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자연 속에서 한껏 즐거운 경험을 한 어린이들이 지역과 환경에 애정을 갖고 돌보는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어요. 그래서 초지탐(초록지구탐험대의 약칭) 여름캠프를 할 때, 초록상상의 거의 모든 활동가들이 따라가서 건강한 음식을 끼니마다 직접 해 먹이면서 어린이들이 안전하고 생태적으로 놀고, 주도적이고 협력적으로 활동을 꾸려나가도록 도왔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초록상상이 최근 힘을 쏟고 있는 일 중 하나는 ‘돌봄’이에요. 지역과 시대의 필요와 단체의 활동이 자연스럽게 닿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지역의 많은 공공과 민간의 자원들이 이미 돌봄을 하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돌봄 요구를 주민 스스로 찾고, 돌봄을 받기도 주기도 하는 ‘공동체 돌봄’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2022년에는 서울시 마을공동체 종합지원센터의 서로이음 사업으로, 중랑건강공동체와 함께 ‘중화2동 홀몸어르신 구술생애사’ 작업을 했어요. 건강리더들이 마을 어르신들을 만나, 이들의 삶의 변화와 어려움과 일상의 세세한 돌봄 필요를 듣고 글로 정리해서 책 『중화동에 살고 있습니다』(중랑구술생애사기록팀, 2022)를 출간했습니다. 사적 돌봄과 시장화된 돌봄을 넘어선 지역공동체 돌봄을 만드는 실천을 통한 ‘지역 지식’이라는 의미를 가지죠. 이렇게 체화된 지식은 상호의존적이며 공존 가능한 커먼즈 생태계를 만드는 필수 돌봄 자원이 됩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2306211781.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13년 ‘초록상상’의 활동가 양성과정을 통해 모인 자원활동가들이 거리에서 십대 청소년 거리상담 ‘달수다’를 진행하는 모습. (이지아 제공)</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2013년과 2014년 진행했던 십대여성 거리상담 ‘달수다’ 캠페인은 가정과 학교의 보호와 돌봄을 받지 못하고 위기 상황에 쉽게 노출될 수 있는 여성청소년들을 만나는 자리였어요. 지역에서 믿을 만한 어른이 되어 청소년들을 직접 거리로 찾아가 만났고, 주먹밥과 담요를 나눠주는 일상 지원과 더불어, 주체적이고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성적자기결정권, 피임법 등 필요한 정보를 제공했어요. 캠페인 진행자였던 한 활동가는 “청소년들이 ‘이런 데 와서 내가 좀 환대받는 느낌이 들고, 나를 비난하지 않고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어른이 있구나’ 하는 표정을 지은 게 기억에 많이 남는다”고 했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달수다’ 캠페인을 통해 가출 청소년들과 만나며, 초록상상의 성평등 활동은 지역사회에서 이들에 대한 낙인과 차별적 인식을 바꾸는 방향으로 확장되었습니다. 나아가 청소년들의 권리가 존중받을 수 있도록 지역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실천이었다고 생각합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논문은 초록상상 운동사를 ‘지역 여성들의 실천적 지식(메티스)을 생산하는 과정’으로 분석하고 있는데요. 중요한 개념으로 등장하는 메티스에 대하 설명해주세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여성학 수업에서 ‘메티스’라는 개념을 접하게 되었고, 지역여성운동과 연결 지점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메티스’는 책이나 공식 교육을 통해 쉽게 전수될 수 있는 지식이 아니라, 반복으로 습득된 실천적·경험적 지식을 뜻합니다. 초록상상이 18년 동안 펼쳐온 활동과 지역에서 버티고 싸워온 과정에서 축적한 경험과 지식을 ‘메티스’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자 했죠.</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고정된 지식이 아니라 사람들에 의해 계속 수정되고, 바뀐 부분들이 축적되며 새로운 부분이 만들어지고 공유되며 배타적이지 않은 것이 ‘메티스’의 특징입니다. 제임스 스콧(약자의 저항을 분석한 미국의 인류학/정치학자)의 ‘메티스(Mētis)’ 개념을 반다나 시바(인도의 생태사상가이자 반세계화 운동가)의 에코페미니즘과 황희숙(생태 공동체를 연구한 철학자)의 여성주의 인식론으로 재해석하여, 지역 여성들이 축적한 실천적 지혜를 ‘여성주의적 메티스’로 재개념화했습니다.”</span></p><p> </p><p><span style="color: #266ad8; font-family: 바탕;">〈초록상상의 여성들이 스스로를 ‘풀뿌리 활동가’로 정체화하며 메티스를 축적하는 과정은 일상의 구체적인 필요와 결핍을 해결하려는 시도에서 출발한다. 초기에는 육아, 먹거리, 안전 등 자신과 가족을 둘러싼 사적인 영역의 문제의식에서 비롯되지만, 이를 해결하기 위해 소모임을 조직하고 학습하고 이웃을 만나는 과정에서 사회와 지역 환경의 구조적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span></p><p><span style="color: #266ad8; font-family: 바탕;">이 과정에서 습득되는 지식은 외부로부터 얻은 정형화된 이론이 아니라, 지역사회라는 구체적 현장에서 수많은 시행착오와 부딪힘을 통해 얻어지는 ‘체화된 지식’이다. 이들은 현장의 난관을 해결하기 위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실패를 통해 대안을 수정하며, 동료들과의 대화와 성찰을 통해 개별적인 경험을 공동의 전략으로 발전시킨다.〉 -논문 「지역여성들의 실천적 지식으로 만드는 커먼즈 생태계 – 중랑구 초록상상의 활동 사례 연구」 (성공회대학교 시민평화대학원 실천여성학전공 석사, 2026) 중</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2307288382.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22년 중화2동 홀몸어르신 구술생애사 작업을 정리한 책 『중화동에 살고 있습니다』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어르신과 건강리더. (이지아 제공)</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span><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지역 여성들의 실천적 지식(메티스)이 만들어지는 구체적 사례를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첫 번째는 초록상상 생태팀 활동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산에 가서 곤충 또는 새, 바닥에 있는 풀을 보며 이를 지식화하는 과정이 독특했어요. 소개 글이나 책을 쓰는 게 아니었어요. 우선 활동가들이 곤충, 새, 풀 등 생태계 구성원들에 대한 인식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세계에 대한 감수성을 높인 다음, ‘어린이들 또는 성인들에게 어떻게 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을 생태적 관점으로 다시 보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실행했죠. 그 과정이 초록상상이 축적한 경험적 지식 ‘메티스’라고 말할 수 있어요. 지역을 생태 관점으로 바라보며 재해석하는 지식을 만들고 공유한다는 점이 특별해요. ‘메티스’는 지금도 꾸준히 쌓여가는 중입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두 번째는 구의회에서 예산 삭감으로 초록상상이 위탁 운영하고 있는 중랑구성평등활동센터가 없어질 위기에 놓여 있을 때,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나서 지켜낸 경험입니다. 성평등이 얼마나 확산되었는지 양적 평가를 하는 건 어려운 일인데요. ‘성평등이 왜 필요한가? 중랑구성평등활동센터가 지역에 왜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토론이 이어졌어요. 여성 의제로 활동하는 분들뿐만 아니라, 지역 내 다른 영역의 활동가들도 협력해주셨고요. 이런 과정을 통해 중랑구성평등활동센터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분들이 늘어나고, 지켜내야 할 지역 자산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었죠. 굉장히 소중한 경험이고, 지역의 이런 자원을 지켜내는 힘이 바로 실천적·경험적 지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또, 다른 공공 자원이 만들어질 때도 주민들이 달려가서 협력할 것이고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실천적 지식(메티스)이 순환하고 연결되며 ‘커먼즈적 세계’를 구성하는 것에 대한 의의가 연구에서 중요하게 설명되고 있습니다. 초록상상 활동을 ‘커먼즈 세계’라는 관점에서 바라본 이유는 무엇인가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지식이 만들어지는 것에 그치지 않고, 어떻게 활용되어 세계를 재구성하는가에 의의가 있습니다. 요즘은 지식을 누가 소유했는지, 그리고 그 가격이 얼마인지에 따라 가치가 매겨지잖아요. 초록상상의 활동을 바탕으로 형성된 지식이 있다면, 이것은 지역에서 누구든지 쓸 수 있다는 게 우리의 원칙입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지역에서 텃밭을 해보겠다는 분들이 있어서 초록상상에서 텃밭 강사 양성과정을 열기도 했어요. 공동의 자산이며, 지역 사람들의 삶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자원이기에 커먼즈(Commons: 공유지, 공유자원, 공유활동) 개념과 연결된다고 보았어요. 개별 존재들이 분리되지 않고 타자와 상호작용을 통해 세계를 함께 구성한다는 것이 ‘커먼즈적 세계’인데요. 초록상상은 이러한 세계를 만들고 싶어하고, 만들어왔다고 평가해도 될 것 같아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b722dd;">[필자 소개] 조영주</span>. 내 삶을 사회적 맥락 속에서 풀어보고자 성공회대학교 시민평화대학원 실천여성학과에서 공부했다. 6년째 청소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청년 여성 자영업자이자, 청년 여성들이 분투하고 있는 노동현장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여성노동 연구자다. 논문 「공간을 다루는 청년 여성 자영업자들의 몸 노동 경험: 집수리·도배·청소 업종을 중심으로」를 썼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5-23 11:01:00</pubDate>
	   <section>sc3</section>
	   <section_k><![CDATA[녹색정치]]></section_k>
	   <section2><![CDATA[]]></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조영주)]]></author>
	   <category><![CDATA[녹색정치]]></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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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즐거웠어야 할 크루드 축제 ‘네우로즈’에 혐오 선동이…]]></title>
       <link>http://www.ildaro.com/10460</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지난 3월, 일본 사이타마현에서는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크루드인들의 봄맞이 축제 ‘네우로즈’(Newroz)가 열렸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화창한 날씨에 쾌적할 정도의 따뜻한 기온, 넓은 아키가세공원에 크루드인 약 1천5백 명이 모여들었다. 봄맞이 축제를 즐기러 온 참가자들은 색색의 화려한 전통의상을 입고서 원을 이뤄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굉장히 생기가 넘치는 모습이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일본에서도 이 축제는 20년 가까이 열렸다. 크루드인들 중에는 체류자격이 있는 사람도 있지만, 난민신청 중에 있어 불안정한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않다. 춤을 좋아하는 민족이어서 네우로즈 축제에 대한 기대감도 높았고, 올해도 개최할 수 있게 된 것을 모두가 함께 기뻐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2213483174.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26년 3월 일본 사이타마현 아키가세공원에서 열린 봄축제 ‘네우로즈’(Newroz)에서 춤추는 크루드인들. [사진-오다 아사히(織田朝日) 제공]</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집요한 혐오가 축제의 자리까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하지만, 이들의 즐거움을 방해하러 온 일본인도 있었다. 전통 축제에 불과한데도, “테러리스트의 축제를 중단시켜라!”라며 네우로즈 중지를 주장하러 아키가세공원까지 찾아온 사람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일본에서는 3년 전부터 크루드인에 대한 온라인 상의 공격과 혐오가 시작된 후, 상황은 점점 격렬해져 개인정보까지 노출되는 데 이르고 있으며, 이 분위기는 전혀 가라앉을 기미가 없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크루드인들이 많이 사는 사이타마현 와라비역 앞에는 연일 크루드인을 비방하는 가두선전 활동을 하거나, 크루드인이 경영하는 가게에까지 찾아가 일부러 카메라를 들이대는 도발을 하는 유튜버도 끊임없이 나타난다. 인종혐오에 장기간 노출된 크루드인들은 지칠 대로 지쳐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일본에서 살아가는 크루드인들이 그나마 마음을 의지하는 축제인 네우로즈에까지 혐오 세력이 나타나 방해한 것은 최악의 사태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영상을 찍어대고, 크루드인들을 모욕했다. 네우로즈에 참여한 크루드 여성은 “비자는 나오지 않고, 크루드인에 대한 괴롭힘이 계속 이어진다. 항상 머리가 아프고 스트레스가 가득하다.”고 탄식하였다. 아이들도 좀처럼 돌아가지 않는 방해꾼들을 보며 불안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결국, 사고가 일어나고 말았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혐오는 괴롭힘이자, 폭력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경찰의 경호 하에 행사장에 들어온, 집요한 혐오를 계속하는 이웃 도다시(戸田市)의 시의원을 보고서 크루드인들이 크게 분노하였다. 소중한 네우로즈 행사를 방해받자 참가자들은 흥분해 고함을 쳤고, 그러다가 한 크루드인 남성이 시의원의 뺨을 친 것. 시의원은 과장되게 쓰러지더니 구급차가 올 때까지 20분 정도를 그 자리에 누워 있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행사장은 소란해지고, 춤은 일시 중단되었다. 모든 것이 다 어그러졌다. 의원은 이때다 싶었는지 자신의 피해 상황을 소셜미디어 X에 호소했다. “크루드인은 역시 흉폭하다”, “일본에서 나가!”라는 목소리가 댓글로 달린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폭력은 나쁜 것’이라는 전제 하에서 말하자면, 크루드인들이 받아온 괴롭힘은 폭력이 아닐까? 크루드인들은 3년이나 모욕과 신변의 위험을 견뎌왔다. 학교에서 호되게 괴롭힘을 당하던 아이가 반격을 하면, 과연 반격한 아이만이 문제일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굳이 도발을 하기 위해 봄축제에 찾아와, 특히 이곳에서 자라나고 있는 어린이들에게 더 깊은 상처를 입힌 의원들을 그 현장에 있던 일본인인 나는 용서할 수 없을 것 같다. [번역: 고주영]</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일다〉와 제휴 관계인 일본의 페미니즘 언론 〈페민〉(women’s democratic journal) 기사를 번역, 편집한 내용입니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5-22 12:06:00</pubDate>
	   <section>sc4</section>
	   <section_k><![CDATA[국경너머]]></section_k>
	   <section2><![CDATA[아시아]]></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오다 아사히)]]></author>
	   <category><![CDATA[아시아]]></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5/2026052212356411.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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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탈시설장애인당과 조상지 후보의 등장이 말하는 것]]></title>
       <link>http://www.ildaro.com/10459</link>
       <description><![CDATA[<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3366ff;">질문:</span> 이제 곧 지방선거라 후보자들과 정당들을 살펴보게 되는데요. 탈시설장애인당이라는 이름이 보이더라고요? 어떤 곳인지 궁금합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b02ed0;">장혜영</span>: 한국의 민주주의는 대의제에 기초한 정당 민주주의입니다. 헌법 제8조는 정당 설립의 자유와 복수정당제를 보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스템 하에서 흔히 ‘양당’이라고 부르는 더불어민주당, 국민의힘은 물론이고, 제가 몸담은 정의당과 같은 다양한 정당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최근 몇 번의 선거에 낯선 당의 이름이 반복해서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름하여 ‘탈시설장애인당’입니다. 과연 탈시설장애인당이 어떤 당인지, 탈시설장애인당의 존재가 지금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 짚어보려 합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탈시설장애인당이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탈시설장애인당은 2021년 1월 13일, 4.7 서울시장 재보궐선거를 앞두고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만든 ‘가짜정당’이자 ‘위성정당’, 그리고 ‘투쟁정당’입니다. 이는 제가 만든 수식어가 아니라 당시 전장연의 보도자료 표현 그대로입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탈시설장애인당은 보궐선거의 본선거 시작 전에 산화할 ‘가짜정당’입니다. 2021년 보궐선거에서 장애인의 의제를 알려내고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는 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위성정당’의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장애인의 힘으로 만드는, 장애인차별 철폐에 공감한다면 누구나 가입할 수 있는, 탈시설의 전선을 구축하고 장애해방을 앞당기는 ‘투쟁정당’을 목표합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2117196833.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탈시설장애인당 소개 (출처: 탈시설장애인당 홈페이지 <a href="https://drparty.or.kr" target="_blank">https://drparty.or.kr</a>)</p></td></tr></tbody></table><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다스릴 정(政) 무리 당(黨)자를 쓰는 정당(政黨)이 아니라, 바를 정(正) 마땅할 당(當)자를 쓰는 ‘정당(正當)’을 표방하는 탈시설장애인당은 ‘민주주의의 꽃’이라 불리는 선거에서 언제나 한쪽으로 밀려나 동정과 시혜의 대상이 되거나 아예 ‘문제’ 취급을 받아온 장애인의 존재를 무대의 중심으로 끌어오는 야심 찬 프로젝트입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탈시설장애인당은 2021년 4.7 재보궐 선거에서 장애인 이동권과 자립생활을 비롯한 11개의 장애인 권리 의제를 상징하는 11명의 서울시장 후보를 발표하고 약 3개월간 활발한 유세 활동을 펼친 뒤, 본선거운동 기간을 앞두고 활동을 중단했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 과정에 웃지 못할 일도 있었습니다. 서울시 선거관리위원회에서 정당법상 등록된 정당이 아닌데 ‘당’이라는 명칭을 쓰는 것이 선거법 위반 소지가 있다는 공문을 발송한 것입니다. 창당 첫날부터 이 당이 ‘가짜정당’임을 만천하에 선포했음에도, 선관위 혼자 ‘아무나 ‘당’을 쓰면 안 된다’고 엄포를 놓은 셈입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탈시설장애인당의 대응은 어땠을까요? ‘그럼 성당도 당인가? 식당은 어떤가?’ ‘탈시설장애인숭구리당당은 괜찮나?’ ‘거대양당의 위성정당은 버젓이 활동하도록 내버려 두면서, 소수자가 모여 정치에 참여하는 정당만 불법이라고 압박하는 서울시선관위를 규탄한다!’ 선관위의 황당한 공문은 힘 있는 기성정당의 반칙에는 아무 말도 못하지만, 바로 그 기성정당들이 외면한 소수자의 새로운 정치참여 활동은 법을 들먹이며 억압하는 선관위의 모순을 스스로 폭로하는 해프닝이었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후에도 탈시설장애인당은 2022년 대통령선거 및 지방선거, 2024년 국회의원 선거, 2025년 대통령선거에서도 후보를 세우고 정책을 발표하고 유세활동을 하며 장애인의 정당한 권리를 대변했습니다. 그리고 작년 12월 4일, 12.3 내란 극복 1주년을 맞이한 다음날에 2026년 6.3 지방선거 투쟁을 선포했습니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축제라는데, 왜 누군가에게는 축제가 아닌 투쟁일까요?)</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조상지 서울시의원 지역구 출마’라는 정치적 사건</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번 지방선거에서 가장 눈에 띄는 탈시설장애인당의 활동은 단연 중증 뇌병변 장애 여성이자 탈시설 당사자인 조상지 활동가의 서울시의원 지역구 출마입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2141463377.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조상지 후보가 5월 15일 서울특별시의원 종로구제2선거구에 출마하고자 후보 등록을 마쳤다. (출처: 탈시설장애인당)</p></td></tr></tbody></table><p><br /><span style="font-family: 바탕;">‘장애인차별 철폐의 날’인 4월 20일, 조 후보는 광화문에서 종로구 제2선거구에 지역구 시의원 출마를 공식 선언했습니다. ‘정치 1번지’이기 때문입니다. 종로가 정치1번지인 이유는 힘 있는 정치인들을 배출했기 때문이 아니라, ‘장애인이 민주주의 안에서 살아남겠다고 투쟁한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종로구 제2선거구에는 전장연 출근길 지하철 투쟁의 거점인 혜화역이 있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조상지 후보는 생후 8개월 무렵 고열로 뇌병변 장애를 얻었습니다. 아버지는 15살 소녀 조상지를 가족들 몰래 시설에 입소시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 같은 아이들은 너희 같은 아이들끼리 살아야 한다.” 그렇게 15년을 열악한 시설에서 버티다, 서른이 되던 해에 어머니의 도움으로 마침내 탈시설을 했습니다. 2008년의 일입니다. 이후 조 후보는 노들장애인야학에 다니며 장애인 권리보장을 위한 투쟁에 합류해 열성적으로 활동해왔습니다. 당사자의 목소리를 전하는 다큐멘터리를 찍고, 신문사에 칼럼을 기고하기도 했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저는 어릴 때부터 정치를 꿈꿔온 사람은 아닙니다. 제가 먼저 꿈꿨던 것은 살아남는 일이었고, 시설 밖에서 내 삶을 꾸려가는 일이었고, 동료들과 함께 권리를 지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투쟁의 현장에서 정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활동지원 시간 삭감, 장애인노동자 해고, 탈시설지원조례 폐지 같은 일들이 벌어질 때마다, 정치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에서 우리의 삶을 직접 흔드는 것이라는 걸 똑똑히 보게 됐습니다.” 조 후보가 언론 인터뷰에서 밝힌 출마의 변입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뇌병변 장애여성, 탈시설 당사자인 후보의 ‘어린이날·어버이날’ 메시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언어장애가 심해 육성 대신 AAC(보완대체의사소통)를 통해 언어소통을 하는 조상지 후보의 언어는 거침이 없습니다. ‘가정의 달’이라 불리는 5월을 맞이해 조 후보는 두 개의 논평을 냈습니다. 하나는 어린이날 논평, 다른 하나는 어버이날 논평입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아이들은 자라면서 더 멀리 나간다는데, 저는 자라면서 더 집 안에 머물렀습니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부모의 등에서 내려와 자기 발로 걷는다는데, 저는 엄마의 등에서 내려온 뒤 갈 수 있는 곳을 잃었습니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세상과 가까워진다는데, 저는 자라면서 세상에서 멀어졌습니다. (중략) 어린이날은 아이들이 자라는 일을 축하하는 날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장애아동은 어디에서 자랍니까. 장애아동은 누구와 자랍니까. 장애아동은 어떤 길을 지나, 어떤 친구를 만나, 어떤 동네를 경험하며 자랍니까. 장애아동에게도 부모의 품과 가족의 등을 넘어, 자기 삶의 세계로 나아갈 권리가 보장되고 있습니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오늘은 어버이날입니다. 저는 어머니의 사랑을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습니다. 제가 지금 이렇게 지역사회에서 살아가고, 진보적 장애운동 현장에서 활동가로 말하고, 탈시설장애인당 서울시당 대변인으로 정치를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중략) 그런 어머니도 너무 힘들 때마다 제게 말했습니다. “상지야, 같이 죽자.” 이것은 저만의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어떤 언니는 어릴 때 어머니가 농약병을 앞에 두고 같이 죽자고 했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언니는 연탄불을 피워놓고 같이 죽자는 말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어떤 오빠는 바닷물에 빠져 같이 죽자는 말을 들었다고 했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장애아동이 태어났을 때, 부모가 제일 먼저 배워야 하는 말이 “같이 죽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장애아의 부모가 평생 들어야 하는 말이 “당신이 책임져라”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최중증 장애인의 삶이 부모의 등, 부모의 허리, 부모의 눈물, 부모의 포기 위에 겨우 세워져서는 안 됩니다. 저는 어머니의 사랑으로 살아남았습니다. 그러나 다음 세대의 장애아동들은 부모의 희생만으로 살아남는 삶을 살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투쟁합니다. 그래서 저는 정치합니다. 그래서 저는 탈시설장애인당當으로, 장애인도 시민으로 살아가는 서울을 만들겠다고 말합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저는 다른 정당에 소속된 사람이지만, 탈시설 당사자의 가족으로서 제게 이번 지방선거 최고의 메시지는 조상지 후보의 이 논평입니다. 계단을 내려와 집 앞 골목 끝의 슈퍼마켓에 가는 것이 어린이날 소원이었던 어린이는 어른이 되어, 가족의 등에 업히지 않아도 자기 삶의 세계로 나아갈 권리가 모든 어린이들에게 보장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선거에 출마했습니다. 다음 세대의 장애아동들은 부모의 희생이 아닌 사회의 연대 속에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정치에 나섰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정치란, 선거란 그저 또 한 명의 당선자와 다수의 낙선자가 나오는 경마와 같은 게임이 아니라, 나와 공동체의 관계를 규명하고 우리 모두를 위해 이 세상을 바꾸는 일이라는 것을 이 뜨거운 논평들은 일깨워줍니다. 자신의 삶에서 길어 올린, 지금껏 기성 정치가 제대로 대변하지 않았던 삶과 권리에 대해 조 후보는 온몸으로 정치를 하고 있습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211821540.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26년 4월 20일, 조상지 후보가 출마 선언을 했다. (출처: 탈시설장애인당)</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탈시설장애인당과 조상지 후보가 제기하는 정치적 이슈</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탈시설장애인당과 조상지 후보의 활동을 보며 느끼는 것이 세 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 사회도 마침내 이런 후보를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중증장애 당사자가 선거 시기에 자신의 경험을 제도 정치의 공간에서 이야기하며, 그것이 이 사회의 공적 의제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시민들에게 지지를 구하는 것은 그 자체로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한 발 전진한 것이라고 평가할 만한 사건입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오세훈 서울시장처럼 그동안 대의정치권력을 쥐고 흔들며 장애시민들의 삶을 외면해온 기존 정치세력들을 단호히 비판하는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의 당사자로서 대안을 이행할 것을 요구하는 것을 넘어 스스로 직접 대안이 되겠다는 선언은, 장애인을 정치와 권리의 주체로 인정하지 않고 객체와 대상으로 간주해온 기존의 패러다임을 시원하게 뒤집어버리는 쾌거입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지금의 상황은 동등한 시민으로서 장애인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는 일, 특히 그 중에서도 장애인의 ‘탈시설’이라는 의제가 기성 정치권에서 얼마나 제대로 다뤄지지 않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특히 장애인 권리를 외치는 전장연의 지하철 시위를 정치적 갈라치기와 공격의 도구로 활용했던 국민의힘 이준석-윤석열 콤비가 승리한 2022년 대선 이후, 전장연이 요구하는 장애인 권리 예산과 관련 정책은 진영을 막론하고 날 선 비난과 공격을 받았습니다. 시위의 내용과 취지는 주류 미디어를 통해 왜곡되기 일쑤였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오세훈 시장은 보복이라도 하듯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 일자리 예산을 전액 삭감해 400여명의 중증장애인 노동자들을 일방적으로 해고했습니다. 전장연 시위와 탈시설 정책이 시민들의 불편을 초래한다는 이유로 여론의 지탄을 받자, 몇몇을 제외하고 대다수의 정치인들은 아예 이 의제에 관해 말을 꺼내는 것을 피했습니다. 이런 상황을 돌파하려면 다른 누군가를 ‘통해서’ 하는 정치로는 더이상 충분치 않다는 것을, 탈시설장애인당의 당원들과 후보들은 절절히 느꼈을 것입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끝으로 제가 절감하는 것은 양당에게는 한없이 낮고, 나머지 정당들에게는 한없이 높은 한국 정당정치의 벽입니다. 조상지 후보는 탈시설장애인당의 당원이지만 법적으로는 무소속 후보입니다. 탈시설장애인당이 정당법상 정당의 요건을 갖추지 못한 법외정당이기 때문입니다. 현행 정당법은 5개 이상의 시ㆍ도당을 가져야 하고, 각각의 시ㆍ도당은 해당 지역에 1천명 이상의 법정 당원을 가져야 합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정당이 당원을 조직하기 위해서는 자유로이 많은 곳을 다니며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하고, 밥을 먹고, 잠을 잘 수 있어야 합니다. 현재 대한민국 전국에서 휠체어를 탄 채 이용할 수 있는 시외고속버스는 단 한 대도 없습니다. 2024년 더불어민주당 서미화 의원실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전국의 편의점 5만 7천여개중 휠체어 접근이 가능하게 편의시설을 설치한 곳은 약 2천2백곳으로, 4%도 되지 않았습니다. 비장애인 중심으로 구성된 정당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정치활동의 제약 요소가 도처에 깔려있는 것입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렇게 불평등한 환경에서 1천명 이상의 당원으로 구성된 5개 시도당을 구성해야 한다는 정당법상 요건은 ‘정당 설립의 자유’를 보장하는 헌법 조항과 대조적으로, 사실상의 봉쇄조항처럼 작동하고 있습니다. 탈시설장애인당當 서울시당은 정당법의 이 조항들에 대하여 헌법소원을 청구할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선거의 의미를 묻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탈시설장애인당이 투쟁하는 만큼 한국 사회가 변화합니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탈시설장애인당은 공식 웹사이트(<a href="https://drparty.or.kr" target="_blank">drparty.or.kr</a>)의 소개란에서 발견한 문구입니다. 선거는 누가 1등인지를 가려내는 게임이 아니라, 하나의 공동체 안에 소속된 사람들이 서로의 삶에 대하여 생각하고, 그 연결을 느끼고, 모두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지 숙고하는 총체적이고 변화무쌍한 경험이자 과정입니다. 이러한 점을 생각해보면 탈시설장애인당이 투쟁하는 만큼 한국 사회가 변화한다는 말에 저는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c237c7;">[필자 소개] 장혜영.</span>  21대 국회 정의당 국회의원. 다큐멘터리 〈어른이 되면〉 감독이자 동명의 책을 썼다. 현재 정의당 마포구위원회 지역위원장이자 비영리단체 ‘망원정x’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span></p><p> </p><p><span style="color: #0000ff; font-family: 바탕;">※[장혜영에게 정치를 묻다] 여러분이 궁금한 것에 대해 질문을 받습니다! <a href="https://forms.gle/ChadDMccSzHkwR448" target="_blank"><span style="color: #0000ff;">https://forms.gle/ChadDMccSzHkwR448</span></a></span></p>]]></description>
       <pubDate>2026-05-21 09:12:00</pubDate>
	   <section>sc1</section>
	   <section_k><![CDATA[사회]]></section_k>
	   <section2><![CDATA[정치/정책]]></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장혜영)]]></author>
	   <category><![CDATA[정치/정책]]></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5/2026052120508390.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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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우정으로 냉장고를 채울 수 있다면 무엇이 두렵겠는가]]></title>
       <link>http://www.ildaro.com/10458</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가정의 달 5월, 여기서 ‘가정’은 무엇일까? 흔히 ‘정상가족’이라 불리는, 혼인과 혈연으로 이루어진 가족의 조건에 충족하지 못하면 가정을 이룰 수 없는 걸까? 혹은 생계나 주거를 함께하는 생활 단위가 아니어도, 서로를 돌보고 일상을 나누는 관계들 또한 그 안에 포함될 수 있을까? </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우리는 여기서부터 질문을 시작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사회 구성원들의 일상적인 돌봄이 국가를 거치기 전에 먼저 가정에서 해결되길 바란다면, ‘무엇으로 만들어진 가정’인지가 아니라 ‘무엇을 하고 있는 가정’인지, 즉 어떤 돌봄과 일상을 주고 받는 관계인지가 중요한 게 아닐까. 가정의 달을 맞아, 지난 설연휴에 ‘예비 할머니 모임’이 함께한 ‘만두 김장’을 통해 우리가 상상한 노후의 생활공동체 한 장면을 나누고자 한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1919253356.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지난 설연휴에 아홉 명의 예비 할머니들이 어느 공동체주택 주방에 모여 ‘만두 김장’을 함께 했다. 만두소를 만드는 칼질 시간. (사진 출처-예비할머니모임)</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왜 하필 만두 김장이냐면</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2025년 단기 프로젝트로 시작된 ‘예비 할머니 모임’은 올해도 이어졌다. 페미니즘 관점에서 노후를 고민하는 젊은 세대들의 관계 네트워크가 너무 아쉽고 소중했기 때문이다. 함께 생활공동체를 탐구하는 동안, 생활공동체라는 것이 대단한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 맺는 절대적인 ‘시간’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가족처럼. 시간과 공간, 관계가 이어질 때 생활공동체도 실체를 가진다. 관계는 시간을 들여 함께 일상을 나눠야 비로소 형태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나는 종종 예비 할머니 모임이 ‘생활공동체 양성소’가 되길 바란다는 이야기를 한다. 각자의 생활공동체를 꾸리고 이 모임에서 서로 연결되길 바란다. 현재 우리 모임에는 자신의 생활공동체를 구체적인 미래로 만들어내기 위한 기초체력을 쌓는 예비 할머니부터, 이미 생활공동체를 시작한 예비 할머니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예비 할머니들이 있다. 올해 우리의 목표는 생활공동체를 공부하며 ‘장기적으로 관계 맺는 시간’ 갖기를 연습하는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생활공동체를 함께하는 사람들과 한 동네에 산다면 어떤 일상을 살게 될까? 상상컨대, 자주 함께 밥을 차려 먹고, 종종 심야영화를 보러 가며, 별일 없이 만나 산책하는, 평범하면서도 어쩌면 비범한 삶을 꿈꾼다. 대부분의 청년들이 도시 노동자이자 세입자로 살며 필연적으로 흩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꽤나 원대한 목표다. 우리는 이 상상력을 일부 실행에 옮기며 미래를 구체적으로 그려보고 낙관하고 싶었다. 그러다 꺼낸 이야기가 친구들과 만두를 빚는 일이었고, 또 누군가는 대용량의 요리를 김장에 빗대어 말하며, 결국 ‘만두 김장’을 하게 됐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일종의 ‘가족극’</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설연휴 마지막 날, 우리는 서울 서부권에 위치한 어느 공동체주택의 공유 주방에 모였다. 10평 남짓한 공간에 놓인 6인용 식탁은 아홉 명의 예비 할머니들이 가져온 도마들로 가득 찼다. 여섯 명이 부추와 버섯을 칼질하면, 자리가 없는 두 명은 다 채워진 그릇을 비우고 쓰레기를 치우거나 두부의 물을 짰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키라라의 전자음악과 함께 끊이지 않는 칼질 리듬은 만두소를 산처럼 쌓았고, 그만큼의 이야기도 쌓였다. 각자의 집에서 듣는 명절 잔소리를 나누기도 하고, 나중에 우리가 생활공동체를 하게 되면 1년에 몇 번의 명절을 치루고 싶은지, 어떤 음식을 만들고 싶은지와 같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렇게 만들어진 2백여 개의 만두 중 일부는 그 자리에서 구워 먹고, 각자 가져온 용기에 야무지게 담기도 했다. 그러고도 만두소가 남아서 밥을 볶아 먹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1919479080.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드디어 만두 빚기 시작 (사진 출처-예비할머니모임)</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돌이켜보면 으레 명절 풍경이란, 온갖 애들이 들러붙어 밀가루 반죽 놀이를 하고 그래도 좀 머리 큰 애들이 만두 같은 걸 빚어 보려고 만지작대는 모습이었다. 그걸 보며 어떤 어른은 칭찬이랍시고 있지도 않은 미래의 딸래미 얼평(‘예쁜 딸 낳겠네!’ 등)을 하곤 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반면, 이곳에서는 칼질의 침착함이나 썰린 재료의 단정함, 노동에의 몰입도 같은 것에 대한 칭찬만이 오갔다. 다양한 모양의 만두가 나오니 새로운 요리도 시도할 수 있었고, 서로의 만두 빚는 모양을 알려주고 배웠다. 여기에는 잘함과 못함이 아닌 다름만이 있었다. 30대 미‧비혼율 50% 시대, 그 절반에 해당하는 여성들이 만드는 명절은 다정함 뿐이었고 그렇게 우리는 가부장제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사실 명절날 여성들이 부엌에 북적이는 것이 낯선 일이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만두 김장을 함께 하며 가족의 진짜 의미를 생각해보았다. ‘정상가족’이라는 경계는 다양한 생활공동체의 존재와 가능성을 가린다. 중요한 건 혈연이나 결혼 여부가 아니라 ‘함께하는 일상’이다. 만두 김장은 일종의 가족극을 통한 역할의 재구성인 것이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예비 할머니 모임이 노후에 대한 불안을 다루는 방법</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많은 사람들이 저축이나 결혼으로 노후를 준비하고 있다. 하지만 예비 할머니 모임에서 준비하는 노후는 결혼 외의 방식으로 가족을 일구며 조금은 가난하더라도 재밌게 살 수 있는 방법을 꾀하는 것이었고, 그렇게 현재의 불안을 다루고자 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지난 번 모임에서 우리는 60대의 구체적인 하루를 상상해보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나이가 들었을 때 어떤 일과를 보내며 어떤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은지, 60대의 내 일상이 되었으면 하는 하루를 그려보고, 그 미래를 만들기 위해 현재의 나는 무엇을 하면 좋을지 이야기 나눴다. 60대가 되어서도 계속 일하면 좋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은퇴하고도 먹고 살 수 있는 상황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고, 다양한 문화센터들을 다니며 새로운 것을 배우고 운동하는 삶을 살고 싶다고도 했으며, 하루의 한 조각에는 꼭 친구들과의 티타임을 가질 수 있는 관계와 여유를 가지고 싶다고 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어진 ‘노후의 일과를 현실화하기 위한 지금의 실천’을 떠올리는 것은 다소 막막했으나, 상상한 일과 중에서도 ‘중요하다 여기는 부분을 지키기 위한 실천’으로 조금 더 구체화하니 단순히 돈의 문제만은 아니란 걸 깨달았다. 사실 많은 부분 ‘돈을 많이 벌어둬야 한다’로 퉁쳐질 지 모른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노후를 준비한다. 하지만, 퉁쳐서 생각한 대안이 현재의 나를 잡아먹고 있진 않을까? 한 참여자는 “적다 보니 꼭 나이를 먹고 해야 하는 일은 아니었네요.”라고 말했고, 이후 운동 레슨을 등록했단 소식을 전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192008311.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반달 모양부터 딤섬 모양까지 제각각 만두들 (사진 출처-예비할머니모임)</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라고 물었던 한강 작가의 말처럼, 우리는 건강한 노후를 실현하기 위해 현재를 살고, 또 그런 현재의 구체적인 실천들이 모여 미래에 대한 불안을 잠재우면 안심하고 현재를 즐기며 살 수 있는 구조를 만들고자 한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비슷한 생애주기적 역할을 요구받는 삶을 살았는지 모른다. 모든 것에는 다 때가 있다는 말로 채찍질 당하며 헐레벌떡 사는 삶은 초조함을 불러오고, 시간에 쫓기는 선택은 판단력을 흐리게 한다. 그렇다면 지금쯤 멈춰서서 고민해야 한다. ‘나는 누구와, 어떻게 내 미래를 함께할 것인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것이 예비 할머니 모임에서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 중 하나다. 사회가 결혼을 통해 가족을 만들도록 유도하고 그 틀 안에서 미래를 설계토록 한다면, 그 밖의 선택을 하는 사람들은 어떤 준비가 필요할까? 이것은 단순히 돈을 많이 벌어둬서 돌봄을 외주하는 문제를 넘어선 고민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우리는 생활공동체를 공부하며 가족을 고민한다. 식구라고 불리는 밥을 먹는 공동체, 두 사람의 로맨스에서 시작된 경제 공동체, 혈연이나 입양으로 연결된 법적 의미의 가족까지. 그 의미나 실체를 뜯어보고 파헤쳐가며 우리가 만들고 싶은 가족의 상을 그린다. 우리는 피를 나누지도 않고 같이 살지 않더라도 근거리에서 서로를 돌보는 우정 공동체를 가족으로 부르고 싶었다. 그것을 왜 가족이라고 불러야 하냐고 묻는다면, 오히려 왜 그렇게 부르지 못하는지 되묻고 싶은 것이다. ‘정상가족’만 가족으로 고집하는 사회는 수많은 결핍을 낳고 있지 않은가.</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급할 건 없다: 미래를 작당모의하는 예비 할머니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만든 울타리 안에서 안전하게 정착하고 싶어하고, 그 중 가장 견고한 울타리를 가족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예비 할머니 모임’ 안에서 가족의 확장을 고민하며 서로가 견고한 울타리가 되어줄 수도 있고, 팀 활동을 통해 다양한 사례들을 만나며 기존에 가지고 있던 네트워크를 재발견할 수도 있다. 실제로 한 모임원은 이 모임의 참여동기를 미래의 하우스메이트를 찾기 위함이라고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예비 할머니 모임’은 미래를 기대하게 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곳에서 만나 함께 활동했던 사람들이 어떤 가족을 만들었는지, 그 삶이 순탄하게 이어지고 있는지 같은 시행착오들이 듣고 싶어진다. 언제까지고 ‘정상성’에 밀려 우리의 선택과 결정이 우습게 여겨지고 있을까? 아니면 우리끼리 너무 잘 지내고 있어서 세상의 풍파같은 건 느낄 새도 없다고 얘기하게 될까? 그렇게 가끔 모여서 사는 이야기도 좀 하고, 생활공동체도 회사의 가족휴가를 쓸 순 없을지 궁리도 하며 꾸준히 작당모의할 수 있는 미래를 그려본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1920303659.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완성된 만두를 담아 인증샷 (사진 출처-예비할머니모임)</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일찌감치 노후를 준비하며 배우는 것은, 급할 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운동은 평생 해야 하는 거니까 나에게 맞는 운동을 찾기까지 끊임없는 시도를 할 수도 있고, 가족 구성원이 성애적 관계로 맺는 한 명이 아니기 때문에 다양한 사람들을 탐색하며 가족으로 섭외해 볼 수도 있다. 생활공동체가 모여 살 마을을 찾아나선다는 명목으로 자유로이 여행 다니는 것도 빠질 수 없겠다. 타임어택 같았던 삶에서 튕겨져 나오니 세상엔 그렇게 급할 것도 없었다. 시간적 여유는 마음의 여유를 가져온다. 여기, 시간을 가진 사람들의 조직은 서로를 기다려줄 수 있다. 우리는 장기적 전망을 함께 고민하는 사람들이고, 시간은 우리 편이니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집에 돌아와 함께 만든 만두를 서로 겹쳐지지 않도록 예쁘게 펼쳐 냉동실에 넣었다. 우리의 활동이 유형의 결과물로 나와 일용할 양식이 됐다. 김할머니가 만든 냉이반찬, 박할머니가 만든 봄동샐러드가 냉장고를 채우고, 젊은 시절을 추억하며 함께 두쫀쿠 김장을 하는 미래가 상상됐다. 우정으로 냉장고를 가득 채울 수 있다면, 무엇이 두렵겠는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b937c7;">[필자 소개] 콩쥐야</span>: 알 수 없는 미래에 혼자 벌벌 떨다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을 모아 함께 헤쳐나가기로 함. 현재 생활공동체를 실험 및 공부하고 있으며 이후 ‘생활공동체 연대체’ 설립을 꿈꾸는 생활체육인.</span></p>]]></description>
       <pubDate>2026-05-19 09:17:00</pubDate>
	   <section>sc1</section>
	   <section_k><![CDATA[사회]]></section_k>
	   <section2><![CDATA[가족/관계]]></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콩쥐야)]]></author>
	   <category><![CDATA[가족/관계]]></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5/2026051921342386.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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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여성 노동운동사가 살아 숨쉬는 인천으로 역사기행]]></title>
       <link>http://www.ildaro.com/10457</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1972년, 한국 노동운동사 최초로 민주노조 ‘여성’ 지부장이 선출된 곳은 어디일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바로 인천 만석동에 있던 동일방직이다. 당시 동일방직 노동조합은 전체 조합원 1,283명 중 88%(1,214명)가 여성이었다. 하지만 노조의 지부장과 간부직은 소수의 남성들이 독점했고, 다수를 차지하는 여성들은 활동에서 소외되어 있었다. 이 장벽을 깨고 1972년 5월, 주길자 씨가 한국 최초의 여성 지부장으로 선출되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172943437.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26년 5월 9일, 인천역에서 〈페미니스트 역사기행 ‘페미로(路)_인천을 잇다’〉 탐방이 시작됐다. 페미로 깃발 모습. ⓒ일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인천은 한국 여성노동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상징적인 공간이다. 교과서나 미디어에서 쉽게 접하지 못했던 여성노동운동의 정보를 나누고 그 흔적을 찾아가는 탐방이 지난 5월 7일과 9일 진행됐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에서 주최한 〈페미니스트 역사기행 ‘페미로(路)_인천을 잇다’〉는 인천 여성노동운동의 역사를 배우는 온라인 강의와 현장 답사로 구성되었다. 역사 강의는 유경순 한국여성노동운동 연구자가, 현장 답사는 박명숙 인천여성노동자회 회장이 길잡이를 맡았다. 답사의 마지막 여정으로는 동일방직 제3대 여성지부장이었던 이총각 선생님과의 차담회가 이어졌다. 치열했던 그날의 이야기를 전한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차별과 억압을 뚫고 피어난 여성노동 운동의 힘</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7일 저녁 진행된 강의에서 유경순 연구자는 “인천은 개항 이후 근대문물이 유입되고 대규모 공업지대가 형성된 산업의 중심지이자, 동시에 가혹한 노동환경에 맞서 가장 치열하게 싸웠던 여성노동운동의 효시이자 성지”라고 설명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먼저, 일제강점기에 가혹한 장시간 노동과 폭력에 맞선 성냥공장 소녀 노동자들이 있었다. “하루 13시간 장시간 노동에도 불구하고 33전이라는 턱없는 저임금에 시달리며” 일했다. 소녀 노동자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1921년부터 1932년까지 총 다섯 차례 대규모 동맹파업을 감행”했다. 투쟁의 목표 또한 “임금인하 반대에서 점차 ‘임금인상’과 ‘8시간 노동제 실시’라는 노동권 쟁취로 발전”시켰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또, 전국 최대 미곡 집산지였던 인천의 정미소에는 수많은 ‘선미여공’들이 있었다. “하루 10~14시간 일하면서도 생존이 불가능한 수준의 임금을 받았고, 수시로 일본인 감독관의 폭력과 성희롱에 노출”되었다. 견디다 못한 노동자들은 1924년 ‘선미여공조합’을 결성했다. 여공조합은 “임금인상과 구타방지, 여성차별 금지 등을 요구하는 파업을 성공시키며, 1920년대 인천 노동운동의 핵심으로 성장”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1730366303.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인천도시산업선교회에 붙어있는 인천 만석동과 화수동 일대의 지도. “이곳 일대는 일제강점기부터 현대까지 노동자들의 애환이 담긴 곳”이라는 설명이 적혀 있다. ⓒ일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이어 유경순 연구자는 1970년대 인천 만석동의 동일방직을 “한국 노동운동사에 큰 획을 그은 곳”으로 소개했다. “가톨릭노동청년회(JOC)와 도시산업선교회의 교육을 통해 권리의식을 깨우친 여성 노동자들은 1972년 한국 최초의 여성 노동조합 지부장 주길자를 선출했기 때문”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하지만 “사측은 남성 노동자들을 사주해 여성 (노조) 집행부를 짓밟으려 했고, 여성들은 1976년 (군부독재 하에) 강제 연행하려는 경찰에 맞서 작업복을 벗고 저항하는 ‘나체 시위’”를 벌였다. 또 “1978년 2월 노조 대의원 선거일에는 회사 측 구사대(회사에 고용되어 조합원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이들)가 여성 노동자들에게 인분을 뿌리고 먹이기까지 한 ‘똥물 투척 사건’이 발생”하는 등 노조 탄압이 계속됐다. 124명의 여성 노동자가 부당해고 당했고, 중앙정보부와 섬유노조가 배포한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라 다른 직장에 취업하는 것조차 봉쇄당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럼에도 여성들의 노동운동은 멈추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 부평공단의 반도상사에서 1974년 여성 지부장이 탄생했고, 당시 만연했던 ‘결혼 후 강제퇴사’ 관행을 폐지”시켰다. 이후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불길은 코스모스전자, 진진양행 등 인천의 중소규모 여성 사업장으로 들불처럼 번졌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1980년대 여성노동자들의 핵심 요구는 ‘임금 불평등 해소’와 모성보호, 그리고 관리자들의 성적 모욕과 욕설, 폭행을 중단하라는 ‘인격적 대우’”였다. 투쟁을 통해 “호주인 여성노동자의 가족수당 지급을 확보”하기도 했다. 유경순 연구자는 “그동안 남성만 가장으로 인정하던 관행을 깨고, 비록 ‘호주’라는 제한이 있지만 여성도 가장이라는 것을 인정한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짚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부당해고와 블랙리스트로 현장에서 쫓겨난 여성 노동운동가들 또한 멈추지 않았다. 이총각 동일방직노조 전 지부장을 비롯한 이들은 지역사회로 눈을 돌렸다. 이총각 전 지부장은 전세김을 빼서 구월동 모래내시장 인근에 공부방을 마련했다. 이후 빈민 자활기관 ‘청솔의집’ 센터장을 지내며 가난한 주민들 곁을 지켰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1731057345.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박명숙 인천여성노동자회 회장의 인솔 하에 〈페미니스트 역사기행 ‘페미로(路)_인천을 잇다’〉 탐방이 진행되었다. 자유공원으로 가는 계단을 지나 만석동으로. 그리고 하늘색 철문이 있는 동일방직 앞에 도착했다. 동일방직 건너편엔 당시 노동자들이 이용했다는 가게가 그대로 간판을 달고 있다. ⓒ일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현장에서 목격한 여성 노동자들의 발자취</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9일 진행된 현장 탐방은 인천역에서 출발했다.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의 ‘페미로’ 깃발 아래 모인 약 15명의 참여자들은 주말이라 활기찬 분위기의 차이나타운을 걸었다. 자유공원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지나며 박명숙 회장은 “(당시) 여성노동자들이 모여 놀 수 있는 곳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에 이곳에 많이 모여 놀았다고 한다”고 설명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동일방직 인천공장이 있는 곳에 도달했다. 부지 7만5천817㎡에 조성된 방직공장으로, 1934년 일본의 5대 방적업체 중 하나인 동양방적이 조선에 진출해 조업을 시작한 곳이다. 해방 이후에는 서정익이 인수하여 1966년 동일방직으로 회사명을 개칭한 후 운영했다. 2017년 가동이 중단된 이후, 현재는 일부가 물류창고로 쓰이고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박명숙 회장은 “동일방직공장 부지가 사유지이긴 하지만, 여성노동운동의 역사가 깃들여 있는 곳이기에 역사성과 상징성이 있다.”며 “이 공간을 시민들을 위한 한국여성노동박물관으로 만들 필요성이 있다”고 강조했다. 시민사회에선 동일방직의 문화적 활용 방안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1735266579.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화수시장으로 가는 길. 시장 내부는 이제 영업을 멈춘 곳들이 대부분이고, 방앗간만 불이 켜 있었다. 과거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장소에서, 탐방 참여자들은 ‘페미로’ 기획단이 사전주문한 화수 방앗간 떡을 먹으며 당시 여성노동자들의 삶을 떠올렸다. ⓒ일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탐방은 화수시장으로 이어졌다. 1970년대의 흔적이 남아있는 공간인 화수시장은 이제 운영되는 가게가 거의 없다. 방앗간 두 곳만이 영업하고 있을 뿐이다. 과거 이곳은 많은 노동자들이 찾아와 생필품을 마련하고, 떡을 사 먹던 공간이었다. 화수시장과 화수아파트 인근에 자리해있던 600석 규모의 인천극장 또한 노동자들이 많이 찾던 곳이었지만, 이제 그 자리엔 마트가 자리하고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화도 고개를 걸어 인천도시산업선교회로 이동했다. 화도 고개는 투쟁을 하던 여성노동자들이 눈물을 흘리며 걸었던 애환이 서린 언덕길이라고 한다. 인천도시산업선교회는 도시화와 산업화가 진행되던 시기, 기독교인들이 ‘산업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고민하며 출발한 단체다. 가장 취약한 환경에 노출되어 있던 도시 노동자를 대상으로 “약한 자를 강하게” 정신을 바탕으로 사역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곳은 1970년대 인천 지역 여성노동운동이 태동하고 성장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여성노동자들을 모으고 교양 교육, 소그룹 활동, 지도자 훈련 등을 제공하며 스스로 권리를 깨우치고 주체적인 노동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1736411292.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인천도시산업교회 곳곳에서 당시 공장 노동자들의 모습과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일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당시 산업선교회 목회자들은 현장을 이해하기 위해 직접 공장에 들어가 노동해야 한다는 원칙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여성 노동자들과 소통을 위해 여성 목회자인 조화순 목사를 초청했다. 조화순 목사는 동일방직에 취업하여 6개월간 일했고, 노동자들과 관계를 형성해 나갔다. 인천도시산업선교회 그리고 가톨릭노동청년회의 적극적인 교육과 지원은 여성노동자들의 의식을 고양하는 밑거름이 되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탐방의 마지막 프로그램으로, 동일방직 제3대 여성지부장이었던 이총각 선생님을 만나 경험담을 듣고, 참여자들이 질문을 던지며 여성노동운동의 역사를 더욱 깊이 접할 수 있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모범 여공’에서 투사로, 후회 없는 연대의 삶</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총각 선생님은 1966년, 18세 나이로 동일방직에 입사했다. 먼저 공장을 다니고 있던 언니의 소개로 공장에 입사할 당시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뻤다.” 하지만 그건 잠시였다. 입사 신체검사에서 남성 의사에게 성추행을 당해 잊지 못할 ‘수치심’을 느꼈다. 그럼에도 “열심히 일하면 부자가 될 것”이라는 생각 하나로 죽어라 일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여성으로, 딸로 태어나서 부모로부터 차별을 받았고, 우리 사회에서도 철저하게 배제되고, 소외되는 차별을 받았다. 그래도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단체나 모임에서 남자들이 주도하는 거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노동조합에 대한 관심도 없었고, 너무 가난하니까 그저 열심히 일해서 돈 벌어가지고 잘 살았으면 좋겠다, 그러다가 적당히 좋은 남자 만나 시집 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아마 당시 여성들은 대체로 이렇게 생각했을 거다. 내가 살던 동네/지역이 너무 지겹고 지긋지긋한데, 거기서 탈출하는 건 결혼이라고 생각했으니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노동은 오전, 오후, 저녁으로 나뉜 3교대였다. 밥 먹을 시간도 보장받지 못하고, 먼지와 소음이 가득한 “생지옥 같은 환경” 속에서, “할당량을 초과 달성해 관리자들에게 칭찬받는 기계 같은 ‘모범생’”처럼 일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1737113514.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페미로’ 탐방의 마지막을 장식한 이총각 동일방직노조 전 지부장과의 차담회는 약 한시간 진행되었다. 80세의 이총각 선생님은 참여자들이 궁금해하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일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변화가 찾아온 건, 가톨릭노동청년회(JOC) 선배들을 만나 소모임 활동에 참여하면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 언니들을 통해서, 몰랐던 이야기를 들으니까 새로운 게 자꾸 보이고 관심이 갔다. 인천도시산업선교회 조화순 목사의 교육을 통해, 노동조합의 존재와 전태일 열사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 과거에는 ‘가난이 부모 탓’이라고만 생각했지만, 뼈 빠지게 일해도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는 현실의 구조적 모순을 깨달으면서 점차 부당한 현실에 맞서는 주체적인 노동자로 각성하게 됐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후 이총각 선생님은 ‘모범 여공’이 아니라 노조 대의원이 됐다. 그리고 지도부 내 총무가 됐고, 1977년에는 제3대 지부장으로 당선됐다. 사측과 정권은 여성노동자들이 주도하는 민주노조를 무너뜨리기 위해 가혹하게 탄압했다. 1976년, 이총각 선생님은 경찰의 강제연행에 맞서 여성 조합원들이 작업복을 벗고 저항한 ‘나체 시위’ 현장을 지켰고, 지부장이 된 후인 1978년 2월 21일에는 사측의 사주를 받은 남성 조합원들이 대의원 선거를 막기 위해 여성들에게 인분을 뿌린 끔찍한 ‘똥물 투척 사건’을 겪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 사건 이후, 이총각 선생님을 비롯한 125명의 여성 노동자가 부당해고를 당했다. 사측의 ‘블랙리스트’로 인해 다른 공장에 들어가기도 힘들었다. 해고 노동자들은 복직 투쟁을 멈추지 않고 출근 시위를 벌이다 구속되었다. 이총각 선생님은 감옥 내에서도 ‘징벌방’에 수감되어 고초를 겪었다. 상상하기 힘든 고초와 동료의 배신, 사회로부터의 억압을 겪었지만, 이총각 선생님은 “노동운동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 어떤 아픔에도, 어떤 위협에도 흔들리지 않고 지금까지 온 자신이 자랑스럽다”고.</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노동운동의 가치는 </span><span style="font-weight: bold;">나를 찾고, 이웃과 함께 공동체로 살아가는 것"</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내가 지금까지 노동운동을 할 수 있었던 건, 내 생활의 일부라서다. 그리고 모진 협박 속에서도 꿋꿋하게 버티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나 혼자의 힘이 아니다. 정말 많은 이웃들, 지인들, 동료들이 나와 함께하면서 힘을 줬고, 격려해줬으며, 용기를 줬다. 살아가면서 점점 느끼는 건 세상은 혼자 살 수 없고 함께 살아야 한다는 거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연대의 삶을 강조한 이총각 선생님은 노동운동의 의미 또한 재차 짚었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우리가 왜 노동운동을 하는가, 왜 사회운동을 하는가, 왜 공동체로 살아야 되는가. 한마디로 우리가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하는 거지 않나. 그러려면 누구 앞에서도 진솔해야 되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노동운동이 어떤 경제적인 문제에만 몰입되지 않았음 좋겠다. 돈 몇 푼 더 받자고 우리가 노동운동을 하는 건 아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페미니스트 역사기행 ‘페미로(路)_인천을 잇다’〉의 마지막을 장식한 이총각 선생님의 한 마디는 역사의 산 증인이 전하는 강렬한 메시지이자, 이번 탐방이 남긴 숙제였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노동운동의 참 가치는 나를 찾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어리석음에서 깨어나, 이웃들과 함께 공동체로 살아가는 것이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5-17 09:25:00</pubDate>
	   <section>sc2</section>
	   <section_k><![CDATA[노동]]></section_k>
	   <section2><![CDATA[]]></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박주연)]]></author>
	   <category><![CDATA[노동]]></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5/2026051741011232.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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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The Women Dreaming of a Utopia in the Male-centric Photo Industry]]></title>
       <link>http://www.ildaro.com/10456</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Last February, a female idol group member posted a photo to her Instagram feed. The picture showed a phone case printed with the phrase, “Girls Can Do Anything”. As some men began to post hateful comments about the statement, the photo became a large controversy in and of itself.</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is situation came as a shock to a number of women, because the reactions of the men seemed so unwarranted yet so extreme. Was the simple statement that “Girls Can Do Anything” really enough cause to warrant such inflammation and anger?</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1617538579.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If abortion is a crime, the state is the criminal." Source: Utopia Facebook page <a href="https://www.facebook.com/utopia2017" target="_blank">https://www.facebook.com/utopia2017</a></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r />The feminist photojournalists behind “Utopia,” the feminist photography project, all have quite a deep connection with the statement, “Girls Can Do Anything”. In fact, the connection is so much so that my meeting with them was nearly cancelled for it, a story that will be revealed in the interview. Anyhow, it was last Sunday afternoon, at a cafe in Itaewon, that I was able to meet “Utopia” photographers Park I-Hyun and Kim Ji-Hae.</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t’s incredibly hard for women to survive in the photo industry”</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Utopia is currently made up of 8 feminist photographers, and the majority of its members are students. The group was born in the spring of 2017, and has since made a name for itself through photographs posted on social media</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span style="color: #8834cb;">Park I-Hyun</span>: “I think Ye-In was the one who first suggested that we make a group like this. The four of us – Ji-Hye, Ye-In, Jae-In, and I – were talking about how the photo industry is awful, there are so many issues and no one’s talking about them, and there definitely aren’t enough female photographers or feminists, when we said, ‘Maybe we should just make it ourselve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span style="color: #2e42d0;">Kim Ji-Hye</span>: “To find people we could talk to, some sort of group was so necessary, but no matter how hard we looked we couldn’t find anything. That’s why we made it ourselves. At first we had 11 people but after a few members got exhausted and dropped out, we now have 8.”</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What is happening in the photo industry to make such a group for female photographers so necessary? The second we threw out this question, the two photographers began to rant passionately. The answer was clear: “The photo industry is so very male-centric”.</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1616472991.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Works by Feminist Photography Project Utopia members. Clockwise from top left: “Black Single Wedding” by Kim Jae-In; “Form [Hyeong]” by Hong San; “Pindle” by Kim Hyo-Won; and “Your Human [Neo-ui Ingan]” by Kim Ha-Yeong.</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r /><span style="color: #2e42d0;">Kim Ji-Hye</span>: “If you are to do professional photography, the equipment is inevitably important, and there is a prejudice that women can’t carry this equipment. When I talk to friends who go to photography schools, they’ll tell me their schools don’t treat them seriously because they think ‘the girls will splinter off to design or post processing instead of going out into the field anyway’. Given such a position, it’s clear who the schools are backing. Once, I got a call about joining a studio but then heard that only 1 out of the 12 photographers were female. I didn’t go because I could already predict the atmospher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 prejudice that women can’t carry heavy photography equipment leads into stereotypes about “feminine equipment” and “feminine cameras”. At photography club meetings, statements like, “Don’t all girls use mirrorless digital cameras since they like cute and small things?” are frequently heard. Despite the lack of difference in the performance of the equipment, these people think that “women use mirrorless cameras, and the real cameras are the ones used by me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n interesting fact is that there are very many female models despite the scarcity of female photographers in the industry. But do numbers always connote success? There may be many of them, but they also struggle to get by in the photography industry.</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span style="color: #8834cb;">Park I-Hyun</span>: “As photography gained some popularity as a hobby, there are now a lot more people who take pictures. There are a lot of photographers who started out this way, especially men who want to take pictures of ‘pretty’ female models. A lot of inquiries about model recruiting will pop up on online photography cafés, and problems (such as sexual harassment) that arise through consequent meetings are frequent. Because of this there are quite a few female models who prefer not to work with male photographers, or decline to do so entirely. But then there are men who call this reverse sexism.”</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span style="color: #2e42d0;">Kim Ji-Hye</span>: “Through the #MeToo movement, photographer Rota has been outed for his sexual assault and is under investigation, but there are many more cases out there. There are some that I’ve personally heard of and others that I’ve read about. In all honesty, this kind of problem has been brought up in the past and nothing was done to change it. And after photographers like Rota got famous and popular through works that objectify and hypersexualize women, the number of people who wanted to take pictures like that just grew. Discourse along the lines of ‘what’s wrong with this, shouldn’t we discuss parts of this from an ethical point of view’ ceased to come ou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While I was being shocked by the unanticipated immensity of the issue, these two women rather bucked up and told me with cheer, “That’s why we had to make Utopia!” There is no doubt that they looked like warriors in this moment.</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What exactly is the issue with “Girls Can Do Anything”?</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Utopia may be the product of women’s resilience and strength, but the process of forming it has been anything but easy. The group was not made to promote friendship between its members, but rather  to realize the goal of staging an exhibition on the topic of feminism. This has warranted consistent work in the academic and personal lives of all of its participants. Although its members felt pressured at times, the determination to realize Utopia kept these worries at bay.</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1618585643.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Girls Can Do Anything” photo by Utopia. ©Photographer Park I-Hyeon</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r />In the midst of such efforts last February, Utopia joined forces with “Project Pyoram,” a two-woman team that had just created the “Girls Can Do Anything” T-shirt. Utopia was to create the promotional photographs. And thus began the Tumblbug crowdfunding page, while a few days later, the photos Utopia had taken were reposted on certain Facebook pages by others. Soon enough, countless comments denouncing the project and models were posted.</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span style="color: #8834cb;">Park I-Hyun</span>: “Most of them were about looks. Mostly things like ‘You’re ugly, you’re fat. You won’t meet a guy.’ but some were comments about our character as well. We reported the respective pages, and asked our followers to report them too through our Facebook and Twitter accounts. But the reply that came the following day read, ‘This page does not violate our terms of use.’ In fact, the other side had reported us for explicit nudity (although none of our photos contained breasts or genitals), and it was our page that was deleted in less than a day.”</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During this time, I had been scheduling the interview with Utopia through Facebook Messenger and was shocked to see the unannounced deletion of the Utopia page. At our meeting, I asked the two women how they took this unusual happening.</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span style="color: #2e42d0;">Kim Ji-Hye</span>: “Of course it was a shock. And it was impossible for spirits to stay high in the team. It was depressing. In truth, we had known that there were people who didn’t like us and slandered us, especially male photographers. I’d even heard that an older male photographer whom I’d considered a close friend had gone around saying harsh things about me, calling me “that feminist". So we’d thought that we had grown somewhat resilient to such responses, but when our page got deleted… how would you feel if your year-long graduation thesis went up in flames in front of you? We felt like tha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span style="color: #8834cb;">Park I-Hyun</span>: “But the relief was that so many people cheered us on. They raged with us and acted with us, and when the page was recently restored, we were shocked by the countless people who started following us. Shall I say that it was even more empowering than before? (Laughs) It was such a recharge.”</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161934624.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Works by Feminist Photography Project Utopia members. Clockwise from top left: “Women [Yeojadeul]” by Kwak Ye-In; “on my own” by Kim Bun-Hong; “About body” by Kim Ji-Hye; and “Girls can do anything” by Park I-Hyun.</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 font-weight: bold;"><br />The utopia that Utopia dreams of</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Like the saying that a girl doesn’t remain a girl but instead grows into a stronger woman, Utopia has become all the stronger for its struggles. In March, Kim Ji-Hye, in collaboration with Kwak Ye-In, held an exhibit entitled “Normal World" at the feminist busineess Café Doing, and Hong San also held her exhibit “Talk With Your Body" at the SangSoo gallery café.</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Utopia is also planning exhibits for the coming summer. The team has stated, “All of our members have different styles and tastes but we think that diversity is what makes us more interesting.” They’ve also let us in on the plan that their team exhibition will reveal their in-progress “100 Feminists” projec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When I carefully asked what else they had on their minds, they laid out the following with twinkling eyes: “We want to take pictures at Seoul Queer Parade! If we can, we want to open a booth there, too! We want to collaborate with other arts organizations! We want to host a digital and photographic feminism seminar!”</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n fact, Kim Ji-Hye has actually created another group, called “Studio Bagdad,” that is less centered on exhibits. It has plans to “facilitate networking between female photographers, and hold feminism lectures and seminar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n truth it takes a lot of money to hold an exhibition. The rent is expensive, and there aren’t a lot of places like Café Doing that give so much help in setting up the show. So in some ways we have to do exhibits together to bear the costs.” With this remark, Kim also voiced her hopes that the future will become an environment where people can earn sufficient wages through photography.</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 time conversing with feminist photographers who want to do a lot and say a lot flew by. As the interview came to a close, I asked each woman what these activities meant for them personally, and how running Utopia has influenced them.</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span style="color: #2e42d0;">Kim Ji-Hye</span>: “I can feel that the number of supporters of Utopia is growing. There are people who post comments and feedback on our photos, and I feel proud every time we are mentioned in the “femi” spher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span style="color: #8834cb;">Park I-Hyun</span>: “I tend to tell stories through my photos, so when people can relate to my work or say, ‘Oh, I experienced that too,’ I always feel stronger. It means that I’m not feeling this way alone, and that we’re building understanding and solidarity together.”</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 time spent with these feminists who are not only dreaming of but creating their utopia was delightful. I hope that more and more people will get a taste of this utopia. <span style="color: #d42aa8;">[Translated by Susan Lee]</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Original article: <a href="http://ildaro.com/8170" target="_blank">http://ildaro.com/8170</a> Published April 6, 2018</span></p>]]></description>
       <pubDate>2026-05-16 16:14:00</pubDate>
	   <section>sc100</section>
	   <section_k><![CDATA[English Article]]></section_k>
	   <section2><![CDATA[]]></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Park Juyeon)]]></author>
	   <category><![CDATA[English Article]]></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563'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5/2026051624423062.jpg' medium='image'></media:content>
<image><![CDATA[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5/2026051624423062.jpg]]></image>
     </item>

     <item>
       <title><![CDATA[농어촌 성평등 “제도는 있다, 현장에서 작동시켜라”]]></title>
       <link>http://www.ildaro.com/10455</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전라도와 제주의 여성농어업인 단체들과 여성농어업인 백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열린 〈여성농어업인 성평등 정책 거버넌스 포럼〉(4월 28일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는 민관거버넌스 실제 사례들이 공유되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고성군, “민관거버넌스 구축, 군의회 11명 중 여성의원 6명” 등 활약</span></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마을 내 성폭행 범죄와 같은 비상사태에서 역량 드러내</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활동우수 사례로 고성군과 제주의 거버넌스(정부·비정부 기관·시민·기업·학계 등이 함께 의사결정하고 운영하는 체계) 구축 과정이 공유되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1546328790.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여성농어업인 성평등 정책 거버넌스 포럼〉에서 민관거버넌스 활동우수 사례로 김명희 고성여성농업인 종합지원센터장이 발표하고 있다. 고성군은 여성농업인 정책 모니터링을 시작으로 민관거버넌스를 구축하여, 군의회 의원 11명 중 여성 의원 6명 당선, 토종농산물 육성 지원 조례, 소규모 식품가공 활성화 등의 진전을 이어가고 있다. (사진 제공- 호미)</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먼저, 김명희 고성여성농업인 종합지원센터장은 2015년에 고성군의회 의장이 주민을 성추행한 사건 당시를 민관거버넌스의 시작점으로 이야기했다. 그런 사태가 발생했는데도 지역사회 내 근본적인 반성이 일어나지 못하는 상황을 보며, 지역 시민사회단체의 문제의식이 커졌던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김명희 센터장의 발표에 따르면, 당시 고성군의 제안으로 고성여성농업인 종합지원센터에서 여성농업인 정책 모니터링을 시작했다. 이를 위해 성인지 역량강화 강좌 및 컨설팅을 진행하였고, 지역 여성농민단체, 군의원, 농업기술센터 등이 참여하는 민관거버넌스를 구축해갔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 거버넌스 활동의 결과, 간담회 등을 거쳐 고성군에 여성농업인 전담부서를 설치하고 전담인력도 배치되었다. 또한 이러한 활동의 결과, 군의회 11명 중 여성의원이 6명 당선되고, 여성농민단체들의 요구 사항이었던 토종농산물 육성, 소규모 식품가공 활성화, 여성농업인의 날 기념행사 등을 포함하는 세 개 조례 제정의 결실을 맺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거버넌스의 힘은 비상사태가 발생했을 때 그 위력을 발휘했다. 2025년 5월, 고성군에서 70대 남성이 이웃인 80대 치매 여성을 성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여성 농민단체들이 즉각적으로 피해 예방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군청에서 진행했고, 성폭력 예방 교육도 했다. 이러한 적극적인 대응으로 가해자는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이 되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제주, 여성농업인 원탁회의가 제안한 17건 중 12건 정책으로 실현</span></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공동경영주 인정, 농민수당 가구별 아닌 개별 지급, 이동식 화장실, 왕진버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두 번째 사례는 강영주 제주여성농업인센터협회장이 발표했다. 농업 환경의 급격한 변화와 여성 농업인의 27%가 감소하는 상황에서 2023년에 제주 거버넌스는 시작되었다. 제주 여성농민단체, 행정, 연구진이 함께 거버넌스를 구축하였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1547108418.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또 하나의 민관거버넌스 활동우수 사례로 제주여성농업인센터협회 강영주 회장이 발표하고 있다. 제주여성 민관거버넌스는 여성농업인 원탁회의에서 제안된 17가지 안건 중 12건이 정책으로 실현되는 성과를 가져왔다. (사진 제공-호미)</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이들은 감귤밭 돌담창고, 된장학교 등 지역 현장을 돌며 회의를 진행하면서, 여성 농민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지방정부에서 정책화하는 방안을 모색해갔다. 그 성과로 제주여성 민관 거버넌스 원탁회의(2026~2030년 제5차 여성농업인 육성 기본계획 수립을 앞두고, 제주도내 여성농업인들의 목소리를 직접 청취하고 정책에 반영하기 위해 마련된 원탁회의)에서 향후 10년의 성평등 과제로 제안한 17가지 안건 중 12건이 정책으로 실현되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조례 제정으로 여성 농업인의 자치법규상 ‘공동 경영주의 지위’를 명문화하고, 농민수당을 기존의 가구 단위가 아닌 개별 지급하고, 여성농민을 위한 이동식 화장실 50개소 설치, 여성농민 특수건강검진 및 찾아가는 왕진버스 운영, 출산농가도우미 100% 정액 지원 등의 성과를 내고 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곡성군, 30여명 규모 여성이장단 모임 있었으나 해체돼</span></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농협 여성 과소대표도 문제, ‘조합원은 35.5% 이사는 13.9% 불과’</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발표가 끝난 후 토론에서 더욱 구체적이고 절박한 현장의 목소리들이 이어졌다. 곡성군 서옥리 김진숙 이장(9년차)은 “곡성군에는 한 30명 정도 여성 이장단 모임도 있고 단장도 있었는데 해체되었다”고 토로했다. 여성농업인들이 네트워크할 조직이 없는 상태인 것이다. 김 이장은 “이 포럼이 끝나면 당장 군수님을 찾아가서 여성 이장 네트워크부터 하자고 하렵니다. 역량강화 교육도 하고요.”라고 다짐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한편, 신진남 한국여성농업인전라남도연합회 수석부회장은 농협 이사가 대부분 남성인 현실에 대해 문제 제기했다. “우리 여성농업인들이 경제적으로도 주체가 되어 의사결정을 할 수 있으려면, 농협에 여성 이사들이 나와야 한다.”고 목소리 높였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2015년 개정된 지역농협의 여성 이사 의무 선출제는 ‘여성 조합원 비율 30% 이상’인 경우에만 적용되며, ‘1명 이상’ 선출이라는 최소 기준만 충족하면 법 위반이 아니다. 이러한 규정의 허점으로 인해, 여성이 전체 조합원의 35.5%를 차지함에도 불구하고 여성 이사 비율은 전체의 13.9%에 그치는 심각한 과소대표 문제가 지속되고 있다. 농축협 1천110곳 중 여성 이사가 한 명도 없는 곳은 237곳(21.4%)이나 된다. 여성 이사가 1명뿐인 곳(법적으로 이사는 조합장 1명을 포함하여 7명 이상 25명 이하이며, 보통 10명 내외로 구성됨)도 605곳(54.5%)이나 된다. 지역농협 76%가 여성 이사 ‘1명 이하’인 것이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1547421629.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포럼 2부에서 농어업 여성단체 활동가들이 기존의 농정 거버넌스를 비판하며 활발한 토론을 이어갔다. 객석에서도 공동경영주 제도의 실효성 부족, 예산 없는 여성농어업인 정책으로 정책 취지 훼손, 여성 농협 조합원의 과소대표, 중앙정책 전달체계 실패 등을 지적하며 앞으로의 과제를 논의했다. (사진 제공-호미)</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생생 바우처, 신청하는 사람이 없어서 집행비 0원?</span></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관이 주도하는 거버넌스는 한계 명확’ 여성농민이 주체가 돼야</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현숙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전북도연합 부회장은 기존의 농정 거버넌스에 제안해 여성농민 분과를 만들어낸 경험을 나누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익산에서도 ‘희망농정’이라고 거버넌스가 생겼어요. 여성농민회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지만, 여성농민과 관련된 정책이 없었어요. 위에서 내려오는 사업 한 두 가지 끼어있는 정도. 여성이 주체가 돼서 정책을 이야기할 수가 없었죠. 1년 동안 지속적으로 요구한 끝에, 여성농민 분과를 만들 수 있었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여성농업인의 체육활동 및 문화활동 비용을 지원하는 생생 바우처 사업의 경우에도 초기에 집행비가 0원이었다. 문의하니, “신청하는 사람이 없다”는 이유였다. 홍보가 되지 않아 여성 농민들에게 전달되지 않은 것이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 일을 계기로 익산시 여성농민회는 영농여건 개선사업을 시작했다. 마을마다 찾아가 여성 농민들을 만나 여성 편의장비나 생생바우처, 특수건강검진 등 여성 농업인 정책을 알리고 소통하는 사업이다. 3년 활동의 결과, 익산의 3분의 2 이상의 마을과 교류할 수 있었고, 마을 주민들의 환대로 성평등 교육도 5년째 이어가고 있다고 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한편, 김미랑 여성농민회 제주도연합 회장은 제주에서 여성농민단체와 관의 거버넌스로 여성농민육성 조례, 여성농업인의 날 행사 등의 성과를 냈지만 한계도 있다고 밝혔다, 남편과 공동경영주로 등록되어 있던 여성농민이 남편 사망 후 행정기관으로부터 경영주 승계를 거절당해 재가입을 해야 했던 사례를 들었다. 김미랑 회장은 ‘관이 주도하는 거버넌스가 되지 않아야 한다’고도 당부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예산 확보 없이는 여성농민 정책 실효성도, 확산도 불가능</span></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민간의 힘으로 거버넌스 구동시켜야”</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어진 객석 토론에서 오순이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사무처장은 예산 없는 사업 대상 확대를 지적했다. “예산을 확보하지 않고 대상을 확대하다 보니, 기존에 받았던 분들을 계속 제외시키는 식으로 정책이 되고 있어요. (여성농업인 정책) 전담부서와 인력도 충원해야 하지만, 거기에 맞는 여성농업인 예산도 확대가 돼야 합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날 포럼에서 공동경영주 제도의 실효성 문제는 반복적으로 지적됐다. 한국생활개선보성군연합회 김미자 회장은 농협 이사회에 지원했으나, 대표 경영주가 아니라 공동경영주라는 이유로 거절당한 경험을 이야기했다. “공동경영주라는 게 말만 공동이지 실효성이 없었다. 정책을 위한 정책이고, 실질적인 형태는 없는 이름뿐인 제도였다.”라고 비판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 자리를 주최한 대통령 직속 농어업·농어촌특별위원회 산하 여성농어업인특별위원회 정영이 위원장은 폐회사에서 이렇게 당부했다. “제도는 있습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그것을 현장에서, 민간의 힘으로 거버넌스를 구축하고 작동시키는 것입니다. 각 지역에 돌아가셔서 다양한 여성농민들이 모여서 정책협의체계를 지자체에 제안해주십시오. 지역에서 현장을 바꿔내고, 이 변화들이 정책이 되도록 해주십시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농어업·농어촌특별위원회는 제1권역 포럼을 시작으로 제2·3권역 포럼을 순차적으로 개최하고, 권역별 논의 결과를 종합하여 전국단위 포럼까지 진행하여 성평등 정책 거버넌스 구축 및 정책 확산을 위한 실행 전략을 마련할 계획이다.<span style="color: #800080;"> [끝]</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0000ff;">[필자 소개] 호미</span>. 귀농운동본부 귀농통문 편집위원, 농어업농어촌특별위원회 여성농어업위원회 위원, 장애활동지원사, 동화집필 노동자이다. 서울에서 귀농했다가 도시로 역이주했지만 다시 귀농 준비를 하고 있다. 여자들이 귀농하기 만만치 않지만, 그 여자들도 만만치 않다는 걸(지민주 노래 ⌜세상에 지지 말아요」를 따라썼다) 드러내려고 쓴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5-15 09:44:00</pubDate>
	   <section>sc3</section>
	   <section_k><![CDATA[녹색정치]]></section_k>
	   <section2><![CDATA[]]></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호미)]]></author>
	   <category><![CDATA[녹색정치]]></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5/202605155035479.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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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여성농업인 정책은 ‘공공 페미니즘’, 아래로부터 변화를]]></title>
       <link>http://www.ildaro.com/10454</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지난 4월 28일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 컨퍼런스홀에서는 〈여성농어업인 성평등 정책 거버넌스 포럼〉이 열렸다. 농번기가 이른 남도라 본격적인 농사 채비에 들어가는 바쁜 상황인데도, 전남·전북·제주 지역 여성농어업인 단체 대표와 활동가, 그리고 여성농어업인 100여 명이 자리를 가득 채웠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1417294258.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26년 4월 28일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 컨퍼런스홀에서 열린 〈여성농어업인 성평등 정책 거버넌스 포럼〉 참여자들이 자료집을 들고 자세를 잡았다. (주최 측 제공 사진-대통령직속 농어업농어촌특별위원회 산하 여성농어업인특별위원회)</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이 자리는 대통령 직속 농어업농어촌특별위원회 산하 여성농어업인특별위원회(이하 여농특위)가 여성농어업인 정책 추진 성과를 공유하고, 지역의 실제 사례를 중심으로 정책을 확산하는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마련된 권역별 정책포럼의 첫 자리였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여농특위는 농업인에게도 아직 낯설다. 2025년 9월에 농어촌 성평등 확산 및 정착, 여성 농어업인의 지위와 권리 향상을 위해 신설된 기구이기 때문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여성 농어업인들은 농어업의 주역임에도 불구하고, 가부장적인 농촌사회와 남성중심의 농어업 정책 속에서 복합적인 차별 상황에 놓여있다. 따라서 여성 농어업계에서는 농어촌 성평등과 여성 농어입인의 권한을 강화시켜야 한다고 줄기차게 요구해왔다. 그 결과, 대통령 직속 농어업·농어촌특별위원회 산하 기관으로 농어촌기본소득특별위원회, 농어촌재생에너지특별위원회와 함께 여성농어업인특별위원회가 함께 만들어졌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정영이 여농특위 위원장은 개회사에서 “농촌의 성평등 정책이 개별 사업의 확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정책 설계와 집행 전반에 일관되게 반영되고 현장에서 실제로 작동하는 체계로 구축되어야 할 시점”이라며 포럼을 열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1417531587.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대통령직속 농어업농어촌특별위원회 산하 여성농어업인특별위원회는 2025년 9월에 농어촌 성평등 확산 및 정착, 여성 농어업인의 지위와 권리 향상을 위해 신설된 기구다. 정영이 위원장이 〈여성농어업인 성평등 정책 거버넌스 포럼〉 -전라도‧제주 권역- 개회사를 하고 있다. (사진 제공-호미)</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25년간 여성농민 정책 추진…왜 현장은 그대로인가?</span></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지자체에 전담부서 없거나, 전담인력 없거나, 전문성 없어</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주제 발표를 맡은 이순미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2001년 여성농업인 육성법이 제정된 이후 지난 25년을 돌아보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25년 전이나 지금이나 우리는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25년 동안 달려왔는데 체감 가능한 긍정적인 변화가 왜 만들어지지 않는가? 저는 핵심 원인으로 중앙-지자체-농촌 현장을 잇는 정책 전달 체계의 부재를 이야기하고자 합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여성농업인 육성 기본계획은 1차부터 6차까지 체계적으로 만들어져 왔고, 수립된 전략 과제들도 혁신적이다. 그럼에도 그 정책이 현장에서 제대로 실현되고 있는가를 보면 회의적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현재 지방정부 중에 광역은 전담부서가 있는데 반해, 기초 단위는 고성군 한 군데밖에 없다. 절대 다수의 지방이 여성농민 보호 및 육성 전담체계를 갖추고 있지 않다. 전담부서가 있는 지방정부라고 해도, 1~3명의 인력으로 방대한 현장 수요를 감당하고 있는 상황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담당하는 부서 이름은 여성농업인 지원팀, 여성농업인 정책팀이라고 붙여졌지만, 사실 그 안에서 일하는 공무원 담당자의 여성농업인 업무 비중은 20~35%에 불과했습니다. 청년농업, 농지관리, 귀농귀촌 같은 업무들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거죠. 기존에 다른 업무를 하던 조직이나 담당자를 그대로 두고 이름만 바꾸고 여성농업인 업무를 부과시키는 수준입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여기에 잦은 인사이동까지 겹치면 전문성은 기대하기 어렵다. 이순미 연구위원은 강원도가 ‘전문관 제도’를 통해 한 담당자가 3년 이상 여성농업인 업무만 전담하도록 하고 있다는 점을 대안으로 소개했다. 그럴 경우 여성농업인 관련 업무 비중은 90% 이상이며, 이후 비약적인 예산 확보와 새로운 정책으로 이어졌다는 것.</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1418175894.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이순미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이 〈성평등 농정을 위한 거버넌스 혁신 전략〉을 주제로 발제하고 있다. 이 연구위원은 ‘지역 성평등 거버넌스(정부·비정부 기관·시민·기업·학계 등이 함께 의사결정하고 운영하는 체계) 구축이야말로 여성농업인 정책 성공의 가장 중요한 동력’이라고 강조하며, 구체적인 과제를 제시했다. (사진 제공- 호미)</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농촌 현장의 요구들은 쉽게 ‘역차별’ 혹은 ‘중복지원’ 이유로 거부돼</span></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성주류화 예산의 낮은 비중, 지방정부의 낮은 성인지 역량</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정부가 ‘여성농업인 육성조례’ 표준조례안을 만들어 보급해도, 일부 지방정부에서는 명시조차 되지 않기도 한다. 또한, 여성 공동경영주와 관련된 정책 사업, 양성평등 교육 사업이나 의사결정 기구의 여성비율 확대 사업 등 성주류화 전략 사업은 예산 비중이 턱없이 낮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순미 연구위원은 지방정부의 성인지적 역량의 문제도 지적했다. 현장 여성농민의 요구가 있어도 ‘역차별’, ‘중복지원’ 등의 이유를 대며 거부당하기 일쑤다. 여성농업인 업무를 ‘잔잔한 업무’, 즉 취약성을 지원하는 시혜적인 복지정책으로 생각하는 담당자들도 많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런 상황에서 지역 성평등 거버넌스(정부·비정부 기관·시민·기업·학계 등이 함께 의사결정하고 운영하는 체계)는 실현되기 어렵다. 행정이 주도하고 여성농업계는 거수기 역할을 배당받거나 동원되는 형태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시정 간담회에 여성 관련 단체를 초대하는 것을 ‘거버넌스’라고 오해하는 경우도 있다. 여성농업인 전담부서나 인력이 없는 경우, 여성농민은 이마저도 배제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순미 연구위원은 “제도를 움직이는 힘은 민간에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공무원과 국가 정책 입안자들이 제도와 행정을 만들지만, 그것을 추동하는 힘은 현장의 여성들에게서 온다는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실제, 1992년 여성농업인 육성이 법제화되기 시작한 이후 제6차 여성농업인 육성 기본계획이 수립되기까지, 현장의 여성농민들은 지난한 시간 정책 과제들을 천명하고 요구하였으며, 이러한 노력을 정부가 수용하면서 법 제도가 만들어져왔다. 이 연구위원은 “바로 이것이 ‘공공 페미니즘’(Public Feminism)이며, 여성농업인 정책들은 공공 페미니즘의 전형”이라고 말했다. 이때, 다양한 이해관계자, 즉 민관의 상호의존성에 기초한 파트너십, 성평등 거버넌스 구축이야말로 여성농업인 정책 성공의 가장 중요한 동력이 되는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순미 연구위원은 성평등 거버넌스를 위한 과제로 1) ‘성인지적 관점의 행정’과 ‘스스로 의제를 형성하는 민간’의 교차, 2) 최소 2인 전담인력과 여성농업인 업무 비중 60% 이상, 전문관 제도 활용 등 행정구조의 정상화, 3) 여성농업인 의사결정참여 확대, 공동경영주 자격 개선 등 성주류화 접근 전략, 4) 조례 개정, 예산 확보, 지속성 담보 등 민관협의체의 제도화, 5)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의 성인지 정책역량 강화, 6) 여성농업인 정책 연대(라운드테이블) 결성 등을 제시했다. <span style="color: #c94d35;">(하편에서 계속)</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234fdb;">[필자 소개] 호미</span>. 귀농운동본부 귀농통문 편집위원, 농어업농어촌특별위원회 여성농어업위원회 위원, 장애활동지원사, 동화집필 노동자이다. 서울에서 귀농했다가 도시로 역이주했지만 다시 귀농 준비를 하고 있다. 여자들이 귀농하기 만만치 않지만, 그 여자들도 만만치 않다는 걸(지민주 노래 ⌜세상에 지지 말아요」를 따라썼다) 드러내려고 쓴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5-14 08:12:00</pubDate>
	   <section>sc3</section>
	   <section_k><![CDATA[녹색정치]]></section_k>
	   <section2><![CDATA[]]></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호미)]]></author>
	   <category><![CDATA[녹색정치]]></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5/2026051420145653.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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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나와는 전혀 다른 너를 사랑할 수 있을까? ]]></title>
       <link>http://www.ildaro.com/10453</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정치적 신념이 인간관계에서 ‘불화’로 작동하는 경험을 나 또한 해 보았다. 어쩌면 매순간 우리 삶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인지도. 작게는 오늘 내가 일하는 사무실 안에서부터, 현재 세계곳곳에서 발생하는 참극까지. 정치적 신념의 대립은 부모와 자식 관계도, 우애도, 신의도, 깊은 역사도 그리고 사랑까지 뒤흔들기도 한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1323422696.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영화 〈추억〉(The Way We Were, 시드니 폴락 감독, 1973년)의 두 주인공. 능력 있고 잘 생긴 미국 주류 남성인 허블(로버트 레드퍼드)과, 반전 운동을 하며 정치적 신념에 따라 움직이는 여성 케이티(바브라 스트라이샌드)의 사랑과 갈등을 다루며 치열한 시대적 상황을 보여준다.</p></td></tr></tbody></table><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font-family: 바탕;">영화 〈추억〉이 남긴 질문</span></span></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br /></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font-family: 바탕;">영화 〈추억〉(The Way We Were, 1973)은 서로의 정반대에 있다고 생각하는 케이티와 허블이라는 인물이 사랑을 느꼈고, 최선을 다해 나와 다른 너를 사랑한 한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바브라 스트라이샌드가 연기한 ‘케이티’라는 인물의 매력에 대해서, 이 영화가 보여주는 치열함에 대해서 들여다보고자 한다.</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영화는 라디오 방송국에서 일하는 거침없는 성격의 케이티와 해군 장교로 활동 중인 허블이 어느 클럽에서 우연히 재회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재회 후, 이 영화의 주인공이기도 한 바브라 스트라이샌드가 부른 주제곡과 함께 오프닝 크레딧이 시작한다. 영상은 현재의 모습에서 그들이 처음 만났던 과거로 전환한다. 여기서 아주 효과적이면서도 아름답게 구현해낸 케이티와 허블의 캐릭터 대비를 볼 수 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132411569.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영화 〈추억〉 중 케이티와 허블의 모습</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둘은 뉴욕의 코넬 대학교에서 만난 동창생이다. 허블은 잘생긴 외모에 ROTC, 체육 특기생으로 육상, 조정 못 하는 게 없다. 자신의 활동을 응원하는 여자친구와 박수쳐주는 사람들까지. 세상은 중산층 미국인인 그에게 관대하고, 주위의 관심을 받는 일이란 그에게 ‘쉬운’ 일이다. 반면, 케이티는 곱슬머리에 멋진 옷은 커녕 알바에 매달려 사는 짠내 나는 대학생이지만 세계 평화를 꿈꾸는 열혈 운동권이다. 세상은 스페인에서 일어나는 학살에 방관하지 말자는 그녀의 간절한 외침을 주목하지 않는다. 학내에서 그녀의 이야기는 관심이 아니라, 조롱거리가 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너무나 상반된 둘이지만, 이들은 대학이라는 한 공간에서 한 시절을 함께 하고 있다. 같은 세계, 같은 공간,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수업을 듣더라도 이들이 사는 모양은 너무 다르다. 그 극명한 차이를 이 영화는 실감나게 묘사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계급과 삶의 조건이 전혀 다른 두 주인공이 서로에게 매료되어 무언가를 깨닫고 성장한다는 설정은 흔한 로맨스의 공식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신박할 정도로 특별하게 다가오는 지점은 시대적 상황과 그에 대응하는 주인공들의 삶의 태도를 묘사함에 있어, 그들 사이의 긴장을 정밀하고 팽팽하게 구현해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이 영화를 특별하게 바라보도록 하는 것은 그 치열한 시대적 묘사들이 결국 ‘사랑’이라는 감정을 통해 구현된다는 지점이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1324406564.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영화 〈추억〉 중 케이티의 모습</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케이티와 허블이 대학에 함께 다녔던 시기는 1930년대 후반으로 스페인 내전이 있던 시기다. 케이티는 학내 집회에서 스페인 내 학살에 더 이상 방관하지 말자는 연설을 하지만, 돌아오는 건 학생들은 야유뿐이다. 그때, 군중 속에서 함께 비웃고 있을 줄 알았던 허블이 의외의 진중한 시선으로 케이티를 바라본다. 그 시선에서 용기를 얻은 케이티는 마침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끝까지 쏟아내는 데 성공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허블의 의외성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케이티는 작문 시간, 자신의 글이 우수작으로 뽑히길 고대하지만 정작 선택된 것은 허블의 글이었다. 교수가 낭독하는 허블의 문장을 들으며 케이티는 허블의 글에 매료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과거의 회상이 끝난 뒤, 영화는 케이티가 허블을 사랑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잘생긴 얼굴, 천부적 재능, 세상의 관대함까지 업은 허블이 관계의 주도권을 쥔 듯 하지만, 사실 관계의 키를 쥐고 있는 인물은 케이티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해 포기를 모르는 인물이다. 그러한 그녀의 기질은 사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그녀에게 허블의 사회적 배경은 중요치 않다. 케이티의 신념과 삶의 태도가 주로 불화를 일으키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케이티의 뜨거움이 없었다면 둘은 만날수도 없었다. 사랑의 위기마다 케이티가 어떻게 돌파구를 찾는지를 지켜보게 되는 것도 이 영화를 보는 재미 중 하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한편, 허블은 케이티를 만남으로써 글을 다시 쓰기 시작한다. 하지만 허블이 할리우드 데뷔를 꿈꿀 때, 케이티는 그의 재능이 왜곡될 것을 경계하게 된다. 둘을 이어주었던 ‘글’은 결국 검열이라는 역사적 사건 앞에 놓이게 되고,  두 사람을 갈라놓는 계기가 된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1325118750.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영화 〈추억〉 중 케이티가 워싱턴에서 시위를 하는 모습</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이 시기의 사회적 배경이 되는 1940년대 후반, 냉전 체제가 시작될 무렵 미국 사회는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려는 매카시즘(McCarthyism)의 광풍에 휩싸인다. 할리우드 역시 사상검증을 피할 수 없었다. 할리우드 내 공산주의 침투를 조사하며 증언을 강요했으나, 이 증언을 거부하고 블랙리스트에 오른 ‘할리우드 10인’이 등장하던 그때, 케이티는 망설임 없이 워싱턴 시위를 주도하고, 합류한다. 이제 막 할리우드 데뷔를 꿈꾸는 허블에게 그녀의 정치적 행위는 부담이었으나, 케이티는 신념에 따라 행동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러나 허블은 그 일로 인하여 데뷔가 막히는 위기의 국면에 닥치자, ‘저항 없이’ 글을 수정하겠다고 약속한다. 시대의 검열은 그렇게 둘을 갈라놓는다. 그러나 케이티는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허블을 잡는다. 그녀에게 신념을 지키는 것과 허블을 사랑하는 것은 이율배반적인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허블은 그럴 수가 없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수 년 후, 두 사람은 또 다시 우연히 재회한다. 케이티는 여전히 거리 선전전을 향하는 길이었고, 허블은 TV쇼 작가로서 파트너와 함께 뉴욕을 방문 중이었다. 둘은 재회의 순간, 나와는 전혀 다른 너를 사랑했던 그때를 추억한다. 그리고 한 세계에 존재하면서도, 사랑하면서도, 이별을 택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이제 받아들인다. 그래서 케이티는 거리에서 다시 외친다. 원자폭탄 반대 운동에 동참해 달라고 말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ad34cb;">[필자 소개] 변규리</span>: 관찰과 기록하는 것을 좋아해 왔고, 그 습관이 발전해 다큐멘터리라는 툴을 탐구하게 됐다. 지역공동체 라디오 구로FM에서 프로듀서로 일하며 다큐멘터리를 시작했다. 2016년 퀴어 페미니스트 미디어 그룹 연분홍치마에서 활동을 시작하면서 다큐가 더 좋아졌다. 다큐는 관객에게 공감과 위로를 전하고, 공동의 경험을 감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세상에 미치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 지금은 성소수자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활동하며, 한국성소수자인권단체연합 무지개행동에서 집행위원으로도 함께하고 있다.  대표작으로 〈Play On〉(2017 연출), 〈너에게 가는 길〉(2021 연출)이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ad34cb;">[성적소수문화인권연대 연분홍치마 소개]</span> 2004년 설립된 연분홍치마는 여성주의적 감수성을 바탕으로 소통과 연대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다양한 현장에서 미디어로 연대하며 다큐멘터리, 극영화, 웹컨텐츠 등을 제작하고 있다. pinks.or.kr</span></p>]]></description>
       <pubDate>2026-05-13 09:21:00</pubDate>
	   <section>sc7</section>
	   <section_k><![CDATA[문화]]></section_k>
	   <section2><![CDATA[영화]]></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변규리)]]></author>
	   <category><![CDATA[영화]]></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5/2026051328187863.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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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고립 출산’한 베트남인 기능실습생이 사체유기죄?]]></title>
       <link>http://www.ildaro.com/10452</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일본에서 ‘기능실습생’(개발도상국에 기술을 이전한다는 명분으로 외국인 노동자가 최장 5년간 일할 수 있게 한 제도인데, 실제로는 저임금 노동력을 활용하려는 측면이 강하다. 과거 한국의 산업연수생 제도와 유사함)으로 일하던 외국인이 일본 경찰에 체포 및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는 사건이 줄을 잇고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2025년에는 베트남 여성 응우엣(일본어 표기는 グエット ‘그웻’) 씨가 사산 후 사체유기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현재 상고 중이다. 이 재판을 지원해온 ‘쿠무스타카-외국인과 함께 사는 모임’의 나카시마 신이치로(中島眞一郎) 씨가 응우엣 씨의 주장과 재판에 대해 보고한다. 이어서 이 사건과 관련하여 ‘재생산 정의’에 대해 쇼치대학 다나카 마사코(田中雅子) 교수가 기고한다. [편집자 주]</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1115376749.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26년 1월 13일, 응우옌 티 응우엣 씨를 지원하는 사람들과 변호인단이 상고 이유서 제출을 앞두고 대법원 정문 앞에서 집회를 열었다. 현수막에 적힌 문구는 “응우엣 씨에게 무죄 판결을!” (출처: 쿠무스타카-외국인과 함께 사는 모임 <a href="https://kumustaka.org" target="_blank">kumustaka.org</a>)</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쿠무스타카-외국인과 함께 사는 모임 나카시마 신이치로 기고:</span></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고립 출산’ 내몰린 기능실습생의 정황 고려하지 않은 재판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쿠무스타카’(Kumustaka, ‘잘 지내요?’라는 의미의 필리핀 타갈로그어)는 1985년부터 일본에서 일하는 아시아 여성들을 지원해온 비정부단체로, 구마모토시에서 발족했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번 사건과 유사한 사례로, 2021년에 일어난 베트남인 기능실습생 린(Linh) 씨 사건을 지원한 바 있습니다. 린 씨는 구마모토현의 귤 농장에서 일하던 중, 기숙사에서 홀로 아기를 낳다가 쌍둥이를 사산하였습니다. 그 후 아이의 이름을 짓고, 편지를 쓰고, 시신을 수건에 감싸 상자에 담아 선반 위에 보관, 다음 날 병원을 찾았다가 ‘사체유기죄’로 체포되었습니다. 린 씨는 1심과 2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2023년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바 있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우리는 2024년 응우옌 티 응우엣(Nguyễn Thị Nguyệt) 씨가 체포되었다는 사실을 언론 보도를 통해 알게 된 후, 후쿠오카의 지원자들을 통해 변호사 및 통역사와 연락을 주고받았습니다. 그해 7월 보석으로 풀려난 응우엣 씨에게 새로운 실습처(일자리)를 찾아주고, 지금까지 곁에서 지원을 이어가고 있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베트남인 기능실습생인 응우엣 씨는 일본에 오기 전부터 “임신하면 귀국시켜 버리겠다”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던 탓에, 2023년 12월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도 누구와도 상의하지 못한 채 지냈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2024년 2월 2일, 지인의 집에서 지내던 중 혼자 갑작스레 출산을 하게 되었는데, 안타깝게도 사산이었습니다. 대량출혈과 그에 따른 산소결핍 등으로 몇 번이고 실신하면서 아기의 사체를 간신히 찾아내어 비닐봉투에 담았습니다. 베트남에는 시신을 맨바닥에 놓아서는 안 된다는 금기가 있는 데다, 아이의 시신을 뭔가로 덮어주고 싶어 바로 옆에 있던 쓰레기통 안에 잠깐 안치하고 그 위에 케이크 상자를 얹었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사산한 지 몇 시간 후, 집에 돌아온 지인이 응우엣 씨를 병원으로 데려갔는데, 병원 측이 경찰에 신고를 했고 응우엣 씨는 사체유기죄로 체포 및 기소를 당했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응우엣 씨는 일관되게 무죄를 주장했지만, 2025년 3월 7일, 후쿠오카지방법원은 유죄 판결(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4일, 후쿠오카고등법원은 1심의 유죄 판결을 지지하며 항소를 기각했습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1111245125.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26년 1월 13일, 대법원에 상고 이유서를 제출하는 날 사법기자클럽에서 열린 기자회견. 왼쪽부터 ‘쿠무스타카-외국인과 함께 사는 모임’ 나카시마 신이치로 씨, 시마 쇼고 변호사, 하야시 요코 변호사, 쇼치대학 다나카 마사코 교수, 그리고 소송 지원자인 ‘아시아에 사는 모임 후쿠오카’의 이노우에 사치오 씨. 테이블 앞 현수막 문구는 “고립 출산의 범죄화에 종지부를!” (필자 제공)</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응우엣 씨의 ‘고립 출산’의 배경에는 많은 기능실습생이 임신을 이유로 강제귀국을 당한다는 현실이 있습니다. 응우엣 씨는 150만엔이라는 빚을 떠안고 일본에 왔기 때문에 강제귀국이 두려워 누구에게도 상의하지 못했고, 가족에게 지속적으로 송금을 해온 탓에 경제적 궁핍 상태였으며, 언어의 벽도 있어 지원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고립 출산에 내몰렸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또한, 사산 직후의 신체적, 정신적 극한 상태에서 무엇이 적절한 대응인지 모르는 채 그러한 행동을 취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때문에 거실에서 사산 후 몇 시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비닐봉투에 담은 시신을 휴지통 안에 둔 것을 가지고 ‘사체유기죄’에 해당한다고 판단하는 것은 매우 부당합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는 여성의 노동권 및 재생산권을 박탈할 뿐 아니라 ‘재생산 정의’(Reproductive Justice, 개인의 출산 선택을 넘어서, 누가 어떻게 아이를 낳고/낳지 않을지, 어떤 환경에서 양육할 수 있는지에 대한 권리와 조건이 공정하게 보장되는가를 묻는 개념)에도 반하는 판결입니다. 또한 임신과 출산의 책임을 여성 한 사람에게 떠맡기는 일본 사회의 젠더 불평등을 표출한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응우엣 씨는 이 고등법원 판결에 불복해 2025년 11월 6일에 대법원에 상고, 2026년 1월 13일에 상고 이유서를 제출했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상고심부터는 규슈의 변호사 3인, 도쿄에서 활동하는 하야시 요코 변호사(전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 위원장)가 새롭게 합류, 변호인단을 강화했습니다. 상고 이유서에서는 지금까지의 주장에 더해, 여성차별의 관점에서 이 사건을 다시 해석하고 재생산 권리 및 재생산 정의에 근거하여 무죄를 주장했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또한, 재판부에 세이난가쿠인대학 후쿠나가 슌스케 교수, 쇼치대학 다나카 마사코 교수, 지케이병원 하스다 다케시 원장 등 전문가의 의견서와, 출산경험자와 의료종사자 등 47인의 일반의견서를 제출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날, 대법원의 무죄 판결을 요구하는 1,762명의 추가 서명(현재는 약 2만명 가량)을 제출했습니다. ‘쿠무스타카’는 서명운동과 재판지원금 모금, 무죄 촉구 집회와 토론회 등을 이어가며, 응우엣 씨의 용기 있는 상고가 미래의 여성들의 더 나은 삶으로 이어지도록 시민들에게 힘을 보태 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응우엣 씨의 호소(발췌): “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주십시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1월 13일, 상고 이유서 제출을 앞두고 가진 기자회견에서 응우엣 씨가 온라인으로 참석하여 대법원 상고 이유를 직접 전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1111497462.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26년 1월 13일, 대법원에 상고 이유서를 제출하는 날 사법기자클럽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응우옌 티 응우엣 씨는 온라인으로 참여하여 직접 상고 이유를 밝혔다. (페민 제공)</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아이를 출산한 후, 몸은 보랏빛에 숨을 쉬지 않는 아이를 보고 저는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너무도 무섭고 혼란스러웠고, 몸은 지쳐 있었습니다. 눈앞에 휴지통이 있어 거기에 아이를 두고, 흰색 케이크 상자로 아이의 몸을 덮었습니다. 숨 쉬지 않는 아이를 보니 너무나 가슴이 아팠지만, 의지할 사람도 없었습니다. 대량출혈로 저 역시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누군가가 (아이를) 발견해주리라 생각해 휴지통 뚜껑을 덮지 않았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지인이 저를 병원에 데리고 갔는데, 그 후 경찰에 잡혀 아이와 만날 수도, 묻어줄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저는 계속 무죄를 주장해 왔습니다. 사건 심리 중에 미처 충분히 생각하지 못했던 점이 있다는 사실, 제가 놓여 있는 처지와 저의 진짜 의도 역시 잘 전달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상고를 한 것은 책임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서가 아니라 진실을 분명하게 밝혀 공정한 판단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대법원이 증거와 사실에 근거하여 판단해주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부디 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주십시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다나카 마사코 교수 기고: ‘재생산 정의 재판’으로 다시 질문하기</span></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임신·출산을 둘러싼 최소한의 접근권과 안전망을 국가가 보장했는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재생산 정의’(Reproductive Justice)는 재생산 권리(Reproductive Rights, 생식의 자기결정권)를 누구나 누릴 수 있도록 사회적 정의(Social Justice)의 관점에서 질문을 던지는 이론적 틀입니다. 여기에 인종, 국적, 민족, 성별, 성적 지향, 장애 유무 등 복수의 속성이 겹쳐져 발생하는 문제를 분석하는 교차성(Intersectionality) 관점을 더함으로써 차별과 불평등을 가시화할 수 있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재생산 정의는 ①아이를 갖지 않을 권리 ②아이를 가질 권리 ③안전하고 건강한 환경에서 아이를 키울 권리가 실질적으로 보장되어 있는가 라는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집니다. 국가는 이 정의를 보장하기 위해 개인에게 부당하게 개입하지 않는 ‘소극적 의무’와, 당사자가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적극적 의무’를 갖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가령 출입국관리청 등이 임신을 이유로 불리한 취급을 해서는 안 된다며 법령 준수를 반복적으로 외치고 있지만, 이는 ‘소극적 의무’를 이행하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적극적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는 정보의 다언어 제공과 상담창구 설치, 보건의료기관에서의 대응, 임신에 의한 휴학과 휴직 등을 포함한 출입국관리법 제도 설계 자체를 재고해야 합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 사건을 ‘재생산 정의 재판’으로 규정하는 것은, 그 배경에 있는 사회적 제도적 조건 -임신·출산을 둘러싼 최소한의 접근권과 안전망을 국가가 보장했는가-에 대해 다시 물을 뿐 아니라, 장애를 가진 여성 등 재생산 권리를 침해당해온 여성들과 연대하기 위해서도 유효합니다. [번역: 고주영]</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일다〉와 제휴 관계인 일본의 페미니즘 언론 〈페민〉(women’s democratic journal) 기사를 번역, 편집한 내용입니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5-11 11:07:00</pubDate>
	   <section>sc4</section>
	   <section_k><![CDATA[국경너머]]></section_k>
	   <section2><![CDATA[아시아]]></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나카시마 신이치로, 다나카 마사코)]]></author>
	   <category><![CDATA[아시아]]></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5/202605111429832.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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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좋은 어른이 있었다’ 아이들에게 이렇게 기억되고 싶죠]]></title>
       <link>http://www.ildaro.com/10451</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마늘(가명)은 부산 출신의 30대 초반 트랜스여성으로 현재 학원 강사로 일하고 있다. 중학생들을 대상으로 수업을 하는 마늘은 ‘아이들’ 이야기할 때 “너무 귀엽다”는 말을 반복하며 웃었다. 지금 이렇게 교육계에 있지만, 여기까지의 과정은 바로 올 수 있는 직선의 길이 아니었다. 또 앞으로는 어떤 일을 하게 될지 정확하지 않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럼에도 마늘은 ‘어쩌라고?’의 마인드로 삶을 살아갈 거라 했다. 인터뷰를 통해 만난 마늘은 당당하고 경쾌하며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또한 꿈이 있는 노동자이기도 하다. 지금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언젠가 돌아봤을 때 나한테도 좋은 어른이 있었다’라고 생각되고 싶다는 마늘과의 즐거웠던 수다를 전한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093852370.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마늘(가명)은 30대 초반 트랜스젠더 여성으로 현재 학원 강사로 일하고 있다. 교재를 들고 칠판 앞에서 찍은 마늘의 모습. (출처: 마늘)</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span><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부산에서 살다가 서울로 언제 올라오게 된 거에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여러 이유가 있는데요. 일단 사범대를 졸업했는데, 교육과 관련된 일을 하기 어렵다고 생각했어요. 대학 다니면서 커밍아웃하고 성별 정정도 했는데 학내 분위기가 좀 보수적이었거든요. 임용고시를 조금 준비하다 서울로 올라오게 됐죠. 굉장히 친한 친구가 수도권에서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도 이유였고, 당시 만나던 사람이 수도권에 있기도 했고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대학을 다니면서 커밍아웃을 했다니,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대단해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중·고등학교 다닐 때 ‘여성스럽다’는 이유로 따돌림이나 놀림도 당했고 괴롭힘도 많이 겪었어요. 그렇게 지내다가 어느 날 ‘난 사실 명랑한 사람인데, 이렇게 쳐져서 지내고 싶지 않아.’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대학은 중·고등학교와 다르게 좀 더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니까, ‘나도 좀 다르게 살아보자’ 싶었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마침 대학 내에 성소수자 동아리가 있었거든요. 그 때만 해도 나를 게이로 정체화하던 때였어요. 근데 동아리 활동하다 보니 다른 게이 친구들이랑 난 다르더라고요. 뭔가 결이 다르달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면서 ‘나다운 게 뭘까, 내가 무엇일까’ 고민하는 시간을 깊게 가지게 됐어요. 그러면서 ‘난 내가 남자인 게 싫은 거구나’를 깨달았죠.</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사실 날 바로 여성으로 정체화했다기 보다 ‘여자로 살라고 하면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정도의 느낌이긴 했어요. ‘나를 여성으로 정체화하는 게 맞나? 이게 완벽하게 나한테 맞는 걸까?’ 계속 생각하긴 했는데 이젠 익숙해진 것 같아요. 페미니즘을 만나면서 ‘여자가 꼭 어떠해야 한다’는 틀이 깨지기도 했고요. 그러면서 내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스스로도 불편하지 않게 돼서 이렇게 살 수 있는 것 같아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사범대를 갔다고 하셨는데, 원래 꿈이 교사였어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초등학교 4학년 때인가 화장실에 갔다가 수업에 조금 늦은 적이 있어요. 그때 선생님이 엄청 뭐라고 하고 막 때렸거든요. 그게 너무 충격이어서 엄마한테 얘기하고 전학을 갔어요. 전학 가면서 그 선생님한테 메일로 “그렇게 하면 안된다, 그건 좋은 어른이 아니다” 이런 글을 써서 보냈던 기억이 있어요.(웃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엄청난데요?!(웃음)</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어렸을 때부터 ‘내가 남들과 좀 다르다’는 걸 빨리 눈치챘던 것 같아요. 그런 것 때문에 내가 공격 받을 때, 날 어떻게 지켜야할지 모르겠는데 도와줄 어른이 없었어요. 가족은 또 오히려 어렵고, 선생님이 날 도와줬음 좋겠다 생각했죠. 학창 시절에 따돌림을 많이 당했다고 했잖아요. 그 때 선생님은 알 거라 생각했어요. 알고 있지만 바쁘고 번거롭고 귀찮으니까 나를 모르는 체한다고 생각했죠. 그런 기억이 있어서 ‘나는 좋은 선생님,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사범대에 들어간 거죠.</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0934572278.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마늘의 일터인 학원, 칠판에 쓰인 수업의 흔적들 (출처: 마늘)</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span><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꿈이 있었는데, 임용고시는 왜 포기한 건가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처음 학교 들어갈 때만 해도 ‘예비 교사가 모이는 공간’에 대한 환상이 있었어요. 그래도 다른 집단에 비해서 인권감수성이라던가 사회에서 말하는 도덕과 윤리랄까, 사회적 교양이 좀 있을 거라고요. 아니 적어도 겉으로 체면치레는 할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더라고요. 지금은 아닐 거라 생각하는데, 제가 대학 들어갔을 때만 해도 여전히 과격한 대학 문화가 있었어요. 신발에다 술 타서 마시라고 주고, 머리 박게 하고 그런 것들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거기다 교내에서 아웃팅 사건도 일어났고, 날 은근히 무시하거나 소외시키려는 분위기도 있었고요. ‘이런 사람들이 예비 교사라니, 내가 이런 사람들이랑 같은 공간에서 일해야 한다니. 그건 못하겠다’ 싶더라고요. 그리고 사실 생각보다 공부가 나랑 맞지 않더라고요.(웃음) 그것보다 활동이 더 재미있었어요. 집회 나가고 투쟁하는 일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그렇게 교사의 꿈을 접고, ‘플랜B’로 생각한 게 있었나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교사 못하겠다 싶으니까 학교 졸업하는 것도 의미 없겠다 싶었어요. 당시 가족이랑 사이가 안 좋기도 해서 휴학하고 일을 구했는데, 그게 콜센터에서 일하는 거였어요. 생각보다 그 일이 잘 맞더라고요. 일도 잘 했고, 눈치도 빨랐고요. 소위 ‘진상’ 처리도 잘 했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콜센터 일이 어렵다고 들었는데…</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성소수자로 살다 보니) 어떤 가면을 썼다 벗었다 하는 익숙하니까요.(웃음) 콜센터에 일하면서 필요한 가면을 하나 더 만들기만 하면 됐어요. 나한텐 그 일이 어렵지 않아서 재미있었고, 그냥 이런 일을 쭉 해도 되지 않을까 싶었어요. 인생에 큰 목표는 없었거든요. 늘 괴롭힘을 당했고,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 수 없는 거면 30살까지만 버텨보다가 죽어야겠다 생각했으니까요. 그래서 큰 계획없이 일단 한달 벌어먹고 살자 정도로 했어요. 그러다 보니 대학 졸업도 굉장히 늦게 했고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지금은 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계신다고 했는데, 이 일은 어떻게 시작한 건가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제 인생의 큰 변화와 굴곡엔 항상 사랑/연애가 껴 있어요.(웃음) 콜센터 일을 계속 하고 있었는데 당시 만나던 사람과 동거 아닌 동거 중이라 지출이 점점 커지게 됐어요. 연애를 계속 하려면 돈이 좀 더 필요하겠더라고요.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에 운 좋게도 교육 관련 회사에서 제안이 왔어요. 거기서 신규 강사를 많이 모집하고 있었는데, 내가 가진 자격증이 조건에 맞았던 거죠. 그렇게 교육 일을 하게 됐는데, 생각보다 제가 아이들을 여전히 너무 좋아하고 있더라고요. 중학생들이었는데, 그냥 너무 예쁘고 귀엽고 그랬어요. 그러다가 그 회사에서 같이 일하던 분이 학원을 차리게 되었고 거기서 같이 일하게 됐어요. 이제 만 2년 정도 됐네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학원 일은 잘 맞아요? 가르치는 것 말고 학부모들과의 트러블 이런 문제도 있는 것 같던데 말이죠.</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쵸. 근데 콜센터에서도 일하고 상담 관련된 일도 하고 그래서 좀 단련이 되어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전 솔직히 말하는 편이에요. ‘우리가 마음에 안 들고 불편하면 다른 학원 가셔도 된다. 그치만 아이의 문제는 다른 학원에 가도 변하지 않을 거’라고요.</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0935307281.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가르치는 학생에게 받은 크리스마스 카드 (출처: 마늘)</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span><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학생들과의 관계는 어때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지금 시험 기간이거든요. 어제도 밤늦게까지 아이들 공부하는 거 봐줬어요. 나 늦게까지 안 자고 있을 테니까 혹시 문제 풀다가 질문 생기면 문자 보내라고 했고요. 지금 담당하는 학생들은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보고 있으니까, 서로 신뢰가 있는 편이죠. 아이들 보면 신기해요. 아무것도 몰랐었는데 이제 나한테 배워서 새로운 문제를 푼다는 게요. 마치 걸음마 못했던 아이가 걷는 걸 보는 것처럼요. 그래서 아이들 보고 있음 기분이 너무 좋고, 입에 뭐 하나라도 더 넣어주고 싶고 그래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아이들이 슬슬 사춘기도 오고 하는데, 또 조금 예의없이 군다거나 그럴 땐 따로 불러서 ‘그런 예의 없는 행동이고, 그런 건 어른한테 하는 거 아니다. 어른이 아니더라도 타인에게 그렇게 행동하는 건 무례하다’고 알려줘요. 그럼 또 ‘죄송합니다’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예쁘게 보이죠.</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본인만의 교육 철학 같은 게 있다면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난 그냥 학원 강사이고 여긴 학원이긴 하지만, 아이들한테는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공간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무언가를 위해 노력하는 것, 실패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고 봐요. 사실 제가 그걸 못 배웠거든요. 임용고시도 무서워서 도망갔잖아요. 실제로 해 봤으면 어땠을지 모르는 일이니까요. 그래서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은 안 그랬음 좋겠어요. 시험을 잘 치든 못 치든 최선을 다해서 공부해 본 경험은 자신들의 삶에서 유용할 거라 생각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멋진 선생님이네요. 나도 마늘님 같은 선생님을 만났음 좋았을 것 같아요. 지금의 내 모습도 되돌아 보게 되네요. 요즘 청소년들과 말이 통할까 싶거든요.(웃음)</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저도 말이 잘 통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에게 고압적이지 않은 게 중요한 거 같아요. 그리고 그들 또한 재미있는 걸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면 돼요. 전 학원 수업할 때 ‘스탠딩 코미디’ 공연한다 생각해요.(웃음) 아이들한테 조잘조잘 여러 이야기를 하죠. 그럼 ‘선생님 이상해요~~’ 이러거든요. 그럴 때 ‘이상한 게 뭐 어때~ 선생님은 열려 있어.’ 이런 말도 하죠. 언제든 궁금한 게 있음 물어보라고 하고. 연애 상담도 해줘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근데 누가 나한테 ‘좋은 선생님이냐’ 물어보면 그건 잘 모르겠어요. 엄청 뛰어난 선생님도 아니고요. 다만 최소한 노력은 하는 사람인 거 같아요. 그리고 아이들을 고립시키지 않는 방법을 생각하는 사람이고요. 학원에서 개별 상담을 길게 하진 않지만, 학생들 보다 보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한 순간이 있거든요. ‘부모님한테 하기 어려운 얘기 있음 나한테 와서 말해.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거면 도와줄게.’라고 하죠.</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자신들의 고민이나 어려움을 다 얘기하진 않을 수 있지만, ‘살면서 좋은 어른 한 명쯤은 있었다’는 게 언젠가 생각나면 좋을 것 같아요. 그게 위안이 될 수 있잖아요. 저도 그랬거든요. 성폭력상담소에서 일하다가 어느 학교에 성교육을 갔었는데, 거기서 중학교 때 담임 선생님을 만난 적이 있어요. 선생님은 물론 날 못 알아봤죠. 거긴 남자중학교였거든요. 그래서 설명을 하고, 사실 그 때 괴롭힘 당해서 힘들었다고 얘길 했어요. 그랬더니 그 선생님이 솔직하게 ‘당시에 초임이었고, 정말 몰랐다. 뒤늦게나마 몰랐던 거에 미안하다, 사과한다’고 하더라고요. 시간이 많이 지난 일이지만 그 말을 들으니,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이 아니었구나 알게 돼서 좋았어요. 그 때 당시에 나한테도 좋은 어른이 있다는 걸 알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고요. 그래서 나는 아이들한테 ‘좋은 어른이 있었다’고 기억되고 싶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앞으로 또 어떤 일을 하고 싶다는 계획이 있나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려고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어요. 학원을 그만두게 되면 사회복지 쪽에서 일하면서 상담을 하고 싶거든요. 부산에 있을 때 성폭력상담소에서 잠깐 일했는데, 사실 일은 엄청 빡세긴 했어요. 그렇지만 보람이 있었거든요. 상담으로 찾아온 피해생존자에게 난 별로 한 일이 없는 것 같은데, 그들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보거나 덕분에 도움이 됐다는 말을 들었을 때, ‘별거 아닌 일이 도움이 되는 세상이구나’ 싶더라고요. 그래서 그런 일을 조금 더 전문적으로 해 보고 싶어요. 더구나 그 일이 제 사주랑 잘 맞대요.(웃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가족들에게 커밍아웃하고 나서 아버지가 ‘사회에 이바지되는 인간이 돼라’는 얘길 하셨어요. 본인이 그런 걸 좀 하고 싶었는데 못한 거에 대한 마음이 좀 있는 것 같고요. 그래서인지 ‘네가 이왕 (성별 정정도) 결정하고 네 삶을 개척했으니, 사회에 헌신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또 대학 때 운동하면서 ‘넌 난년이다’라는 말을 많이 들었거든요.(웃음) 사회운동이나 활동 같은 게 잘 맞는 게 같아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지금은 가르치는 아이들 보는 게 너무 재미있기도 하고, 얘네 고등학교는 보내야지 싶어서 일단 올해까진 이 일을 하지 않을까 싶어요.</span></p>]]></description>
       <pubDate>2026-05-09 15:32:00</pubDate>
	   <section>sc5</section>
	   <section_k><![CDATA[소수자 시선]]></section_k>
	   <section2><![CDATA[퀴어]]></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박주연)]]></author>
	   <category><![CDATA[퀴어]]></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5/2026050937488519.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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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Uncomfortable, But Must Be Confronted]]></title>
       <link>http://www.ildaro.com/10450</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n the history of contemporary Korean art, very few exhibits by Korean feminist artists have been shown since the 2000 exhibit A-bang-gung: Jongmyo Occupation Project by the feminist artist group Ipgim. It is difficult for artists to continue to produce their works in Korea, if they are not already famous, or if they do not have support from Arts Council Korea, a regional government, or a private foundation. In this sense, it is reasonable to say that producing artwork is truly a matter of survival for artists pursuing activist art that encompasses social commentary; feminist art is no exceptio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n the early 2000’s, feminist artists were not very visible in the realm of Korean fine art due to the depressed atmosphere of the feminist movement. However —fortunately or unfortunately —due to a chain of events in 2015 such as a young Korean man with the surname Kim joining ISIS because he hated feminism and the appearance of the feminist online community ‘Megalia,’ hate crimes and hate speech against women became a hot issue and conditions began to change gradually. Feminist groups started to form in art schools, and news of feminist artists’ activity began to be heard every now and again. It was in this state of affairs that I visited an exhibition by the feminist visual art community Sisterhat.</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0842076920.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Set of 6 Pussy Postcards by Sisterhat (Source: Sisterhat Twitter/X <a href="https://x.com/sisterhat" target="_blank">@sisterhat</a>)</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 font-weight: bold;"><br />Feminist Art as Activism</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Van Gogh’s Starry Night, Monet’s Water Lillies—that is what the general public, who did not major in art, thinks of when someone mentions “fine art”: a masterpiece hung on the wall of a museum or, at least, a completed expression of an artistic intention rendered in a specific medium, something to please the viewer’s visual and aesthetic sensibilities. However, contemporary art no longer aims to achieve these imperatives; no longer is the goal a masterpiece hung on the wall.</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Many contemporary fine artists seek to actively engage with society by exposing social problems and making them into an issue. For them, art is not only an end, but also a means—a tool—for activism. The works produced with this intention or through it do not stimulate people’s sensibility by so-called aesthetic beauty; rather, they create a discomfort which is not easy to face. Feminist art is—without a doubt—at the forefront of contemporary art’s effort to make us uncomfortable rather than aesthetically pleased.</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is aspect can be found in the works of Sisterhat, who started their work identifying themselves as a feminist visual art community. Sisterhat’s activism reflects women’s issues, such as inequality, and draws attention to them–thus increasing public awareness and urging action to remedy injustice. To start a discussion on the human rights of sex workers in Miari [a red-light district in Seoul] in 2015, Sisterhat chose ‘sexual violence’ as the theme for their exhibition Ordinary Violence which opened at the Seongbuk Seoul Art Space on April 14, 2016.</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Hello, Sisterha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 most direct and violent damage which men can inflict upon women is sexual violence. Sexual violence not only leaves physical damage but also deep psychological scars on the victim;  moreover, it stigmatizes the victims in a social atmosphere in which women’s virginity is considered to be of the utmost importance, thus inflicting irreparable psychological pain and leading them to hide or minimize the fact of the damage. Further harm is also found within laws and policies in which the victims need to prove sexual violence, even as the investigators are ignorant that this causes second and third-hand sexual violence—a tendency that has constantly been criticized as a serious problem.</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n this exhibition, Sisterhat tried to change “the direction of the existing discourse on sexual violence” by projecting the image of a predator, not the victim. Along with this image was the idea to represent the fact that most cases of sexual violence occur between acquaintances (seventy to eighty percent of all sexual crimes are committed by an acquaintance) and that we are never sure if sexually violent predators exist near us; it even suggests the possibility that potential predators are among the people we know well.</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Sisterhat stated that they created their works by directly communicating with survivors of sexual violence and engaging in discussions with a counseling center for sexual violence. The exhibition space is filled with reconstructed images of predators based on sexual violence survivors’ documentation which, by itself, occupies one entire wall in the exhibition space.</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0843013259.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Yim Ee-hye's Untitled. Pen on paper, 14.85×10.5 cm, 2016 ©Sisterhat’s exhibition Ordinary Violence</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r />There are works by five artists. Im Ee-hye’s Untitled series is  unforgettable. It shows undistinguishable shapes resembling a human face, a human figure, or parts of a human body, intermingled and fragmented. Black marks are roughly speckled about, creating the feeling of instability filled with terrible and painful memories of horror, attempting but unable to forget as the dark spots erupt. Lee Jeong-eun’s Untitled series suggests the many stories of a crime scene and victim, of gazes following and torturing the victim, and of social stigma; they do not let the spectator contemplate the work with a light hear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Sexual violence by acquaintances occurs because of the gender hierarchy that exists in the victim’s relationship with the perpetrator. In general, men hold the power in this hierarchical relationship, not women. There are many cases of sexual violence generated in this kind of relationship being hidden for long periods of time. The perpetrators control the victims’ psyche by providing reasons like the importance of the relationship, or instilling the fear of society’s views should the relationship be disclosed, thus leading the forced or voluntary concealment of the sexual violenc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n Juna Lee’s work there is a parasitic plant, which embodies the figure of a perpetrator, encroaching on its victim’s mind, thus controlling the relationship and the situation. The work by Kwon Soon-young visualizes the violence that may be hidden within. Using the metaphor of a tentacled beast, representing a perpetrator who commits violence at the very moment that a victim is defenseless, Maekjoo’s work reveals the vulnerability of women exposed to unfathomable terrors and the accompanying sense of dread.</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 indefinite terror which the artists express through a victim’s memory is an emotion that most women must have felt. We are familiar with this ill-defined sense of dread; on the other hand, this emotion is not familiar to men. Their discomfort arises out of the fact that “men” are defined as the category of perpetrator. Even though sexual violence is basically considered not as an individual’s issue, but as a society’s systematic problem, couldn’t the structural problem be solved by the transformation of individuals? So, please feel, understand, and sympathize after seeing Sisterhat’s works—even if they make you feel uncomfortable.</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25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0843269030.jpg" alt="" width="725"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The "Ordinary Violence" exhibition poster by Sisterhat, a feminist visual arts collective. April 11-28, 2016. (Seoul Art Space Seongbuk)</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 font-weight: bold;"><br />The Politics of Feminist Art Urge an “Unfamiliar Perspectiv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Feminist art can be uncomfortable to people who live far from feminism, which advocates women’s rights, equality between women and men. Feminist art points out problems in a wide range of areas, from social policies to culture to private everyday life issues, encompassing such concerns as the glass ceiling, invisible entry barriers, public space issues which women confront, the wage gap, one-sidedly distributed domestic work, sexual virginity forced upon women only, standardized criteria for beauty required for women only, and so forth. </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Feminist art is an artistic genre which proposes to the public visual expressions of the problems that women and society’s minorities confront. Feminist art asks for the reformation of legal and social policies that are irrational toward women, criticizes patriarchy and its implicit and inherent masculinity; it also negates the standardized beauty norm, advocates for a “spontaneous” beauty, and proposes an alternative way of caring for one’s appearanc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Feminist art suggests an unfamiliar view to us. Feminist artworks show us something we haven’t felt before, seen before, spoken before, or acted upon before, allowing us to directly feel and experience what we couldn’t before. This is the aesthetics and politics of feminist art. I hope that feminist art, which we haven’t seen much of for a while, will be resurgent in our troubling times of misogyny. So happy to meet you, Sisterhat. <span style="color: #c632cd;">[Translated by Jieun Lee]</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Original article: <a href="http://ildaro.com/7442" target="_blank">http://ildaro.com/7442</a> Published: April. 20, 2016</span></p>]]></description>
       <pubDate>2026-05-08 12:38:00</pubDate>
	   <section>sc100</section>
	   <section_k><![CDATA[English Article]]></section_k>
	   <section2><![CDATA[]]></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Kyoungmi Oh)]]></author>
	   <category><![CDATA[English Article]]></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596'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5/2026050844514346.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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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세계 가톨릭 청년들의 축제에 ‘퀴어’로 함께 할 것이다]]></title>
       <link>http://www.ildaro.com/10449</link>
       <description><![CDATA[<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Love is Not a Sin - 사랑은 죄가 아니야</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072046110.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24년 서울퀴어문화축제에 가서 나누라고 수녀님들이 굳은 살 잡혀가며 만들어 주신 매듭 묵주 팔찌. (크리스 제공 사진)</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내가 연애를 시작했을 때, 나는 그것을 죄라고 여기지 않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나는 천주교 재단 유치원, 초등학교, 고등학교를 다녔다. 그 오랜 시간 동안 누구도 내게 ‘동성애는 죄’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그러한 낙인은 동성애가 에이즈와 결부되고 혐오와 뒤섞인 채, 사회의 공기 속에 이미 스며들어 있었다. 누가 가르쳐준 게 아니라 어느새 알게 됐다. 나의 사랑은 숨겨야 한다는 것을.</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직장을 잃을 수도 있고, 가족에게 알려질 수도 있었다. 두려움이 늘 앞장섰고, 사랑은 그림자처럼 그 뒤를 조용히 밟았다. 하지만 나는 끝내 그 말을 믿지 않았고, 계속 질문했다. ‘나의 사랑이 정말 죄일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1998년, 미국에 갔을 때 처음으로 다른 세계를 봤다. 어학 연수에서 게이 선생님을 알게 됐고, 성 정체성을 숨기지 않는 퀴어 친구들이 자연스럽게 주변에 생겨났다.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퀴어프라이드 퍼레이드를 처음 봤다. 당시 나는 스스로를 동성애자라고 부르지도 않았었다. 어렸을 때부터 동성에게 끌렸지만, 애인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거리에는 행복해 보이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숨지 않고, 당당하게. 그 풍경을 보며 나는 또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이게 죄일까?’</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0721132918.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작년 대구퀴어문화축제 때 단상에 올라 연대 발언을 했다. 보수적인 대구 지역에서 열린 퀴어 행사이고, 나의 어릴 적 기억이 많이 남아있는 곳이라 개인적으로도 의미가 컸다. (크리스 제공 사진)</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미국 유학 시절, 나는 다큐멘터리를 한편 만들었다. 제목은 〈Love is Not a Sin〉(사랑은 죄가 아니야). 카메라를 들고 학교 주변 성당 신부님과 수녀님을 찾아가 물었다. 동성애는 죄입니까? 그분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건 우리가 판단하는 게 아닙니다.” 그 말이 나를 붙잡았다. 만약 그분들이 강하게 “죄”라고 말했다면, 나는 아마 그때 천주교를 떠났을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한국에서는 달랐다. 교회는 동성애를 죄라고 가르친다고 들었다. 사제가 신도들의 죄를 듣고 용서를 선언하는 의식인 고해성사 때 그 말을 직접 들었다는 성소수자 신자들이 있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가 단골로 등장했다. 그 이야기가 실은 환대(사랑)의 부재와 집단적 폭력에 관한 것이라는 성서해석은 가르쳐주지 않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내가 만든 다큐멘터리는 대학에서 작품상을 받았다. 하지만 내게 더 중요한 건, 성직자들의 대답이었다. 그 다큐의 제목이 내 철학이 됐다. 동성애는 죄가 아니다. 동성애자를 차별하는 세상이 우리를 죄인으로 만든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가톨릭은 동성 결혼을 인정하지 않잖아”</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2013년은 내게 이정표와도 같은 해였다. 파트너와의 결혼과 어머니의 간병이 함께 시작된 해였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우리 커플은 캐나다에서 결혼했다. 배우자와 나, 둘 다 대한민국 국적이었다. 한국에서는 불가능한 결혼을 캐나다에서 했다. 주례를 맡아주신 분은 예수회 소속 천주교 사제였다가 동성 파트너와 함께하기 위해 환속한 캐나다 사람이었다. 가톨릭 신자와 비신자 사이의 혼인을 교회가 축복하는 관면혼배 예식과 유사한 형식으로, 그분의 소성당 같은 작은 공간에서 예식을 올렸다. 결혼 반지는 묵주 반지였다. 우리 결혼의 증인은 게이 부부였다. 제도 밖이었지만, 가장 가톨릭적인 방식이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0721373386.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나와 파트너는 캐나다에 가서 결혼했다. 2013년의 일이다. 주례는 예수회 소속 천주교 사제였다가 환속한 캐나다인이었고, 관면혼배와 유사한 형식으로 예식을 올렸다. 우리 결혼의 증인은 게이 부부가 맡았다. (크리스 제공 사진)</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같은 해, 어머니가 서울의 병원에 장기 입원하였을 때 수간호사가 나의 배우자에게 물었다. “며느리시죠?” 남들 눈에도 며느리로 보였다는 건, 설명하지 않아도 알 만큼 우리가 그 자리를 지켰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정작 가족들 앞에서 우리는 그저 유난히 가까운 사이일 뿐이었다. 여동생은 남편과 해외여행을 가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지만, 나는 배우자와 여행을 가면서도 ‘친구’랑 간다고 말해야 했고, 그것만으로도 핀잔을 들었다. 그러다 어느 날, 차 안에서 말이 터져 나왔다. “나도 결혼했어.”</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여동생의 첫마디는 이랬다. “가톨릭은 동성 결혼을 인정하지 않잖아.”</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 순간 나는 결혼한 사람에서, 판정을 기다리는 사람이 됐다. 교리가 사랑보다 먼저였다 — 내 사랑을 가장 가까이서 본 사람에게조차. 동생의 말은 오랜 상처가 됐고, 나는 사랑과 교리 사이의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됐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교회법상 혼인은 남녀의 결합으로 정의되기 때문에, 우리 관계는 처음부터 혼인으로 성립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동성 부부의 삶은 교회에서 중대한 죄를 짓는 것으로 간주될 수도 있어, 미사 중 빵과 포도주를 받는 성체를 모시는 것이 제한되기도 한다. 나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지금도 미사 자리에 앉아 있다. 과거형이 아니다. 거의 매주, 그 자리에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예전엔 성당에 있으면 마음이 편하고 온전히 인정받는 느낌이 들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다른 신자들과 나란히 앉아 있을 때. 우리의 관계를 이 자리에서 드러낼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미국에서 우리가 다니던 성당은 달랐다.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 저녁 미사가 끝나면 본당 사제와 퀴어 신자들, 그 가족들이 함께 모이는 자리가 열렸다. 같은 가톨릭 신앙 안에서, 나의 존재를 숨기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었다. 한국에서는 그런 자리가 없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가톨릭 여성퀴어 단체 알파오메가를 만들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나는 한국에서 가톨릭 여성퀴어 단체 ‘알파오메가’를 만들어 20년 넘게 이끌어오고 있다. 성소수자를 지지하는 신부님들과 수녀님들이 우리만의 미사를 열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별도의 공간에서, 별도의 시간에 가능한 일이다. 동네 성당에서 다른 신자들과 함께 앉아 우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은 여전히 어렵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교리 시간에, 본당 청년 활동에서 동성애 혐오 발언을 듣고 상처받은 친구들이 알파오메가로 온다. 그나마 이 자리에서 위안을 얻는다고 말한다. 그 말이 고맙고, 무겁다. 이런 자리가 필요하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동네 성당에서 혼자 고립되어 상처받고 있는지를 말해주니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미사 중에 가끔 생각한다. 하느님은 우리를 어떻게 바라보실까. 죄인으로? 아니면 그냥, 당신이 창조한 존재 그 자체로?</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0722066212.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한국 천주교 여성 성소수자 공동체 ‘알파오메가’ 피켓을 들고 작년 대구퀴어문화축제 퍼레이드에 참여했다. (크리스 제공 사진)</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오랫동안 마음에 걸리는 생각이 있다. 우리 부부 중 한 명이 먼저 떠날 것이다. 언젠가는. 그때 성당에서 장례 미사를 치를 수 있을까. 남겨진 사람이 배우자로 인정받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앉아야 한다면 얼마나 서러울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어릴 때부터 당연하게 생각해왔다. 내가 죽으면 성당에서 나를 기릴 것이라고. 그 상상이 위안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묻는다. 내 배우자가, 내 친구들이 내 장례를 준비하면서 마주쳐야 할 어려움이 있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는 일이, 제도와 싸우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되는데.</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우리는 존재하지만, 제도 안에서 우리는 온전히 존재하지 못한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2027년 서울에서 열리는 세계청년대회를 준비하며</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2023년 12월, 교황이 승인한 신앙교리부 선언문 ‘간청하는 믿음’(Fiducia Supplicans)은 동성 커플을 혼인으로 인정하지는 않지만, 비전례적 상황에서 개별적으로 축복을 줄 수 있다고 했다. 성 프란치스코 축일 무렵 반려동물 축복식이 열리는 본당에서도, 동성 커플에게 허락된 것은 미사 밖에서, 개별적으로, 조용히. 조건이 많다. 존재에 조건이 붙는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2024년, 우리 부부는 한국에서 사제에게 커플 축복 기도를 받았다. 언론에는 축복해 주신 신부님의 이름과 소속 수도회가 실렸다. 신부님의 동의와 앨라이(지지자) 단체 운영위원들과의 합의하에 결정한 일이었다. 배우자의 친구가 그 기사를 보고 수도회에 후원을 시작했다. 보수 신자들의 항의 전화가 빗발쳤다는 걸, 수도회 사무실을 통해 전해 들었다. 같은 기사를 보고, 누군가는 후원을 시작하고 누군가는 후원을 끊겠다고 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0722297979.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Jesus Loves Every Identity.” 가톨릭 여성퀴어 알파오메가, 가톨릭퀴어예술회, 가톨릭퀴어연구회가 함께 만든 ‘가톨릭 퀴어 연합’의 부스. (크리스 제공 사진)</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한국 가톨릭 내에서 이렇게 한 걸음 내딛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믿었던 앨라이가 “주교님들이 지켜보고 있으니, 지금은 납작 엎드려 있어야 한다.”며 내게 침묵을 요구했다. 퀴어문화축제에서 사제에게 축복을 청하는 동성 커플은 이기적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자신은 연대자라고 말하면서, 당사자가 목소리를 내는 것은 막는 것. 당사자가 아닌 사람이 당사자의 자리를 대신하고, 당사자는 뒤로 물러나게 하는 구조. 이와 같은 일들을 나는 2022년에도, 2025년에도 겪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내가 잘못된 존재인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일들을 겪으며, 한동안 죄인이 된 기분으로 폐인처럼 지낸 적도 있다. 그러나 침묵하라는 말에 눌려 진짜 숨 죽이고 있으면, 교회와 성소수자 사이의 다리가 양방향으로 이어지기는 더욱 더 어렵다. 다행히 나를 믿어주는 배우자, 신부님들과 수녀님들, 성소수자 신자들 덕분에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더 힘차게 목소리를 내기 위해, 종교를 넘어서는 퀴어 중심의 연대의 장으로 다시 나가려 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우리는 더 이상 흩어진 점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가톨릭 여성퀴어 알파오메가, 가톨릭퀴어예술회, 가톨릭퀴어연구회가 함께 만든 ‘가톨릭 퀴어 연합’이 그 자리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올해 퀴어문화축제에, 그리고 2027년 서울에서 열리는 지구촌 가톨릭 청년들의 대축제 ‘세계청년대회’에도 우리는 거기 있을 것이다. 전 세계 가톨릭 성소수자 네트워크 GNRC(Global Network of Rainbow Catholics)와 함께.</span></p>]]></description>
       <pubDate>2026-05-07 10:19:00</pubDate>
	   <section>sc5</section>
	   <section_k><![CDATA[소수자 시선]]></section_k>
	   <section2><![CDATA[퀴어]]></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크리스)]]></author>
	   <category><![CDATA[퀴어]]></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5/2026050724139983.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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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더 많은 지역의 하늘에 무지개가 뜰 수 있도록]]></title>
       <link>http://www.ildaro.com/10448</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color: #355cc9; font-family: 바탕;">[연구 소개] 논문 「<a href="https://skhu.dcollection.net/srch/srchDetail/200000965299" target="_blank"><span style="color: #355cc9;">춘천퀴어문화축제를 통해 본 새로운 지역 연대의 가능성</span></a>」은 최정희가 지난 5년간 강원도 춘천에서 퀴어문화축제를 직접 일궈나간 경험을 바탕으로 쓰여졌다. 함께 축제를 만들어 온 열 명의 동료들을 만나, 춘천에서 어떻게 퀴어문화축제가 열리고 지속될 수 있었는지 그리고 축제가 지역의 사회운동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본다. 꼭 대도시가 아니어도 자신이 사는 동네에서 퀴어문화축제가 열리기를 바라는 전국 방방곡곡의 퀴어와 엘라이들에게 이 논문이 전해지길 바라며, 저자 인터뷰를 진행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0634116519.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24년 10월 19일, 춘천 낙원문화공원에서 열린 제4회 춘천퀴어문화축제 ‘소양강 퀴어’ 행사 중에서 무지개예수단 축복식. (사진-춘천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span><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춘천퀴어문화축제는 강원도에서는 첫 시도이고 또 인구 30만명 미만 지역에서 진행된 몇 안 되는 퀴어문화축제로도 의미가 깊지요. 자기 소개를 부탁드립니다</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지난 5년간 춘천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으로 활동했고요. 올해도 축제 당일 스탭으로 함께합니다. 현재 녹색당 전국당 사무처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지난 해 6월까지는 지역 단체의 상근자로 일하면서 대학원생으로 논문을 준비하다보니 정말 바빴어요. 그래서 먼저 제안을 드렸습니다. 가을에 하는 우리 지역의 다른 축제와 겹치지 않는 여름, 그리고 제가 논문을 본격적으로 쓰기 전인 8월에 축제를 하면 좋겠다고요. 감사하게도 그렇게 결정이 되었는데요. 소도시이다보니 가능했던 꼼수이기도 합니다. 하하.”</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논문에서 ‘인구가 적은 소도시에서의 성소수자들은 아웃팅(outing)의 위협에 놓이면서 사회적 교류와 소속감을 획득할 커뮤니티를 탐색 및 구성의 곤란을 겪는다.’라는 대목이 떠오르는데요. 함께 축제를 만들어온 동료가 십여 명으로 적은 수이지만, 그래서 상황에 유연할 수 있고 또 끈끈하게 뭉칠 수 있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춘천퀴어문화축제는 성소수자도 춘천의 시민이며 당당한 한 인격체로서 가시화되는 의미를 갖는 동시에, 지역에서 ‘나로 있는 순간’ 그 자체를 수용 받는 경험을 할 수 있는 시공간이에요. 논문 인터뷰에 참여한 분들이 해준 얘기가 있는데요. 축제를 하고 있는 그 바로 지척에서 혐오 세력들이 와서 훼방을 놓고 있는데, 거기에 자기가 반주하는 교회에서 만났던 사람이 있었다는 거에요. 잘 보인다는 것은 이런 거죠. 대도시처럼 익명성에 묻힐 수 없어요. 그래서 역설적으로 내가 사는 곳을 안전하게 만들어야 해요. 내가 살던 곳에서 인정받기 위해서요.</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0628197893.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춘천퀴어문화축제에서 사회를 보는 최정희(활동명 ‘토끼’) 씨의 모습. (사진-춘천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처음에 ‘춘천에서도 퀴어문화축제를 하자’고 모인 사람이 딱 4명이에요. 사람이 모이면 일은 진행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하고자 하는 사람들끼리 연결되는 게 굉장히 중요한 것 같아요. 다른 지역의 경우, 조직이 중심이 되고 거기에 뜻이 맞는 사람들이 결합이 된 경우가 많은데, 춘천은 개인들이 모여서 춘천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를 꾸렸어요. 거기에 ‘소양강퀴어 연대회의’라는 명칭으로 지역사회의 진보정당과 시민사회단체가 힘을 보태는 방식이었습니다. 시작은 4명이었지만 지금은 벌써 6년 차가 되어 조직위가 12명인데요. 모두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시작했어요. 단체나 조직의 대표가 아닌, 지역의 학생들과 청년들이 ‘춘천에서 뭔가를 하자’는 마음으로 뭉친 거죠.”</span></p><p> </p><p><span style="color: #0000ff; font-family: 돋움;">〈지역에서 새로운 의제를 기존의 운동 관계망에 제안할 때는 누가 제안하는 것인가가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제안자가 지역 운동에 꾸준히 연대하면서 적극적으로 활동을 한 사람일 때 의제 수용이 잘 된다는 의미이다. 작은 도시의 운동은 대체로 새로운 인물과 의제가 유입되기 어려운 경직성을 띠고 있다. 그러므로 어떤 의제를 어떤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해나가려고 하는가가 연대의 중요한 고려점이 된다.〉 -논문 「<a href="https://skhu.dcollection.net/srch/srchDetail/200000965299" target="_blank">춘천퀴어문화축제를 통해 본 새로운 지역 연대의 가능성</a>」(성공회대학교 시민평화대학원 실천여성학전공 석사, 2026) 중</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논문에 소양강퀴어 연대회의가 구성되고 지역사회와 연결되는 과정이 나와 있는데요. 그 과정을 직접 만든 사람으로서 상세한 이야기를 들려주시겠어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서울의 퀴어문화축제에 가면서 ‘인권을 지켜내고 투쟁하는 것이 노래와 춤으로도 가능하구나’라는 것을 깨달았고, 우리 지역에도 이런 멋진 축제가 있으면 좋겠다고 막연히 생각했어요. 그러다 춘천에서도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은 즐겁고 행복하게 자신을 긍정하고 가시화할 수 있는 시간이 정말 필요하다는 절실한 생각으로 이어졌는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지역의 청년들과 퀴어 의제로 함께 활동을 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했지만, 대학생이나 청년들은 졸업과 취업 등으로 삶이 변화하는 시기다 보니 자꾸만 흩어져버렸고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러던 중 한 기자회견에서 만난 다른 정당 활동가에게 저의 생각을 말했더니, 매우 반가워하더라고요. 그렇게 정의당의 활동가 분이 첫 춘천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 4명 중 한 명이 되었구요. 나중에서야 그분이 제주에서 퀴어문화축제를 만든 경험이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렇게 조직위가 구성되고, 지역의 단체들에게 연대 제안을 했는데 흔쾌하게 수락하더라고요.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생각해 보니, 꾸준히 지역에서 활동했던 시간 때문인 것 같아요. 저는 2013년 지역의 여성단체에서 일하면서 녹색당에 가입했어요. 단체 상근자로서도 지역의 다른 시민사회단체들과 협업했고, 또 녹색당의 춘천지역당 대표로 적극 활동을 하다보니 후보로도 뛰게 되면서 지역에 많은 사람들과 연결될 수 있었어요.”</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0628485703.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22년 9월 17일 제2회 춘천퀴어문화축제 ‘소양강 퀴어’ 중 퀴어퍼레이드 모습. (사진-춘천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span><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1회 춘천퀴어문화축제를 추진했을 때가 코로나 대유행의 시기였네요. 진행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아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코로나보다는 ‘뭐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라는 고민이 더 컸어요. 뭐라도 하자고 모였는데 뭐부터 할까 고민인 거죠. 소도시 퀴어문화축제는 대도시의 모델을 따라할 수도 없고, 자원도 부족하잖아요. 코로나는 두 번째 고민이었어요. 거리두기가 시행되면서 시에서 많은 권고가 내려왔어요. 그래서 축제를 한 달 미뤘어요. 퍼레이드만 하는 방식으로 의견이 모아졌고요. 이것도 춘천퀴어문화축제 조직위가 개인들의 연합이다보니, 보다 신속하게 결정하고 판단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대체로 행사의 규모와 역량을 형성하는 것은 재정적 자원이다.’라는 대목은 아주 덤덤하게 쓰여졌지만, 굉장히 많은 고뇌와 감정들이 담겨있는 문장 같아요. 무언가를 시도해본 사람들이라면 공감할 것 같은데요. 재정을 마련하는 과정은 어땠나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고맙게도 비온뒤무지개재단이 든든한 씨앗이 되어주었어요. 그리고 지역의 단체들도 많은 도움을 주었어요. 재정적으로도 연대해 달라고, 전화를 일일이 드리고 찾아뵙고 했습니다. 정해진 방법은 없는 것 같아요. 소도시는 자원이 한정적이라는 아쉬움도 있지만, 동시에 꾸준히 활동하면 눈에 잘 띈다는 엄청난 장점이 있습니다. 노동이면 노동, 환경이면 환경, 성평등이면 성평등. 내가 뜻이 있는 활동을 지역에서 그저 열심히 하면 보일 수밖에 없어요. 그게 지역입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또 작은 축제만의 즐거움이 있어요. 큰 곳에서는 나 하나가 매우 작은 존재지만, 이곳에서는 참여자들이 적극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많아요. 더불어 저희는 현수막에 연도와 회차를 쓰지 않고 재활용합니다. 피켓도 마찬가지고요. 지역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기에 이런 연속성을 지켜갈 수도 있는 것이겠죠.”</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0629198669.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춘천퀴어문화축제 역대 포스터 모음</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span><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지역에서 최근 5년 동안 멈춤 없이 축제를 진행했다는 자부심도 있을 것 같아요. 논문에 소개된 해마다의 슬로건은 성장해나가는 춘천퀴어문화축제의 역사가 그려지는데요. 실천적 경험에서 갖게 된 지식을 나누기 위해 논문을 쓰셨는데, 지금도 전국 각지에서 퀴어문화축제를 만들고 있거나 꿈꾸는 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거시적인 것, 익숙한 것, 정해진 답을 따르는 것을 과감하게 깨보는 것이 퀴어문화축제의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퀴어함’이라는 것이 익숙한 것을 깨고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것이니, 퀴어 의제로는 뭐든 할 수 있다고 저희는 생각했습니다. 축제 부스를 과감하게 없애고 퍼레이드만 하기도 했고요, 장퀴자랑도 했고요, 퀴어운동회도 했고, 퀴어마블게임도 했습니다. 축제를 만들어가려는 분들께 작은 힌트가 되길 바랍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오랫동안 함께 일한 사람들이지만, 연구자로서 동료들을 만난 느낌은 또 다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연구 과정에서 예상과 달랐던 점이나 새롭게 발견한 것이 있다면?</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저는 연구 주제를 정하고 가설을 세우면서 ‘우리가 퀴어문화축제를 5회나 했으니 지역에서 당연히 가시화되었고, 매우 큰 의미를 던졌다’는 자긍심으로 출발했는데요. 실제 인터뷰를 하면서 ‘춘천 시민들이 얼마나 퀴어문화축제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대부분의 연구참여자들이 여전히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더라고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지역사회가 아무리 외면하고 부정해도 우리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리는 활동이 필요한 만큼 춘천퀴어문화축제는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편으로 기존의 운동방식과는 다른 방식의 새로운 시도를 했고, 그 과정을 통해 지역사회에 ‘퀴어프렌들리’라는 새로운 인권의 가치를 던졌다는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싶습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0629463546.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25년 8월 30일 열린 제5회 춘천퀴어문화축제 중에서 드랙퀸 허리케인 김치 공연 모습. (사진-춘천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span><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연구가 끝난 지금, 더 확장하고 싶은 질문이 있나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지금은 정당에서 활동하고 있는데요. ‘정치에서 페미니즘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와 관련하여 그 방향성이 요즘 고민입니다. 정당의 운영에서, 정치의 현실에서 성별 이분법은 견고합니다. 이를테면 비례대표 여성할당제를 논의할 때, 이 제도가 성별 이분법을 강화하기 위한 제도는 아니잖아요. 남성중심적인 정치의 한계를 넘어서야 하는 과제와 더불어 ‘퀴어와 정치가 어떻게 만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돋움;">강원도는 인구감소와 인프라 위축 등으로 지역소멸 위기의 대표적인 지역으로 여겨지는 곳이다. 춘천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와 소양강퀴어 연대회의는 그런 강원/춘천에서 사람과 사람을 잇고, 위축된 지역사회에 새로운 변화의 질문을 던지고 있다. ‘지금 여기서 뭐라도 하자’는 마음으로 차별과 혐오에 저항하며 지역에서부터 연대와 사랑의 다양한 시도를 하는 이들을 응원하고 싶다면 후원계좌가 열려있다. 신한 100-036-349540 (춘천퀴어문화축제조직위원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a446b8;">[필자 소개] 박지하</span>는 석사를 하면 명쾌하고 선명한 정답들을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나름 큰 돈을 써서 대학원 진학했다. 페미니스트들의 둥지 성공회대 실천여성학과에 와서 질문과 갈등, 불편함을 계속해서 옆에 남겨두고 뒤죽박죽 부딪히고 불화하면서도 살피며 살아가는 태도가 여성학을 하는 이유라는 것을 배웠다. 정답을 말하는 사람은 못 되었지만 후회는 없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5-06 10:22:00</pubDate>
	   <section>sc5</section>
	   <section_k><![CDATA[소수자 시선]]></section_k>
	   <section2><![CDATA[퀴어]]></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박지하)]]></author>
	   <category><![CDATA[퀴어]]></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5/2026050632145611.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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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여성긴급전화 상담노동자들이 ‘쉴 권리’를 말하다]]></title>
       <link>http://www.ildaro.com/10447</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여성긴급전화 1366은 가정폭력, 성폭력, 스토킹, 성매매, 교제폭력 등으로 위기에 처한 여성들을 위해 365일 24시간 운영되는 긴급 상담 및 보호 서비스다. 긴급 피난처 제공, 의료 및 법률 연계, 112나 119 연계 등 초기 지원을 한다. 성평등가족부의 안내에 따르면, 1366은 전국 17개 시·도에 설치에 되어 있고, 서울·경기엔 1개소 추가되어 2곳이 운영 중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사실 이런 개괄적인 설명만으로는 부족하다. 1366은 단지 또 하나의 콜센터가 아니라, 1980년대부터 이어져 온 여성운동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가정폭력, 스토킹 등 위기 상황에 처한 여성들이 24시간 전화로 도움 요청할 수 있는, 피해자의 보루이기도 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바로 그 1366의 상담원들이 투쟁을 하고 있다. 온전히 휴식을 취할 수 없는 고강도 노동과 고용 불안 문제를 해소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상담노동자의 노동권과 인권을 보장하는 것이 결국 젠더폭력 피해자를 지원하는 1366 체계를 지켜내는 것이라고 목소리 높이고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지난 4월 22일,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젠더와노동건강권센터의 월례토론회 “상담 노동자 소진을 막기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 여성긴급전화1366서울센터분회의 투쟁”이 온라인 줌으로 열렸다. 이 자리에서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서울지부 여성긴급전화1366 서울센터분회 박은영 분회장과 A사무장이 자신들의 투쟁 이유와 상황을 밝혔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040436137.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살인적인 근무표 개선하라”, “인력공백 문제 해결하라”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서울지부 여성긴급전화1366 서울센터분회의 39차 선전전 모습 (출처: 전국공공운수사회서비스노조)</p></td></tr></tbody></table><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br />여성운동의 결실이자, 젠더폭력에 대한 국가 책무인 1366</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박은영 분회장은 여성긴급전화 1366의 의의와 역사를 설명했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여성운동은 가정폭력과 성폭력 등을 사적인 문제로 치부하던 사회적 인식을 깨고, 이를 국가와 사회가 책임져야 할 명백한 인권침해로 규정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1997년 가정폭력방지법이 제정되었고, 1998년 보건복지부가 전국 16개 광역시·도에 24시간 위기전화 ‘여성1366’을 개통하면서 제도의 닻을 올렸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설립 초기 1366은 예산부족과 낮은 인지도, 자원봉사자에게 의존해야 하는 등 한계가 컸다. 박 분회장은 “여성단체들이 1366이 단순한 상담에 머물지 않고 긴급구호와 의료·법률·보호시설 연계가 가능한 실질적 체계로 작동해야 한다고 끈질기게 요구”했고, 그 결과 “서울센터의 경우 2001년 여성가족부의 지정으로 전담 직원 9명이 배치되며 3교대 근무와 긴급피난처 운영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2014년부터는 대한불교조계종 사회복지재단이 운영을 위탁받아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말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여성운동의 역사가 새겨진 1366은 오늘날 “젠더폭력 대응의 핵심 거점이자 가장 기민한 감지기”이다. 박은영 분회장은 “2024년 기준, 전국 19개 센터의 총 상담 건수는 약 29만 건에 달하며, 그중 1366 서울센터 한 곳이 전체의 10%가 넘는 3만1천여 건을 감당하고 있다.”고 밝혔다. “스토킹, 딥페이크, 디지털 성범죄 등 새로운 형태의 폭력이 발생할 때마다 정부의 정책홍보나 언론기사 하단에는 ‘1366으로 연락하라’는 문구가 들어간다.”는 말도 덧붙였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살인적인 3교대 스케줄로 수면장애 시달리는 상담원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렇게 피해자들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1366이지만, 정작 그 전화를 받는 상담노동자들의 삶은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 여성긴급전화1366 서울센터분회 A사무장은 “핵심적인 문제는 ‘주간-오후-야간-휴무(오프)’로 이어지는 살인적인 3교대 스케줄”이라 짚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사무장의 설명에 따르면 “노동자들은 한 달에 무려 7~8번의 야간 근무(밤샘 근무)를 소화해야 한다. 명목상 ‘오프(휴무)’라고 불리는 날조차 사실 온전한 휴일이 아니다. 야간 근무를 마치고 아침에 퇴근해 자지 못한 잠을 몰아서 자는 시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1366 노동자들의 삶은 ‘매일 출근하고 하루 걸러 잔다’는 참담한 문장으로 요약된다”는 것. (관련 기사: 여성상담 노동자, 3교대 ‘오프’가 쉬는 날인가요? <a href="https://ildaro.com/10358" target="_blank">https://ildaro.com/10358</a>)</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러한 노동 패턴은 건강에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상담원들은 불면증과 수면장애는 물론, 방광염이나 허리디스크 같은 신체적 질환에 일상적으로 시달리고 있다”. 특히 괴로운 건 야간 시간대에 일할 때라고 A사무장은 설명했다. “야간 시간대에는 자살충동이나 극심한 트라우마를 호소하는 고위험군 내담자의 전화가 쏟아지는데, 수면 부족으로 인해 인지 저하와 몽롱한 상태를 겪는 상담노동자들은 내담자에게 최선의 지원을 하지 못한다는 자책감과 대리외상에 시달린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또한 몸과 마음의 건강이 위협받아도 ‘쉴 권리’가 보장되지 않는다고 호소했다. “1366 서울센터에는 유급 병가가 제대로 보장되지 않아, 수술이나 입원이 필요한 노동자는 개인 연차를 모두 소진한 뒤 무급 병가를 써야만 하는 실정”이라는 것. 박은영 분회장은 “상담노동자 대다수가 40~50대의 여성이며 교대 근무의 특성상 질병 노출 위험이 매우 높음에도, 최소한의 건강권조차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0405152860.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25년 12월 10일 성평등가족부 앞에서 〈여성긴급전화1366서울센터 상담노동자 인권침해 및 인력공백 해결 촉구 기자회견〉이 열렸다. (주최: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서울지역공공서비스지부)</p></td></tr></tbody></table><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br />떠나는 상담노동자들…1년 계약직 고용으로 불안감 가중돼</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노동환경이 열악하고 “직장 내 괴롭힘, CCTV 감시 등의 문제도 계속 제기”되고 있어 인력 이탈도 상시적이다. A사무장은 “1366 서울센터에서는 2020년부터 2024년 사이 연평균 퇴사자가 정원 대비 절반에 이를 정도로 이직률이 높았으며, 2025년 한 해에만 상담사 채용 공고가 20차례 넘게 올라왔다”고 설명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런데 ‘사측은 인력 공백의 근본적 원인인 처우 개선은 외면한 채, 상담원들을 1년 단위 계약직으로 고용하며 불안감을 가중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박은영 분회장은 “더욱 심각한 부분은 사측이 업무 평가를 노동자를 억압하고 통제하는 수단으로 악용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꼽았다. “1366 서울센터는 평가 지표나 개인의 평가 결과를 철저히 비공개로 부치고 있다. 계약 연장 시기가 다가오면 사측은 직무 능력이나 전문성과 무관하게 ‘다른 직원들과 조화롭지 못하다’는 등 자의적이고 추상적인 이유를 들어 낮은 평가 점수를 통보하고 사실상 사직을 종용하는 일이 벌어졌다.” 노동자들은 “부당한 환경에 문제 제기를 하는 직원들을 솎아내기 위한 인사권 남용이자 직장 내 괴롭힘”이라고 비판하고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러한 통제는 노동자들에게 고용불안으로 작동하고, ‘계약직 상담원들은 계약 만료의 두려움 때문에 아파도 병가조차 당당하게 요구하지 못하고 침묵하는 악순환이 벌어지고 있다’고 박 분회장은 설명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리고 “정부가 젠더폭력 대책의 핵심기구로 1366을 내세우지만, 정작 실무를 위탁받은 기관에 대한 관리·감독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채 방치되어 온 결과”라며 “성평등가족부와 지자체에서 책임을 갖고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여성폭력 지원체계, 국가가 외주화하고 방임하는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상담 현장의 소진과 이직이 반복되는 구조 속에서, 젠더폭력 피해자를 온전히 지원하는 일이 가능할까. 1366 서울센터 상담노동자 6명은 작년 3월,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서울지역공공서비스지부 1366 서울센터분회를 결성하며 직접행동에 나섰다. 노조는 12차례의 단체교섭과 2차례의 지방노동위원회 조정을 거쳐 작년 12월 합법적인 쟁의권을 확보했다. 그리고 올해 4월 23일 제19차 교섭을 이어가는 중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들이 요구하는 것은 특별한 대우가 아니다. 365일 24시간 위기 대응을 지속하기 위한 최소한의 노동 조건이다. 4대 핵심 요구안은 다음과 같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0000ff;">-투 오프(Two-Off)</span>: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이틀 연속으로 쉴 수 있는 제대로 된 휴일 보장.</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0000ff;">-대체휴무</span>: 공휴일과 오프(야간 근무 후 수면 시간)가 겹칠 경우 대체 휴무 지급.</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0000ff;">-고용안정</span>: 1년 단위 계약을 멈추고, 위탁 기간과 동일하게 근로계약 기간 보장.</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0000ff;">-노동조합 인정</span>: 타임오프(근로시간 면제제도) 보장 등 정당한 노조 활동 보장</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박은영 분회장은 “노조는 매주 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서울여성플라자 내부에서 선전전을 펼치며 단체협약 체결을 위한 싸움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며 시민들의 관심을 부탁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1366상담 노동자들의 투쟁은 “국가가 외주화하고 방치해 온 여성폭력 지원체계”에 대한 책임을 절박하게 요구하고 있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5-04 15:02:00</pubDate>
	   <section>sc2</section>
	   <section_k><![CDATA[노동]]></section_k>
	   <section2><![CDATA[]]></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박주연)]]></author>
	   <category><![CDATA[노동]]></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5/2026050407358329.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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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아이누 문화의 계승자 중에 조선인이 있다’]]></title>
       <link>http://www.ildaro.com/10446</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작년 출간된 『홋카이도를 여는 평화학』이라는 책을 읽다가, 석순희(石純姫) 씨가 집필한 챕터에 눈길이 머물렀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태평양전쟁 시기(1941~1945년. 일제는 전쟁 물자 및 노동력 확보를 위해 ‘국가총동원법’을 시행, 탄광‧토목‧건설 현장에 대대적으로 조선인을 강제동원함) 홋카이도에서 탄광 노동 등을 강요당했던 조선인 남성이 혹독한 노동을 견디다 못해 도망을 치자, 아이누(홋카이도 선주민) 사람들이 집에 숨겨주었다. 그가 돌아갈 곳이 없다고 하자, 아이누 공동체 안에서 세대를 이루어 정주할 수 있게 해주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조선인도, 아이누(홋카이도 선주민)도 일본의 식민지배에 억압당하고 착취당하던 존재였는데, 홋카이도에서는 그들이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0314303189.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석순희(石純姫) 도쿄에서 태어난 재일조선인 2.5세. 홋카이도에서는 3살부터 18살 때까지 살았고, 그리고 홋카이도 도마코마이의 고마자와대학에서 18년간 교수로 재직했다. 현재는 구마모토현 거주. 저서로 『조선인과 아이누 민족의 역사적 유대』, 공저로 『홋카이도를 여는 평화학』 외. (인터뷰이 제공 사진)</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일제로부터 착취당한 조선인과 아이누 민족의 연결</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석순희 씨는 홋카이도 도마코마이(苫小牧)의 고마자와대학 내 ‘환태평양‧아이누문화연구소’에서 공동연구를 하던 때, 동료 교수로부터 “아이누 문화의 계승자 중 조선인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후에 인터뷰를 통해 강제노동으로부터 도망친 조선인을 아이누 사람이 숨겨준 사실을 알게 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아버지도 홋카이도의 대학에서 교수로 일하셨지만, (아버지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은 없었어요.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잘 알려진 사실이라, 오히려 금기였던 것 같습니다. 2005년경부터 아이누와 조선 양쪽의 혈통을 가진 사람들을 소개받아 이야기를 들었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현재의 재일조선인의 선조가 일본으로 이주해온 경로는 ‘강제동원에 의한 것’이라는 연구가 많았지만, 홋카이도에는 그보다 더 앞선 에도시대(1603~1868년)부터 이주가 진행되고 있었다. 조선에서 조세에 불만을 가진 농민과 농촌의 만성적 피폐로 인해 민중의 봉기가 일어나, (조선 농민들의) 러시아 연해주로의 이주가 시작되었고, 그곳에서 다시 홋카이도로 이주한 것.</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석 씨는 조선인의 홋카이도 이주와 관련된 자료를 도립문서관 등에서 찾았지만 발견하지 못했다. 대부분은 입으로 전해진 것들이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2006년에 비라토리초(平取町) 후레나이(振内) 마을의 향토사 집필을 의뢰받았을 때의 일이에요. 의뢰받는 내용에 맞춰 전쟁 중 탄광 등에서 가혹한 노동에 희생되어 시신이 화장·매장되었다는 사실을 적었는데, 마을의 향토사 편찬 담당자가 ‘유골을 둘러싼 국제 문제가 생기면 골치 아프니 적지 말아달라’ 하더군요. ‘골치 아프다’라니, 어쩌면 그렇게 가볍고 냉정하게 말을 할 수 있는지. 결국 조선 사람들이 희생되었다는 사실만 간신히 게재되었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2018년 펴낸 책 『조선인과 아이누 민족의 역사적 유대』에 자세한 내용이 실려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연구자로서 그렇게 공식화되지 않았던 사실을 이야기해주신 내용을 책에 적어 제 업적으로 삼아도 될지, 갈등했습니다. 하지만, 식민지 지배에 의한 국가적 폭력은 역사의 기록으로서 후세에 남기지 않으면 안 됩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0310276467.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석순희 씨의 단행본 『조선인과 아이누 민족의 역사적 유대 - 제국의 선주민·식민지 지배의 중층성(重層性)』 한국어판. (이상복 역, 어문학사, 2019)</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화해’를 말하기 이전에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부터…</span></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천황제가 전쟁과 식민지주의를 정당화하는 자들을 살아남게 해</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조선인 혈통인 데다가 여성이라는 이중의 차별과 억압에 의해 일본 사회에서 살아가며 어려움을 느끼던 석 씨였지만, 가혹한 시대에 양심을 잃지 않고 행동한 아이누 사람들과 강제노동으로부터 생존한 조선인을 생각하면 자신도 더욱 힘을 내야 한다는 마음이 들끓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국가와 민족을 넘어 기억과 역사를 공유하지 않는 한, 미래는 없습니다. 지금 만연하고 있는 외국인에 대한 배외주의는 미래를 짓이길 겁니다.”라고 말하는 석순희 씨.</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석 씨는 또한 아이누를 테마로 한 국립시설 ‘우포포이’가 아이누에 대한 차별과 유골 도굴 등의 범죄를 은폐하고 있다고 잘라 말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일본은 ‘화해’라고 말하지만, 그에 앞선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죄’가 없습니다. 그 배경에 있는 것은 천황제이고요. 전후에도 천황제가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이 일본의 전쟁과 식민지주의를 정당화하는 사람들을 살아남게 했다고 생각합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국가와 민족을 넘어, 기억과 역사를 공유하자</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석순희 씨는 도쿄의 대학에서 10년 정도 학생들을 가르친 후, 홋카이도 도마코마이의 대학에서 2019년에 퇴임할 때까지 동아시아 근대사회사를 연구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리고 퇴임 후, “온화한 땅에서 살고 싶어서 2022년에 파트너와 함께 구마모토현 아마쿠사(天草)로 왔습니다. 낡은 집을 개조해 밭에서 채소랑 쪽풀도 기르고 있고요.”라며 현재의 일상을 말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아마쿠사에는 고대부터 조선과의 교역항이 있고, 9세기에는 신라에서 사절단이 오기도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공동체에서 행하는 작업에 참여하지 않으면 벌금이 부과되는 조선의 농촌 공동체의 규율이 지금의 아마쿠사에 남아 있어 깜짝 놀랐습니다. 앞으로는 조선과 아마쿠사의 연결을 천천히 조사해나가고 싶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석 씨는 집 문 앞에 일본군 ‘위안부’ 여성을 직접 형상화한 평화의 소녀상을 두고, ‘기억과 평화의 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작년 12월에는 역사와 젠더, 환경을 배우는 장인 ‘아마쿠사 자유학교’ 운영을 시작했다. “시민운동 안에서도 중요한 것은, 역사를 아는 것”이라고 강조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지금 일본 전역에서 군사기지 강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구마모토에도 자위대 주둔지에 미사일이 배치되고 탄약고가 만들어지고 있다. 시민들은 이에 반대하고 있다. 하지만, 석순희 씨는 여기에서도 누락된 관점을 일본 사회에 환기시킨다. “군사 확대에 반대하는 (일본)사람들은 ‘전쟁이 일어나면 자위대의 젊은이들이 전장으로 가게 된다’고 말하지만, 아시아 사람들은 ‘또 일본이 쳐들어온다’는 관점으로 생각할 겁니다.” [번역-고주영]</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일다〉와 제휴 관계인 일본의 페미니즘 언론 〈페민〉(women’s democratic journal) 기사를 번역, 편집한 내용입니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5-03 11:07:00</pubDate>
	   <section>sc4</section>
	   <section_k><![CDATA[국경너머]]></section_k>
	   <section2><![CDATA[아시아]]></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시미즈 사츠키)]]></author>
	   <category><![CDATA[아시아]]></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5/2026050313142066.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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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여성의 No를 ‘무시’한 성폭력 가해자와 재판부]]></title>
       <link>http://www.ildaro.com/10445</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지난 4월 23일 오전 11시 헌법재판소 앞에서 기자회견이 있었다. ‘동의없는 성폭력 재판소원’ 청구를 알리는 내용이었다. 여성·인권·사회단체들이 주요하게 대응하고 있던 성폭력 사건의 2심 선고를 앞두고 열린 기자회견이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당시 사건에서 피해자는 취해 있었고, 중간에 휴대폰 녹음 버튼을 눌렀는데 나중에 보니 75회 이상 거절 의사가 녹음돼 있었다. 물리적인 저항도 있었다. 그런데 경찰 송치, 검찰 기소 후 1심에서 법원은 무죄를 선고했다. 결론부터 알리자면, 2심 법원 판결도 다르지 않았다. 검사는 상고해달라는 피해자의 의사가 있었지만, 상고하지 않았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0142094428.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26년 4월 23일 오전 11시 헌법재판소 앞에서 ‘동의없는 성폭력 재판소원’ 청구를 알리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필자(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한국성폭력상담소 제공)</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강간죄 ‘동의 여부로’ 개정, 정부와 국회는 끝도 없이 미루는 중</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2심 선고를 앞두고 열렸던 기자회견은 총 61개 여성·인권·사회단체가 공동주최했고, 현장에 40명의 활동가와 시민이 모였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여성인권위원회와 천주교성폭력상담소,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의전화, 탁틴내일 아동청소년성폭력상담소, 장애여성공감 성폭력상담소는 피해자와 만난 후 재판소원 공동대책위원회를 결성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공대위를 결성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 논의가 있었다. ‘강간죄 개정 운동과 함께할 것인가, 별도의 대책위원회가 필요한가’도 그중 하나였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미투 운동 시기 ‘명시적 폭행과 협박이 없고 현저히 곤란하게 저항할 수도 없었던 성폭력 사건이 대다수였다’는 점이 우리 사회가 목격한 진실이었다. 이러한 사실이 형법 개정 운동(강간죄 성립 요건을 폭행 협박이 아닌 ‘동의 여부’로)을 본격적으로 지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당시의 20대 국회부터, 21대를 거쳐, 현재 22대 국회에 이르기까지, 당시 문재인 대통령, 윤석열을 거쳐 현재 이재명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당시 민선 6기 지방자치단체와 7기를 거쳐 8기 지자체 선거를 앞두고 있는 지금까지, 강간죄 개정 운동은 7년간 줄곧 다양한 자료와 액션을 통해 촉구하고 있다. 그러나 입법상 변경을 정부와 국회가 하지 않고 있다. 그동안 개별 성폭력 사건들은 계속 법정에서 다투어지고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피해자의 동의가 없었는데 폭행이나 협박이 뚜렷하지 않은 성폭력 사건은 부지기수다. 그러던 중 재판소원 제도(법원의 재판이 기본권을 침해한다고 판단될 경우, 그 재판 자체를 대상으로 헌법소원을 제기하여 구제를 요청하는 제도)가 생겼고, 한 사건이 그 문을 두드린다. 이 사건을 놓고 집중해서 논의하고, 무엇이 맞는지 최소한의 상식선을 질의하는 공대위가 탄생한 것이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0142367555.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19년 출범한 ‘강간죄 개정을 위한 연대회의’ 기자회견. 이미 여러 국가들처럼 강간죄 성립 요건을 폭행 협박이 아닌 ‘동의 여부’로 개정해야 한다고 촉구해왔지만, 한국 정부와 국회는 끝도 없이 과제를 미루는 중이다. (사진-한국성폭력상담소 제공)</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녹음파일에서 75회 거절·거부가 밝혀져도, 무죄라니?</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 사건에서 공대위가 주목한 부분은, 피해자가 거절·거부를 수차례 했던 사건이라는 점이었다. 실제 성폭력 중에서 피해자가 거절, 거부를 그토록 많이 한 경우가 많을까. 그렇지 않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독일도 성폭력 법이 ‘상대의 의사에 반하여’ 기준이지만, 여기에는 ‘묵시적’인 의사표시도 포함된다. 명시적인 의사표시가 쉽지 않음을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일본 성폭력 형법 개정 때도 명백한 거부라는 기준은 피해자에 대한 부당한 책임 전가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하여 ‘동의를 형성, 완수, 표명할 수 없는 상태를 만들거나 편승하여’라는 문구가 확정된 바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러한 점은 역으로 말해 ‘피해자가 75회 이상 거부, 거절 의사를 표했다면 가해자가 무죄일 수 없다’는 최소한의 선을 뜻한다. 기자회견을 보도한 기사에 달린 댓글에 이런 내용이 있다. “75번 거절하기도 힘들었겠다”. 그리고 “재판부가 공범인가”. 이 사건이 무죄가 맞다고 한다면,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이 법과 법원에 의해 용인되고 있음을 모두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가해자가 ‘OOO OOOO라고 우겼던 성폭력’ 시리즈</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공대위에서 논의했던 또 한 가지가 있다. ‘동의없는 성폭력 재판소원 공대위’라는 이름 대신 ‘OOO OOOO라고 우겼던 성폭력 사건 공대위’라고 이름 짓자는 의견이다. ‘OOO OOOO’에 들어가는 말은 이 사건 가해자가 주장한 내용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무슨 논리로 상대방의 동의 없는, 상대의 의사에 반하는 성폭력을 했는지 드러나는 문구이다. ‘동의 없는 성폭력’이라는 기준은 피해자의 거부 정도를 심문하는 게 아니다. 성폭력 가해 어떤 행위 수단, 방식, 논리, 정당화, 왜곡 속에서 일어나는지 규명하고, 인식하고, 그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OOO OOOO라고 우겼던 성폭력’으로 사건 이름을 짓고 공대위를 명명하면, 그리고 이것이 시리즈가 되면, 무수히 많은 성폭력의 수단과 과정이 드러날 것이다. 말할 때마다 분노와 실소가 우리 몫이 되는 건 단점이자 장점이다. 그러나, 가해자가 자신이 특정되었다고 여기면 피해자에게 역공격을 가하는 현실을 고려해서, 실제 이름이 되지는 않았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판결문 ‘피해자는 분명히 거부했다, 그래도 피고인은 오해할 수 있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피해자 ‘내 의사는 도대체 무엇으로 더 증명되어야 하는가?</span><span style="font-weight: bold;">’</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동의없는 성폭력 재판소원’을 통해 명확히 하고자 하는 목적, 그 첫 번째는 “여성의 No는 Yes일 수 있다”는 말을 판결문에 쓰면 안 된다고 확정하는 것이다. 피해자는 발언문(대독)에서 이렇게 말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1심 판결문에는 제가 사건 당시 분명한 거부 의사를 표현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재판부는 같은 판결문에 ‘피고인이 피해자의 내심의 의사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였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라고도 쓰여 있습니다. ‘피해자는 분명히 거부했다’고 쓰여 있는 판결문 안에, ‘그래도 피고인은 오해할 수 있었다’라는 의미의 말 또한 쓰여 있는 것입니다. 피해자의 거부가 판결문에 명시된 사건에서조차 ‘오해 가능성’이 피고인의 무죄 근거가 된다면, 피해자의 말은 도대체 무엇으로 더 증명되어야 하는 걸까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1심 같은 판결문이 가능했던 이유는 뭘까. “여성의 No는 Yes일 수 있으니 강행하면 된다”라는 남성중심적 사고 때문이다. 가해자 이러한 인식으로 폭력을 행한 데 이어, 재판부가 그 가치관과 실천을 용인해준 것이다. 재판부는 상대의 동의 없는 성적 행위를 그대로 밀어붙인 가해자를 심지어 옹호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피해자는 발언문에서 핵심적인 문제를 짚으며 재판부를 규탄한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피고인이 제 거부 의사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것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수십 차례 거부 의사를 말하는 제 말을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더 억울하고 힘들었던 점은 제가 저항해서 겨우 피고인의 행동을 멈추게 한 것을 피고인이 ‘강제로 할 의사가 없었다는 증거’로 보았다는 점입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법원이 성폭력 행위를 합리화할뿐 아니라, 피해자의 저항 행동까지 피고인의 면죄 이유로 삼는 국가는 피해자 보호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피해자가 얼마나 저항했는지 묻는 강간죄 최협의설 폐기해야</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재판소원을 통해 이루어지길 바라는 변화, 두 번째는 ‘강간죄 폭행‧협박 최협의설’의 위헌성이 심각하게 짚어지는 것이다. 최협의설이란 법 개념의 범위를 가장 좁게 해석하는 것으로, 강간죄(형법 제297조)와 유사강간죄(형법 제297조의2)의 ‘폭행 또는 협박’을 피해자의 항거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여야 한다고 해석하는 것이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0143117510.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만취 상태에서 성폭력(준강간)을 겪은 피해 사건에 대해 법원은 강간죄도, 준강간죄도 인정하지 않았다. 2020년 7월 7일 ‘준강간 사건의 정의로운 판결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164개 단체)가 수사 및 재판부의 인식 변화를 요구하며, 대법원의 파기환송을 촉구하는 기자회견 모습. (사진-한국성폭력상담소 제공)</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이 사건 피해자 대리인단의 단장 오지원 변호사(민변 여성인권위원회)는 기자회견 발언에서 최협의설은 (피해자가 극단적으로 저항해야만 강간으로 인정한다는 점에서) “정조 관념에 기반”해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 등을 보호할 헌법상 의무는 포기하고, 가해자에게는 ‘타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해도 되는 위헌적 자유’를 부여”하는 것이며, 평등권도 침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동안 법원은 여러 대법원 판례를 발표하면서 강간죄, 유사강간죄를 비교적 넓게 해석하는 판결을 내왔다. 2023년에는 대법원이 강제추행죄 구성 요건 ‘폭행 또는 협박’에서 최협의설을 폐기한다고 결정했다. 그러나 강간죄, 유사강간죄에 대해서는 그대로다. 이것이 강간죄, 유사강간죄에 대한 경검의 불송치, 불기소의 가장 큰 이유이자, 이번과 같은 무죄 판단의 이유이고, 피고인 변호인이 2차 피해를 일으키는 심문을 남발할 수 있는 이유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실전에선 학습되지도 않은 ‘성적 동의 부재’ 개념, 왜?</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세 번째로 재판소원을 통해 바뀌기를 바라는 것은 ‘성적 동의’에 대한 거의 부재하거나 얕은 사회의 인식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성폭력 판단기준이 ‘동의 부재(不在)’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너무 많이 들었고, 이제 상식처럼 느껴진다. 2025년 직장갑질119가 글로벌리서치에 의뢰해 조사한 전국 19살 이상 직장인 1천명 문조사에서 ‘비동의 강간죄가 필요하다’고 응답한 사람은 72.2%, 남성의 62.9%와 여성의 83.9%였다. 2025년 조기 대선을 앞두고 더불어민주당 내에서 전국 18세~38세 성인남녀 1천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상대방의 동의를 받지 않고 성교한 경우 강간죄’로 보는 의견에는 20~30대 남성의 61.0%, 여성의 87.5%가 동의했다. ‘명백하게 거부 의사를 표시했는데도 성교한 경우 강간죄’라는 의견에 대해서는 20~30대 남성의 83.5%, 여성의 95.0%가 동의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러나, 실전에서의 성적 ‘동의 부재’ 개념은 학습되지 않고, 인식되지 않고, 적용되지 않는 중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20세 피해자가 아르바이트 사장과 음주 도중 성폭력 피해를 입고 119와 경찰에 신고했는데, 경찰은 피의자 제출자료만 보고 ‘합의했다’는 사장의 말에 의해 불송치했다. 중고등학교에서 ‘동의 없이’ 발생한 친밀한 연애 관계에서의 성관계는 어떠할까. 학교폭력 전담교사가 이를 어떻게 바라볼까. 직장에서 일어난 동의 없는 성적 행동에 대해 ‘상대도 동의했다’고 피신고인이 주장할 때, 어떤 관점으로 조사하고 판단해야 할까.</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014337734.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캐나다 온타리오 법원의 ‘적극적 합의 없는 성폭력’ 판결 내용 일부(2016). 한국성폭력상담소 ‘적극적 합의’ 홍보물 중.</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일본의 경우 최근 형법 개정에서 업무상 위력에 의한 성폭력과 준강간 조항을 없애고, ‘동의가 부재한 성폭력’으로 일원화했다. 동의에 대해 들여다보는 것이 이제 책무여야 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동의에 관한 이야기는 복잡하다. 동의하지 않음을 아무리 표현해도 무시당하는 사람들이 있다. 동의에 대한 의사를 형성할 여건 자체가 안되는 상황, 성적 동의가 문제가 아니라 생존이 시급해서 동의한 것으로 보인 경우, 동의했으나 동의 당시의 전제가 무너지고 뒤집혔을 때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여성과 소수자가 술, 유흥, 성적 취향, 상업적 활동과 산업적 고용에 연루되었을 때, 이미 ‘동의’로 간주하여 성폭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나, 원치 않는 성적 행동을 즉각적으로 거부하고 빠져나왔는지/그렇지 않았는지를 기준으로 평가하며 배제하려는 시도 역시 비판적으로 돌아보아야 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동의는 개인의 능력이나 선택의 결과로만 설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누군가의 동의하는 의사 또는 동의하지 않은 의사가 진실되게 형성되고, 표현되고, 실현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져 있는지’의 문제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이러한 조건을 마련해, 개인의 의사 실현이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키지 않고 오히려 이를 타파하는 힘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 민주주의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cf2fc2;">[필자 소개] 김혜정</span>. 2004년부터 반성폭력 운동판에서 사람을 배우고 세상을 바라보았다. 성폭력을 알게 된 사람들이 사려깊고 해방된 세상을 만든다고 믿는다. 현재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이고, 상근활동가이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5-01 09:39:00</pubDate>
	   <section>sc1</section>
	   <section_k><![CDATA[사회]]></section_k>
	   <section2><![CDATA[성폭력]]></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김혜정)]]></author>
	   <category><![CDATA[성폭력]]></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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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Living In a Society That Demands Sex Appeal]]></title>
       <link>http://www.ildaro.com/10444</link>
       <description><![CDATA[<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lind dating introduced me to the gaze of other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 can still remember vividly the time when I first entered university. Outside of the school uniform skirts I’d been wearing my whole life, I had never worn a skirt. Getting a perm and putting on makeup felt awkward to me. Even though walking up a hill in shoes that already hurt my feet was uncomfortable, the thought that “still, now I’m a university student” made me put on a skirt, shoes, and makeup just like others, and leave the house.</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3018188397.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When I became a university student, putting on makeup felt awkward to me. [Image by olga volkovitskaia from Pixabay]</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r />And at some point, I started to wonder if that me was the real me. I thought not. So from that day I started going to school in comfortable clothes, with a bare face and sneakers. I had no interest in being pretty, and wasn’t good at dressing myself up, so I wasn’t sure what looking like that meant. Before I started going on blind dates, that i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f you want a blind date to go well, you have to wear a pretty dress.” The older university student who set me up on a blind date told me this as a tip. Because the first impression would be decisive, I had to wear a blouse and skirt, or a dres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at wasn’t all. There were more tips for “succeeding” on a blind date. Don’t blather on, you have to laugh at your date’s jokes and look innocent. So her explanation was that it was good manners and a virtue not to be myself, but to fit myself into the image of what men want in a woman. </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 think it was from that time that I started to be aware of how I looked in other people’s eyes and how I should look. I started to feel embarrassed about not wearing makeup, to notice ugly parts of my face, and to worry about whether I looked like I had gained weight. I started to try properly(?) to look good, and people said I had gotten prettier. But it wasn’t that I had gotten pretty, it was only that I had gotten used to trying to fit myself into what other people wanted.</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s this what university festivals are normally lik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t university, there is an event that is held once a year. People not affiliated with the university can attend, it’s an unavoidable part of university life – that’s right, the university festival. Most student clubs spend a long time preparing performances and booths for it, and students put their hearts and souls into it, so I had big expectations. There was a festival in high school, too, but because it didn’t feel like a student-led event, I wanted to experience the freedom that could only be enjoyed in university. </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ut the festival that I actually experienced crushed my hopes. I still can’t forget the scene I saw at my freshman-year festival. Female students under red lights, wearing short skirts and bunny ears, taking the arms of male customers visiting the school and acting like they were soliciting them. Pub tents with signs reading “Booking 100%” and “Miari Texas.[A famous red-light district in Seoul]” Loud music and lone women sitting at tables with groups of male customers... this was all a huge shock to m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s this freedom? Is this what university festivals are normally like? I was horribly uncomfortable and had no choice but to leave quickly. After that, I would go home early during festivals. I felt like a lone outsider in that foreign atmosphere and culture. I became someone who “didn’t know how to have fun at a festival,” and spent the next few years avoiding them, even at my own school.</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Who owns the festival? Students raise question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ut it turns out that I wasn’t the only one made uncomfortable by the atmosphere of student festivals. Aside from a few students belonging to groups and clubs that operate pub tents at the festival, most students didn’t actually have much to do with pub tents. There were many who said they never once went to a festival in four years of university. There were awfully many who had a critical view of festival cultur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re were two main problems with the festivals at that time. The first was the suggestive atmosphere, which included the clothing. I felt repulsion at the female students wearing sexy outfits and seeming to solicit male customers. The second was that the nighttime pub tents were operated as places for male customers from outside the university instead of for current female students. The criticism was that the current students, the ones who were supposed to be enjoying the festival, ended up being excluded from i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Criticism began to come from all quarters. A common sense of something being wrong could be found even among the students who had operated pub tents. The clothes that they wore were uniforms determined by the department or club; they had had no freedom of choice and had simply worn what senior students had told them to.</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efore and after the festival every year, criticism and introspection appeared on the school’s anonymous Internet forums. Questions could be heard about whether this was really the festival that we wanted and why the pub tents just had to be operated this way every year. The students couldn’t speak with one voice but did make a constant outcry.</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Finally, in 2014, the university student council and student president council gathered 110 student representatives to hold an “All Students Representative Council” and discuss this problem. As a result, the “2014 Sookmyeong Festival Regulation” was created. It limits suggestive clothing for students operating pub tents and stipulates penalties, among other things. Because they harbored expectations that we would stop ourselves from allowing the festival atmosphere to be like that again, most students have welcomed the regulation.</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How the media consumes “female university student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nd then one day, someone asked if I had seen a post a criticizing our university’s festival. As soon as I opened my browser, I could see that the main page of the popular portal site was plastered with articles criticizing the lasciviousness of the women’s universities’ festival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nd every article included one particular poster for a pub tent, which had my school’s name and the woman dressed as a maid, bending over and showing her mesh stockings and garter belt. Needless to say, the department that had made it had chosen a “sexy maid” concept for their pub tent and had the tent staff students dress up as maids to serve customers. The articles had attracted countless comments, calling the poster lewd, asking if female students should look so cheap, and bemoaning today’s university students in general.</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 media and netizens had two opposing views. One was “Suggestive and promiscuous female university students” and the other was “if they’re regulating clothing, how are they different from domineering old people?” Both views built conclusions without knowledge of the context from which the students’ voices and the regulations for pub tents had come. The media was consuming “women’s university festivals” as they wanted.</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Criticism about promiscuous female university students revealed a stereotypical view of them. It was a reaction full of anger and reprimand, that seemed to say, “You are supposed to be good, modest, and pure, so is it okay for you to be so suggestive and promiscuous?” The mass media had no interest in the student discussions surrounding the festival and simply pumped out articles that used keywords like “female university student” “suggestive” and “promiscuous” to gain page views. I felt like the way that our society consumes female university students is awfully harmful.</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s it sexual liberation or sexual commodificatio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re were a few articles criticizing the students’ decision to regulate clothing. They – and the comments – said things like, “The regulation isn’t cool,” “It’s like during the military dictatorships when they regulated skirt length,” and “Women’s university students are reversing sexual liberation and running towards sexual conservativism.”</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 think that these opinions show a lack of knowledge about university festival culture. They assume that university festivals are totally free, the clothing worn is the result of individual choices, and regulating that freedom is unjus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ut the festival that I saw wasn’t free at all. Students have said that they had no choice but to wear what older students told them to, and it was capitalist logic and not respect for autonomy that was operating in the groups using the pub tents to make money for the clubs or departments. More than anything, it wasn’t free because the women were learning to and being forced to fit themselves into the image that men in our society wan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at female college students operating pub tents at university festivals dress sexily and solicit male customers – it is clear that there is a context other than that of freedom of expression at work here. That’s sexual commodification, not sexual liberation. So students decided that it was necessary to put the brakes on with autonomous student regulations (not those of professors, faculty, or others), in order to change this entrenched festival culture.</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Living in a culture that demands a “friendly” figur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se incidents made me think deeply about the connection between women’s grooming habits, sex appeal, and femininity. It’s easy to mistake plastic surgery, dieting, and getting dressed up and made up as behavior that “voluntarily” reveals women’s own desires. But I learned that on the hidden side of it, there is something that can’t be explained by freedom of expression, fulfillment of individual desires, or autonomy: discrimination against and oppression of women.</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3018559846.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Women are pressured to fit their bodies to the image that men want. [Image by Mohamed Hassan from Pixabay]</p></td></tr></tbody></table><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Of course, I don’t want to say that women getting dressed up and being sexy can only be called a passive action meant to make themselves visually pleasing to men. I believe that women attempting to independently express themselves as sexual beings is very meaningful. When viewed from the outside, it can be impossible to distinguish the two, and it may be conveyed in a distorted way by the media, but sexual expression by women who want to escape from men’s gazes and become freer continues unbowed and must be supported. What is clear is that the weight of a culture that compels femininity is heavy.</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n our society, young women are more used to seeing their bodies through the eyes of others instead of their own. Internet shopping sites whose customers are mainly women in their 20s use copy like “A dress that will make your boyfriend’s jaw drop,” “Hair that will make him stop hesitating,” and “A style that men like” to sell their goods. Even if you just want a pair of shoes, you see ads that tell you to buy “shoes that men like,” and soon get used to this kind of writing. </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n a male-centric society, women grow up feeling pressure to fit their bodies to men’s image of women. In a society in which a “good-natured body,” being pretty, and having a good character are virtues of equal weight. Not putting on make-up is bad manners, and not being thin means you are a lazy person who doesn’t take care of herself.</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elecom companies that choose female pop stars as spokesmodels gain popularity with ads that showed their curvy figures but have nothing to do with telecommunication. Female weather forecasters wear tight, sexy clothing when talking about the weather. The sexual commodification that is everywhere in the media – I wonder what kind of message it gives to girls and how much it affects them. I think it’s a problem that our society needs to think deeply abou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We’re living in a era in which women’s rights are better than they’ve ever been, but in which it’s also difficult to use the word “autonomy” about even my own body. <span style="color: #ad34cb;">[Translated by Marilyn Hook]</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Original article: <a href="http://ildaro.com/7508" target="_blank">http://ildaro.com/7508</a> Published: June 23, 2016</span></p>]]></description>
       <pubDate>2026-04-30 14:10:00</pubDate>
	   <section>sc100</section>
	   <section_k><![CDATA[English Article]]></section_k>
	   <section2><![CDATA[]]></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Seol-gyeong)]]></author>
	   <category><![CDATA[English Article]]></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596'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4/2026043021429327.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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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정병 경지 메이크업’이라는 이름]]></title>
       <link>http://www.ildaro.com/10443</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과거 성형으로 비슷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조롱하는 말로 ‘강남 미인’이나 ‘성괴’(성형괴물)라는 말이 유행했다면, 지금은 메이크업을 통해 얼굴을 꾸미는 행위조차 ‘정병(정신병) 경지’라는 말로 불리고 있다. 성괴라는 표현이 ‘괴물’이라는 혐오스러운 존재를 빗대어 여성을 타자화하였다면, ‘정병 경지 메이크업’이라는 말은 더 직접적으로 정신질환을 호출한다. 과한 메이크업을 한 사람을 비정상적 존재로 위치시키고, 그 얼굴의 상태를 ‘정신병의 경지’라고 진단하는 것이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2926035385.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한동안 ‘정병경지 메이크업’이라는 밈이 온라인 공간에서 유행했다. 구글에서 관련 검색어를 입력하면 많은 인스타그램, 틱톡, 유튜브 이미지/영상이 뜬다. (구글 검색 이미지)</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그런데, 솔직히 이러한 말들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유는, 사실 그것이 최근에 갑자기 등장한 감각이 아니기 때문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가령 현재에는 ‘애교살’을 강조하는 메이크업이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잡았지만, 이러한 화장법이 지금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 십대였던 나는 눈 밑을 강조하는 메이크업을 즐겨 했다. 학교에서 금지된 메이크업을 일부러 드러내며 하는 것에서 묘한 해방감을 느끼기도 했다. 일방적으로 주입되는 학교의 규칙을 어기는 방식으로 내 얼굴을 꾸미는 일이었기 때문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나의 ‘티 나는 화장’은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애교살을 강조한 눈 밑은 ‘애벌레같다’는 말을 들었고, ‘다크서클 같다’, ‘눈 밑에 아이라인을 그렸냐’는 식의 비아냥을 듣기도 했다. 지금 와서 보면 그러한 평가는 단순한 취향의 차이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허용된 정도’를 벗어난 얼굴에 대한 교정이었던 것 같다. 그때의 나는 단지 조금 과하게 화장을 했을 뿐이지만, 내 얼굴은 웃음거리나 이상한 것으로 분류되고 교정해야 할 대상으로 취급되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자연스러움이라는 규범과 ‘정상성’</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러니 문제는 단순히 하나의 유행어가 아니다. 어떤 얼굴이 ‘정상’으로 인정되고 어떤 얼굴이 ‘비정상’으로 밀려나는지에 대한 기준이 만들어지는 방식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화장을 하는 것 자체는 더이상 문제되지 않는다. 오히려 여성에게 화장은 기본적인 자기 관리로 요구된다. 화장을 하지 않는 여성은 ‘예의가 없다’, ‘게으르다’, ‘프로답지 못하다’는 꼬리표가 따라붙는다. 동시에 화장은 ‘자연스러워야’ 하고, ‘티 나지 않아야’ 하며, ‘과하지 않아야’ 한다. 허용되는 것은 화장이 아니라, ‘화장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화장’이다. 이 모순적인 규범 속에서 여성의 얼굴은 끊임없이 조정되고 평가된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292732672.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미국 페미니즘 개념미술의 대표적인 예술가로 꼽히는 바바라 크루거(Barbara Kruger)의 1983년작 〈Untitled (You Are Not Yourself)〉와 1981년작 〈Untitled (You thrive on mistaken identity)〉 작가는 여성의 몸과 정체성이 사회와 미디어가 규정한 이미지와 가부장적 규범에서 기대하는 여성상에 끼워맞춰지고, 대상화되고, 분절되며, 평가당하는 현실을 비판한다. ©Barbara Kruge</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메이크업의 기준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대와 유행에 따라 미묘하게 이동한다. 과거에는 어색하다고 여겨졌던 표현 방식이 시간이 지나면 트렌드가 되기도 한다. 애교살 메이크업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한때는 과장된 것, 촌스러운 것으로 여겨지던 표현이 지금은 ‘자연스럽고 예쁜 얼굴’을 만드는 기술로 받아들여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는 것은 ‘적당함’에 대한 기준이다. 무엇이 적당한지, 어디까지가 괜찮은지에 대한 ‘선’은 계속해서 재설정되지만, 그 선을 벗어난 얼굴이 ‘비정상’으로 분류되는 구조는 변하지 않는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리고 기준을 벗어나는 순간, 그 얼굴은 미적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병리의 영역으로까지 이동한다. ‘정병 메이크업’이라는 이름이 붙는 순간, 그 얼굴은 ‘다른 스타일’이 아니라 ‘문제가 있는 상태’가 된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정병’이라는 말이 작동하는 방식</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최근 SNS에서 유행한 ‘정병 경지 메이크업’ 밈에서 강조되는 것은 단순히 색감이나 분위기가 아니라, 얼굴을 세부적으로 분해해 특정한 ‘증상’처럼 읽어내는 방식이다. 눈 밑에 넓게 퍼진 핑크색 치크는 단순한 메이크업이 아니라 ‘울어서 번진 얼굴’처럼 해석되고, 보라색에 가까운 아이섀도우와 강조된 애교살은 ‘정서적 불안정’을 드러내는 징후처럼 설명된다. 나아가 속눈썹, 피부 톤, 입술 색까지 각각의 요소가 ‘정신병 농도’와 같은 표현으로 연결되며, 얼굴 전체가 정신 상태를 진단하는 표면처럼 다루어진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즉, 여기서 조롱받는 것은 진한 화장이 아니라, 얼굴을 통해 읽히는 여성의 ‘이상한 상태’이다. 단순히 건강하지 않아 보인다는 인상을 넘어서, 감정이 통제되지 않거나, 과도하게 집착하거나, 불안정한 상태에 있다는 해석까지 포함한다. 여성의 얼굴을 단순한 외형이 아니라 ‘내면 상태를 드러내는 지표’로 간주하는 시선과 맞닿아 있다. 여성은 밝고 안정적이며 관리된 상태로 보이기를 요구받는다. 그 균형이 흔들리는 순간 ‘이상하다’, 나아가 ‘문제가 있다’는 진단을 받는다. ‘정병 메이크업’이라는 말은 바로 그 지점에서 작동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러한 명명 방식은 ‘정병’(정신질환)이라는 단어가 가진 의미를 가볍게 소비하면서 동시에 강화한다. ‘정병경지 메이크업’ 밈 안에서 ‘정병’이라는 명명은 단순히 과한 꾸밈을 지칭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얼굴의 단점이라고 여겨지는 부분을 보완하려는 시도, 즉 결점을 가리고 조정하려는 행위 자체가 ‘과도한 집착’이나 ‘비정상성’으로 해석된다. 특정한 몸과 얼굴 상태를 낙인찍는 언어를 재생산하는 동시에, 정신질환을 조롱과 희화화의 대상으로 만든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NS에서 이러한 표현이 빠르게 확산되는 방식 또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극적인 이름일수록 더 쉽게 소비되고 공유되는 구조 속에서, ‘정병’이라는 단어는 하나의 밈으로 가볍게 유통된다. 그러나 그 가벼움은 특정한 여성의 얼굴과 상태를 밀어내는 무게를 함께 지닌다. 누군가의 얼굴은 ‘예쁘다’고 불리고, 또 다른 얼굴은 ‘정신병 같다’고 불린다. 그 경계는 개인의 선택이나 취향이 아니라,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규범 속에서 만들어진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문제는 어떤 메이크업이 더 낫고 덜한가가 아니다. 문제는 그것을 ‘병’이라고 부르는 방식이다. 어떤 꾸밈은 자연스럽다고 인정받고, 어떤 꾸밈은 과하다고 판단되며, 어떤 꾸밈은 아예 비정상으로 밀려난다. 그 과정에서 여성의 얼굴/몸은 여전히 통제되고, 진단되고, 평가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이름들을 너무 쉽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도 모른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cd2bd3;">[필자 소개] 이은선</span>. 고등학생 시기 학칙 개정과 학생인권조례 제정 활동을 하며 청소년 인권 운동을 만났다. 청소년이 학교와 사회에서 그저 버티는 존재가 아니라, 부당한 순간에 목소리를 내고 변화를 만들어가는 시민이 될 수 있기를 고민하며 활동해 왔다. 현재 대학원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폭력에 반대하며 비건을 실천하고 있다. 『우리는 청소년-시민입니다』, 『노키즈존 한국 사회』 등을 공저했고 청소년의 경험과 권리, 젠더화된 규범에 대해 글을 써왔다. 주변 존재들에 물들고, 물들이는 것을 좋아한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4-29 09:17:00</pubDate>
	   <section>sc8</section>
	   <section_k><![CDATA[일다의 방]]></section_k>
	   <section2><![CDATA[몸 이야기]]></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이은선)]]></author>
	   <category><![CDATA[몸 이야기]]></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4/2026042930084346.jpg' medium='image'></media:content>
<image><![CDATA[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4/2026042930084346.jpg]]></image>
     </item>

     <item>
       <title><![CDATA[장애인을 태우지 않고 ‘대중교통’이라 불릴 자격 있습니까]]></title>
       <link>http://www.ildaro.com/10442</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지난 4월 21일, Moon은 ‘업무방해’ 혐의로 재판정에 섰다. 3년 전, Moon이 지역의 저상버스 도입을 요구하며 버스를 세우고 쇠사슬로 버스와 자신의 몸을 묶어 버스의 운행을 방해하는 등의 피해를 주었다는 이유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지난 주에 Moon과 함께 국선 변호인 면담을 하러 갔다. 변호인은 의견서에 “버스회사에 손해를 끼치고, 승객들이 탑승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해 죄송하다”는 문구를 넣어도 되는지 물었다. Moon은 “죄송하다. 그런데, 장애인들이 수십 년째 버스를 타지 못한 것은 누구에게 사과를 받아야 하는가?”하고 물었다. 삼십 분이 채 되지 않는 면담 후, 변호인은 Moon을 설득하기보다, 판사를 설득하기로 입장을 바꾸었다. 활동지원인인 내게도 의견서를 제출해달라고 요청했다. 다음은 나의 의견서를 일부 수정한 것이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2736348781.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21년, Moon은 저상버스 요구를 위한 시위에 동참했다. 올해 4월 21일, Moon은 업무방해 혐의로 재판정에 섰다. 법정에서 Moon은 보완대체의사소통(<span style="letter-spacing: -0.39px;">AAC</span><span style="letter-spacing: -0.03em;">)으로 진술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장애는 죄가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의 현실은 장애를 이유로 권리를 제한하고 있습니다. 저는 묻고 싶습니다. 시민이라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어야 할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 잘못입니까. 이동할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 범죄입니까.” 사진 속 버스 출입구에 Moon의 모습이 보인다. 끌려나가지 않기 위해 쇠사슬로 버스와 자신의 연결했다. 이 시위 이후 세종시 저상버스 도입률이 8%에서 2023년 기준 46.4%로 올라섰다. (사진 제공-Moon)</span></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존경하는 판사님께</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저는 「장애인활동 지원에 관한 법률」에 근거하여, 보건복지부가 정한 활동지원사 교육과정을 수료하고 현장실습을 이수한 장애인 활동지원사입니다. 저는 3년째 Moon의 옆에서 Moon의 삶을 지원하고 있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Moon이 대표로 있는 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리프트가 장착된 관광버스를 타고 중증장애인들이 자립여행을 가는 모습을 보고 센터 후원회원이 되었고, Moon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Moon의 활동지원도 하게 되었습니다. 장애에 관심을 갖고 장애를 주제로 석사 논문을 썼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저는 좋은 장애활동지원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3년 차인 저는 그 바램을 접었습니다. 저는 Moon에게 잘못된 정보를 주기 일쑤입니다. 제가 잘 안다고 안내한 길에 턱이 있어 되돌아오기 일쑤고, 제가 소개한 가게들은 휠체어가 진입하지 못하는 곳이 더 많습니다.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노선을 찾아도 저상버스가 아니라서 Moon은 탈 수 없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Moon이 먹고 싶은 메뉴가 있어도, 경사로가 있는 음식점으로 갑니다. Moon은 용변을 제어할 수 있지만 제가 기저귀를 입도록 권합니다. 장애인화장실이 아예 없는 건물도 있고, 있다 해도 잠겨 있기 일쑤라 화장실 이용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장애인 콜택시가 잡힐 가능성이 없는 일정은 포기하게 종용합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싶어하는 Moon에게 저는 장애인 콜택시를 타라고 합니다. 장애인 콜택시도 한 시간 이상 기다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버스정류장에 무한정 서 있는 것보다 낫기 때문입니다. 2004년에 도입된 버스 도착 안내 서비스는 휠체어 장애인에게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Moon은 자신이 제어할 수 있는 전동휠체어를 타려고 하지만, 이동수단이 없을 때 저는 Moon에게 수동휠체어를 권합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활동지원은 “장애인의 자립생활을 지원하고 장애인의 삶의 질 향상시키며, 장애를 가족에게 떠넘기지 않기 위한 제도”이지만, 저는 장애인이 자립하지 않는 쪽으로, 삶의 질을 포기하는 쪽으로, 장애로 인한 불편을 개인과 가족에게 떠넘기는 방향으로 활동지원을 하고 있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법과 제도는 장애인차별을 금지하고, 교통약자의 이동 편의를 증진하라고 하는데도, 버스 타는 일 같은 가장 기초적인 일들이 장애인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 때, 장애인과 장애활동지원사는 사회에서 함께 배제되고 고립됩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2731337606.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재판이 끝난 후 Moon이 향한 곳은 가덕도 신공항 건설사업 무효화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이 열린 국토교통부 앞. 가덕도신공항반대시민행동은 가덕도 신공항 건설사업 기본계획이 조류 조사가 부실하게 이루어진 전략환경영향평가를 바탕으로 수립된 것에 문제 제기하며, 국토부를 상대로 기본계획 무효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Moon은 말한다. “재난 앞에 가장 먼저, 가장 크게 피해를 입는 사람들이 장애인이예요. 생명안전과 환경 이슈에 장애인들이 민감할 수밖에 없어요.” Moon은 누구보다 법을 지키고, 법을 보완하고, 법의 준수를 촉진하는 사람이다. (사진 제공-호미)</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하지만 저는 Moon을 지켜보며 조금씩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Moon은 지역사회에서 활동하면서 법과 질서를 지키고, 법을 보완하고, 공공과 민간이 법을 준수할 것을 촉진해왔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Moon은 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지역의 중증장애인들의 자립을 위해 스포츠 교실을 열고, 장애인 동료상담을 합니다. 버스를 처음 타보는 장애인과 함께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버스 탑승이 익숙할 때까지 지원하고, 통장이 없는 장애인과 은행에 가서 통장을 만듭니다. 시설 장애인을 초대해서 영화제도 엽니다. 센터 회원들과 버스 모니터링을 하며, 지역의 교통약자들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데 어려움이 없는지 살피고 해결해갑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하는 책 모임 등의 프로그램을 마련해 지역 내에서 일상적으로 장애인식 개선활동을 합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Moon이 그동안 제기한 민원만도 수십 가지입니다. 민원 뿐 아니라, 직접 행정기관이나 시의원을 찾아가고 모니터링을 해왔습니다. 그 결과 버스정류장에 있던 턱들이 없어지고, 버스 탑승을 방해했던 화단이 재배치되고, 장애인 콜택시 야간 운행이 생겼습니다. 2021년도에 8%이던 저상버스 도입률이 Moon의 시위 이후 2023년 기준 46.4%로 획기적으로 늘었습니다. 국토교통부 ‘제4차 교통약자 이동편의 증진계획’의 목표인 저상버스 62% 도입률에 가까워지게 된 것입니다. 중증장애인도 일을 할 수 있도록 시를 설득해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 조례도 만들었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 모든 활동은 법이 정한 활동입니다. Moon은 “장애를 이유로 한 차별을 금지하고, 장애인의 완전한 사회참여와 평등권 실현을 통하여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애인차별금지법’을 앞장서서 지키고, 보완하고, 풍성하게 만드는 활동을 해왔습니다. Moon의 활동은 2008년, 우리나라도 비준한 유엔장애인권리협약(CRPD) 내용과도 일치합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Moon이 버스를 멈춘 것은 법을 어긴 것이 아니라, 이윤 때문에 법을 어기고 있는 버스회사와 이를 묵인하고 있는 행정에 법을 지키라고 촉구한 것입니다. 자신의 몸에 쇠사슬을 두르면서까지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25년간 집에만 있다가 처음 사회에 나와 ‘은행 업무도, 버스도 탈 줄 몰랐던’ 스스로에 대한 무력감과 좌절을 겪은 Moon은 스물다섯 살 때 “중증 장애인들의 삶을 살만하게 만드는 일을 하겠다”고 한 다짐을 30년째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3년 전, 항암치료를 받았던 1년을 뺀 전 기간 동안 말입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moon의 활동은 단지 장애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장애는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고, 우리 모두는 언젠가 이동이 불편해집니다. 오늘 저상버스가 없어 버스를 타지 못하는 사람의 문제는 필연적으로 모두의 문제입니다. 장애인의 시민권을 보장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은 장애인을 위한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존엄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일입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고,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않는다.”는 헌법 조문이 ‘모든 국민’에게 해당되는 말이라고 믿습니다. 헌법이 누군가는 태우지 않으면서도 ‘대중교통’이라고 버젓이 불리고 있는 계단버스가 아니길 간절히 바랍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판사님의 판결이 법과 제도의 이름으로 차별을 묵인해 온 우리 사회를 전환시키는 판결이 되기를, 한국의 민주주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이는 판결이 되기를, 그래서 저도 좋은 활동지원사가 되고 싶은 바람을 다시 가질 수 있기를 간곡히 바랍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a935c9;">[필자 소개] 호미</span>. 장애활동지원사이며 동화 집필 노동자. 전국귀농운동본부 ‘귀농통문’ 편집위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장애활동서비스 이용인’ Moon을 돌보고 Moon으로부터 돌봄을 받으며 하루하루 연명합니다. 일하고 사랑하며, 투쟁하고 놀며 새로운 몸으로 되어갑니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4-27 21:28:00</pubDate>
	   <section>sc5</section>
	   <section_k><![CDATA[소수자 시선]]></section_k>
	   <section2><![CDATA[장애]]></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호미)]]></author>
	   <category><![CDATA[장애]]></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4/2026042733377211.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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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죽음 이후에 도착한 어느 이주 여성의 편지]]></title>
       <link>http://www.ildaro.com/10441</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당신과 저는 매우 슬픕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좀 더 나은 삶’을 찾아 한국으로 온 지 1개월 14일만에, 남편에게 ‘맞아 죽은’ 베트남 여성 후인 마이 씨가 살해당하기 하루 전날 남편에게 쓴 편지는 이렇게 시작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19세의 후인 마이 씨는 46세의 한국인 남성과 결혼해 2007년 5월 16일 한국에 도착했고 6월 26일 사망한다. 갈비뼈 18개가 부러졌고, 뇌사상태에 빠졌다. 시신은 8일만에 발견되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녀가 어느 지방 도시 반지하 단칸방에서 보낸 45일간의 한국 생활은 ‘유형지’의 삶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반지하 단칸방이라는 척박한 물리적 환경 때문이 아니다. 낯선 나라에 온 신부를 배려하기는커녕 화만 내는 남편과, 전혀 가닿을 수 없는 언어 때문이다. 고립된 채 언어 감옥에서 고통받던 그는 편지를, 다섯 페이지나 되는 긴 편지를 모국어인 베트남어로 썼다. 남편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가능한 한 다 담고자 하는 이 편지의 첫 문장이 ‘나’의 슬픔이 아닌 ‘당신과 나’의 슬픔을 말하고 있는 건 중요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당신은 아세요?</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저는 당신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당신은 왜 제가 한국말을 공부하러 못 가게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저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대화하고 싶어요. 당신을 잘 시중들기 위하여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무엇을 마시는지 알고 싶어요. 저는 당신이 일을 나가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것을 먹었는지, 건강은 어떤지 또 잠은 잘 잤는지 물어보고 싶어요. 제가 당신을 기뻐할 수 있게 만들 수 있도록, 당신이 저에게 많은 것들을 가르쳐주기를 바랐지만, 당신은 오히려 제가 당신을 고민하게 만들었다고 하네요. 저는 한국에 와서 당신과 저의 따뜻하고 행복한 삶, 행복한 대화, 삶 속에 어려운 일들을 만났을 때에 서로 믿고 의지하는 것을 희망해 왔지만, 당신은 사소한 일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화를 견딜 수 없어 하고, 그럴 때마다 이혼을 말하고, 당신처럼 행동하면 어느 누가 서로 편하게 속마음을 말할 수 있겠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후인 마이 씨는 편지에서 여러 번 “당신은 아세요?”라고 묻는다. 이해하고 싶고, 이해받고 싶은 마음의 절실함이 주도 동기처럼 반복된다. 그런데 이 질문의 ‘당신’은 누구일까. 편지가 수신인에게 도착하기 전에 편지를 쓴 사람이 바로 그 수신인에게 살해당한 이 사건에서 편지의 운명은 두 갈래로 나뉜다. 경로와 시간을 바꿔 다른 수신인에게 도달하거나, 영원히 수신인을 만나지 못하고 유령처럼 허공을 맴돌거나. 그런데 편지는 시신과 함께 발견되었고, 한국어로 번역되었다. 그렇게 편지는 ‘우리’에게 도달했고, “당신은 아세요?”라는 질문은 이제 ‘우리’를 향하고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당신은 아세요?</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제가 당신과 결혼하기 전에는 호찌민시에서 일을 했어요. 당신이 우리 집에 왔을 때 우리 집은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어요. 저는 가정을 위해서 일을 나가야 했고, 그 일은 매우 힘들었어요. (...) 베트남에서 그렇게 많은 일을 했어도 입을 것과 먹을 것만 겨우 충당할 수 있었지요. 그래서 제가 한국에 왔을 때에 더이상 바라는 것이 없었고, 단지 당신이 저를 이해해 주는 것만을 바랬을 뿐이에요. 저도 일을 해봤기 때문에 일을 어떻게 하고 또 그것이 힘들다는 것을 알아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19살이 되기까지 이미 힘겨운, 희망 없는 노동자의 삶을 다양하게 겪었던 그녀는 남편 역시 자신과 똑같이 희망 없는 고단한 하루하루를 사는 건설일용직 노동자였음을 알게 되었을 때, 오히려 역설적으로 거기서 희망을 보려 했다. 이해가 도우리라, 비슷한 삶의 경험을 공유하는 게 서로의 지지대가 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후인 마이 씨의 편지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당신과 나는 서로 다른 나라 사람이어서 내가 한국에 왔을 때 대화를 할 사람이 당신뿐이었는데... 누가 이렇게 될 것이라 생각할 수 있었겠어요. 정말로 하느님이 나에게 장난을 치는 것 같아요. 정말 더이상 무엇을 적을 것이 있고 말할 것이 있겠어요. 당신은 이 글씨 또한 무엇인지도 모르고 이해하지도 못할 것인데요.“</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2625213435.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이주여성은 국민남성 배우자에게 종속된 존재가 아니다.” 2023년 12월 11일, 국가인권위원회 정문 앞에서 열린 〈성·인종차별적 관점을 확산하고 차별적인 행위를 조장하는 국제결혼 지원조례 폐지 촉구〉 기자회견 중에서 참가자가 든 피켓.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경제대국, 문명국의 허울 속 우리 내면의 야만성 부끄러워’</span></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2008년 재판부의 판결문, 그리고 지금</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후인 마이 씨 살해 사건을 다룬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우리 사회의 ‘총체적인 미숙함과 야만성’에 부끄러움을 고백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노총각들의 결혼 대책으로 우리보다 경제적 여건이 높지 않을 수도 있는 타국 여성들을 마치 물건 수입하듯이 취급하고 있는 인성의 메마름. 언어 문제로 의사소통도 원활하지 못한 남녀를 그저 한집에 같이 살게 하는 것으로 결혼의 모든 과제가 완성되었다고 생각하는 무모함. 이러한 우리의 어리석음은 이 사건과 같은 비정한 파국의 씨앗을 필연적으로 품고 있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 우리는 21세기 경제대국, 문명국의 허울 속에 갇혀 있는 우리 내면의 야만성을 가슴 아프게 고백해야 한다. 혼인은 사랑의 결실로 소중히 보호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가치를 온전히 지켜낼 능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일까. [...] 19세 후인 마이의 편지는 오히려 더 어른스럽고 그래서 우리를 더욱 부끄럽게 한다. 이 사건이 피고인에 대한 징벌만으로 끝나서는 아니되리라는 소망을 해보는 것도 이러한 자기반성적 이유 때문이다.”(<a href="https://www.law.go.kr/LSW//precInfoP.do?precSeq=71041" target="_blank">대전고법 2008. 1. 23. 선고 2007노425 판결</a>)</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2007년에 일어난 사건을 거의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기억해야 할 이유를 이 판결문은 비교적 명료하게 말하고 있다. 1990년 말부터 민간 차원에서 시작해, 2000년 초중반부터 지자체의 지원 정책으로 채택된 국제결혼은 최근까지도 결혼중개업체를 매개로, ‘결혼 이후’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 추진되었다. (각 지방자치단체의 인권침해적 국제결혼 지원조례는 이주민/여성 단체들의 항의에 이어 국가인권위원회와 여성가족부의 권고로 2025년 상반기에 와서 대부분 폐지되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주민과 생활세계에서 함께 산 경력이 20년이 넘어도 여전히 ‘잡종’ 같은 혐오 용어를 부끄럼 없이 사용하는 정치인이 있고, 베트남 출신 이주여성에게 “그냥 야 아니면 베트남 아니면 월남, 이렇게 부르는” 사람이 있다.(한인정, 『어딘가에는 싸우는 이주여성이 있다』 44쪽) ‘다문화’는 여전히 당사자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국제결혼 가족의 고유명사로 쓰이고 있으며, 이주여성의 시민권 문제는 논외로 한 채 ‘한국의 며느리와 시어머니 사이’라면 더이상 가능하지 않을 고부간 갈등과 화해의 서사를 재현하고 전시하는 〈다문화 고부열전〉 같은 프로그램이 버젓이 교육방송에서 방영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한국에서 태어나 이제 스물여섯 살이 된 이주배경 청년 고예나는 자기보다 한국에 더 오래 산 엄마가 한국에는 자신의 자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에 놀라, ‘그렇다면 지금 살고 있는 한국 집은 무엇’이냐고 묻는다. 엄마는 “상처를 받은 공간”이라고, 하지만 자신의 선택이었고, 그 선택에 책임을 다했으니, 후회는 없다고 답한다. 그러나 딸의 생각은 다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사실은 이 일들은 개인의 선택이 아니다. {그녀 엄마의} 이주 결혼의 뒤에는 한국 정부와 통일교가 있었다. 잉여 남성 및 노인 부양과 기피되는 지방의 일자리를 채우기 위해서였다. 나는 엄마가 한국에서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할머니가 엄마를 ‘한국인 며느리’처럼 대했더라면, 아빠가 엄마에게 더 살가웠더라면, 시골과 도시의 접근성이 더 좋았더라면, 사회가 가사 노동과 농사의 가치를 알아줬더라면, 결혼이주여성을 존중했더라면, 엄마는 상처받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고예나, 『우리는 언제나 타지에 있다』 93-94쪽)</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증언: 사후에 도착한 후인 마이 씨의 편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다시 후인 마이 씨의 죽음과 그녀가 남긴 편지로 돌아가 보자. 그녀는 죽었고, 그녀가 쓴 편지는 ‘살아남았다’. ‘사후적 증언’으로 (한국어로 번역되어) 이 편지는 도착했거나, 여전히 도착하지 못한 채 유령으로 떠돌고 있으며, 이 편지에 대해 우리는 수신인이거나 아니다. 우리가 수신인이라면 그녀(의 삶)보다 더 오래 살고 있는 이 편지는 우리에게 무엇을 증언하는 걸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증언한다는 것은, 자신의 고유한 언어를 잃어버린 사람의 입장에서 그러한 언어 속에 자신을 두는 것이라고, 살아있는 언어가 마치 죽은 언어라도 되는 양 또는 죽은 언어가 마치 살아있는 언어라도 되는 양 그러한 언어 속에 (...) 자신의 자리를 잡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조르조 아감벤,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 237쪽)</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아우슈비츠’의 증인과 증언을 언어화할 수 있는 윤리/학을 탐색하며 아감벤은 이렇게 말한다. 배제됨으로써 포함되는 ‘헐벗은 삶’은 특정 역사적 시기 혹은 특정 수용소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지구 곳곳으로부터 헐벗은 삶, 살만하지 않은 삶, 애도 받지 못하는 삶의 이야기가 (종종 사후에) 도착하지 않는가.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이제 아우슈비츠에 부여된 역사적 ‘고유성’에 대해서조차 강력한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읽는 후인 마이의 편지는 아감벤이 말한 저 증언의 형식을 곱씹게 만든다. 그녀는 자신의 고유한 언어도, 한국어도 ‘가지지 못한’ 채 한국에서 살만하지 않은 삶을 살았고, 이 삶이 폭력적으로 중단되었을 때, 그 빼앗긴, 가질 수 없었던 언어 속에 자신의 자리를 잡게 되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살아있는 언어가 마치 죽은 언어라도 되는 양 또는 죽은 언어가 마치 살아있는 언어라도 되는 양.” 그런 언어 속에 자리를 잡은 이 (죽은) 여성은 무엇을 증언하는 것일까? 모국어인 베트남어와 번역어인 한국어 사이에서 계속 흔들리며 자기 자리를 모색하는 후인 마이 씨는 지금도 “당신은 아세요?”라고 묻고 있다. “당신은 이 글씨 또한 무엇인지도 모르고 이해하지도 못할 것인데요.”라는 그녀의 슬픈 탄식과 절망은 그 이면의 인간 논리를 역설한다. 언어를 가지고 사는 당신들, 인간이라면 알고 이해해야 하지 않는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아우슈비츠 ‘생존자들’은 ‘부끄러움’에 대해 말하곤 한다. 결국 자살함으로써 생존의 불/가능성을 계속 질문하게 만든 프리모 레비는 여러 번 부끄러움의 주제로 되돌아간다. 그는 이미 죽음이 죽음이기 어렵고 살아있다고 해서 삶을 산다고 말하기 어려운 수용소의 수인들에게 부끄러움이 익숙했다고 말한다. ‘그와 같은 범죄가 존재하며, 그것이 결국 기존의 세계에 들어와 버렸다는 사실’ 앞에서 경험하는 부끄러움, 구체적이고 무거운 부끄러움.(프리모 레비,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중 특히 3장 “수치”)</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사후에 도착한 후인 마이 씨의 편지를 받아 들고, 지금도 멈추지 않는 억울한 죽음들 앞에서, 우리는 ‘부끄럽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결국 들어와 버렸다는 것. 내가 ‘나’로 생각하고 말하고 이해하는 인간으로 산다고 믿고 있는 이곳에 들어와 버렸다는 것‘에 대한 수치심에 얼굴이 화끈거린다고 고백해야 한다. 그 고백 속에서 수신인은 증인으로의 변신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생명정치로 추진된 국제결혼이 이방인 여성들을 계속 죽게 내버려둔다면, 살만하지 않은 삶을 강요한다면, 삶도 아니고 죽음도 아닌 ‘그저 살아남음’만을 허용한다면, 그에 대해 알아야 하고, 증인이 되어야 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b637c7;">[필자 소개] 김영옥</span>. 페미니스트 여성으로 늙어가고 있다. 교차성의 관점에서 노년기 말년성에 대해 질문하고 감각하고 쓰고 지우고 또 다시 쓰고 있다. ‘죽음은 무엇인가’가 아니라, ‘죽음에 대한 사유는 무엇을 하는가’에 관심이 있다. 이번 연재에서 죽음에 대한 사유는 명사적 죽음의 보편성과 동사적 죽음 경험의 특이성을 교차적으로 탐색하면서, 삶의 여러 국면을 고유한 문장으로 새롭게 낯설게 만나게 하리라 기대한다. 『늙어감을 사랑하게 된 사람들』, 『흰머리 휘날리며, 예순 이후 페미니즘』 단독 저서와 『돌봄의 얼굴』, 『돌봄의 상상력』, 『돌봄과 인권』,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 등 다수의 공저가 있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4-26 19:23:00</pubDate>
	   <section>sc4</section>
	   <section_k><![CDATA[국경너머]]></section_k>
	   <section2><![CDATA[이주]]></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김영옥)]]></author>
	   <category><![CDATA[이주]]></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4/2026042628266218.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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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평등법에 ‘종교 예외 조항’이 들어가는 게 정당한가?]]></title>
       <link>http://www.ildaro.com/10440</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포괄적 차별금지법’(평등법) 제정이 20여 년간이나 지연되어 왔기에, 한국 사회의 핵심 인권 과제로 꼽힌다. 수 차례의 법안이 발의되었고 유엔(UN)이 14차례나 제정을 권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그 원인 중 하나는 일부 보수 개신교계의 강력한 반대 운동과 로비이다. 이 세력이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이유는 여럿이지만 대체로 소수자 혐오, 특히 성소수자 혐오와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평등법이 제정되면 ‘동성애 반대’ 설교를 하는 목회자가 처벌받는 등 종교의 자유가 심각하게 침해될 거라는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러한 갈등의 돌파구로 2020년 말, 정치권에서는 ‘종교 예외 조항’이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이미 차별금지법을 시행 중인 서구 국가들처럼 종교단체의 자율성을 보호하는 면책 조항을 두자는 취지였다. 과연 종교 예외 조항이 ‘평등권’과 ‘종교의 자유’가 충돌하는 우리 사회의 딜레마를 해결할 열쇠가 될 수 있을까?</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2536088566.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26년 4월 8일, 기독여민회, 믿는페미, ‘차별과 혐오 없는 평등세상을 바라는 그리스도인 네트워크’, 차별금지법제정연대, 차별너머, ‘한국 교회를 향한 퀴어한 질문 큐앤에이’ 공동 주관으로 〈무지개빛 논문 발표회〉가 열렸다. 장예정 차별금지법제정연대 상임집행위원장이 「차별금지법상 종교 예외에 관한 연구」를 발표했다. (출처: 무지개빛논문발표회 기획단)</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이에 대해 장예정 차별금지법제정연대 상임집행위원장은 자신의 석사 논문(숙명여대 대학원)인 〈차별금지법상 종교 예외에 관한 연구〉 내용을 발표했다. 지난 8일 416연대 공간에서 “무지개빛 논문 발표회” 첫 강으로 진행되었으며, ‘종교 예외 조항’의 실체와 해외 입법례, 그리고 한국 사회에 주는 시사점을 분석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종교 예외 조항’ 등장-평등법과 종교의 자유 사이</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2020년 12월, 21대 국회에서 평등법 발의를 준비하던 더불어민주당 이상민 의원안에 ‘종교 예외 조항’이 포함된다는 소식이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해당 초안은 ‘사회 상규에 반하지 않는 특정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의 집회, 단체 또는 그 소속 기관이 교리, 신조, 신앙에 따라 행하는 종교의 본질적 내용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행위를 차별의 예외로 본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는 차별금지법 반대 여론을 주도하는 보수 개신교계를 설득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풀이되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러나 이 조항은 예상치 못한 반발에 부딪혔다. 조계종, 천태종 등 30여 개 불교 종단이 연합한 한국불교종단협의회가 즉각 반대 성명을 발표했고, 원불교 인권위원회 역시 반대 입장을 밝혔다. 불교계는 “특정 종교의 이익을 위한 법안 발의를 중단하고, 만인이 평등하고 차별 없는 법의 제정”을 촉구했다. 다종교 사회인 한국에서 특정 종교계 요구를 반영한 ‘예외 조항’이 오히려 다른 종교계의 반발을 촉발한 것이다. 결국 이상민 의원은 해당 조항을 삭제한 채 평등법을 발의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장예정 활동가는 “이 사건은 한국 사회에 ‘종교 예외 조항’의 의미와 허용 범위에 대한 본격적인 질문을 던졌다”며, 이를 이해하기 위해 세 가지 개념 구분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종교 예외 조항</span><span class="bold"> (Religious Exemption)</span>: 종교단체가 교리·신조·신앙에 따른 행위를 하는 경우, 차별금지법 적용을 면제하는 규정. 국내법에선 명문화된 바 없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 </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333333;">진정 직업 자격</span><span class="bold" style="color: #333333;"> (GOR)</span>: 직무 수행의 특성상 불가피하게 특정 자격(예: 성별, 종교 등)이 요구되는 경우, 이를 차별로 보지 않는 일반적인 예외 조항. 목회자 채용 등이 여기 속하며, 이미 한국의 현행 개별 차별금지법이나 발의된 평등법안들에도 포함되어 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2537341894.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진정 직업 자격’이란 직무 수행의 특성상 불가피하게 특정 자격(예: 성별, 종교 등)이 요구되는 경우, 이를 차별로 보지 않는 일반적인 예외 조항이다. 목회자 채용 등이 여기에 속하며, 이미 한국의 현행 개별 차별금지법이나 발의된 평등법안들에도 포함되어 있다. 출처: 차별금지법제정연대 [카드뉴스 – 차별의 예외 조항을 살펴봅시다] <a href="https://equalityact.kr" target="_blank">https://equalityact.kr</a></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span><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 color: #333333;">성직자 예외 법리 (Ministerial Exception)</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 종교기관의 ‘성직자’ 고용 및 해고 시 광범위하게 자율성을 인정하는 헌법적 원칙. 주로 미국 연방대법원 판례로 정립된 법리이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해외는 어떻게? 미국과 유럽의 다른 행보-면책이냐, 조정이냐</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차별금지법을 시행한 국가들은 역사적, 헌법적 맥락에 따라 종교의 자유와 평등권을 조율하는 서로 다른 방식을 취하고 있다. 장예정 활동가는 해외 사례를 통해 두 가지 모델을 분석했다. 미국의 ‘강력한 헌법적 면책 모델’과 유럽연합(EU)의 ‘비례적 조정 모델’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미국은 1964년 민권법을 통해 종교단체의 고용에서 종교적 차별을 허용하는 최초의 명문 예외 규정을 두었다. 장 활동가는 “미국 법원의 해석 경향은 종교기관의 자율성을 가장 폭넓게 보장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고 말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몰몬 교회가 운영하는 비영리 체육관에서 일하던 엔지니어 겸 건물 관리인이 주일예배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해고된 ‘아모스 사건’(1987년)이 대표적이다. 그의 업무는 종교적 성격과 무관했지만, 연방대법원은 종교단체가 운영하는 비종교적, 세속적 활동의 고용에 대해서도 종교 예외 조항이 적용된다며 교회의 손을 들어줬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2010년 비영리 국제구호단체인 월드비전에서 종교적 신앙고백에 동의하지 않은 직원을 해고한 ‘스펜서 사건’ 역시 합법으로 인정됐다. 2012년 ‘호산나-타보르 사건’은 일반 교사에게까지 ‘성직자 예외 법리’를 넓게 적용하여 논란이 됐다. 법원이 교회의 손을 들어주자, 종교단체가 부당 해고를 정당화하기 위해 모든 직원을 ‘성직자’로 분류하려 할 수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반면, 유럽연합은 종교의 예외를 특권으로 보지 않고 평등권과의 ‘비례적 조화’를 중시한다고 장예정 활동가는 설명했다. 유럽연합의 고용평등지침은 해당 직무의 성격상, 종교가 ‘진정하고 결정적인 직업 요건’인 경우에 한해서만 엄격하게 예외를 허용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독일의 가톨릭 병원에서 이혼 후 교회의 무효 결정 없이 재혼한 의사를 해고한 ‘IR 사건’에 대해 법원이 ‘해고는 무효’라며 의사의 손을 들어준 사례가 대표적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또, 개신교 사회봉사단체가 인권보고서 작성 직무 지원자에게 기독교 신앙을 요구한 ‘Egenberger 사건’에서도 유럽사법재판소(CJEU)는 인권보고서를 작성하는 데 특정 종교 신앙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며 종교단체의 패소를 결정했다. 유럽사법재판소는 “종교단체의 자체적 판단만으로 차별이 정당화될 수 없으며, 해당 요건이 직무 수행에 객관적이고 실질적으로 필수적인지 법원이 엄격히 비례성을 심사해야 한다”고 판시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2538447792.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무지개빛 논문 발표회〉 첫 강으로 열린 &lt;차별금지법상 종교 예외에 관한 연구&gt; 발표회 홍보물 일부.</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캐나다와 호주 사례-공공 서비스와 교육 영역으로 번진 갈등</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장 활동가는 “종교 예외 조항의 쟁점은 ‘고용’의 문제를 넘어, 종교단체가 제공하는 ‘공공 서비스와 교육’의 영역에서 누구를 배제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논란으로 확장되고 있다”고 밝혔다. </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캐나다에서는 혼외 및 동성 간 성관계를 금지하는 ‘커뮤니티 서약’을 의무화한 로스쿨 설립을 추진한 기독교계 사립대학에 대해, 변호사회가 로스쿨 인가를 거부했다. 이 서약이 성소수자 학생을 차별하고, 법조계의 평등성과 다양성을 해친다는 것이 이유다. 이후 대법원도 변호사회의 손을 들어주었다. 종립대학의 신앙 실천보다 소수자 학생의 평등한 접근성과 사회적 공익 보호가 더 우위에 있다고 판결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호주는 연방법이 아닌 주마다 다른 평등법을 시행하고 있어 판결이 엇갈린다. 가령 기독교계 복지기관이 위탁 양육부모로 신청한 동성커플을 거부한 ‘OV &amp; OW 사건’에서, 법원은 ‘종교적 신념을 바탕으로 실행하는 기관의 활동 전반에 예외가 적용된다’며 기관 승소 판결을 했다. 반면, 개신교 단체가 운영하는 청소년 캠프장이 성소수자 단체의 대관을 거부한 ‘CYC 사건’에서는 법원이 ‘대관 업무는 상업적, 공공적 성격이 강하므로 종교의 자유를 이유로 차별을 정당화할 수 없다’고 판단해 불법으로 규정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장예정 활동가는 “이처럼 폭넓은 예외 조항은 같은 나라 안에서도 서비스 대상자를 혐오와 배제에 노출시키는 ‘자의적인 차별 허가증’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고 비판적으로 진단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2539125142.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25년 11월, 차별과 혐오 없는 평등세상을 바라는 그리스도인 네트워크(평등세상)와 차별금지법제정연대가 발간한 〈차별금지법이 궁금한 당신에게 – 기독교인을 위한 차별금지법 안내서〉 PDF 보기: <a href="https://equalityact.kr/christian-equalityact-pdf" target="_blank">https://equalityact.kr/christian-equalityact-pdf</a></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평등법에 ‘종교 예외 조항’은 위험…‘진정 직업 자격’으로 충분해</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장 활동가는 무엇보다 “해외 입법례를 단순히 한국에 직수입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경계했다. 한국은 특정 종교가 절대적 다수를 점하지 않고 비종교인이 절반가량을 차지하는 동시에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는 세계적으로도 드문 ‘다종교 사회’이며, “서구의 종교 예외 조항이 국교의 전통과 단일한 기독교적 역사 속에서 기득권을 조율하기 위해 탄생한 맥락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특히 종합사회복지관 등 복지시설의 약 75%를 종교법인이 국가의 세금과 보조금을 받아 위탁 운영하고 있는 국내 현실에서, 종교기관에 대한 광범위한 예외를 허용할 경우 “공공복지와 교육 영역에서의 차별이 정당화”될 우려가 있다고 강조했다. “국가 재정이 투입되는 공적 시설에서 채용 조건으로 특정 종교를 강요하거나, 성소수자 및 타 종교인에 대한 서비스 제공을 거부하는 실질적인 차별 행위가 합법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오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장예정 활동가는 “이미 종립대학이 학내 페미니즘 단체나 성소수자 관련 강연의 대관을 불허하고, 종교계 복지시설에서 노동자에게 종교 행위를 강요하는 일들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종교 예외 조항의 신설은 이들에 대한 인권 구제의 통로마저 막아버리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어 종교단체의 핵심적인 자율성은 이미 ‘진정 직업 자격(GOR)’ 조항으로 충분히 보호된다고 설명했다. “종교단체가 그 본연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권리(예: 목회자 및 사제 채용 시 자율성 보장)는 굳이 위험천만한 별도의 ‘종교 예외 조항’을 신설하지 않아도 보호받을 수 있다. 이미 21대, 22대 국회에 발의된 평등법안들에는 직무 수행상 불가피한 경우 예외를 인정하는 일반적인 ‘진정 직업 자격(GOR)’ 조항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장 활동가는 “종교의 자유가 타인의 기본권을 짓밟는 핑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일부 보수 교계의 과도한 우려를 달래기 위해 공적 영역에서의 차별을 합법화할 위험을 안고 갈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또한 “지금 한국 사회에 가장 시급한 과제는 예외를 넓히는 꼼수를 찾는 것이 아니라, ‘공적 영역에서 정당한 이유 없는 차별은 결코 용인될 수 없다’는 보편적 원칙을 천명하는 온전한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제정”이라고 주장했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4-25 09:32:00</pubDate>
	   <section>sc1</section>
	   <section_k><![CDATA[사회]]></section_k>
	   <section2><![CDATA[]]></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박주연)]]></author>
	   <category><![CDATA[사회]]></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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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의자 없는 하루’를 생각해 본 적 있나요?]]></title>
       <link>http://www.ildaro.com/10439</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어떤 커피로 하시겠어요? 산미 있는 커피? 고소한 커피?”</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산미 있는 커피요. 감사합니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드시면서 화면에 보이는 큐알코드로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에 접속해 주세요.”</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2353239511.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에서 공연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 제80조에 의거한 서비스직 근로자의 안전 관리 매뉴얼 만들기〉 시작 전, 류소연 배우가 관객들에게 내려준 따뜻한 드립 커피 한 잔을 마셨다. (사진: 전솔비)</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공연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 제80조에 의거한 서비스직 근로자의 안전 관리 매뉴얼 만들기〉를 보러 극장에 들어서자마자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커피 드실래요?” 이 커피 한 잔이 공연 표 값에 포함된 것인지, 혹은 배우와 관객 간에 오가는 선물인 것인지 궁금해하며 따뜻한 커피를 받아 든다. 나는 객석의 맨 왼쪽 끝 열, 앞에서 두 번째 줄 의자에 앉는다. 극장 안에는 카페 브금이 흘러나오고 있고 무대 한복판에 있는 테이블 위에는 커피 내리는 도구들이 놓여있다. 주위를 둘러보자, 자리에 앉은 관객들이 하나 둘 커피를 마시면서 오픈채팅방에 접속하는 모습이 보인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공연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음료와 휴대폰은 자제해야 하는 극장의 기본적인 규칙이 깨지자, 이렇게 모여 앉아 있다는 것만으로 약간은 느슨해진 극장의 공기가 퍼져나간다. 이 다정한 극장은 분명 바깥 세계를 향해 반쯤 문을 열어두고 있다. 무대 위에서 바리스타 복장을 한 채로 커피를 내리고 있는 저 사람이 이 공연을 이끌어갈 사람일 것이다. 그의 앞 주머니에 삐죽 튀어나온 종이 뭉치가 눈에 띈다. 아마 대본일 것으로 추측했고, 예상대로 그는 공연이 시작되자마자 그 종이 뭉치를 꺼내 들며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누군가는 배우가 어떻게 대사를 외우지 않고 공연을 하냐고 의아함을 가질 수도 있겠다. 공연 소개 글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 공연은 1인 다큐멘터리 퍼포먼스라고 소개되어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다큐멘터리 퍼포먼스, 혹은 다큐멘터리 연극은 실제 자료와 현실을 기반으로 동시대의 사회적 문제들을 다루는 공연예술이다. 배우와 관객, 무대와 현실 사이의 경계에 대해 질문하고 그래서 배우가 자신의 이야기를 극 중 자신의 역할에 이입하는 방식이 자주 등장한다. 무대 바깥에서 살아온 배우 자신의 삶이 무대 안으로 끊김 없이 들어오는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렇다면 류소연이라는 배우는 현실을 끌어온 무대 위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가?</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공연에서 소개한 그의 설명에 따르면, 그는 공연예술에 종사하는 배우일 뿐만 아니라, 카페에서 일하는 노동자이자, 30대 후반의 청년이며, 여성이자, 책방을 운영한 적 있고, 공연 이외에도 디자인 등 다양한 일을 하는 예술가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 공연에서 그는 바리스타 복장으로 커피를 내리며 카페에서 일하던 모습을 미처 다 지우지 않는다. 그리고 공연의 순서를 다 외우지 않은 채로 슬쩍슬쩍 대본을 보며 마치 연습이 다 끝나지 않은 배우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렇게 완전한 노동자도 완전한 예술가도 아닌 채로, 아니 불완전하기에 자신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복합적인 모습 그대로 그가 말문을 연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노동자이자 예술가의 정체성으로 그가 ‘말’의 문을 연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제가 만든 커피 드실래요? 그리고 제가 만든 이야기 한번 들어보실래요?</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2354005463.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 제80조에 의거한 서비스직 근로자의 안전 관리 매뉴얼 만들기〉 공연 포스터. 류소연 작가의 1인 다큐멘터리 퍼포먼스(2026)로, 지난 4월 9일~19일 진행된 ‘2026 안전연극제: 면역력’ 상연 작이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정말로 이상한 것, 누구에게는 당연한 것-</span></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근무 시간 내내 서 있기</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내가 대형 브랜드 카페에서 일하면서 만난 노동자들에게, 일하다 앉을 수 없는 환경은 당연한 것이었다. 소비자본주의 산업을 지탱하는 서비스 노동의 현실은 ‘안전’의 질문에서 누락되곤 한다. 노동이 유발하는 통증은 안전과 무관한가? 서비스 노동에서 통증은 참고 감내해야 할 개인의 정신력과 숙련의 문제인가? 하지정맥류는 산업재해의 질병 목록에서 비껴가는가? 산업안전보건법을 뒤져보며 나는 의자의 비치에 관한 규칙을 찾아냈다. 현장에서 지켜지지 않는 이 한 줄의 규칙을 보며 나는 1970년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세상을 떠난 한 사람을 떠올렸다. 그 사람의 편지 한 통을 나는 동료들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공연 소개 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무대 위에서 예술가 류소연은 노동자 류소연으로서 그간 자신이 겪어온 여러 임금노동 경험을 들려준다. 그 이야기들은 최저시급도 받지 못했거나, 제때 월급을 받지 못할까 봐 전전긍긍했거나, 나이가 많아지면서 일을 구하기 어려워 난처했거나, 그래서 불합리한 조건에 대해 말하기 어려웠던 기억에 관한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어서 그는 최근 자신이 일하던 어떤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의 업무 강도가 놀랄 정도로 세서 도저히 버틸 수 없어 3일 만에 그만둔 일화를 고백한다. 카페에서 일한 경험도 많고 바리스타 경험이 꽤 쌓인 그가 ‘3일 만에’ 일을 그만둘 정도로 힘들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놀랍게도 그곳에서 그는 업무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앉을 시간도 없었고 앉을 공간도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카페에서 같이 일했던 동료들에게는 ‘근무 시간 내내 서 있는 일’이 당연한 일상이었다는 사실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대부분의 대형 브랜드 카페의 근무 환경이 그러했다. 의자가 없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노동 환경, 일하는 동안 한 번도 앉아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노동 환경, 일하는 동안 계속 서서 다리의 통증을 참아야 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노동 환경이 ‘정말로 이상하지 않냐고’ 그는 묻는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제9장 제80조에 명시된 ‘의자의 비치에 관한 규칙’</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 제9장 제80조에는 분명히 의자의 비치에 관한 지침이 명시되어 있다. 배우는 관객들에게 의자에 관한 규칙을 소리 내어 읽어준다. 하지만, 처벌 규정이나 강제성이 없기에 줄곧 무시되는, 있으나마나 한 규칙이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2354235017.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 제9장 휴게시설 등을 정리한 제80조에는 ‘의자의 비치’에 관한 조항이 적혀있다. (출처: 국가법령정보센터)</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노동 환경을 보호하는 관련 법령에는 ‘의자’라는 단어가 존재하지만, 실제 현실의 노동 환경에는 ‘의자’라는 사물이 존재하지 않는 모순에 쓴 웃음을 지으며 배우는 관객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한다. 공연을 시작하며 접속했던 카카오톡 채팅방에서 다 같이 서비스직 근로자의 안전관리 매뉴얼을 만들어보자는 것이다.(이 지점에서 배우는 ‘근로자’에 지움 표시를 하고 ‘노동자’로 다시 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존재하지만 지켜지지 않는 규칙을 가만히 바라만 볼 것이 아니라, 함께 구체적인 매뉴얼을 만들어보자는 이 제안은 공연에 그림자처럼 존재하는 한 통의 편지에 대한 응답이기도 하다. 공연의 어느 지점에서 류소연 배우는 전태일 열사가 대통령 박정희에게 노동 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썼던 편지를 읽는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근로기준법이란 우리나라의 법인 것을 잘 압니다. 우리들의 현실에 적당하게 만든 것이 곧 우리 법입니다. 잘 맞지 않을 때에는 맞게 입히려고 노력을 하여야 옳은 것으로 생각합니다.”(전태일의 편지 중에서)</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존재하지만 지켜지지 않던 근로기준법을 준수하길, 현실에 맞게 개선하길 요구했던 그 편지는 여전히 지금도 소리 내 읽을 가치가 있다. 여전히 하루 종일 서서 일하는 것이 당연한 세상이 남아 있고, 법에 적혀있는 ‘앉을 권리’가 노동 현장에서는 지켜지지 않고 있다. 의자가 있어야 할 곳에 의자가 없기에, 전태일의 편지는 아직도 빛 바래지 않은 채 계속해서 다시 읽힐 수밖에 없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관객들과 함께 만드는 안전 관리 매뉴얼</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채팅방에서는 다양한 의견들을 읽을 수 있었다. 형태적으로는 등받이가 있는 편안한 소파 같은 의자, 혹은 앉아서 일과 휴식을 모두 다 할 수 있는 높은 의자를 제안하는 사람도 있었다. 조건을 고려할 때 누군가는 의자가 손님과 분리된 공간에 있으면 좋겠고, 혹은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에 의자가 있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나도 떠오르는 생각을 적었다. 일단 직원 수만큼의 의자가, 그리고 자기 의자가 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떠올렸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 순간, 왜인지 공지영 작가의 책 『의자놀이』가 떠올랐다. 쉼의 공간조차 경쟁이 되는 사회여서는 안 된다. 최소한으로만 보장되는 쉼의 자리 말고, 너와 내가 앉고도 조금 더 자리가 넉넉하게 지켜지는 여유가 필요하다. 남는 의자에 잠시 다리를 올릴 수도 있는 그런 영역까지 상상할 수 있는 사회라면 정말 살만하지 않을까. </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리고 ‘자기 의자’라는 말은 어딘가 귀엽지 않은가. 기억 속에서 고등학교 때까지 교실에는 늘 모두에게 자기만의 의자가 있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우리가 함께 만든 안전 관리 매뉴얼이 지켜지려면, ‘안전’을 말하는 방식을 국가나 대기업의 입에서 나오는 투자나 효율성의 가치 중심으로부터 이탈시켜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극도의 ‘효율성’을 추구하기에 카페 업주, 혹은 고용주는 노동자가 시간 대비 더 많은 노동을 하게 하려고 효율적인 동선을 짠다. 좁은 공간에서 최대한 빠르게 이동해야 하는데 의자가 있으면 그만큼 시간이 지체되기 때문에 놓지 않는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효율적인 동선을 추구하는 노동 환경에서 의자는 안전하지 않은 물건이 된다. 빠르게 움직이다가 의자에 걸려 신체 일부가 부딪히거나 넘어지는 등 다칠 수 있다. ‘다치지 않고 일해야 하는’ 노동자의 안전을 위해 의자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는 ‘효율적으로 일해야 하는’ 기업가치의 안전을 위해 의자를 놓을 수 없다는 목소리와 충돌하고 있는 현실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한편, 오늘날 점차 늘어나고 있는 로봇 카페는 의자 없이도 ‘안전하게’ 커피를 만들고 효율성을 만들어내는 노동력을 등장시키고 있다. 로봇 카페에서 로봇은 정확히 필요한 움직임만 수행하며 최적의 동선으로 커피를 주문 받고 생산한다. 공연에서 류소연 배우는 자신이 직접 로봇 카페에서 촬영한 커피 만드는 로봇의 모습을 영상으로 보여주었다. 영상을 보면 로봇은 한 번도 의자에 앉지 않고 내내 서서 일하지만, 인간처럼 하지정맥류 통증을 호소하지 않는다. 의자가 필요 없는 로봇 노동의 효율성에 맞춰진 기준에 따라, 앞으로 인간은 더 많은 노동을 포기하거나 혹은 노동의 자리를 얻기 위해 통증을 참아야 할지도 모른다. 인간과 로봇을 경쟁하게 하며 안전이나 건강, 보호의 권리를 개인이 포기하게 하는 사회가 과연 괜찮을지, 정말로 이상하지 않은지 우리는 계속해서 질문해야 한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2355207818.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공연을 끝내며 류소연 배우는 민중가요 〈세상에 지지 말아요〉(지민주)를 관객들과 함께 불렀다. (사진: 전솔비)</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커피 한 잔 뒤에 남겨진 긴 이야기-</span></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관객 혹은 손님 혹은 시민의 자리에서</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안전연극제는 2014년부터 세월호 연극제를 지속해 온 혜화동 1번지 동인들이 이어가고 있는 기획이다. 2024년의 주제가 ‘계속-계속-계속 말하기’였다면, 2025년에는 ‘불완전’이었고, 올해의 주제는 ‘면역력’이다. 2026 안전연극제는 ‘면역력’이라는 단어를 통해 ‘안전’이라는 단어를 지우고 다시 쓴다. 사고가 난 후에 포착하는 ‘안전’이 아니라, ‘안전’을 다양한 감각 속에서 점검하여 예견된 참사를 막자고. 제도에 존재하지만 지켜지고 있지 않은 ‘앉을 권리’. 앉지 못하는 통증을 작은 문제로 치부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하자고 제안하는 좋은 작품들이 공연되고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 공연에서 류소연 배우는 자신이 대형 브랜드 카페에서 3일밖에 일하지 않았고, 그것으로 이 연극을 만들었다고 조금은 겸연쩍어하는 모습을 보인다. 대형 브랜드 카페에서 일하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지가 없는 노동자들과 자신을 비교한 것일 수도 있고, 오랫동안 경험과 관계를 쌓지 않은 소재로 예술 작업을 했다는 것에서 오는 부끄러움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되는가? 3일밖에 일하지 않은 그가 만든 이 연극은 앞으로 얼마간은 내가 어떤 카페에 가든 카페 노동자가 서 있는지 앉아 있는지, 그에게 앉을 의자가 있는지 유심히 보게 해줄 것이다. 가끔은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만들어 주셔도 된다고, 말 한마디라도 건넬지 모른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 흥미로운 공연은 나에게 단지 선한 시민의식에 관한 교육적 효과보다는, 현실이 무대로 끊김 없이 이어진 장소에서 언젠가 상상 또한 현실로 끊김 없이 흘러갈지도 모른다는 감각적 깨달음을 남긴다. 그건 아마 배우 류소연이 예술가이자 노동자로서 자신이 만들 수 있는 이야기를 건네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서비스직 노동자의 모습이 조금 묻은 채로 커피를 내려주고, 공연 시간 내내 앉지 않고, 서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한결같이 열정적인 배우의 모습으로 다정한 눈빛을 보내곤 했다. 커피를 마신 관객들은 현실을 향해 열린 극장 안에 앉아, 마치 어떤 서비스를 제공받은 기묘한 감각 속에서 공연을 본 경험이 어떤 의미일지 계속해서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그가 건네준 커피 한 잔은 따뜻하고 맛있었지만, 커피 한 잔 뒤에 남겨진 긴 이야기는 쉽게 일상으로 삼켜지지 않을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cc23db;">[필자 소개] 전솔비</span>. 시각문화 연구자. 독립기획자. 정체성과 수행성의 문제를 연구하며 전시와 책을 만들어왔다. 동시대 현장에서 생산되는 이미지의 정치성과 예술적 실천을 탐구하며 예술가, 연구자, 활동가 동료들과 여러 협업을 이어가고 있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4-23 12:50:00</pubDate>
	   <section>sc2</section>
	   <section_k><![CDATA[노동]]></section_k>
	   <section2><![CDATA[]]></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전솔비)]]></author>
	   <category><![CDATA[노동]]></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4/2026042358181085.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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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What Would “Family” Mean to a Woman Who Is Someone’s Aunt and Mother?]]></title>
       <link>http://www.ildaro.com/10438</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Family is a symbol of love and comfort, but 53.8% of Korean families are abusive. Even so, domestic violence is widely considered ‘someone else’s business’ or ‘family matters that should not be meddled with.’ We at Ilda would like to explore the fundamental solutions to domestic violence. The ‘Yes, this is a big deal’ series will run as part of the ‘May, Month of Peace Free of Domestic Violence’ campaign by Korea Women’s Hot Line. The writer of this article, Kim-Hong Miri, is a member of Korea Women’s Hot Line (<a href="http://hotline.or.kr/eng" target="_blank">http://hotline.or.kr/eng</a>).</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errible things that happen in the name of family</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On April 5, 2016, I read an article about a woman who gave birth to a child, whom she then killed. It turned out she had been repeatedly raped by her brother-in-law since she was 19 years old, and the child was conceived due to rape. She had not sought help because she felt that reporting what her brother-in-law did to her would betray the best interests of her sick sister, niece and nephews, whom she had to look after. Now, what then would family mean to this woman, who is someone’s sister, aunt, sister-in-law and mother?</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 also read an article about a man who coerced his wife into meeting him during their separation period and battered her after locking her up in his basement storage (March 28, 2015). The bait he used was the child visitation rights. Children are the number one weapon husbands love to use against wives trying to escape from domestic violence. Laws painstakingly safeguard the rights of men, who are seen as fathers before they are seen as perpetrators of domestic violence. Domestic violence is not given much consideration in the face of the law’s stubborn eagerness “to preserve the family.” Thanks to this potent obsession with preserving family, there is never a shortage of women murdered by their husbands during divorce proceeding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n December 2015, a man was able to lure and murder both his wife and child by using the excuse of visitation rights. With these dying victims in mind, one question begs to be asked: what really is this “family” that laws try so hard to preserve? And what would “family” mean to this man who would rather die with or kill than to lose them?</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is past March, a man murdered his wife and daughter, and then killed himself. Last October, a 50-year-old man murdered his wife, who was battling the last stage of cancer, and his daughter, who was attending a specialized high school for gifted students. Tragedies like these have never stopped happening. The story of a man [of Korean descent] who shot his wife and two children in LA 10 years ago because of financial strife, and the daughter who survived this attack, was brought back to us by an LA Times article this past April. What would ‘family’ mean to the surviving daughter?</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2255213831.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We Don’t Need Such Families”: A campaign by the Korea Women’s Hotline that asserts there is no place for relationships that inflict blame, control, discrimination, and violence while justifying suffering in the name of “family.” It challenges the conventional notion of the “normal family” and works to spread the recognition that violent patriarchal hierarchies must not be tolerated.</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 font-weight: bold;"><br />What does family mean to you?</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We often neglect to mention whose family we are discussing when we define family, as if we assume family is the same for everyone or believe that it should be. However, family is also a concrete space in which powers are at play. Because of this, the meaning of family significantly differs, depending on the position of each person. This is why it’s important to ask whose family we are trying to defin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s we neglect to ask ‘whose family,’ eliminate the context of life, discuss family and emphasize its value, family becomes increasingly taxidermied. Innumerable people seek space to rest in and depend on; some may say that space is ‘family’ without a question. Nevertheless, in a society that provides countless rules to answer the question of ‘how to live and with whom,’ ‘family’ gives comfort only to certain groups of people who meet certain conditions. </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Comfort may find its way to the man raping his sister-in-law who cannot fight him, or the man regularly beating his wife who chose to endure rather than resist violence. Yet, for the sister-in-law and the wife who persevered to take responsibility for their ‘family’ by the means of foregoing themselves and giving up all resistance, family can never be said to be a place of comfort. </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Examples of unjust use of ‘taxidermied family’</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Sometimes I think Koreans hide their head in the sand and use the word ‘family’ as the answer to everything. To struggling youth, they give hollow sympathy and labels like ‘sampo generation’ (for those who have given up on romantic relationships, marriage, and children), opo generation (those who have given up on the above plus home ownership and all other human relationships), and ‘yukmu generation’ (those who lack a job, income, home, romantic relationship, children, and future). Korean government takes it upon itself to arrange international marriages for single rural men who feel they must “import” foreign girls from developing nations in order to get hitched, in a system akin to human trafficking. Laws enacted by provincial and city governments provide financial support for these mail-order bride programs under the title of ‘International Marriage Sponsorship Statutes.’ The press pinpoints Korea’s low birth rate (and used to pinpoint its high birth rate in the past) as the culprit of its faltering economic growth. Moreover, the so-called experts incessantly worry over how one out of six Korean men cannot marry this year because of the peaking male-to-female ratio, conveniently looking past the 370,000 victims of female infanticide (who never got a chance to even be born) that are at the root of this imbalance. All of these efforts casually take out of the equation the unfairly structured gender relations and issues caused by global capitalism and safely land at a belief that every problem stems from family or lack thereof. </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Such old-fashioned belief that public and private sectors of life are clearly separated aims to picture family as existing in a vacuum, as if changes taking place within family are completely independent of social changes taking place outside the family. Problems caused by global capitalism and gender inequality are separated from the family. Instead, they are simply portrayed as matters that can easily be solved by individual efforts to remedy them and make the right choices in pregnancies, abortions and marriage. This binary system of dividing public and private sectors is the first step to perfecting a system in which efforts made by individuals in a family are solely held responsible for solving all of the headache-inducing social problem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t is not surprising that women are singled out and criticized for the low birth rate (many lament that “women these days are selfish, self-centered, irresponsible, greedy and lazy”), when the increase in allergic diseases is being attributed to ‘decreased cleaning opportunities [for women] due to an increase in nuclear families and women in the workforce.’ At this pace, if doomsday ever comes, “unhealthy families” and greedy women who abandoned their family just so that they could join men in the outside workforce will take all the blame for it. </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Oh, but ‘family’ is much more than that. Hence, this society makes frequent attempts at questioning whether you are worthy of having a family. Your sexual orientation, disabilities, age, ethnicity and religion are all used as evidence of your unworthiness to start a family and have children. Not only are lesbians’ and gay people’s right to marriage and disabled women’s right to give birth denied, the rights to form various types of family are being infringed upon in a Korean society that adamantly insists on only accepting the “normal” families. Family stands like the Berlin wall before 1989, separating“[worthy] citizens” and “[unworthy] non-citizens”, andas one’s right to have a family is constantly questioned, it simultaneously moves away from acting as a communal tie for imperfect individuals.</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225555183.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To you for whom family is, above all else, a source of pain: a campaign message by the Korea Women’s Hotline. Family can be a place of refuge for some, but for others it can be a site of oppression. The more we emphasize the “importance of family” without asking what kind of family it is, the more family becomes a kind of hollowed-out, preserved ideal. In doing so, it also becomes harder for victims to receive protection or remedy even when violence occurs.</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 font-weight: bold;"><br />Do you really think it’s okay to pretend that our family is“normal”?</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s it does every year, National Family Month has fast approached. From Children’s Day (5th), Parents’ Day (8th), and International Day of Families (15th) to Spouses’ Day (21st), National Family Month aims to appreciate family at least a few days a month, one month a year. You could simply state that “family’s important” and move on. But what should really be “important” here is what such important ‘family’ consists of, and why the importance of family must be emphasized. When we repeatedly claim that “family’s important” without defining what a family is, we taxidermize ‘family’. We start to isolate ourselves from it. </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s people make efforts to properly celebrate ‘family events’ by procuring popular gifts for children a month in advance of Children’s Day and making dinner reservations at the most popular restaurants that were featured on TV to take out their parents, they feel not just the importance but also the weight of their family. People experience the mundane and tiring nature and the strict order and structure of their family as well as their own feelings of ambivalence toward them. We continue on with our lives as we engrave this complex emotional circuit onto the word ‘family’.</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We hide behind the slogan “Family’s important” and suppress our complicated feelings by choosing not to answer the questions it raises. Acting like a “normal family” reaches its peak in May, the National Family Month, as we urgently cover this forcedness with wrapping paper. Are we really going to be okay? Is it truly okay to just superficially act out this let’s-be-nice-to-family scenario?</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 have a small wish for May, the Month of Family – I wish we could call all those we comfort and are comforted by ‘our family.’</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People always rely on others. They may strive to prove they are okay on their own but unless you are from another planet, you take care of, are taken care of, comfort and are comforted by someone. I don’t know when it started, but I’m hesitant to call such people ‘family’ now. This is because I’m not sure if the term ‘family’ can regain its warmth it once had despite so much violence that has been committed in its name. Is it okay for me to expect to put such doubt to rest and hope that anyone can find comfort in the name of family someday? <span style="color: #3366ff;">[Translated by Jamie Sung]</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Original article: <a href="http://ildaro.com/7467" target="_blank">http://ildaro.com/7467</a> Published: May 14, 2016</span></p>]]></description>
       <pubDate>2026-04-22 14:53:00</pubDate>
	   <section>sc100</section>
	   <section_k><![CDATA[English Article]]></section_k>
	   <section2><![CDATA[]]></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Kim-Hong Miri)]]></author>
	   <category><![CDATA[English Article]]></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567'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4/202604225853209.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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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자발적으로 왔다”는 말로 덮을 수 없는 구조적 착취와 인신매매]]></title>
       <link>http://www.ildaro.com/10437</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한국에 사는 A가 있다. 오랫동안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그는 어느 날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에서 광고 하나를 보게 된다. “서울시가 연결해주는 해외 일자리 프로그램.” 시청에서 설명회를 연다는 말에 A는 그 자리에 가본다. 설명은 솔깃하다. 한국보다 최저임금이 두 배 높은 나라에서 5개월에서 8개월 정도 일하고 돌아올 수 있고, 숙식도 제공된다. 언어를 몰라도 되는 단순 노동이며, 이미 다녀온 한국인도 많다고 한다. A에게는 부양해야 할 가족도 있다. 그는 결국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러나, 현지에 도착하자 상황은 달라진다. 함께 온 관계자는 여권을 맡기라고 요구한다. 행정비용을 이유로 돈을 빌리게 하고, 그 대출금은 매달 임금의 3분의 1씩 공제된다. 일을 중간에 그만두면 이탈보증금과 벌금을 내야 하고, 가족은 이탈 방지 보증인이 된다. 계약을 어기면 민형사 소송까지 들어올 수 있다는 말이 따라붙는다. 이미 한국을 떠났고, 돌아갈 돈도, 여권도 없다. 그저 정해진 기간을 버티고 돌아가는 것만이 유일한 선택처럼 보인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 상황을 두고, 처음에 “자발적으로 갔다”는 이유만으로 자유로운 노동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이야기는 한국에 온 외국인 계절노동자들이 실제로 마주한 현실이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계절노동자 제도 설계와 현실의 간극, 왜?</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외국인 계절근로비자(E-8)는 단기 인력이 필요한 농어촌에 최대 8개월간 외국인을 고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비자이다. 고용노동부가 아닌 법무부가 관할하며, 일손이 필요한 한국의 농어촌 기초지방자체단체가 필리핀·베트남 등 인력을 보낼 수 있는 외국 지자체와 업무협약(MOU)을 맺어 운영된다. 외국 지자체에 거주하는 주민을 계절노동자로 초청하고, 고용주에게 배정하여 일하게 하는 방식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제도상 핵심 원칙은 명확하다. 노동자의 모집과 송출, 배정 전 과정은 공공기관이 담당해야 하며, 사적 중개나 알선, 수수료 수취는 엄격히 금지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러나 현실은 이와 거리가 멀다. 지방자치단체의 인력과 관리 역량이 부족한 틈을 타 이른바 ‘브로커’들이 제도 전반에 개입하고 있다. 이들이 노동자 모집부터 입국, 사업장 배정, 통장 개설, 보험 가입, 비자 업무까지 사실상 전 과정을 장악한 상태다. 공공이 통제해야 할 영역이 민간 브로커로 대체되면서, 제도 설계 취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2107002441.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농번기, 성어기 등 농어촌에 일손이 많이 필요한 시기에 외국인 노동자를 국내에 초청하는 ‘외국인 계절노동자 제도’가 점점 확대되어 왔다. 원칙적으로 민간의 중개나 알선, 수수료 수취를 금지하지만, 현실은 ‘브로커’들이 제도 전반에 개입하여 착취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사진은 한국 농가의 비닐하우스 고추밭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모습. (사진 출처-우춘희)</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이런 상황에 대해 인신매매 피해자로 인정된 필리핀 계절노동자를 인터뷰하면서 자세한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브로커들은 필리핀에서 계절노동자 설명회를 열어 사람들을 모았다. 주 5일, 하루 약 8시간 일하면 월 2백만 원 이상의 월급을 벌 수 있다고 홍보했다. 필리핀의 경우, 한국의 최저임금만 받아도 자국 대비 약 4배의 소득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이들에게 이는 큰 기회이자 생계유지 수단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계절노동자로 선발되어 출국하는 때부터, 착취는 시작되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브로커들은 서류 처리·행정 비용 명목으로 빚을 지게 하고, 월급에서 75만 원씩 3개월간 공제한다. 합법적 직업소개소도 임금의 1% 이하, 1회 소개비만 받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명백한 불법적 이익 취득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사업장 이탈을 막는다는 이유로 여권을 빼앗고, 이탈 방지 보증금을 요구하고, 가족과 친인척을 이탈 방지 보증인으로 세웠다. 만약 사업장을 이탈하면 본인 및 보증인에게 각각 100만 페소(약 2,500만원)의 벌금이 부과되고, 이름이 블랙리스트에 올라 한국 또는 필리핀에 갈 수 없게 되고, 민형사 소송이 벌어질 것이라고 협박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노동환경 역시 열악했다. 계절노동자들은 휴식일 없이 12시간씩 일했고, 최저임금에 미치지 못하는 급여를 받았다. 숙소는 CCTV로 통제되기도 했다. 이를 견디다 못해 도망간 노동자가 나오자, 브로커는 다른 계절노동자들에게 이탈한 자들을 잡아 오면 현상금을 주겠다고 했고, 필리핀에 있는 이탈자의 집을 찾아가 보증금을 요구하기도 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단순 노동 문제가 아니다, 취약성 이용한 인신매매 구조</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일부 수사기관은 이것을 단순 임금체불이나 열악한 노동환경 문제로 한정하여 바라본다. 브로커는 주선, 관리만 했을 뿐이고, 돈을 적게 주고 열악한 노동환경을 만든 건 사업주가 아니냐는 주장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러나 이는 문제의 본질을 놓치는 해석이다. 브로커의 개입은 단순한 중개가 아니다. 그들은 노동자를 통제 가능한 상태로 만들어, 구조적으로 착취할 수 있는 조건을 형성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2102412730.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올해 2월 6일, 계절노동자 인신매매 피해 고소대리인단이 외국인 계절노동자 인터뷰를 위해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에 방문하여 기념 촬영을 했다. [사진 제공] 정효주</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국제사회는 이미 인신매매의 개념을 확장해왔다. 인신매매는 기존처럼 사람을 사고 파는 행위가 아니라, ‘착취’를 목적으로 사람을 ‘모집, 수송 또는 제공 받는 행위’로 새롭게 정의된다. 여기서 착취란, 성매매, 기타 형태의 성적 착취, 강제노동 및 서비스, 노예 및 노예와 유사한 관행, 노역, 장기 적출 등 힘의 불균형을 이용해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부려먹거나 이득을 취하는 것이다. 결국, 사람을 강제로 잡아 와서 억지로 가두는 행위에서 더 나아가, 상대의 취약성을 이용하여 착취 가능한 상태로 만드는 점이 문제라는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취약하다는 건 무엇일까? 불안정한 체류자격, 낮은 경제적 지위, 언어와 문화의 장벽은 이주노동자를 취약하게 만든다. 취약하다는 것은 결국, 누군가 정교하게 짜둔 착취의 구조가 있을 때, 그것이 착취인 줄 알든 모르든 그것에 걸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임금 격차와 빈부격차가 지속되는 한, 더 나은 소득을 기대하며 국경을 넘는 이주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흐름 속에서 취약한 위치에 놓인 사람들은 반복적으로 동일한 구조에 편입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누군가는 “뭔가 이상한 걸 알았으면 오지 말았어야지”, “결국 자기 선택인데 이제 와서 피해받은 것처럼 구네.”라고 말한다. 결국 그래서 돈을 벌었으니 된 것 아니냐는 정서, 네가 스스로 선택한 일이니 네가 감당하라는 논리다. 이러한 시각은 그 선택이 이루어지는 조건을 외면한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으로서의 결정, 정보의 비대칭 속에서 이루어진 선택이 과연 자유로운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인신매매방지법은 분명히 말한다. 피해자가 착취에 동의했더라도 인신매매 범죄 성립 여부에는 영향이 없다. 취약한 조건에 있는 사람의 ‘선택’은 진정한 의미의 자발적 선택이 아니기 때문이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브로커를 처벌해야 하는 이유</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우리가 브로커 처벌에 힘쓰는 이유는 분명하다. 브로커의 적극적 개입이 사람을 착취하기 쉬운 조건 자체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여권 압수, 채무 부과, 가족 보증, 현상금 추적—이 모든 장치는 노동자가 스스로 상황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설계된 통제 수단이다. 사업주의 저임금 착취가 가능한 것은, 바로 이 구조가 먼저 노동자의 선택지를 봉쇄해놓았기 때문이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2103218537.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올해 3월 19일, ‘계절노동자 브로커 처벌 및 계절근로제도 전면 개선’을 촉구하며 열린 기자회견. [사진 제공-계절노동 전면개선 대책위원회]</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계절노동자 제도 자체가 문제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농어촌의 인력난은 현실이고, 국가 간 노동 이동 역시 불가피하다. 그러나 제도의 공공성이 실질적으로 작동하지 않을 때, 브로커는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와 착취 구조를 만든다. 제도의 이름이 ‘계절노동’이라도,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 인신매매의 정의에 부합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인신매매라고 불러야 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름을 정확히 부르는 것이 출발점이다. 인신매매, 착취라고 불러야 수사가 시작된다. 계절노동자들이 인신매매 피해자로 확인되었음에도, 수사기관은 여전히 “노동자들이 설명을 듣고 동의했다”는 이유로 노동력 착취 약취·유인을 부정한다. 전국의 농어촌에서 피해가 확인되고 있어 큰 틀의 공조가 필요함에도, 관할을 이유로 수사가 미뤄지고 있다. 그 사이 계절노동자 제도는 더 확대되어 시행되고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b127d8;">[필자 소개] 정효주</span>. ‘이주민센터 친구’에서 상근변호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계절노동자 인신매매 피해 고소대리인단으로 함께하고 있습니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4-21 16:59:00</pubDate>
	   <section>sc4</section>
	   <section_k><![CDATA[국경너머]]></section_k>
	   <section2><![CDATA[이주]]></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정효주)]]></author>
	   <category><![CDATA[이주]]></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4/2026042105212890.jpg' medium='image'></media:content>
<image><![CDATA[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4/2026042105212890.jpg]]></image>
     </item>

     <item>
       <title><![CDATA[부족해도 실천해보는 거야, “나쁜 비건 페미니스트”]]></title>
       <link>http://www.ildaro.com/10436</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돋움;">[연구 소개] 논문 「<a href="https://skhu.dcollection.net/srch/srchDetail/200000964914" target="_blank">페미니스트의 비건 되기 경험 연구 : 지속가능한 페미니스트의 실천적 연대를 위해</a>」는 페미니스트이자 비건을 실천하는 이들이 겪은 경험을 소개하고 이러한 실천이 어떤 의의를 갖는지 살펴보는 연구이다. 논문을 쓴 비화 역시 페미니스트이자 7년 전부터 비건 실천 중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비화’라는 별명으로 자신을 소개해주셨는데요. 어떤 의미인가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비건 화이팅’의 줄임말입니다. 비건(Vegan, 동물을 착취하는 시스템에 반대하며 그로 인해 생산되는 모든 결과물에 대한 소비를 지양하는 사람)으로 사는 게 녹록지 않아서, 남들도 나도 이렇게 부르면서 응원하고 싶어서 지었습니다. 별칭 가지고도 비건 얘기 한 번 더 하고요.”</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2006104123.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비건 요리는 맛없다는 편견을 박살내는 야무진 도시락 모음. 논문 「페미니스트의 비건 되기 경험 연구 : 지속가능한 페미니스트의 실천적 연대를 위해」를 쓴 비화는 페미니스트이자 7년 전부터 비건 실천 중이다. (비화 제공 사진)</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span><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페미니스트의 비건 되기 경험에 관한 논문을 쓰게 된 계기에도 이러한 응원의 의미가 있나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저도 그렇고, 페미니즘 리부트(2015년경) 이후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한 사람들이 많죠. 그리고 얼마 안 있다가 비건 실천을 결심한 사람들도 꽤 되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페미니즘 각성이 비건이 되는 데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아닌 경우도 있겠지만요. 페미니스트 각성으로 세상이 달라 보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삶의 방식을 실천해 나가는 페미니스트에게 세상이 만만치가 않잖아요. 비건도 마찬가지거든요. 그래서 둘은 닮아있다고 생각했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논문은 제가 비건이자 페미니스트로서 살면서 느끼고 경험했던 것들, 나와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을 만나 다양한 이야기를 듣고 나누고 싶다는 생각으로 시작됐구요. 페미니스트가 되었던 경험과 마찬가지로, 비건이 되는 과정에서 그들이 겪었던 소외, 갈등, 백래시 같은 것들을 살펴 보았어요. 견고하고 촘촘히 얽혀있는 가부장제, 인간중심주의, 비장애중심주의, 자본주의, 육식주의 등 사회의 맥락 안에서 ‘비건 실천’이라는 일상적 행위가 갖는 한계와 의미에 대해 고민해 봤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난 태어날 때부터 페미니스트였다’ 이런 사람들은 별로 없잖아요. 페미니스트로 살겠다고 결심하는 과정에도 많은 고민과 계기가 있었을 텐데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2등 시민 내지는 피해자로서의 여성을 체감하게 됐달까요? 그전에는 제가 여성폭력에 대해 무지하고 무심했어요. 내 인생과는 상관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죠. 마치 제 자신은 그러한 일에 포함되지 않는 사람처럼 살다가, 딱 느끼게 된 거죠. 대중교통에서도, 학교, 도서관, 직장에서도 내가 자라고 살아온 모든 공간에서 불법촬영부터 성폭력까지…. 그러면서 나의 사회적 공간이 위축되는 것을 느꼈어요. 그동안 내가 외면해 왔던, 도처에 있는 이 폭력적인 관계를 인식하게 된 거죠.”</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논문에서 보면, ‘페미니스트로 산다는 것은 폭력에 무뎌지지 않겠다는 것’이라는 깨달음이 비건 실천으로 이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요. “다른 종에게 가해지는 구조적 억압과 폭력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같은 인간종으로서 피해자의 위치에서 누적된 여성혐오의 역사와 문화를 인식하고 저항하는 것과는 다른 층위, 즉 가해자로서의 성찰이 필요하다.”라는 대목이 인상 깊습니다.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과 비건이 되는 일은 많은 공통점이 있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요. 그리고 이런 성찰은 여성 내에서의 ‘차이’에 대한 성찰적 감각으로도 이어질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떤가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여성을 억압하는 남성, 비인간 동물을 착취하는 인간. 이런 식의 이분법적 도식이 성이나 종에 대한 본질화의 우려가 있지만, 그것과 별개로 착취의 측면에서는 인간은 때로는 가해자일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사람이 누구나 그냥 태어나서 살다 보면 연루되어버리는 동물착취를 비롯한 축산업이라는 구조가 구축되어 왔고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페미니즘이 ‘여성’에만 집중하는 운동이 아니고, 비건 실천도 마찬가지로 ‘동물’에만 집중하는 운동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위계와 차별 그리고 이분법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운동이라는 점에서 맞닿아 있기에 분명히 연결되는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저도 처음부터 이러한 감각으로 비건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어요. 이전까지는 동물에 대한 시혜적인 시선이 더 컸고, 동물도 불쌍하고 환경도 살리기 위해 비건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었어요.”</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2006489492.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작년 기후정의행진에서 행진하고 먹은 비건감튀. (비화 제공 사진)</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span><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위계적으로 아래에 있는 대상에게 베푸는 시혜는 그들의 권리를 옹호한다고 여겨지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 그 자체가 동등한 위치가 아니라는 것을 전제한다.”는 대목도 생각나네요. 비화님 본인이 ‘동물화된 여성과 여성화된 동물’이라는 자각을 한 계기가 궁금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처음 축산업 안에서 동물이 어떻게 사는지를 본 건 오래전이거든요. 도살 장면도 나오는 다큐멘터리였는데 엄청 충격적이고 끔찍해요. 그렇지만 한 번의 충격으로 바뀌지 않더라고요. 이후에 여러 자료들을 보면서, 세미나도 하면서, 조금씩 공감을 쌓아갔죠.</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 사이 페미니스트로 각성하기도 했고요. ‘가임기 여성 지도’(2016년 한국에서 행정자치부가 저출산 대책의 일환으로 임신이 가능한 연령대의 여성이 얼마나 분포해 있는지를 시각적으로 표시한 ‘출산지도’)를 만들어 여성을 ‘아이 낳는 도구’처럼 여기는 것에 페미니스트들이 분노했었잖아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근데, 젖소는 그냥 ‘우유를 생산하기 위한 기계’로 여기고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어요. 축산업 전체를 위해서도 계속해서 새끼를 낳아야 하는 어미가 필요하고요. ‘젖소가 임신하고 출산해야 젖이 나오는구나’라는 당연한 사실을 그제야 깨닫게 된 거죠. 이윤을 목적으로 임신 주기가 매우 짧게 이루어지고, 젖을 짜내야 하는 도구로 개량되어 태어나 죽을 때까지 강제 임신과 출산 착유를 반복해야 함을 알았을 때. 자신의 새끼에게 먹이라고 나오는 젖을 인간이 대량으로 가져가기 위해 동물들을 가두고 태어나게 하고 착취하고 죽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저도 치즈, 유제품을 좋아했는데요. 그랬던 과거의 저를 포함해 사람들은 젖소를 우유가 나오는 기계 정도로 여기고, 실제 그 동물이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관심갖지도, 궁금해하지도 않죠. 익숙한 무지와 무관심을 뚫고, 젖소도 인간 여성과 다르지 않은 임신-출산의 재생산 과정을 거치는 하나의 생명이라는 사실이 아주 어렵게 제 인식체계로 비집고 들어왔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안다고 해서 모두가 그대로 실천하면서 사는 건 아니잖아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하지만 진심으로 와닿는 순간은 컨트롤이 불가하죠. 수나우라 테일러(예술가이자 장애운동가, 동물권 운동가)는 감옥, 요양시설에 있는 사람들, 돌봄 및 식사 준비를 타인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장애인, 심각한 건강 문제로 비건 식생활이 어려운 경우 등을 이야기하며, 비건이 되는 데 따르는 가장 큰 어려움이 개인적 층위가 아니라 구조적 층위, 즉 사회적이고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데서 비롯된다고 짚는데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 말은 비건 실천을 할 수 없거나 실천이 어려운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모두가 무조건 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말이에요. 그렇지만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는 말에 기대어 비건 실천을 하지 않는 쪽으로 기울기보단, 일상의 매 순간 빠짐없이는 못하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는 비건을 선택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에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비건 실천을 시도하는 사람들을 위해 제안하는 팁이 있다면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비건 실천을 거창하게 말고 플라스틱 줄이기, 쓰레기 줄이기 정도로 생각하고 웬만하면 하려고 노력하는 것? 자기 자신을 포함해 실천하는 사람을, ‘완벽할 수 없다면 안 하는 게 낫다고 여기지 않는 태도’가 중요한 것 같아요. 그리고 실천에 시행착오와 모순과 한계가 당연히 있을 수 있음을 말해주고 싶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비건 지향하는 지인이 있으면, 웬만하면 그 사람 만날 때만이라도 비건 실천한다 생각하고 비건으로 먹는 것부터가 시작이 될 수 있죠. 회식이나 행사 시 비건으로 준비하는 것은 혼자 하는 것보다 여러 사람을 참여시킨다는 측면에서 훨씬 더 파급력 있는 실천이죠. 전부 비건으로 준비하기가 어려우면, 비건 옵션이라도 마련하면 좋고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특히 다과 준비는 디저트, 빵류보다 간단한 과일이나 떡을 준비하고, 기타 기성제품일 경우 미리 성분표(밀, 대두만 들어가면 대충 비건일 가능성 높다!)를 확인해서 주문해 놓는 것도 좋은 시도가 될 수 있습니다. 행사 당일이나 시일에 닥쳐서 사려면, 살 수 있거나 아는 메뉴 등이 없어 논비건을 사게 될 확률이 높아요. 비건으로 음식이나 간식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주변에 비건 지인이나 친구에게 문의하면 어떤 것들이 가능하고 어떤 것들이 불가능한지 기쁘게 알려줄 거에요.</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2007144782.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비건 짜장면은 가원(서울 망원동에 위치한 중식당)이 가장 취향. (비화 제공)</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카페나 식당에서 비건 옵션을 물어보는 것도 좋은 실천 방안이라고 생각합니다. 계속 물어보다 보면 메뉴에 넣어줄지도 모르죠. SNS나 프로필 등에 논비건을 전시하지 않는 것도 실천의 한 방안이라고 생각합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할 수 있는 것이 많네요. 비건 앞에서 고기타령 같은 거 안 하는 것부터 시작해 봐도 좋겠습니다. 논문에 ‘킬조이’(Killjoy: 흥을 깨는 사람)라는 말이 눈에 띄였어요. 폭력에 눈감으면 모두가 편안하다고 퉁쳐지는 것을 거부하고, 친밀한 관계 및 사회 안에서 어려움을 겪지만 고집스럽게 ‘킬조이’로 살기를 선택한다는 것은 도처에 있는 폭력을 예민하게 의식하며 살아가는 일이겠지요. ‘킬조이’로 살아가는 것의 어려움과 동시에 흥을 깬 일화들도 궁금합니다</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흥을 깨는 일화는 너무 많죠. 매 순간? 하하. 여럿이 모이거나 단체 행사 같은 때에 누군가 애써 준비한 음식이나 다과 같은 거에 대해 말하지 못할 때도 있어요. 사람들은 고마워하고 감사 인사를 나누고 화기애애한 상황 속에서 저는 혼자 속으로 ‘나는 못 먹는데…’ 하며 생각하는 거죠. 좋은 걸 나누고 싶은 마음은 저도 너무 잘 알고 고맙기도 해요. 근데 또 그 자리에 비건이 있을 거라는 생각조차 못하는 분위기에서 저만 소외되고 지워지는 듯한 경험은 어렵고 복잡하거든요. 때론 상대방도 배려해준다고 하고 나도 어느 선에서 눈감고 넘어가려고 해도 서로 불만족스러운 상황이 생기기도 하고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런 자리에서 결국 ‘비건으로 다과를 준비했으면 좋았을 텐데…’ 같은 말을 하면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얼어붙죠. 어떨 땐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 생각만 하기도 하고, 고민하고 말하기도 하고, 그때그때 달라요. 고기나 회 같은 게 대단히 좋은 것을 대접한다는 식으로 음식이 문화적으로 깊숙하게 의미로서 연결되어 있는 문제이기도 하고, 예외적인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인식이나 예외적 존재와 어떻게 지내야 할지 훈련이 부족한 문제인 것도 같기도 하고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어떤 사람들은 저의 존재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편함을 내비칠 때도 많고요. 저만 아니면 불편함 없이 즐거운 식사나 디저트 시간이 될 수 있는데, 신경 쓰이고 저 때문에 먹고 싶은 걸 못 먹기도 하고 불편하니까요. 저를 소외시키거나, 불편한 티를 내거나, ‘너만 아니면…’ 식으로 저를 문제화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런 게 누적되다 보면, 사람이 아무래도 예민하고 화가 많고 불평불만이 많고 억울함이 쌓여 있는 상태가 되죠. ‘고작 먹을 것’ 때문에 별것도 아니고 치사스럽고 짜치는 일에 집착하는 사람, 자연스러운 상황을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데요. 세상은 그런 사람의 말을 듣지 않죠. 이미 억울한 제가 어떤 말을 하면 친절하지 않다고, 감정적이라고 또 문제를 삼고요. 저도 저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게 되고요. ‘내가 잘 설명하지 못해서, 내가 더 포용력 있지 못해서, 내가 모난 성격이라…’</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근데 그거, 페미니즘에서도 똑같잖아요. 내가 완벽하게 빈틈없이 설명하면 다를까? 내가 좀 더 친절하게 말하지 못해서인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거는 패턴이다 라는 생각. 약자들이 무언가에 항의하면 ‘좀 더 친절하고 정확하고 부드럽게 말해줄래?’라고 대응하며 문제를 그 이야기를 하는 사람에게 돌린다는 생각. 이것이 반복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사라 아메드가 『페미니스트 킬조이』 책에서 ‘이들이 같은 말을 반복해서 하는 계속 튀는 고장난 레코드판처럼 느껴질 것이다.’라고 썼는데, 현실이 변화하지 않고 (우리의 말이) 현실에서 계속해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계속 고장난 레코드판이 될 수밖에요.”</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2007415859.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내가 만든 비건 두쫀쿠’, 라이스 페이퍼로 만들어도 맛있다! (비화 제공 사진)</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span><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논문에서 “인터뷰 참여자들의 일상 속에서 겪은 어려움을 가시화하는 작업은 규범적 질서에서 벗어남으로써 규범의 구조를 드러내고 문제 삼는 이들에 대해, 사회가 이들을 문제라고 여기지 않도록 또한, 스스로 자신이 문제라고 여기지 않도록 하는 데 의의가 있다.”고 썼는데요. 싸우고 있는 사람들, 지금 이 순간에도 ‘킬조이’하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벽을 깨려다 내가 깨질 순 없잖아요? 포기하거나 깨지지 않기 위해 저는 ‘이것은 구조의 문제다’라고 계속 주문처럼 되새기는 것 같아요. 또 ‘킬조이’가 되면서 좋은 점들을 생각합니다. 다른 ‘킬조이’들을 포착하는 시선을 갖게 되고 수용할 수 있게 되었는데요. 장애 접근성, 트랜스젠더 화장실 이용 문제 같은 것들을 보며 이들이 겪는 곤란함, 이들이 제기하는 문제에 대해 비건 실천을 하게 된 후로 더 많이 공감하게 되었죠.</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래서 논문에도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차라리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낫고 우리 모두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모두가 실천하지 않는 것보다, 각자의 상황과 조건 안에서 부족하더라도 자신의 최선을 실천하는 나쁜 비건이 낫다.”라고 썼습니다.<span style="font-family: 돋움;">(※기사 제목에서 ‘나쁜 비건 페미니스트’는 록산 게이의 책 『나쁜 페미니스트』에서 착안한 표현이다.)</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맛있는 걸 먹는 건 정말 큰 기쁨이고 행복이죠. 저도 먹는 걸 참 좋아하는데, 당연히 사람마다 어떤 사회문화적 조건 안에서는 실천할 수 있는 환경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가능한 비건을 선택했으면 좋겠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더불어 비건 실천이 딱히 자신을 희생하면서 대의를 위하는 실천이지만도 않아요. 속도 편하고 건강하기도 하고 환경에도 좋고 비인간 동물에게도 좋은, 요리 보고 저리 봐도 좋은 실천입니다. 비건이 좁게만 보면 먹는 얘기만 하는 것 같은데 종차별주의, 비장애중심주의, 자본주의 등 엄청 다양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봐요. 그게 페미니즘이 말하고자 하는 것과도 많이 연결되어 있고요. 많은 사람들이 더 관심 가지고 덜 소비하면 좋겠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돋움;">비화 씨는 ‘실천하고자 하는 주체들은 현실에서 어떻게든 모순과 불안전함을 마주하게 된다’고 말하며 비건을 시도하는 이들을 격려하고 자신을 성찰한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돋움;">오늘도 도시락을 싸는 비건화이팅 씨를 응원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d126d8;">[필자 소개] 박지하</span>는 석사를 하면 명쾌하고 선명한 정답들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나름 큰돈을 써서 대학원에 진학했다. 페미니스트들의 둥지 성공회대 실천여성학과에 와서 질문과 갈등, 불편함을 계속해서 옆에 남겨두고 뒤죽박죽 부딪히고 불화하면서도 살피며 살아가는 태도가 여성학을 하는 이유라는 것을 배웠다. 정답을 말하는 사람은 못 되었지만 후회는 없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4-20 10:58:00</pubDate>
	   <section>sc3</section>
	   <section_k><![CDATA[녹색정치]]></section_k>
	   <section2><![CDATA[]]></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박지하)]]></author>
	   <category><![CDATA[녹색정치]]></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4/2026042010458177.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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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비혼 여성들, ‘할머니가 되는 것을 걱정하지 말자’]]></title>
       <link>http://www.ildaro.com/10435</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나이 듦과 주거 불안을 고민하는 2030 여성들이 모여 생각했다. ‘늙어가고 아파지고 정착할 장소와 관계가 필요해질 우리, 어쩌면 “생활공동체”가 필요한 건 아닐까?’ 우리는 생활공동체를 고민하며 ‘가족’, ‘나이 듦’, ‘주거’에 관한 공부를 함께 했다. 또, 이미 생활공동체가 삶의 일부가 된 사람들을 찾아가서 궁금한 걸 묻고 대화를 나누어 보자고 기획했다. 이른바 〈예비할머니 프로젝트〉다. 어떤 이들과, 어떤 동네에서, 어떤 연대와 돌봄의 관계를 맺으며 나이들 것인가? 작년부터 느리지만 꾸준하게, 20명 남짓한 청년 여성들이 1년간 만들어 온 ‘예비할머니 질문’들을 살며시 소개한다. [기획의 말]</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나는 왜 ‘할머니’ 되는 것을 걱정하는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래도 결국엔 피 나눈 가족이 최고야.” “아플 땐 가족밖에 없어.”</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누군가에겐 위로가 되는 말이겠지만, 때로 누군가를 작아지게 만드는 이런 말들 사이에서 나와 같은 사람들은 길을 잃는다. ‘젊은 여자’가 나이 들어 ‘할머니’가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이토록 당연한 순리에 두려움이 붙는다. 예비할머니들이 수십 년 뒤에나 펼쳐질 ‘노후’를 생각했을 때 벌써부터 막막한 이유도 이 언저리에 있다. ‘나이 듦’이 내포하는 ‘취약성’ 때문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한국 사회에서 취약해진 개인이 기댈 곳은 가족, 특히 혼인과 혈연으로 이어진 ‘정상가족’으로 국한되어 있다. 다시 말해, ‘정상가족’ 바깥에서 무방비하게 취약해진 개인은 안전하고 충만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 낙관하기 어려운 질서가 뿌리깊다. 가족구성권연구소에서 펴낸 책 『가족 신분 사회』(2025)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가족이 짊어져야 하는 복지의 책임과 역할이 과도한 사회에서, 가족을 벗어난 개인의 기본적인 생존과 돌봄은 불안정하고 위험해질 수밖에 없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185844415.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예비할머니 프로젝트 2025년 첫 모임. 노후에 대한 두려움의 ‘이유’부터 함께 파헤쳐보다. (예비할머니 모임 제공)</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가족’이 대체 뭐길래? 예비할머니 프로젝트에 모인 17명의 2030여성들은 ‘가족이 필요한 순간’을 곱씹어 보기로 했다. 우리는 집안일이 벅찰 때부터 급하게 돈 필요할 때, 집 구하기나 장례 등 큰일이 닥쳤을 때, 갑자기 아프거나 몸을 가누기 힘들 때, 백수가 되었을 때 ‘가족’에게 기댄다(또는 기댈 수 있길 기대한다). 나만의 공간도 필요하지만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을 때, 오늘 있었던 일 얘기하고 싶을 때도 ‘가족’이 있어서 좋다고 느낀다(또는 그런 가족이 있다면 좋겠다고 느낀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또, 같이 살면서 정서적, 물리적 안정감을 느꼈을 때 이런 ‘가족’이 계속되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고, 반대로 ‘있는 그대로의 나’의 모습이 아닌 채로 원가족 안에 있을 때는 ‘다른 가족’이 필요하다는 마음을 품는다. 가족이 필요한 순간이란 즉, 빌붙을 수 있는 장소와 관계가 필요할 때를 의미하고 있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다시 말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상가족’에 갇히지 않아도 괜찮은, ‘돌봄’을 주고받으며 ‘생활’이 서로 연결된 ‘공동체’ 자체다. 『가족 신분 사회』에서는 다음과 같이 생활공동체를 소개한다. “다양한 가족 형태는 민법상 가족의 범주를 넘어 (…) ‘이성애 핵가족의 전형적인 틀’을 벗어나는 ‘생활공동체’를 포괄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생활’과 연결되는 화두가 바로 가족 간의 ‘돌봄’이다.” 책은 이어서 묻고 제안한다. “서로를 돌보고, 위기의 순간에 뒤를 맡기며, 행복한 시간을 함께 나누고픈 상호의존의 관계를 누구와 맺을 것인가? 나는 그러한 관계를 누구와 맺고 있는가? 시설과 가족을 넘어서 이 질문을 상상할 때, 우리 사회에 더 폭넓은 시민적 유대 관계가 자리할 것이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누구’와 함께, 어떤 ‘동네’에서 늙어가고 싶은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누구와, 어떻게’ 나이 들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자연스럽게 ‘어디서’ 나이 들 것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탁자 두 개만한 밭뙈기를 원하는 예비할머니가 있다. 음식점을 운영하긴 하는데 하루 4시간만 열고픈 예비할머니가 있다. 일 없이 은퇴하겠다는 예비할머니가 있고, 또래 할머니와 어울릴만한 노인일자리에 취직하겠다는 예비할머니도 있다. 자가를 갖고 싶은 예비할머니도 있고, 50년 또는 영구 공공임대를 노리는 예비할머니도 있다. 많은 돈을 상상하는 예비할머니도 있고, 가난을 생각하는 예비할머니도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토록 다양한 삶을 상상하는 우리가 각자 또는 함께 어울려 살고 싶은 공동체란, 구체적인 물리적 장소와 관계로 구현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느 땅 위에서 어떻게 실천되고 있을지 알아보는 것 또한 우리에게 좋은 영감을 줄 수 있을 것이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페미니즘 ‘책방’, 페미니즘 ‘의료사회적협동조합’, 페미니즘 ‘커뮤니티 공간/카페’ 등이 지역사회 안에 자리잡은 동네들을 함께 탐방하면서 지난 여름과 가을을 보냈다. 구체적인 장소를 경험해보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각자의 미래 계획 안에 공동체적 삶의 요소들을 자연스럽게 포함시킬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이것이 막연한 상상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에서 지금 구현되고 있는 일상이자 얼마든지 낙관할 수 있는 구체적 삶의 장면으로 다가온 것만으로도 마음이 벅차 올랐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1859236237.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서울 마포구 성산동 탐방. 페미니즘 책방과 마을공동체 동네, 지역 커뮤니티 공간에 함께 머물다. (예비할머니 모임 제공)</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할머니가 된 내가 어떤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면 좋을지를 ‘함께’ 그려나가는 것은, 나와 우리의 불안을 ‘함께’ 해소시켜주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어쩌면 우리에겐 아주 대단한 전략이 필요한 게 아니라, 서로 무언가를 함께 꾸준히 하며 서로의 일상에 엮여 드는 관계와 시간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구체적으로 우리의 미래를 상상하고 계획해볼수록, ‘예비할머니’들의 상상은 더 가까운 현실이 될 것임을 느꼈다. ‘정상가족’ 너머의 삶을 함께 시작할 용기를 모으기 위해서라도, 더 많은 예비할머니들의 더 구체적인 작전들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나눴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은평구 ‘살림’ 의료협동조합, 전주 비혼여성공동체 ‘비비’의 사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어떤 어른이 내게 말했다. “나이 들면 손주 보는 재미로 사는 거야.”</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러나 나는 이제 안다. 손주 보는 재미‘만’ 추구하는 삶은 우리에게 없는 선택지다. 게다가 우리에겐 이미 대단한 (예비)할머니들이 있다. 2030 여성들이 가진 노후에 대한 두려움을 뒤집어 내는 관계와 실천들이 이미 지역곳곳에 있다. 〈예비할머니 프로젝트〉를 통해 대표적으로 찾아간 곳은 ‘살림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과 ‘비혼여성공동체 비비’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서울 은평구에 위치한 살림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이하 ‘살림’)은 “건강하게 살고 싶다.” “믿을 수 있는 의료기관이 있으면 좋겠다.” “아플 때 좋은 돌봄을 받고 싶다.” “병들고 장애가 있더라도 존엄을 잃지 않고 살고 싶다.” “끝까지 나답게 살다가 아는 얼굴들 사이에서 죽고 싶다.”와 같은 공통의 필요와 바람을 가지고 지역주민들이 만든 협동조합이다. 다른 말로 설명하면, 살림은 “여성주의 건강관을 기반으로 지역주민들이 협동하여 의료·복지·돌봄 기관을 만들고 운영하는 곳”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사실 많은 이들이 ‘아픈 몸’을 응당 당사자 개인과 가족이 책임져야 한다고 여긴다. 그게 아니라고 말하는 세상을 경험해볼 일이 별로 없다. 그래서 살림 견학은 예비할머니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경험이었다. 취약해진 몸을 시설에 보내는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이 일상이 될 수 있는 곳이 여기 있다. 살림을 알아간 시간은 예비할머니들이 “안전하게 나이 들고 서로 돌보는 지역 공동체”의 가능성을 긍정할 수 있는 경험이었고, 구체적인 실체를 체감하는 시간이 됐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한편, 30대에 만나 20년 넘게 이어져 온 여성들의 생활공동체가 있다면? 우리는 전북 전주에 위치한 ‘여성생활문화공간 비비’도 방문했다. 이제 50대가 된 비비 멤버들은 ‘여성주거공동체 비비 사회적협동조합’을 만들었는데, 이야기를 나누며 ‘주거’의 중요성과 집단적인 주거실천 사례를 함께 알아볼 수 있었다. 서로가 주체적으로 돌봄을 주고받을 수 있는 비비의 주거공동체 실천이 멋지게 구현되길 바라면서, 우리의 바람 역시 이와 같다는 것을 확인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30대 때부터 50대 현재까지 이어져 온 ‘비혼여성공동체 비비’의 공동체 경험은 이제 겨우 ‘예비할머니 모임’ 활동을 한 지 1년차인 우리들이 좀더 가볍고 자유롭게 마음가짐을 다질 수 있는 소중한 계기이기도 했다. 내가 상상하는 미래가 누군가의 현재일 때, 우리는 좀더 자신 있게 기대하고 낙관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다양한 생활공동체를 형성하고 서로가 관계 네트워크로 연결되는 미래를 상상하며 즐거운 마음을 나눌 수 있어 든든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1859487513.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함께 만든 예비할머니 작전노트. 안전하게 나이 드는, 서로의 존엄한 노후를 위해! 서로를 꼬시기 위한 예비할머니들의 작전은 계속 된다. (예비할머니 모임 제공)</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내 바람은 너희랑 같은 동네 사는 할머니가 되는 거야”</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우리는 예비할머니 모임을 가지며 주고받은 질문과 대화들을 엮어서, 〈예비할머니 작전노트〉를 만들었다. 작전노트를 통해 1)나이 듦과 함께 누리고 싶은 존엄한 삶의 조건들을 살피고, 2)누구와 생활공동체를 함께 할 것인지, 3)이들을 어디서 어떻게 꼬실 것인지, 4)이들과 어디서 모여 살 것인지, 5)어떤 가족을 만들고 싶은지 상상해볼 수 있길 바랐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노후를 생각하며 마냥 외롭지만은 않을 수 있음에 안도하는 마음, 여전히 막연하지만 혼자만의 고민은 아니라는 확인을 주고받는 관계, ‘정상가족’ 질서 바깥에서도 주거 불안과 나이 듦에 따르는 두려움을 걷어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의 근거를 확인하는 과정. 이것은 더 많은 ‘예비할머니’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삶의 장면들이기도 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서로가 서로의 가능성이 되어주는 관계 네트워크는 더 확장될 필요가 있다. 이미 이런 마음을 확인한 20명 남짓의 예비할머니들이 2026년을 함께 맞이했다. 즐겁고 안전하게, 나이 드는 서로를 환대하는 생활공동체를 꿈꾸며 말이다. 올해도 예비할머니들이 모여서 가족, 돌봄, 주거와 동네, 공동체 문화 등 ‘노후’를 둘러싼 질문과 고민을 해소할 좋은 답들은 찾아가는 과정은 계속된다. 그 길을 함께 가보자고, 온갖 공동체를 함께 고민해보자고 소문 내고 싶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에서부터!</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b82bd3;">[필자 소개] 호랑집사.</span> 가난한 페미니스트로 나이 든다는 건 뭘까? 가임기는 끝날 테고 몸은 취약해질 테고 주거는 쭉 불안할 텐데. 두려움을 직시할 수 있는 용기와 노후를 낙관할 수 있는 증거들을 얻기 위해 예비할머니 모임을 구상하고 시작했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4-18 15:56:00</pubDate>
	   <section>sc1</section>
	   <section_k><![CDATA[사회]]></section_k>
	   <section2><![CDATA[]]></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호랑집사)]]></author>
	   <category><![CDATA[사회]]></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4/202604180126245.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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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돌봄…혼자 하면 ‘불안’, 함께 하면 ‘대안’이 돼]]></title>
       <link>http://www.ildaro.com/10434</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2022년 6월, “예상치 못했던 파트너 돌봄이 나에게 왔다”(<a href="https://ildaro.com/9366" target="_blank">https://ildaro.com/9366</a>)라는 제목으로 ‘동성 파트너를 간병하며 경험하고 배운 것들’에 관한 글을 기고해 SNS상에서 큰 호응을 얻었던 캔디 씨가 관련 책을 집필했다. 올해 2월 출간된 『우리가 마지막 순간을 함께할 수 있을까? - 사랑과 돌봄에 관한 퀴어한 참조』는 열두 해를 함께 한 동성 파트너의 투병과 죽음, 장례 그리고 이후의 삶에 대한 캔디 작가의 솔직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동성 파트너 관계, 투병과 간병, 파트너의 죽음, 장례, 이후 새롭게 시작하는 사랑... 그 어떤 것도 쉬운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꺼냄으로써 누군가에게는 길잡이가, 누군가에겐 따끔한 회초리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썼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최근 그는 오랫동안 몸 담았던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를 나와서 ‘큐라이프 협동조합’의 활동가가 됐다. 누구나 자신답게, 존중 받으며 나이 들어갈 수 있도록 돌봄과 배움, 사람 사이의 연결을 만들고 키워가는 협동조합을 목표로 하는 큐라이프는 지난 3월 말 창립총회을 열어 그 시작을 알린 상황이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1643382046.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캔디 작가가 책 『우리가 마지막 순간을 함께할 수 있을까? - 사랑과 돌봄에 관한 퀴어한 참조』를 들고 웃고 있다. (제공: 캔디)</p></td></tr></tbody></table><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최근 몇 년간의 강렬한 경험이 작가의 삶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고 있는 걸까? 캔디 작가가 살고 있는 동네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333333;">동성 파트너 간병과 죽음, 장례를 겪은 경험을 책으로 쓰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이후 출간까지 시간이 좀 걸렸는데요, 소감이 어떤가요?</span> </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사람들이 책을 읽을까 봐, 또 반대로 안 읽을까 봐 무섭다는 두 가지 마음이 동시에 들어요. 신곡이 나온 연예인처럼 매일매일 검색하는 게 스스로 좀 부끄럽기도 하고요.(웃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333333;">집필 과정이 길어지면서, 책에 담으려고 했던 내용이 좀 달라졌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돌봄과 장례의 과정 자체를 사람들과 공유하려고 했고 그 마음은 변함없었어요. 다만, 책 쓰는 과정이 길어지면서 제가 새로운 연애를 하고 결혼식까지 하게 되었어요. 파트너를 보내고 1년 만에 새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산다는 내용을 책에 쓰면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까?’ 고민하게 되었죠. 또, 법이나 제도가 없어서 불행해진 성소수자 서사를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과, 사실 그런 불행 서사를 내세우는 게 나라는 사람과 맞지 않다는 생각도 있었고요. 정말 복잡한 마음이 왔다 갔다 했던 거 같아요.</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1639356006.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지난 2월 출간된 에세이집 『우리가 마지막 순간을 함께할 수 있을까? - 사랑과 돌봄에 관한 퀴어한 참조』(캔디 글, 들녘) 홍보물</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span><span class="bold" style="color: #333333; font-family: 바탕;">책엔 동성 파트너의 간병, 돌봄을 하며 여러 부분에서 장벽에 부딪힌 경험이 담겨있는데요. ‘동성 파트너’이기 때문에 어려웠던 점은 또 어떤 게 있었나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나와 력사의 커밍아웃 정도가 달랐던 점이요. 력사는 자신의 성정체성이 드러나는 걸 극도로 꺼려하는 사람이어서 직장이나 학교 친구들과의 교류와 나와의 생활, ‘이쪽’ 활동을 철저히 분리했어요. 내가 무지개 굿즈 같은 걸 하고 다니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고요. 력사가 왜 그렇게 해야 했는지 너무 잘 알았지만, 그게 저에겐 힘들었다는 것도 사실이었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책을 쓸 때도 력사가 어떤 사람인지 쓸 수 없는 부분도 많았죠. 그가 무엇을 좋아했고 어떤 일을 했으며 어떤 공부를 했는지도요. 력사 장례식 때도 그랬어요. 파트너의 직장 동료, 학교 친구들을 내가 모른다는 점이... 참 그랬죠. 력사가 왜 그렇게 자신을 숨길 수 밖에 없었는지 알죠. 그가 불안해 하고 걱정했던 것들을 이해하지만... 서운하진 않았어요. 아니, 서운하기도 했죠. 정확하게 말하자면 ‘서운하기만 했던 건 아니다’라는 말이 맞는 거 같아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친구 중에 이성애 커플인데 결혼은 하지 않은 이가 있어요. 10년 넘게 같이 살고 있고 양쪽 가족도 다 알긴 해요. 근데 한 분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거에요. 그때 어땠냐고 물어봤거든요. 파트너로서의 일은 다 하는데 인정은 못 받는 위치라고 하더라고요. 사위 같은 거지만 결국 사위는 아닌 거죠. 이성애 커플이어도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 있어서 좀 인상적이었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333333;">력사님과의 관계에서 돌봄과 장례를 겪으며, ‘공동체’ 커뮤니티의 중요성도 언급하셨어요. 친구들이 캔디 님에게 중요한 버팀목이었다는 이야기도 나오고요. 많은 이들이 그런 커뮤니티를 원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기도 하죠</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나이 들수록 커뮤니티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앨라이(Ally, 퀴어의 연대자) 친구도, 비혼인 친구도 좋죠. 하지만 때때로 이들은 내가 고민하는 것에 이해는 하지만 공감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요. 어떤 공통점이 있는, 삶의 결이 맞는 사람들을 찾게 되는 이유죠. 성소수자 커뮤니티 사이트에 ‘그동안 잘 살았고, 학벌도 좋고, 직업도 좋은데, 40대가 되니까 만날 사람이 없다. 친구를 찾고 싶은데 너무 어렵다’는 이야기가 종종 올라와요. 내가 파트너랑 헤어지거나 파트너가 죽어서 슬픈데, ‘너 갑자기 왜 울어? 왜 슬퍼해?’ 하는 사람만 주변에 있으면 너무 괴롭잖아요. 내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해줄 사람이 필요하죠.</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런 친구들, 커뮤니티를 갖기 위해선 사실 노력이 필요한 거 같아요. 요즘 사람들이 생각보다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 특히 코로나 팬데믹 이후에 더 그런 거 같은데요. 온라인으로 적당히 교류하고 실제로 만나지 않거나, 깊은 관계를 맺고 싶지 않은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그나마 다같이 만나도 감자튀김 먹으면서 피상적인 말만 나누다 헤어지죠. 그건 노력하고 싶지 않은 거고, 갈등을 경험하고 싶지 않은 거고, 귀찮아지고 싶지 않은 거에요. 하지만, 그걸 감수해야 얻을 수 있는 게 있다고 생각해요. 내가 정말 필요한 순간에 그 커뮤니티가 나에게 큰 힘이 될 거니까요.</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1640202735.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큐라이프 협동조합 홍보물 중. 누구나 자신답게, 존중 받으며 나이 들어갈 수 있도록 돌봄과 배움, 사람 사이의 연결을 만들고 키워가는 협동조합을 목표로 지난 3월 말 창립총회를 열었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span><span class="bold" style="color: #333333; font-family: 바탕;">이제 ‘큐라이프 협동조합’의 활동가가 되셨는데요. 캔디 님의 일련의 경험이 협동조합을 만드는데 영향을 줬을까요?</span> </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아무래도 그렇죠. 협동조합에 들어간다는 건 믿을만한 사람들이 있는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거고, 나 혼자 있을 때 10을 노력해야 한다면 협동조합 안에선 8정도만 노력해도 무언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잖아요. ‘함께’ 하니까요. 또, 내가 무서울 땐 다른 조합원들 등 뒤에 숨어있을 수도 있고, 그들에게서 힘을 받을 수도 있고 내가 힘을 줄 수도 있고요. 돈이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외로움은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이건 사실 퀴어가 아니어도 마찬가지고요. 돌봄을 배우고 실천해야 한다고 할 때 내가 조금이라도 아는 관계망, 그러니까 협동조합 안에서 무언가 할 수 있다면 조금 더 쉬워질 거라고 생각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333333;">책에서 “난 운이 좋았다”는 말이 몇번 언급되는데 공감이 됐어요. 저도 그런 표현을 쓰거든요. 운이 좋았으니까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지금 이렇게 살아있고, 이 자리에 있는 거니까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력사 장례식 때도 도와주는 친구들이 있었고, 많은 것에서 도움을 얻었죠. 하지만 모두가 그런 행운을 누리진 못하잖아요. 그렇게 좋은 친구가 없으면, 당연한 권리를 획득하거나 소소한 위로조차 누리기 힘들다는 사실, 즉 “운이 좋아야만” 한다는 현실이 좀 비참하고 속상했던 게 솔직한 마음이에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여전히 주변엔 “파트너가 죽었는데 그 과정에서 나를 사람으로 취급해 주지도 않더라, 20~30년을 같이 살았고 (파트너의) 조카들도 ‘이모’라고 불렀는데 막상 파트너가 죽으니까 내용증명부터 보내더라...” 등의 이야기가 들리잖아요. 그럴 때마다 그 사람들이 그 순간 혼자였다는 사실에 너무 화가 나요. 하지만, 그들에게 모두 투사가 되라고 할 순 없잖아요. 어쩌면 그냥 다 포기하고 잊는 게 편안한 삶을 보내는 방법일 수도 있고요. 이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게 뭘까? 그래서 큐라이프를 생각하게 된 것 같아요. 큐라이프 홍보하면서 쓰는 문구가 “혼자 하면 불안이지만, 함께 하면 대안이 된다”거든요. 사람들이 누군가의 삶을 보고 ‘아, 저렇게 하면 되는구나. 저렇게 친구를 만들면 되는구나. 어떤 서류를 준비하면 되는구나. 어떤 기술이 필요하구나...’ 등의 정보를 얻을 수 있고, 미리 준비할 수 있도록 하고 싶어요. 퀴어 친화적인 공간도 더 많이 만들고 싶고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책에도 썼지만, 지금의 파트너(책에선 ‘오쓰’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와 혼인신고를 하러 갔을 때 구청 직원한테서 굉장히 좋은 인상을 받았어요. 그 직원도 분명 동성 커플의 혼인신고를 받아줄 수 없다는 걸 알지만, 그걸 오히려 창피해하고 미안해 하는 모습을 봤을 때 뭔가 위안이 됐어요. 그런 태도가 너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당장 혼인평등권이 마련되지 않더라도, 담당 공무원들이 많은 동성파트너가 존재하고 그들이 파트너로서 혼인신고를 하고 싶어한다는 걸 ‘교육’받는다면, 인식이 많이 달라질 거라 생각해요. 그런 부분도 큐라이프를 통해 해나가고 싶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333333;">작년에 ‘큐라이프’ 프로젝트로 일본, 대만, 필리핀을 방문해 각 나라 퀴어들의 돌봄과 나이듦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잖아요.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무엇이었나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대만 타이베이의 노인센터에서 “성소수자인 노인이 방문할 것을 대비해” 준비하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어요. 아직 센터에 성소수자 노인은 없지만, 언젠가 올지 모르는 일을 준비한다는 거요. 그리고 성소수자 단체와 협업하면서 센터 내 노인들과 관계망을 만들었다는 점도 흥미로운 부분이있어요.</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 </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필리핀의 퀘존(Quezon) 시에선 2023년부터 필리핀 지방정부 최초로 “Right to Care Card”라는 제도를 도입했대요. 일종의 파트너십 같은 거죠. 이 카드를 가진 커플은 파트너의 의료위기 상황에 처했을 때 보호자로서 결정을 할 수 있대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사실 필리핀이 소위 ‘잘 사는’ 나라는 아니고 복지 시스템이 잘 마련된 곳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퀴어들이 함께 살아낼 방법을 많이 고민하더라고요. 커뮤니티 내에서 노후 인식 조사를 할 때도, 문맹인 사람들은 일단 글부터 가르치고, 또 핸드폰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성소수자 관련 용어도 알려주면서 조사를 진행했다는 이야기는 놀라웠어요. 단지 조사만 하고 끝이 아니라, 조사하는 과정 속에서 계속 연결지점을 만들었다는 게 대단하다 싶더라고요. 큐라이프 활동에서도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일부터 해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도 하게 됐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일본과 대만에서 모두 ‘부모 돌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었는데, 비혼 1인가구가 부모 돌봄을 하는 것과 성소수자가 부모 돌봄을 하는 건 분명 차이가 있어요. 어느 날 엄마를 모시고 와야 하는데, 엄마는 내가 혼자 산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파트너와 20년째 같이 살고 있는 상황이라면 어떻게 될까요? 파트너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성소수자로서 돌봄을 한다는 건 분명 다른 점이 있다는 걸 절감하는 순간이 올 거라 생각해요.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할지 함께 툭 터놓고 이야기할 공간이 필요할 거에요.</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1640481330.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캔디와 오쓰의 결혼식 중 밝게 웃고 있는 캔디의 모습. 두 사람은 (반려될 것을 알면서도) 구청에 혼인신고를 하러 갔다. (제공: 캔디)</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333333;">누군가는 캔디 님이 겪은 것과 유사한 일들을 겪고, ‘그냥 다 잊자’ 이러고 새 출발을 할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그 경험을 토대로 배운 걸 공유하고 함께 고민하는 활동을 하는 동력은 무엇인가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기본적으로 사람에게 필요한 걸 돕고 연결하고 싶은 오지랖?!(웃음)인 거 같아요. 호기심과 애정이기도 하고요. 이 책을 쓴 계기를 굳이 나누자면 1/3은 오지랖이고, 1/3은 활동가로서의 직업병, 1/3은 전 파트너에 대한 애증과 내 이야기를 쏟아내며 자랑도 하고 위로도 받고 싶은, ‘관종’같은 개인적 욕망인 것 같아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리고… 많이 봤기 때문이에요. 파트너의 장례식도, 장지도 못 가본 사람이나, 많은 퀴어가 죽어가는 걸 봤으니까요. 동시에 퀴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이야기를 쓰는 사람들도 봤죠. 그 모든 장면이 나에겐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333333;">지난 일들을 겪으며 캔디라는 사람이 변한 부분이 있다면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부당한 것들을 더 이상 참지 않게 되었고, 현실적인 법제도가 내 근본적인 욕망과 직결된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어요. 력사의 장례를 치르고 유품을 정리하면서 ‘운이 좋아서’ 할 수 있는 게 있었지만, 사실 법적 권리가 없으면 고인의 물건 하나 지킬 수 없다는 걸 경험했으니까요. 단지 예쁜 드레스 입고 축하받고 싶어서가 아니라, 가족들이 나를 받아들이는 것, 아니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성소수자임을) 인지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결혼이라는 걸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사전연명의료의향서도 작성해 놨지만 사실 지금 상황에선 와이프인 ‘오쓰’는 그걸 확인하지도 못해요. 직계가족이 아니면 안 되거든요. 그래서 결혼식을 하고, 혼인신고를 하는 등의 행동을 한 거에요. 가족들이 오쓰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도록. 귀를 기울여야만 하는 사람이어야 하니까요. 그걸 인지시키기 위해서 한 거죠. 그런 게 변화된 점이에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333333;">앞으로 또 하고 싶은 활동은 무엇인가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오쓰와 함께 ‘퀴어 동네 이장’이라는 이름의 팟캐스트를 한 3번 정도 했는데, 재미있었어요. 그래서 이번엔 뉴스레터를 발행해 보려고 하고요. 거창한 영향력이 있는 사람보단 주변 사람들에게 필요한 인연이나 정보를 연결해 주는 ‘홍반장’ 같은 역할을 하고 싶어요. 그리고 퀴어가 질병이나 생활고 등 남들도 겪는 불안 외에,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겪는 추가적인 불안 없이 남들만큼 ‘슴슴하게’ 살 수 있도록, 그런 세상을 함께 만들어가고 싶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333333;">이 책을 어떤 분들에게 가장 추천하고 싶나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솔직히 모든 사람이 다 읽었으면 좋겠어요.(웃음) 성소수자 당사자에겐 공감과 레퍼런스가 되길 바라고, 무엇보다 성소수자 이슈에 관심 없는 비-당사자들이 책을 읽고 충격을 받았으면 해요.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그들과 동등한 권리를 갖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위험하고 불안해지는지 그 현실을 보여주고 싶어요. 우리의 절박함을 꼭 알아줬으면 해요.</span></p>]]></description>
       <pubDate>2026-04-16 14:35:00</pubDate>
	   <section>sc5</section>
	   <section_k><![CDATA[소수자 시선]]></section_k>
	   <section2><![CDATA[퀴어]]></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박주연)]]></author>
	   <category><![CDATA[퀴어]]></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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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I “Cross the Sea” Every Week to Study]]></title>
       <link>http://www.ildaro.com/10433</link>
       <description><![CDATA[<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 former hagwon teacher who applied for insurance after being fired</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 was a teacher at a hagwon[private academic institute]. In my mind, a hagwon teacher is a temporary worker who can get fired anytime, but from the outside, it was a teaching position that appeared good.  When I was seeking a job, I hadn’t even heard about the 4 main insurances, severance pay, or unemployment insurance. I just started work after hearing about pay raises and the working hours. Still, my mom always proudly said I was a teacher, and I often heard, “You must be good at English!” from those around m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For hagwon teachers, dyspepsia is common. I also suffered from indigestion at least 3 times a week after having to eat in a rush during the 20 minutes allotted for meals. Still, I had to be grateful of the fact that I could eat and teach. After 10 minutes of break there were continuous classes, and paperwork I had to do piled up. ‘When on earth are you supposed to prepare for class and do the paperwork?’ I found myself teaching classes without preparing for them and filling out paperwork whenever I could during class tim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 could only be a teacher who improved the grades of the students; I couldn’t talk to them of dreams and aspirations. The more time passed, the more I came to choose teaching methods that were easy for me as a teacher and that could raise the grades of the students, instead of a ‘good’ way of teaching.</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Still, I liked the children. On Ppeppero Day [Nov. 11, when people give each other the snack called Ppeppero] and Valentine’s Day, I even made chocolate with the students. I was interested in them, about what went on in school and whether they got along with their friend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 was lucky (according to another teacher) to receive two weeks’ notice. It was a place where being fired over the phone, on the day of, and incidents of unpaid wages occurred too easily. Of course, there had been no contract stating the promise that my salary would get increased after one year, so I couldn’t prove it. There were no severance pay or unemployment benefit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 filed a report to the Labor Administration to receive my severance payment and ‘advance notice payment’ (If the employer intends to fire a employee for reasons of management, they must give notice at least 30 days in advance, and if not, they must pay them the regular wages for 30 or more days). Even though it was a reasonable demand, I went through the process asking numerous times whether I was doing the right thing.</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When I met my employer and her husband again, I was astonished at their brazenness. Since you can receive severance payment if you worked 1 year or longer, my employers weren’t able to say anything about this. But to receive advance notice payment, I had to prove that I had actually been fired, and they lied, saying that I had stopped coming to work without informing them. Although there was circumstantial evidence that I had been fired, there was no certain evidence such as a recording of when I was getting fired. Furthermore, my employer told me that if I sued, they would sue back for false accusations. Consequently, I was not able to receive the advance notice paymen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Even as I was starting to question whose words were the truth, feeling like my own words were a lie, I submitted the unpaid wage report that the labor inspector had fortunately issued to the unemployment insurance center, and was able to receive unemployment benefits. I paid the premium and got unemployment insurance coverage—which I hadn’t had when I was working at the hagwon—to receive unemployment benefits only after I was fired. I was finally learning the rights a worker was entitled to, one by on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n this way, I secured my severance pay and my unemployment benefits in the small community of Jeju Island. Many hagwon teachers don’t, because if you do this, it becomes difficult to find a job within the hagwon circle. The reason why I could do this was because I wasn’t going to do this work anymore.   </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1503422217.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The sea is a 5-minute walk from my home. But for me, Jeju Island is not an island of romance. ©Lee Yeon</p></td></tr></tbody></table><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 font-weight: bold;">Saying goodbye to a loved on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 fell in love with someone. It was a love where it wasn’t certain whether I loved that person, or I lovedloving that person. It felt as if I could do anything because that person existed. It was because of them that I decided to go abroad to study women’s studies. (Even though, ironically, we would not be able to be together if I went abroad…) Luckily, they were going to wait for me. It was when I was preparing to study abroad that I received the notice that I was fired from the hagwo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fter receiving the notice, I started to clear out my previous life, piece by piece. I let go of my affection towards the children, and emptied out my passion towards working as a hagwon teacher. The day I packed and carried out the heavy pile of all my things from the hagwon, the person I loved was waiting in their car for me. They threw out all the used paper from my boxes, and ate dinner with me. I was able to endure the whole process thanks to that person. But my plans to study abroad became the reason their friends could not welcome me, and why I gave that person up.</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fterwards, I gave up the dream of studying abroad due to my own reasons. Even now, I wonder what would have happened if I had decided earlier that I wouldn’t go abroad to study, or whether the fate of that person and I might have been different if I had discovered the reason I wanted to study women’s studies earlier.</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at person had always been supportive, and particularly during the time when I was going through a difficult time after getting fired, the person’s existence itself was a big help. They supported me when I flew to Seoul every Saturday by plane to study women’s studies. On Fridays, I would get home after 10pm at night, go to Seoul on Saturdays to study, and rest my tired body next to that person on Sundays. But had I ever been supportive of them?</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When I was struggling against the hagwon that person was worried that I would get hurt, but they left in the end without knowing whether I succeeded. After that, I sought that person and then said goodbye numerous times in my mind every day. Now their voice and face have faded away.</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What is the reason I want to study women’s studie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t was good to stop working and receive unemployment benefits. After consulting people around me, I decided to study feminism not abroad but in Korea. I studied hard while receiving training in sexual violence counseling. But my teacher told me I needed to find out why I wanted to study women’s studies in order to be good at studying i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o be honest, I didn’t have a reason for studying women’s studies. No, I didn’t know. I asked myself over and over again. ‘Why do I want to study women’s studies? What is it that I want to do after graduating from graduate school?’ But asking myself these questions made me realize that the reasons I wanted to study women’s studies would not get resolved through women’s studies. It was because the answer I was attempting to find through women’s studies was already inside m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When I first encountered women’s studies during college, I was finally able to forgive my relationship with my mom and give myself freedom. Women’s studies was a source of liberation for me. But I had been mistaken in believing that I could resolve the even-now troubled relationship I had with my dad through women’s studies. I was confused. Getting along well with your family. It occurred to me that maybe the presumption that one should get along well with family itself was wrong. You could get along well but also not that well too… I calmly dissected the feelings I had towards my family. And I realized that I had come to want to forgive my dad.</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is was not a problem that would be solved by going to graduate school. But still it was clear that women’s studies had let me know what the problem I had wa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My plans to go to graduate school next year all disappeared. I became very confused when thinking of what I should do for a living. I was 28 years old. A friend of mine already had 2 kids. Of course, I don’t think marriage will be my liberation. Plus, I don’t have someone to marry either, so ‘chwijip’ [marriage as one’s job] is impossible for me. What in the world have I been doing since graduating college? I still don’t know what I like or what I want to do. In dramas, at this age, people are already good at their jobs and are dating people they are planning to marry after several past relationships… I had thought I would become like that too.</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 had always dreamed of living in another country, and I decided to earn money, travel, study English more, and do work related to English. So I obtained a working holiday visa for Australia. Even after receiving the visa I continued to ask myself, could I do physical labor in another country? Could I, who hadn’t physical strength, clean and work in restaurants? Wouldn’t I be regarded as wasting time by doing such work as a person of 30 years old? I decided that I would first just go. And if it didn’t work out, that I would return… you can’t prepare everything perfectly. And so I reserved a flight to Australia for September 16th.</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 first phone call I made to my dad in 29 year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Last February, I happened to learn that they were doing a ‘Healing Drama Professional Course (a program designed to liberate participants by finding the cause of pain and sickness through internal guidance) at the Healing Drama Research Center NOW and participated in it. I only had to go to Seoul once a month so the schedule wasn’t difficult, and I had a lot of interest in drama.</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 first day, I sat in a circle with strangers and told them my story. Things gradually started to change, as if wounds heal the moment they are spoken in words. I, who had tried to take responsibility for everyone’s emotions, was able to think of myself first and protect myself. Now (who is the head of the research center) said, “Other people change only when I change." Indeed, as I started to change, my surroundings started to, too.</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Dad had always been strict. To me, my dad was a scary person. He was someone who caused me distress. He was an abuser… Speaking these words, I was able to separate myself from my past. I was no longer afraid to look at my dad. I had been dragging the dad who had always frightened me with his anger (past) into the present and confusing him with the dad who merely chastises me (reality). Even when my dad was chummy with me, I had clung to the wounded self inside me and had been angry.</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One day, my dad came back from Dongsaseob (a happiness meditation program) and, having had a good experience there, wanted the rest of the family to go as well. To tell the truth, I had been thinking that the Drama course would be sufficient, and I resented it since it seemed as if Dad was saying ‘you should go and change too.’ I had endured and made efforts within our family until now, and I resented my dad for starting to make efforts only now. But even after returning from Dongsaseob my dad did not change, and I then thought going there and changing myself would be better.</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My suspicions about my dad were wrong. I realized there just how much I had been hating my him. In my heart, I had been thinking ‘I am doing more than enough, but I’m here [using my precious time] because of my dad. (At that time, I was quite busy preparing for my working holiday in Australia.) There, I considered my heart, which blamed my dad, and as each day passed, I reflected upon myself more and mor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t was strange. I saw my fellow trainees getting in touch with those that were significant in their lives even without being told to do so. I also called my dad and told him I was sorry. It was the only phone call I’ve made to my dad in my 29 years. In fact, if he hadn’t called me on my way to Dongsaseob, I wouldn’t even have known the number. I hadn’t been able to forget how brusque I had been upon answering the phone. Not just that. Whenever my dad had been warm towards me, I had ignored his affections because of the moments in the past when he had been angry and made my life difficul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nd I realized that he hadn’t wanted to go because he wanted me to change, but because he genuinely had had a good experience and had wanted to share it. Just like the way I talked about Dongsaseob to the people around me these days. Looking into myself and looking at my dad, I realized that I had been wrong in thinking it was only I that had been making efforts and had been a victim…</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1503054339.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Currently, I’m helping out at my parents’ shop ©Lee Yeon</p></td></tr></tbody></table><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 ambiguity of life ‘helping out at one’s parents’ shop’</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My plans to go to Australia on a working holiday were postponed due to health issues. Currently, I’m helping at my parents’ shop. People around me envy me in that I can do that and also do what I want to do. They also say that since I can inherit this business in the future, I don’t have to worry about making a living.</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What I do at the shop isn’t fixed. This is because what I do changes depending on what the customer orders. In other words, I do everything. These days, I do paperwork or prepare study plans and material needed for when mom lectures. This is because my mom isn’t that good at using computers. I also prepare lunch for us to eat at work and mind the shop. On Sundays, I look after the shop alone, and when my mom has errands to take care of I also mind the shop. Because it’s something I’ve been doing since I was very young, it’s not difficult. When a customer comes, I sell products, connect them with my mom, and make further appointments for them.</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ut this feeling of not working even though I am working, and having issues with my parents from time to time is something I can’t do anything about. I dream of becoming completely independent, but it feels as if I will not be able to do so… Sometimes, when I discover myself giving up on what I want to do because of my parents (even though they themselves say nothing about it), I get frustrated. Sometimes the words ‘our family’ pressure me to hide my desires and be patient. Also, I have to protect myself from the views that see me as living off my parents instead of my own abilitie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se days, I go to Seoul every Friday for a class. The fee is 200,000 won. I needed my parents’ support in order to pay the fee upfront. Since I go to Seoul from Jeju Island to listen to these lectures, the additional cost for a total of 6 lectures is around 1,500,000 won. The reason I was able to put up with those gazes of incomprehension from others is my own will and my mom’s support. (When it cost around 3,000,000 won to study women’s studies before, I didn’t tell those around m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t this moment, the place closer to me is not the sea, which is a 5 minute walk away, but the area near Hongik University. Is Jeju Island really the island of romance? For me, it’s merely the place I make a living, my hometown, and a place where the beautiful sea can be seen from time to time. I’m beginning to grow tired of the impressed looks I get when I say I’m from Jeju Island, since for me, who has to deal with the expensive airfare, living in Jeju Island is neither a privilege nor romantic.</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Currently, I am an unmarried woman who lives with her pet (Namu) and doesn’t have a job or any savings. I went through a lot and had to continuously let go in order to be able to say this without difficulty. I’ve started to study the mind recently, and my teacher said that the question ‘what am I?’ is different from the question ‘who am I?’ Honestly, I’m not sure I completely understand this. But I’m sure of the fact that this question makes me grow and is helpful to my lif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ve been struggling over and over with the question ‘what am I?’ during my 20s. Questions such as ‘why was I born into this world, and what was I meant to do? What would be the thing I would be best at?’ . . . But now, I think about ‘who am I?’ Although it’s a question whose answer I don’t know, it occurs to me that it’s okay if I don’t in the end. Even though there’s a beginning, there doesn’t necessarily have to be an end. Sometimes even the start itself is valuable. I just want to live, gratefully, together with someone who will always be on my side. <span style="color: #3366ff;">[Translated by Rose]</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Original article: <a href="http://ildaro.com/6873" target="_blank">http://ildaro.com/6873</a> Published: November 2, 2014</span></p>]]></description>
       <pubDate>2026-04-15 15:00:00</pubDate>
	   <section>sc100</section>
	   <section_k><![CDATA[English Article]]></section_k>
	   <section2><![CDATA[]]></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Lee Yeon)]]></author>
	   <category><![CDATA[English Article]]></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583'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4/2026041505295568.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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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낯선 곳에서 헤매길 좋아하는 사람의 ‘길’]]></title>
       <link>http://www.ildaro.com/10432</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거의 3년의 시간을 지나 마주 앉은 연임과의 대화는 당연히, 건강 이야기로 시작됐다. 유독 검던 우리의 머리칼이 절반은 하얘진 이슈, 여성호르몬 이슈, 연임의 몸에 기어이 나타난 유전성의 의료적 징후 이슈, 지난 한 해 나를 쥐고 흔든 각종 증상과 병원 순례 배틀… 나이는 그냥 지나가는 젊음을 아쉬워하는 척하며 먹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이드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인 줄은 우리가 처음 만난 20년 전에는 꿈에도 몰랐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1459095457.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사람들이 그런다? 네가 하는 일이 너무 많아서 널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그럼 난 그냥 ‘저는 김연임인데요’ 해.” (사진 촬영: 고주영)</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엄마 마주하기-“죽을 둥 살 둥 매달리게 되는 문제잖아”</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마지막으로 만난 게 언제였더라, 따져보니 나의 아빠가 갑작스럽게 암 투병을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코로나로 인해 병문안도 간병 교대도 할 수 없던 시기, 40년 넘게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사람이지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가깝지 못했던 사람에게 마지막이 다가온다는 사실에 당황하고 무력하고 혼란스러웠던 때, 연임에게 그 두려움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나의 아빠는 세상을 떠났고, 그 이듬해 연임의 아빠도 세상을 떠났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아빤 학교에서 영어교사이자 상담교사였어. 시도 쓰고 먹그림도 그리고, 감수성이 풍부한 분이셨지. 덕분에 나도 어릴 때부터 전시나 공연, 영화관 같은 델 자주 갔지. 내 기억에 엄마는 아빠와의 관계가 만족스럽지 못했는데, 어린 나는 엄마 편이 되어주고 싶어서 아빠를 되게 미워하고 못되게 굴었어. 엄마는 무섭고 슬퍼보였고, 아빠는 나를 버리지 않을 거라 믿었거든. 시간이 흘러 아빠 돌아가신 후에 과거의 나를 돌이켜보면서 이런 내 모습을 알게 되었어. 죄책감과 원망하는 마음이 뒤엉켜 엄마와의 관계가 더욱 어려웠고 거리를 뒀어.</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일 년 넘게 상담 받고 괴로워하다 알게 됐어. 엄마는 누군가의 정서나 감정을 받아주기 힘들었던 거야. 엄마도 당신의 감정을 읽어줬던 사람이 없었으니까. 어려운 환경에서 너무 힘든 일들을 혼자 경험해야 했으니까. 탱크처럼 씩씩하게 헤쳐나가는 방법밖에 몰랐어. 사랑하는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였지. 험한 전쟁터에도, 사랑만 바라는 꽃밭 같은 딸이 손을 내밀어도, 상대가 얼마나 아플지 느끼지 못하고 탱크처럼 밀어붙였던 거야.</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엄마와의 어려움이 나한텐 큰 공부가 됐어. 엄마와의 관계는 죽을 둥 살 둥 매달리게 되는 문제잖아. 나를 우울하고 불안하게 만드는 문제였지만, 그걸 들여다보고 해결하려다 보니까 (심리를 공부하고 상담하는) 나에겐 결국 큰 도움이 된 것 같아. 엄마의 하소연, 아빠의 하소연을 가운데에서 듣던 어린 시절의 경험도 경청의 조기교육이었던 것 같고.”</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질문 마주하기-“춤 배우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연임과 나는 30대 초반에 신생 예술지원기관에서 아주 짧은 기간 동료로 지냈다. 연임이 기관을 그만두고 다른 길로 나아가는 동안, 나는 여전히 그 직장에 머물며 연임의 탁월한 영어 실력이 필요할 때 일을 부탁하기도 했고, 그러다 나 역시 바깥으로 나와서 공연예술 영역에 속하게 되었을 때 어느 지점에서 잠깐 마주쳤다가 또 각자의 길을 떠다니곤 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1455338685.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연임과 나는 30대 초반에 신생 예술지원기관에서 아주 짧은 기간 동료로 지냈다. 이후로도 우리는 어느 지점에서 마주쳤다가 또 각자의 길을 떠나곤 했다. (사진 촬영: 고주영)</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나, 대학에서는 영어교육 전공해서 정교사 자격증도 땄었지. 그런데 그땐 교사가 되긴 싫었어. 부모님 두 분 다 교사라 너무 익숙해서 흥미가 없었던 것 같아. 대신 예술에 관심이 있었지. 하지만 어떻게 그 분야에서 일을 해야 하는지는 몰랐던 거야. 대학 때 어느 날 갑자기 춤을 춰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우리 학교 무용과에 전화를 한 거야. ‘춤 배우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그랬더니 전화 받은 조교 분이 자기 과 동기가 하고 있는 개인 강습을 소개해줬어. 거기로 무용을 배우러 다녔는데, 그 무용 선생님이 나중에 대학원 ‘예술경영과’에 들어갔다더라고. ‘아!’ 그래서 나도 예술경영과를 들어갔어. 그 공부를 하고 (우리가 함께 일했던) 예술지원기관에 들어간 거였어.</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마케팅을 좀 더 본격적으로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경영학 석사과정을 공부하기도 하고, 외국인 남편과 살면서 한국어 교육을 공부하기도 하고. 아카데믹한 공부보다는 나의 삶에 필요한 공부를 찾아서 하고, 일과 삶에 적용해 보고 했던 것 같아. 공공극장, 민간축제, 무용단체, 음악단체, 개인 아티스트, 드라마제작사, 비엔날레 사무국, 그리고 대기업 전략팀까지... 뭔가가 궁금하면 일단은 책을 읽거나 물어보고, 공부하고, 그 다음에는 필드에서 일해보고, 또 다시 공부하고 일하고, 그런 식이었던 것 같아….</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래도 되나 싶고 한 가지를 꾸준히 하지 않는 게 괜찮은가.’ 스스로 불편할 때가 있었어. 사람들의 시선도 의식 됐고. 그런데, 결국 내가 계속 불안함을 느끼고 걸려 넘어진 건 편가르기 같은 ‘집단문화’, 층층시하의 ‘조직문화’였던 것 같아. 나의 그런 패턴을 발견하면서 심리 공부를 시작했어. 2009년에 대기업을 퇴사하면서 가능하면 혼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면서 내 호흡에 맞게 사는 방식을 찾아보자고 결심했던 것 같아.”</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마침내 ‘무소속’이 된 연임은 공연예술 매거진 편집일을 꽤 오랫동안 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무용전문극장을 표방했던 LIG아트홀이 발간하던 계간지 [inter-VIEW], 그리고 서울문화재단 산하 서울무용센터가 발행했던 웹진 [춤:in]. 매우 개인적인 평가라는 전제하에 말하자면, 두 잡지 모두 무용이라는 키워드에서 출발하지만, 전통적인 장르의 경계가 얼마나 혁신적으로, 흥미롭고 아름답게 확장되고 기어이 무색해질 수 있는지를 보기 좋게 실험했던 매체였다. 내 딴에는 열심히 연극을 기획하고 있는데, 별로 연극으로 보여지(보아주)지 않아 외롭던 시절에 나는 이 매체의 지향에 열렬히 공감했고 지지했고 힘과 영향을 받았다. 지금은 모두 사라진 두 매거진이 가장 빛나던 시절을 연임이 만들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나는 책상 앞에서 공부만 했던 사람이잖아. 그런데, 무용하는 사람들을 만난 게 나에겐 너무 새로운 경험이었던 거야. 그때까지 막연하게만 인식하고 있었던 몸을 섬세한 연장으로 쓰는 사람들을 가까이에서 본 거지. 있는 곳이잖아. 그 무용단엔 다양한 몸들이 있었어. 땀내 나고, 멍들고, 까매진 발에, 땅딸막한, 길고 가냘픈 몸들이 함께 움직이는 걸 보면서 ‘아! 아름답다!’ 생각했어. 몸에 대해 가지고 있던 터부, 선입견 이런 것들이 완전히 깨진 거야. 아름다움에 대한 관점, 세계관 자체가 달라진 거지. 정말 놀라운 경험이었어. 그 경험이 나를 예술계에서 버틸 수 있게 해준 것 같아. 그래서 고마움이 있었고, 이 분야에 진 빚을 갚고 싶다, 기여하고 싶다는 생각이 ‘사심 없이’ 잡지를 만드는 원동력이 됐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나는 얇고 넓게 엄청 다양한 경험들을 해왔으니 그것들이 어떻게 세상과 연결되는지에 대한 감이 좀 있었던 것 같아. 무용도 내가 직접 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거리를 두고 보니, 곁의 무엇과 연결되는지가 보였던 것 같고. 혼자 하는 게 아니라 내 뜻에 공감하는 사람들과 같이 하는 작업이기도 했고. 내가 이런 걸 잘, 혹은 즐겁게 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 이런 일이 나에게 잘 맞는구나, 하는 걸 발견해서 기쁜 경험이었고, 굉장히 많이 배우기도 했어. 마무리가 좀 갑작스럽고, 문화적이지도 예술적이지도 않은 방식이었던 게 아쉽긴 했지만.”</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1459352673.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이제는 내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돕고 그 삶에 기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연임은 현재 심리상담사 겸 상담코치로 일하고 있다. (사진 촬영: 고주영)</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마음 마주하기-“누군가 성장하는 걸 보는 게 너무 좋은 거야”</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마음이 힘들어서 혼자 심리학을 공부했다고 했잖아. 그때 찾아간 대학 심리학과 교수님이 그러시더라고. 상담을 받고 싶은 건지, 상담을 하고 싶은 건지를 먼저 생각해보라고. 생각해보니 내가 도움을 받고 싶은 거더라고. 그래서 상담을 받기 시작했어.</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리고, 시간이 한참 흘러 코칭을 공부하며 숙제를 하다가 깨달은 거야. ‘아, 나는 누군가 성장하고, 치유되고, 편안해지도록 돕는 게 기쁘구나. 이젠 그 일을 해야겠다.’ 나를 좀 알게 됐고, 내 삶의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살지 고민하고, 내가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일, 기쁨을 느끼는 일을 알아챈 거지. 그래서 상담코칭 전공으로 대학원에 갔어. 이제는 내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돕고 그 삶에 기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내가 만난 이들이 성장하고, 편안해지고, 건강해지는 게 너무 좋아. 내 몸에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편하고.</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지금은 대학 상담소에서 학생들 상담도 하고, 개인 상담도 해. SNS(<a href="https://www.instagram.com/a___dear___friend" target="_blank">@a___dear___friend</a>, 언더바 3개씩)로 가끔 홍보를 할 때도 있는데, 상담 받으셨던 분들이 소개해주셔서 오는 경우가 제일 많아.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조금씩 하고 있어. 지금은 딱 이 정도가 좋은 것 같은데, 물론 현실적인 고민은 되지. 어쨌든 지금은 할 수 있는 데까지만 하자, 그냥 하루하루를 잘 지내보자, 그냥 그런 정도.”</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나 마주하기-“지금의 내가 모이면 어느 날엔가 내가 되어 있겠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사람들이 그런다? 네가 하는 일이 너무 많아서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그럼 난 그냥 ‘저는 김연임인데요’ 해. 그리고 제가 요새 관심 있는 건요, 아니면 요새 하는 일은요, 그렇게 덧붙이지. 내 직업이 뭔지, 직함이 뭔지, 어디 소속인지를 계속 증명해 도구로 삼아 봤자 뭐 어쩌겠어. 나는 맨날 변하는 사람인데, 구르는 돌 같은 애인데 뭐 어쩔 거야.</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나의 ‘명확한 선택과 결심’의 바탕엔 ‘난 내가 할 수 있는 걸 있는 힘껏 다 하는 삶을 살 거야’, 그거 하나. 나에게 명확함이 있다면 그때그때 순간의 명확함이지, 내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에 대한 명확함, 비전 같은 건 없어. 대신 그런 믿음은 있는 것 같아. 나는 내가 길을 헤매는 걸 되게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아. 진짜 길도, 내 삶에서의 길도 있는데, 실제로 시간의 여유만 있다면 난 헤매는 걸 좋아해. 낯선 길로 계속 가보는 걸 좋아하는 스타일이더라고. 빨리 가는 길, 쉬운 길이 있겠지만, 모르는 길을 계속 탐험하거나 탐색하는 게 좋아, 그러다 길을 만들기도 하고. 막혀 있으면 그냥 돌아오기도 하고. 하지만 돌아온 그 자리가 같은 자리가 아니라고 믿어.</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지금의 내가 모이면 어느 날엔가 내가 되어 있겠지. 아님 말고.(웃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b62ed0;">[필자 소개] 고주영</span>. 몇몇 예술축제와 지원기관을 거쳐 2012년부터 공연예술 독립기획자로 일하고 있다. [안산순례길 프로젝트](2015~2019), [플랜Q 프로젝트](2018~2023), [연극연습 프로젝트](2018~현재)를 기획·제작했고, 하고 있다. 연극과 연극 아닌 것, 극장과 극장 아닌 것, 예술과 예술 아닌 것 사이에 있고자 한다. 2007년부터 〈일다〉에 일본 제휴 매체인 〈페민〉 기사를 번역 중이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4-14 13:51:00</pubDate>
	   <section>sc8</section>
	   <section_k><![CDATA[일다의 방]]></section_k>
	   <section2><![CDATA[인터뷰]]></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고주영)]]></author>
	   <category><![CDATA[인터뷰]]></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4/2026041458075344.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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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우경화, 배외주의 넘어 ‘경계’에서 이야기가 열리다]]></title>
       <link>http://www.ildaro.com/10431</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노골적으로 배외주의를 드러내며 더욱 우경화되는 일본의 정치 현황 속에서, 일본의 페미니즘 언론 〈페민〉의 올해 신년호 1면을 장식한 것은 정유경 작가의 〈오무라 도자기〉(OMURA-Yaki,　大村焼き) 작품 이미지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자이니치(在日)코리안 3세 예술가 정유경 씨의 이 작품은 뿌리 깊은 일본의 배외주의, 식민지주의 역사를 보여준다. 〈페민〉은 “우리 사회가 붕괴되기 전에”라는 의미심장한 말로 외국인혐오와 인종차별, 그리고 군사주의에 경종을 울리는 신년호 기획을 내놓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오무라 도자기〉 작품은 2차 세계대전 말기에 아리타(有田) 등 도자기 산지에서 만들어진 ‘도제 수류탄’의 형태를 본 따, 아리타 도자 기법으로 제작되었다. 아리타 도자기는 임진왜란 시기 도요토미 히데요시 군이 조선을 침공했을 때 연행해온 조선인 도공들이 창시했다고 알려져 있다. 또, 작품 제목에서 ‘오무라’(大村)는 나가사키현 오무라시에 있는 ‘오무라입국자수용소’를 가리킨다. 1950년 ‘불법입국자’로 분류된 조선인을 조선반도로 강제송환하기 위한 목적 등으로 만들어진 장소이며, 현재는 출입국관리센터가 되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1310449436.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자이니치(在日)코리안 3세 예술가 정유경(チョン·ユギョン) 作 〈OMURA-yaki〉(오무라 도자기, 2023) 사진. 로고 마크는 ‘Zainichi Against Raicism’(인종주의에 반대하는 자이니치)의 머리글자. 노예무역을 통해 제국으로 번성했던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일본에서 수입한 아리타 도자기에 새긴 ‘VOC’(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네덜란드어 표기의 약칭)를 비꼰 것이다. (촬영: 마나베 유리)</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작년 11월, 일본에서 정유경 작가의 〈오무라 도자기〉를 소재로 책 『전쟁과 예술의 ‘경계’에서 이야기를 열다-아리타·오무라·조선과 탈식민지화』가 출간되었다. 출판사인 하나타바책방 대표 이토 하루나(伊藤春奈) 씨에게 이 책의 의미에 관한 글을 기고받았다. </span><span style="color: #3366ff;">[편집자 주]</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정유경 작가가 ‘오무라 도자기’를 통해 던지는 질문</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하나타바책방(花束書房)에서 출간한 『전쟁과 예술의 ‘경계’에서 이야기를 열다-아리타·오무라·조선과 탈식민지화』는 〈오무라 도자기〉라는 작품이 기점이 된 책이다. 이 작품을 제작한 자이니치코리안 3세 예술가 정유경(チョン</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ユギョン) 씨, 그리고 한일관계사 등을 연구하는 야마구치 유카(山口祐香) 씨의 대담과 에세이 등을 모은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2017년 정유경 작가는 창작의 거점을 한국으로 옮겼지만, 한국으로 이주하기 얼마 전 해외 출장에 불리한 ‘조선 국적’(일제강점기 일본으로 이주한 조선인들과 그 후예들이 대한민국이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적을 선택하지 않고, 일본에 귀화하지도 않은 경우 갖게 되는 행정상의 적. 관련 기사: ‘조선적(籍)’자의 변치 않은 현실 <a href="https://ildaro.com/4400" target="_blank">https://ildaro.com/4400</a>)에서 ‘한국 국적’으로 전환하는 등 국가가 자의적으로 긋는 경계선의 폭력성을 체감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후 한국에서 예술 활동을 하던 그는 한국 병무청으로부터 “3년 이상 한국에 거주할 경우 징병 대상이 된다”는 서면 통보를 받고, 어쩔 수 없이 일본으로 돌아왔다. (한국의 법과 제도는 재일조선인의 역사적 상황에 대한 고려가 없다. 작가는 일본에서 조선학교에 다니며 북한에 친화적인 교육을 받고 자랐는데, 대한민국은 그의 체류 조건으로 북한과의 전쟁을 대비하는 군 복무 의무를 부여한 것이다. 관련 기사: “꽝! 균열의 양쪽을 응시하는 힘” <a href="https://ildaro.com/10353" target="_blank">https://ildaro.com/10353</a>)</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정유경 작가는 일련의 개인적인 경험까지 포함해 100년 이상 이어진 일본의 식민지주의, 재일조선인이 당하는 차별, 남북 분단으로 인한 갈등, 자신에게 덮쳐온 한국전쟁의 여파 등. 일본 사회에서는 이야기되지 않는 역사의 과제를 작은 〈오무라 도자기〉에 집약시켰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임진왜란 시기 조선에서 돌아온 무사가 호랑이를 풀어놓은 데에서 오무라 지역 일대가 ‘호코바루’(放虎原, 호랑이가 풀린 마을이라는 뜻)라 불렸던 것도, 당시 연행되어 온 조선인 도공들로 인해 ‘아리타 도자기’가 처음 만들어진 배경도, 그저 일본에서는 ‘흥미로운 역사거리’로만 소비된다. 이런 사회에서 정유경 작가는 회화 작품 등을 포함한 〈오무라 도자기〉 연작을 통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작가는 후쿠오카를 거점으로 창작을 하는데, 도자 작품인 〈오무라 도자기〉는 아리타에 체류하며 완성했다고 한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1304442854.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필자 이토 하루나(伊藤春奈) 씨. ‘하나타바책방’(花束書房)의 설립자이며, 『왕언니의 문화사』 등을 집필한 작가이기도 하다. 인터뷰 기사: “100년 전, 가부장제 사회의 ‘역할’에 저항한 여성들” <a href="https://ildaro.com/10289" target="_blank">https://ildaro.com/10289</a> (촬영: 오치아이 유리코 ©落合由利子)</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조선인의 ‘이동’ 역사와 자의적으로 그어진 ‘경계’ 사이</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내가 처음 〈오무라 도자기〉를 알게 된 건, 우연히 소셜미디어를 통해서였다. 작품의 모습과 함께, 작품의 개념을 설명하는 다음과 같은 글을 보고 가슴이 뜨거워졌던 기억이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400년 이상 전부터 이어져 온 조선인의 ‘이동’을 다시 생각하고, 자의적으로 그어지는 경계선에 질문을 던지는, 현 시점에는 존재하지 않는 가공의 도자기.”</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로부터 얼마 후에 정유경 작가와 야마구치 유카 씨의 대담을 듣게 되었다. 야마구치 유카 씨는 아리타 출신으로, 어머니 쪽이 조선 혈통이다. 가족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오무라출입국수용소, 아리타 도자기 제작의 역사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그러한 배경도 야마구치 씨가 연구자가 된 이유의 일부가 됐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 두 사람이 만난 사실에 우선 놀랐고, 규슈 각지의 식문화와 그릇 등 일상적인 것들을 통해 조선반도와의 연관성을 생각하는 야마구치 씨의 글에도 매료되었다. 연구자와 생활인의 관점이 절묘하게 섞인 넓은 품, 개인사와 수백 년에 걸친 조선과 일본의 역사를 엮는 경지, 거기에 지역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일상의 유머까지 담겨 있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정유경 씨과 야마구치 유카 씨의 대담에서 각자 자신과 연관된 역사에 대해 깊이 고민해온 흔적을 엿볼 수 있었고, 〈오무라 도자기〉 작품해설에서는 사람의 무의식에 작동해 무언가를 열어젖히는 듯한 힘을 느꼈다. 두 사람이 주고받는 개인의 절실한 이야기, 그리고 지역의 발자취에서 역사적 과제를 생각하게 하는 힌트가 가득하다고도 느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일본 사회에서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을 정유경 씨의 이야기를, 첫 대면인 야마구치 씨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마지막에는 캐치볼을 주고받는 듯한 장면이 전개되며 정 작가의 말이 훅 열리는 장면도 봤다.(책의 제목-전쟁과 예술의 ‘경계’에서 이야기를 열다-는 그때의 상황을 표현한 것이다.) ‘대화’가 억압이 되기도 하는 지금, 둘의 솔직한 대화에서 순순히 희망을 느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1305222859.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정유경 작가의 〈오무라 도자기〉를 소재로 엮은 책 『전쟁과 예술의 ‘경계’에서 이야기를 열다-아리타·오무라·조선과 탈식민지화』(정유경, 야마구치 유카 공저, 이토 하루나 편집, 하나타바쇼보, 2025) 표지 이미지. 하나타바책방 홈페이지 <a href="https://www.hanatabasyobo.com" target="_blank">www.hanatabasyobo.com</a></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페미니즘을 통해 배운 것 - 나와 사회와 역사의 ‘연결’을 깨닫고,</span></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나의 ‘위치’를 확인하며 새로운 ‘언어’를 만드는 일</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책 부제(아리타·오무라·조선과 탈식민지화)의 지명에도 많은 의미를 담았다. 그 땅에서 살고자 모색하거나, 혹은 그것을 실현하지 못했던 조선인과 그 역사를 망각하지 않는 것, 오무라수용소와 출입국관리로 이어져 온 조선인/외국인 학대와 폭력, 그와 연속선상의 경찰 권력, 돌연 ‘경계선’을 긋는 국가, 눈곱만큼도 역사에서 배우려 하지 않는 배외주의에 휩쓸리는 ‘국민’, 그들의 근원에 있는 ‘식민지주의’를 묻고 싶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문제가 너무나 뿌리 깊어 설명이 길어지고야 마는 책이지만, 모든 것을 새겨넣고 싶어 제목에 전부 담아버렸다. 복잡한 역사는 복잡한 대로 알고 싶고, 이야기하고 싶고, 생각하고 싶기 때문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런 나의 바람이 패키지에 담긴 데는 멋진 디자인의 힘이 크다. 미야코시 사토코 씨가 북디자인을 맡아주었다. 미야코시 씨에 따르면, 아리타 도자기가 도자기 흙에서 만들어지니, 꺼칠한 질감의 표지에서 광택이 있는 커버를 향해 도자기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표현했다. 가공되지 않은 투박한 표지의 질감에 이 책의 주제를 노이즈처럼 울려 퍼지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담겨 있다니 기쁠 따름이다. 정형에서 벗어난 미묘한 판형과 한 손에 잡히는 사이즈는 ‘질문을 던지는’ 오무라 도자기를 떠올리게 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오무라 도자기〉 작품의 배경을 생각해 보니, 이것이 내가 페미니즘에서 얻은 여정과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사회, 나아가 시대와 역사의 연결을 깨닫고, 내가 서 있는 위치를 확인하면서 언어를 만들어내는 경험. 내가 페미니즘을 통해 배운 것이다. 한편으로는 일본의 ‘전전/전후’라는 고정화된 서사, 비대해져버린 전후민주주의 ‘신화’, 그것을 일부 페미니스트를 포함한 자유주의자들이 이끌어왔다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은 보다 깊어졌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사실 한마디로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전쟁과 예술의 ‘경계’에서 이야기를 열다-아리타·오무라·조선과 탈식민지화』는 읽으면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싶어지는 책이다. 당신이 몰랐던 역사와 만나게 된다면, 관련된 책을 더 찾아 읽어보거나 그 의문을 누군가에게 전하며 사유를 열어나가길 바란다. 그러다보면 분명, 왜 일본이 지금 같은 모습이 되어버렸는지, 그 이유를 일부 들여다볼 수 있을 테니. <span style="color: #3366ff;">[번역-고주영]</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일다〉와 제휴 관계인 일본의 페미니즘 언론 〈페민〉(women’s democratic journal) 기사를 번역, 편집한 내용입니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4-13 17:00:00</pubDate>
	   <section>sc4</section>
	   <section_k><![CDATA[국경너머]]></section_k>
	   <section2><![CDATA[아시아]]></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이토 하루나)]]></author>
	   <category><![CDATA[아시아]]></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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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성역할, 성폭력, 침묵…조카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은 것들]]></title>
       <link>http://www.ildaro.com/10430</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둘째 조카가 예닐곱 살이었을 때, 함께 유원지에 놀러 간 적이 있다. 아이와 화장실에서 손을 씻는데, 비슷한 또래의 다른 아이가 조카에게 물을 뿌리고 지나갔다. 조카는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어 서 있을 뿐, 화를 내지 않았다. 올라오는 감정을 꾹 누르는 모습이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내가 안고 달래준 뒤 아이는 곧 기분이 풀렸지만, 나는 걱정이 되었다. 마음이 상해도 구석에서 얼굴만 일그러뜨릴 뿐 항변하지 않는 모습을 전에도 몇 번 보았기 때문이다. 부정적 감정을 삭히는 게 몸에 배어 부당한 일을 겪어도 참는 사람으로 자라는 건 아닐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나는 아이에게 눈을 맞추고 말했다. “누가 너를 힘들게 하면 그 사람한테 말해야 돼. 화가 날 땐 참지 말고 화를 내도 돼. 알았지?”</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너는 그렇게 자라지 않기를</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사실 이전에도 둘째 조카를 보며 걱정스러운 마음이 든 적이 있었다. 아이가 다섯 살 때 내 옆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흥얼거리며 크레파스를 고르다가 이렇게 말했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핑크색 골라야지. 나는 여자니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분홍색을 좋아하는 것은 취향일 수도 있지만, ‘여자이기 때문에 분홍색을 골라야 한다’는 생각은 성 역할 고정관념으로 이어지기 쉬워 바로잡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고모 역할에 익숙지 않았고, 오빠네 부부의 자녀교육에 </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대해 참견하게 되는 것 같아서 그냥 지나가고 말았다. 그게 오래 아쉬웠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세 번째로 마음에 걸리는 일이 생겼을 때는 오빠에게 나의 염려를 털어놓고 상의했다. 놀이터에서 아이가 탄 그네를 밀어주다 힘에 부쳐 옆에 있던 오빠에게 대신 밀어달라고 하니, 아이가 이렇게 외쳤던 것이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고모는 여자라 힘이 없어!”</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여자와 남자의 평균적 신체 능력에 격차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이전에 느낀 찜찜함 때문에 아이의 머릿속에 ‘여자 = 힘이 없다’라는 공식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나는 조카가 나처럼 ‘고분고분한 소녀’의 모습을 학습하지 않기를 바랐다. 평소 주변 상황 파악이 빠르고 타인의 기분을 잘 알아차리는 아이였다. 나는 내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기보다 상대의 만족과 관계 안정을 우선시하며 자란 내 모습을 그 애에게 겹쳐 보고 있었다. 혹시 나처럼 성폭력을 겪으며 자신을 잘 방어하지 못하고 많은 상처를 안게 되는 건 아닌지 두려웠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나는 성폭력 교육에 대한 동화책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오빠에게 연락해, 아이가 이미 성폭력 예방 동화책을 가지고 있거나 관련 교육을 받았는지 확인했다. 오빠는 자신을 지키는 일에 대해서는 집에서도 가르쳤고 유치원에서도 배울 거라며 나를 안심시켰다. 그 말을 들으니 ‘내 세대랑 환경이 다르긴 하지.’라는 생각이 들어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1243425032.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괜찮아, 네 잘못이 아니야!』(정이숙 글, 센·이주연 그림, 키움북스, 2019) 조카에게 선물하기 위해 찾아본 동화책 중 하나. 성폭력 대처 방법을 담고 있다. 나는 여자아이의 신체, 복장, 행동 단속에 집중된 성교육 동화책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과 의사 표현 능력을 키워주는 책을 선물하고 싶었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후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성별에 관계없이 누구나 성폭력의 가해자가 될 수도, 피해자가 될 수도 있는 것인데, 왜 나는 남자인 첫째 조카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않고 둘째 조카의 교육만 신경 쓴 것일까. 더욱이 아동성폭력 가해자의 99%가 남성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첫째 아이에 대한 교육 역시 중요하다. 혹시 내가 무의식에서 나의 부모 세대처럼 성폭력을 ‘여자가 조심해야 할 일’로 여긴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들었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깊이 생각해 보니, 첫째 아이는 내게 성별 고정관념에 대해 염려될 만한 표현을 한 적이 없었다. 또 둘째 아이가 이 사회의 여성으로 살아가며 다 피하기 어려울 성차별과 성폭력 피해 경험에서, 적어도 자신의 태도를 원인 삼는 생각이나 ‘잘 대응하지 못했다’는 자책만은 덜어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러니 내 마음은 둘째 조카만이 아니라, 어릴 적의 나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주변에서 비슷한 고통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음으로써 내가 어렵게 지나온 과정을 헛되지 않게 만들고 싶었다. 그것은 나 자신을 치유하는 일과 이어져 있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달라진 원가족의 모습</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둘째 아이는 밝고 해맑기 이를 데 없지만, 그 애도 주변과 사회로부터 크고 작은 상처를 입으며 살아갈 것이다. 그 때문에 빛나는 웃음에서 진정성이 점점 사라진다고 해도, 그것은 그 아이가 스스로 겪고 치유해 나가야 할 일임을 안다. 다만 나와 같은 어른이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여성인 나 스스로가 어떤 상황에서도 의견을 분명히 얘기하고 가족 안에서 마땅한 대우를 받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몇 년 사이, 원가족 안에서 내가 받아온 대우는 상당히 달라졌다. 나는 ‘저것 좀 가져와라.’라며 내게 습관적 명령을 하는 오빠에게, ‘부탁하는 말로 바꾸지 않으면 하지 않겠다.’라고 단호한 어조로 맞받았다. 어린 조카들 앞에서였다. 아이들에게 ‘장남은 더 나은 대우를 받는 게 당연하다’는 인식을 심어주고 싶지 않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리고 엄마와 오빠에게 나를 능력 없는 존재로 깎아내리는 말 습관을 고치도록 거듭 요구했다. 지난한 과정이었지만 가족들은 점차 바뀌었다. 후에 오빠는 내 글을 읽고 전화를 걸어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엄마가 너를 그렇게 대하길래 나도 생각 없이 그런 거야.”</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하지만 가장 다행인 것은, 가족 안에서 ‘엄마에 대한 존중’을 이끌어낸 것이다. 3년 전, 추석 연휴이자 엄마의 생일이던 날, 나는 본가에 엄마와 오빠, 조카들과 함께 있었다. 전부터 엄마 생일이라는 개념은 명절에 묻혀 흐지부지 사라지기 일쑤였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때 나는 조카들과 놀아주느라 상차림을 돕지 못했지만, 적어도 상을 차려준 사람이자 그날의 주인공인 엄마가 자리에 앉아 숟가락을 뜨는 게 가족 식사의 시작이 되길 바랐다. 하지만 어서 앉아서 같이 먹자는 내 말에도 엄마는 여전히 주방을 오가며 “나 신경 쓰지 말고 먼저들 먹어.”라는 말을 반복했다. 그리고 오빠와 두 조카, 나까지 식탁에 앉아 의자가 부족한 상황에서, 엄마는 “나는 서서 먹어도 돼.”하면서 정말로 서서 밥을 먹기 시작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나는 그 모습에 충격을 받았지만, 오빠는 엄마 옆에 아무렇지 않게 앉아 있었다.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올랐고, 울면서 오빠에게 소리를 질렀다. 엄마의 돌봄노동은 식구들에게 당연했고, ‘잘 먹겠습니다’, ‘잘 먹었습니다’라는 인사조차 없었다. 나 자신을 포함해 거기에 익숙해져 있는 가족들에게 화가 났다. 내가 어릴 적 이혼한 뒤 거의 혼자 생계와 돌봄을 책임져온 엄마가 왜 이런 대접을 받는지 이해되지 않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러자 엄마는 “엄마 괜찮으니까 울지 말어.”라고 하면서도 눈물을 닦았다. 내가 아이들 앞에서 소리를 지른 것은 분명 잘한 일이 아니었지만, 적어도 할머니가 식구들에게 밥을 해주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집안에서 존중받아야 할 사람들이 남자만은 아니라는 것을 아이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지난 설에 본가를 방문했을 때는 크게 놀랐다. 오빠는 내게 앉아서 쉬라고 한 뒤 엄마와 함께 밥상을 차렸다. 식사를 시작할 때는 엄마가 먼저 수저를 들기를 기다렸고, 아이들에게 “이 음식들 누가 해주신 거지?”라고 물은 뒤 “할머니, 잘 먹겠습니다.”라고 인사하도록 가르쳤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집안 분위기는 내가 기대한 것보다 훨씬 달라져 있었다. 3년 전 나 말고는 아무도 기이함을 느끼지 못하던 밥상의 풍경이 떠올라 감회가 새로웠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건 정말 자랑스러워해도 될 일이라고.</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가족들의 변화를 본 뒤 우리 집으로 돌아와 누운 밤, 나는 문득 양손을 들어 내 머리와 어깨, 양팔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너 참 잘해왔어. 너 진짜 장해.’ 어려서부터 내가 ‘말 잘 듣는 소녀’의 역할을 하며 살아오는 데 큰 영향을 미친 원가족을 내 힘으로 바꾸어냈다는 것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지난 3년의 여러 장면이 머릿속에 천천히 흘렀다. 성폭력에 대한 대응을 고민하고 연습하던 밤들, 꾸준히 해온 심리상담에서 기억에 남는 순간들, 다른 성폭력 피해자들과의 다양한 집단상담·사이코드라마·캠프, 온라인으로 나눈 대화, 성폭력과 페미니즘에 대한 책을 읽으며 ‘숨이 쉬어진다’고 느끼던 시간, 내 이야기를 써나가며 얻은 용기.</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1244378723.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이제 모든 여성들이 치유되었다고 상상해 보라.” 성폭력 피해생존자의 치유를 위한 책 『아주 특별한 용기』(엘렌 베스·로라 데이비스 저, 이경미 옮김, 동녘, 2012)에서 와닿았던 부분. [사진 출처=민바람]</p></td></tr></tbody></table><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여기까지 걸어온 나에게, 그리고 당신에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제 겨우 성폭력 트라우마에서 벗어난 내가 세상에 만들어갈 수 있는 변화는 먼지보다 작을지도 모른다.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친구가 자신을 성희롱한 민원인을 계속 마주했을 때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같이 그 민원인을 욕해주고 그 기관의 성폭력 대응 매뉴얼에 대해 묻는 일밖에는 없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저 확실한 것은, 살면서 겪어온 많은 성폭력을 들여다보고, 대응하고, 치유하는 과정을 지나오며 내 안에서 무언가 달라졌다는 사실이다. 이제 나는 ‘구조’를 본다. 나를 비롯한 내 주변 여성들이 어째서 엄격한 자기검열과 무력감을 갖게 되었는지, 내가 분노하고 원망했던 남성들의 언행이 어디에 기인한 것인지 안다. 과거 나의 남성 친구들이 페미니즘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했던 말들 속에 어떤 모순과 기만이 숨어 있었는지도 밝혀 말할 수 있게 되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직장에서도 내게 자연스레 반말을 섞는 남성에게 존댓말을 요구하고, 여러 번 잘못을 하고도 아무 일 없듯 넘기는 남성에게는 왜 사과하지 않는지 차분히 묻는다. 그리고, 글을 쓴다. 과거라면 나를 잠 못 들게 했을 일들에 대해 ‘또 쓸 만한 에피소드가 생겼군.’하고 반색하기도 한다. 지금의 나는 누군가 앗아갈 수 없는 힘이 나에게 있음을 믿는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제는 안다. 조카의 말 한마디를 그렇게 신경 썼던 것은 단지 내 가족을 지키자는 마음이 아니라, 내가 지나온 부정의한 세계를 다음 세대에 그대로 넘기지 않으려는 마음이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1244591247.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그러니 기억하라. 치유 작업 하나하나가 이미 세상을 치유하는 데 기여하고 있음을.” 성폭력 피해생존자의 치유를 위한 책 『아주 특별한 용기』(엘렌 베스·로라 데이비스 저, 이경미 옮김, 동녘, 2012)에서 필사한 문장들. [사진 출처=민바람]</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이 뒤는 없나요?’</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 연재를 시작하기 전, 몇 편인가 쓰다 마무리 짓지 않은 채로 두던 개인 매거진의 발행 글에 누군가 그렇게 댓글을 달았다. 3년 전의 글, 그것도 어설프기 그지없는 글을 읽어주고 필요로 하는 이가 있다는 게 신기하고 고마웠다. 나는 ‘아직은 없지만, 이어가 보겠다.’라고 답했었다. 그렇게 일단 던져놓은 말이 14화의 칼럼 연재가 되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페미니스트 시인 뮤리엘 루카이저(Muriel Rukeyser)는 ‘여성이 자기 삶에 대해 진실을 털어놓는다면 세상은 터져버릴 것’이라고 했다. 나는 이것만은 단언할 수 있다. 당신이 자신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다면, 적어도 당신을 구속하던 당신 안의 무언가는 깨지고 터질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에게 ‘이 뒤는 없나요?’라고 물어주는 사람이 된다면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자유가 우리 자신, 나아가 다른 누군가의 아픔을 덜어줄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세상이 심어놓은 우리 안의 두려움과 불안은 우리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다. 그러니, 자신에게 말을 걸어주자. 당신이 하고 싶은 그 이야기는 분명히, ‘해도 되는 이야기’이다. <span style="color: #d126d8;">[끝]</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d126d8;">[필자 소개] 민바람</span>. 자신의 경험으로 사회 구조를 비추는 글을 쓴다. 퀴어, 여성, 신경다양성, 빈곤, 지역 문제의 교차성 탐구에 관심이 많다. 『나는 ADHD 노동자입니다』(2025년 재출간), 『낱말의 장면들』(2023) 등을 출간 후, 퀴어 소설을 써왔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4-12 09:41:00</pubDate>
	   <section>sc1</section>
	   <section_k><![CDATA[사회]]></section_k>
	   <section2><![CDATA[성폭력]]></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민바람)]]></author>
	   <category><![CDATA[성폭력]]></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4/2026041246406930.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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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세례 받던 날, 나는 ‘크리스티나’가 되고 싶지 않았다]]></title>
       <link>http://www.ildaro.com/10429</link>
       <description><![CDATA[<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들어가는 말 – 아직도 동성 부부를 인정하지 않는 대한민국에서</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어릴 때 나는 소꿉놀이를 하면 아빠 역할을 맡았고, 조금 커서도 격식을 갖춰야 하는 자리에서는 치마 정장 대신 바지 정장을 고집했다. 그때는 몰랐다. 그 고집이 결국 나를 설명하게 될 거라는 것을.</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나는 지금의 파트너와 함께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채, 2013년 동성혼이 합법인 캐나다에서 결혼했다. 우리의 결혼은 미국에서도 법적으로 유효하지만, 정작 우리가 태어나고 자란 대한민국에서는 아직 그렇지 못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나는 동성 배우자와의 관계에 대해 국내 항공사에 ‘가족 등록’(2019년 12월, 대한항공에서 마일리지 합산이 가능한 스카이패스 가족 고객으로 등록)을 하였고, 최근에는 대법원의 동성 동반자에 대한 피부양자 인정 판결이 나옴에 따라 ‘건강보험 피부양자 등록’까지 마쳤지만, 아직도 대한민국에서는 우리가 부부임을 인정받지 못한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1039058469.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나와 배우자는 2013년에 동성혼이 가능한 캐나다에서 결혼했다. 우리 결혼의 증인 ‘게이 부부’가 찍어준 결혼식 직후 사진. (크리스 제공 사진)</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아버지 역시 오랫동안 내 결혼을 인정하지 않았다. 다행히 이제는 우리의 혼인 관계를 인정해 주는 친인척도 조금씩 생기고 있다. 그 사실이 긴 시간 속에서 나를 버티게 하는 힘이 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가톨릭 신자이자 성소수자인 나는 오랫동안 내 정체성을 숨기며 살아온 시간과, 이제는 더 이상 숨지 않으려는 마음 사이에서 자주 묻는다. ‘사랑은 무엇으로 증명되는가, 그리고 누가 그것을 인정하는가.’ 이 질문이, 내 글을 읽는 누군가의 마음에도 가만히 닿을 수 있기를 바란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첫 세례식, 여자 아이에게 허락되지 않은 이름</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유치원 옆 성당에서 세례를 받던 날, 나는 ‘크리스토퍼’가 되고 싶었다. 슈퍼맨을 연기한 배우 크리스토퍼 리브의 이름이었다. 빨간 망토를 휘날리며 하늘을 날아다니는, 세상을 구하러 온 영웅. 세례명으로 그 이름이 갖고 싶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하지만 그 시절, 여자아이에게 남자 성인의 세례명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크리스티나’가 됐다. 크리스티나. ‘티나’라는 꼬리가 문제였다. 입 밖으로 내뱉을 때마다 혀끝에 닿는 발음이 어색했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예의 바르게 웃어야 하는 연극 같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성당에서 첫 영성체 예식 때 여자 아이들만 미사포를 쓰고 흰 드레스를 입어야 한다는 지침이 참 싫었다. 초등학교 졸업식 날엔 고집을 부려 바지 정장에 넥타이를 맸다. 중학교는 사복을 입을 수 있는 학교에 다녔지만,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무렵 교복 자율화가 폐지되면서 대부분의 여학생이 치마 교복을 입어야 하는 상황이 왔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나는 치마를 입지 않아도 되는 학교에 가게 해달라고, 생애 처음으로 54일 묵주 기도를 했다. 매일 밤 촛불을 켜고 정성껏 기도했다. 당시 내가 치마 입기 싫어하는 마음을 잘 알던 어머니 주변 성당 분들도 함께 기도해 주셨다. 그리고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내가 배정받은 곳은 천주교 재단 여고였는데, 놀랍게도 그 학군에서 교복 의무화가 시행되지 않은 거의 유일한 학교였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신을 닮게 창조된 인간이 왜 여성 남성 둘 중 하나여야 하는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나는 오랫동안 레즈비언으로 정체화하고 살았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 명칭이 내 존재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는 갈증을 느꼈다. 크리스티나가 그러했듯 말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후 여러 젠더 개념들을 접하면서 나는 논바이너리(non-binary, 성별이 남성/여성이라는 이분법 틀에 갇히지 않는 정체성), FTM 스펙트럼(여성으로 지정된 출생 성별에서 위화감을 느끼는 범주)에 가깝다는 걸 알게 됐다. 나는 넓은 어깨와 단단한 근육을 가진, 키 큰 몸을 갈망한다. 여성스러운 가슴의 형태를 마주하는 일은 여전히 불편하다. 사람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것은 관념의 문제가 아니다. 매일 거울 속에서 실감하는 언짢은 현실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어머니가 나를 향해 일컬었던 ‘중성’이라는 단어에는 부정적인 시선이 담겨 있었지만, 그 비하 섞인 명명은 어린 내게 뜻밖의 해방감을 선사하기도 했다. 그 말을 통로 삼아 나는 비로소 ‘여성’이라는 견고한 틀 밖으로 걸어 나갈 수 있었으니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기독교에서는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됐으며, 하느님과 천사들은 성별을 초월한 존재라고 가르친다. 가브리엘, 라파엘, 미카엘 — 대천사들은 여성도, 남성도 아닌 존재들이다. 그렇다면 하느님을 닮은 존재가 왜 이 땅에서는 반드시 둘 중 하나여야 하는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가톨릭교회에서 세례명은 한 번 받게 되면 수도자가 되거나 극히 예외적인 상황이 아니고서는 평생 바꿀 수 없다. 고(故) 변희수 하사는 ‘가브리엘’이라는 세례명을 받았으나, 세상은 그녀가 떠난 뒤에야 비로소 ‘가브리엘라’라고 부르며 그녀를 추모한다. 죽어서야 온전한 이름을 얻을 수 있는 서글픈 현실이다. 때로는 성직자들의 비밀스러운 도움을 받아, 기존 이름의 주인을 ‘망자’(亡者)로 처리한 뒤 새 이름을 다시 등록하는 절차를 거치기도 한다. 죽어야만 이름을 바꿀 수 있는 시스템 안에서, 누군가는 그렇게 다시 태어난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1039503365.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배우자와 나는 캐나다에서 결혼을 하였고, 대한항공에 ‘가족’ 멤버십으로 등록되었고, 최근 대법원 판결 이후 ‘건강보험 피부양자’ 등록을 마쳤지만, 아직도 대한민국에서는 우리가 부부임을 인정받지 못한다. (크리스 제공 사진)</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또한 교회는 하느님이 세상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했고 둘이 결합해 자녀를 낳는 것이 ‘자연의 질서’라고도 가르친다. 수컷과 암컷이 짝을 이루어 종을 이어가는 생태계처럼, 인간도 그 질서를 따라야 한다는 것. 그 질서를 벗어나는 존재는 ‘무질서’하고 ‘비자연적’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런데, 정작 자연을 들여다보면 어떤가.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다 보면 자웅동체로 태어나는 생물이 있고, 수백 종의 동물에서 동성 간 성적 행동이 관찰된다. 자연은 그들이 말하는 것보다 훨씬 다양하다.(이와 관련한 생물학 연구로 브루스 배게밀의 『생물학적 풍요』, 조안 러프가든의 『진화의 무지개』 등이 있다.) 무엇보다 신의 이름을 내세워 누군가를 배제하고 혐오하는 행위가, 과연 예수가 가르친 사랑의 본질과 맞닿아 있는지 깊이 되묻지 않을 수 없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많은 퀴어가 닉네임으로 살아간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대학 시절부터 아버지는 남성적인 스타일을 선호하고 이성에게 무관심한 나를 보며, ‘결혼은 자식의 도리’임을 역설하셨다. 결국 내 정체성이 당신의 세계관과 충돌하자, “너 같은 자식은 없는 자식 취급하겠다”는 말로 선을 그으셨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내가 동성 배우자와 결혼한 사실을 밝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니가 무슨 결혼을 해? 니가 뭔 남자랑 결혼했냐.”</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캐나다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대한항공에 배우자와 가족으로 등록되고, 건강보험 피부양자로 인정받은 뒤에도…. 아버지에게 받은 그 모멸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한국 성소수자들이 겪는 통증의 뿌리는 대부분 가족과 맞닿아 있다. 어떤 이에게는 평생의 흉터로, 어떤 이에게는 끝내 닿지 못한 후회로 기록될 그 파편 같은 말들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런데, 그 파편조차 마주하지 못한 채 깊은 침묵 속에 자신을 가두는 이들도 꽤 있다. 가족에게 상처받을까 봐, 혹은 내가 사랑하는 가족에게 상처를 줄까 봐 두려워 숨죽이며 살아가는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우리는 그렇게 날카로운 말들과 무거운 침묵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지나며 각자의 삶을 버텨내고 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나와 배우자가 만든 가족에게 이름을 붙이다, 아콘네(Acorn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나는 부모가 지어준 한글 이름이 불편하다. 그 이름을 부를 때마다 불효하는 마음이 따라온다. 성소수자 대부분이 커뮤니티에서 실명을 쓰지 않는다. 신분 노출이 두렵기 때문이다. 직장을 잃을 수도 있고, 가족에게 알려질 수도 있고, 때로는 안전이 위협받기도 한다. 온라인에서도, 오프라인 모임에서도, 인터뷰에서도 — 우리는 닉네임으로 존재한다. 이름을 숨겨야 살아남을 수 있는 세계에서, 내 영어 이름 크리스(Chris)가 더 편한 이유다. ‘크리스’는 크리스토퍼도 크리스티나도 아닌, 그냥 ‘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름 하나에 이렇게 많은 것이 담긴다. 젠더, 가족, 신앙, 두려움, 그리고 살아남는 방식.</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1040161540.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우리 부부의 영어 이름이 적힌 결혼 1주년 기념 케이크. Ari와 Chris의 첫 자를 따서, 우리 둘이 함께 구성한 가족의 이름을 만들었다. 아콘네(Acorne)라고. (크리스 제공 사진)</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아버지가 호적에서 파내겠다던 자리에, 나는 새로운 이름을 넣곤 한다. 아내의 영어 이름 Ari와 내 영어 이름 Chris의 첫 자를 따서, 우리 둘이 함께 구성한 가족의 이름을 만들었다. 김가네, 최가네처럼 — 아콘네(Acorne)라고. 작은 도토리(acorn) 한 알이 참나무(oak)가 되듯 우리가 함께하면 크게 자란다는 뜻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름을 짓는 존재는 결국 나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4-10 09:36:00</pubDate>
	   <section>sc5</section>
	   <section_k><![CDATA[소수자 시선]]></section_k>
	   <section2><![CDATA[퀴어]]></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크리스)]]></author>
	   <category><![CDATA[퀴어]]></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4/2026041042483980.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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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강제 퇴거의 폭력, ‘우리에게 다른 땅은 없다’]]></title>
       <link>http://www.ildaro.com/10428</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color: #3366ff; font-family: 바탕;">*이 글은 씨네큐브에서 진행된 〈노 어더 랜드〉 씨네토크(유운성 영화평론가, 이종찬 문화평론가)에서 공유된 발언과 설명을 참고해 작성되었습니다. 일부 내용은 해당 자리에서 소개된 구술 정보를 바탕으로 합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지금 지구에서 가장 아픈 곳</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대학 시절,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해나가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한 교수님께서 해주신 말이 있다. “지금 지구에서 가장 아픈 곳에 대해 말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 지구에서 가장 아픈 곳은 시리아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지금, 지구상에 가장 아픈 곳 중 하나는 아마도 팔레스타인일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다큐멘터리 영화 〈노 어더 랜드〉는 팔레스타인 서안지구 마사페르 야타(Mosfaret Yatta)에서 일어나는 강제 퇴거를 담았다. 강제 퇴거 혹은 점령, 분쟁 등 사실 어떠한 언어로도 설명하지 못 하는 이 현재진행형의 폭력은 영화를 보고 있는 매 순간마다 눈을 감거나 영화관을 뛰쳐나가 도망가고 싶게 만든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0804329974.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다큐멘터리 영화 〈노 어더 랜드〉(No Other Land, 바젤 아드라, 함단 발랄, 유발 아브라함, 라헬 쇼르 감독, 2024) 스틸 컷</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영화의 배경이 되는 마사페르 야타는 1980년대 초 이스라엘에 의해 ‘사격 훈련 구역’(Firing Zone 918)으로 지정된 곳이다. 군사 훈련이라는 명목이지만, 이 지정은 그곳에 오랫동안 뿌리내리고 살아온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불법 거주자’로 만드는 행정적 장치로 작동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실제로 이 지역에는 이스라엘이 서안을 점령하기 이전인 1967년 이전부터 살아온 공동체가 존재했으며, 주민들은 동굴과 간이 주거지에서 농업과 목축을 기반으로 삶을 이어왔다. 그럼에도 1999년 이스라엘 군은 약 700명의 주민들을 “사격 구역에 불법적으로 거주한다”는 이유로 강제 퇴거시켰다. 이후 수십 년에 걸친 법정 다툼 끝에 2022년 이스라엘 대법원은 군의 손을 들어주었다.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주민들의 삶은 사실상 보류된 상태에 놓였고, 이 판결 이후 마사페르 야타 지역의 일상은 더 이상 일상이라 부르기 어려운 상태로 밀려났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영화 〈노 어더 랜드〉는 바로 그 마사페르 야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이라 부르기 어려운 시간을 기록한다. 영화는 공동 감독 중 한 명이자 팔레스타인 활동가 바젤 아드라가 자신의 마을이 파괴되는 과정을 카메라에 담는 것으로 시작된다. 오랫동안 지역에서 이스라엘 군에 저항해온 가족의 역사 속에서 자란 그는, 아버지의 활동을 이어 카메라를 들었다. 이들에게 카메라는 내일이면 사라질지도 모르는 집과 마을 공동체,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기록의 도구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바젤이 기록한 영상들 속에서 이스라엘 군은 집을 철거하고, 우물을 메워 없애고, 전기를 끊는다. 사람이 더 이상 살 수 없는 조건을 만들어 스스로 떠나게 하는 방식의 폭력은 노골적인 전투가 아닌, 일상의 형태로 지속된다. 거대한 충돌은 없다. 대신 불도저가 밀어버린 집을 주민들은 밤 새워 다시 짓는다. 다시 집은 무너지고, 사람들은 다시 짓고, 또 다시 철거된다. 이 반복은 개별 사건이 아니라 구조가 되고, 폭력은 특정한 순간이 아니라 일상이 된다. 영화는 이 일상의 붕괴를 끝까지 보여준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0804573850.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영화 〈노 어더 랜드〉(No Other Land) 스틸 컷</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국적이 다른 네 명의 공동감독이 ‘합의’한 원칙</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영화는 네 명의 공동 감독이 만들었는데, 두 명은 팔레스타인 사람이고 다른 두 명은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 중 바젤 아드라와 유발 아브라함은 영화에 직접 등장한다. 바젤은 앞서 언급했듯 활동가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마사페르 야타 지역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기록해왔다. 유발은 이스라엘인이자 기자로서 바젤과 함께 현장을 기록한다. 둘은 집을 철거하러 온 군인들에게 항의하기도 하고, 무너진 집을 주민들과 함께 다시 짓기도 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둘은 현장에서 같은 일을 하며 함께 활동하지만, 그들이 처한 상황은 다른 식으로 버거워져 간다. 바젤은 법을 전공했지만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채 불확실한 삶을 이어간다. 그의 활동을 막기 위해 이스라엘 군이 아버지를 연행하는 일까지 벌어진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유발은 팔레스타인 주민들에게 원망을 듣는다. 이스라엘 군이 마을을 휩쓸고 가면 주민들의 감정은 유발에게 향한다. “너는 이스라엘 사람이잖아.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해?” 유발은 이 현실을 이스라엘 사회에 알리면서, 동시에 그 사회 내부에서도 ‘반유대주의자’라며 비난 받는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누가 더 불행한가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일을 한다. 그러나 그 위치에는 분명한 조건과 한계가 존재한다. 서로 다른 조건이 하나의 영화 안에 함께 담길 수 있었던 것은 네 명의 공동 감독이 합의한 원칙과도 연결된다. 이들은 네 명 중 단 한 사람이라도 반대하는 장면은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러한 합의의 원칙은 영화의 구성에서도 드러난다. 예를 들어, 마사페르 야타를 철거하는 군인들이 아랍계 이스라엘인이라는 점에 주목한 이스라엘 감독은 그 맥락을 영화에 담고자 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감독은 이에 반대했다. 중요한 것은 군인의 출신이 아니라, 그들이 수행하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결국 이 맥락은 영화에서 제외되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들의 원칙은 폴란드-독일의 공동 역사교과서 집필 사례를 떠올리게 한다. 양국은 하나의 단일한 역사 서술을 만드는 대신, 서로 다른 시각을 함께 제시하는 방식을 택했다. 같은 사건을 두 국가의 관점에서 병렬적으로 서술하며, 차이를 드러낸다. 물론 이 사례를 현재진행형의 점령 상황과 동일하게 놓을 수는 없다. 또한 가해와 피해의 관계를 병렬적으로 보는 것과 소거적으로 보는 것은 다를 것이다. 그럼에도 서로 다른 위치에 있는 주체들이 하나의 결과물에 도달하기 위해 합의를 형성했다는 점에서 유사한 측면이 있다. 그리고 이 합의 속에서 〈노 어더 랜드〉가 분명히 보여주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이스라엘의 선명한 폭력이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0805255778.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영화 〈노 어더 랜드〉(No Other Land) 스틸 컷</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이러한 합의 원칙은 제작 환경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 모든 합의를 위해 네 사람은 당연히 함께 편집을 진행하려 했지만, 팔레스타인 감독들이 이스라엘로 이동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웠다. 팔레스타인 사람의 이동 자체가 이스라엘의 허가 아래 통제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스라엘 감독들이 마사페르 야타로 들어가 함께 편집을 진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영화에서 드러나듯 마사페르 야타는 철거가 계속되는 지역이다. 이들은 전기가 안정적으로 공급되지 않는 환경에서 작업해야 했고, 전기가 들어오는 짧은 시간마다 편집을 이어나갔다. 편집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마을에서는 철거가 계속되었기에, 그들이 기록한 영상 속 철거 장면과 현실에서 벌어지는 철거가 겹쳐지는 가운데 작업이 이루어졌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영화의 많은 장면에서 탄식하게 되지만, 특히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 “우리가 이런 상황을 세계에 알릴수록, 미국이 이스라엘을 압박할 거야.” 그러나 2026년 현재 우리가 마주한 현실은 다르다. 미국은 여전히 이스라엘의 강력한 우방이며, 이란과의 군사적 충돌 속에서 그 관계는 유지되고 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가장 아픈 곳을 기록하는 이들의 마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2024년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된 〈노 어더 랜드〉는 이후 전세계 여러 영화제에서 상영되며 마사페르 야타의 현실을 알렸다. 하지만 2025년 3월, 영화의 공동 감독 중 한 명인 함단 발랄(Hamdan Ballal)이 서안지구에서 이스라엘 정착민들의 공격을 받은 뒤 이스라엘 군에 의해 연행·구금되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 소식이 전해지자 세계 각지의 영화인들이 그의 석방을 촉구하는 목소리를 냈다. 다행히 함단 발랄은 다음 날 석방되었지만, 이 사건은 영화가 기록한 폭력이 스크린 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현실에서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는 세계의 여러 영화제에서 찬사를 받고 관객들을 만나왔지만, 영화를 만든 감독 중 한 명은 차가운 감옥에 갇히고 무너진 폐허로 돌아가야 했던 것이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0805568383.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25년 3월, idfa(암스테르담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a href="https://www.instagram.com/idfafestival" target="_blank">인스타그램</a>에 업로드한 함단 발랄(Hamdan Ballal)의 석방을 촉구하는 이미지 게시물.</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그들의 고통이 담긴 프레임을 넘어 직접 가 닿을 수 없는 무력감과 막막함 속에서도 우리가 이 다큐를 꼭 보아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런 질문 속에서, 이 영화를 추천한다는 말이 조심스럽다. 누군가의 삶이 파괴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결코 가벼운 경험이 아니기 때문이다. 10년 전 교수님이 말했던 ‘지구에서 가장 아픈 곳’은 매번 이름을 바꾼다. 하지만 감히 추측하건대, 가장 아픈 곳을 기록하는 이들의 마음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 이야기가 기록되고 전달되어서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바라는 것. 그들이 존재했고 그들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 그리고 이들의 삶이 어떤 식으로든 나아지길 바라는 것일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노 어더 랜드〉는 세상을 향해 말한다. 우리에겐 이 땅 말고는 다른 땅이 없다고.(No Other Land) 그러니 여기서 끝까지 버티며 서로를 기록하겠노라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이 영화의 마지막 프레임까지 지켜보는 일, 그것이 우리가 마땅히 가져야 할 최소한의 연대이자 지구에서 가장 아픈 곳에 보낼 수 있는 응답일 것이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 </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c632cd;">[필자 소개] 김수민</span>. 2026년 프로젝트 활동가로 ‘연분홍치마’에서 활동하고 있다. 다큐멘터리 연극과 극작을 좋아한다. 아시아 4개국의 퀴어 부부 이야기를 담은 중편 다큐멘터리 〈모던 패밀리〉를 공동 연출했으며, 지금은 예술 대학 내 위계폭력에 대한 다큐멘터리 〈블랙박스〉를 만들고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c729d5;">[성적소수문화인권연대 연분홍치마 소개]</span> 2004년 설립된 연분홍치마는 여성주의적 감수성을 바탕으로 소통과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하며, 다큐멘터리·극영화·웹 콘텐츠 등 다양한 미디어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a href="https://pinks.or.kr/" target="_blank">pinks.or.kr</a></span></span></p>]]></description>
       <pubDate>2026-04-08 12:02:00</pubDate>
	   <section>sc7</section>
	   <section_k><![CDATA[문화]]></section_k>
	   <section2><![CDATA[영화]]></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김수민)]]></author>
	   <category><![CDATA[영화]]></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4/2026040807483441.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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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CDATA[Don’t try to be a nice girl; set your boundaries!]]></title>
       <link>http://www.ildaro.com/10427</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More than anything, I realized, ‘Ah, I don’t have to smile’.”                                                 </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is is what one participant said on the last day of the “Training to Improve Daily Coping Skills” that took place in a small town in southeast Jeju for 8 weeks. She said that she had long been concerned that she ‘looked like a pushover.’ She said that she had difficulty refusing requests from others and that the times she had tried to please others in order to be loved were recorded in detail in her diary. Through this training, she finally gained the ability not to smile, and she was practicing it in her daily lif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s the instructor for the program, and as a fellow citizen trying to produce better responses to issues in my everyday life, I think I’ll remember her saying that for a long time.</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071612920.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Learning about the base of support. Many participants were unfamiliar with the mechanisms of even simple bodily movements. (Photo credit: Jeju Women’s Association 2030 Committee)</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 font-weight: bold;"><br />The joy of speaking up for the first time - ‘I can’t keep this good thing to myself!’</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 first time I encountered feminist self-defense training was in the spring of 2007, when I was 21 years old, while participating in the planning team for a program at the Korea Sexual Violence Relief Center called “Training for Teen Girls to Become Different Bodies - Beyond Your Gaz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For over three months, I moved my body and used my voice alongside the teenage ‘girlz’ (the participants in the program at the time were called ‘girlz’ instead of ‘girls’ to give them a slightly tougher image), experiencing new possibilities for my body outside of the norms of femininity. Above all, it was really fu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is was, so to speak, the 'red pill' of my life. From then on, there was no going back.</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Changes in daily life followed. At the time, the student I was tutoring was starting to pay me later and later, and although everyone told me to confront them about it, I hadn’t been able to bring myself to. However, with the weekly practice in raising my voice firmly and destroying wooden boards, plus arguing with some old men at bar where we had our after-party, I absorbed these teachings into my body again and again, and finally one day I was able to speak up.</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Uh… you know… it seems like you keep paying me lat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t wasn't a firm and cool voice like in the practice room. I thought to myself, 'Shoot, I’m not doing this right,’ and I was disappointed. But still, from the next month, the money started coming in on the right date. The experience of being able to effect change, even if it wasn't with the ideal cool speech, made a strong impression on m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With a mindset of ‘I can’t keep this good thing to myself!’, I organized several 10-week self-defense training sessions with my friends under the name of “Let’s Fly!” In addition, at the high school where I did my student teaching internship, I trained and drilled the female students on effective strikes and refusal skill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efore I knew it, I became a self-defense training instructor, and this year, I am conducting the “Training to Improve Daily Coping Skills” program with women living in towns and rural areas in Jeju.</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Self-protection is learned in the body, not the mind</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When people think of self-defense training, they often think of martial arts, but the most important thing I talk about in my workshops is boundaries. In my trainings, I define boundaries as “the power to distinguish between what is mine and what is not min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For example, the power to refuse a request by saying, “That would be difficult.” And, even if I expect the other person to feel embarrassed or upset about my refusal, the power to realize that those feelings are theirs to handle, not mine, and to let go of responsibility for them.</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 first time I encountered the concept of boundaries was when I participated in a program at the IMPACT Bay Area Center in San Francisco, USA. IMPACT is a non-profit organization in the U.S. that provides self-defense and empowerment training.</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0716479014.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The author (center front) with “Model Mugging” instructors from the IMPACT Bay Area Center in San Francisco, USA. The picture was taken at Hwa Rang Kwan Martial Arts Center, the setting for the [Korean-language] webtoon San Francisco Hwaranggwan. (Photo credit: Shin-yul)</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r />With IMPACT, trainers who are fully clad in protective gear take on the role of assailants, and trainees repeatedly practice defending themselves and counterattacking in threatening situations that are staged as if they were real. The concept most emphasized in the training is that of muscle memory. Through repeated drills, the body becomes able to react automatically even in a crisis situatio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t the same time, another concept they emphasize is boundaries. They repeatedly stressed the importance of being able to recognize and set not only physical boundaries, but also emotional and psychological boundarie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My IMPACT instructors constantly trained us in dealing with boundary violation situations. We role-played refusing a request to borrow a pen, or countering an invitation to an unwelcome activity with a suggestion to do something we’re comfortable with. We practiced speaking in a way that protected us even while under emotional pressur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Even after the training was over, other participants and I would send emails to each other about our experiences with “BOUNDARY!” in all caps. And one thing stuck with me the strongest: boundaries are learned not in the head but with the body!</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Responding honestly to situations that I used to just accep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My experience at IMPACT has become the foundation of the classes I teach. The Training to Improve Daily Coping Skills is not just about surviving in emergency situations. Of course, we also practice using our bodies and asking for help in dangerous situations; but more importantly, we train ourselves to put a stop to situations in our daily lives that we used to just tolerate and reorient them in the direction we wan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t's the work of connecting your body and mind so that words like, "Just a moment," "Please stop that," or "I'll take care of this myself," can come out of your mouth in the tone you want.</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071712766.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Training on basic response posture. This is a training that combines boundary-protecting nonverbal and verbal responses to ingrain them in your body. (Photo credit: Jeju Women’s Association 2030 Committee)</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r />At the start of each week's session, we sit in a circle and share our experiences from the past week—moments when we set boundaries, or moments when we didn't, and how we felt afterward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 got a call asking me to help out at an event. Last time this happened I’d felt I couldn’t refuse. But this time, I took a beat and then said no. My heart was pounding so hard.”</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re was someone who kept blabbing everything I told her to others, so I spoke to her privately and said, ‘What you’re doing isn’t righ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Regarding suggestions made by others:) “In the past, I would have just smiled, said, ‘Okay!’ and went along, but this time, when it was something I didn’t want to see, I just said, ‘I’m good,’ and left it at tha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We applaud each other’s small successes, and when one of us experiences regrets about how she handled a situation, we brainstorm better responses together. We grow by listening to each other's stories in this way every week.</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When I conduct trainings on response skills with participants living in rural Jeju, as well, we practice engraving into our bodies phrases to protect our boundarie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 most interesting phrases have been “Please speak from there (where you are)” and “Please go back there and talk.” The countryside is a place where boundaries are blurred. There are people who feel entitled to suddenly come into our yard, our vegetable garden, and even inside our house. Spatial boundary violations that are hard to imagine for those used to living in apartment buildings occur on a daily basi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When one participant said the above sentences, which mean, "Let's talk in a space other than the space you have just invaded," it set the other participants abuzz. I heard murmurs here and there that these were very useful sentences and resolutions to practice them. These are sentences that are never mentioned during self-defense training in Seoul or other metropolitan areas.</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raining to understand the limits and possibilities of my body” </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When we fail to protect our boundaries, we often blame ourselves, saying, “Why didn’t I speak up?” or “Why did I just smile like an idiot?” But it’s not really our fault. We have been trained to respond that way since we were young. A daughter who goes along to get along, a child who is well-behaved, a student who tries to read the room—they were praised as a “good child” and a “good perso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 want to emphasize this: what you did back then [in whatever situation bothered you] was not stupid at all. Whether you froze, avoided addressing it, laughed to relieve the tension, or even ran away, that choice was the best you could have mad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We are gathered here to develop the response skills that no one ever taught us. From now on, I can set my boundaries in my own way.</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We can avoid traps like the fear of not being seen as ‘nice,’ the desire to quickly escape from awkwardness and silence, and the prohibition, “The countryside is dangerous, so you can’t move there,” and instead develop the ability to feel and utilize our own bodies and minds. A sense of self-efficacy, not fear, awaits us.</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0717373922.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Practicing striking posture with participants in a self-defense training workshop. (Photo credit: UNNInetwork) *Related [Korean-language] video: <a href="https://www.youtube.com/watch?v=FUbhf9zjRBM&amp;t=12s" target="_blank">Interview with a participant of ‘Feminist Self-Defense Training - The Body That Shouts and Responds’</a></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r />I would like to pass on a phrase that I have used as a lighthouse during my time trying to share better coping skills and wisdom as a self-defense instructor.</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Self-defense training is not training to become stronger, but training to understand the limits and possibilities of my body.” – Kwon-Kim Hyun-young (foreword to the Korean version of Thomas Mathieu’s The Crocodile Project, published by Blue Knowledge, 2016)</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 want more people to have the opportunity to explore the possibilities of their bodies. To be able to build relationships while respecting their boundaries and those of others. To be able to live where they want to live and not be confined by the words, “You can’t live there because it’s dangerous.” To have more and more choices in lif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For that possibility, we will keep gathering and training joyfully, tomorrow and the day after. <span style="color: #3366ff;">[Translated by Marilyn Hook]</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span style="color: #d12eca;">About the Author: Shin-yul</span> is the head of Annyeong Gongjakso [Hello Workshop]. She is a self-defense instructor, the captain of FC Sanjunghogeol, and a National Singing Contest Popularity Award winner. These are her proudest achievements. She lives with her partner and one old dog. Instagram: <a href="https://www.instagram.com/shinyul___" target="_blank">@shinyul___</a></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Original article: <a href="https://ildaro.com/10198" target="_blank">https://ildaro.com/10198</a> Published June 5, 2025</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 To see more English-language articles from Ilda, visit our English blog(<a href="https://ildaro.blogspot.com" target="_blank">https://ildaro.blogspot.com</a>).</span></p>]]></description>
       <pubDate>2026-04-07 14:10:00</pubDate>
	   <section>sc100</section>
	   <section_k><![CDATA[English Article]]></section_k>
	   <section2><![CDATA[]]></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Shin-yul)]]></author>
	   <category><![CDATA[English Article]]></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567'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4/2026040720578799.jpg' medium='image'></media: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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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우리 노동의 결과물은 공간에 새겨진다”]]></title>
       <link>http://www.ildaro.com/10426</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0000ff;">[연구 소개] 논문 「<a href="https://skhu.dcollection.net/srch/srchDetail/200000964667/" target="_blank">공간을 다루는 청년 여성 자영업자들의 몸 노동 경험 : 집수리</a></span><span style="color: #0000ff;">·</span><a href="https://skhu.dcollection.net/srch/srchDetail/200000964667/" target="_blank">도배</a><span style="color: #0000ff;">·</span><a href="https://skhu.dcollection.net/srch/srchDetail/200000964667/" target="_blank">청소 업종을 중심으로</a><span style="color: #0000ff;">」는 집수리·도배·청소 업종에 종사하는 청년 여성 자영업자들의 노동 경험을 조명한 연구이다. 논문을 쓴 조영주 씨는 본인 스스로가 청소업체를 운영하는 청년 여성 자영업자이자, 동시에 여성학을 배우고 실천하는 연구자이기도 하다.</span></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0615398571.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일명 ‘돌돌이’(마루광택기)라고 불리는 바닥 세척 장비를 사용하여 사무실을 청소하는 모습. 조영주 씨는 본인 스스로가 청소업체를 운영하는 청년 여성 자영업자이자, 동시에 여성학을 배우고 실천하는 연구자이기도 하다. (사진-조영주 제공)</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span><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청소업체 사장님이면서, 시민단체 간사로 지역사회에서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만큼 바쁜 와중에 어떻게 여성학 대학원을 진학하고 논문까지 쓸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태어나 20대 후반까지 서울시 중랑구에 살았어요. 문화콘텐츠학을 전공하며 연극과 음악을 만들면서 마을 공동체 활동을 했어요. 중랑구 마을 공동체는 여성주의 관점으로 사업을 하는 곳이었는데, 그때는 제가 ‘여성주의 관점’이라고 인지를 하지는 못했어요. 하지만 사업을 기획하고 운영하면서 자연스럽게 감수성을 갖게 되고, 페미니즘 강좌를 함께 들으며 ‘이런 세계가 있구나’ 알게 되었죠. 언젠가 기회가 온다면 공부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결혼하고 이사를 하면서 인천에 터를 잡게 되었어요. 생계를 위해 ‘먹고 살려고’ 청소일을 하게 되었고, 중랑구에서 해왔던 활동들을 이어가고자 시민단체 간사 일도 반상근으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오랫동안 바라왔던 여성학 공부도 할 수 있게 되었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청소일을 하면서 오히려 시간을 낼 수 있게 된 거군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제가 청소일을 하기로 한 또 하나의 이유가 시간이에요. 일하는 사람의 리듬에 맞게 운영되는 조직은 드물잖아요. 조직의 리듬에서 벗어나 내 리듬으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 조금일지라도 나를 위해 시간을 쓸 수 있는 삶을 살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이 일을 하게 되었어요. 이전의 노동 경험에서는 장시간 일하다 보니 건강이 계속 악화되는 것을 느끼며, 이것이 지속 가능한 삶인지 고민하는 시간도 꽤 길었던 것 같아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지금은 청소일을 하며 길고양이들을 돌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지고 있거든요. 길고양이를 돌보며 고양이들을 입양하기도 했고요. (지금 막둥이, 강냉이, 꿀떡이와 살고 있습니다.) 청소 일은 고될 때도 있지만, 내가 내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게 행복한 것 같아요.”</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0607143964.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사무실 정기청소 방문 시 쌓여 있는 일회용 음료 컵을 모으고 정리하는 과정. (사진-조영주 제공)</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span><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시간을 뜻대로 쓰기 위해 기술을 배우고 자영업자가 되었고, 같은 일을 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모아 논문을 쓰셨네요</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대학원 면접을 본 날, 일기에 ‘이런 내 생애를 사회적 맥락 속에서 한번 풀어보고 싶다’고 썼더라고요. 내가 지금 이렇게 흘러온 시간의 기록이 단순히 내 개인 삶의 기록이 아니라,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여성의 기록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저는 같은 일을 하는 여성들과 정말로 만나고 싶었고, 제가 청소일을 하는 것에 대해 신기해하고 의아해하던 사람들에게 제 삶을 설명하고 싶었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요즘 다양한 채널에서 공간을 다루는 청년 여성 자영업자 콘텐츠가 나오고 있는데, 그런 콘텐츠들은 ‘월 천만 원 수입’을 강조하거나 아니면 힘든 부분을 주로 조명해요. 저는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쑥스럽고 낯설어할 것 없이, 일하는 사람으로서 자긍심을 다루고 싶었습니다. 또 이 일이 굉장히 (주로 남성들의 일자리라고) 젠더화된 경향이 있기 때문에 그런 점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책임감도 있었고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일하는 사람으로서 자긍심을 다루고 싶었다는 말이 인상깊어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사회가 정한 성공의 척도와 위계가 있잖아요. 이를테면 변호사, 의사 등 ‘성공’이라 여겨지는 일에 대해서는 다들 이야기하지만, 우리 사회가 굴러가게 하는 많은 필수노동에 대해서 상당수는 실제로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어떤 노동들은 가시화되지 않죠. 저는 그걸 드러내고 싶었어요. 사회가 가치 있다고 여기지 않는 노동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이게 세상을 굴리니까요. 힘든 일이기도 하고 당연히 어려움도 많지만, 단순히 노동을 고통으로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논문 제목을 보며 왜 ‘공간을 다루는 노동’이라고 범주화했을까 생각했는데, 20쪽에 “이 노동의 결과물은 공간에 새겨진다.”라는 문장을 보면서 이해가 되었어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청소하러 들어가면 한 주 간의 생활감이 쌓여 있어요. 쓰레기도 많고 오염도 많죠. 어떻게 보면 그곳을 쓰는 이들의 치열한 노동의 흔적이기도 하죠. 생각해 보면 저도 회사 다닐 때 분리수거를 그렇게 잘했던 것 같지는 않아요. 일이 힘들면 힘들수록 망나니처럼 살았던 것 같네요. 그런데 청소하고 나면 전/후의 차이를 확실히 느끼게 돼요. 집수리하는 것도 그렇고, 도배를 하는 것도 그렇고 공간을 바꿔놓는 작업이고, 노동이 그 공간 안에 새겨진다고 느꼈습니다. 그것을 바로 눈으로 확인할 수도 있는 일이고요.”</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0607479595.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사무실 바닥 세척 후 왁스코팅을 시공하는 모습. 입주청소가 끝난 뒤 청소 전후의 모습을 확인할 때마다 보람과 성취를 느낀다. (사진-조영주 제공)</p></td></tr></tbody></table><p><span style="color: #0000ff; 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우리 사회가 굴러가게 하는 필수노동이지만, 가시화되지 않았죠.</span></p><p><span class="bold" style="color: #0000ff; font-family: 바탕;">일하는 사람으로서 자긍심을 다루고 싶었습니다. 이게 세상을 굴리니까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자영업 진입 배경에서 ‘조직에서 배제되거나 인정받지 못했던 경험’과 ‘대인관계 감정노동에서의 피로감’을 이야기하셨더라고요. 논문을 읽는 사람들에게 많은 공감을 받을 거 같아요.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지 여성 청년들이 느낄 수밖에 없는 경험과 감정 같달까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제 주변의 여성들이 일을 하며 몸과 마음이 많이 아팠어요. 동시대의 여성들이 왜 약 없이 일을 할 수 없을까? 이게 저에게는 큰 질문이었어요. 저도 일을 하면서 많이 지치고 소진되었고요. 왜 그럴까 생각했는데요. ‘내가 이걸 왜 하지?’라는 질문에 대해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정 부분 답을 찾을 수 있어야 내 몸을 갈아 넣을 수 있다고 생각되는데, 도대체 이 배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겠으니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저는 특정 조직에 대한 욕을 하고 싶지는 않아요. 다만 부품이 된 것 같은 느낌이나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수량화·표준화해야 한다는 요구가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것 같아요. 끝나지 않는 일을 한다는 느낌? ‘내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살았던 순간을 돌아보니 병든 나만 남아있네? 일한 건 다 어디로 갔지?’ 조직이 나를 보호해 주지 않더라고요. 활동가는 자신을 갈아 넣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고요. 자다가도 눈물이 흐르는 날들을 지나며 곰곰이 생각하고 많이 아파하다가 결론을 내렸어요. 내 삶은 내가 책임져야겠다. 그렇게 일을 정리하고, 새로 정한 일이 청소에요. 청소를 하니까 내가 한 일이 눈에 보이고 일의 전 과정이 내 손에 들어와서 좋더라고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노동으로부터 소외감을 느꼈던 다른 노동 경험과의 차이라는 대목이 떠오르네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맞아요. 책임을 어디까지 져야 할지 몰라서 오는 모호함이 없고 담백해요. 청소는 군더더기가 없는 일이에요. 내 성과가 눈에 보이니 스스로 인정도 되고, 부족함을 발견했을 때 보완도 해결도 내가 책임지는 일이에요. 요령이 없던 시절에는 일을 마치고 나면 몸이 아프기도 했어요. 연구 참여자분들은 저와 마찬가지로 몸을 관리하는 요령이 다 있어요. 이 일이 몸을 갈아 넣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동시에 감각들이 내 몸에 쌓여가는 숙련노동이에요. 많은 여성들이 자기가 했던 일이 ‘물경력’이 되어버린 경험들이 있잖아요. 몸을 쓸 줄 아는 사람이 되면 경력이 몸에 새겨지는 게 되죠.”</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0608226945.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인터뷰를 하는 조영주 연구자. 석사 논문으로 「<a href="https://skhu.dcollection.net/srch/srchDetail/200000964667" target="_blank">공간을 다루는 청년 여성 자영업자들의 몸 노동 경험 : 집수리·도배·청소 업종을 중심으로</a>」를 썼다. 테이블에 자영업자들이 즐겨 쓰는 메모지가 눈에 띈다. (박지하 촬영)</p></td></tr></tbody></table><p><span style="color: #0000ff; 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가장 두려운 건 ‘미수금’…“일하고 돈 못 받는 여성들 많아요”</span></p><p><span class="bold" style="color: #0000ff; font-family: 바탕;">영세 자영업자들, 사회적 보호망이 너무 없다고 느껴</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고용된 노동자들과는 달리 자영업자들은 보호망으로부터 취약하잖아요. 뛰어들 때 이런 부분이 걱정되지는 않았나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한 연구 참여자 분이 ‘자영업자들도 경제인으로서 이 세계의 경제의 축을 떠받드는 하나의 존재고, 자기도 이 수레바퀴를 같이 돌리고 있는데 완전히 배제당하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셨는데요. 저도 일상적으로 겪는 문제인데, 자영업자가 가장 취약한 지점이 뭐냐면 일하고 돈을 못 받는 거에요. 〈장인의 나라〉라는 웹사이트를 만드신 분도 필름 시공일 하고 밤에 코딩을 공부해서 웹사이트를 개설한 이유가 못 받은 돈 때문이에요. 공익을 위해 만든 거죠. 돈 못 받는 여자들 너무 많아요. 저도 청소 자영업을 하며 가장 두려운 일이 미수금인데요. 대금 독촉하는 것도 하나의 일이에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자영업자는 모든 게 자기 책임이에요. 물론 돈을 많이 버는 사람도 있지만, 지금 한국의 산업 구조를 무시한 채 ‘자영업자는 사장이기 때문에 보호하지 않아도 된다’는 인식이 있다 보니 영세 자영업자들의 경우 보호망이 너무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면 ‘꼬우면 남 밑에 가서 일하세요’, ‘니가 능력이 안 되면서 사장 타이틀도 달고 싶고 대우는 받고 싶냐’라고들 하죠.</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과거 여러 조직을 거치면서 일할 때 ‘다들 이렇게 사는데 나는 왜 안 될까?’라는 자기혐오가 있었어요. 그런데 나는 의미를 찾지 못하는 걸 견디지 못하더라고요. 그래서 ‘이 벼랑이나 저 벼랑이나’라는 생각에 자영업자가 되었죠. 프랜차이즈로 자영업을 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본사만 돈 벌어주는 일은 싫었고요. 내가 과정을 컨트롤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은데 소자본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어요. AI 시대에 대체될 수 없는 일을 해야 한다는 고민도 있었고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렇게 청소일을 시작했는데, 장례식장에서 몇 년 만에 친척분들을 만났어요. 무슨 일을 하냐고 묻는데, ‘회사 다녀요’ 하면 대충 뭉개지는데 청소일을 한다고 했더니 다들 뜨악해 하더라고요. 그때 아버지께서 헛기침을 하다가 자리를 뜨셨어요. 친척들의 걱정이 이어졌죠. ‘아니다 싶음, 빨리 취직해라’ 같은. 이 일에 대한 사회적인 평가와 위계를 느끼긴 했어요. 제가 다른 사람 눈치를 엄청 보는 성격이지만, 어차피 망해도 내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크게 영향은 안 받았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지금은 아버지께서 굉장히 자랑스러워 하신다구요. 논문에서 ‘노가다’라는 인식을 넘어 이 일에 대한 존중을 만들기 위해 업계 사람들이 하는 다양한 시도들도 소개해 주셨는데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저는 몸 노동을 하는 여성들이 매체에 더 많이 나와서, 이 노동을 가시화하고 또 자긍심을 많이 드러내면 좋겠어요. 저 역시 논문을 쓰고 지금 단행본을 준비하고 있고, 요즘 유튜브도 시작했는데요. 이런 시도들은 이 일을 하는 동료들과 스스로에 대한 존중을 만드는 흐름이기도 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또 이 논문이 쓰여질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신 집수리·도배·청소 의 업종에 종사하는 여성 자영업자 카톡방이 있어요. 그 방에 6백여 분이 계시는데, 그 단톡방이 사실 여성 자영업자, 예비 여성 자영업자들에겐 노조 같은 곳이에요. 하루종일 카톡방 알람이 울려요. 일터에서 겪은 고충을 이 방에서 이야기하면 서로 응원해 주고 도움 주고 합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연구 참여자분들께 굉장히 감사하다는 말을 드리고 싶어요. 해당 업종에서 일하시는 여성 자영업자들은 고객의 요청에 따라 달려가야 먹고 살 수 있기에 휴무가 유동적이거든요. 인터뷰 약속을 잡았는데 일이 들어와서 취소된 경우도 있어요. 저도 견적 보러 오라고 하면 바로 달려 나가니까 이해가 되죠. 인터뷰를 해주신 분들은 하루 일을 빼고 만나주신 거예요. 그간 모르고 살았던 여성 자영업자들로부터 응원을 받는 기분이었어요. 그래서 저도 연구한다는 마음에 앞서서 연대한다는 마음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던 것 같아요.”</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0608581511.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조영주 씨는 청소일을 시작하고 근무 시간을 조정할 수 있게 되자, 길고양이 친구들을 입양하여 살고 있다. (사진-조영주 제공)</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span><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연구가 끝난 지금, 더 확장하고 싶은 주제나 질문이 있나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내가 어떤 보호를 받을 수 있는지 모르는 여성 자영업자들이 정말 많았어요. 앞으로 차차 자영업자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정책적으로 무엇이 필요한지 고민해보고 싶고, 나아가 조직을 구성해야 한다는 생각도 듭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이 바쁜 와중에 단행본도 쓰고 계시고 유튜브를 시작하셨는데, 사실 자영업자는 홍보 마케팅도 다 자신의 몫이잖아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NS 관리를 비롯한 홍보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하죠. 안 하면 가라앉으니까. 기본이에요. 요즘 유튜브에 몸 쓰는 여성 기술자, 자영업자 영상이 많이 나오는데 다 찾아봤어요. 월 천만 원파/실력-성과파/사연파 등등 차고 넘치는 에피소드를 다 분석했는데 아직 나오지 않은 이야기, 저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단행본의 경우 논문에 못 담았던 이야기들, 이를테면 자영업자의 노후나 지금 얘기 중인 디지털 노동 관련해서도 담아보려 해요. 올해 출판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여기저기 많이 알려야 더 열심히 쓰겠지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기술자×사장×연구자×페미니스트 조영주 씨는 ‘남성들의 영역’, ‘노가다’ 그리고 ‘여성에게 적합하지 않은 일’이라고 불리는 영역에서 기존의 편견에 균열을 내며 자신만의 기술로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가고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bb2dd2;">[필자 소개] 박지하</span>. 석사를 하면 명쾌하고 선명한 정답들을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나름 큰 돈을 써서 대학원 진학했다. 페미니스트들의 둥지 성공회대학교 실천여성학과에 와서 질문과 갈등, 불편함을 계속해서 옆에 남겨두고 뒤죽박죽 부딪히고 불화하면서도 살피며 살아가는 태도가 여성학을 하는 이유라는 것을 배웠다. 정답을 말하는 사람은 되지 못했지만 후회는 없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4-06 16:00:00</pubDate>
	   <section>sc2</section>
	   <section_k><![CDATA[노동]]></section_k>
	   <section2><![CDATA[]]></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박지하)]]></author>
	   <category><![CDATA[노동]]></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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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교복은 누구를 위한 옷인가]]></title>
       <link>http://www.ildaro.com/10425</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학교 교칙을 보면 여학생 규정과 남학생 규정이 따로 있다. 그런 걸 보면 학교와 사회가 학생들이 어떻게 행동하기를 원하는지, 즉 ‘학생다움’의 기준에는 단지 학생으로서만이 아니라 특정 ‘성별’로서의 몸과 태도를 다르게 설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몸의 사용 범위를 제한해버린 치마 교복</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나는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 내내 치마를 입고 다녔다. 정확히 말하면, 입고 싶어서가 아니라 입어야 했기 때문이다. 치마 안에 바지를 입으면 안 됐고, 스타킹을 신는 것이 ‘규정’이었다. 그건 선택이 아니었으나 이내 익숙함이 되었고, 익숙함은 곧 당연한 것이 되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교복 단속은 더 이상했다. 치마 길이를 본다며 학생을 책상 위에 올려 세우고, 치마 안이 보이든 말든 신경 쓰지 않던 장면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때 나는 ‘학생’이기 이전에, 통제를 받는 몸으로 다뤄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치마는 단순한 옷이 아니다. 할 수 있는 행동의 범위를 제한하는 장치이기도 했다. 다리를 편히 벌리고 앉을 수 없었고, 움직임은 늘 조심스러워야 했다. 나는 체육을 좋아했지만, 초등학교 시절 사복을 입고 자유롭게 뛰어놀던 때와 달리, 운동장에서 놀이와 운동기구를 사용하는 것조차 스스로 제한하게 되었다. 내가 다닌 학교는 체육시간 외에는 체육복 착용도 철저히 금지했기 때문에 그 제약은 더 컸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교복은 나와 같은 여학생들에게 단지 ‘입는 옷’이 아니라, 몸의 사용 방식을 바꾸는 규율이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050929985.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17년, ‘두발 자유’를 요구하며 염색을 하고 등교한 모습. (사진-이은선 제공)</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학생’이라는 표식이 드러날 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졸업식 날은 사복을 입을 수 있었다. 나는 우리 학교 학생회장이었고, 그래서 더 자유롭게 입고 싶었다. 그런데, 사복을 입었다는 이유로 교사들에게 지적을 받았다. 학교에서의 마지막 날까지도, 내가 무엇을 입는지는 내가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교복은 종종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라고 말해진다. 하지만 나는 그 말에 쉽게 동의하지 못하겠다. 한 번은 ‘두발 자유’를 요구하며 탈색을 하고 학교에 간 적이 있다. 하교하는 길, 교복을 입고 있은 여자가 머리를 탈색했다는 이유로 낯선 아저씨에게 시비가 걸렸다. 그 순간 교복은 나를 보호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학생’이라는 표식으로 드러내어 위험하게 만들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돌이켜보면, 학창 시절 교복을 입고 다니며 ‘어린 X’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주위에 드러내고 다니는 기분을 느꼈다. 사회에서 그 위치가 나를 안전하게 만들어 준 적은 별로 없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경제적 격차를 가려준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최근 정부에서 교복 가격 안정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교복을 둘러싼 논의가 다시 활발해지고 있다. 가격 조사, 불공정행위 대응, 편한 교복 전환, 바우처 지원 등 다양한 방안이 제시되고 있지만, 교복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는 빠져 있는 것 같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교복을 옹호하는 논의에서 자주 등장하는 “경제적 격차를 가려준다”는 말도, 나에게는 조금 의아하다. 이미 학교에서는 가방, 패딩, 휴대폰, 학원 등 수많은 방식으로 학생들이 서로의 경제적 조건을 알고 있는 상황인데, 교복 하나가 그것을 가려줄 수 있을까. 그리고 정말로 ‘가리는 것’이 해결일까. 격차를 보이지 않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격차가 드러나도 그것이 조롱이나 차별로 이어지지 않는 교육환경을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정장 교복’과 같은 ‘비싼 교복’ 문제도, 가격을 낮춘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까 싶다. 한편에서는 “몽클레르가 교복”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이미 옷은 또 다른 방식으로 위계를 만들어내고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한편으로는 ‘편한 교복’이라는 말도 자주 등장한다. 체육복처럼 편하게 만들면 된다고. 하지만 그냥 체육복을 입으면 되는 일 아닐까. 왜 그것조차 ‘학교가 정해주는 형태’로만 입어야 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실제 ‘편한 교복’ 역시 학교의 로고가 부착되고, 다양한 형태가 있다 하더라도 카라가 있는 디자인이 대부분이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4/2026040510183541.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18년 3.8 세계여성의날 기념 한국여성대회가 열린 광장에서 “우리는 청소년 서프러제트”라는 피켓을 들고 참여했다. ‘서프러제트’(suffragette)는 20세기 초 영국에서 여성 참정권을 요구하며 시위했던 운동가들을 칭하는 용어이며, 이를 인용하여 선거연령 하향 등 청소년의 참정권 보장을 요구하며 투쟁하는 한국의 청소년 인권활동가를 뜻함. (사진-이은선 제공)</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가격이냐, 형태냐의 문제가 아니라, 왜 학교가 특정한 옷을 정해놓고 그것을 학생들에게 강제하는가, 근본적인 질문을 해야 하지 않을까.</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교복, 가격과 형태만이 문제가 아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교복 논의는 우리 사회에서 사실 오래된 이야기다. 이미 한 번 폐지되었다가, 통제의 논리로 다시 돌아온 제도이기도 하다. 그래서 더더욱, 지금 이 질문을 던져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교복은 누구를 위한 옷인가. 학생을 위해서인가, 아니면 학생을 일정한 모습으로 보이게 하기 위한 것인가. 교복은 과연 학생을 보호하고 평등하게 만드는 장치인가, 아니면 특정한 ‘학생다움’의 기준을 강제하는 기성세대의 규율 장치인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c93594;">[필자 소개] 이은선</span>. 고등학생 시기 학칙 개정과 학생인권조례 제정 활동을 하며 청소년 인권 운동을 만났다. 청소년이 학교와 사회에서 그저 버티는 존재가 아니라, 부당한 순간에 목소리를 내고 변화를 만들어가는 시민이 될 수 있기를 고민하며 활동해 왔다. 현재 대학원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폭력에 반대하며 비건을 실천하고 있다. 『우리는 청소년-시민입니다』, 『노키즈존 한국 사회』 등을 공저했고 청소년의 경험과 권리, 젠더화된 규범에 대해 글을 써왔다. 주변 존재들에 물들고, 물들이는 것을 좋아한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4-05 09:07: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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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ection_k><![CDATA[소수자 시선]]></section_k>
	   <section2><![CDATA[십대]]></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이은선)]]></author>
	   <category><![CDATA[십대]]></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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