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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영은 내 지인 중 유일한 ‘셰프’다. 지인들이라고 해봐야 대학 연극반 친구, 공연 일을 하다 만난 사람들과 연극을 매개로 알게 된 연구자, 활동가, 조금 폭을 넓혀 다른 장르 예술인 등 ‘예술’ 빼고 인간관계가 거의 없다. 그 와중 ‘셰프’라는 직업을 가진 지인이 있는 건 어딘가 좀 든든하고 뿌듯한 구석이 있다.
그래서 미등록 이주여성들의 자립을 위한 케이터링 프로젝트에 강사가 필요하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도, 이영만연극상(세월호 참사로 세상을 떠난 이영만 씨의 어머니이자 연극배우 이미경 씨가 주도해 제정한 상) 행사를 준비하며, 故이영만 씨를 위한 생일상이자 시상식 참석자 모두를 위한 비건 상차림을 준비해야 할 때도 나는 소영을 찾았다. 내 유일한 셰프 지인이라는 이유 이상의, SNS나 이따금 건너 건너 듣는 그녀의 궤적이 이런 자리들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소영을 처음 만난 건 ‘예술경영’ 전공 대학원에서였다. 당시 나는 한 직장에서 5년 정도 근무하고 있었는데, 야근은 기본, 철야를 해도 끝나지 않는 일과 정부 정책에 따라 수시로 리셋되는 비전 없음의 현실을 자각하고, 숨통 트일 곳을 찾은 답이 대학원이었다.
연예계, 영화계, 게임회사 경영자 등 다양한 백그라운드를 가진 동기나 선후배들은 좀 낯설었고, 애초에 연구가 절실하지 않다 보니 물에 뜬 기름처럼 학교생활에 잘 적응을 못한 채 어찌어찌 과정만 마치고, 그곳은 내 인생에서 잊혀졌다.
그나마 일 년에 한두 번 만나며 근황을 공유하는 공연계 동기들로부터 간간이 소영의 소식을 들었다. “스페인으로 요리유학을 갔대.” (몇 년 후) “요리사가 되어 한국으로 돌아왔대”, “홍대에서 팝업 레스토랑을 하는데 먹으러 가자”, “스페인 요리 클래스 한다니 같이 듣자” 등등.
예술계 현장에서 일하다가 뜻한 바 있어 대학원까지 와서 흔치 않게 2년 만에 논문까지 써서 학위를 따고는 바로 다른 일을 한다고? 항상 성실하게 수업을 듣고, 인사를 하거나 말을 건네면 햇살처럼 따뜻하게 웃고, 다정하게 답해주던 동기의 의외의 소식이었다.
“고등학교 땐 공부만 열심히 하던 학생이었어요. 그냥 점수에 맞춰 과를 정했고, 뭘 해야 할지 몰라서 고고미술사, 경영학과, 의류학과 수업도 청강해보고 환경동아리 활동도 하고, 학교에서 보내주는 어학연수도 가고, 1년 동안 스페인 주재 한국 공사의 재외 인턴도 하고, 닥치는 대로 이것저것 했던 것 같아요.
스페인에 체류하며 그 풍요로운 문화예술을 접하다 보니 막연하나마 관심이 생겨서 공연축제에서 대학생 자원활동가로 일했고, 4학년 때 스페인의 국제 미술행사인 아르코스페인아트페어의 한국 주빈국 조직위원회에 인턴으로 합류해 우리 쪽 예술가들의 의전과 통역을 맡았어요. 그때 알게 된 분의 소개로 졸업 후 국립오페라단에 정식으로 취업을 하게 됐고요. 사실 그때까지 오페라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지만, 어두운 객석에 덩그러니 앉아 몇 번이고 리허설을 보는 걸 좋아했어요. 그러다가 거길 퇴사하고 문화예술 관련 연구팀에서 일하다가 대학원까지 가게 된 거죠.”
국립예술단체를 그만둔 것은 정권교체에 따른 일방적인 단체 구조변화와 그에 따른 단원 해고 과정 등을 지켜보며 그가 내린 결정이었다. 이후 지역의 문화예술거점센터 설립 준비 과정에 참여해 열심히 발로 뛰며 연구를 했지만, 이 역시 지역의 정치적 이권 다툼과 연결되어 무산됐다. 그리고, 학교에서 논문만 마무리하고 예술계가 아닌 다른 길로 발을 내디뎠다.
정권이 바뀌면 많은 것이 바뀌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지만, 문화예술 공공기관, 그중에서도 말단 직원들이 받는 영향은 실로 막대하다. 나 역시 바뀐 기관장의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조직-인사개편에, 몇 년을 가슴 속에 품고 있던 사직서를 던지고 독립의 몸이 된 바 있다.
“자의로 예술계 일을 그만둔 게 아니에요.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과 반복적으로 맞닥뜨린 거죠. 전업학생이 되어 교수님과 함께 공동연구를 하면서 스페인의 산 세바스티안으로 리서치를 갔는데, 간 김에 요리학교 리서치도 했어요. 이미 마음속에는 대학원을 졸업하면 요리를 하러 가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거든요.
요리를 시작한 건 결혼해 제 가정을 꾸리면서였어요. 마음이 편안해지고 오감이 살아나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집에 손님을 초대한 전날, 밤을 새면서 음식을 준비하는데 너무 즐거운 거예요. 뭐든 변화가 필요한 시기라는 생각을 할 즈음이어서, 맞든 아니든 일단 해봐야겠다, 싶었어요.”
소영은 그때 서른둘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서른둘은 뭐든 시작할 수 있는, 전혀 늦지 않은 나이지만, 막상 서른을 넘겼을 무렵의 나는 뭔가를 다시 시작하기엔 이미 늦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소영에게 요리가 밀려왔듯 무언가가 나에게 밀려오지도 않았지만, 바닥부터 다시 시작할 용기도 없었다. 그렇게 이 길이 맞나, 의심하며 20년이 지나고도 여전히 서성이고 내딛기를 주저하는 나는 40대 끝자락이 되어 소영의 경험을 듣고 있다.
“스페인에서 보고 겪은 식문화에 대한 관심이 있었어요. 인턴 생활 때 8시 반에 출근해 11시면 1층 바 겸 카페에서 가볍게 먹고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2-4시에는 집에 돌아가 점심을 잘 차려 먹고, 일이 끝나는 6시면 다시 노천에서 먹고 대화하고, 9시면 또 저녁식사. 스페인의 이런 타파스(tapas, 스페인 특유의 음식 문화로, 애피타이저, 간식, 술안주 등의 간단한 요리를 지칭한다.) 문화가 참 좋아 보이고 부러웠어요. 어떻게 만드는지 알고 싶고 끼고 싶고.
산 세바스티안은 양기 가득한 다른 스페인 도시들과 달리 흐린 날이 많아 음울하고 차분한 곳이에요. 그런데도 전 세계에서 미슐랭식당이 많은 도시 3위. 토종 식재료가 많아 핀초스(타파스의 바스크어)도 발달되어 있고요. ‘소시에닷’, ‘초코’라고 부르는 미식클럽이나 공유주방 문화가 잘 정착되어 있는 문화의 토대가 있어서 그곳으로 향했어요.”
‘산 세바스티안에서 요리를 시작하자.’ 이 한 줄의 문장 같은 건 대체 어떻게 삶에 등장하는 걸까. 대학 연극동아리로 시작해 대단한 야망도 사명감도 없이 흐름에 몸을 맡겼더니 지금에 이른 내가 평생에 걸쳐 원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결심 혹은 확신’의 순간이다.
‘창작작업을 하지 않으면 답답하다, 예술 말고는 삶의 의미를 못 찾겠다’는 예술인들, ‘죽어도 연기를 하고 싶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포트폴리오를 영화사에 돌렸다는 배우들. 무언가를 하고 싶(다고 생각)어서 계속해 판을 벌여왔지만, 솔직히, 이걸 하지 않으면 못 살 것 같진 않았고 이 길이 맞나 싶었다, 내내.
그러면서 늘 동경했다. 타고난 운명, 하지 않으면 안되는 재능을 가진 사람, 방향을 틀어 저벅저벅 나아가는 사람, 두려움과 불안과 온갖 안 좋은 시나리오를 떨쳐내고 아무튼 저지르는 사람, 소영 같은 사람.
“계획은 하나도 없었어요. 그저 하고 싶다는 마음뿐. 그런데 요리학교가 입학과 동시에 반나절은 수업, 반나절은 현장실습을 하는 과정이었는데, 실습하면서 바로 알았죠. ‘아, 나는 유명한 셰프는 될 수 없겠구나.’ 요리는 어릴 때부터 몸으로 익혀야 하는 거더라고요. 돌아와 홍대 스페인 식당에서 일할 때도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고요.”
스페인 노포부터 미슐랭 레스토랑, 와인바, 디저트 가게 등 다양한 현장 경험이 요리의 스펙트럼 확장시켜
스페인의 여덟 군데 식당에서 현장실습을 한 후, 스카웃 제안도 마다하고, 한국에 두고 떠났던 사람들과의 관계를 정돈하고 스스로 회복하기 위해 돌아오고 싶었다고. 돌아온들 이곳에 요리 관련 동료나 네트워크가 있을 리 없다. 30대 중반 즈음에 다시 맨땅에 헤딩.
“요리학교 수업 중, 졸업 후 하고 싶은 프로젝트를 기획하는 수업이 있었어요. ‘에스파시오(espacio, 공간) 마하키친(espacio, 공간)’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식당 일보다는 스튜디오 수업이나 판매하는 프로젝트를 기획했거든요. 한국에 돌아와 혼자 살던 집에서 쿠킹 클래스를 열고, 소셜다이닝 플랫폼을 통해 팝업 레스토랑을 열고, 마르쉐에 나가 소스나 음식을 판매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요리 일’을 시작했어요. 마르쉐에 참여하고 거기에서 ‘봉금의뜰’이라는 농장의 여성농부님도 알게 되어 함께 농사를 배우면서 느슨한 공동체가 생기기도 했고요.”
사회생활의 대부분을 보낸 분야에서 다른 분야로 방향을 틀어 살금살금 활동반경을 넓혀간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나는 기획력도 추진력도 독립심도 강한 편이라고, 그래서 지금껏 사회에서 살아남았다고 생각했는데, 대단한 착각이었다. 어떤 갈림길에 선, 서야 하는 지금, 너무, 쫄아서 자꾸만 눈을 감고 싶어진다.
“어떤 자리에서 기반을 넓혀갈 때 꼭 멘토를 만났던 것 같아요. 예술 현장에서 일이 계속 연결되도록 해주고 여러 조언은 물론 협업 파트너로 받아준 선생님도 있었고, 요리학교에서 의지가 되어준 스페인 동료도 있었고, 팝업 다이닝을 열 때 등 떠밀어준 셰프도, 마르쉐에 참여해보자고 손 내밀어준 분도, 농사일 해보자고 권해주고 알려준 분도. 항상 귀감이 될 만한 선배 여성이 저를 이끌어준 것 같아요.
그리고 지금 ‘마하키친’의 공동대표인 세 살 터울 여동생의 공도 커요. 트렌드에 민감해 프로젝트 공동기획은 물론 보조셰프일과 운전을 도맡아 해주고 있어요.”
어떻게 비슷한 일을 하는 서로가 경쟁상대가 아닌 그저 협력의 파트너, 동행인이 될 수 있을까.
“특히 농사는 혼자 할 수 없는 일이고 같이 하면 결실이 커지는 걸 몸으로 체감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농사를 지으며 만나는 자연, 흙, 바람 때문에 마음이 말랑해지고 내려놓아지는 부분이 있기도 하고요. 혼자 잘 살고 싶은 사람이라면 애초에 마르쉐나 농장에 안 오지 않을까요? 마음이나 가치를 공유하는 사람들이라서요. 봉금의뜰 멘토 김현숙 농부님도 마을에서 할머니들과 같이 농사짓고 할머니들을 돌봐요. 그런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고 배운 것 같아요.”
만화가 박희정의 〈호텔 아프리카〉를 읽은 스무살 즈음부터 나의 꿈은 줄곧 탈서울, 지역 정착, 텃밭과 숙박업이었다. 하지만, 지역 (농업) 공동체의 이성애, 가족주의 문화는 사실 가장 두려운 요소, 넘기 힘든 허들이기도 하다.
“농장에 참관 오신 다른 지역 여성농부 분은 일부러 군복 바지를 입고 농사일을 하기도 한다고 하시더라고요. 저 역시 남양주로 이주할 때 주변에 친척들이 많아서 저의 이혼 이슈로 인해 마음이 쓰였는데, 살아보니 쾌감이 있어요.‘괜찮아, 난 내 갈 길 갈 거야’. 농사를 직접 경험해보면 마음이 달라질 거예요. 밭에 많이들 오셔서 누렸으면 좋겠어요.”
이야기가 있는 요리
지금 소영의 요리는 단순히 ‘스페인 요리’에 국한되지 않는다. 스페인의 노포부터 미슐랭 레스토랑, 와인바, 디저트 가게 등 워낙 다양한 현장에서 요리를 배우기도 했고, 반찬가게를 하던 이모를 도왔던 경험도 한 몫 했다. 이 모든 경험들이 지금의 다정한(스페인어 maja의 의미) 마하키친 요리의 스펙트럼을 확장시켰다.
“상업주방에서 일할 때, 재료가 어디에서 누구 손에 길러져 이곳에 오는지 그런 과정이 다 분절되니 건강해지기는커녕 몸이 아파지는 음식이 되더라고요. 마하키친은 ‘이야기’를 전하는 요리를 내놓고 싶어요. 농부님들의 이야기, 재료와 땅의 이야기가 전해지도록 설명도 하고 시각적으로도 노력해요. 쓰레기 배출도 줄이고 먹었을 때 몸이 편안하고 기분 좋아지는 음식. 스페인 재료와 우리 땅에서 생산되는 재료가 다르니 그걸 어떻게 잘 요리할까를 고민하다 보니 여러 스펙트럼이 자연스럽게 생겼죠.”
그 원동력에는 힘든 마음을 달래려 명상지도자 자격증을 따고 사찰음식을 배우기 시작한 동생, 그리고 대학원에서 만난 출판기획자 같은 여성 동지가 있다. [下편에 이어집니다.]
[필자 소개] 고주영. 몇몇 예술축제와 지원기관을 거쳐 2012년부터 공연예술 독립기획자로 일하고 있다. [안산순례길 프로젝트](2015~2019), [플랜Q 프로젝트](2018~2023), [연극연습 프로젝트](2018~현재)를 기획·제작했고, 하고 있다. 연극과 연극 아닌 것, 극장과 극장 아닌 것, 예술과 예술 아닌 것 사이에 있고자 한다. 2007년부터 〈일다〉에 일본 제휴 매체인 〈페민〉 기사를 번역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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