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하게 만드는 ‘아름다움’

일러스트레이터 이정은

조이여울 | 기사입력 2004/01/12 [05:58]

불편하게 만드는 ‘아름다움’

일러스트레이터 이정은

조이여울 | 입력 : 2004/01/12 [05:58]
‘빨강 그림판’의 주인공 이정은님을 인터뷰하게 된 건 그가 매력적인 사람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큰 이유는 독자들이 원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독자들 중엔 정은님의 인생 이야기가 궁금한 분들도 많을 것이다. 그런데 만나보니 정은님은 역시 그림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인터뷰 방향을 바꿨다. 정은님의 그림을 접한 독자들에게 그의 작품세계를 좀더 상세히 들려주는 쪽으로. 인터뷰 기사의 형식도 ‘문화읽기’ 컨셉으로 정했다.

“다른 여성들과의 만남이 자극을 줬어요”

-정은님의 그림 정말 좋아해요. 감탄하게 될 때도 많죠. 그림은 언제부터 그리기 시작한 거에요?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좋아하긴 했지만 그림 그리는 ‘일’을 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중고등학교 다닐 때까지도 별 생각이 없었죠. 배운 적도 없고. 대학 졸업하기 1년 전부터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제가 좀 소극적인 성격이라 일을 찾아 나서지를 못해요. 대학에서 학교에 정 못 붙이고 방황했는데, 그러다 사이버 공간을 통해서 다른 여성들과 만나게 된 것이 내 인생의 중요한 기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어요. 1999년 즈음인데요. 다양한 여성들과 함께 모여서 영화도 보고, 전시회도 보러 다니고, 그러면서 자극을 받았어요. 특히 이미지 쪽으로요.”

아, 그러고 보니 정은님이 ‘빨강 그림판’ 소개글에 그렇게 적었지. “내가 그림을 그리게 된 건 멋진 여자친구들 덕분이었다”라고.

-그럼 그 때부터 개인적으로 그림을 그린 건가요?

“대학 졸업하기 1년 전에 미대 쪽으로 편입할까 했지만 집에서 반대가 심했어요. 경제적으로도 어려웠고, 그래서 졸업한 다음 혼자 해보려 했죠. 처음엔 막연히 ‘순수미술’을 생각했는데, 6개월간 일러스트레이션 학교에 다니면서 그림 작업을 배웠어요. 거기 졸업하고 몇 개 전시회를 했고요. 그렇지만 마땅한 일자리를 찾은 건 아니었고, 포트폴리오 들고 여기 저기 다녔죠. 일다에서 칼럼 제안을 받은 게 그 때였어요.”

정은님은 작년 1월 맥갤러리에서 ‘일러스트 100인 릴레이전’에 참여했고, 8월엔 ‘동상이몽’ 온라인전과 월간 <일러스트>의 인디포럼전에 작품을 전시했다.

터부를 건드리는 ‘여성’ 이미지

-예전 정은님의 그림과 지금 그림의 느낌은 상당히 달라요. 물론 독특한 색깔이 있다는 점에선 공통적이지만. 일러스트 배우면서 그림체를 바꾼 것 같아요.

“초기에 2년 여간 그렸던 그림들은 주제의식이 강했어요. 사실 그 때가 가장 재밌게 그림을 그렸던 시기에요. 그런데 2002년 들어와선 ‘프로가 되어야겠다’ 생각을 하니, 부담스러워졌어요. 그리고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는 게 어려워졌어요. 평준화 되어간다고 해야 하나? 나도 모르게 눈치를 보게 되더군요. 그리고 작품의 질을 높이는 과정에서 내가 원하는 내용만을 담기가 어려워졌어요. 수준 있는 그림을 그리려면 주제에 국한돼 안주하면 안 되거든요.”

-수준 있는 그림이란 어떤 것을 말하죠?

“내 스타일이 묻어나면서도 사람들이 보았을 때에도 아름다운 것.”

-아름답다는 것도 여러 가지 의미가 있잖아요. 어떤 게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해요?

“전 강하고 단순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약간 불편하게 만드는 걸 수도 있고. 제가 좀 괴팍한 데가 있나 봐요. 편하고 예뻐서 사람들을 안심시키기 보다는 터부를 건드린다거나 해서 좀 불안하게 만드는 거죠.”

강하고 단순한 것, 그리고 사람들을 약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아름답다? 정은님의 작품들을 보면 그런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내가 정은님에게서 느끼는 매력도 바로 이런 거다.

-터부를 건드리는 것은 작품에 ‘주제의식’이 많이 담겨있다는 얘기겠죠?

“네. 마냥 부드럽고 산뜻한 건 별로 매력적이지 않아요. 겉보기에 제 이미지가 얌전하고 모범생틱한 게 싫어서 벗어나려고 노력한 적도 있어요. 지금은 겉모양은 좌절했구요. 내향성이 워낙 강한 것 같아서. 대신 작업하면서 표현하려고요. 그런 이미지로부터 벗어난 것들을요. 몸으로 표현하고 싶었지만 잘 안 되니까 작업으로 표현하고 싶어요.”

-정은님 작품은 여성들 이미지가 많죠.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건 다시 말해서 남자는 별로 안 그린다는 의미인데 이유가 있나요? 남자들은 그리기 싫은 건지.

“그렇기도 하구요. 세상엔 남자들이 보는 여자들 이미지투성이잖아요. 남자들 간의 우정에 대한 것들도 넘쳐나고. 야오이물도 넘쳐나지만 여성들 간의 우정과 사랑을 보여주는 이미지는 거의 없어요. 반면 여성을 폭력적으로 대하는 이미지들은 세포 분열하듯이 팽창하고 있죠. 그런 것들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매우 크다고 생각해요. 그게 밸이 꼬여서 의도적으로 몇 개 시작했어요. 의식적으로 그림에 담기 시작했어요.”

-색도 꽤 강렬한 걸 좋아하는 것 같은데, 빨강을 제일 좋아하나요?

“흑색 들어간 빨강이요. 흑적색이라고 해야 하나. 예뻐요. 검정과 빨강을 좋아해요. 조금 과장하자면 두 칼라만 있어도 그림 그릴 수 있을 것 같아요.”

“몽글몽글한 ‘돼지’그림에 빠져있었죠”

-월간 <일러스트>에 인터뷰하면서 돼지를 그리는 이유에 대해 말한 적 있죠? 꽤 인상적인데. 일다 독자들에게 다시 설명해주세요.

“야생동물은 자기 위의 80%를 먹고 돼지는 100%를 먹는대요. 사람은 120%를 먹죠. 돼지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 많잖아요. 그렇지만 탐욕스러운 걸로 말하면 사람만 한 게 없죠. 전 환경문제에 관심 많고 동물에도 관심 많아요. 특히 돼지를 무척 좋아해요. 사람과 살색도 비슷하고, 동질감을 느껴요.”

정은님이 ‘빨강 그림판’에 그린 <우는 사람>이란 작품은 일다 다이어리 표지가 될 뻔한 그림이다. 돼지의 품에 안겨 우는 사람. 그러나 정은님 그림 속 돼지들이 꼭 그렇게 따뜻한 이미지로만 나타나는 건 아니다. 사람과 돼지가 연결된 그림은 섬뜩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누군가는 그 그림을 보고 화를 내기도 했다고.

-정은님 그림 톤이 몇 개 있잖아요? 다이어리 제작하면서 보니까 세 가지 정도로 분류되던데. 일다에서 일명 ‘돼지톤’으로 불리고 있는 그림들을 주로 그리는 것 같아요.

“아, 그건 물감을 깔고 그 위에 색연필로 칠하는 거예요. 저는 그림 그리는 방법에 대해 많이 몰라서 간단한 방법을 주로 써요. 시간이 많이 걸리는 작업인데, 한동안 그런 ‘몽글몽글한’ 그림을 그리는 데 재미를 느꼈어요. 그림 그리다 보면 무아지경에 빠진다고 해야 할까. 감정이 올라와요.”

감정까지 전달하는 일러스트 그리고 싶어

-‘빨강 그림판’에 그림 연재한 지가 8개월이 되어가네요. 다이어리 나온 걸 보고 기뻐하는 모습보고 나도 기분 좋았는데. 그런데 정은님의 신년 인사 글은 좀 의아했어요.

“제가 ‘엄한’ 글 올렸었죠? 저 사실 2004년 들어오면서 연재를 중단할까 생각도 했었어요. 놀라시겠지만. ‘페미니즘’이란 이름으로 그림을 그리는데, 계속 내 그림의 질을 높여가기 보다 대충 독자들 반응이 좋으면 그대로 굴러갈 수 있을 거란 안일한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러나 곧 마음 고쳐먹었죠. 다시 시작하는 마음 갖기로.”

오, 정말 놀랐다. 일다에서 ‘빨강 그림판’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건 상상도 못한 일인데. 그렇지만 정은님의 얘기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는 이해가 갔다. 정은님이 ‘엄하다’고 말한 글은 다음과 같다. “이제껏 올린 그림들을 쭈욱 돌아보니 딱히 메세지가 일관된 것도 아니고, 그림도 여러 사람이 그린 것처럼 보일 만큼 다양하게 보입니다. 비틀거리고 약한 모습이 고스란히 비치는 것 같아 부끄럽습니다.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니므로 앞으로도 그런 모습이 비칠 수 밖에 없겠지만 쑥스럽게도 이런 글을 쓰는 것은 앞으로 그림 하나 하나에 좀 더 정성을 쏟고 진지해지고 싶어서입니다.”

-칼럼 뿐 아니라, 일다 기사에 들어가는 일러스트도 많이 그렸잖아요. 그건 또 다른 작업이라고 생각하는데. 앞으로도 계속 이 쪽으로 작업을 할 건가요?

“아, 기사 그림에 욕심 있어요. 시작한지 얼마 안 되지만, 글을 해석해서 글에 대한 그림을 그리는 연습을 많이 하고 싶어요. 정말 좋은 일러스트는, 글이 전달하는 것을 더 확실히 전달할 뿐 아니라 감정까지 전달하죠. 그런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게다가 일다의 기사들은 제가 동의하는 내용이니까요. 그렇게 제 그림을 어느 정도 수준에 올려놓고 싶어요. 그런 다음 제가 하고 싶은 얘기가 생겼을 땐 그림책을 만들고 싶어요.”

사실 일러스트레이터가 밥 먹고 살기 힘든 세상이다. 정은님 역시 조금이라도 ‘안정적인’ 일자리를 갖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건 일다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인터뷰하는 동안 나는 여러 모로 정은님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특히 글을 쓰는 것과 그림을 그리는 것과의 비교, 작품의 주제의식과 작품의 질에 대한 논의들은 독자들에겐 미안하지만 나와 정은님의 마음 속에 담아두기로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정은님은 ‘창작 의욕’이 생긴다고 했다. 그의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두 그러하겠지만, 나 역시 정은님의 새로운 작품들이 무척 기대가 된다. 그만의 스타일이 묻어나면서도 사람들이 보았을 때 ‘아름다운’ 그림들이.

<정은님의 홈페이지 http://jung-eu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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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NATIC 2004/01/14 [08:20] 수정 | 삭제
  • 묘하게 이토준지의 소용돌이가 생각난다..
  • 좋다.. 2004/01/13 [23:55] 수정 | 삭제
  • 정은님 그림들 좋아요. 검정과 빨강만으로 그린 그림도 맘에 들어요.
    저 그림들 속에 여러 개의 정은님이 포함되어 있는 거겠죠?
    무언가 표현을 해낼 수 있다는 게 대단한 일 같아요. 몸이 안 될 것 같아 그림으로 표현한다고 하셨는데.. 그림으로 표현하는 게 몸으로 표현하고 있는 거 아닐까요? ^^
  • chanel 2004/01/13 [13:39] 수정 | 삭제
  • 이번에 다이어리 통해서 정은님 그림 더 좋아하게 됐는데..
    인터뷰 보니까 느낌이 더 새롭네요.

    돼지 얘기도 재밌구요..
    남자들 안 그린다는 얘기도.. 끄덕거리면서 봤어요. ^^ 공감.. 공감.
  • 운명보다 2004/01/12 [23:06] 수정 | 삭제
  • 일다에서 일하시는 분들 다 궁금해요.
    정은님 그림 저도 많이 좋아했는데 인터뷰 보니까 더 좋아지려하네요.
    저는 정은님 그림에서 자매애가 느껴져서 좋았거든요?
    근데 터부를 건드리는 그림을 그리고 싶으시다니 멋져요.
    그건 용기가 필요한 것 같거든요.
    저도 예쁘기만 한 그림은 별로에요.
  • 은. 2004/01/12 [13:17] 수정 | 삭제
  • 일러스트레이터 입장에서 정은님 참 부러워요. 스타일이 독창적이고, 그림이 전달하는 바도 잘 느껴지니까요. 전 그림을 그리면 그릴 수록 자기만의 개성을 갖는다는 게 쉽지 않은 것 같다는 걸 느끼게 되고.. 벌써부터 내 한계에 도달한 것처럼 생각되고 그렇거든요. 정은님 그림들 보면, 독착성이라는 것은 타고나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앞으로도 일다에선 정은님의 그림을 많이 볼 수 있겠죠?
    정은님. 화이팅입니다.
  • 커피향 2004/01/12 [10:36] 수정 | 삭제
  • 저 빨강 그림판 팬인데 정은님 인터뷰 올라와있어 깜딱 놀랐어요. ^^

    전 거기 올라온 그림들을 보면 말문이 막힐 때가 간혹 있었어요.

    이쁘다고만 하기엔 말이 딸렸는데 "생각하는 그림"이라고 스스로 생각했죠.

    정은님 홈페이지에도 가서 다른 그림들도 좀 보다가 왔습니다.

    정은님! 기억해주세요. 전 처음부터 정은님 그림보고 멋진 작가 탄생을 예감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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