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교육 시간에는 스팸 메일 오면 클릭하지 말라는 것 가르쳐 주고. 담임선생님은 총각 아무한테나 주지 말라고 그러고요.”(중2, 남)
“난소나 그런 거 보여주고 애기 어떻게 만들어지나 그런 거. 성폭력 당하면 어떻게 해라, 그런 거요.”(중2, 여) 우리 사회가 성적으로 문란(?)해졌다고도 하고, 요즘 10대들은 많이 변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성교육’은 제자리 걸음을 걷고 있다. 대부분 학생들은 가끔씩 주어지는 ‘성교육’ 시간을 ‘쉬는 시간’으로 인식할 뿐이다. 새로운 이야기도 없다. 실제적인 정보나 소통이 이뤄지는 경우도 드물다. 스팸 메일로부터, 성폭력으로부터 어떻게 청소년을 ‘보호’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사실상 성교육은 청소년이 ‘섹스’를 하지 않는 존재라거나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전제하고 이뤄진다. 한국여성민우회 가족과성상담소 이찬희 상담부장은 “선생님들은 아직 청소년들의 성은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본다. 건전한 이성관계를 해야 하고 섹스는 안 된다는 식으로 교육하는 경우가 많다. 본인들이 ‘순결교육’이라고 내세우진 않지만 결론적으로는 그렇다고 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성교육’ 한다고 해놓고 결국 ‘순결교육’하고 있다는 말이다. 죄의식만 심어주는 순결교육 일단 이런 식의 교육은 학생들에게 별로 ‘먹히지 않는다’. 이찬희 상담부장은 “지금은 성에 대해 아이들이 접할 수 있는 정보도 많고 선생님들이 알려주는 것들은 이미 다 안다. 그런데다가 여전히 보수적인 관점으로 교육하기 때문에 흥미도 없고, 그럼으로써 성교육이 현실화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 상담부장이 지적하는 순결교육의 더 큰 문제점은 “이미 섹스를 경험을 한 아이들에게 죄의식을 주게 된다”는 점이다. 기본적으로 ‘성으로부터 보호한다’는 식의 교육은 성을 ‘더럽거나 불결한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준다. 그러니 성경험이 있는 학생들은 자신이 ‘더러운 짓’을 했다는 죄의식으로부터 자유롭기 힘들다. 미디어칸 성문화센터 배정원 실장은 “성기 삽입 중심의 순결교육에 있어 성에 관한 모든 것이 죄와 연결된다. 어떤 경우에도 섹스를 죄와 연결시켜선 안 된다. 섹스를 죄와 연결시키는 것은 인간의 성적인 복지에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남녀 모두 순결하라? 배정원 실장은 또 “사실 순결이라는 개념이 남자의 경우에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고 여자에게는 일종의 소유의 개념이다. 어디까지 순결의 기준을 세워야 하나. 왜 삽입섹스가 순결의 기준이 되나”라고 반문한다. 성과 섹스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깔고 진행되는 순결교육은 여학생들에게 훨씬 가혹하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녀 모두 순결하라’는 구호는 실제로는 여자를 향해있는 것이다. 순결하다는 것은 ‘깨끗하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섹스를 통해 더러워진 것은 누구인가? 우리는 ‘더러운 여자, 깨끗한 여자’라는 이중잣대에 익숙해져 있다. ‘더럽혀졌다’는 표현은 여성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다. 섹스경험이 있는 비혼 여성은 곧잘 ‘걸레’로 표현된다. 이는 ‘순결’이 여성에게 하나의 자원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순결한, 고로 깨끗한 여성의 몸은 상품이 되는 것이다. 중학교 교사인 김모씨는 “사실 순결교육은 남학생들한테는 먹히지 않는다. 남자애들은 실제 경험한 경우도 많고 순결이 자신과 직결되는 문제로 인식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학생들의 경우에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가능성이 크다. 부모나 선생님, 사회의 인식이 여성의 몸은 깨끗하고 단정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이찬희 상담부장은 “요즘 애들이 성에 있어 자유롭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여학생들은 순결에 대해서 여전히 민감하다. 사실 여학생들은 성관계를 했을 때 자신이 불이익을 본다는 것을 잘 안다. 따라서 태도적으로는 허용적으로 보이지만 행동은 굉장히 보수적이고 양면적인 혼란을 느낀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은 해도 되지만 나는 아니다’라는 생각 속에서 여학생들은 여전히 성에 대해 더욱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태도를 고수하는 것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성교육 시간에 이뤄지는 성폭력 방어교육은 자칫 성폭력의 문제가 여자의 순결을 잃는 문제로 읽혀지기도 한다. 즉 ‘성적 자기결정권’의 개념을 인식하기 이전에, 여자가 가지고 있어야만 하는 자원인 ‘처녀’를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식의 수동적이고 부정적인 성 고정관념을 주입 받게 되는 것이다. 교사들의 성 의식이 문제 현재 학교 성교육은 1년에 10시간 의무적으로 하게 돼 있다. 주로 양호교사나 보건교사가 성교육을 담당하고, 교사 자격증이 있는 교사는 교과목에 상관없이 교육부에서 진행하는 연수 프로그램 이수를 하면 자격이 부여된다. 또 외부강사를 초빙해 성교육을 진행하기도 한다. 지금의 상황에선 교사의 재량에 따라 성교육의 내용, 수위, 방향이 달라질 수 있어 교사의 올바른 성 의식이 매우 중요하다 할 수 있다. 중학교 국어 교사인 김모씨는 “학생들에게 성교육 시간에 뭘 배웠냐고 물어보면 별 반응이 없다. 사실 일년에 몇 시간 안 되는 시간에 성교육이 이뤄지는 것은 무리다. 결국 일상적으로 교사들에 의해 성교육이 이뤄지는 것이 바람직한데, 교사들 사이에도 성교육의 범위를 어디까지 할 것인가가 합의가 안됐다”고 지적한다. 김 교사는 얼마 전 학생들 성교육을 위해 성에 대한 정보와 관점이 잘 설명돼 있는 <섹스 북>을 주문해 서가에 꽂아놨다. 그런데 다른 교사가 그 책을 빼내 서랍에 깊숙이 숨겨뒀다는 것이다. “남자애들은 이미 다 본 현실이며 학생들에게는 꼭 필요한 지식이 들어있다” 고 설득했지만, 그 교사는 “중학생 수준에 섹스 이야기는 못한다. 아직 그런 것을 보여줄 때가 아니다”라며 책을 반납했다고 한다. 김 교사는 “교사들부터가 성에 대해 보수적이고 은밀한 영역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성교육이 이뤄지기 힘들다. 교사들의 순결의식부터 깨야 한다”고 말한다. 성에 대한 생각과 경험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학생들이 성교육 시간에 별 흥미를 못 느낀다 해도 그들에게는 성교육이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배정원 실장은 “학생들이 자기를 컨트롤할 수 있는 힘을 갖도록 하는 게 성교육이다. 성에 관한 정보를 주고 판단하게 해야지, 기준을 미리 잡아서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죄’라고 한다면 건강하지 못한 성 의식을 심어주는 것”이라고 경고한다. 섹스를 할 것인가, 하지 않을 것인가에 대한 판단은 개인의 몫이라는 것이다. 배정원 실장은 “순결해야 한다는 가치관이 있는 애들을 말리진 않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각자 자신이 순결의 기준을 잡도록 하는 것이다. 순결의 기준을 자기가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성에 대한 정보를 주고 자기 기준, 자기 의지에 따라 성적 경험을 선택하도록 한다.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성교육”이라고 말한다. 이찬희 상담부장 역시 “성교육을 통해 개개인이 성적 주체로서 가치관을 확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런데 순결교육은 성에 대해 알고 생각하고 꺼내서 이야기하는 것 자체를 못하게 막는 것이다. 순결교육은 성에 대한 생각과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을 원천봉쇄하고 죄의식만 갖게 하거나 문제를 덮어버릴 뿐”이라고 지적한다. 또한 “민우회에서는 성교육 할 때 성적 자기결정권, 성적 의사소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서, 학생들이 성에 대해 스스로 이야기하고 구체적으로 자신의 몸이나 느낌에 자유롭게 소통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구체적으로 자신의 의사를 발화하도록 하며 스스로 가치관을 정립, 판단하게 돕는 것이 성교육에 있어 무엇보다 우선돼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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