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 란희님은 서울여성의전화 인권부 간사입니다. - 편집자주>
서울특별시 주최로 오는 4월 3일, 운현궁 특설무대에서 ‘왕비간택의식 재현행사’가 열릴 계획이다. 주관기관인 운현궁에 따르면 이 행사는 “조선왕조 가례(국혼례)중 전국에 금혼령을 내리고 처녀단자를 받아 20-30여명의 후보 중에 초간 재간 삼간 절차에 따라 왕비를 가려 뽑는” 간택의식을 재현하기 위해 치러진다. 이 행사는 ‘고종 명성 후 가례의식’에 앞서 있었던 왕비 간택의식을 재현함으로써 운현궁은 “명실상부한 궁중문화의 전당으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이 ‘처음 재현되는 뜻 깊은 전통문화행사’에 대해 서울여성의전화를 비롯한 6개 여성 교육단체들이 전면으로 반기를 들고 행사 중단요구 성명을 발표했다. 이 ‘뜻 깊은’ 행사를 격려하지는 못할망정, 중단하라는 성명을 발표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 행사가 성별고정관념과 외모지상주의의 극단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서류전형 ‘키와 몸무게, 사진’ 필수 행사 참가자격을 보자. 왕비간택의식재현행사를 위해 만 15세에서 17세까지의 여자 청소년의 지원을 받는다. 지원서류는 참가신청서, 학교(기관)장 추천서, 자기소개서. 참가신청서에는 이름과 연락처 외에 키와 몸무게를 기재하도록 되어 있으며, 자기소개서에는 사진을 “필히” 부착해야 한다. 그 외에 별다른 기재사항은 없다. 한 가지 더. 운현궁 홈페이지 게시판에는 행사와 관련한 문의에 대해 다음과 같은 답변이 올라와 있다. “본 간택행사의 대상기준은 나이 이외에도 키가 중요한 항목이 됩니다. 본인이 정말로 참여한다면 키의 기준을 알려 줄 수 있습니다. 전화로 확인하세요”라는 게시판 운영자의 답변. 결국 ‘외모’가 관건이라는 얘기다. 한편, 앞서 언급한 참가신청서, 학교(기관)장 추천서, 자기소개서를 근간으로 서류전형을 통과한 27명은 초간재간삼간의 절차를 거쳐 왕비로 선발된다고 한다. 주최 측의 설명에 따르면 초간택은 서류전형을 통과한 참가자 중 기본예절(걸음걸이, 절하는 법 등) 등을 심사하여 5명, 재간택은 초간택에서 선발된 5명의 참가자 중 식사예절(음식 먹는 법, 차 마시는 법 등)을 심사하여 3명, 삼간택은 재간택에서 선발된 3명의 참가자 중 최종심사로 1명을 선발하는 것이다. 이 외에 공개되지 않는 어떠한 기준들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표면상으로는 이것이 왕비간택 절차와 기준의 전부다. 여기서 여성 청소년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한복입고 다소곳이 걷고, 마시고, 절하는 ‘고분고분한’ 태도다. 이는 여자아이들을 기존 통념대로 ‘여성스럽게’ 교육하는 성 역할 고정관념의 발현에 다름 아니다. ‘미인대회’와 다름없어 조선시대의 왕비가 단순히 외모와 절하고 음식 먹는 모습으로 뽑혔을 리도 만무하지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2000년대에 그것을 기준으로 10대 여성을 대상으로 왕비를 뽑겠다는 생각은 대체 어디서 나온 것인가. 그들이 재현하려는 전통문화는 무엇인가. 그들이 재현하고픈 전통문화, 그들이 재현하고픈 ‘왕비’는 어떤 고상한 부연설명을 덧붙이더라도 ‘어리고, 외모가 아름다우며, 걸음걸이가 단정하고, 음식도 조용히 잘 먹는 여성’,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광화문 촛불집회 사진에서도 ‘촛불얼짱’을 찾아내는 시대이다. 성형수술을 했다는 사실이 예전처럼 창피한 일도 아닌 시대다. ‘얼꽝’은 곧 ‘왕따’가 되기도 하는 시대며, 안면윤곽술이나 유방확대술을 받던 여성이 사망했다는 뉴스가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시대다. 21세기를 지배하는 외모주의를 우려하고 경계해도 모자를 판에 서울시는 ‘전통문화 재현’이라는 미명하에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외모주의에 편승한 괴상한 문화상품을 만들어내고 있다. 여성계는 여성의 성 상품화에 반대하면서 수년간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등 각종 미인대회의 폐지를 줄기차게 요구해왔다. 그리하여 2002년부터 공중파 방송에서는 미스코리아 대회를 볼 수 없게 되었고, 최근 인천 일보사 주최 인천미인대회가 폐지되는 등 각종 지역 미인대회도 속속 폐지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꿋꿋이 거슬러 올라, 급기야 미스코리아와 다름없는 ‘왕비간택의식 재현 행사’를 개최하는 서울시의 행보는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21세기에 왕비 ‘간택’이 웬 말이며, 간택대상이 10대 여성이라는 것은 어떤 발상이며, 그 간택의 기준이 키와 몸무게, 걸음걸이, 음식 먹는 법이라는 것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개인의 다양한 아름다움을 존중하고, 시대에 맞는 여성 리더십을 육성, 지원해도 모자랄 마당에 전통문화재현이라는 미명으로 10대 여성까지도 외모로 재단하고 상품화해, 행사 홍보 수단으로만 이용하려는 서울시의 행태는 강력한 비판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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