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비아 플라스. 당대 유명한 남성시인 테드 휴즈와의 결혼으로 유명해진 미모의 여성시인. 그는 테드 휴즈의 외도로 아이들을 데리고 집을 나서, 혹한과 우울증 때문에 가스 오븐에 머리를 처박아 서른 살의 나이로 삶을 마감했다.
요절한 천재 여성시인이라는 신화를 남긴 실비아 플라스의 삶은 대중 매체를 통해 두 가지 방식으로 회자되어 왔다. 테드 휴즈와의 비극적인 로맨스가 그 하나이고, 남성에 희생당한 순교자적인 여성예술가의 이미지가 두번째다. 마치 여성화가 프리다 칼로의 고통스런 삶이 디에고 리베라의 기구한 로맨스와 페미니즘적 색채 때문에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영화로 제작된 것처럼. 한 여성예술가의 고통스런 내면일기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는 대중들의 흥미를 끄는 그의 이미지에 정면으로 맞서는 책이다. 일기는 18세부터 죽기 2년 전까지 자신의 이야기와 생각들을 구체적으로 기록한 것으로, 마치 소설을 보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는 일기는 요절한 천재 여성시인이라는 신화를 넘어서, 자신만의 세계를 확립하여 글쓰기로 세상에 인정 받기를 원했던 한 여성의 고통스러운 내면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실비아 플라스의 소녀 시절은 평범한 소녀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이성을 끌어당기는 매력이란 도대체 뭘까?”라고 고민하며, 연애를 통해 자신감을 찾고 싶어했고 또래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고 싶어했다. “제대로 옷도 못 입는 주제에 이 나라를 선도하는 패션 잡지를 어떻게 비판한단 말인가?”라는 웃지 못할 문장을 쓰던 이 감상적이고 정열적인 소녀의 모습은 대학 진학 후로도 이어진다. 그는 수재로 이름을 날렸고, <세븐틴>과 같은 유명한 소녀 잡지에 글을 게재하며, 주목을 받았다. 그렇게 화려하게 살아갔다면, 실비아는 아마도 유명한 저널리스트나 대중작가가 됐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타인과 자신이 늘 다르다고 느꼈다. 그 차이는, 그 자신이 스스로 인정할 만큼 가치를 지닌 글을 써서 세상에 인정 받고 싶다는 욕망이었다. 자신만의 글을 쓰고 싶다는 그의 욕망은, 명예욕과 성욕, 허영기 등 범속한 모든 욕망을 무화시킬만큼 강렬했다. 창작에 대해 고민하면서, 그는 여성이 남성에 비해 불리한 사회적 현실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한다. 실비아는 “결혼이 내 창조력의 즙을 짜내 시들게 만들고, 글과 그림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내 욕망을 말살해 버릴 것인가”라고 걱정하고, “어째서 여자들이 기껏 남의 정서를 맡아 관리해주는 관리인이나 아기 보는 사람, 남자의 영혼과 육체, 자존심을 먹여 살리는 유모 노릇을 해야 한단 말인가?”라고 반문한다. 그의 일기 전반에 드러난 여성 문제에 대한 관심을 고려할 때, 실비아에게는 남성에 의해 희생당한 수동적인 이미지보다는 자신의 문제에서 출발해서 당대 여성 문제에 대해 날카롭게 직시한 페미니스트의 이미지가 더 어울린다. ‘노처녀’로 늙으면 어떡하나 걱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사회적으로 인정 받는 존재이기를 원하는 젊은 실비아의 모습은 1950년대 미국 여대생들이 가졌을 법한 고민을 잘 드러낸다. 나약함에 대한 날카로운 질책 테드 휴즈와의 결혼, 대학 강사라는 직업과 본격적인 글쓰기로 뛰어들면서 그는 변한다. 그는 소녀 잡지에 글을 게재하던 반짝이는 대학생 필자였던 과거와, 돈과 집 문제를 걱정하며 당대 시인들에게 늘 라이벌 의식을 느끼는 불안한 젊은 시인이자 주부로서의 현재가 가지는 괴리를 직시한다. 특히 원고가 번번이 거절 당하는 자신과는 달리, 시인으로서 사회적인 명망을 얻기 시작한 남편 테드 휴즈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그는 번민에 시달린다. 그는 “테드의 시가 수락되었다는 사실로 인해 이렇게 열렬한 대리 만족을 느끼다니 이상한 일이다”라고 고백한다. 글을 잘 쓰지 못하고 있다는 의식은 언제나 그를 괴롭혔다. 일기 전반에 걸쳐 등장하는 그의 고뇌는 예술가의 작업에 대한 낭만적인 신화를 철저하게 무너뜨린다. “우리 작품이 정말 훌륭한 게 아니라면 어떻게 하지?” 라고 걱정하며, 언제 원고가 수락되었다는 편지가 출판사에서 올 것인가 전전긍긍하며 우체통을 뒤지는 그. 실비아는 집안일과 남편의 작업을 타이핑하느라 사라진 시간에 초조해하고, 글을 쓰는 데 재능이 없을 경우 돈을 벌기 위해 강의를 계속 해야 하거나 학위를 따야 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한다. 한편 젊었을 때부터 신경 쇠약에 시달리던 그는 상담을 통해 자신의 불안과 질투심, 초조함이 어디에 기인하는지를 탐구하고 관찰한다. 버림받았다는 의식, 타인이 자신을 온전하게 받아주지 않는다는 의식은 늘 그를 괴롭혔다. 실비아는 일기장에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타인에 대한 불만족을 토로하지만, 뒤이어 그런 자신의 나약함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과 질책을 시도한다. 이 점이 모순투성이의, 불안하고 약한 자아를 지닌 그를 천재적인 시인으로 만든 힘이 아닐까. 다른 작가들의 책을 읽어서 충실히 공부하자는 자기 단련, 자신의 내면에 대한 끝없는 탐구는 그만이 가진 힘이었다. 죽기 2년 전 작업을 위해 그가 남긴 글들에서는 18세 소녀의 감상과는 완연히 다른, 세상과 타인에 대한 섬세한 묘사가 빛난다. 일기이기에 이 책은 거칠고, 같은 말들이 자주 반복되는, 정제되지 않은 텍스트다. 그러나 그 정제되지 않음은 글을 잘 쓰기 위해 노력하는, 처절하고 나약하기까지 한 내면의 모습을 남김없이 드러낸다는 점에서 장점을 지닌다. 여성이 여성 자신의 세계를 만든다는 것은, 사회적인 역할과 위반된 것이기에 불안하고, 고된 과정이며, 끊임없이 남의 것을 엿봐야 하는, 결코 아름답지 않은 모습이다. 테드 휴즈에게서 시와 소설을 쓰는 방식을 배우고 그에게 정서적으로 의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에게서 벗어나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고자 고집스럽게 노력했던 실비아 플라스의 모습은 많은 여성예술가들의 초상과 공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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